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생명신학

 

                                                                                                                                            심창섭 교수

 

현대는 생명에 대해 존중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 속에 있다. 낙태와 안락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고, 생명도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것은 성경과 정반대가 되는 사상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우리는 생명에 대한 바른 이해, 즉 성경적이고 개혁신학적 이해를 정립해야 한다. 이에 도움을 얻고자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에서 역사신학을 교수하신 심창섭 박사의 글을 소개해 본다.

  

I. 서론

 

생명신학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는 두 가지 견해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공의적 해석으로 생태신학적 관점에서 생명신학을 이해하고 있다. 즉 생명을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적 질서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 이런 개념은 생명에 대한 외경 사상으로 모든 자연세계의 생명체의 보존과 보호를 인간의 책임으로 강조하면서 생태신학이라는 용어를 창출했다.

 

생명신학의 다른 한 부류는 자연 환경적 생명에 대한 관심보다는 인간의 영원한 영적 생명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것은 자연세계의 생명을 초월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어지는 영생에 대한 이해이다. 이 생명은 인간의 속성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생명이다. 성경에는 예수를 믿는 자는 새 생명이 있다고 하였다. 기독교가 추구하는 궁극적 생명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이해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참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신을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고 하였고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에게로 갈 자가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성경은 “그 안에 생명이 있으니”라고 하므로 예수 안에 생명이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생명이란 그리스도를 떠나서 해석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개혁주의 생명신학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생명은 원천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므로 하나님과의 단절은 곧 사망을 가져온다. 인간은 타락을 통해 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었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어 생명을 되찾게 되는 은혜를 입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명을 가져오는 은혜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죄의 회개라는 과정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그리고 회개의 결과로 새 생명을 사는 삶의 현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되찾은 자는 중생의 삶을 통한 성화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성화의 과정을 확대하면 생명신학의 수평적 관점인 상태신학으로 발전한다고 볼 수 있다. 개혁주의 생명신학은 이와 같이 중생을 통한 영적 생명의 회복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실천적 삶 속에서의 생태신학의 과제를 동반하고 있다.

 

최근에 이런 생명신학의 양면성을 조명하는 신학적 작업이 한국신학계의 신학적 주제로 다루어졌다. 생태적 생명과 생명공학에 대해 연구한 학자는 숭실대 김영한 교수를 들 수 있고 서정배 교수도 생명공학적 관점에서 생명에 대한 견해를 잘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 반해 생명신학을 영적생명에 초점을 둔 연구가 백석대 개혁주의생명신학연구소에서 발표된 생명신학에 대한 논문들에서 나타난다. 특히 본 학술 포럼에서는 생명을 복음적 관점에서 해석하면서 영적생명을 강조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칼빈은 어떻게 생명신학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검토할 것이다. 생명신학이란 용어가 칼빈에서는 생소한 용어이지만 기독교 신앙자체가 생명의 종교이므로 칼빈의 개혁신학 사상 속에서 생명신학에 대한 이해와 그것의 신학적 근거를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논자는 이런 의미에서 칼빈의 생명에 대한 이해를 조명해 볼 것이다. 칼빈의 생명에 대한 이해는 3가지로 분류해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생명의 출처, 둘째, 생명의 실존적 삶, 셋째, 생명의 종말론적 이해이다. 이 세 가지 분야를 다룬 후 칼빈의 관점에서 생명공학적 생명과 영적생명에 대한 이해를 종합적으로 조명해 볼 것이다. 생명신학에 대한 칼빈의 이해는 그의 신학적 대적인 기독교강요를 중심으로 연구될 것이다.

 

II. 본론

 

1. 생명에 대한 성서적 이해

 

생명에 대한 정의는 일반적으로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첫째, 생명을 생리적 유기체의 현상으로 본다. 이것은 자연과학분야의 생명에 대한 정의이다. 그래서 생명을 생화학적으로 해석하면서 물질과 에너지 대사를 통해 복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조직체로 정의한다. 이런 견해는 생명을 하나의 생화학적 과정의 산물로 보는 생물학적 관점이다. 둘째, 생명에 대한 종교적 정의이다. 이는 생명은 유기체의 생화학적 과정의 산물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시적 영역에 두는 견해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적 생명에 대한 이해이다. 성서는 모든 존재하는 생명의 근원을 하나님께 두고 있다.

