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있는 훈련> 

광야의 학교는 외로움의 학교이다. 깊이 있는 영성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이 외로움이라는 학교에 입학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과정에서 통과해야 할 수업이 있다면 외로움이다. 

하나님은 외로움을 통해서 우리를 성숙시키신다. 
광야는 황량한 곳이다. 사람이 없다. 다만 홀로 있어야 한다. 
거기서 하나님은 자기 사람들을 준비시키신다. 깊이 있는 사람은 홀로 있음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토저는 "이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들은 대부분 외로웠다. 외로움이란 성도가 자신의 성스러움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 인 것 같다." 고 말했다. 모세도, 세례 요한도, 예수님도 그리고 바울도 외로웠다. 왜 하나님은 성도에게 외로움을 통과하게 하시 는가? 왜 홀로 있게 하시는가? 홀로 있을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던 장소는 화려한 궁중이 아니 었다. 오히려 외로운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홀로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자신을 돌아볼수 있다. 자신을 성찬 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자신을 성찰 할 수 있는 것은 영혼을 가진 인간만이 할 수 있다. 자신의 성찰을 포기한 사람은 인간됨을 포기한 것이다. 홀로 있는 시간에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보여 주심으로, 우리 자신을 깊이 성찰하게 하신다. 

헨린 나우웬은 외로움과 고독을 구분했다. 단순히 홀로 있음과 고독을 구분했다. 외로움은 '광야'로, 고독을 '동산'으로 묘사한다. 외로움이라는 광야를 아름다운 꽃이 피고 풍성한 열매 
를 맺는 동산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고독으로 보았다. 

고독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다. 고독은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다. 고독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외로움은 고통스러 운 것이다. 그러나 고독은 하나님과의 깊은 친교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나우웬은 "외로움으로부터 곡으로 가는 움직임이 모든 영적 인 삶의 시작이다"라고 말했다. 하나님 앞에서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고독은 축복이다. 고독은 하나님의 은혜의 시간이다. 홀로 있음을 두려워 말라. 토저는 "큰 독수리는 홀로 날아간다. 큰 사자는 홀로 사냥한다. 위대한 사람들은 홀로 간다"고 말했다. 하나 
님은 하나님과 함께 가며 홀로 있음을 즐거워하는 사람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백성들과 함께 있게 하시기 전 광야에서 홀로 있게 하셨다. 홀로 있음이 목표가 아니다. 함께 있 게 하기 위해 홀로 있게 하신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홀로 있지 못하는 사람은 공동생활을 조심하도록 하라. 공동 생활 속에 있 지 않은 사람은 홀로 있기를 조심하도록 하라." 고 말한다. 

또한 그는 "홀로 있지 못하는 사람과의 친교는 공허한 말과 감정에 빠지게 되고, 친교 없는 홀로 있기를 추구하는 사람은 공허한 깊은 구렁과 자기 도취와 절망에 빠진다." 라고 말했다.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 모세와 같은 광야는 없다. 광야는 단순히 특정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다. 홀로 있을 수 밖에 없는 고난의 현주소요, 내적 상태일 수 있다. 하나님은 바로 그 곳에서 우리를 만나시기를 원하신다. 함께 있기 위해 
홀로 있고, 홀로 있기 위해 함께 있어야 한다. 

-강준민의 '뿌리깊은 영성'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