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자의 신앙과 삶 -칼빈의 케노시스(kenosis) -

제108회기 총회 섬김의대회 심창섭 강의 내용 전문, 심창섭 총장 (국제개발대학원/GS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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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창섭 교수  © 리폼드뉴스

 

I. 서론

 

튀빙겐과 베를린 대학의 교회사 교수였던 칼 홀(Karl Holl)은 “칼빈 신학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그의 신학을 지배하는 인간론, 구원론, 교회론에서도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있다. 그리고 칼빈의 모든 개별적인 문제들은 하나님의 개념에서 절정을 이룬다”라고 하였다. 실제로 기독교 강요와 주석들과 그리고 그의 설교와 논문들을 검토해 보면 칼빈은 하나님 중심 사상 즉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전면에 부각 시키고 있다. 그래서 칼빈은 참되고 경건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엄숙한 두려움과 경외와 사랑이 결합 되므로 가능하다고 보았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경외, 사랑이란 덕목은 평생 개혁의 삶을 살았던 칼빈을 지배한 삶의 모토였다. 한 마디로 압축한다면 ‘Coram Deo’ 였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깨어 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신앙은 칼빈의 kenosis(비움)의 삶으로 이어졌다. 이 비움의 삶이 없었다면 칼빈의 종교개혁은 실패했을 것이다. 제네바 종교개혁을 위한 투쟁 속에 반추된 칼빈의 비움의 삶을 조명해 본다.

 

II. 본론

 

칼빈은 1533년 파리대학의 총장이었던 니콜라스 콥(Nicolas Cop)의 만성절(All Saints’ Day)날 기념 강연에 연류되어 망명 생활을 시작하였다. 1534년 5월 21일 칼빈은 자신이 자란 고향과 교회를 등지고 개혁을 위한 순례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는 이단으로 추적 당했지만 진리인 말씀을 추종하는 자로 태어난 것이다. 당시의 심정을 칼빈은 몇 개월 후에 토로하였다. “나의 한 가지 목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격리되어 생활하는 것이었으나 하나님은 다른 변화들과 전환들을 통해 어느 장소에서도 내가 쉴 수 없도록 나를 인도하셨다.”(Henry Berevidge trans, Calvin’s Commentories Vol. IV. Baker Book House, 1993, xli. cf. Thea B. Van Halsema, This was John Calvin, 1990, p. 42)

 

칼빈은 피난 중에도 개신교도들을 가르치고 용기를 주며 그들을 담대하게 했다. 칼빈은 많은 비밀집회소와 개신교도들의 모임에서 가르쳤고 때로는 경찰에 의해 방해받기도 하였다. 칼빈은 파리에서 경찰로부터 소총의 저격을 피하기 위해 창문을 넘어 어둠 속으로 도망가야 할 경우도 있었다. 핍박의 상황이 악화되자 파리의 동료들이 칼빈으로 하여금 파리를 떠나도록 압박했다. 그러나 칼빈은 여전히 파리에 머물렀다. 파리 개신교들이 그를 필요로 했고 젊은 청년인 세베르투스(Servetus)와 만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칼빈은 변장 한 채 세베르투스와 만나기로 한 장소에 갔다. 그러나 세베르투스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칼빈은 파리 외에도 다른 도시들을 방문하였다. 칼빈은 야외 공원에서 가르쳤고 늦게는 횃불을 밝히고 동굴에서 가르쳤다. 이 동굴에서 칼빈이 편편한 바위를 성만찬대로 사용하여 처음으로 성만찬을 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칼빈은 더 이상 파리에 머물 수 없어서 친구들과 함께 파리로부터 200마일 떨어진 메츠(Metz)를 향해 갔다. 도중에 그들이 머무는 여인숙에서도 경찰의 추적으로 인한 위협에 떨었다. 겨울의 칼바람과 함께 칼빈은 평소에 앓았던 복통과 두통을 이겨내야 했다. 

 

1535년 칼빈은 친구들과 함께 바젤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칼빈은 운명을 같이 했던 니콜라스 콥 총장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때 파리에서 있었던 당황스럽고 가슴 아픈 박해 소문을 상세하게 듣게 되었다. 화형을 면하려는 한 개신교 수감인이 개신교도들의 비밀집회소를 폭로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개신교도들이 발각되어 비참한 박해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바젤에서 칼빈은 이 소식을 접하고 그의 절친들이 파리에서 얼마나 잔혹한 박해를 받았음을 알게 된 것이다. 칼빈이 잠시 머물었던 에티엔 드 날 포르지(Etienne de la Forge)는 산채로 화형을 당했다는 것이다.

