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이 병들 때 &  어릴적 대인관계 경험과 신앙형성

▲ 황헌영 교수. 

1960년대, 미국 켄터키주 한 정신병동에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자처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믿으라고 아주 시끄럽게 소 리 지르는 한 환자가 있었다. 이 환자의 상태를 감당할 수 없었던 병원 당국자들은 마침내 그 병원내에 시무하고 있던 원목을 불 러 환자를 만나게 하였다. 원목이 그 병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 그 환자는 두 눈 부위를 커다란 붕대로 감고 있었다. 간호사들 은 이 환자가 자신의 두 눈을 스스로 상하게 하여 입원을 하게 되었음을 알려 주었다. 원목은 환자와 이야기를 하는 중에 그 환자 가 자신의 눈을 상하게 한 것은 '너의 눈이 범죄하거든 뽑아내 버리라'라는 성서의 명령에 따라 문자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라는 사실 을 알게 되었다. (W.Oates,&nbspWhen&nbspreligion&nbspgets&nbspsick,&nbspWesterminster&nbspPress)

이 사례는 우리가 귀중히 여기는 '믿음 혹은 신앙'도 잘못되어 병들 수 있으며, 병든 신앙은 급기야 인간 삶에 파괴적 영향 을 끼칠 수 있다는 경고를 준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게 하며 마침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풍성한 삶을 영 위케 하는 귀중한 자원이다. 그런데 이 믿음이 잘못되어 병들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도대체 이런 일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그 리고 이러한 병든 신앙의 위험에 가장 유약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구하기 전에, 우리는 '믿음'에 대하여 갖고 있는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을 살펴볼 필요 가 있다. 이는 '믿음'이란 말속에 담겨 있는 우리의 일차적 마음의 관심을 통해 드러난다. 흔히 '너는 믿음을 가져야 해, 믿음생 활을 해봐', '믿음을 지켜야지', '아무개는 믿음이 너무 없어'라는 말들을 쉽게 한다. 이러한 말들은 사실, 믿음의 '질 (quality)'보다는 '양(quanity)'에 관하여 우리가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즉, 우리가 어떤이의 믿 음에 대하여 얘기할 때, 그 믿음이 어떠한 내용과 방향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 믿음의 성격과 참모습(질)이 어떠한 것인가 를 살피기보다는 단지 믿음의 '있고 없음'을 확인하려 들거나 믿음의 정도(양)를 중요시 하는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을 보여준다.

양적인 믿음을 중요시하는 한 신자가 있었다. 어느 학교의 기숙사는 매일 새벽예배를 드리는데, 아침 잠이 많은 젊은 학생들에 게 매일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여러 학생들 중에 하나님께 '1천번제'를 약속하여 그 숫자 를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며 매일 빠지지 않고 앞자리를 지키며 헌금을 드리는 한 여학생이 있었다. 모두 그 여학생의 신앙에 감탄 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기숙사 내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다가 사감에게 들켜 지적을 받게 된 학생이 있었는 데, 바로 그 일천번제의 주인공 여학생이었다. 물론, 담배를 피우고 안 피우고를 따지면서 개인의 신앙생활 전부를 판단할 수는 없 다. 하지만, 하나님께 '1천번의 새벽제사'를 약속하여 실행하며 남들보다 더욱 경건한 모습을 강조하던 학생이 이러한 지적을 받았다 는 것은 보통 충격의 문제가 아니었다. 상담자는 금연의 문제보다는 그 학생이 드리는 '일천번제'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 를 나누었다. 그 결과, 그 학생의 일천번제는 신령과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예배가 아닌 자신의 내면세계 불편을 이기지 못한데서 오 는 긴장감을 해소하기 위한 강박증적 행위였음이 밝혀졌다. 이 학생은 예배의 본질보다는&nbsp1천번으로 정해진 행위를 통 해 그것을 강행함으로써 불편한 심기를 대리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우리 신앙에 있어 양적인 요소에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된다. 양적인 면은 우리 신앙의 열정을 대변해 주고 연단을 주 는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이 학생처럼 예배의 진정한 의미를 상실한 채, 다른 의도를 가진 반복적 신앙행위는 본질적인 면을 소 홀하게 하고 신앙의 방향마저 잘못 설정하여 결국엔 그 신앙이 건강치 못한 모습으로 치닫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면, 잘못된 신앙(병든 신앙)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 드로의 고백처럼 믿음의 핵심이 되는 내용은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의 공통된 고백이요 결단이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의 고백을 담 고 있는 우리들의 '마음의 그릇'은 그 모양에 있어 제각기 다를 수 있다. 인간의 외향이 천차만별 다르듯이 우리의 성격도 다르 며 그 성격을 형성시킨 인간의 경험 역시 각기 다른 것이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한 선물을 담는데 완벽하고 아름다운 그릇 을 소유한 사람은 별로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중에 어떤 이들은 삶의 상처가 너 무 깊어 그 은혜마저도 거부하거나 포기하고 마는, 그런 마음의 소유자들이 있다. 바로 마음의 그릇이 심하게 훼손되었거나 이상한 모 양으로 변형된 경우이다. 이런 불행한 경우에는 하나님의 복음을 접하게 되더라도 구부러진 그릇안에 그것을 담는 까닭에 왜곡되고 뒤틀 린 모습으로 변형될 소지가 생긴다. 

