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8월 빛과 소금 블레인 스미스 칼럼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 인들에게 참으로 곤혹스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필요한 일을 전적으로 주님의 손에 맡기고 가만히앉아 있어야 할 때는 언제이고, 또 문제 해결이나 목표 달성을 위해 신중하게 발벗고 나서야 할 때는 언제인가? 


흔히 그리스도 인들은 믿음이란 후자보다 전자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잭이라는 친구가 자신의 은사를 선용할 수 있는 새 직업을 얻고 싶어한다고 하자. 그의 마음에 새 직업을 얻고 싶은 갈망이 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밖에 나가 일거리를 찾는 것이 하나님의 등을 떠미는 행위는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일어날 수 있다. ‘주님께서 내게 다른 직업을 주시기 원하신다면, 내 편에서 노력하지 않더라도 주님께서 직접 인도해 주시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수잔이라는 여성이 결혼하기를 원한다고 하자. 수잔도 이와 유사한 의문으로 갈등을 겪을 수 있다. 훌륭한 배우자를 얻고자 직업을 바꾸는 것을 고려해 볼 수 있고, 좋은 사람을 만날 확률이 높은 도시로 이사 가는 것을 고려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행동이 문제를 전적으로 주님께 맡기지 못하고 자신의 손으로 해결하려는 태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주님께서 내게 맞는 배필을 직접 인도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게 믿음이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예화에서 잭과 수잔은 목표 달성을 위해 어떤 특정한 행동을 취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취해야 할 조처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마음 한 켠에 상황을 호전시키고자 하는 자신들의 노력이 하나님의 권위를 찬탈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면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께서 일하시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이 이면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능동적일 때 vs. 수동적일 때
이에 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경우에 따라 두 가지 서로 다른 수준의 믿음을 발휘해야 한다. 하나는 우리가 나서지 않고 주님께서 움직이실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려야 한다. 이 경우는 우리가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하지 않더라도 주님께서 어떤 해법을 가져다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은 성경에 아주 많이 등장하고 있다. 사람은 가만히 앉아서 여호와께서 행동하실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 요셉이 옥중에 있었을 때, 이스라엘이 요단강에 도착해 강을 건널 수 없었을 때가 그런 경우다. 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도 해당한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하지만 성경에서 믿음은 개인적인 책임 수행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빈번하게 증언한다. 하나님의 계시나 특별 지시가 없어도 개인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담대하게 나섰던 수많은 인물들의 인상적인 모습들이 등장하고 있다. 나오미와 룻은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갔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기 위해 용기있게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조직했다. 바울은 복음 전파의 기회를 얻고자 수많은 문을 두드렸다.

사실 적극적으로 직접 행동을 취하는 것도 믿음이고, 주님께서 일하시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도 믿음이다. 룻이 모압에 머물며 하나님께서 남편과의 사별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실 때까지 기다렸다 하더라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베들레헴으로 간 것은 아마 더 훌륭한 믿음의 행위였을 것이다. 룻은 발벗고 나섬으로써 스스로 하나님을 신뢰할 수밖에 없는 더욱 취약한 상황으로 들어가야 했다. 주님께서 자신을 보호하시도록, 그리고 문을 열어 자신의 모험을 성공으로 인도하시도록 주님을 신뢰해야 했다. 흥미롭게도 바로 이런 행동 때문에 룻은 보아스와의 만남이 이뤄지고 그의 아내가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두 번째 수준의 믿음을 보여야 한다는 것도 역시 잘못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능동적으로 단호하게 나서는 믿음이다. 다시 말해, 어떤 요망 사항에 대해 답을 발견하고자 주도적으로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주님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스스로 내모는 행위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한다면 그런 의존은 불가능하다.

주도적으로 담대하게 나서기
이와 같은 구별, 즉 가만히 앉아 기다려야 할 때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를 구별하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하나님께서 첫 번째 수준의 믿음에 따라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를 원하시는 때는 언제이고, 두 번째 수준의 믿음에 따라 우리가 앞으로 나서기를 원하시는 때는 언제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에 관해 필자가 한 가지 기준을 제안하고자 한다. 만일 외견상 우리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문제나 스스로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고 생각되는 상황에 직면한다면, 첫 번째 수준의 믿음에 따라 가만히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상황을 호전시키거나 목표를 향해 전진하기 위해 어떤 합리적 조처를 취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주님께서 두 번째 수준의 믿음을 발휘하기 원하신다고 가정해야 한다.

