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을 회복하라

이재순(김인중 목사 사모)

올 여름 나는 남편의 미국 이민교회 부흥집회에 동행했다. "사모님 미국 구경 많이 하셨죠?", "사모님처럼 가끔 해외 여행 도 하고 살았으면 좋겠어요."라고 교인들은 말한다. 정말 미국 이민 교회 구경은 많이 했다.&nbsp5주 동안 여섯 교회에 서 똑같은 내용의 설교를 들으면서도 잘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각 교회의 사정과 형편이 때로는 충격으로, 때로는 안타까움으로, 때로 는 감사함으로 다가 왔기 때문이었다. 

가는 곳마다 그 지역의 명소도 보여주고, 좋은 음식으로 대접도 해 주었다. 그러나 개교회의 형편을 듣고, 집회에 은혜를 끼 쳐야 하는 남편으로서는 나만큼 신기해하거나 감격해 하지 않았다. 집회 전에는 밥맛도 없어했고, 집회 끝난 주일 밤이 지난 월요일에 나 남편은 회복되었다. 같은 설교를 매번 하는데도 그 교회의 상황마다 다른 사정들이 시간시간 성령님을 사모하게 한다고 남편은 말했 다. 긴장하는 남편 옆에서 난들 편하겠는가? 

"같이 밥 먹고 사는 데 당신만 그렇게 편안히 잠만 잘 수 있느냐?"고 남편은 나에게 핀잔 아닌 핀잔을 준다. "대한민국 에 물건이 없어서 여기서 그런 것을 사려느냐? 공항의 세관원들이 보면 목사가 창피하지 않느냐? 어떤 목사님은 해외에 다녀 올 때마 다 짐이 칫솔밖에 없어서 공항 직원들이 놀랬다더라" 하면서 핍박(?)을 한다. 

남편은 "집을 떠나면 다 맡겨야지 왜 자꾸 교회와 집에 전화를 하려느냐?"고 말하고 "나는 전화도 마음대로 못하게 하면 집 에 가버린다"고 남편에게 공갈(?)을 쳤다. 집회에 대한 부담감이 우리 마음에서 여유를 빼앗아 버린 듯했다. 

그런 중에도 무엇보다 유익했던 것은 그 이민교회들을 보면서 우리 목회를 다시 한번 돌이키게 했다는 것이다. '나는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 나도 조심해야지!'를 되풀이했다. 

공항의 마중에서부터 식사 대접, 숙소 안내 등 모든 것을 목회자 중심으로 하는 교회, 장로님이 주도적으로 하고 심지어 집 회 때 예배사회까지 장로님들이 하는 교회,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적당히 나누어서 하는 교회, 사모님들이 뒤에서 웃으며 인사만 하 는 교회, 좀더 활발하게 참여하는 교회, 부흥집회 강사가 교인들과 인사하는 것도 부담 느끼는 교회 등등, 여러 유형들을 경험하였 다. 

가장 크게 나를 당황케 한 것은 교회마다 강사로 온 목사 내외를 환대한다는 점이었다. 목회자나 장로님, 특히 장로님들의 적 극적인 관심이 나를 놀라게 했다. 평일인데도 공항에 여러분들이 마중 나오는 모습들, 식사 때마다 시간을 내서 접대하는 정성 들…. 저들이 얼마나 바쁜 생활을 한다는 것을 들어서 안 나로서는 그들의 접대가 황송할 지경이었다. 

