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완성될 천국을 사모하지 않는가? 

요즈음 그리스도인의 가르침 가운데 천국이라는 주제를 찾아 보기가 매우 힘들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도 내면 세 계,&nbspQT, 은사 발견, 찬양 사역, 멘토링, 제자 훈련, 중보 기도, 기도 정탐 여행 등 거의 모든 내용이 관심 의 초점으로 등장하고 있지만, 천국에 대한 것은 거론조차 되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교리를 순서적으로 다루면서 종말론에 접하든 지 책별 성경 공부를 하다가 재림에 관한 언급이 나올 때 잠시 그 주제를 생각하든지 하는 일은 있습니다. 그러나 완성될 천 국, 곧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의 신앙 의식과 삶을 움직이고, 통솔하고, 다스리고, 컨트롤하는 모습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 다는 말입니다. 

= 천국은 어떤 곳인가? = 
우리가 천국이라는 주제에 대한 희귀 현상을 논하려면, 그에 앞서 천국이 어떤&nbsp-- 무엇이 이루어지 는&nbsp-- 곳인지부터 설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본질에 대한 오해가 이 모든 경시와 간과의 직·간접적 요인이 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천국은 어떤 곳일까요? 다시 말해서, 현재에는 없는 어떤 상태가 천국에서는 이루어질까요? 세 가지 서로 다 른 각도에서의 설명이 가능할 것입니다. 

첫째, 천국은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위로를 얻는 곳입니다. 요한은 완성될 천국과 관련하여 "보라! 하나님의 장 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 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계&nbsp21:4-5)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시리라는 말씀은 종말론적인 약속으 로 존재해 왔습니다 (사&nbsp25:8 계&nbsp7:17). 그러다가 드디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 약속이 현 실화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죽음과 아픔을 겪습니다. 우리의 눈에 눈물 잦을 날이 없습니다. 질병, 재난, 고통, 슬 픔, 번민, 소외는 인생의 단골 메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모든 인간 비극은 종막(終 幕)을 알려 왔습니다. 사망이 삼킨 바 되고 (고전&nbsp15:54) 불못에 던지 운 바 (계&nbsp20:14) 됨으로써, 더 이상 애통하는 것과 아픈 것이 우리를 괴롭히지 않게 됩니다. 주께서 우리 눈 에서 눈물을 거두어 주시고 친히 위로하실 것입니다. 

둘째, 천국은 관계의 회복이라는 각도에서도 조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타락 이전의 세상에서 아담은 조화롭고 의 미 있는 사중 관계(fourfold&nbsprelationship)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에 대 한 관계, 자아와의 관계, 자연에 대한 관계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가운데 가장 핵심적 관계인 하나님-아담의 관계가 깨지자 나머 지 관계들도 파괴와 부조화로 치달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완성될 천국에서는 이러한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고 온 피조계는 그야말로 샬롬[평강/평화]의 현장이 될 것입니다. 하 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회복 (계&nbsp21:3)은 곧장 이웃끼리의 화해 및 하나 됨 (사&nbsp2:4&nbspcf. 엡&nbsp2:13-18)으로 연결될 것이고, 자아 역시 죄성을 벗 어 버리고 온전한 모습 (cf. 히&nbsp12:23)으로 회복될 것이며, 자연계 또한 해방의 상 태 (사&nbsp11:6-9 호&nbsp2:18 롬&nbsp8:19-22)를 구가할 것입니다. 

