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부활관"(고전&nbsp15:53-58)

부활(復活)은 기독교(基督敎)의 핵심이며 가장 중요한 교리(敎理) 중에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를 믿고 이렇게 그 의 몸된 교회에 주일마다 모이는 것은 이 주님의 부활을 근거로 하고 이 내용을 믿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라 고 합니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일 뿐 아니라 여전히 죄악 가운데 거할 수 없는 것입니다.(고 전&nbsp15:17) 부활의 진리가 무너진다면 기독교의 모든 믿음이 헛되게 되는 것입니다. (롬&nbsp4:25) 세상의 종교마다 저마다 각 교주의 무덤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만들어 놓고, 그 무덤으로 위엄을 나타내 고 자랑을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이 없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보면 예수님이 묻히셨다는 곳이 있 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예수님의 시체가 없습니다. 텅텅 비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있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성장합 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승리의 믿음을 축복을 주고,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죄사함을 축복으로 주고, 주님의 부활 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라는 부활의 소망을 축복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이시기 때문입니 다. 만약 어떤 감나무에 첫 열매를 맺혔다면 그것은 더 많은 열매가 맺히리라는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부활 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리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였습니다.(요&nbsp11:24,25) 우리 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① 평강을 얻게 되고(요&nbsp20:19,21) ② 선교적 사명을 깨닫게 되고 (요&nbsp20:19,막&nbsp16:15) ③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요&nbsp20:20,21, 행&nbsp1:8) ④ 마음이 뜨거워집니다.(눅&nbsp24:32)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세상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을 논란 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그런데 여러분의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확실히 역사적 사건입니다. 주님 의 부활은 초대교회의 증언과 일치하며,성경대로 이루어진 것이며,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이 많은 역사적 사건입니다(고 전&nbsp15:1-34) 그러면 고린도전서&nbsp15장을 중심으로 바울의 부활관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예수님의 부 활에 대한 바른 교훈을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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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예수님의 부활과 성도들의 부활(고전&nbsp15:1-34절)
사도 바울은 고전&nbsp15:1-34절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과 성도들의 부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에 대한 바울의 변증(1-11절)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역사적으로 부활하셨을 믿었다. 사실상 고린도 교인들도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해 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지성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에 대하여 회의적인 반응을 갖고 있 다. 즉&nbsp18세기 영국의 자연신론과 독일의 계몽주의의 출현으로 '인간 이성'이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이때 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자율이 인정을 받게 되고 따라서 인간 이성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 것이다. 그들은 성경도 인간 의 이성에 판단 대상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의 우주관은 폐쇄된 우주관을 견지하고 개방된 우주관을 배척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우주 내에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설자리 를 빼앗아버린 것이다. 그들은 자연히 초자연적인 사건인 이적을 부인하게 되었고 결국 부활도 부인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그리스도 의 부활을 논할 때 순전히 합리적인 방법으로 ① 시체 도적설 ② 예수님 기절설 ③ 신화설 혹은 신비설 ④ 허위설 ⑤ 무덤 오인 설 ⑥ 환상설 혹은 전파설 등을 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트륄취라]는 신학자는 "성경의 이적은 부활을 포함하여 허위이며 따 라서 부인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전&nbsp15:1-11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역사성에 대하여 분명하게 반박하고 있습니 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을 세 가지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본문 고전&nbsp15:2절에서 "너희가 만 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자신이 전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초대교회의 증언과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전&nbsp15:3에서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다"라고 말함으로 자신의 가르침은 그 당시 초 대교회의 전통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묻히심과 부활을 그들의 신앙의 핵심으 로 생각하고 전달하였습니다.(행&nbsp2:23-33,&nbsp3:12-15,4:10,5:30) 바울은 자신이 전하 고 있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이루어진 초대 공동체의 신앙고백과 일치함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대로"이루어진 사건이기 때문에 확실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전&nbsp15:3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성경대로 이루어졌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서 "성경대로"라는 말씀은 구약 성경을 가리킨다. 우리는 구약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풍부한 자료를 찾을 수 있습니 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도들을 대신하여 매를 맞으며(사&nbsp53:4,&nbsp50:6, 마&nbsp26:27), 성도들이 받아야 할 고난을 대신 받고 (사&nbsp53:5, 롬&nbsp5:6,8), 예수님이 부자의 무덤에 묻히실 것 (사&nbsp53:9, 마&nbsp27:57-60)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구약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의 수족이 찔림을 받을 사실과 그의 옷이 나누이게 될 것까지 자세하게 예언하 고 있습니다.(시&nbsp22:17-18,요&nbsp20:27)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시&nbsp16:10 과&nbsp49편&nbsp15절에 명백하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예언된 내용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어떤 증거보 다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인 성경의 증거가 더 무게가  있고 분명함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경대로"라는 말씀 을 두 번씩이나 사용하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 많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부활은 부인할 수 없는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육체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이 많음을 들어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을 증명하고 있다. 
