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 

빛과 소금 2003년1월1일 호 

Special Theme 존 스토트 칼럼 


이 글은 Knowing and Doing(2001년 가을호) p.6∼7에 실린 것으로 필자와 C. S. Lewis Institute측의 허락을 받아 번역, 게재합니다. 「빛과 소금」에서는 이번 호부터 매월 존 스토트 목사님의 영성 깊은 글을 싣습니다. This work was taken from Knowing and Doing, fall 2001; ⓒ2002 C. S. Lewis Institute; used by permission, all right reserved. 

새 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대화와 토론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예수는 누구인가? 세계 종교 시장에 나온 예수만 해도 수백 종류에 달한다. 예수님에 대한 이런 오해의 경향은 예로부터 있어 왔다. 주후 1세기 중엽에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을 향해 “누가 가서 다른 예수를 전파할 때는 너희가 잘 용납한다”고 탄식해야 했다(고후 11:4). 

물론 시대마다 크리스천들은 동시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방향에서 예수님을 전하고자 애썼다. 옳은 일이다. 그런 까닭에 6세기 수도원 운동에서 예수님은 완벽한 수도사였고 중세에 예수님은 봉건 영지주의의 채무자였으며, 계몽주의 시대에는 인도적인 스승이었고 그리고 20세기 라틴 아메리카에선 사회 해방가 였다. 

그러나 하버드대 학자 케드베리(H. J. Cadbury)는 저서 「예수 현대화하기의 위험성」(The Peril of Modernizing Jesus, 1937)에서 예수님을 길들이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그 분께 자신들의 외투를 입혔던 군사들처럼 우리는 예수님에게 ‘우리 식의 옷’을 입히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고 앞에서,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보여주는 진정한 예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님이 현대인들의 마음에 들거나 말거나 말이다. 오직 “한 주 예수 그리스도”(고전 8:6)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구미에 맞도록 적당히 변형시킬 자유는 없다. 오늘날은 4세기 아다나시우스 같은 지도자들이 필요하다. 당시 대부분의 교회 인사들이 이단 아리우스를 따르기로 결심했을 때도 그는 예수님의 신성과 삼위일체 교리를 굳게 고수했다. 

C. S. 루이스는 아다나시우스의 이런 자세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아다나시우스가 시대의 흐름과 함께 나아가지 않은 것은 그의 영광이다. 여느 시대처럼 그 시대가 가버린 지금에도 여전히 홀로 남아있다는 것은 그의 상급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의 딜레마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참 모습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현대인들에게 맞는 예수님을 전할 수 있을까?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하기 위해 가능한 최선의 방법으로 세상에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믿음을 권유하려고 십자가의 거치는 것을 포함해 기분 상하게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예수님의 초상화에서 제거해 버리는 일은 좋지 않다. 이런 식의 마음 약한 타협에는 언제나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 예수님은 성경 원래의 문맥, 본연의 모습에서 벗어나고 만다. 또 조작되고 길들여지며 순화된다. 그러면 세상에 선보이는 예수님의 모습은 시대에 뒤떨어진 인물이거나 심지어 풍자 만화 그림으로 전락해 버린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런 오류를 피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진정한 모습으로, 현대에 맞는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제시할 수 있을까? 거기에는 소극적인 훈련과 적극적인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소극적인 훈련이란, 우리 마음에서 온갖 선입관과 편견을 제거하고 예수님을 미리 정해진 거푸집 속에 억지로 넣으려고 하는 온갖 행위들을 단호히 배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기독교적 ‘프로크루스티니즘’(procrusteanism: 억지로 어떤 기준에 맞추려는 행위)을 회개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는 아주 잔인한 강도였다. 그는 잡아들인 사람을 자신의 쇠 침대에 눕혀 놓고 키가 침대 치수보다 짧으면 잡아 늘이고, 길면 다리를 잘랐다고 한다. 기독교의 프로크루스테스도 이런 완고한 태도를 보인다. 예수님을 자신의 사고 방식에 억지로 꿰어 맞추는가 하면, 예수님의 치수를 적당히 조절하기 위해 무자비한 조처를 취하기도 한다. 선하신 주님이여, 프로크루스테스와 그의 제자들로부터 우리를 구하소서! 

적극적인 훈련이란, 우리는 마음과 가슴을 활짝 열어제치고 성경 본문이 제시하고 있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신약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에 대해 무엇을 증언하고 있는지 경청해야 한다. 

두 가지 훈련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경우는 복음을 전할 때이다. 흔히 사람들이 거부하는 것은 진정한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이비 그리스도이다. 유고슬라비아 오시젝의 복음주의 신학교 학장 피터 쿠즈믹(Peter Kuzmic)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기독교 선교의 신뢰성을 회복해야 한다. 선교와 전도는 일차적으로 방법론, 돈, 경영,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성, 신뢰성, 영적 권능의 문제이다. … 유고슬라비아에서 복음을 전하러 나갈 때, 나는 종종 신학생들에게 우리의 주된 임무가 ‘예수님의 얼굴을 깨끗이 씻어주는’ 일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얼굴은 수백 년 동안 이뤄진 제도적 기독교의 타협과 수십 년 동안 있었던 공산주의 무신론의 적대적 선전에 의해 오염되고 왜곡되었기 때문이다.”(A Credible Response to Secular Europe, Evangelical Review of Theology, June. 1994). 
그러므로 우리가 신약 성경의 증언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참된 전도에 관심을 가질 때 그리스도에 대한 시각은 더욱 명료해진다. 어쨌든 우리의 시각에 아무리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흐려지고 왜곡되었다 하더라도, 이미 우리에겐 이런 약속이 주어져 있다.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나타나실 때 우리는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요일 3:2)이다. 참되신 그리스도,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를 볼 것이다. 

글 / 존 스토트(John R. W. Stott) 일러스트 / 정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