셋째, 우리로서는 좀 낯설게 느껴지겠지만 천국은 또 진·선·미라는 추상적 관념의 완성으로서도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 리는 현 세상을 살며 진·선·미를 경험하면서도, 동시에 진리와 거짓이 혼재하고 선과 악이 공존하며 미와 추가 뒤섞여 있는 것을 발 견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의 진·선·미 추구는 그야말로 보람과 의미로 충만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선·미의 극치이신 하나 님께서 온 피조계에 자신의 속성을 완전히 실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이신 하나님 (cf. 요&nbsp14:6)이 영광스 럽게 나타나심으로 우리의 진리 추구는 결정적 계기를 맞게 될 것입니다. 최고 선(善)(summum&nbspbonum)이 신 하나님(cf. 막&nbsp10:18)께서 자신의 속성을 피조계에 드러내실 때 우리의 도덕적 가치 실현은 그 정점에 다다 를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미와 직접적으로 연관시키지는 않지만&nbsp-- 시&nbsp27:4에 나타나는 여호와 의 "아름다움"은 "쾌적함" (agrreableness,&nbsppleasantness) 혹은 "사랑스러움" (loveliness)에 더 가깝습니다&nbsp-- 우리는 자연 만물의 아름다움이나 인간의 미적 감식력이 만물의 창조주이 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새 하늘과 새 땅은 미의 완성에 있어서도 한 몫을 단단 히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는 천국의 성격을 세 가지&nbsp-- 개인적 위로, 관계의 온전한 회복, 진·선·미의 완 성&nbsp-- 각도에서 규명해 보았습니다. 천국은 이토록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곳이며, 거기서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모 든 것들의 완벽한 상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 왜 천국을 사모하지 않는가? = 
천국이 앞에서 기술한 것처럼 그토록 영광의 장소인데, 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비전에서는 거의 자취를 감추다시피 한 것일까요? 몇 가지 서로 연관된 요인들을 찾아낸 후, 그에 대한 답변을 시도하고자 합니다. 

첫째, 천국을 매우 따분하고 심심하기 짝이 없는 장소로 생각하기 때문에 배척합니다. 물론 이것은 무지와 편견의 산물입니 다. 천국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예로 들자면, 영물(靈物)들이 흐느적거리고 있다든지, 음악을 싫어하는데도 계속 찬송가만 부르 고 있어야 한다든지, 하릴없이 빈둥거리며 게으른 삶을 영위하고 있다든지 하는 것 등이 있습니다. 

물론 이런 묘사들은 천국의 실상과는 거리가 멉니다. 사람들은&nbsp-- 그리스도인을 포함하 여&nbsp-- 성경과 신학이 제시하는 영광스러운 천국의 모습을 모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배척은 진정한 천국에 대 한 것이 아니고 천국의 패러디를 겨냥한 것에 불과합니다. 

