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라 


예배갱신  
 
초대교회는 말씀(word, 기사와 이적(works), 예배(worship) 등 3요소가 균형잡힌 공동체였다  
예배 갱신에 대한 이야기가 굉장히 많이 우리 주위에서 나돌고 있고 많은 목회자들이 심각하게 예배 갱신에 대해서 논의하고 토의를 하고 그런 토의가 진행될 때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좋은 예배가 좋은 예배자를 만들어내느냐 아니면 좋은 예배자가 좋은 예배를 만들어내느냐.’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질문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우리가 밤새도록 토의를 하고 논의를 해도 결정이 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만약 예배 갱신이 우리의 과제라고 하면 좋은 예배자들이 좋은 예배를 만들어내면 좋은 예배자를 키워 내야할 것이고, 좋은 예배를 준비해야 좋은 예배자들이 나타난다고 하면 우리는 좋은 예배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예배갱신에 있어서 책임은 예배인도자인 목회자에게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것이 찬양인도자이든, 설교자이든, 아니면 예배를 사회하는 목사이든 상관없이 예배는 예배 인도자의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 그래서 예배가 살 수 있느냐 아니면 형식적인 예배에 치우치느냐는 것은 순전히 예배 인도자에게 달려 있다. 물론 우리가 예배를 인도하다보면 짜증이 날 정도로 교인들이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로 올 때가 많다. 하지만 그렇게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깊은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인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예배갱신의 중요한 고민 중의 하나라고 본다.  

예배 갱신의 3가지 요소  
사도행전 2장 42절에서 47절에 보면 초대교회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것을 다른 여러 가지 각도에서 볼 수 있지만 예배적인 차원에서 볼 때 그 가운데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나타난다.  
첫째는,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사람들의 마음이 찔려 돌아오는 그런 광경이 우리에게 소개되고 있다.  
그 다음에 사도행전의 예배를 보면 꼭 기사와 이적이 따랐다. 그것을 신약적인 차원에서 어떻게 우리가 볼 것이냐 하는 것은 각자의 해석에 달려있지만 그러나 확실한 증거들이 나타났다. 그 다음에 이어서 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쉽게 대하지 못하는 예배의 장면들이 나온다. 2장과 3장과 4장에서 보면 기뻐 뛰며 찬송하는 모습들이 나타난다. 굉장히 흥분된 상태에서 어떤 면에서는 흥분의 도가니로 들어가서 앉은뱅이의 사건에서 보면 앉은뱅이가 나으니까 정신없이 뛰다가 나중에는 어쩔 수 없는 감격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 내용들을 전반적으로 우리가 살펴볼 때, 일반적으로 초대교회 예배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선포가 있었고, 그 다음에 그 말씀에 따라서 현저한 기사와 표적들이 따랐다. 그리고 그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과 표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누가 와서 특별한 자극을 준 것도 아니고 어떤 특정한 사람들의 인도를 받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감격스러운 찬송과 예배가 터졌다. 예배가 터지는 삶이다.  
예배갱신이라고 할 때 여러 가지 차원과 여러 가지 각도에서 조명할 수 있지만 많은 이들에게 주고 싶은 도전은, 진정한 예배갱신은 이 세 가지 요소를 다시 되찾는데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세 가지 요소는 조금 회복되고 있는 것 같다. 우선, 말씀에 대한 것은 루터와 칼빈을 통해서 말씀의 권능과 중요성이 회복되었다. 그리고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일어난 오순절 교회의 움직임과 60년대에 일어난 성령운동을 통해서 많은 이적과 기사가 뒤따랐다. 이 두 가지가 합쳐지면서 교인들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60년대에 이르러 탄생된 CCM을 통해 예배의 감격을 맛보게 된다. 이것을 하나의 유행처럼 받아들인다면 무의미한 것이 되겠지만 하나의 유행이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의 무브먼트가 아닌가 생각한다.  
내 자신에게도 지금까지 신앙생활 해 오면서 가장 영향을 미쳤던 훈련 중의 하나는 예배였다. 예배는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내가 이해하고 있는 나름대로의 예배의 이해와 목회철학은 지금 필자가 담인하고 있는 교회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목회자, 예배 인도자이기 전에 예배자  
예배갱신을 위해 제일 먼저 예배인도자인 우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예배인도자이기 앞서 예배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야한다. 우리가 설교를 준비하고 찬송가를 준비하는데 정말 내가 예배자로서 하나님 앞에 나가고 있는가? 내가 일주일 동안 그렇게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서 살았는가? 정말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서 그분의 임재 가운데 교통하는 삶을 살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그렇게 살지도 않았는데, 그런 체험이 없는데 어떻게 갑자기 주일날 강대상 앞에 선다고 교인들을 그와 같은 삶으로 인도할 수 있겠는가?  
제일 먼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먼저 경험되어져야 한다. 일주일 동안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살아갈 때, 성령님의 음성도 듣고 감동도 있을 때 찬양을 부르면서도 은혜가 쏟아진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된다.  