바울은 예수님이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게바에게 보이시고 열두 제자에게 보이시며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다고 말하고 있습 니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 후의 모습을 본 오백여 형제 중 태반이나 고린도전서를 쓸 당시에 살아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고 전&nbsp15:6,참고 고전&nbsp15:5-8절) 그런데 만약 예수가 부활했다는 바울이 증언이 거짓이라면 살아있 는 사람들이 곧 논박해서 바울을 거짓말쟁이로 몰아세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전혀 없었고 당시의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 의 부활을 증거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 게바에게, 열두 제자에게, 오백여 형제에게, 야고보에게, 그리고 바울 자신에게까 지 보이신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여러 가지 증거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역사성에 대하여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고 전&nbsp15:5-8) 

그런데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고전&nbsp15:12) 이들은 내세의 육체의 부활하 는 자들로서 스토아 학파(금욕주의)와 에피쿠로스 학파(쾌락주의) 등과 같은 자에게 영향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도 시는 헬라의 중심도시로서 이러한 학풍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행&nbsp17:32)

그렇습니다. 행&nbsp17:30-34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반응하는 여러 사람에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아덴의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전할 때에 여러 가지 반응으로 나타난 모습에 대한 말씀입니다. 당시 헬라 의 수도였던 아덴은 로마 시(市)와 알렉산드리아 시와 더불어 세계&nbsp3대 도시 중에 하나였습니다. 아덴의 사람들은 종 교성이 많았습니다(행&nbsp17:23)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한 제단을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그 래서 아덴은 우상의 도시라고 합니다. [아덴]이란 도시 이름도 헬라 여신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지금도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있 는 파르테논 신전은 세계&nbsp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입니다. 또한 아덴은 철학의 도시였습니다. 소크라테스, 폴라톤의 고 향이며 아리스토텔레스와 에큐로스학파(쾌락주의),스토아학파(금욕주의)의 활동무대였습니다(18절) 동시에 헬라 철학의 중심지였습니 다. 그러기에 바로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던 아덴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은 주님의 부활하심을 증거하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 서 본문 행&nbsp17:1절의 말씀과 같이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 그 몸의 부활(復活)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 의 육체의 부활을 전했습니다(행&nbsp17:31절) 그런데 아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① 주님의 부활(復活)을 기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행17:32 상)
행&nbsp17:32 상반절에 보니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하고"라고 말씀하고 있는데,여기에서 ' 기롱'이란 말은 '속여 희롱하는 것, 업신여겨 놀리는 것,비웃는 것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저들은 놀라운 진리의 말씀 을 들었으나 이를 진지하게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비웃고 희롱하고 업신여기고 놀렸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내세의 육체의 부 활하는 자들로서 스토아 학파(금욕주의)와 에피쿠로스 학파(쾌락주의) 등과 같은 자이 있습니다. ① 에피큐로스 학파 사람들은 내 세 즉 사후의 세계를 믿지 않는 현실적 쾌락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② 스토아학파 사람들은 영혼의 불멸은 믿었으나 육체의 부 활은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바울의 말을 들기를 원했으나(20절) 듣고는 믿지 않고 기롱하고 말았던 것입니 다. 이처럼 아덴은 우상의 도시요 철학의 도시라고 했습니다. 미신에 사로잡힌 백성들이나 철학적 지시기나 사변에 사로잡힌 백성들 은 부활의 진리,생명의 도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부활절을 맞이하여 죽은 자의 부활의 도를 모두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 중에서도 아직 미신 에 사로잡힌 자가 많고 철학적 지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자가 많습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말하기를 "아브라함,이삭,야곱의 하나님 은 철학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믿는 자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벧후&nbsp3:3에서는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 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말세 에 "예수님의 재림"을 기롱하는 자들이 있을 것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재림의 근거가 되므로 이들은 별개의 진리의 아니라 하나인 진리임을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② 주님의 부활(復活)을 믿는 것을 연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행&nbsp17:32절 하)