이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의 마음이 훼손될 가능성은 너무나 크다. 여러 요인을 들어 우리의 마음의 모습이 하나님 이 원하시는 바대로 형성되지 못하게 되는 이유를 설명(유전적, 기질적, 심리적, 사회문화적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수 있겠지 만, 인간 신앙의 발달을 연구하는 종교심리학자들은 정신분석학(대상관계이론)에 입각한 설명을 중시한다. 즉, 우리가 어릴적부터 쌓 아 온 경험들이 우리의 삶과 신앙에 미치는 영향을 찾는 것이다. 우리가 어릴적 유아로서 돌봄을 필요로 하던 그 때에, 우리에게 ' 중요한 타자'로서 다가와 우리의 마음속에 대인관계 형상의 기초를 심어준 사람들이 있다. 이들과의 만남은 우리 마음의 구조형성에 가 장 큰 영향을 준다고 본다. 위에서 언급한 여학생의 경우에도, 신앙을 담을 그 마음의 그릇을 삐뚤어지게 한 것은 다름아닌 그녀 의 어릴적 원가족 경험이었다. 그녀의 가족은 '신앙'을 중시하는 가족이었지만, 하나님을 따뜻하고 온화한 사랑의 아버지로 소개하 지 못하였다. 그 가족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모든 가족 구성원들의 행동을 일거수 일투족 엄격하게 규제하는 규율이었고 통제의 수단이었 다. 그 결과, 가정내에서 아주 작은 잘못도 용납될 수 없었으며 이와같은 지나친 엄격성은 그녀로 하여금 어릴적부터 죄책감과 죄책 감 해소를 위한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하였던 것이다. 

신앙인이라고 해서 그리고 신앙생활을 중요시하는 가정이라고 해서 모두 정신적으로 잘못되지 않는 완벽한 면역성을 가지는 것 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우리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가 많으며, 우리는 누구나 우리가 기대하거나 의도하는 바대로 일 들이 처리되지 않을 때 실존적으로 부딪히는 문제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우리의 심리상태는 이런 어려움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 갈 필요가 있으나, 대부분의 우리는 우리의 정서를 다스릴 교육이나 훈련을 재대로 받은 적이 없다. 우리가 받는 스트레스는 우리 자 신은 물론 가정내 타인에게도 영향을 주는 방법으로 이동한다. 정신분석학적 대상관계론자들에 의하면 어린 유아가 이렇게 정서적으로 불 편함을 느끼고 있는 부모를 통해 겪게되는 생애 첫 대인관계 경험들은 유아의 마음속으로 내면화 되어 아픈 상처의 그림자를 심게 하 며 이는 마침내 한 인격이 현실적 삶을 영위하는데 커다란 방해요소로 자리잡는다고 한다.

