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을 잘 하면 오래 산다?

김우영

신앙 생활 하면 오래 산다'는&nbsp4단 횡으로 지면의 반을 할애한 커다란 제목이 붙어있는 신문 기사를 읽었 다. 미시간 대학의 연구결과인데 '7년 이상 믿음 없으면 사망률&nbsp33%가 높다'는 내용이었다. 미시간 대학 사회학 과 연구진이 전국 성인&nbsp3,600명을 상대로 한 신앙과 건강에 관한 실태 조사자료였다. 

그러나 제임스 하우스 교수가 이 보고서는 '종교 생활이 적당한 운동이나 금연이 가져다 주는 수명연장효과와 비슷한 영향을 미 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고 했다. 돈과 시간을 들이고 연구를 하지 않더라도 상식적으로 누구나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눈에 보 이는 이런 효과는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는 상식 중의 상식이다. '건전한 마음에 건강한 육체',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라 는 말은 초등학생들조차 알고 있는데 굳이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연구할 필요가 어디에 있었을까? 

병석에 누워있는 환자를 찾아가서 '그저 마음 편히 가지세요', '아무 걱정 말라'고 한다. 이 말은 '무엇이든 믿고 편안한 마음을 가지라'는 뜻이다. 실제로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면 회복이 빨라진다는 것도 사람들은 알고 있다. 

개인 신앙에 대한 이러한 사회 과학적인 접근은 이미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나 아직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 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이런 연구는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면 '오래 산다'는 엉뚱한 말도 할 수 있게 한다. 신앙이나 종교 의 본질적인 문제로 접근하기보다 이런 듣기 좋은 말로 믿지 않는 사람들을 현혹한다. 이런 방법은 사람들을 신앙생활의 첫걸음부터 신 앙의 본질에서 벗어나게 만들 확률이 높다. 

여기서 말하는 '신앙 생활'은 개인적인 신앙을 말하는 것이며 '종교 생활'은 대부분 어느 종교의 틀 속에서 개인 신앙을 잃어버리고 틀에 박힌, 혹은 계율에 붙잡혀 살아가는 삶을 지적하는 말이다. 

미시간 대학 연구팀의 연구 대상이 어떤 특정 종교인이나 신앙인을 상대로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종교에 관계없이 막연하 게나마 무언가를 붙들고 있는 사람이 아무 것도 붙들고 있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와 희망과 낙관적인 견 해를 갖기 마련이다. 그래서 특정한 신앙이나 특정 종교라 해도 연구 결과엔 별로 차이가 없을 것이다. 

신앙이나 종교를 가지고 육체의 수명의 문제를 다루기보다 인본주의적, 심리학적 접근이 오히려 낫지 않았을까? 어찌 보면 하나 님이나 어떤 신을 믿는 것보다는 자신의 강인한 정신력을 믿는 사람들이 투병에 더 강한 면도 있고, 삶에 대한 집착력이 강해서 촌각 에 달린 생명이 더 오래 연장되는 일도 흔히 있는 일이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나 터키와 같은 지진의 참화 속에서도 강한 정신 력을 가진 사람들이 악조건 속에서도 생존해 있어서 구출을 받았다. 

이들이 신앙이나 종교 생활을 수명과 관련시킨 것은 신앙이나 종교의 본질을 너무나 피상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종교나 개인 이 갖고 있는 신앙이나 신앙 형태에 따라 내용이 다르긴 하겠지만, 기독교 신앙은 오래 사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다 시 말하면 기독교 신앙은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수명에 초점을 두고 있지 않고 영생에 초점을 두고 있다. 땅 위에서는 인간이 아무 리 오래 살아도 결국 늙고 병들어 죽기 때문에 하나님께선 인간의 장수에 초점을 두고 구원을 계획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의 영원한 생명을 인간에게 주시겠다고 계획하신 것이다. 따라서 단지 신앙을 사람의 수명을 연장해주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일 이 전혀 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성경 인물들을 보아도 그들의 연수가 그들의 신앙과 관련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생명의 보전'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다윗 도 있긴 있다. 그래서 땅 위에서 생명이 조금 길어질 수도 있지만, 그 수명이 길어 보았자 야고보는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 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라고 수명의 덧없음을 말한다. 

미시간 대학 연구팀의 연구 결과가 어디든 통하는 증명된 이론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신앙과 수명이 비례한다는 가설은 증명될 수가 없다. 만약에 그렇다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수명이 가장 길어야 하지 않겠는가? 