 

반신불수이므로 포스터를 붙이지 못했던 구두장이 바르테레미 미론(Burthelemy Milon)도 그레베 광장에서 화형 당했다. 미장이 헨리 포이는 화형 장에서도 그의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도록 그의 혀를 쇠꼬챙이로 볼에 꽤 메었다는 것이다. 파리의 목사중 한 명이 바젤로 도망 와서 파리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고 했던 것이다. 칼빈은 이러한 순교자들을 대변해서 안타깝고 분노하면서 그들의 신앙을 대변하기 위해 [기독교 강요]를 출판한다고 했다. 그는 시편주석 서문에 이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것이 내가 기독교 강요를 출판해야 했던 이유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내 형제들이 감수해야 했던 불의하고 못된 비난들에 응수함으로써 그들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했다. 그들의 죽음은 주님 앞에서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위협과 탄압받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연민을 갖고 있으며, 외국에서 할 수 있는 한 이들을 돕도록 애썼다.”(CR 59, 23 정미현, 장로교의 뿌리 칼빈, p. 41)

 

칼빈은 [기독교 강요] 초판을 완성한 후 바젤을 떠나 샤를 데스베빌(Chatles d’Espeville)이라는 가명으로 이태리의 레나테 본 에스테를 방문하였다. 에스테는 루드비히 12세의 딸로 당시 프란츠 1세 대신 프랑스의 왕이 될 지위였지만 국법에 의해 여성이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다. 에스테는 개혁정신에 대해 확신을 가진 인물로 칼빈과의 교류도 원했기 때문이었다. 칼빈은 그곳에서 6개월을 머물다 박해가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바젤로 돌아왔다. 칼빈은 왕의 칙령으로 6개월간의 사면기회를 틈타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에게 속했던 땅을 팔고 영원히 고향을 떠날 것을 결심하였다. 

 

1536년 7월 저녁 어느 날 칼빈은 스트라우스부르그로 가기 위해 제네바의 어느 여관에 짐을 풀었다. 뒤 티예(de tillet)가 이 사실을 알고 파렐(Guillaume Farel)에게 전달한다. 이 사실을 전달 받은 파렐은 여관에 머물고 있는 칼빈을 찾았다. 칼빈의 운명을 달리한 밤이었다. 그 날 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칼빈은 스스로 말하고 있다.

 

“나는 항상 조용히 살기를 원했고, 굳건히 그렇게 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제네바에서 나는 충고나 권유라기보다는 파렐의 전율적인 언급에 의해 눌러앉게 되었다. 하나님이 마치 하늘에서 그분의 거대한 손을 내게 뻗치시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나는 파리에서 내가 살고 싶어 했던 스트라스부르그로 갈 수 있었던 가까운 길을 전쟁으로 말미암아 접어두어야 했다. 나는 빨리 길을 나서고자 했기 때문에 제네바로 거쳐 가려 했으며, 그곳에는 단 하루 밤만 머물고자 했다. 파렐과 비에르 비레의 사역으로 인해 교황주의는 이 도시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도시는 매우 위험하게 당파적으로 갈리고 찢겨 있다. 그 사이 다시 교황주의자로 전락한 뒤 티예(de Tillet)가 나를 찾아내고 제네바에 내가 있음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복음 전파에 불붙는 열정을 가진 파렐이 재빨리 모든 힘을 다해 나를 붙들어 버렸다. 파렐은 내가 개인적 작업에 열중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나를 구속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간청이 내게 별로 효력이 없음을 알고 한탄 스러워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즉, 내가 이런 어려운 상황을 외면한다면 하나님이 내가 애쓰고 노력하고자 하는 학문적 작업에 저주를 내리실 것이라고 하였다. 그 말이 나를 당황스럽고 놀라게 했다. 나는 마침내 여행을 중단해야 했다. 나는 두려움과 전율로 온몸을 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떤 특정한 직분이나 확고한 자리를 맡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CR 59, 23-25. 정미현, 장로교의 뿌리, 50)

 

칼빈은 결국 파렐의 강권에 의해 자신의 일을 묶어두고 제네바에 머물기 위해 바젤에 가서 자신의 짐을 꾸려 다시 돌아왔다. 칼빈은 처음에 제네바에서 별 볼일 없는 존재였다. 시 의회는 그를 성 베드로 성당에서 로마서를 매일 오후 강론하도록 허락 할 뿐이었다. 기록에 보면 단순히 어떤 프랑스 인(Frenchman)이 강사로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파렐의 요청에 의해 적은 봉급을 받고 생활하였다.