부유하지는 않지만 넉넉한 가정에서 자란 내게 부족함이란 없었다. 그런 내가 염세주의에 빠져들면서 방황하기 시작했다. 고2학년 때 미국으로 건너가 자연스레 히피가 되었고 술과 마약에 빠져 살았다. 그렇게 살던 내게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에 일어났던 Jesus Movement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히피들이 변화되어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을 받아줄 교회가 없었다. 그러던 중 척 스미스 목사님이 그들을 받아들였고 그들에게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그들의 예배는 정말 뜨거웠다.  

감동이 있었다. 그들이 뜨겁게 예배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기 시작하는데, 그들의 고백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고백이었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문란하게 살던 아이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예배라고 생각했다. 예배가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이라면 이것이 예배라고 생각하며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예배할 때마나 나도 저렇게 예배하고 싶다고 기도했다. “하나님, 예배할 때마다 제 눈에서 눈물이 그치면 저는 못 삽니다.”  
예배와 눈물과는 상관이 없을지 모른다. 이것은 개인적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눈물 없는 예배는 드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평생 하나님을 예배를 통해서 찾는 그런 갈증이 끊어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은 26년 동안 끊어지지 않았다.  

나는 교인들 앞에서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열심히 예배드리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예배하지 않으면 내 스스로가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주일날 하나님을 만나는 그 사건이 새롭게 나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 다음 일주일 동안 목회를 할 수가 없다. 그날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이 터지지 않는다면, 감당할 수 없는 멍에를 메고 그 예배에 참석했다가 허탈하게 돌아가는 교인들의 모습을 목자인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자 되신 주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면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 그 예배를 통해서 회복되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어떤 종류의 악기, 어떤 장르의 음악, 어떠한 모양, 어떠한 순서, 이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예배 갱신의 핵심은 예배를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내가 만나고, 예배 속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날 것이냐,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깨어지고 성령의 임재 가운데 치유 받고, 새 힘을 얻고, 능력 받고, 세상에 나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그런 공동체의 삶을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예배의 확신이고 예배의 갱신이다.  


예배의 갱신-시대적 요구인가?  

사회자의 사회, 대표기도, 성가대의 찬양, 설교 그리고 축도 등 공적인 예배에 익숙한 현대 교인들  
CCM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축복 중에 하나는 1인칭으로 찬양하는 길이 열렸다는 것  
목회현장에서 능력의 한계와 부족한 것을 느낄 때마다 사단의 조롱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질 때가 많다. 철저히 준비하고 더 철저히 준비하건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회중, 그리고 메말라 버린 나 자신. 그런 속에서 교인들은 빨리 예배가 끝나고 돌아가기를 고대할 것이다.  
회중이 반응 없이 예배드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은 한 주간을 세상에 나가서 너무 많이 시달린다. 아니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해 얼굴을 들고 주목하고 살았던 삶이 아니라 생존 전쟁터에 나가서 언어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통하지 않는 너무나도 심한 변화 속에서 그냥 간신히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시달린 영혼과 마음을 가지고 교회를 찾아오는 그들은 열정적으로 예배드릴 준비가 되어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냥 지나쳐 버리기에는 예배를 통해서 내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임재가 너무 강렬하기에 그 예배를 회복하?싶은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 때문에 아무리 설교준비를 잘했을지라도 그 설교를 끝내지 못하는 것이다. 너무 흥분의 도가니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통회 자복하기 때문에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 성도들의 심령을 뚫고 들어가 목사의 설교가 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그런 예배를 드리고 싶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는 예배  

하나님은 내게 예배를 통해서 역사하셨다. 내가 신앙생활 하는 동안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예배였고 목회현장에서 좌절과 절망을 느끼며 기진맥진해 있을 때에도 주님은 여러 번 예배의 경험을 통해서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셨다. 그러기에 이 예배를 교인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것이다. 단지 소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경험하게 하고 싶은 것이다.  
교인들은 묻는다.  

어디에서 평강을 찾을 수 있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실 수 있느냐고. 그러면 우리는 ‘바로 성경에 해답이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현장에 그런 역사가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단지 목마른 사람에게 콜라병의 그림을 보여주면서 ‘이런 것을 마시면 시원해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수를 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그렇게 경험했고 내가 그렇게 살고 있다고, 그러기에 당신의 빈 잔을 하나님께 높이 들면 그분께서 역시 채워주실 것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살아 있고 생동감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는 예배로 우리에게 맡겨주신 양떼를 인도하고 싶은 것이다. 거기에는 형식과 스타일, 어떤 음악, 어떤 악기가 문제되진 않는다. 단지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느냐 그렇지 않느냐인 것이다.  