 

즉 기독교적 생명은 자연적 모든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다는 견해이다. 그래서 성서는 모든 생물학적 생명뿐 아니라 근원적으로 영원한 영적 생명도 하나님의 영역에 두고 있다. 그리고 영원한 영적 생명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성서는 이와 같이 인간의 생명을 하나의 자연현상으로 치부하는 자연주의적-일원적인 생명관과 차별화 한다. 이것은 성서가 생리적 물질적 생명과 영적 혹은 정신적 생명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입장을 취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성서가 추구하는 궁극적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 자신 안에 거하는 영원한 생명임을 말하는 것이다. 칼빈은 이러한 성서적 생명의 개념에서 생명신학을 출발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온 우주의 생명의 근원이심을 전제하고 있다.

 

2. 생명의 기원에 대한 칼빈의 이해

 

칼빈은 생명의 근원을 생명의 본체론적 논증에서 말하고 있다. 생명이란 하나님을 떠나서 존재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의 실체가 또한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세르베투스의 주장에 반대하여 생명이 그리스도에게 주입되었다는 주장들은 설득력이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칼빈은 하나님은 자신 안에 생명을 가지며 하나님 홀로 생명의 본래적 원인으로 자신의 본래적 힘에 의해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물을 태동시키시며 소생시키신다. 그래서 비밀스럽고 숨겨진 이 생명의 근원인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 나타내신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인간은 그리스도로부터 열린 생명의 샘물을 갖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생명이 그 자신에게 숨겨져 있길 원치 않으셨기에 그리스도 안에 자신이 생명으로 존중하였고 우리에게 흘러오도록 하신 것이다. 칼빈은 요한복음 주석에서도 이 점을 명료하게 밝히고 있다.

 

“생명의 원인과 원천이 하나님 자신 안에 없다면 생명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우리에게 흘러오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 자신 안에 생명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는 홀로 본래적인 자신의 힘에 의해 존재할 뿐 아니라 그는 자신 안에 생명의 충만함을 가지고 만물을 소생시키시는 것이다.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시 36:9)라고 말한바 대로 이것은 하나님께 특별한 것이다. 우리보다 훨씬 멀리 있는 하나님의 위엄은 비밀스럽고 숨겨진 샘물과 같은 것이므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 계시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가까이에서 끌어낼 수 있도록 열린 샘물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 말씀들은 하나님은 숨겨진 생명을 가지길 원치 않으시며 그것이 자신 속에 묻혀 있기를 원치 않으시므로 그의 아들에게 주입시켜 우리에게 흘러오도록 하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생명을 주입했다는 사실을 반대하지만 요한복음 주석에서 생명이 그리스도에게 주입되었다고 말한다. 이런 입장은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말한 정황을 살펴보면 칼빈의 입장을 이해하는데 문제가 없다. 칼빈이 생명이 주입되지 않았다는 주장은 이단인 세르베투스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즉 세르베투스가 존재론적으로 생명의 주입을 주장하는데 대해 칼빈이 반대한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주석에서 칼빈은 본체적인 견지에서 생명의 주입을 말하고 있다.

 

칼빈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이 생명의 원천이었고 그 생명을 예수에게 존재케 하셨기에 예수 자신도 우리에게 생명의 원천이요 공급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구원자가 된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 사실을 요한복음 주해를 통해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통한 생명의 원천이라는 사실이 인정되지 않으면 신앙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아무리 철학자들이 훌륭한 말을 한다 해도 그리스도를 떠난 모든 신학은 혼돈될 뿐 아니라 텅빈 것이고 미친 것이고 속임수라는 것이다.

 

칼빈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논하면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구속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정죄 받고 사망에 이른 상태였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과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가 바로 생명이 아니라면 죽음을 삼킬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분은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요 동시에 생명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가진 생명은 생명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사용된 생명이란 헬라어는 조에라는 단어로 단지 육체적 생명에 대한 표현일 뿐 아니라 초자연적 생명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는 표현은 육체적 생명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생명이 지속적으로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생명은 자존하는 생명으로 아버지와 함께 누리는 생명이다. 즉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은 헬라인들이 추정하는 것과 같은 추상적 성격의 정신이 아니라 구체적 실체를 나타내는 생명인 것이다. 이는 죽거나 소멸됨이 없는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즉 칼빈은 생명의 기원을 철저하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두고 있다. 그래서 생명은 성부와 성자께 속한 것이며 영원한 실체인 것이다. 칼빈은 생명이란 단어는 성경에서 예수님에 관해 사용된 메타포적인 용어인 빛, 길, 진리와는 달리 그리스도안에 실재하는 삶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또 그리스도가 인간의 생명의 원천일 뿐 아니라 만물의 생명의 원천이며 동시에 그의 능력으로 만물의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고 밝힌다. 칼빈은 무생물에게 생명이 주어졌든 생물에게만 생명이 주어졌든 그것은 문제가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생물의 원천은 하나님의 말씀인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현존하는 모든 생물의 상태는 그로 말미암아 유지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연구한 칼빈의 생명의 원천에 대한 이해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생명의 원천은 하나님이며 하나님 자신이 예수의 이름으로 육화되었기 때문에 생명이 또한 예수 안에 있다. 이는 예수도 생명의 원천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생명에 대한 주권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과 육화되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에게 속한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공학이 생명을 경시하는 방향으로 연구되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개인적인 타살이나 자살행위는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3. 생명의 실존적 삶에 대한 이해