 

제네바에서의 초기 칼빈의 개혁은 쉽지 않았다. 칼빈은 개혁신앙의 정신으로 훈육하고 지도하려고 하였다. 특히 성만찬에서 개신교신앙을 고백하는 자 만이 개신교 성찬에 참여하도록 할 계획이었다. 1538년 3월 11일 대 의회는 칼빈의 의도와는 반대되는 베른의 유형에 따라 교회를 운영 특히 성만찬을 시행 할 것을 결의하였다. 칼빈에게 수용하기 힘든 결정이었다. 시의회는 모든 설교자들이 무조건적으로 수용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반대했던 맹인 목사인 코로(Coraud)를 투옥시켰다.

 

칼빈과 파렐은 이에 저항하였고 칼빈은 코로의 수감에 대해 용감하게 비판하였다. 이에 시의회에서는 칼빈에게 설교 금지령을 내렸고 칼빈은 저항의 의무를 주장하였다. 부활절에 칼빈은 성 베드로 성당에서 국가적인 금지령에도 불복하고 설교하면서 성찬예식을 거부하였다. 개신교 설교자와 시의회의 갈등은 지속 되었고 소요가 동반되었으며 총성이 오가기도 하였다. 부활절 후 화요일에 시의회가 소집되어 소요 자들에 대한 구금 형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설교 금지령을 어긴 목사들에 대해서는 72시간 내에 제네바를 떠나도록 결정하였다. 1538년 4월 25일 칼빈은 망명자 신세로 22개 월 간의 생활을 청산하고 제네바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지난 22개월 동안 모든 삶의 영역에서 경건의 삶을 실천하려던 칼빈은 시의회원과 시민들의 반대를 받게 되었다. 거의 매일 칼빈과 동료들에게 시련과 환란이 닥쳤다. 사람들은 그에게 돌을 던졌다. 그리고 개들을 부추겨 달려들게 했다. 때로는 사람들이 개혁자들에게 독약을 먹이곤 하였다. Pierre Viret는 거의 치명적인 독약으로 인해 일생동안 고통을 당하며 살기도 하였다. 폭도와 모욕적인 노래 그리고 그들을 저주하는 일들이 면전에서 일어났다.

 

칼빈이 설교하는 동안 어떤 회중은 일부로 감기에 든 것 처럼 기침을 하고 발바닥을 끌며 방해하였다. 칼빈은 자신의 저축이 바닥 났을 때 물질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시에서 급료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파렐은 시에 요청해서 5개월 동안 지급하지 않은 보수를 받도록 하였다. 이러한 적대적인 환경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자신의 일을 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아니했다. 강의하고 가난한와 병자 그리고 감옥에 갇힌 자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외에 결혼주례와 세례식 그리고 저작 활동을 하였다. 

 

제네바에서 쫓겨난 칼빈은 바젤에 머물면서 시몬 그리네우스 교수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다. 그는 역시 조용히 연구하면서 살려는 의도에서였다. 칼빈은 바젤에 머무는 동안 폐렴에 걸린 파렐의 조카를 돌보고 그의 장례까지 치루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였다. 그는 자신의 저서 일부를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죽어가는 친구의 조카를 돌보면서 칼빈의 경제도 건강도 소진 되었다. 5개월 후 제네바에서 파렐에게 권고당한 것처럼 스트라스부르그의 마틴 부처로부터 긴박한 청빙의 초청을 받아 바질을 떠나게 된다. 

 

“그리스도의 특출한 종 마틴 부쳐는 파렐이 제네바에서 했던 것과 유사하게 강력한 권고의 말씀으로, 내게 새로운 과제를 맡겨 스트라스부르에 오게 하였다.”(시편 서문, 정미현, p. 59)

 

칼빈은 부쳐의 권고에 따라 1538년 9월 8일 성 니콜라스 교회에서 프랑스 이민교회를 담당하게 된다. 개신교 신앙을 위해 피난 온 프랑스 인들의 이민교회는 진리에 대한 갈증과 열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칼빈의 경제적인 삶은 여전히 절망적이었다. 스트라스부르그의 시당국도 제네바처럼 칼빈에게 줄 급료를 제대로 지급하지 아니하였다. 6개월이 지나서야 지불을 받게 되었다. 주 급료는 칼빈이 살아가기에 충분치가 않았다. 그는 파렐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우리가 바질에서 머물던 집 주인이 청구서를 보내왔다. 거기에는 임대료와 더불어 술값도 포함되어 있었다. 칼빈은 혼자서 그것을 지불 할 능력이 없어서 자신이 2개 월 분을 내고 파렐은 7주와 2일을 머물렀으니 그에 해당하는 돈을 지불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칼빈은 파렐에게 아직도 그에게 한 크라운 반을 빚지고 있는데 그것은 가능한 빨리 갚겠다고 하였다.