감동과 기대속에 드린 예배  

우리는 말씀도 회복했다. 말씀에 대한 열정도 있고 말씀에 대한 갈증도 있다. 또 훈련도 받았다. 모든 성도를 제자로 세우기 위해 우리는 그동안 열심히 일했다. 기도훈련도 받았고 선교의 현장으로 나갔다. 교회의 사명과 교회의 모습을 회복했는데 이제 그 밑에서 용광로처럼 불을 태울 수 있는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  
이제 남은 것은 예배의 회복이다. 예배가 회복되면 위의 모든 사역들이 힘을 받는다. 예배에 성공하면 교인들은 기대를 가지고 예배에 몰려든다. 목사님의 얼굴을 주목하면서 그를 통해서 선포될 메시지를 기다린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 이런 기대와 감동 속에서 예배를 드릴 수가 있다면 그런 목사님을 둔 교회는 얼마나 행복한 교인들일까?  

1. 예배갱신은 교회와 교인들이 성숙해 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말씀을 통해 거듭난 교인들은 기사와 이적을 통해 신령한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이제는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원하게 된 것이다.  

첫째로, 그들은 개인적으로 표현(personal expression)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공적인 예배에 너무나 익숙해져있다. 사회자의 사회, 대표기도, 성가대의 찬양, 설교 그리고 축도. 그러나 이제는 개인적으로 표현하고 싶어한다. 그런 의미에서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축복 중에 하나는 1인칭으로 찬양하는 길이 열렸다는 것이다.  
둘째로, 그렇기 때문에 찬양을 직접 많이 부르기 원한다. 교인들이 예배 갱신을 체험하면 찬양을 직접 부르기를 원한다. 그리고 많이 부르길 원한다.  
셋째, 부르기 쉬운 찬양을 부르길 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기에 짧은 가사를 반복해서 부르는 것이다.  
넷째, 친숙한 매개체, 악기를 통해 예배드리기를 원하는 경향이 있다.  

2. 새로운 예배의 정의가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요구하셨다. 신령이라는 것은 ‘in spirit’ 즉 영적으로 교통하는 예배요, ‘in truth’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요한계시록 7장 11~12에 보면 거기에 간단한 예배의 정의가 나온다. ‘엎드려 절하다’는 뜻이다. 구약에서 가장 많이 쓰인 단어도 ‘엎드려 절한다’(shacha)이다. 물론 우리의 몸으로 엎드려 절하기도 해야 하지만 마음과 의지가 굴복해야 한다.  
결국 예배란 하나님 앞에서 엎드려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이것이 경배이다. 왕 중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 그분의 요청에 굴복하는 것이다.  

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예배가 무엇인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의미와 생명을 일은 듯 하다. 우리는 점잖게 좋은 옷을 입고 좋은 환경에서 편안한 의자에 앉아 예배를 인도하는 이들의 표정을 바라보며, 관망하며 어떤 때는 점수까지 매긴다. 그러나 그것이 예배인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와야 한다(사 6:1~5, 64:6). 또한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나와야 한다(시 47편, 100편).  

우리는 A.W. Tozer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 시대에는 우리를 무능력하게 만들며 찬물을 끼얹는 듯이 거룩한 열심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이것은 우리 자신들이 너무도 나를 바라보기 때문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대한 반응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예배의 모범-표현하는 예배자  

사무엘상 4장에 보면 하나님의 궤가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임을 당하며 이 소식을 들은 엘리도 목이 부러져 죽게 된다. 마침 산기가 가까운 비느하스의 아내는 해산하면서 이 고통스런 소식을 듣게 되고 아들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이라 명명한다. ‘이가봇’,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뜻이다.  