행&nbsp17:32 하반절에 보니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내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 은 저들 중에는 바울의 부활의 증거를 듣고 기롱은 하지 않았으나 부활의 진리 믿기를 연기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신앙 생할에서  "돈을 벌어 놓고 믿겠다","자녀들을 길러놓고 나오겠다","이 복잡한 문제가 해결되면 나오겠다","부모님 이 세상 떠나면 나오겠다"하여 신앙을 결단할 기회와 시간을 모든 핑계와 구실을 동원하여 연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 는 약&nbsp4:14에서 이런 사람들에게 분명히 말하기를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 는 잠깐 모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말씀하고 있고,잠&nbsp27:1에서는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 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수 없음이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 세상을 떠나든지 "부활 신앙"만을 분명히 가지고 떠나야 생명의 부활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모든 묘지 는 둘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자의 무덤과 부활을 기롱하거나 부활 신앙을 연기하던 자들의 무덤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덤 에 계시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은 부활을 믿는 모든 성도들의 영생의 부활을 약속하고 확인하고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③ 예수님의 부활(復活)을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행&nbsp17:34)
행&nbsp17:34에 보니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원 (판사)과 여자도 있었고 남자들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아덴 시민이 냉대하여 거부했으나 그 중에 소수의 심령에게 부활 신앙이 불같 이 옮겨 붙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오늘날 아덴의 헬라인들은&nbsp95%가 그리스도인이라 합니다. 이 헬라를 근거로 해서 희랍정교 회가 동구권에 전파되어 카톨릭과 쌍벽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몇 사람의 심령에 옮겨 붙은 부활신앙의 불길이 이제 와서 전체 헬라인 의 마음을 불붙게 한 것입니다. 모두 기롱하고 모두 연기하고 상황 속에서도 부활을 믿는 자가 생긴 것은 하나님의 선택과 섭리의 역 사인 것입니다. 고전&nbsp1:18절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들에게 하나님 의 능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nbsp26:8-12에 보면 바울은 체포되어 아그립바 왕에게 전도할 기회를 얻어 "당신들은 어찌하여 하나님이 죽 은 사람을 다시 살리심을 못 믿을 것으로 여기시나이까?"하면서 자기 체험담을 간증적으로 들려 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부활의 주 를 믿게 된 것도 결국 하나님이 그를 택하였기 때문인 것을 그는 고백하고 있습니다.(행&nbsp22:14) 그런데 우리 가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단순하게 머리로 이해하거나 믿는 것을 뜻하지 않고 부활의 신앙 을 가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2) 예수님의 부활과 성도의 부활의 연합(12-20절)
바울은 부활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연합된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자신의 부활에서 수동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묘사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성육신하여 우리와 동일시되신 사실을 강조하 기 위하여 예수님이 자신의 부활에서 수동적인 역활을 한 것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바울서신에서 부활(復活)을 묘사하는 용어로 사용 된 것은 주로 "에게이로"(      )와 "아니스테미"(        )라는 헬라어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부활을 설명하는 용 어는 "에게이로"(      )라는 단어인데, 이 말이 능동형으로 사용되면 "하나님이 동작의 주체가 되며 예수님은 수동적인 역할 을 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행&nbsp4:10, 행&nbsp5:30,13:30,37, 롬&nbsp4:24,8:11, 골&nbsp2:12, 살 전&nbsp1:9-10, 엡&nbsp1:17-20) 또한  부활을 묘사하는 다른 동사인 "아니스테미" (        )의 경우도 능동으로 사용될 때 하나님이 동작의 주체이며,예수님이 동작의 대상이 됩니다. (행&nbsp2:24,32) 

반면에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할 때 "에게이로"(      )와 "아니스테미"(        )라는 동사가 수동형으로 사용되 면은 삼위일체의 제&nbsp1위되신 성부 하나님이 부활 행위의 주체자로서 동작의 책임자이시며, 제2위이신 성자 예수님은 일 으킴을 받은 수동적인 입장에 놓여있는 것이 명확해집니다.(고전&nbsp1520,롬&nbsp4:25)

뿐만 아니라 바울은 부활에 있어서 예수님의 수동적인 역할을 강조함으로 예수님의 부활과 신자들의 부활의 밀접성을 제시하고 있 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잠자는 자들과 함께 동등하게 된 것을 강조하며,  또한 예수님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부활하신 것 을 강조하고 있다.(고전&nbsp15:20) 이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과 결속된 사실을 증명하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 저 나신 자"가 되며,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신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가 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요 (롬&nbsp8:29) 둘째 아담으로서 그의 신분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예수님의 부활은 그 성격에 대속적 인 성격이 있을 뿐만 아니라 메시야적인 성격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이 대속적이고 대표적인 만큼 예수님 의 부활도 대속적이고 대표적인 것입니다.