 

칼빈은 하나님에 의해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은 생명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소중함을 강조하고 있다. 칼빈은 우리의 삶의 주인이요 소유주이신 하나님을 쫓아서 삶을 이끌어 갈 때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하나님의 속성인 거룩한 삶을 추구하므로 하나님과 연합의 관계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룩함이 공로가 되어 그 근거로 하나님과 관계에 들어간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중생한 삶의 결과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은 악과 부정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원한다면 당연히 우리의 삶은 거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칼빈은 그리스도로부터 새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의 성화적 삶의 당위성을 속죄와 구원론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칼빈은 중생한 자의 삶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요 하늘에 소망을 둔 삶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런 목적의식이야 말로 올바른 삶을 세우는 가장 확실한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일반 철학자들의 도덕론은 단순히 인간의 존엄을 강조하는데 그치며 그 이상의 것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에 대해서는 무지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영적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야 말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멸하도록 하라(롬 12:2)고 권고하고 있다. 칼빈은 이렇게 함에 있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의 생각, 뜻이 하나님의 계획과 행동을 주관하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분의 뜻과 지혜가 우리의 모든 행동을 다스리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한 삶이 아니라 매일 하나님을 향한 삶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것이야말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생명에 이르는 관문이라고 했다.

 

칼빈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헌신의 삶을 사는 것이야 말로 그릿도인들이 소유한 생명의 존재의미와 가치임을 역설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에게 마땅히 일어나야 할 축복된 삶의 형태이며 이것은 곧 자기 비움의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부인의 삶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과 이웃의 유익을 위한 삶으로 채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칼빈은 왜 자기 부인의 삶을 강조했는가? 칼빈은 자기 부인의 삶이 없이는 세상의 정욕에 사로잡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온전한 삶의 추구가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자기 부인은 주님의 명령이며 그것 없이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은 가능치 않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웃에 대하 의무는 자기 포기라는 결단이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 포기를 주장하는 칼빈은 인간 본성은 원천적으로 자기만을 사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칼빈이 말하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무엇이든지 이웃과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아낌없이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웃과 교회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신자의 삶의 자세는 무엇인가? 칼빈은 우리가 교회의 공동유익과 이웃을 위해 섬기는 태도는 청지기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이웃을 돌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물질관 때문이다. 그리고 칼빈은 청지기의 사역을 감당하는 유일한 길은 바로 사랑이라고 했다.

 

그러면 칼빈이 이웃을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왜 이웃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가? 그는 인간을 단순한 생태적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생명체로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칼빈의 위대한 인간존중의 사상을 볼 수 있다. 칼빈은 사람들이 선을 받을 자격이 대부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에게 서로 선을 행하라고 하나님이 가르친 것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런 원리에서 인간으로서 존귀와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엄성 때문에 알지 못하는 사람이든 비천한 사람이든 불학무식한 사라미든 혹 전혀 가치 없는 사람이든 관계없이 그 사람들 속에도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이 빛나고 있으므로 그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는 언제나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칼빈은 마 5:44의 말씀을 인용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이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를 밝히고 있다.

 

칼빈의 이웃 사랑과 존엄사상은 또한 인간 외형적 행위에 의존하지 않는다. 칼빈은 사랑을 베푸는 자들이 인격적 내적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고 했다. 사랑은 우리 자신을 죽이는 일이며 그것은 사랑의 수혜자의 위치에 자신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인간다운 감정이고 참된 동정심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선물이므로 우리의 삶 자체가 철저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귀한 존재임을 주장하면서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칼빈은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청지기로서의 삶을 촉구하고 있다. 이런 삶이 지속될 때 생명의 가치와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로 얻은 새 생명의 성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칼빈이 추구하는 생명의 실존적 가치의 의미이다.

