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과 영성   

경건(piety)과 영성(spirituality)은 어떻게 다를까. 근래 경건이란 말보다 영성이란 말을 더 즐겨 쓰고 있 는 것 같다. 한국교회에서&nbsp1980년대 이전에는 '경건해야 된다', '경건하게 살자' 등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이 상, 혹은 고상한 신앙의 경지를 지칭하는 단어는 경건이었다. 그 시절 경건한 목사, 경건한 성도는 말씀 중심적이고 기도 많이 하 며 점잖고 흠 잡을 데 없는 이였다.

그런데 지난&nbsp20여년간 경건은 어느 덧 영성에다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히스베르트 푸치우스 (1589∼1676)가 영성으로 번역할 수밖에 없는&nbspGottseligke란 단어를 사용한 적이 있긴 하지만, 종교개 혁자들과 그 후예들은 영성이란 말을 거의 쓰지 않고 성경의 용어인 경건이란 말을 썼다. 그런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들 은 중세의 행위구원적 영성신학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세 당시 영성은 구원을 위한 인간의 추구와 행위 노력을 함의한 낱말이 었다.

하지만 개혁자들은 구원을 위한 인간적 추구와 노력으로서의 영성을 부인하고 구원받은 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이 기 뻐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의 모습을 경건이라고 했다. 경건에 대한 강조점이 서로 약간 다르기는 했지만 영미권의 청교도주의 자들과 독일권의 경건주의자들도 중세적 영성이란 용어를 쓰지 않고 대신 경건을 사용했다.

20세기 후반에 와서 프란시스 쉐퍼 목사가 영성이란 말을 썼고 근자 한국 교회에서 부쩍 영성이 회자되고 있다. 그것은 세속 적 삶을 저버리고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자는 취지에서 대두됐다. 구원관 내지 신앙관은 개혁적이지만 실생활에서 성결함과 성령의 능력 이 발휘되기를 바라는데서 중세적 방법을 얼만큼 참조하려는 것인 듯하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경건이란 말과 영성이란 말에 같은 뜻 을 부여하면서 바꿔 쓴다고 볼 수 있다. 하긴 말이란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쓰면 또 그런 말이 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