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재난 현장에 달려가 천막 치는 사명을 받아 그 일을 하면서 받은 은혜가 있다. 그것은 한국 교회가 사랑으로 충만하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확인하는 기쁨이다. 한국 교회는 사랑이다. 한국 교회는 살아있다. 

한국 교회에 사랑이 없다고 생각하면 재난당한 현장엘 가 보라. 거기 한국 교회가 있다. 재난 현장에는 한국 교회가 보내 온 구호품을 가득 실은 트럭이 줄을 서서 하차를 기다린다. 물을 한 트럭 가득 싣고 달려오기도 하고, 이불을 한 차 싣고 달려오기 도 하고, 가스렌지를 한 차 싣고 달려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국민들의 의식이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 교회는 이웃에 대해 관심이 없고 자신들만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현장에서 보는 한국 교회와 수치로 보는 한국 교회가 차이가 난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길까? 성경을 보는 가운데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말씀을 만났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일러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러므 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 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여기서 말은 쌀 한 말 두 말 할 때 그 말이다. 등경은 선반이다. 

혹 우리는 그동안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부분만 강조했지 그 빛을 등경 위에 올리라는 말씀은 소홀히 하지 않았 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한국 교회 가운데 이런 저런 허물이 있고 실수한 일도 있지만 대부분의 많은 교회들이 빛이다. 그런데 안 타까운 것은 한국 교회는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는 것 같다.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 위에 뚜껑까지 덮 는 것 같다. 교회가 하고 있는 착한 행실은 숨기고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오히려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 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한국 교회는 이 말씀에 좀 소홀히 한 것 같다. 우리 는 착한 행실과 관련해서는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 하나만 기억하는 것 같다. 같은 산상보훈 중에 있 는 이 두 말씀을 함께 붙잡는 한국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일반적으로 언론 보도는 악행은 취재를 통해서 보도되고, 선행은 보도 자료를 통해서 보도된다. 기업도 정부 도&nbspNGO도 그래서 보도 자료를 낸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보도 자료를 내지 않는다. 이렇게 되다보니 자연스럽게 한 국 교회가 하고 있는 착한 행실은 언론에 보도되지 않는다. 대신 한국 교회의 실수나 허물은 주기적으로 보도된다. 그러다 보니 국민 들은 주기적으로 한국 교회의 허물과 실수를 읽는다. 그들에겐 그것이 한국 교회다. 

이제 한국 교회가 더 이상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올렸으면 좋겠다. 이 시대의 등경 중 하나는 언론 이다. 그 등경 위에도 한국 교회 등불이 올려 졌으면 좋겠다. 언론을 통해 한국 교회의 착한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하 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면 좋겠다. 

중앙일간지엔 종교 면이 있다. 일주일에 한 두 번씩 종교관련 기사가 난다. 종교 간의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 기독교와 천주 교 그리고 불교관련 기사를 교대로 내 보낸다. 신문들도 가능하면 종교적으로 어느 한 종파에 치우친다는 이미지를 주지 않기 위해 애 를 쓴다. 기독교 차례가 되었을 때 누군가를 인터뷰해서 싣든지, 한국 교회에서 하고 있는 착한 행실을 싣든지 실어야 한다. 일반적 으로 이 면에서는 종교의 긍정적인 면을 보도해 주려고 한다. 신문을 통해 한국 교회를 있는 그대로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이 다. 이런 기회도 한국 교회가 잘 활용했으면 좋겠다. 

구제할 때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과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 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이 두 구절은 모순이 아니다. 착한 행실의 동기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되어 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은밀한 중에 갚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구제할 때 우리는 선을 행하다 낙심치 않고 계속 선을 행할 수 있다. 사람들은 우리가 행하는 그 선을 바라보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조현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