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칼빈주의 교회론

 

김순정  | 기사입력 2019/10/19 [20:45]박윤선 목사의 교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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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선 박사     © 리폼드뉴스

(박윤선 박사는 「신학지남」에 칼빈주의 교회론에 대해 상세하게 연구하여 발표했다. 조직신학자가 아닌 성경신학자의 시각에서 칼빈주의 교회론에 대해 연구한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칼빈주의 교회론을 다시 정립하는데 매우 중요한 글이라고 생각된다.)

 

  

인간은 성품에서부터 벌서 사회적 존재이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홀로 살도록 되어 있지 않다. 그는 그렇게 단체 의식을 타고 나서 그 어느 수난이라도 단체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생태를 가지고 있다. 특별히 신앙 생활에 있어서 그러하다.

 

I. 개론

 

1.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란 말은 불러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교회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의 단체이다(벧전 2:9, 롬 11:1-5). 칼빈은 말하기를 “선택의 거룩은 그리스도라”라고 했다. 곧 누구든지 진실히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택함 받은 자란 뜻이다. 인간의 개인적 성품에 의한 집합은 교회가 아니고 종파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계약과 말씀에 근거하고 성립된다.

 

2. 인류와 교회

 

범죄한 인류는 그 역사의 초두부터 교회를 가졌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류가 두 종류의 인간으로 나누일 것을 아담 하와에게 말씀하신 데서 결정된 것이다. 아벨이 교회 곧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한 반면 가인은 불택자들을 대표한다. 그 뒤에 구약시대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민 운동은 바로 교회운동이었다. 이 운동이 신약 시대에 이르러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새 이스라엘 운동으로 성취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교회 설립을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의 교회 설립 교훈을 많이 볼 수 있다. 특별히 마 16:18이하의 말씀은 이점에 있어 중요하다. 우리는 이 밖에 예수님의 말씀에서 교회 설립에 대한 간접적 교훈을 많이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속죄로 말미암아 새 이스라엘 운동이 개시된다는 말씀(마 21:23-46),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그가 그들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를 삼으시겠다고 하신 말씀(마 4:19),

 

또는 교회의 권징에 대한 말씀(마 18:15-20)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신약의 교회 설립이 구약계시의 성취라고 생각할 때 문제는 명백하게 해결된다. 구약계시는 메시야의 오실 것을 예언하여 왔는데 신약 시대에 메시야가 오심으로 그것이 성취되었다. 메시야가 오셨다는 말은 곧 바로 교회에 대한 구약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교회는 메시야의 수반 현상이기 때문이다.

 

3. 신약 시대의 교회관 변천

 

우리는 2-3세기의 교회가 점점 교회 통일성의 영적인 내용을 외부적인 것으로 바꾸게 됨을 볼 수 있다. 사도 후 시대가 처음에는 통일성에 대해 영적으로 바로 생각했다. 그 시대의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는 참된 이스라엘 곧 복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였고 기독교회는 성령을 받은 자들의 단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이단자들이 일어나자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들을 막으려고 영적 통일에 주력함보다 외부적 통일에 힘썼다. 그들은 말하기를 감독이 있는 곳이 교회라고 하였다.

 

교회가 이렇게 외부적 통일을 위주하게 된 역사적 계단을 자세히 말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곧 성경을 보면 장로들 중에는 치리에만 관계하는 이들이 있고 또는 치리와 교훈을 겸하여 시무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므로 H. Bavinck은 말하기를 “모든 감독은 동시에 장로였다”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사도들과 및 사도 직후의 교부들이 별세한 뒤에 교회는 성경의 말씀대로 엄밀히 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개교회에서는 장로들 중에서 교훈까지 맡아 교역할 수 있는 자를 택하여 이제부터 감독이란 이름을 그에게만 전용하게 되었다.

 

그러면 이제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벌써 감독은 교회 안에 장로들과 다른 교직으로 제도화되어 있었다. 3세기에 이르러 감독의 직권이 더욱 강화되고 교회의 중대한 일은 감독회에서 결정하도록 되었다. 4세기에 이르러서는 대감독 제도가 생기어 한 지방 안에 있는 모든 감독들은 대감독에게 복종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5세기에는 로마의 감독이 모든 지방 교회의 감독들을 통솔하였으니 그가 레오 1세이다. 법황의 교회 통치가 이런 역사적 단계를 경유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16세기에 이르러 루터가 다시 교회를 성도의 교통으로 보고 모든 신자들을 다 제사장이라고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개혁의 결과는 칼빈주의 교회 안에 더욱 명백화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될 것은 교권주의자가 어느 교파에서든지 기회만 있으면 일어나서 진리보다 권리를 위해 싸우는 불행한 사실이 있다는 것이다.