둘째, 어떤 이들은 천국을 현실 도피주의자들의 비겁한 대안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싫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천 국 운운하는 이들치고 현실에 대해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자세를 함양하는 이가 없고, 세상의 삶 가운데 보람과 성취를 이룩한 이가 없 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나약하고 패배주의적이고 비겁하기 때문에, 삶의 현실 속에 뛰어들지 못한 채 결국 피안의 세계만을 동경하 는 도피주의적 광신자로 탈바꿈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판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아, 염세주의적 경향의 그리스도인 개인이나 집단 가운데 그런 경향을 보인 경 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완성될 천국의 동경이 반드시 현실 도피주의적 멘탈리티로부터 연유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현 실을 심각히 고려할수록 동시에 천국도 동경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장 마음을 두는 것 (또 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cf. 고전&nbsp10:31). 우 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모든 창조 영역과 분야에 관심을 쏟는 것은 그런 영역과 분야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 다. 그리스도인이 구령(救靈) 사업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영혼 구원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또 그리스도인 이 시간 관리의 중요성을 운운하는 것은 그런 태도와 행위가 하나님의 영광과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전공과 직업에서의 노력이 나 사회 봉사와 개혁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 성, 사회의 구조악, 사단의 시험 등이 방해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방해 요인이 완전히 근절되기를 기 다립니다&nbsp-- 그런데 그 일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완성될 천국을 그리워하고 동경하는 것 은 이 세상을 회피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이 피조계 가운데 온전히 반영되기를 열망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국의 동경 아 도피주의자들의 종교적 게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현실과 현세적 삶이 너무 재미 있고 보람 되기 때문에 천국의 도래를 부담스럽게 여깁니 다. 그들은 현재 너무나 만족스럽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데, 이 시점에서 천국이 실현된다면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 편에서의 잔 인하고 심술궂은 방해라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이들은 지혜와 통찰력이 이중적으로 얄팍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인생에 대한 이해가 피상적입니다. 그들이 그 토록 행복하다고 느끼는 인생은 현재 자기가 원하는 조건과 일치하기 때문일 텐데, 안타깝게도 이런 상태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대체 로 보아 그런 조건의 충족은 덧없는 일이라서 곧 사태의 변화와 더불어 고통과 상실의 아픔이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혹시 그런 조건 이 계속 충족된다고 해도 오히려 우리 편에서 싫증이나 환멸을 느끼는 수도 허다합니다. 또, 그들은 천국을 인간 생활 및 피조계 의 완성으로서 알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도 피상적입니다. 어떤 이가 인생에서 정말로 보람되고 참된 그 무엇을 느꼈다면, 그는 인생 의 완성인 천국을 부담스러워하든지 귀찮게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넷째, 적잖은 이들은 (역시 그리스도인을 포함하여) 지구(또 우주)가 갑자기 대격변을 겪게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서, 천국의 인정을 꺼리는 수도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미래학자, 생태학자, 천문학자)은 지구와 우주가 큰 문제 없 이&nbsp-- 또 혹시 문제가 있더라도 얼마든지 스스로 해결해 나감으로써&nbsp-- 영구적으로 존속하리라는 견해 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관에 입각할 경우, 성경이 말하는 천사장의 나팔 소리, 해와 달이 빛을 잃음, 구름 타 고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등의 내용이 좀처럼 믿기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종말과 그리스도의 재림, 새 하늘과 새 땅의 가르침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희귀하거나 우발적이거나 주변적인 항목이 아 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창조,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 부활, 오순절 성령 강림 등의 교훈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본질적 메시 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천국의 도래가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또 성경의 가르침을 차치하고라도, 지구가 불운한 대격변을 맞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 종종 비기독교적 전문가들의 입에서도 회자되는 바입니다. 소행성과의 충돌, 식량 및 자원 고갈, 지구 온난 화 및 이에 따르는 기후 변동 등의 자연적 요인으로 말미암아 지구에 종말이 찾아올 수 있고, 또 이런 재앙들이야말로 바로 하나님께 서 사용하시는 수단일지도 모릅니다. 천국의 도래와 그리스도의 재림은 처음 생각하듯 그토록 얼토당토않은 망상으로만 여길 것이 아닙니 다. 

다섯째, 이장림 목사의&nbsp1992년&nbsp10월&nbsp28일 그리스도 재림설과 그 후유증 이 역시 천국관의 희소화에 기여했습니다. 비록 그가 내세운 주장의 핵심이 재림의 시기에 대한 것이고 재림의 사실에 대한 것은 아니 었지만, 전자에 대한 오류의 입증이 자연히 후자에 대한 진리 확립이나 개인적 확신 등에 찬물을 끼얹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일을 그릇되이 예측한 인물들은 꽤 많이 있었습니다. 이장림 목사의 경우도&nbsp-- 단 지 한국에서 그런 예측을 시도했다는 점만 빼놓고는&nbsp--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이의 성경 해 석 (및 그 오류)과 성경의 진리 주장 사이를 구별해야 합니다. 재림일에 대한 주장은 전자에 속하지만, 재림의 사실 및 천국의 도 래는 복음의 진리 자체입니다. 따라서 천국에 대한 어떤 그리스도인들의 오류가 천국이라는 복음 진리 자체를 도외시하지 않도록 해 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는 천국을 배척하든지 경시하게 만드는 다섯 가지 요인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 가운데 어느 것 한 가지 도 천국의 영광스러운 실상을 백안시해도 될만큼 타당성을 갖고 있지는 않음이 밝혀졌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강조하는 천국 교리는 여전 히 복음의 진리로 굳건히 서 있습니다. 