(롬&nbsp4:25)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성도가 부활할 것을 보증합니 다. 즉 첫 열매가 되십니다.(살전&nbsp4:14)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과 성도들의 부활이 어떻게 연합하였는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성도들의 부활의 미래(未來)적인 면을 살펴보면 고전&nbsp15:20,골&nbsp118, 고후&nbsp4:14 등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① 고전&nbsp15:20에서 "이제 그리스도께서 잠자는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의 관심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들의 부활은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수확의 첫 열매가 되 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들의 부활의 보증이라고 말하지 않지만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대표적인 성격"으 로 이해해야 하며 또한 세기적인 사건인 일반 부활의 실제적인 시작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앞으로 한번 있을 일반 부활의 첫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논리를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고 전&nbsp15:12-19절의 내용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여기에서 바울은 고전&nbsp15:12에서 "부활은 의심 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고전&nbsp15:13-16에서 신자들의 미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부 인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② 골&nbsp1:18에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는 예수님을 지칭하는 것인데, 특히 그리스도의 부활 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계&nbsp1:5) 즉 부활에 있어서 일으킴을 받을 성도간의 견고한 연합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 다.(롬&nbsp8:29) 이는 일으킴을 받은 죽은 자들의 무리가 있고 예수님이 바로 이 무리들로부터 먼저 나신 자로 나타 나셨다는 것입니다.  유기적인 연합 개념을 생각할 때 롬&nbsp8:29의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 심이니라"와 유사성(類似性)을 가지고 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의 백성을 수확하는 위대한 일반부활의 첫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고 전&nbsp15:20)  이와 같은  연합 개념은 "그는 몸된 교회의 머리라"에서도 잘 나타나 있는데 예수님과 신자들의 결 속된 연합 개념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머리로서 교회뿐 아니라 온 우주를 유지하시는 창조적인 능력의 본체 가 되시기 때문에 타당한 해석으로 생각됩니다.  
③ 고후&nbsp4:14에서 바울은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부활과 성도들의 부활의 연합 개념과 아울러 시간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연합 개념 은 예수와 "함께"라는 구절에서 명시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예수와 함께"라는 말을 쓸 때 신자들이 예수와 동시에 부활했다 는 뜻으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의도는 과거의 예수님의 부활에 기초를 두면서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지 않았으면 우리들에게도 생명으로서 의 부활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예수와 함께"라는 말을 하나님이 앞으로 신자들을 예수와 함 께 살린다는 미래적인 개념으로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과거의 예수님의 부활에 성도들이 연합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 로 인해 성취된 모든 축복을 예수님과 연합된 성도들이 앞으로 부활함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개념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 의 부활이 신자들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었다는 개념과 같은 것입니다. 고후&nbsp4:14에서 미래의 육체 부활의 개념 이 뚜렷이 나타납니다. "예수와 함께 우리도 살리사 너희와 함께 서게 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구절들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성도들이 미래에 분명히 부활할 것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성도들의 부활의 과거적인 면을 엡&nbsp25, 골&nbsp2:12,롬&nbsp6:3,갈&nbsp2:19 둥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 여러 곳에서 성도들이 이미 부활했다는 성도들의 과거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다.(엡&nbsp2:5, 골&nbsp2:12, 롬&nbsp6:3, 갈&nbsp2:19) 
사도 바울이 흔히 "우리들은 일으킴을 받았다"(골&nbsp2:12)라고 쓸 때에는 요셉의 무덤에서 예에수님이 부활 할 때 이미 성도들이 부활했다는 사상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들을 위해 부활하셨고 또한 우리들은 그때 예수님과 함 께 부활했다는 부활사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예수 안에서 부활한 것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신자들의 부활에 있어서 과거적인 측면을 내포하고 있지만 사실상 "우리들이 일으킴을 받았다"라는 구절은 예수님 의 부활에 연합되는 과거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신자 개인 생활에서 발생된 것으로 이해되는 실존적인 의미도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 다. 

