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논단 

"사람에게 눈이 필요한 것처럼 사회는 뉴스를 필요로 한다” 

영국의 작가 레베카 웨스트의 말이다. 신문의 필요성을 간파한 말이다. 독자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기능에 포커스를 두고 있다. 

신문왕이라 일컫는 미국의 윌리암 허스트는 “뉴스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가 광고인 것이 신문이다”라고 신문의 상업성을 강조했다. 산업사회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기독신문(교계언론)은 무엇인가. 위의 기능보다 더 큰 사명 하나가 우선된다. 곧 복음전달이다. 이 사명을 잃을 때 기독언론은 그 존재이유가 상실된다. 그렇다면 신문이 존재하기 위한 그 구체적인 사명은 무엇인가. 

첫째, 보여줘야 하는 사명이다. 

누구에게 무엇을 보여줘야 하는가. 곧 불특정 다수에게 오늘의 현실을 보여주는 기능이다. 오늘의 밝음과 어둠, 기쁨과 아 픔, 만남과 소외, 갈등과 화해, 정의와 부조리, 색깔들, 소음들… 때로는 침묵의 소리도 듣게 하는 역할 감당이 필요하다. 

그래서 오늘 속의 자아의 정체를 찾게 하고, 오늘에 서서 어제를 조명하게 하며, 미래를 내다보는 거시적 시각을 열어주는 작 업을 신문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갈멜산상에서 수평선에 떠오르는 작은 구름조각을 보고 큰 비의 소리를 미리 들을 수 있도 록 미래를 보여줘야 한다. 

둘째, 해석해 줘야 하는 사명이다. 

오늘의 상황, 주어진 실존을 그리스도를 통해 해석해 주어야 하는 역할이다. 그리스도가 완전한 역사의 해석이기 때문이다. 그 를 통한 개체와 공동체의 해석, 그리고 어제와 오늘의 해석이 없는 신문은 한낱 잡문에 불과하다. 성경에 의한 구속사의 흐름을 투명 하게 해석해야 하는 것이 기독신문의 차별성이다. 

기독언론이 사회 속의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무엇이 길이고 무엇이 길이 아닌지를 보여주지 못할 때 크리스천들은 빛된 삶, 소금 된 삶을 영위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사회 속의 혼탁에 오염되고 만다. 바른 해석을 위해서는 사회과학적인 접근도 필요하다. 이를 테면, 다양한 리서치 기능을 통해서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데이터를 제시함으로 정론을 펴는데 공신력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깨워야 하는 사명이다. 

구약성경 요나서를 보면 다시스행 선박에 두 지도자가 등장한다. 선장과 요나라는 선지자다. 그 배가 거센 풍랑으로 위기에 직 면해 있을 때 선장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 공동체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한다. 그러나 선지자 요나는 배 밑층에서 깊은 잠 에 빠져 있다. 그러자 선장이 요나를 깨운다. 그리고 묻는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이 물음이 오늘의 우리 교회 지도자를 향 한 질책이 아닐까 더럭 겁이 난다. 

바로 여기에 오늘의 기독언론의 시급한 사명이 있다. 불의와 부패 속에 잠들어 있는 지도자를 향하여, 독선과 아집속에 스스 로 갇혀 있는 자들을 향하여, 우리를 거부한 채 나만의 동굴로 도피하는 자들을 향하여, 깨어나라 깨어나라 외치는 신문, 그들 의식 의 잠을 깨우는 노크 소리… 이것이 기독신문의 빛깔이어야 한다. 

사물을 깨우기 위해서는 스스로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잠든 자, 잠꼬대하는 자들을 감시할 수 있지 않겠는가. 

넷째, 생명의 새 소식을 전해야 한다. 

복음은 곧 생명이다. 그러므로 복음이 전달되는 곳에는 새 생명이 주어지고, 새 생명이 살아난다. 생명의 이야기를 새롭게 창 출하는 작업이 기독언론이 해야 할 본연의 사명이다. 생명없는 가설이 난무하는 기사로 황금보다 귀한 지면을 덮어버린다면 그것은 비극 이 아닐 수 없다. 

오늘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생명존엄이 파괴되는 가공할 도전 앞에 직면해 있다. 윤리 타락, 성의 상품화, 생명의 상품 화, 유해식품 유통, 공해유발 등에 무감각해진지 오래며 그로 인해 창조질서의 파괴는 물론 생명경시 풍조가 극에 달해 생명복제와 유 전자 조작등으로 엄청난 인간재앙을 자초하고 있다. 이런 패역한 세대를 향한 복음의 미디어가 고작 흘러간 옛노래나 읊조리고 있다 면 어찌 그 존재이유가 있다고 하겠는가. 

간음한 여인을 예수께 끌고 온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 열린 현장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 상황을 바로 해석하 셨다. 옛 의식의 노예가 된 그 종교지도자들과 그 군중들을 깨우신 것이다. 그리고 그 극한 상황에 놓인 생명을 구하신 것이다. 보 여주시고, 해석하시고, 깨우시고, 복음의 새 소식을 선포하셨다. 

신문의 날을 맞으면서 예수님의 이 실루엣 위에 기독신문의 사명을 오버랩시켜 본다. 

박종구 목사(월간목회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