= 우리는 어떤 태도로 천국을 기다려야 할까? = 
그러면 천국이 그토록 영광스러운 곳이라면 우리는 어떤 태도로 그 완성을 기다려야 할까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요? 세 가지 사항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새 하늘과 새 땅을 실현시키실 그 주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는 늘 주님을 사모해야 하지만, 특히 우리의 눈물 을 씻기시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실 (계&nbsp21:3) 그 주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나의 고통과 서러움을 다 아시고 "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마&nbsp25:21) 라고 인정해 주실 그 주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의 낮 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화시키실" (빌&nbsp3:21) 주님을, 우리를 "그와 같이" 되도록 하실 (요 일&nbsp3:2) 바로 그 주님을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은 늘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 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찬송가&nbsp85장)라는 가사의 내용처럼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삶의 현실 가운데 수시로 완성될 천국의 모습을 상상해야 합니다. 우리는 원래 자기가 소원하고 바라는 것들은 시키 지 않아도 마음 속으로 그리게 되어 있습니다. 연인의 자태, 승진할 때의 축하 장면, 시상식의 정황, 황혼 녘의 들판 등이 그 예 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자연적으로 좋아하는 것 말고, 신앙적·윤리적으로 바람직한 것들&nbsp-- 참되고, 경건하 고, 옳고, 정결하고, 사랑스럽고, 칭찬할 만하고, 덕스럽고, 기릴만한 것들&nbsp--을 생각하라고 말합니 다 (빌&nbsp4:8). 

그렇다면 우리가 늘 생각해야 할 항목 중에는 반드시 완성될 천국의 모습도 포함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위로하시 는 장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만물 가운데 편만한 광경, 형제를 사랑하며 진심으로 기꺼워하는 모습,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은 자신 의 영화로운 상태 등에 정신이 팔려야 합니다. 처음에는 이런 일들을 의도적으로 떠올려야 하겠지만, 내면적 훈련이 이루어짐에 따 라 시간만 나면 우리 생각이 저절로 완성될 천국으로 치닫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부지런히 지속적으로 성화(聖化)의 훈련에 임해야 합니다. 성화는 실제로 거룩해지는 것으로서, 정결의 관점에서 보자 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는 일" (고후&nbsp7:1)이기도 하고, 영광이라는 각도에서는 "아 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 (롬&nbsp8:29)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또 성화란 우리 자신들이 완성될 천국의 삶에 적합 하도록 이 세상에서 자신을 신앙적으로, 윤리적으로 준비시켜 나가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의 표현처럼 현재 우리의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고전&nbsp15:50). 오 직 우리가 변화되어 완성될 천국의 질서에 적합하게 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니할 말 로 우리가 변화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간다고 해도 결코 그 즐거움을 인식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상태에서는 천국이 우리에 게 오히려 불편과 고통을 줄 수도 있으며, 그리하여 그 곳이 곧 지옥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최종적 변화&nbsp-- 영화(榮 化,&nbspglorification)&nbsp-- 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이지만, 우리 편에서는 그 상태에 도 달하기 위해 끈질기고 피나는 노력 또한 배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 이후 우리의 신앙 생활이란 실상 천국의 삶을 연 습하는 과정이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삶 속에서 완성될 천국의 가치관을 반영하며 살아야 합니다. 동시 에 교회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영광스러운 변화 모습을 미리 앞당겨 자신의 신앙 공동체 속에 실현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완성될 천국에 대한 가르침과 열망을 다시금 회복해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인(개인 및 공동체)의 모 든 신앙과 삶은 완성될 천국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입니다. 바로 오늘의 예배 가운데, 신앙 공동체 가운데, 삶의 현실 가운 데, 세상 가운데,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열망과 간원이 메아리쳐야 할 것입니다. 
 
송인규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