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신앙에 있는가 확증하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의 기초요 토대이며 복음진리의 핵심사항이다. 따라서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도 복음도 다 공허하며 무위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부활신앙은 주님 제자들의 삶을 일변시켰다. 막달라 마리아의 증거에도 믿지 아니하고(막&nbsp16:10∼11) 시골 로 가던 두 제자의 증거에도 믿지 아니하던(막&nbsp16:12∼13)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달 았더니 거기에 나타나신 부활예수를 확인하고는 삶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다. 불안하고 초조하던 자리에서 벗어나 의연하고 당당하게 복 음을 증거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제자들은 아무데서도 예수 부활을 외쳤던 것이다.

제자들의 부활신앙은 그들 모두를 순교자가 되게 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전도하다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했고 안드레는 헬 라에서 전도하다 아가야 성에 엑스자(X)형의 십자가에 순교했으며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헤롯에게 칼에 목베임을 당해 순교했고 요 한 사도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끝까지 모시면서 전도하다 끓는 가마솥에 넣었으나 죽지 아니하므로 끌어내어 밧모섬에 정배를 가 서 요한계시록을 썼고 빌립은 소아시아 부르기아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기둥에 매달려 순교했으며 바돌로매는 알메니아에 가서 전도하다 가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했으며 도마는 인도에서 창에 맞아 순교하였고 마태는 에디오피아에 가서 목베임을 당해 순교하였고 가나안 인 시몬은 애굽에서 전도하고 유대에 돌아와서 활에 맞아 순교하였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떨어트려 순교하였고 야 고보의 형제 유다는 파사에 가서 전도하다 활에 맞아 순교하였고 가룟 유다의 대신으로 제자가 된 맛디아도 에디오피아에 가서 전도하 다 돌에 맞아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비겁하고 무력하던 제자들이 한 순간에 용기있고 능력있는 주의 증인들로 바뀌게 된 것은 순전히 부활신앙 때문이 다. 제자들이 부활예수를 직접 대면한 다음부터 생긴 변화였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의 한국 교회가 깨끗한가 혼탁한가, 용감한가 비겁 한가, 생동인가 침체인가, 권능인가 무능인가는 부활신앙의 여부에 달렸다고 본다. 초대교회의 순수함과 진지함, 애정과 열정, 사명감 과 역동성을 상실한 채 지금은 부패하고 굳어진 몰골일 때 이는 부활신앙의 실종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며 주일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 할 때엔 예수부활과 육체부활을 되뇌인다. 그러나 참으로 부활신앙 을 가졌는지가 문제이다. 그레데 사람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실천적 무신론자였듯이 (딛&nbsp1:16) 부활신앙에도 그런 부류가 많을 것이 틀림없다.

내가 초년 목사일 때 서울가는 기찻간에서 옆자리에 앉은 분과 신학토론을 한 적이 있다. 그 때 그 분은 중년 신사분으로 모 대학의 교수이며 진보교단에 속한 목사라고 자기소개를 하였다. 선글라스에 남방셔츠를 입었는데 셔츠 주머니엔 담배가 한 갑 들어있었 다. 그 때 나는 갓 번역되어 나온 하비 콕스의 ‘세속 도시’를 읽고 있었는데 그가 ‘그 책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와 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nbsp12년간 목회도 한 바 있다는 그분에겐 김은국의 ‘순교자’에 나오는 신 목사 같은 류 가 참 그리스도인이었다. 나는 토론 말미에 그에게 우문인줄 알면서 ‘사도신경을 믿느냐’고 물었다. 뜻밖에도 그는 ‘믿는다’고 대답 했다. 그가 너무도 급진적인 신학사상을 펼쳤었기 때문에 다시 ‘사도신경의 동정녀 탄생과 부활사건 등을 실제 사실로서 받아들이느냐’ 니까 ‘그렇지는 않다’면서 자기는 ‘그 의미만 믿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성경의 기술은 사도들이 예수 부활을 사실로 인식 한 것 아니냐’니까 그것은 ‘맞다’면서 ‘하지만 그 때와 지금은 시대가 다르지 않느냐’고 답변했다.

명백한 부활사실도 재해석으로 포장하여 애매모호하게 호도하는 불신앙적 풍조가 한국 교회를 급격하게 속화시켰고 이제는 감성 의 시대가 되어 예배가 놀이 문화로 바뀌는데까지 변질되었다. 현 시점에서 한국 교회가 사도들의 순교적 신앙의 뒤를 잇고자 할찐 대 반드시 부활신앙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는 일이 선결되어야 하리라고 믿는다(고후&nbsp13:5). 부활신앙이야말로 성 도들의 삶을 일변케 하는 생명의 출발점으로 활력과 열정을 점화케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