평범한 인간은 누구나 신체적으로 성숙하게 되어 결혼 적령기에 이르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양육하지만, 신체적 성숙이 정 신적 성숙도와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아직도 '정신적 어른'의 기능을 수행할 준비를 하지 못한채 가정을 이루 고 어린이의 양육을 맡게 된다. 즉, 내면세계에 아직도 성숙하지 못한 자아, 즉 '내면적 아이 '(the&nbspinner&nbspchild) 혹은 '성인아이'라고 불리우는 실체가 도사리고 있음을 모르는 채 단 지 성인이라는 겉모습(거짓자아)으로 이러한 중차대한 책임을 맡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아이가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과 같 다. 성인아이는 바로 자신의 원가족 경험으로부터 해결되지 못한 상처를 간직하고 있으며 그 상처는 자신이 시작한(결혼하여 이 룬) 새 가정 안으로 어떠한 모습으로든 방출되어 이동한다. 이러한 배경 안으로 새로 태어난 유아는, 가족 구성원들 중에 가장 유약 한 존재로서 그것을 불가피하게 받아들여 마음속 깊숙이 내면화시키는 것이다. 가계에 흐르는 상처는 이처럼 대를 이어 유전되며, 이 를 전수받은 유아는 구부러진 마음의 형상을 키우며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유아기의 이러한 경험들 중에 가장 중요한 사건은 '자기에 대한 느낌'에 대한 부정적 영향이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 터 자기를 수용해 주고 인정해 줄 대상을 찾아 자신에 대한 좋은 느낌을 받길 원한다. 유아의 경우 이를 충족해 줄 대상은 바로 양 친, 특별히 엄마이다. 아직 이 세상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존재이지만, 유아는 엄마가 자신을 은은한 눈빛으로 보아주며 자신 의 몸짓이나 흥얼거림을 아무 조건없이 수용해 줄 때, 엄마의 얼굴을 통해 자신에 대한 좋은 느낌을 받는다. 바로 엄마의 얼굴은 어 린 유아의 자화상을 반영해 주는 거울과도 같은 것이다. 아이는 엄마의 미소를 바라보며 자신의 가치를 심게 되고 이러한 엄마의 미소 를 바탕으로 정신적 산소(에너지)를 공급받아 자긍심을 키우며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어린 유아가 엄마의 이런 은 은한 사랑의 얼굴을 계속해서 경험하지 못하게 되거나 혹은 자신을 대하는 엄마의 얼굴이 사랑이 아닌 짜증의 모습으로 비춰진다면 아이 는 결코 좋은 자화상, 즉 자신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그릴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 경험된 자신에 대한 좋지 않은 느낌은 자신 뿐 아니라 타인, 그리고 세상에 대하여도 좋지 않은 느낌을 갖게 하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누구와도 신뢰의 관계를 형성하기 어 려워지는 것이다. 

더더욱 불행한 일은, 점차 아이가 자라나면서 이러한 '언짢은 부모'들을 상대하는 과정중에 자신의 얼굴을 그 부모의 감성 에 맞추는 역작용을 하는 것이다. 즉, 부모가 자기의 심성을 만족시켜주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린 자신이 부모의 심 성을 만족시키는 버거운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이는 성장의 필요에 직면한 유아에게 있어서 '성인아이'인 부모의 필요를 먼저 채우 게 하는 힘겨운 부담일 수 밖에 없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가장 쉬운 예는, 가정내 어른 들의 불편한 정서적 상태속에서 살아남 기 위해 아이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어른들의 보호자/카운슬러의 역할을 하는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교심리학자들은 어린 유아들의 이러한 잘못된 부모관계 경험으로 빚어진 잘못된 부모형상 내면화가 결국엔 하나님의 이미지 형성 에 있어서도 같은 불행한 영향을 받는다고 본다. 즉, 엄격하고 꾸중을 일삼는 계율적인 부모 밑에서 성장한 사람은 따뜻하고 인자 한 하나님의 모습을 인정하기 힘들다. 늘 일관성이 없으며 신뢰할 수 없는 부모에게서 자란 사람은 자신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 의 존재와 능력에 대하여 신뢰를 하기 힘들다. 물론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개입하셔서 특별한 방법으로 역사하시지만, 적 어도 그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좋은 이미지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마음이 굳어져 있거나 그 마음의 그릇이 이미 너무 구부러져 있는 것 이다.