 

이 사정을 알게 된 친구 드 듀예로부터 칼빈에게 제안이 왔다. 프랑스로 오면 자신이 칼빈의 경제적인 것을 해결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칼빈은 거절하였다. 이것은 칼빈이 다시 로마교회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였다.

 

칼빈이 이곳에서 3년을 지내는 동안 자신을 쫓아낸 제네바는 도덕적으로 문란해졌고 정치적인 투쟁이 계속되었다. 설교자들의 부도덕성이 심화 되었고 시의회원들에 의해 창녀촌이 재개되도록 하는 압력이 가중되었다. 제정된 도덕규율을 위반하는 사람들이 점점 담대해졌다. 시가지에서 나체 스트리킹은 제네바의 젊은이들의 오락 중의 하나였다. 경건하게 살려는 자들과 정치적인 안정을 원하는 자들은 이러한 도덕적 타락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칼빈의 개혁을 지지했던 기욤파라고 불리 우는 사람들은 1538년 이후로 소수로 전락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 가운데 1539년 봄 제네바를 베른에 종속시키려는 정치적인 음모가 있었다. 즉 일찍이 칼빈의 교회법 제정에 반대하던 조항주의자들은 베른과 같이 제네바를 국가교회체제로 만들려고 하였다.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기욥 파렐의 이름을 딴 기욤파는 아미 페랑(Ami Perrin)파의 도움을 받아 대 의회를 통해 반대하였다. 베른파들이 대중의 지지를 상실하게 되고 기욤파들이 정치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제네바는 칼빈과 같은 개혁자가 다시 필요하게 되었다. 

 

1540년 10월 20일 제네바의 사신들이 칼빈을 청빙하기 위해 스트라우스부르그로 보내졌다. 제네바 시에서 파송한 두 명의 사절단이 시장의 문장(seal)이 찍인 공문서를 칼빈에게 전달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네바 시장과 시의회는 우리의 훌륭한 형제요 탁월한 친구인 칼빈 선생님께 편지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말씀의 확장만이 당신의 바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제네바시의 대·소의회와 총의회(총의회는 자신들의 이름이 여기에 쓰여 있다는 것을 당신에게 알려 줄 것을 매우 간절히 우리에게 부탁하였습니다)의 이름으로 정중하고도 간절하게 당신을 초청합니다. 우리들이 당신을 절실히 요청하는 이곳에서 당신의 옛 직무를 다시 맡아 주십시오. 우리는 당신이 어떤 어려움이나 곤란도 느끼지 아니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모든 면에서 당신을 예우하고자 합니다.” 

 

이 공문서 받아 본 칼빈은 죽을 지언정 다시 가고 싶지 않는 제네바를 생각하면서 고민에 빠진다. 그러나 주변의 개혁주의 동료들과 파렐과 부쳐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제네바시를 개혁하기 위해 제네바 정부의 요청을 수락하였다. 

 

1541년 제네바시의 초청을 수락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답신을 보낸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저를 여러분들의 목사로 원하신다면 여러분들의 생활의 무질서를 고치십시오. 만약 여러분들이 신실한 마음으로 저를 망명 생활에서 다시 부르신 것이라면, 여러분 가운데 만연하고 있는 범죄와 방탕함을 제거하십시오. ... 제 생각에 복음의 제일 큰 적은 로마의 교황이나 이단이나, 미혹케 하는 자들이나 독재자가 아니고 나쁜 기독교인들 입니다...선행을 겸비하지 않은 죽은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악한 생활이 진리를 가장하고 행동이 말을 부끄럽게 한다면 진리 자체는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제 저로 하여금 두 번째로 여러분들의 고장을 버리고 떠나 새로운 망명지에서 제 고통의 쓰라림을 삭히게 하시든가 교회 안에 법이 엄격하게 지켜지도록 해 주십시오. 순수한 훈련(discipline)이 재건되게 하소서.”

