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법원이 아니고 병원입니다/ 정원 


언젠가 어떤 신앙이 깊은, 경건한 부인에게 어느 잡지에서 읽은 내용을 들려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신실한 그리스도인 여성이 집에 들어온 강도에 의해 성폭행을 당한 이야기 였습니다. 

그녀는 "나는 주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데, 왜 이러한 일이 나에게 생겼는가?" 
하는 의문과 씨름하며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내용의 이야기였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 부인의 얼굴은 마치 벌레를 씹은 듯한 표정으로 별로 달가운 빛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그 내용에 대하여 "더러운 것" 하는 듯한 분위기였습니다. 

충분히 이야기의 결론을 마치기도 전에 그녀는 성급하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는 회개했대요?" 나는 나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내가 읽어주었던 내용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끔씩 경험하게 되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고통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고통의 배후에서 우리의 지각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함께 나누려고 했던 것입니다. 

누구의 죄를 들추어내기 위한 것은 물론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회개라니요! 그녀는 피해자이지, 가해자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가 아니라 치유와 위로가 필요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후,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이 경건한 부인의 상처받은 사람에 대한 태도가 이 시대의 교회의, 
그리스도인의 보편적인 태도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과연 이 시대의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할 줄 아는가요? 
가난한 자, 무명한 자, 패자의 편에 서 있는 가요? 
상하고, 망가져 있는, 아무런 힘이 없는, 그래서 정말 위로와 치유가 필요한 사람의 입장에 서 있는 가요? 어쩌면 우리도 상처받은 사람들을 신앙의 이름으로 더 정죄하고 심판의 판결을 내리는 것은 아닌지요? 

오래 전에, 언론에서는 가정 파괴범에 대한 보도를 집중적으로 많이 한 적이 있었습니다. 
가정 파괴범이란 신조어로서 여러 명의 떼강도가 집에 들어와 금품을 빼앗고, 남편을 묶어놓은 다음, 아내를 성 폭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마 경찰에 신고를 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행동인지는 모르지만, 엄청난 그 잔인함으로 한동안 많이 보도가 되었습니다. 
가정 파괴라는 용어가 쓰여진 것은 실제로 그 충격이 너무 커서,가정이 깨어지곤 했기 때문입니다. 

폭행을 당한 여인들은 그 충격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고,친정으로 돌아가서 오랫동안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두문불출을 하기도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때 남편들의 태도였습니다. 물론 이런 경우 대부분의 남편들은 아내의 상처를 위로하고 
치유하기 위하여 애썼겠지만, 어떤 남편들은 더 이상 아내와 함께 있기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그들도 아내가 피해자라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아내를 지켜주지 못했던 자기에게도 책임의 일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관계는 악화되어 갔고 그로 인하여 가정들은 깨어져 갔던 것입니다. 
가장 위로가 필요하고, 가장 섬세한 돌봄과 애정이 필요했을 때, 아내들은 가장 의지할 대상에게서 버림을 받았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어떨까요? 
그곳은 상한 영혼들이 치유를,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일까요? 아니면 오히려 더 고통을 받는 장소일까요? 죄인들이 안식 을 얻을 수 있는 곳일까요? 아니면 정죄를 받는 곳일까요? 교회는 과연 병원인가요? 아니면 재판소, 법원일까요? 

 
약간의 안면이 있는 분에게 나는 권면합니다. 
"교회에 나오시지요." 
그는 쑥스럽다는 듯이 말합니다. "저는 죄가 많아서 못나갑니다." 
나는 다시 되 묻습니다. 
"때가 너무 많으니까, 목욕탕에 갈 수 없다구요?" 
그는 껄껄 묻습니다. 
"그렇군요. 참." 

어떤 이는 말합니다. "지금, 문제가 너무나 복잡해서 갈 수가 없어요." 나는 다시 묻습니다. 
"아픈 데가 너무 많아서 병원에 갈 수가 없다구요?" 
사람들의 이와 같은 대답을 보면, 그들은 교회를, 신앙을, 자연스럽고 편안한 부담이 없는 곳으로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교회에 가려면 경건해야 하고, 거룩해야 하며 자연스러운 삶을 많이 희생해야 하고, 많은 자유를 포기해야 하고, 이것, 저것 재미있는 것들을 다 포기해야 하고,... 

그러므로 급한 일이 생기거나, 사경을 헤매거나 인생의 마지막에 별로 할 것이 없을 때, 바쁘거나 재미있는 일이 없을 때 가보려는 생각을 가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성도님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이 교회가 너무 더러워서 다닐 수가 없습니다. 
다른 교회로 가야겠습니다." 
목사님은 대답했습니다. "교회는 원래 죄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더럽지요. 교회는 쓰레기장 같은 곳이지요." 

집사님은 의견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정도가 너무 심합니다. 저는 깨끗한 교회를 찾아가겠습니다." 
목사님은 웃으며 되물었습니다. "세상에, 더럽지 않은 교회도 있나요? 또 아주 깨끗한 교회를 찾아보았댔자, 성도님 덕분에 곧 더러워질 텐데요." 

위선자들이 모인 교회보다는 더러운 죄인들이 모인 교회가 나을 것입니다. 묘하게도,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위선 을 통렬하게 공격하시면서도, 죄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세리와 창기들에게는 별로 정죄하신 대목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 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야유를 들었던 것입니다.(눅5:30 ) 

왜 주님은 그들을 정죄하지 않으셨을까요? 아마 이런 이유는 아닐까요? 
세리와 창기는 굳이 주님이 말씀하시지 않더라도 자신이 더럽고, 나쁜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반면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이 죄인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그러한 깨우침을 받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죄인을 하나의 병자로 볼 것이냐, 악인으로 볼 것이냐, 하는 것은 신앙관의 문제입니다. 
병자로 본다면 그는 치유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또한, 악인으로 본다면 그는 정죄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바리새인,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죄인을 정죄의 대상으로 보았다면, 주님은 그들을 치유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질문을 받으셨을 때,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 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하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눅5:30-32)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죄인에 대한 주님의 시각을 회복해야 합니다. 죄인을 사랑하고 용납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들을 도울 수도 새롭게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드러난 죄를 가지고 있는 죄인보다 드러나지 않은 죄를 가진 채 드러난 죄인을 정죄하는 우리가 주님의 더 무서운 심판을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느 심령이 맑고 예민하며 주님과 깊이 교통하는 여집사님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어느 날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불구의 몸으로 구걸을 하고 있는 거지를 보았습니다. 그녀는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저 사람은 너무나 불쌍하군요. 왜 저 사람은 저렇게 고통을 받아야 할까요." 
주님은 그녀에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많이 비참한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은 어느 정도의 고통의 기간이 끝나면 그의 고통은 회복될 것이다. 그러나 가장 비참하고 불쌍한 사람들은 교회 안 에 있다. 그들은 나와 상관이 없으면서도 자기들이 가장 잘 믿는 줄로 알고 있다. 그들이 진정으로 가장 불쌍한 자들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두려운 심판이 임하지 않도록, 기도하고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신앙의 옷을 입고, 종교의 울타리 속 에 있다 하더라도, 주님의 자비로운 시선,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진정 우리의 신앙이 실제적인 것인지, 새삼 돌이 켜 봐야 하는 것입니다. 

(정원 목사 / 영성의 글 모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