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할 때  
  사기(史記)의 <추양열전(鄒陽列傳)〉에 나오는 말로 백구여신(白頭如新)이란 말이 있다. 아무리 사귀어도 서로를 알지 못하면 헛수고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반대말로 처음 잠깐 만났는데도 매우 친숙하다는 뜻의 경개여고(傾蓋如故) 또는 경개여구(傾蓋如舊)가 있다.

 사람과의 만남은 항상 새롭다. 그러나 그 만남이 서먹거림과 친숙함으로 나누어지면서 계속과 멈춤의 갈래로 이어진다. 본래의 자리로 갔다 하여도 다 된 것은 아니다. 새로운 자리에 선 것이다. 그러기에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용기이다.

 살다보면 가끔 무엇인가 아쉬운 때가 있고, 그 아쉬움을 채우기 위해 그 무엇인가를 시작하려 하면 선뜻 용기가 나지 않을 때가 있다. 나이가 많은 것 같기도 하고, 힘이 달리는 것 같기도 하고, 머리도 따라주지 않을 것 같다. 거기다 형편까지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다. 또 지금 해보아야 먼저 시작한 사람들 많으니 도무지 비교도 안 되고, 의미가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자꾸 나 자신은 초라해 보이고, 저만치 멀어 보이는 훌륭한 사람만 확대되어 보인다. 이렇게 차일피일 머뭇거리다 보니, 어느덧 삶의 시간은 회복하기 더 어렵게 빠른 속도로 흘러간다. 이러한 삶에 대한 자신 없음과 초조감은 우리를 더욱 조급하고 우울하게 만든다. 그러나 비록 늦었다 할지라도, 그 늦음을 느낀 바로 그때 시작해야 한다. 바로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인생의 먼 길에서 반드시 먼저 갔다 해서 먼저 도착하는 것도 아니며, 현재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반드시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것만도 아니다. 다 때와 기한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떤 요행수를 바라서가 아니라, 비록 늦었더라도 시작을 해서 꾸준히 노력해야한다. 또 바로 그 자리에 다시 섰다면 우리는 특별한 용기를 갖고 서야한다.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데미안의 "알을 깨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오는 고통"에 견줄 만 하다. 세상일이란 막상 생각만큼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선입견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참으로 막연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본인의 의지가 이미 섰고, 성실성만 입증된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매사 불여튼튼, 돌다리도 두드려보는 신중한 검토와 세심한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반복되는 실수는 그 누구도 내편으로 다가와 주지 않는다. 그러기에 더 많이 수고하고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안다는 것만 가지고 끝까지 승부를 내기가 어려운 시대이다. 그렇다고 롤로 메이의 책 「창조적 용기」에서 말하는 네 종류의 용기(신체적 용기, 도덕적 용기, 사회적 용기, 창조적 용기)로 나누지 않아도  때를 바로 판단하고 방향을 세울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 무식함의 용기가 아닌 세련되고 준비되고 결과를 믿음으로 보고 달려 나가는 용기가 필요하다. 쉬었던 자리. 포기되었던 자리에서 다시 일어선다는 것은 예수 부활 후 갈릴리로 고기를 잡으러 갔던 제자들이 사명을 깨닫고 제자의 길로 돌아서는 것이다. 죽음의 길 인줄 알면서 나를 통하여 더 많은 사람이 귀한 자리에 있다면 기꺼운 마음으로 감당하는 것이 바로 용기이다.

   

 요나가 두 번이나 제 자리에서 출발하였다. 피하고 도망갔지만 또 다시 제자리에서 출발하게 된 것이다. 늦었다. 그리고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러나 그 일은 바로 그의 몫이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쉽게 포기하거나 머뭇거림에 묻히게 할 수는 없다. 늦은 만큼 바로 가야한다. 그리고 더 빨리 가야한다.

 한국의 대통령이 제자리로 복귀하였다. 63일 동안 불쌍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할일을 바로 하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에게 그렇게 보인다. 내가 서 있는 자리는 탄핵을 받을만한 자리는 아닌지 언제 보아도 늘 같은 자리에서 당당히 서 있기를 원한다면 끝까지 지킬 줄 아는 용기도 필요하다. 만용이 아닌 섬김의 자리에 있다면 누구든지 그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기를 원할 것이다.

  나로 말미암아 주변이 복되어지는 일이 하나씩 더 나타나길 원하는 믿음의 사람이 바로 용기가 있는 사람이다. 사랑이 동기인 용기는 모두를 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