 

칼빈은 1541. 9. 13 제네바로 향하였다.

 

칼빈은 시의회위원들과 목사들로 구성된 치리회(당회)를 통해 시민의 악을 제거하고 하나님이 원하는 교회와 사회의 질서 회복을 위한 개혁을 시작하였다. 그는 춤, 도박, 주정, 술집 출입의 횟수, 방종, 사치, 접대 행위,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분수에 넘치는 의복 착용, 음란하거나 비 신앙적인 노래 등에 금지, 혹은 비난, 구금 형을 가하였다. 심지어는 잔치 집의 접시까지 세며 규제했다. 주민들의 교회 참석 여부를 감독하는 사람이 파견되었으며, 교회법원의 사람들이 가정을 1년에 한 차례씩 찾아가서 신앙상태를 점검 하였으며, 심지어는 길거리에서 무심코 뱉은 말까지도 책임져야 했다.

 

하지만 제네바 치리회는 사회개혁이 동반된 일벌 백 개 주의의 법정적 기관이 아니라 상담, 중재, 교육을 통해 치유의 기능을 동반한 것이다. 치리회는 시민들의 삶을 바로 세우고 제네바 시를 거듭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시 이 사실을 목격한 존 낙스는 제네바를 기독교 역사이래로 “the perfect school of Christ”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제네바에 돌아온 칼빈은 개혁교회의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중심으로 교회의 규율을 제정할 것을 약속받았던 것이다. 1541년 칼빈이 작성한 교회 규정이 성 베드로 성당에서 성대한 예식을 갖추어 낭독되었고 투표로 결의 되었다. 장로교의 정치적인 체제가 수용된 것이다. 개혁교회를 위한 정치체제가 결의 되었지만 당회구성원의 선출과 임명은 시의회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당회의 의장은 항상 시장이 차지하였다. 결국 제네바의 종교, 사회적 생활은 완전히 제네바의 세속정치지도부의 관할에 놓이게 되었다. 칼빈은 성도들의 영적, 정신적 지도의 권한도 정부의 법령 하에 종속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이에 칼빈은 교회가 정부의 정치적 통제로부터 자유롭게 훈육할 수 있도록 맞서 투쟁하였다. 

 

한 예를 들면 귀족가문의 아들인 필리베르 베르테리에(Philibert Berthelier)의 경우이다. 그는 방탕한 신앙생활로 악명 높았다. 이로 인해 당회(장로회연합회)는 그를 성찬예식 참여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베르테리에는 시의회에 이 사실을 호소하여 성찬예식의 참여를 허락 받았다. 이에 칼빈은 시의회의 결정을 용납하지 않고 맞서 투쟁하였다. 시 의회는 끝까지 칼빈의 저항에 반대하였다. 의회의 서기록에는 “종교개혁자 칼빈이 이에 반대하여 들고 일어난 이유들과 비판점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정미현, p. 78) 칼빈은 의회의 결정에 맞서 투쟁하기로 결정하고 설교 후 성찬 대 앞으로 나갔다. 베르테리에의 성찬참여를 반대하기 위해서였다.(의회의 권고로 베르테리에는 성찬에 참여하지 아니함) 칼빈은 오후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제가 행하는 설교가 제네바에선 마지막 설교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제 의사에 따라 이곳을 떠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들을 제게 강요한다면 저는 결코 그 일에 경솔히 대처하지 않을 것입니다.”(정미현, p. 78)

 

1538년 깨끗이 제네바를 떠났을 때와는 달리 칼빈은 국가의 강압적인 태도가운데서도 교회의 독립과 신앙의 자유를 위한 단호한 결심을 보였다. 칼빈의 개혁은 페랑을 중심한 제네바의 전통적인 귀족가문들과 충돌로 이어졌다. 칼빈이 내세운 권징 혹은 훈육(displina)의 공평한 적용이 기득권층에게 수용되지 아니했던 것이다. 제네바 시민의 자격도 없는 피난민으로서의 칼빈의 신분이 또한 배타성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종교개혁을 위해서는 타협을 모르는 칼빈은 해가 갈수록 어려움에 부딪쳤다.

