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올의 뱃속   

운전을 하는 사람이라면 ‘진입금지’를 의미하는 표지판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표지판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던 초보 운전이었을 때, 나는 경황없이 들어선 길에서 마주 오던 차들이 유난히 나를 노려보며 경적을 울리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얼마간 진행을 하다가 마침내 주차단속을 하던 경찰이 나를 세웠다.

‘일방통행로입니다. 면허증을 좀 보여주시지요.’ 나는 그제서야 내가 얼마나 위험한 행동을 했었는지 깨달을 수가 있었다. 범 칙금 고지서를 발부 받았으나 나는 오히려 미안해하고 또 감사하면서 즉시 유턴을 하여 제 길로 바로 가게 되었다.

선지자 중에서 하나님의 순리와 명령을 거역하고 나의 경우처럼 역주행 하던 선지자가 있으니 아시다시피 바로 ‘요나’이다. 니 느웨로 가라시던 명을 거스려 다시스로 향하던 요나는 경찰의 제지(대풍’大風’)를 받아 ‘스올(음부, 무덤)의 뱃속’으로 불리는 물 고기의 뱃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 물고기를 생각하면 어릴 때 주일학교에서 한 선생님께서 보여주시던 그림 속의 장면이 떠오른다.

그 그림은 고기 뱃속을 자그마한 다락방의 이미지로 형상화 한 다음, 호롱불 아래에서 성경책을 펴 놓고 기도하는 요나의 모습이었다.

어두운 고기 뱃속에서도 성경책을 볼 수 있도록 해 준 선생님의 배려가 참 세심하다고 느껴졌다. 그렇지만 성인이 된 내가 다 시 한 번 요나의 상황을 재현해 볼라치면 그 그림은 동화 수준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아마도 고기의 뱃속 상황은 그리 호락하지는 않 았으리라 생각한다. 위(胃)의 연동운동으로 인한 물리적인 압력, 지속적으로 내뿜는 강산성 위액, 뜨거운 내부 온도, 밀려오는 온 갖 해조류며 작은 고깃덩이까지… 그가 느꼈을 고통의 깊이란 것은 당해보지 않은 내가 상상하기에 너무 가혹하고, 어쩌면 죽음의 위기 감을 바람 앞의 등불처럼 직접 체험한 심각한 것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때 요나의 처신이다. 그 와중에 하나님 앞에 무릎으로 기도한 요나에게 박수를 보낸다.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2:2)’ 절망적 고통 앞에서 요나는 하나님을 만난 것이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기 위해 아주 특별한 곳을 택하시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세상 사람들이 만날 때 즐겨 찾는 화려하 고 아늑한 곳이 아닌, ‘스올’과 같은 절망적인 곳, 상처와 고통의 깊이를 절감할 수 있는 어두운 곳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 길 원하신다.

수렁에 빠졌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그 고통을 진솔하게 받아들이고, 고통 속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체험 해 보라. 그리고 그 길에서 돌아서라. 시인하고, 고백하고, 순종하는 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가장 현명한 선택이 여러분 앞에 기 다리고 있다. 

기도할 수 있는 한 절대로 완전히 절망에 빠진 사람은 없다.

“하나님을 깊이 느끼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그는 차라리 자신의 고통의 깊이를 먼저 느껴보라.”고 역설한 유진 피터슨의 말이 오늘따라 귀에 쟁쟁하게 들린다. 

정연철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