2000년 전에 요셉의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이 어떻게 우리의 부활로 연결되어질 것인가가 문제인데, 이것은 믿음으 로 가능하다. 성도들이 믿을 때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되며 따라서 부활의 첫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골&nbsp2:12, 엡&nbsp2:5-10) 특히 엡&nbsp2:2에서는 예수를 알기 전에  생활을 묘사 하고 있고, 엡&nbsp2:10에서는 예수를 안 이후의 생활에 대하여 묘사하면서 후자의 입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 한  골&nbsp3장과 롬&nbsp6:4의 도덕적인 경험을 하게 된 신자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이 예수를 믿을 때 과거의 예수님의 부활과 연합이 되어 성도들은 이미 부활 생명을 살고 있다는 것이 다. 성도들이 비록 부활체로서의 부활은 소유하지 못한 상태이지만 이미 부활을 소유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들 은 과거에 이미 실현된 국면과 아직 실현되지 않은 국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already&nbsp-&nbspnot&nbspyet)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고전&nbsp15:12-20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이 하나의 분리된 사건이라 면 성도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의의가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부활 의 첫 열매로서 부활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고전&nbsp15:20) 

3)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의 비교(고전&nbsp15:21-28)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의 부활은 하나의 연합된 사건이요, 그리스도의 부활은 부활 사건의 맨 처음에 발생한 첫 열매 역할 을 하는 것입니다. 즉 성도들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아무런 의의를 가질 수 없다고 역설적으로 논리를 강조하고 있습니 다. 왜냐하면 바울이 고전&nbsp15:21-28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이 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부활을 언급하면서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칭시킨 것은 [대표원리]을 사용하여 신자들의 부활체의 문제 를 해결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첫 열매의 부활은 이미 발생했지만 첫 열매에게 붙은 자들의 부활은 아직 미래로 남아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 다. 즉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성도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할 것이며, 바로 그때 마지막 원수 사망이 멸망 받게 될 것입니다. (고전&nbsp1526) 즉 성도들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입니다. 

4) 현재의 삶 속에서 증거되는 부활의 확신(고전&nbsp15:29-34절)
바울은 성도들의 부활을 증명하기 위해 고린도 성도들의 삶 속에서 찾을 수 있는 두 가지 요소를 언급하고 있는데, 그 하나 는 고전&nbsp15:29에 언급된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 받는 습관이요", 다른 하나는 고 전&nbsp15:30-34에 언급된 이 세상에서 겪는 고난입니다.

첫째로, 습관을 통한 증거하고 있습니다.(고전&nbsp15:29)
바울은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은 무엇을 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시면 서 그 당시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습관을 예를 들어 죽은 자들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즉 본문의 말씀은 죽은 자들 을 위해 살아있는 사람들이 대신 세례 받아 주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고 전&nbsp15장을 쓰는 이유는 죽을 형편에 있는 사람들이 부활을 의심했기 때문이 아니요, 일반적인 고린도 성도들이 육체 의 부활을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죽은 자를 위하여 세례 받는 습관'을 승인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단순히 고린도 교회에서 발견되는 습관 을 사용하여 죽은 자들의 부활이 분명함을 확신시키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 여 세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라는 질문의 형태로 말함으로 바울 자신과 그들을 구분시키고 있습니다. 바울 은&nbsp3인칭으로 그분을 묘사함으로 자신이 그런 습관과는 무관함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 당시의 미신적인 습관을 사용하면서도 자신은 그 습관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바울의 지혜를 봅니다. 바울 은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습관을 사용해서라도 고린도 성도들에게 성도들의 미래 부활을 확신시키기 위함인 것입니다.  

둘째로, 삶 속에 겪는 고난의 의미(고전&nbsp15:30-34)
바울은 이 부분에서 자신이 복음을 위해 당하는 고난을 열거합니다.  그리고 그런 고난을 현세에 당하는 이유는 미래에 대 한 소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만약 미래의 부활이 없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고 전&nbsp15:32)하는 삶이 우리의 삶이 될 것이라고 말하니다. 바울은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가장 어리 석은 종교요, 기독교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맥을 주의와 권고와 책망으로 끝맺고 있는 것이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 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 전&nbsp15:33-34)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당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타락 한 생활을 하기 때문에 바로 그런 사람들의 삶은 미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삶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의 부활을 믿 는 사람은 타락한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II. 성도들의 부활체(고전&nbsp15:35-52)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들의 부활의 연합 개념에서 성도들의 부활체에 대한 개념을 셍각할 수 있다. 성도들의 부활체도 예수님 의 부활체와 같을 것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바울은 고전&nbsp15장&nbsp35절에서 두 가지 질문 을 하고 있는데  ①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 수 있느냐?  ② 부활할 때 어떤 종류의 몸으로 되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 합리적으로 증명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죽은 자 가 부활할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고 전&nbsp15:36)라고 말하며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38)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 도 바울은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간단한 설명으로 끝나지 않고 고전&nbsp15:38-49에 이르는 긴 설명을 하고 있습 니다. 바울은 고전&nbsp15:42-49 사이에서 죽은 몸과 부활체를 비교하고 있는데, 고전&nbsp15:42 에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는 단적으로 그 비교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죽은 몸"의 특징은 "썩을 것"(고전&nbsp15:42), "욕된 것"(고 전&nbsp15:43),"약한 것"(고전&nbsp15:43)이며 부활체는 "썩지 아니할 것"(고 전&nbsp15:42), "영광스러운 것"(고전&nbsp15:43), "강한 것"(고전&nbsp15:43)이 라고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전&nbsp15:44 상반절에서 지금까지의 비교를 종합하여 한 쌍의  대칭을 말한합니다.