신앙을 강조하면서도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 이러한 감성적 상처를 안겨주는 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경우 종교행위는 결 국 반항/거부의 대상이 되거나 아니면 강박적 행위의 모습으로 수용되어진다. 전자의 경우, 우리가 흔히 보듯이, 성인이 되어서 자신 의 어릴적 종교를 부인하는 청장년들의 모습에서 발견된다. 후자의 경우에는 반대로, '나쁜 부모'의 '나쁜 종교' 안으로 자신의 감 정을 숨긴 채 수용하는 경우인데 이는 참자기를 숨기고 거짓자기로 병적 신앙을 키우는 종교인의 모습이다. 이들은 부모와의 관계 를 (현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부모의 종교를 싫으면서도 좋은 듯이 (양가적 감정) 유지하고 반복하는 강박적 신앙인이 된 다. 즉, 구부러진 마음의 그릇속에 왜곡된 신앙을 담아가는 안타까운 종교인의 모습이 바로 그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구부러진 마음을 위해 치유의 은혜을 허락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부터 우리 가 걸어가는 구원의 길이 바로 이 치유의 과정이 되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아직도 그 '달려 갈 길'을 가 고 있을 뿐이다.&nbsp12세기의 성자 베르나르는 이러한 치유과정을 '삐뚤어진 자기사랑'과 '하나님 사랑'의 관계성에 서 찾아 다음&nbsp4가지 단계로 설명한다. 이 단계를 보고 각자 '과연 나의 마음의 그릇은 어느 위치에 있을까?' 진단 해 보자. 

첫째 단계, 자기를 위해 자기를 사랑함. 
인간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자기를 사랑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이는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께서 주 신 삶의 보람과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올바르게 개발할 에너지가 필요하다. 자기사랑은 올바르게 사용되고 발전되 면 자신의 인격수련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 '자기사랑'이 미숙하고 원시적인 모습으로 고착되어 버릴경우 남을 배려하지 못하 고 자기만을 아는 자기애적 성격장애를 가져 온다. 

둘째 단계,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사랑함.
지금까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던 사람이 어느 날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에게 있어 신앙은 새로운 위 안처가 된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 나에게 이러 저러한 것들을 주시면, 나는 당신을 더욱 사랑하겠습니다'라는 식으로 기도한 다. 이 단계는 첫 단계보다는 많이 좋은 단계 같지만 실상은 아직도, '나를 위한다'는 전제 조건 아래 남도 존재하고 하나님도 존 재한다는 세계관(조건적 신앙)을 가지고 있다. 

셋째 단계: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만을 사랑함. 
흔히 사명을 받고 신학에 입문하여 성직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 유형이다. 많은 면에서 자기 희생적이고 아주 이상적 인 모습으로 보이나, 그들의 실제 내면세계에는 아직도 내적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유형이다. 일례로, 일생 목회를 위해 헌신하신 목 사님들의 경우 하나님만을 위해 살았다고 하지만 자신의 아픔을 돌볼 겨를이 없어 내적으로는 아물지 않은 상처뿐인 영광을 안고 있 는 모습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아직도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 고 있는 마음'이 내재한다.

넷째 단계: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사랑함.
베르나르가 말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단계. 이전의 모든 단계를 거쳐 이제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는 그의 형상으로 빚어진 자신을 사랑하는 단계이다. 즉, 진정한 치유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형상을 회복하여 그 형상으 로 인해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단계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이제는 자신 뿐 아니라 남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일하 는 가장 아름답고 보람된 삶을 이룬다. 마음의 모든 병적 요소는 더 이상 자신의 신앙을 흔들지 않으며 하나님의 사랑도 왜곡됨 없 이 받아들일 수 있기에 그의 신앙생활은 건강을 유지한다.