무슨 일이든지 간편하고 실용적인 것을 원하는 남편은 한 달간이나 해외에 나가는데도 기사 외에는 공항에 배웅 나오는 것을 원 치 않는다. 어쩌다 비행기 시간을 묻는 교인이 있으면 잘 모른다고 대답하라고 한다. 그런 습관 속에 살다보니 '자연히 손님대접 도 소홀히 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목사가 교회 크다고 강사를 가볍게 대접한다'고 섭섭해하지는 않았을까 염려되기 도 했다. 이제부터라도 좀더 정성껏 접대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또한 나는 한 영혼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교민 수는 제한되어 있는데 교회와 교 역자가 많으므로 대부분이 작은 교회였다. 한 교인이 문제가 생겨 교회에 안나온다는 말을 듣고, 한숨도 못 자고 고민하는 목회자 를 보면서 한 교인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개척교회 시절, 한 사람의 전도를 위해 그렇게 애썼건만, 지금은 누가 안나와도 이사를 가도 모르는 지경이 되었으니…. 그때 의 '영혼 사랑'이 열심히 교인 수를 늘리는 데 있었단 말인가? 전도에 열심인 권사님이 '빨리 부흥되어야 교회 짓지요'해서 나 를 실망시켰던 일이 있었다.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삯군은 되지 않겠다고, 그렇게도 결심했건만&nbsp20년 목회 속에 서 교인을 숫자로만 세는 데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큰 교회 목사는 다 가짜'라고 외치는 어떤 목사님의 말씀이 다 사실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여야 하지 않는가! 

또한 이민 교회를 달리 보게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열심히 사모하는 성도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하루 종일 직장에서 일하 고, 저녁 집회에 한 시간씩 차를 타고 오는 분을 볼 때 마음이 뜨거워 졌다. 땅이 넓은 나라라서 그런지 한 두 시간 차 타는 것 을 보통으로 여기는 듯 했다.&nbsp30분만 차 타면 충분히 올 수 있는 거리인데도 교회가 멀다고 엄살을 부리는 교인 들 때문에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교인들은 거리가 문제가 아니라 훈련되기 나름인 것이다. 한 젊은 부부가 거 의 두 시간 걸리는 지역에서 집회를 참석하고, 마지막 날에는 밤&nbsp10시에 직장으로 돌아가 밤새도록 병원 청소를 하 고 다시 한 숨도 못 자고 새벽기도에 와서 기도 제목을 내놓았을 때 저들 부부를 축복해 달라고 간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목회자로서 이민교회를 섬기는 것은 한국에서 목회 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어려운 듯 했다. 내 나라에서 아름다운 모국어 로 설교하고 기도하며, 순수한 교인들과 목회한다는 것이 큰 축복이라고 새삼 느끼게 되었다. 교회의 분열이 많고, 목회자와 교인 간 에 불신이 심한 것이 이민교회의 실정이었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우리 조카는 이민교회의 분열 상에 실망을 느껴 차라리 미국교회에 나 간다고 했다. 미국인들의 개인주의가 얼마나 우리와 다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도 그래도 미국교회를 택했다고 한 다.&nbsp3년만에 자기 집에 찾아온 동생과 함께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서, 각자 돈을 내는 형에게 '너를 찾아 왔는데 그 럴 수 있느냐'고 했더니 '저 애도 직장이 있다'고 해서 외계인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그 미국인들인데도 그래도 미국교회가 낫다 고 했다. 어떤 목사님이 '이민교회 교인들은 다 정신병자로 봐야한다'고 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얼마나 어려우시면 그랬으랴'는 생 각에 마음이 아팠다. 목회자나 교인들이 '인정 욕구'와 '섭섭 마귀'가 얼마나 많은지 감당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분열하므로 성 장한다'는 자조적인 말을 들을 때 우리 민족의 민족성에 대해서 절망하기도 했다. 

이제는 자라나는 이민&nbsp1.5세&nbsp2세에게 희망을 걸고 있었다. "저 자녀들은 바나나 같다"고 했 다. 겉은 노란데 까보면 하얗다는 것이다. 사고 방식이 부모와 전혀 다른 서양 사람인 저들의 교육을 어떻게 성공하느냐가 미래 한 국 이민교회의 숙제였다. 장년 신자의 부속물처럼 여겼던 우리 주일 학교 꿈나무들에게&nbsp20년만 투자하면 우리 교회 와 민족의 기둥들이 될 것이 아닌가. 어려울수록 정도를 가라며 신생아 때부터, 아니 태교부터 교인 교육을 다시 하라던 목회 상담 학 교수의 말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번 여름은 우리 부부 목회에 '첫 사랑을 회복하라'고 주님이 주신 참으로 유익한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