고전&nbsp15:44 하반절에서 "만약 육의 몸이 있다면 신령한 몸도 있다"라고 논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 리 말 번역 성경에서는 "육의 몸이 있는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 하므로 하나의 진술인지 논증인지 확실치 않습니다. 그러 나 원문 성경은 논증으로 이것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연적인 몸에서부터 영적으로 몸으로 그의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몸은 영적인 몸의 조건으 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전&nbsp15:45의 마지막 아담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살려 주는 영이 되셨다고 합니다.
따라서 고전&nbsp15:45은 "첫 사람 아담은 산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라 고 아담과 예수님을 넓은 전망으로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창조로 인해 산 영이 된 것처럼 마지막 아담은 부활 로 말미암아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아담과 예수님을 비교함으로 고전&nbsp15:35에서 제기했던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즉 "부활체 가 어떤 것이냐?"라는 질문에 답을 줄 수 있겠는가? 이것에 대하여 우리 성경에는 확실하지 않지만 원문에 고 전&nbsp15:45 초두에 "이처럼"이라는 말을 하면서&nbsp45절의 아담과 예수님을 대칭시켰습니다. 
그러면 고전&nbsp15:35의 질문과 연관해서 생각할 때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가? 여기서 첫 사람 아담은 몸 을 가진 존재의 표본으로서 육의 몸의 소유자였고 마지막 아담 예수는 부활 후 영적이 몸의 존재를 대표하는 영의 몸의 소유자였습니 다. 즉 부활 전의 우리들의 몸은 아담의 몸과 같은 형편이고 부활 후의 성도들의 몸은 부활 후의 예수님의 몸과 같이 될 것입니 다. 바울 사도는 여기서 아담과 예수를 한 개인으로서 비교하지 않고 대리자로서 비교하고 있습니다. (롬&nbsp5:12,고 전&nbsp15:22)

그런데 바울은&nbsp35절의 질문인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에 대한 대답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체와 같이 그에게 속 한 성도들이 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령한 몸은 살과 뼈가 있으며 (눅&nbsp24:7,39), 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눅&nbsp24:41,42), 다른 사람이 식별할 수도 있고 (눅&nbsp24:39), 사람이 만질 수도 있습니다.(눅&nbsp24:39) 그러나 신령한 몸은 시간과 공간의 영 향을 받지 않습니다.(눅&nbsp24:36) 
신령한 몸은 썩지 않고(고전&nbsp15:42), 영화로운 몸이며(고전&nbsp15:43), 강한 몸이다(고 전&nbsp15:43), 고전&nbsp15:47에서도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하늘에 속한 자요, 그에게 딸린 자들 은 고전&nbsp15:49에 있는 대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 즉 신령한 몸을 입게 될 것입니 다. 이 신령한 몸을 입게 될 때 신자들의 구원이 완성되게 됩니다. 그래서 롬&nbsp8:23에서는 "우리 곧 성령의 처 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했고 고후&nbsp5:12에서 는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 에게 있는 줄 아니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 다.  

그렇다면 성도가 어떻게 자신의 육체 부활을 확신할 수 있는가? 
①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성도의 육체 부활을 보증해 줍니다. 