결론적으로, 우리 마음의 그릇을 이렇게 아름다운 형상으로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는 역 시 기도이다. 특별히, 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아픔까지 맛보시는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는 기도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픔 을 이미 체휼하시는 분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이러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러내놓고 기도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는 하소연 에 그쳐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많은 말을 늘어 놓기보다는 그 분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기도하여야 한다. 그렇 게 할 때,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체험되어질 수 있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수용할 용기를 갖고자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는 누구나 드러내놓고 자랑하고 싶은 부분과 남에 게 결코 보여주기 싫은 부끄러운 부분을 가지고 산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되 우리의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시 는 분이시다. 우리가 누구이기에 하나님께서 이미 용서해주시고 받아주신 부분들을 인정하지 않는가? 이런 마음은 우리의 위치를 하나님 보다 높이 올려 놓는 교만의 행위이다.

셋째, 이 모든 일들이 힘들다면 우리의 영적 지도자(mentor&nbspor&nbspcounselor)를 발 견하고 그 분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당신의 일을 위해 보내신 일꾼들이 있다. 우리가 그 분들의 영적인 리 더십을 인정하고 아픈 내면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이는 치유를 향한 중요한 첫 발걸음이 될 것이다. 물론, 영적 지도자들은 이러 한 거룩한 사역을 위해 많은 준비와 훈련이 필요하다. 잘못된 영적 지도자들을 만나면 오히려 병든 신앙을 더욱 가중시키는 경우가 있 기 때문이다. 특별히, 상처입은 치유자의 간절한 사랑의 기도와 안내는 그 치유하는 힘이 크다.

넷째, 전인적인 치유를 위해 노력하라.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전인적인 차원에서 관찰되어져야 한다. 즉, 우리 의 아픔은 육적, 정신적, 영적 영역의 모든 면에서 살펴져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영적 영역만을 강조하여 어떤 이의 정신질환 을 단순히 '귀신들림'으로 섣부른 진단을 내리고 정신의학적 도움을 거부한채 축사의 방법으로만 고치려 한다면 우리는 그를 위한 최상 의 치유의 기회를 포기하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 어느 곳에서도 영적인 방법만을 고집하시거나 신체적, 정신적 치료의 가능성 을 거부하지 않다. 우선 그 사람이 신체적으로 자신과 타인을 상하게 하고 있지 않나 살펴야 할 것이고, 의사를 통해 필요하다면 약 물치료를 받도록 권면하고, 더 나아가 그의 가정적 환경에서 비롯된 문제들을 포함한 보다 넓은 영역의 치료가 이루어지도록 도와야 한 다. 그리고 역시, 영혼의 의사라 불리우는 목회자의 간절한 기도와 사랑의 돌봄을 통해 궁극적인 치료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됨을 간과 해서도 안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기가 속한 믿음의 공동체와 그 자원을 활용하라고 당부하고 싶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치유하시는 역사는 공동체 의 나눔과 돌봄 속에서 역동적으로 역사한다. 마음의 형상을 구부러지게 했던 과거의 경험들은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새롭게 경험되어지 는 사랑의 관계를 통해서 회복되고 더욱 그 구조가 강해질 수 있다. 서로 아끼고 돌보아주는 믿음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도록 노력해 야 할 것이다.


황헌영 박사 / 한동대학교 교수,크리스천마음연구원 공동대표

미국 탈레톤 중부텍사스대학원, 남감리교대학교 신학대학원(목회상담)을 졸업한 후 시카고 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 정신분석가 인&nbspbob&nbspmoore교수의 지도 아래 자기심리학적 정신분석으로 박사학위를 마쳤다. 그 뒤 미국교회 인 멀덴 와이어넷 감리교회 담임과 일리노이주 공인 심리상담가, 미국 공인 상담가로서 활동하다 귀국하여 한동대학교 상담복지학과 교수 로 재직중이다. 현재는 기독교상담심리치료학회 심리치료 전문가이자 임상목회 슈퍼바이저이며 크리스천 마음연구원 공동대표로, 한국교회 의 신앙성장 프로그램 개발에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