 

“정치적 책략과 시의회의 공개적 트집 잡기와 억지가 칼빈의 윤리적 엄격성과 대립되었고, 점차 종교개혁적 사역의 중단을 우려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아모, 구뤼에, 페랑, 파브르, 세크, 베르테리에 가문에 대한 유명한 ‘교회 훈육 사례’는 그 때문에 나쁜 상황을 연출해 냈다. 하나님의 법 앞에서 사회적 특권의 정당성을 문제시하는 원칙적 질문을 했기 때문이다.”(정미현, p. 89)

 

파울 베르늘레(Paul Wernle) 같은 자유주의 신학자는 다음과 같이 칼빈의 태도를 적시하였다. “칼빈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자기의 절친한 친구들에 대해서조차 동일한 요구를 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중적 잣대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 바로 갈등의 원인이 된 것이다.”(정미현, p. 89)

 

칼빈은 시장이 당회의 소환을 거부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귀하께서 어떤 이유로 장로연합회에 나타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점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여러 형태로 무게를 재는 불공정한 저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세상법이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면, 하나님의 교회법에도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누구인지 귀하께서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귀하께서 적어도 아셔야 할 것은 제가 하늘 주인의 법을 가장 중심에 두고 섬기는 남자라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 법을 가장 양심적으로 보호하고 지키려는 생각에서 멀어지게 할 수 없습니다. 모두에게 적용되는 법으로부터 귀하에만 치외 법권이 적용된다고 한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럽겠습니까?”(1546년 4월 편지, 김미현, pp. 89-90)

 

칼빈과 반대파들과의 갈등은 지속적으로 칼빈의 개혁과 삶을 힘들게 만들었다. 반대자들은 칼빈의 서적 출판을 위한 복잡한 절차를 요구하여 무산시키거나 지체하게 만들었다. 길에서 칼빈에게 야유가 쏟아졌고 조롱의 휘파람과 “가인, 가인!”이라는 별명을 부르기도 하였다. 칼빈의 집 앞에서 시편 찬송가의 곡에 맞추어 음란한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1547년 칼빈은 비레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못된 일들이 너무 많이 생겨서 교회의 정돈된 상태가 어느 정도 지속력 있게 유지된다는 것을 더 이상 희망할 수 없다네, 특히 내가 하는 일들을 통해서 말일세.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나는 정말이지 아주 부서지고 망가진 한 남자일 뿐 일세”(정미현, p. 91)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교회의 건설을 위해 칼빈은 강인하고 결단력 있게 그들의 악습과 패륜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맞섰던 것이다. 칼빈이 제네바로 다시 온다는 것은 투쟁을 의미한다. 1541-1555까지 투쟁의 삶의 연속이었다. 1545년부터 이단을 대항한 저서를 통한 투쟁도 감당했다. 한때 칼빈의 사망에 대한 소문을 들은 그의 고향 노용의 성당참사들은 죽음을 축하하는 거리행렬을 행사하였다. 1552년에는 곡물시장 광장에 위치한 칼빈의 집이 분노에 찬 이들에 의해 방화가 시도되었으나 다행히도 화마는 피했다. 칼빈이 사망했다는 소문이 무려 10번 정도 보고될 정도로 그는 로마교회의 대적이었다. 그러나 칼빈은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건 수 많은 개신교도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친구가 되었다. 그들은 그가 얼마나 자신을 비우며 가난한 삶을 선택했는지를 보았던 것이다(Halsema, p. 157).

 

매년 수 천 명의 개신교 난민들이 제네바로 이주했고 칼빈은 그들의 최상의 친구로 그의 집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의 아내 드 뷰레는 손님 대접에 여념이 없었다. 칼빈은 피난민들을 위해 시당국에 봉제업을 육성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는 여러 지역에서 온 이들을 위해 다문화 예배순서를 만들기도 하였다.-영어, 이태리, 스페인, 플래미쉬 등. 칼빈은 너무 바빠서 아플 시간도 없었다. 

 

칼빈의 대적들은 칼빈이 부동산을 구매하기 위해 수 천 달라를 투자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때 칼빈은 이렇게 답했다.

 

“우리가 앉아 먹는 식탁도 우리가 잠자는 침대도 우리 자신의 것은 하나도 없는데...어디에서 이런 소문이 났을까? 나의 절친들은 내가 1피트의 땅도 소유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나는 1에이커를 구입할만한 정도의 돈을 한 번도 가져 본적이 없었다.”(Halsema, p. 164)

 