 

II. 교회의 종별

 

신학상으로 교회의 분별은 다음과 같다.

 

1. 전투적 교회와 승리의 교회

 

(1)전투적 교회는 죄와 마귀를 대항하여 끊임없이 영적인 전투를 가지는 것을 그 특색으로 한다(히 12:4). 이는 인류 역사의 시초부터 세상 끝날까지 계속한다. 날마다 영적으로 잘 싸운 자들은 세상을 떠날 때에 승리의 교회에 참가한다.

 

그런데 전투적 교회의 전투는 어떤 것인가? 이것은 공격전인 동시에 방어전이다. 이 점에 있어 우리는 성경에 많은 장절들이 있음을 알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히 엡 6:10-20; 히 12:4의 말씀을 명심해야 된다. 현세에 처한 교회가 진리를 파수한다고 하면서 방어전만 위주한다면 그것은 소극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후퇴를 자취함이다. 그만큼 그 교회는 증거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바울은 복음을 굳게 파수하면서도 사람들과의 접촉은 넓게 하였다(고전 9:19-23).

 

(2)승리의 교회는 하늘 위의 교회이니 완성된 성도들의 단체를 말함이다. 이것에 대해 히 12:23이 잘 묘사한다. 특히 요 14:1-6의 천국 교훈은 승리의 교회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2. 보이지 않는 교회와 보이는 교회

 

이것도 동일한 교회를 양면으로 논함이다. 교회는 현실에 있는 대로 볼 때는 보이는 교회라고 할 수 있고 그 본질적으로 생각될 때는 보이지 않는 교회라고 할 수 있다. 보이는 교회(유형교회)란 것은 마치 영혼에게 있어 몸과 같이 비유된다. 이것은 신앙고백, 덕행, 복음사역, 조직과 행정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교회(무형교회)는 보이지 않는 몇 가지 사실 즉 첫째,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신 사실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된 사실, 둘째, 신자들의 신앙 고백의 내부적 실정으로 성립된다.

 

우리는 교회를 식별함에 있어 너무 외관만 위주하면 안된다. 누구든 외관만 위주하다가는 그리스도에게 책망을 받은 바리새인들처럼 외모주의자가 되어 버린다. 우리는 우리 교회 밖에는 피차 협력할 복음주의 교파가 없는 듯이 남들을 모조리 무시하려 들면 안된다. 우리가 우리 교파의 교리는 굳게 파수하면서 역시 어떤 특수한 사업에 있어서 복음주의 신앙을 가진 다른 교파들과도 어느 정도 합작해 복음 전할 길을 겸손히 모색함이 필요하다. 우리가 어떤 일에 있어서는 그들과 합작하므로 우리 교파의 장점을 그들에게 증거할 수 있고 또 우리 민족에게도 더 널리 영적 유익을 줄 수 있다.

 

3. 유기적 교회와 기관적 교회

 

이것은 보이는 교회의 작용을 다시 분석함이다.

 

(1)유기적 교회란 교인들이 각기 은사대로 섬겨 몸과 같이 살아가는 교회를 말함이다. 이것은 일종의 단합체로 생각될 수 있는 모래 무더기나 기계에 비유되지 않고 몸으로 비유된다(고전 12:12-27). 그 이유는 몸은 단합체일 뿐 아니라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2)기관적 교회란 신실한 자들의 어머니로서 직분이나 방편을 통해 작업하는 형태로 있다. 칼빈은 이 점에 있어서 로마 교회의 이원론적 교회관 곧 자연과 은혜의 관념을 버리고 교회의 기관이 세속적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기관 교회는 은혜의 기관적 표현인 만큼 어디까지나 교직원 선출에 신약의 교훈을 순종하도록 해야 한다. 기관교회는 은사 중심으로 선출되어 몸된 교회를 봉사하기 위한 것이고 권리 행사를 위한 것은 아니다. 언제든 교권주의는 교회를 크게 해롭게 하는 죄악인 것이다. 누구든지 그의 받은 은사에 따라 몸된 교회를 봉사할 수 있다.