물론 이런 진취적 조처를 취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 안에서 첫 번째 수준의 믿음을 경험할 기회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때도 언제나 의외의 장애물이 등장해 주님께서 역사하시기까지 기다리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도 우리의 삶은 주도권을 가지고 담대히 전진해야 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한 인물들의 사례를 살펴보면, 대부분 이런 패턴과 어울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례로 바울은 복음 전파의 기회를 찾을 때, 하나님께서 문을 닫으신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행 16:6∼7; 16:39∼40) 일반적으로 자신이 주도적으로 문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단호한 태도 보이기
이처럼 주도적 행동을 취할 때 종종 우리의 확신을 분명하게 전할 필요가 있다.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우리의 확신을 밝혀야 한다. 이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단호한 태도를 사용해 사람들을 설득하시고 중요한 문을 열어 주실 수 있다.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 주는 충고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말에서 어떤 통찰을 얻도록 마음을 열어 놓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해 남을 충고하며 그들의 오해를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

골리앗과의 싸움에 관해 사울과 대화를 나누던 다윗의 모습에서 우리는 단호한 태도의 고무적인 면을 엿볼 수 있다. 다윗은 사울에게 나아가 거인과 싸우겠다고 솔선해 제의한다. 사울의 첫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삼상 17:33).

그러나 다윗은 사울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삼상 17:36∼37).

사울은 다윗의 직설적인 주장을 물리치지 않았다. 오히려 거기에 설득당했다.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삼상 17:37). 이 사례에서 우리는 식견이 있고 힘이 있는 사울 앞에서 자신에게도 사용할 만한 은사가 있음을 납득시키고자 애쓴 다윗의 노력에 하나님께서 능력을 실어 주셨음을 알 수 있다. 다윗의 단호한 주장은 국가 전체에 큰 유익을 안겨주었다.

성경의 이 단락은 우리 각자에게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삶의 새 지평을 바라보도록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대안을 실현시킬 변화의 행위자로 우리를 사용하신다는 사실이다. 믿음의 길을 걷기 위해 우리의 주장을 분명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노력에 힘을 실어주실 것으로 믿는다면, 남들이 우리의 주도적 행위로 인해 유익을 얻을 것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그런 용기를 얻을 수 있다. 다윗의 사례는 이 점에서 우리에게 큰 용기를 주고 있다.

당신의 보폭으로 걸어라
직접 주도적 행동을 취함에 있어서 두 가지 주의할 점을 일러두고 싶다. 우리가 어떤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고자 한다면 우선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과 에너지의 한계 내에서 흥분 없이 차분한 마음으로 추진할 수 있는지, 이미 수행하고 있는 기타 중요한 일들을 위태롭게 하지 않을 것인지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다음으로, 어떤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이해가 주님과의 정규적인 교제 시간에서 나와야 하며 이때 우리 삶의 방향 및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숙고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성경의 인물들이 주제 넘은 짓을 한 것으로 판단 받는 경우, 직접 주도적 행위를 취했기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 앞에서 계획을 세우지 않고 제멋대로 행했기 때문이다(수 9:14). 우리는 매일 주님의 인도를 구할 때, 아주 자유로운 마음으로 담대하게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면서 은사 사용과 인간 관계 형성의 좋은 기회를 찾아야 한다.

필자는 젊은 시절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와 같이 행동하는 것이 좋다는 한 친구의 조언을 들었을 때 얼마나 큰 위안을 얻었는지 모른다. 이 점에 관해 당신도 성경이 주는 자유를 깨닫고 위안을 얻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삶의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큰 통제력을 주시는 것은 사실이다.

글·블레인 스미스 느헤미야 미니스트리 대표로 크리스천들의 재능과 잠재력을 일깨우고 실현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Knowing God’s Will 외 7권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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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직장선교회 iCCM.net 운영자 대표 김건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