시류를 틈타지 말라   

지금 총회장(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의 총신대에서의 실언으로 교계가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있었다. 이러한 사건은 총회장 본 인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유익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돌발적이긴 했으나 우리 모두에게 많 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다. 

필자가 사건이 발발한 이후 학생들과 교수들의 아픔을 전하기 위해 총회장을 만났을 때 총회장께서는 즉시 잘못을 시인하시면 서 사과부터 하였으며 그 이후 자신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발언이었음을 밝혔다. 그리고 다시 총신 채플에서 교수 학생 각종 여성단체 에게 진솔하게 사과하면서 다시금 이를 밝혔다. 

정말 어처구니없이 일어난 돌발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파장은 너무도 컸고 이로 인해 본인과 우리 모두는 너무도 크게 당 황하였다. 총회장으로서 여성 목사 안수를 허용하지 않는 우리 교단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돌발적으로 튀어나온 지나친 발언이었 다. 그러나 자신의 실수를 진솔하게 인정하고 사과하는 총회장의 용기도 대단하였고, 이를 뜨거운 박수로 받아들인 총신대생들과 교수들 의 너그러움도 대단하였다. 

그후 총학생회의 임시 총회를 통해 이를 재확인하고 이를 악용하는 언론과 사회단체들의 요구에 불응하기로 결정한 총학생회의 용기는 더욱 돋보인다. 자랑스러운 총신의 제자들이 보여준 성숙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 사건이 당사자들 간에는 일단락되었으나 당사자들 이외의 사람들이 매우 어처구니없는 것을 요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교 단 이외의 여성 단체들과 일반인들이 매우 비기독교적인 극렬한 언사들을 사용하면서 용서를 구한 총회장과 용서를 받아들인 총신대 당사 자들을 비난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피차 용서할 것을 거부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자세는 용서와 화해와 화평케 하는 자로 살아가야 할 우리들로 하여금 아예 그리스도인이기를 포기하라는 요구와 다를 바 가 없기 때문이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이를 계기로 여성 목사 안수를 허용하지 않는 우리 교단을 정죄하면서 회개를 촉구하고 차 제에 여성목사 안수를 허용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시류의 틈새를 이용하여 비 성경적인 것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신앙고백에 동의할 수 없다면, 작금의 시류에 편 승하기 보다는 오히려 평온한 때에 우리들의 신앙과 생활의 최고의 권위를 가진 성경을 통해 여성 목사 안수의 당위성을 입증하는 노력 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들에게 사명을 주시면서 주님을 위해 모든 고통을 감내하기를 요구하신다. 목사직은 세상적으로 명예와 부귀를 누리는 직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종의 직무이다. 

하나님에 의해 남자의 돕는 배필로 창조된 여자는 존재론적으로 다른 피조물에 대하여 남자와 그 존엄과 권위와 영광에 있어 서 동등하다. 이러한 남녀의 존재론적 동등성은 반드시 직무상의 동등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든 사람들은 존재론적으로 동등하 나, 하나님은 은사와 사역을 다양하게 정하시고 각 자에게 필요한 은사와 직무를 허용하셨다. 성경이 허용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기보다 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사역에 얼마나 충실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이를 위해 우리 각 자 자신이 목사냐 아니냐는 그렇게 중요 하지 않다. 

이 사건은 다시금 건전한 신학 교육과 그에 따른 인재 양성의 중요성, 그리고 지도자의 언행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롭게 일깨 워 주는 계기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목회자들과 교회에 인터넷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새롭게 확인시키는 계기도 되었다. 

또한 각종 언론 매체와 기관의 인터넷 게시판에 올려진 글들을 통해 한국 기독교인들의 표현이 얼마나 난잡하고 비상식적이며 비윤리적인가를 확인하는 계기도 되었다. 

비록 돌발적인 사건이기는 하였으나 이를 계기로 표출된 한국 기독교 문화와 신학의 수준을 확인시켜 준 것은 의외의 소득이 아닐 수 없다. 이를 계기로 우리는 새롭게 다짐해야한다. 

시류를 틈타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면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리스도인답게 인생을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기독신문/ 김인환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