 

III. 교회의 속성

 

1. 교회의 단일성

칼빈주의 곧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교회의 단일성을 논함에 있어 영적 단일성을 표준으로 가진다. 영적 단일성이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함, 같은 성령으로 교통함, 신앙과 소망과 사랑이 동일함을 가리킨다. 위의 영적 단일성의 진리를 믿는 교회라면 어떤 나라의 교회든지 어떤 교파의 교회든지 모두 다 동일체로서 보편적 교회의 단일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와 반면에 로마교회는 외형적으로만 단일성을 생각하여 로마교회 하나만을 참된 교회라고 생각해 왔다.

 

2. 교회의 성결

칼빈주의 교회관에 있어 신자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성별된 것과 또는 그들의 생활이 순결함을 가리켜 교회의 성결이라고 한다. 어느 시대에나 교회의 지도자들 중에는 교권을 잡기 위해 열중하고 자기 자신은 고요히 반성하지 않으며 회개하지도 않으니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물론 그들도 인간이므로 그들에게도 허물과 죄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죄를 회개하는 한 역시 성결을 어기는 것은 아니다. 회개 운동도 성결 운동이다.

 

3. 교회의 보편성

보편성이란 어느 시대나 어느 민족 중에나 어느 땅에나 참된 교회가 있다는 것이다. 보편성이란 말이 성경에는 없으나 교회의 보편성을 가르치는 성구들은 성경에 많이 있다(창 12:3; 시 2:8; 사 2:2; 렘 3:17; 말 1:11; 마 8:11, 28:19; 요 10:16; 롬 1:8, 10:10-12, 18; 엡 2:13-14; 골 1:6; 계 7:9).

 

H. Ridderbos는 교회의 보편성 교리가 복음의 메시지 성격 때문에 나온 열매라는 의미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곧 “교회의 보편성은 때가 파므로 신창조를 가려오는 복음의 내용에 속한다”라고 하였다. 이 보편성 사상은 바울이 유대주의를 대항하는 변론을 동기로 하여 말한 것이지만 에베소서와 디모데서에서도 그것을 강하게 말한다. 현대의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의 보편성 교리에 반대되는 잘못된 행동을 취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 신앙을 진실히 고백하는 형제들끼리 육적인 것을 인해 편파적으로 행한다면 그것은 보편성 교리를 위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교파만 참 교회인 듯 생각하고 다른 복음주의 교파를 무시한다면 그런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박형룡 박사는 “어느 한 교파가 전 기독교회로 되기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로마교 신학자들은 로마교회 안에 대중이 포섭되었다고 생각하여 로마교회가 보편적 교회라고 한다. 그러나 그 교회의 명칭인 로마란 것이 우선 보편성과 반대된다.

 

4. 교회의 사도적 유래

칼빈주의 교회관은 사도의 교훈(성경)에 근거한 교회를 사도적 유래있는 교회라고 바로 말한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법황을 사도의 직계적 계승자, 또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여긴다. 그러므로 그 교회는 말하기를 법황이 모든 것을 선하게 만드니 법황이 있는 곳에 참된 교회와 순결한 교리와 사도적 계승이 있다고 한다.

 

IV. 참된 교회의 표지

 

참된 교회의 표지는 주로 세 가지를 든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순결하게 전파함이고 둘째, 성례를 바로 시행함이고 셋째, 권징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시함이다. 위의 세 가지에 있어 하나님의 말씀이란 물론 성경이 보여주는 복음을 말함이다. 그리고 성례는 성찬과 세례를 가리키는데 이것들도 그리스도께서 교회로 하여금 시행하도록 명령하셨으니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말씀과 꼭 마찬가지의 영적 효과를 가져온다. 이것이야말로 눈에 보이는 표호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이다. 아무리 신성하고 좋은 제도라 해도 주님께서 이것을 시행하라고 명하시지 않은 것이라면 그것은 말씀의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 그리고 권징으로 말하면 교회의 진실성과 성결성을 유지하기 위함이니 그것 역시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이고 교회로서 그것을 올바로 시행해야 될 처지에 있다.

 

V. 교회의 정치

 

1. 교회에는 여러 가지 정치 형태가 있다.