땅에서 인간의 생명이 길리라고 말씀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출&nbsp20:12). 제&nbsp5계명에서 인간 의 수명이 부모 공경과 관련이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신앙이 좋으면 땅 위에서 오래 산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신앙이 좋은 사 람이 땅 위에는 고난과 핍박 때문에 단명하는 경우가 많다. 야고보를 비롯한 사도들의 생애가 그랬고, 스데반 집사도 돌에 맞아 짧 은 생애를 마감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겨우&nbsp30대의 새파란 젊은 나이에 십자가상에서 비참한 최후를 마쳤고, 여인 이 낳은 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주님에 의해서 명명됐던 세례 요한도 겨우&nbsp30세라는 짧은 생애를 살다가 목 베임을 당했다. 대부분의 신앙의 사람들은 신앙 때문에 오히려 땅 위에서 짧은 생애를 살다가 갔지만, 그들은 그들의 믿음 때문에 영 원한 생명을 소유했다. 그러므로 신앙은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지 땅위에서 육신의 수명을 길게 하는 도구는 아니다. 

신앙 생활을 잘 하면 땅 위에서 오래 산다는 말은 신앙으로 영원한 생명을 산다는 말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우리에게 가장 커다란 오해가 있다면 그것은 생명이 수명에 달려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늙으면 수명이 다하고, 수명이 다하면 생명도 수명과 함께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결국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늙어가고 있는 것이 다. 우리들은 아기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때 그를 대견스럽게 보면서 '아가, 몇 살이지'라고 잘 묻는다. 아이는 손가락 하나 나 둘을 내세워 제 나이를 말하지만, 어른들이 아이에게 영어로 나이를 물으면 퍽 당혹스러운 질문이라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나 이가 몇이니?" 라는 말을 영어로 풀어보면 '너 얼마나 늙었니? (How&nbspold&nbspare&nbspyou?)'라는 뜻이다. 아이가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이 면&nbsp1년을 늙었다는 말이고, 둘을 세워 보이면&nbsp2년을 늙었다는 말이다. 더구나 이곳에선 엄마의 자궁 에 앉아 있었던&nbsp10개월까지 늙음으로 계산하고 있으니 어찌 황당한 일이 아닌가? 

결국 인간은 늙어가고 있다는 말인가? 우리가 정말 늙어가고 있다면 참으로 서러운 일이다. 우리는 결국 늙기 위해 태어나 서 땅 위에서 늙다가 죽는 것이 우리가 누리는 수명이라면 그것이 길든 짧든 별다른 차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물론 구약 인물들 이 살았던 세월만큼만 살아도 여한이 없다고 말할 사람들도 많겠지만…. 

야곱이 애굽의 바로왕 앞에 섰을 때, 바로왕이 그에게 몇 살이냐고 묻는 장면이 있다. 야곱은 이렇게 대답한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nbsp130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 을 보내었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야곱은 자신의 나이는&nbsp130세인데 우리 조상들의 나이에 비해선 얼마 되지 않을 뿐 만 아니라, 이 짧은 세월도 고생, 고생하며 살았다고 했다. 결국 야곱도 고생하면서 늙음을 살아왔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인생의 수명 가운데는 늙음도 있고, 야곱의 표현대로 '험악한 세월'도 있는 것이다. 병들고 약해질 때도 있고, 먹고살기 위 해 고생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수명을 늙어서 죽는 연한으로 생각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우리 영혼에 여러 가지 색깔을 칠하 는 햇수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창세기&nbsp5장에는 아담으로부터 노아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수명이 기록되어 있다. 인간의 조상 아담 이&nbsp130세가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을 닮은 셋이란 아들을 낳았다. 셋이 태어난 후에 아담은&nbsp8백년 을 더 살면서 다른 아들들과 딸들을 낳은 후 그의 나이&nbsp93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담의 수 명&nbsp930년을 살펴보면 첫&nbsp130년은 늙음을 살았는지는 몰라도, 그 뒤&nbsp8백년은 셋 을 비롯해 많은 자녀를 낳으며 살았다. 늙음을 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녀를 생산하며 살았다. 아담의 수명을 말하 면 첫&nbsp130년보다는 그 뒤&nbsp8백년이 보다 화려한 색깔을 칠하며 살았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그는 늙 음을 살다가 죽었다고 말할 수가 없다. 

단 한 살을 살다가 죽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아이에게 일년 늙어서 죽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게 아닌가? 연수가 많아지면 서 늙고 병들고 약해져서 죽을 확률이 높아지긴 하지만, 늙음 때문에 죽는 것은 아니다. 야곱의 말대로 다만 '나그네의 험한 세월' 이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도 늙어서 죽는 것으로 알고 이런 기원을 드린 적이 있다. 

'나를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떠나지 마소서…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 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을 장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시&nbsp71:9,&nbsp18)' 

모든 피조물은 때와 기한 안에서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선언이다(전&nbsp3:1). 이것이 수명이 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사는 기간동안 노고를 주사 애쓰며 살게 하셨다(전&nbsp3:10).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께서 주신 노고를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지혜로운 자이다. 인간의 노고는 적어지기도 하고 얼마간 사라지면서 평안을 누릴 수도 있 지만 그렇다고 수명이 늘어나는 것도 짧아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인간이 사는 동안 수고함과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 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전&nbsp313).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우리의 생명은 그 런 수명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달려있고, 수명이 끝나기 전에 영생을 소유했다는 사실에 있다. 
 
김우영 / 재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