어느 날 추기경 사돌레토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incognito) 제네바에 나타났다. 그는 제네바를 다시 로마교회로 돌려놓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추기경이었다. 그는 캐논 거리에 위치한 소박한 칼빈의 집에 도착하였다. 추기경은 초라한 칼빈의 집을 보면서 개신교의 대표주자로 유명한 칼빈이 이런 초라한 집에 살고 있는데 대해 경아해 했다. 말문이 막힐 정도로 어리둥절하였다. 로마에 있는 감독들도 부와 하인들을 거느리며 대 저택에서 살고 있는데 그리고 총감독이나 추기경들은 왕들처럼 궁전에서 살고 있는데 전 개신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이런 집에 살다니. 그리고 사돌레토는 초라한 검은 망토를 걸치고 문을 열어주는 칼빈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톨레도가 당시 교황인 파이어스 4세(Pius IV)에게 어떻게 보고했는지는 몰라도 교황은 칼빈이 죽었을 때 이런 말을 남겼다. “이 이단의 가장 큰 힘은 돈이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에서 나왔다.”(Halsema, p. 164) 교황은 로마교회의 성직자들에게서 그런 모습은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칼빈은 얼마 안 되는 돈에도 불구하고 늘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얼마 안 되는 수입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기 때문에 진정한 부자이다.”(Halsema, p. 165) 이 얼마 안 되는 돈은 칼빈에게 손님을 대접하고 약값을 지불하고 문전에 찾아온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기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항상 빌린 돈을 지불하지 않고는 시의회의 도움을 받지 아니했다. 칼빈의 병든 기록을 남김 시의회 서기록에는 “who has no resourses”라고 기록되어 있다. 

 

어느 날 시의회는 딱한 사정에 처한 칼빈에게 10 crowns를 보냈다. 그러나 칼빈이 회복되었을 때 칼빈은 그 돈을 다시 돌려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 돈으로 자신을 위해 와인 한통을 사는 비용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 돈을 받아드릴 수 없었다는 기록이다. 그리고 칼빈은 도리어 자신의 봉급에서 10 crowns를 가장 가난한 목회자들을 위해 나누어 주었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해에 그의 두 번째 아이의 병으로 빚을 지고 있었다. 

 

다음 해 소 의회는 칼빈 집에 있는 모든 가구를 그에게 선물하도록 동의하였다. 칼빈은 이제야 자신의 식탁과 침대에서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1548년이었다. 어떤 때는 치솟는 자신의 치료비를 감당하기 위해 25달러를 차용해 주도록 시 당국에 간청하였다. 칼빈은 빌린 돈이 준비되었을 때 시의회에 갚으려고 했지만 시 의회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때 칼빈은 시 의회에 답변을 보냈다.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시는 강단에 서지 않겠다고” 그리고 칼빈은 도리어 그가 받을 당연한 봉급의 일부도 거부했다. 어느 날 목사들이 칼빈에게 그의 봉급을 시 의회에서 올려 주도록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때 칼빈은 시 의회에 자신의 봉급을 평준화해서 다른 목사들에게 나누도록 제안했다.(Halsema, p.165-166) 

 

칼빈은 시편주석 서“나의 일생 동안 내가 부유하지 않았고 돈이 없었다는 것을 설득 시킬 수 없는 어떤 사람이 있다면 나의 죽음이 최후로 그것을 보여줄 것이다.”(Halsema, p. 166) 칼빈이 죽었을 때 그의 재산은 2500달러에 불과했다. 그가 조금 더 살았다면 아마 그것보다 작은 액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마지막 4개월의 봉급은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는 마지막 4개월간 병으로 인해 자신의 목회사역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봉급을 수령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칼빈은 자신의 가난에 대해 이와 같이 말했다. “Satisfied with my humble condition, I have ever delighted in a life of poverty”(Halsema, p. 166)

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칼빈은 실로 그의 주인(Master)의 본을 따라 일생을 살았던 것이다. 1564년 5월 27일 사망했을 때 자신의 유언대로 그를 장례 지냈다.

 

“나의 몸은 축복된 부활의 날을 기다리기 위해 일상적인 형식으로 매장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의 무덤에는 어떤 말도 기록된 것이 없고 무덤을 표시하는 비석도 없이 장례 되었다. 

 

III. 결론

 

칼빈의 일생을 통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칼빈은 불의한 일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분노는 감성적인 분노가 아니라 불의를 묵과하지 않는 의지적인 분노였다. 그는 자신과 함께 개혁에 동참한 자들을 향한 핍박과 그들의 고난과 순교를 지켜보면서 조용히 기도로 하나님께 호소하는 수도원적인 경건한 신앙은 아니었다. 그는 개신교도들을 핍박한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에게 핍박을 중단 할 것을 소원하면서 개혁자들의 신앙이 정당함을 밝히려는 강력한 서한을 보냈다. 그것이 기독교 강요이다. 그는 시편서문에서 강요를 기록한 이유가 바로 형제들이 당하는 불의한 핍박을 간과할 수 없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는 그들을 연민하였으며 안타까움에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연민과 안타까움의 밑자리에는 불의에 대한 분노가 있었던 것이다. 