 

(1)무정치주의

예를 들면 퀘이커교파에서는 교회가 정치를 시행함은 죄악이라고 하였다. 이 교파는 정치 시행은 교회의 신령한 생활을 해롭게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경에는 교회정치는 실시되어야 할 것으로 교훈되었다(마 18:15-17). 교회정치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올바로 시행되는 한에 있어 그것이 해로운 것은 아니다. 현대에는 퀘이커 교파에서도 무정치제도를 교정하고 성례를 시행하며 교직자들을 두고 있다.

 

(2)국가에 위임하는 정치제도

이것은 에라스티안 제도라 불리기도 한다. 이 제도에서 가르치는 바는 교직자들은 복음을 가르칠 뿐이고 정치는 국가에 일임해야 된다고 한다. 곧 교회는 신령한 기관인 만큼 정치 행위를 직접 취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제도에서 주장하는 것은 교회를 속화시킬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국가가 신령한 단체인 교회의 치리를 언제나 바로 할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교회정치를 국가에 위임하는 제도는 종교개혁 시대에 유럽의 교회 실정에 의해 얼마동안 시행된 것뿐이다. 지금은 그것도 많이 수정된 형편이다.

 

(3)감독정치

이 제도에서는 교회행정을 전적으로 감독에게 일임한다. 이 제도에서는 회중이 행정에 절대적으로 상관하지 못한다. 이 제도는 감독들이 사도의 직접 계승자라고 하는 점에 있어 과오를 범한다. 사도직은 교회 설립의 기본적이고 또 단회성을 가졌던 것이다. 감독 정치는 영국 성공회란 교회가 사용한다. 성공회의 예배 이식은 루터교회적이고 교리는 칼빈주의적이다.

 

(4)법황정치

이 제도에서는 법황이 베드로의 직접 계승자라고 생각한다. 법황의 권위를 사도의 권위와 같은 수준으로 생각한다. 이 전통은 마 16:13-19에 의지하여 말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제1법황으로 지시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 16:18이 그 사실을 가르치는지에 대하여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구절은 말하는 베드로란 말은 남성 명사로 베드로라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다음에 나오는 이 반석은 여성 명사이므로 그것은 베드로를 의미하지 않고 베드로가 주님에게 고백한 그의 신앙고백을 비유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신 것은 그가 그의 교회를 베드로의 인격 위에 세우시겠다는 의미가 아니고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19절에 열쇠라는 말은 로마교회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교회에 대한 베드로의 절대적 주장권을 언제나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교회 설립의 권위를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만이 그 권위를 독점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다른 제자들에게도 이와 같은 권위를 주셨다(마 16:19; 요 20:23). 그 뿐 아니라 베드로 자신도 법황권과 같은 절대적 치리권을 스스로 소유하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벧전 5:1-3; 행 15:26). 베드로에게 대한 바울의 태도도 비판적이었다(갈 2:7, 11; 고전 9:1, 5).

 

로마교는 베드로의 로마 주재(로마 법황)를 말하나 그것은 전설에 의한 것일 뿐 성경적 증거는 아니다. 고고학자들도 이 사실에 대해 아무런 증거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사람들이 벧전 5:13에 언급된 바벨론은 종종 로마의 상징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믿을 수 없는 해석이다. 베드로전서는 각국에 흩어진 유대인 기독자들에게 보낸 서신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사실 바벨론에 있는 교회를 의미했든지 혹 상징적으로 흩어져 있는 어떤 유대인 기독자들의 단체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5)회중정치

이것은 독립 정치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제도에 있어 회중이 교회 운영에 대한 일체 권리를 가질 뿐이고 교직자들은 치리권을 전연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이 제도도 일방적으로 너무 기울어진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성직자들이 회중의 부표에 의해 택함이 되는 것인 만큼 회중을 기본으로 하고 회중에게서 권한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성직자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세운 것인 만큼 그들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이기도 하다.

 

(6)장로교 정치

첫째, 장로교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심을 믿는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생명의 원천이 되신다는 의미에서도 머리가 되시지만 교회를 치리하는 의미에서도 그는 머리가 되신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그의 말씀으로 교회를 다스리심을 믿는다. 셋째, 그리스도께서 교회 회중에게 권세를 주시어 치리에 참가하게 하심을 믿는다. 넷째, 그리스도께서 그의 대표자들을 세워 교회를 다스리심을 믿는다. 다섯째, 그리스도께서 지교회의 치리회를 기본으로 하여 상회를 세우도록 하심을 믿는다.