 

4. 생명의 종말론적 이해

 

칼빈은 생명의 출처와 생명의 실존적 가치에 대한 자기의 이해를 정리한 후 미래의 삶에 대한 묵상에 관하여 설명하면서 생명의 종말론적 견해를 정리한다. 그는 생명의 종말론적 입장을 피력하며 현실 세계의 삶과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첨예하게 대비하면서 설명한다. 그는 사후의 삶을 현실세계의 삶에 비교해 보면 사후의 삶이 초종적인 삶의 소망이며 목적임을 밝힌다. 즉 사후에 있을 영생하는 삶이 없다면 우리의 생명은 짐승보다도 나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지한 사람들은 세상의 온갖 부와 권력, 명예에 빠져 이 땅에서의 육체적 쾌락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욕망에만 매달리지 않도록 세상에 전쟁과 약탈 같은 고통과 악들을 허용하여 세상의 허무함을 알게 하신다는 것이다. 칼빈은 또 개인과 가족에게 닥치는 고통이나 환난도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안일에 빠지지 않도록 하시는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일이라고 보았다. 칼빈은 이런 세상에서의 고통의 삶을 십자가의 훈련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인간이 이 세상의 삶에 집착하는 한 하늘아날에 대한 소망을 동경할 수 없기 때문에 현재의 고통의 삶도 훈련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최종목적은 미래의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임을 확인해주고 있다.

 

장차 올 영생에 대한 칼빈의 생각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생각하며 영생의 삶에 대해 사모하고 열심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천국이 본향이고 현세의 삶은 유배와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세의 삶을 영원한 삶과 비교해 본다면 이 땅의 삶은 죄로 얽매어 있으므로 주님이 부를 때에는 언제라도 이 땅의 삶을 마감할 준비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칼빈은 현세의 삶에 대해 염세주의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그가 이 세상의 삶에 대해 갖고 있는 부정적 견해는 결코 이 땅의 삶을 혐오하거나 증오하는 차원에서 이해해서는 안된다. 칼빈이 갖고 있는 현세의 삶에 대한 멸시 사상은 하늘에서 누릴 영생의 삶에 비교해 무가치함을 말하려는 것이다. 또 이 땅의 삶이 얼마나 죄악 속에 있다는 것을 표현할 뿐이다.

 

그래서 칼빈은 이런 자신의 주장이 이 땅의 삶에 대한 허무주의적이거나 염세적인 사상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며 땅의 삶의 가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이 땅의 삶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영원한 삶에 대한 묵상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좋은 일들은 하나님의 축복, 선물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칼빈은 이 세상의 삶을 무시하지 않고 도리어 감사할 것이라고 했다.

 

또한 칼빈은 이 세상의 삶은 하늘나라의 영광스런 삶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 보기도 한다. 그래서 곤고한 세상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까지 현세의 삶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는 죽든 살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이렇게 현세의 삶은 하나님의 축복이고 선물이라고 규정하면서 세상의 삶에 대한 양극단적 오류를 지적한다. 첫째, 그는 물질에 대한 비관적 생각으로 현세의 삶에 대한 부정적 수덕주의를 지적한다. 칼빈은 동시에 물질을 자신의 사치를 위해 사용하면서 방종하는 삶을 사는 것을 경계한다. 그가 밝히는 성경이 말하는 현세의 삶 속에서 물질 사용에 관한 원리는 물질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은 우리의 유익함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음식은 생필품으로 중요하나 동시에 음식을 통해 우리에게 즐거움, 기쁨을 주기 위해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의복과 각종 풀과 나무도 열매나 향기를 발하게 하여 생존의 문제를 넘어 그것들을 통해 미적 감각을 즐기도록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간이 그것들을 즐기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만물은 하나님에 의해 우리에게 즐거움의 소재로 주어졌지만 역시 인간의 욕심에 의해 남용되기를 원치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이 물질의 즐거움에 빠질 때 영적 은혜를 소멸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은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히지 말고 각자의 소명에 따라 만족하고 성실한 삶을 살 것을 주장한다. 만물을 통해 인간은 창조주를 깨닫게 되고 그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오히려 창조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육체의 정욕에 굴복하지 말고 억제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 영혼을 오염시키지 않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이것을 경건의 의무라고 했다.

 

칼빈은 이 경건의 소명을 감당하기 위한 최상의 길은 현재의 삶에 중심을 두지 말고 하늘의 영원한 삶을 묵상하는 것이라고 했다. 칼빈은 하늘의 영원한 삶에 목표를 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삶의 소명에 만족하는 삶을 살기를 주장한다. 우리가 처한 곤경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반대로 좋은 환경에 처한다 해도 교만하여 타락하지 말고 영원한 소망을 위한 삶에 충실히 행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정하는 삶의 고귀한 자세라고 말한다.

 

칼빈은 결코 현세의 삶을 비관론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그는 하늘의 영생하는 삶을 사는 자들에게 현세의 삶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최종적 삶의 목적은 하늘나라의 불멸의 삶을 사모하는데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종말론적 생명사상이다.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