 

둘째, 칼빈은 저항하는 믿음을 가진 개혁자였다. 그는 신앙 양심의 자유를 주창한 16세기의 자유 사상가로 행동하였다. 그는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었다. 칼빈은 제네바 시의회의 결정이 교회의 성결 원칙에 위배 된다면 단호하게 저항하였다. 칼빈은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단호한 투쟁의식을 가진 개혁자였다. 그는 자신의 직

책을 잃을 각오로 진리 편에 서 있는 개혁자였다.

 

셋째, 칼빈은 예언자로서의 개혁자였다. 칼빈은 종교 개혁자에 앞서 예언자였다. 중세기는 예언자가 없었고 오직 배부른 사제의 역할을 하는 성직자들만이 있었다. 구약의 선지자가 종결되고 중간시대에 예언자가 없었고 살진 제사장들만 있었던 것처럼 중세교회는 사제들만 있었다. 그래서 예수 당시 사제처럼 중세의 성직자들은 제사에 종사하는 특권을 누리면서 치부하며 부패한 삶을 살았다. 이들에게 잘못을 지적할 예언자들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암흑기에 칼빈은 진리를 밝히고 말하는 예언자로 등장한 것이다. 칼빈은 진정한 개혁적인 예언자였다. 

 

넷째, 칼빈은 그리스도의 캐노시스의 삶의 철학을 철저하게 실천한 개혁자였다. 그는 명예와 권력 그리고 물질에서부터 해방된 비움의 개혁자였다. 그의 비움은 헬라의 정숙주의적인 비움이나 수도원적인 자기 비하의 비움이 아니라 개혁자로서 성경적인 삶의 모범을 위한 비움이었다. 칼빈의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통해 오늘날 개혁교회가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이와 같이 칼빈의 개혁정신과 삶이 동반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칼빈은 실제로 자신이 주장한 진리대로 삶을 살려고 노력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먼지처럼 소멸되어 버리기를 원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 자신의 모든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빌며 생을 마감할 정도로 소박하고 정직한 남자였다. 

 

그는 성직자이기 전에, 위대한 신학자이기 전에, 그리고 1 만 명이 넘는 대형교회의 담임목사이기 전에 그의 왕 예수그리스도에게 절대복종하는 겸허한 전도자였다. 칼빈은 1564년 4월 28일 제네바의 동료 목사들에게 마지막을 말을 남겼다. 

 

“여러분은 제가 저지른 많은 실수를 참아내야만 했습니다. 제가 이루어낸 것이란 정말 보잘 것 없습니다. 마귀들은 이 말을 이용하려 들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다시 한 번 말하겠습니다. 제가 이룬 모든 일은 가치 없는 것이었고, 저는 정말 가련한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저는 시종 좋은 의도로만 일해 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의 부덕을 떨쳐내고, 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슴에 담아두고 일해 왔습니다. 여러분도 제 의도가 좋은 것이었다고 추억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제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용서해 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종교개혁 아니 교회개혁은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칼빈은 21년 간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하였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져야 한다고 외쳤는지도 모른다. 왜? 끊임 없는 개혁을 통해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져 왔기 때문에. 그러나 이 모든 개혁은 자기 비움(kenosis)의 삶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땅에 천국 복음을 전한 예수님과 칼빈이 살았던 삶의 여정이자 비움이었기 때문이다. 

 

심창섭 목사[국제개발대학원(GSID) 총장 : 심창섭 목사님은 미국 리폼드신학교에서 목회학석사(M.div)와 프린스톤신학교에서 신학석사(Th.M)를 마친 후, 포체스트룸대학에서 신학박사(Ph.D)학위를 받고 1988년부터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23년간 역사신학 교수로 섬기셨습니다. 이후 교수님은 2013년 은퇴하실 때까지 신학대학원장 및 부총장 등을 역임하시면서, 신학도들이 영적 실력을 갖추고 정의 앞에 정직하며 용감한 믿음을 가진 지도자가 되도록 혼신의 힘을 기울여 가르치셨습니다. 목사님은 현재 선교사 재교육기관인 국제개발대학원 총장으로 섬기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