 

2. 성직의 제도

(1)특수직으로는 사도직이 있고 선지자들이 있고 전도자들이 있었다.

(2)일반직으로는 주로 세 가지 직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곧 목사직, 장로직, 집사직이다.

(3)성직에 부름받은 원리

계시 시대에는 하나님의 사자들이 직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것은 기적적인 성격을 지녔다. 그러나 교회 시대에는 보통 성직자들이 일반적 방법으로 부름을 받았으며 그것은 주로 두 가지 계단을 경유하게 된다. 첫째, 내부적인 것 둘째, 외부적인 것이다.

 

3. 치리회의 제도

성경은 개인 자격으로 교회 치리를 하도록 허락하지 않고 또 회중적 교회치리도 허락하지 않는다. 회중과 교직이 합하여 교회를 치리함이 성경적 원리이다. 그것은 첫째, 초대교회에는 사도들이 장로들과 함께 다스렸고 바울도 장로들을 세워야 되는 원리를 말했다. 둘째, 장로 선택은 회중이 하도록 되어 있다. 회중이 장로를 택한다는 것은 회중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장로들의 자격을 식별하도록 하는 뿐이다. 그러므로 사실은 회중이 그들에게 권세를 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만이 그것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미에서라도 회중이 교회 치리에 참가함이 확실하다.

 

(1)지교회의 상대적 자율성

모든 지교회는 하나의 완전한 교회로 상회의 무조건적 억압을 받을 처지에 있지 않다. 그러나 상회는 제한된 분야에서 많은 교회들에게 필요한 치리를 맡은 것이니 지교회는 일반교제가 상회를 통해 일치적으로 결정한 일에 순종할 처지에 있다. 처음에 예루살렘에 설립된 교회는 다른 교회의 연락없이 교회의 작용을 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후에 교회들이 많아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공통적으로 필요한 일 때문에 서로 교통을 가지고 연락을 가지게 된 것이다. 여기서 상회가 생긴 것이다. 성경에 상회를 형성하라는 명령은 없으나 교회의 본질로 보아 그것의 존재가 요청된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만큼 모든 지교회들이 한 몸과 같이 서로 연락하여야 된다. 행 15장에 기록된 공의회는 그때의 지교회들의 상회로 알려진다.

 

(2)상회의 하는 일들

상회는 지교회가 낙착짓지 못하는 난문제를 해결하며 모든 교회의 통일과 연락에 관계되는 일들을 취급한다. 예를 들어 지교회들이 일치하게 고백해야 할 교리, 예배 모범, 권징, 조례 같은 것들을 작성하는 일이다.

 

4. 교회의 권세

교회의 권세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그가 교회의 머리되시며 사도들에게 그 권세를 주셨다. 또 일반 교회에도 주셨으니 교직자들로 하여금 사역적으로 다스리는 일을 하게 하셨다. 이 사역은 일종의 예배 행위이다. 그 권한은 자율적, 독립적, 절대적 권세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순종하는 마음으로 취해지는 행사이다. 영적으로 생각하면 교직자들이 이 권세를 회중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에게서 받았다. 그러므로 교직자들의 권세는 자율적인 것이 아니고 영적이고 사역적인 것이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진리를 증거하는 권세와 자비를 행할 권세가 있다. 이 권세란 교회가 하나님의 명령을 배경하고 이런 일들을 행한다는 뜻이다. 또한 교회는 권징을 실시해야 한다. 이것은 교회의 성결을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다.

 

(1)권징의 목적

첫째, 하나님의 말씀의 주권을 높이고 둘째, 교회가 그 말씀을 순종하여 축복을 받게 되며 셋째, 범죄자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여 새 생명을 가지게 하며 일반 교회로 하여금 반성과 근신을 가지게 함이다.

 

(2)권징 실시의 방법

첫째, 권징의 대상은 무인격적 사물들이 아니고 오직 사람이다. 또 교회 밖의 사람도 아니고 죽은 사람도 아니다. 권징은 그 대상을 취급할 때 단체 취급으로 하지 않고 오직 개인 취급으로 하되 세례 받은 신자에게 국한하여서 시행된다.