성도들의 육체 부활에 대한 확신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지를 고찰하면 명백해 집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 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엡&nbsp2:8) 그러면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 우리 가 믿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입니다.(롬&nbsp10:9-10)

그러면 믿음은 어떻게 생기는가? 인간이 자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수 있는가? 성경은 인간의 자력으로 예수를 구 주로 믿을 수 없으며, 예수의 고난과 부활을 자신을 위한 사건으로 믿을 수 없다고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엡&nbsp2:1-7) 우리들의 "믿음으로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롬&nbsp1017)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말씀과 함께 역사사려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 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 를 주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nbsp1230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을 때 성령께서 우리 마음 에 역사 하여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게 하며 그의 죽음과 부활을 우리를 위한 사건으로 받을 수 있게 하 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우리 속에 역사 하신 그 순간부터 성령은 우리 속에 내주 하시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 순간부터 성도들은 성령 의 인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엡&nbsp1:13-14) 그래서 성경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 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nbsp3:16,6:19)라고 말한 것이다. 예수 믿는 성도 들은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이 일단 성도 안에 내주 하시는 일을 시작하시면 성령이 일단 성도 안에 내주하시 는 일을 시작하시면 성령은 그 선한 일을 끝나지 유지하시고 이루시게 됩니다.(빌&nbsp1:16) 여기서 우리는 성도들 의 부활의 확신을 찾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미래 육체 부활을 위해 하나님께서 쓰실 도구는 우리 속에 내주 하시는 성령 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 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nbsp8:11)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 님은 성도 속에 내주하는 성령을 도구로 사용하여 성도들의 죽을 몸을 살리실 것입니다. 

② 같은 성령을 도구로 사용하십니다.(롬&nbsp8:11)
롬&nbsp8:11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부활시킬 때 성령을 도구로 사용하셨으며 앞으로 성도들을 부활시킬 때도 성령 을 도구로 사용하실 것을 명백히 합니다. 그리고 과거에 발생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떻게 성도들에게 적용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 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신자 안에 거주하는 성령이 과거의 그리스도 사건과 신자들의 현재 경험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고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은 신자들로 하여금 생명의 새로움을 가지고 현재 생활을 계속할 수 있게 합니다. (롬&nbsp6:4) 확실히 신자가 생명의 새로움을 가지고 생활할 수 있는 것은 마치 자신의 생애에서 발생한 것처럼 그리스 도와 함께 부활한 데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의 생명은 부활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의 현재 생활도 영적인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롬&nbsp8:1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 의 부활을 유추로 사용하여 신자들의 미래 상태를 확신시키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의 기본적인 사상은 예수를 이가 하나님 아버지로 서 바로 그가 신자들 안에 거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상에서 예수님의 부활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들을 살리셨다는 삼위일체적 성격을 찾을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확고한 연합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의 부활에서 사용한 도구나 신자들 의 부활에서 사용할 도구나 모두 같은 성령이며 그 성령이 현재 신자들 안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은 신자들의 부활의 확실성을 제시 해 줍니다.  성령이 현재 신자 안에서 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명백해진 부활의 원리가 현재 신자 안에서 역사하 고 계신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신자 안에 거하고 있는 성령이 장차 죽을 몸의 부활을 확실히 보증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 령은 미래에 있을 완전한 구속의 약속이 되는 것입니다. (롬&nbsp8:23, 엡&nbsp1:14)그렇습니다. 성령 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나 신자들의 부활에서 도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육체 부활에 대한 확신은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과 정비례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 면 성도 자신이 에수를 확실히 믿기만 하면 그 안에 성령이 내주 하실 것이요, 하나님은 그 내주 하시는 성령을 도구로 사용하여 성 도들의 죽을 몸을 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확실히 믿는다는 그 자체가 장차 있을 성도들의 육체부활을 보증해주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확실한 방법으로 성도들이 미래의 육체부활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계획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현재 의 삶은 부활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III. 부활 신앙과 윤리(고전&nbsp15:53-58)
바울은 고전&nbsp15장의 마지막의 결론으로 현재 살아있는 성도들에게 간결하면서도 심오한 권면을 한다. 즉 본문 은 부활의 승리에 대한 말씀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 같이 우리도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이지만 이것은 미래적인 측 면 뿐 아니라 과저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이미 부활 생명을 가 지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있는 자들이다. 