‘영광’이라는 이 단어는 ‘무게’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것은 우리 무게의 중심을 잃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중심이 되셔야 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린 것이다. 이것이 범죄한 아담의 후손들의 모습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린 인간에게 그 영광을 회복하는 길이 열렸으니 이것이 곧 예배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구원받은 우리는 예배를 淪漫?하나님의 영광와 그 임재 속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전혀 억제하지 않고 표현하는다윗의 모범  
우리는 다윗을 통해 예배의 한 모범을 보게 된다. 사무엘하 6장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찾아오면서 너무 기뻐서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그는 자신을 표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자기가 왕으로서의 체면이나 품위를 지키는 것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기쁜 마음 때문에 왕의 품위를 무시하고 양반의 체면을 벗어 던지고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그는 바로 공개적인 표현(open expression)이 무엇인가를 증거한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것은 전심으로, 직선적으로, 그리고 폭발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기쁘게 찬양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어리석다거나 좋지 않다는 부정적인 진단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이러한 다윗을 바라보는 그의 아내 미갈의 관점은 전혀 달랐다. 그녀는 다윗을 업신여기며 그의 모습을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 몸을 드러내는 행위라고 비난하였다. 성경은 그러한 미갈에 대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더라고 단언한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사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보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 속에 살면 자신만만하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니까 인생을 살면서 무게중심이 자꾸 비틀거리고 있다. 비틀거리면서 자신을 찾으려고 여러 가지를 추구하는데 그것이 대부분은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이다. 뭔가 무게를 찾아야 되니까 목에 힘을 주는 것이다.  
정말 우리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 속에 산다면 우리가 목회현장에서 목회가 잘되고 안되고 무슨 상관이 있으며, 사람들한테 인정받고 못받고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당당하고 담대하고 자신감을 가지고 산다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분명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면 내가 무엇하러 주눅이 들고 다른 것을 찾아 빈 공간을 채우려 하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지 못하니까 세상적인 것들로 무게를 잡으려 하는 것이다.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도, 참여하는 성도도 일주일 내내 목에 힘주고 살다가 하나님 앞에 무게를 찾으려고 하니 무게가 찾아지겠는가. 예배의 중요한 것은 겸손히 무릎꿇고 경배하는 것인데, 무게를 잡고만 있으니 무릎이 꿇어질리 없다.  
외적인 표현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할지 모르나 사실은 외적인 표현이 우리의 중심을 보여줄 때가 많다. 이것을 우리는 body language라 부른다. 팔짱끼고 앉아서 ‘당신에게 관심이 많다’고 말하는 것을 누가 진실이라고 받아들이겠는가?  

목회자로서 나 자신도 교인들 앞에서 찬양하다 말고 무릎꿇는 일이 쑥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내 마음이 굴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릎꿇는 일은 더더욱 힘든 일이다. 하지만 목회자들이 나의 권위와 나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만족하고 그분을 위해 그분만으로 채워지는 삶을 살면 항상 담대하게 나와서 무릎을 굽히는 것이 무엇이 문제이며, 주일날 출석수의 많고 적음이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교인이 많다는 것으로 무게를 잡고 설교영향력으로 무게를 잡으려고 하니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치료하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 지는 것이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주님만을 만족하는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고 난 다음에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은 자신들의 몸을 가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예배하러 오면서도 사람들은 많은 것들로 자신을 가리려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려면 우리가 투명해져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노출시켜야 한다.  

내가 감추고 싶어하던 것, 내가 의지하던 것, 나의 실수, 나의 경력, 내가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으려 했던 모든 것들을 예배하는 순간마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자꾸 벗겨버리면 우리는 자유함을 누릴 수 있다. 그 자유함을 누릴 때 다윗처럼 춤추며 찬양할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성향이나 체질을 떠나서 마음껏 춤추며 예배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를 선택할 권리가 없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선택할 권리가 없다. 우리는 원하는 종교를 택할 수 있는 자유는 있다. 불교를 믿든지 회교를 믿든지 무신론자가 되든지 상관없다. 그러나 내가 만일 기독교를 선택했을 경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요 나의 삶의 주님으로 인정하고 고백한다면 더 이상 내가 원하는 예배 방식을 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지금 구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또는 얼마나 헌신된 삶을 살고 있는지 또는 얼마나 경건한지에 관?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신앙 생활 중 단 한 분야, 즉 예배에 관해서 얼마나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느냐에 관해 토론하고 있는 것이다.  

손뼉을 쳐야만, 손을 들고 찬양을 해야만 구원을 받는다든지 경건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은혜와 능력을 어떻게 하면 풀어놓을 수 있는지,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갈 수 있는지, 나의 교만과 두려움을 직면할 수 있는지, 우리 신앙 생활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파괴할 수 있는지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배의 모범을 말하면서 이 두 가지 극단적인 위험만은 피해야 할 것이다. 하나는 무질서한 광신자 또는 시끄러운 감정에 움직이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 움츠리고 소극적으로 조심스럽게 만든다. 또 다른 하나는 너무 엄숙하고 조용한 것만을 좋아하는 광신자들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경계해야 한다. 조용하다고 무조건 경건한 것도 아니고 소리가 크다고 무조건 불경건한 것도 아니다. 둘 다 경건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예배의 갱신을 말한다면, 우리의 예배는 표현되는 예배여야 한다는 것이다.  

목회자로서 예배를 인도하는 우리나 성도들이나 신선한 기대와 꿈, 하나님의 터치를 기다리는 열정과 갈증을 가지고 참여해서 한 주도 빠짐없이 예배 가운데 좌정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여 한 주간의 삶이 능력 있게 찬송 가운데 보내진다면 이것이 예배의 회복이고 예배자의 회복이라 믿는다.  

김원기 목사(미, 휄로쉽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