 

둘째, 교회가 권징할 죄악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곧 교회 안에서 질서를 문란하게 하여 시끄럽게 하는 범죄건에 국한해 시행되는 것이다. 권징자가 분별해야 될 것은 숨은 과오와 나타난 범과이다. 나타난 범과는 물론 공직 권징을 받는다. 그러나 어느 정도 알려졌으면서도 공중에게는 드러나지 않은 숨은 범과에 대해서는 마 18장에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먼저 은밀히 책망하는 단계를 경유해야 한다. 그때 그 범과자가 확실한 범죄의 증거가 있으면서도 불복하면 그는 공적 권징을 받도록 되어 있다(마 18:17).

 

셋째, 권징은 육체적이 아니고 오직 영적 성질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벌금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체형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혈기의 분노로 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중세기의 교회가 사용하던 그릇된 권징법이었다. 그리고 권징의 방법으로 가족을 해하거나 범과자의 시민권을 박탈하거나 그 밖에 어떤 정치적 권리를 박탈하지도 못한다. 이런 방식의 권징은 재세례파에서 사용했던 것이다. 범죄자에게 대하여 불법한 악담, 저주, 음해를 하는 것도 옳지 않고 혹은 범죄자를 공예배석에서 불법하게 밀어내는 것도 옳지 않다.

 

넷째, 출교는 최후의 벌인데 완고히 회개하지 않는 범과자에게 주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와 그 범과자와의 영적 교제를 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에게 대하여 소망을 단절함이 아니다. 언제든지 그가 분명한 회개를 할 때는 교회가 그를 다시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의 회개는 공적 고백으로 나타나야 하고 이것이 온 교회의 인정을 받아야 비로소 다시 교회가 그를 받아들인다.

 

VI. 은혜의 방편

 

은혜의 방편이란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를 말한다. 그런데 그 작용은 어떤 것인가? 로마교는 은혜의 방평으로서 성례가 그 자체에 은혜를 보관하고 있다고 잘못 말한다. 그리고 신비가들은 성령의 직접적 사역을 강조하며 말씀과 성례는 심령 속에 은혜의 역사를 비유할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교회는 위의 두 가지 견해를 반대하고 하나님은 은혜의 방편에 절대적으로 메이지 않으셨으나 그가 그것들을 그의 기쁘신 뜻대로 사용하신다고 믿는다.

 

은혜의 방편의 한계는 교회, 신앙, 회개, 기도도 은혜의 방편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사실 교회는 은혜의 방편을 실시하는 자이고 방편 자체는 아니며 회개, 신앙, 기도 등도 은혜를 받은 결과로 생기는 신자의 주관적 행위이고 은혜의 방편은 아니다. C. Hodge는 기도도 은혜의 방편으로 생각하나 L. Berkhof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1.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1)은혜의 방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의 범위

이것은 인격적 말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지 않는다. 어느 때에나 하나님께서 직접 나오는 계시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기록된 말씀을 가리킨다. 주로 증거자의 입으로 전파되는 때의 그것을 말하나 그 밖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신자들을 접촉하는 그 말씀도 가리킨다.

 

(2)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미

개혁자들은 성경 말씀의 능력있는 역사를 무인격한 마술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늘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와 연락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성령은 무인격적 능력이 아니고 늘 말씀과 함께 하시며 말씀으로 활동하게 하시되 언제나 같은 모양으로 역사하시지는 않는다. 그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인 이 말씀으로써 역사하시고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혹은 강퍅하게 하시고 혹은 일어나게 하시고 혹은 넘어지게도 하신다. 그가 이 말씀으로 역사하시되 언제나 같은 모양으로 하시는 것은 아니다.

 

(3)말씀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의 관련

율법주의는 말씀 사역만 강조하고 성령의 역사를 필요하게 느끼지 않는 반면 반율법주의는 성령의 역사만 강조하고 말씀의 역사를 등한히 한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말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성령의 역사의 동반을 주장한다. 성령께서 말씀없이 역사하실 수도 있으나 보통으로는 말씀과 함께 역사하신다.

 

(4)말씀의 두 가지 부분

율법과 복음은 말씀의 전 내용이다. 그런데 율법과 복음은 언제나 서로 정반대되는 것인가? 첫째, 바울이 말한대로 그 둘이 서로 정반대된다는 것은 율법의 정죄 사역 방면을 두고 하는 말이다. 둘째,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인임을 깨닫게 하여 복음을 믿도록 하여 주고 또 복음대로 살도록 성결의 길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점에서 율법이 복음과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과 복음은 서로 동반되어 구약시대에도 있었고 신약시대에도 그러하다.

 

2.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세례

 

(1)말씀과 성례의 비교

첫째, 말씀은 성례없이는 스스로 존재를 유지하며 또 스스로 완전하나 성례는 말씀없이 스스로 완전할 수 없다. 둘째, 말씀은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며 믿음을 견고하게 함에 필요하나 성례는 다만 믿음을 견고하게 할 뿐이다. 셋째, 말씀은 세계 그 어디든지 가지만 성례는 진실한 신자들만 상대한다.

 

(2)성례의 종류

첫째, 세례

세례와 침례에 대한 반론. 침례는 물속에 몸을 잠금이고 세례를 물로서 머리를 조금 적심이다. 침례만이 정당하다고 하는 학자들은 롬 6:3-4의 말씀에 근거해 세례받는 자를 물속에 잠겼다가 다시 물 위로 올라오게 해야 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롬 6:3-4에 기록된 말씀은 이 성례가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한다고는 하지만 반드시 침례를 보장하지 않는다. 칼빈주의 신학은 이 성례가 정결케 한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하고 물로 적시는 표식만으로도 그것을 베푼다. 그 근거로는 구약의 결례에서 추론된다. 구약의 결례도 그저 비유와 표식으로서 물을 뿌리거나 적시는 것으로 시행되었다.

 

유아세례의 성경적 근거. 유아세례는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유아가 할례받은 사실에 근거한다. 구약의 할례는 신약의 세례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그 이유는 양자가 다 영적 의미를 가지고 같은 계약에 참여한 자를 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약의 계약은 구약의 것의 계속이다. 중보자가 같고 축복받는 조건도 같고 축복 내용도 같다. 사도 바울은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나 계약이 변치 않는다고 힘써 변증했다(롬 4:13-18; 갈 3:15-18; 히 6:13-18).

 

합법적 세례. 이것은 목사만 시행하며 교회적 규례로 신자들이 모인 공석에서 시행되어야 하고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예식은 물로 베푼다.

 

둘째, 성찬

성찬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에 대한 해석들. 로마교는 화체설을 주장하여 떡과 포도주가 실제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된다고 한다. 덕과 포도주의 속성들은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그 본질은 예수님의 살고 피로 된다는 것이다. 이 근거는 마 26:26과 요 6:50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루터파는 예수님의 인성이 그 신성과 연합되었으니 신성의 무소부재 속성에 따라 인성도 편재하게 된다는 원리를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찬의 물질에도그리스도의 인성은 섞여 있다고 한다. 떡과 포도주에 예수님의 살과 피가 공존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공존설이다. 이것도 예수님의 말씀을 억해한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하신 것이지 “이것은 내 몸과 동반한다”고 하신 것이 아니다.

 

쥥글리는 성찬이 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행사로서 다만 그의 신성이 그 행사에 임하는 것뿐이고 그의 몸이 실제로 거기 임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제자 불린저는 그가 형성한 제2헬베틱 고백서에서 성찬이 다만 표식뿐이란 사상에 반대했다. 이것을 보아 쥥글리도 성찬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음을 어느 정도 인정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칼빈은 “성찬을 시행할 때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능력적으로 임재한다. 이는 마치 태양이 하늘에 있으면서도 그의 빛과 열이 땅에 임함과 같다. 그리스도의 몸이 성령의 중재에 의해 그 영향력이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임한다. 그것은 성령의 영향력과는 다르다.”고 했다.

 

성찬은 어떤 방법을 그 참석자들에게 은혜를 주는가? 로마교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새로운 희생 때문에 참석자들에게 은혜를 준다고 했다. 그리고 거기 참여하는 자들에게 신앙이 있든 없든 성찬은 그들에게 은혜를 준다고 했다. 그러나 이 이론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절대 완전성을 무시함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그의 희생은 완전하여 중복적으로 다시 희생되실 필요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단번에 죽으셨다.

 

칼빈주의에서는 그것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말씀의 권위가 영적 효과를 발생시킨다고 한다. 성찬은 말씀의 권위를 가진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행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교회는 이것을 행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하나님 말씀의 역사가 임한다.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