그런데 부활 생명을 소유한 우리들이 소유할 부활 신앙과 윤리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1)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을 돌려야 합니다(고전15:57)
사도 바울은 성도들은 "다 잠잘 것이 아니요"(고전&nbsp15:51),"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15:520,"죽지 아니함으로 입게될 것이다"(1553) 하나님은 인간을 그렇게도 괴롭힌 죄 문제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 해 해결하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서신 다른 곳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nbsp623)고 했다. 사망의 문제만큼 인간을 많이 괴롭힌 것이 없다. 많은 군왕들이 오래 살고 사망을 피하기 위 해 그들의 재물과 그들의 권력을 총동원해서 노력했지만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들의 죽음의 문제를 예수님의 죽음으 로 해결하셨다. 하나님은 죽음의 문제를 역설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신 것이다.  이처럼 죽음으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이 하나님 의 지혜이다. 하나님은 죽음을 통해 죽음을 해결하시고 부활로 이를 확증하셨다. 부활은 사망을 이긴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망 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으냐?"(고전&nbsp15:55)라고 승리를 외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망의 세력을 무효케 하 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2) 견고하며 흔들리며 말아야 합니다(고전15:58 상)
성도는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승리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승리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예수 그 리스도 안에서 이미 승리하였기 때문에 동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선전이란 것은 참말이라는 것도 절반쯤 거짓이고 혹 은 거의 다 거짓입니다. 기독자는 진리를 믿음에 있어서 벌써 승리자의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벌써 그의 구원이 그리스 도 안에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딤후&nbsp1:12에서 "이를 인하여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 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nbsp57:7에는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 가 찬송하리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시&nbsp108:1,112:7) 마음이 확정되지 못하는 원인은 미련한 데 있습니 다. 미련하여 일정한 목표를 잡지 못하였으니 만큼 안정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잠&nbsp17:24에서 말하기를 "미련한 자 는 눈을 땅 끝에 두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씁니다. 믿는 사람도 미려한 사람이 있습니다. 곧 허욕을 몇 백 가지나 가지고 예수를 믿 는 자는 미련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리스도 제일주의 곧 하나 님 제일주의로 마음을 작정한 다음엔 흔들리지 않습니다. 
무디 선생은 예수만 원하는 신앙 심리에 대하여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① 전엔 축복받는 것이 내 소원이었더니 지금 은 주님 자신이 내 소원이며 ② 전엔 내가 감정 중심이었더니 지금은 그의 말씀중심이며 ③ 전엔 내가 쉬지 않고 달라고만 하였더 니 지금은 그가 나를 사용하심을 내가 원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중심생활 곧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견고하게 하며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입니 다. 그렇습니다. 불신자로 한 번 마음을 정한 뒤에는 흔들리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물며 그리스도인이 견고하며 흔들리며 않아 야 함은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반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한 기초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활신앙을 갖고 있는 자 는 어떠한 상황과 환경 가운데서 결코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3)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고전15:58 하) 
사도 바울은 본문&nbsp58절 하반절의 말씀을 통하여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nbsp...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말씀은 현재의 몸을 가지고 살면서 육체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친다. 우 리는 부활하신 주님이 육체로 계실 때  어떻게 살았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 주님이요,주인이며 왕이시라면 그리 고 우리들이 앞으로 부활하신 주님처럼 부활체를 입게 될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시기 전 그의 육체로 계 실 때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를 배워 그대로 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요셉의 목수일을 도우면서 자라고 강건해졌다. 그는 그의 삶 속에서 자제하는 것을 배웠다. 그는 휴식을 취해아만 했 고 잠을 가야만 했지만 여러날 밤 아버지께 기도하면서 지냈다. 그는 먹어야 하고,마셔야 했지만 그는 이런 식욕에 의해 주장되지 않 았다. 예수님은 항상 자제와 단련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처럼 이미 부활 생명을 소유하고 살고 있 는 성도들은 예수님의 부활하시기 전에 사셨던 것처럼 현재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산 제사로 드리라"(롬&nbsp12:1)로 권면하 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몸을 가지고 있는 동안 "죽은 몸"이 아니라 "살아있는 몸"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며 기뻐하실 일 을 예수님처럼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부활의 확신을 믿고 사는 성도들의 삶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지금 조직이나 전통이 나 제도의 무덤 속에서 제도의 무덤 속에서 시체를 바라보는 기독교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지금 부활하신 주님 과 함께 행동하는 그리스도인,능력을 행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사명의 권세를 깨뜨리고 주님께서 부활하신 오늘, 우리의 잠들었던 영혼이 다시 깨어나고 게을렸던 마음들이 다시 분발함을 얻으 며 우리의 눈이 더욱 밝아져 우리를 부르신 부름과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인도하심에 대하여 우리의 마 음 깊은 곳으로 부터 새로운 깨우침과 죽었던 시체가 일어나는 것 같이 놀라운 전기가 마땅히 있어야 되는 주님의 이 부활의 오늘이라 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사람과 죽음이 두려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것이 두렵지 않을진데 왜 비 맞는 것이 두렵고 바람 부는 것이 두려겠습니 까?  혹시 우리는 비 맞는 것이 두렵고 바람부는 것이 두려운 자가 아닌가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미련한 자 들입니다. 우리는 더디 믿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더 많이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 속에 새겨 봐야 되고 그 약속을 따라 믿는 우리 의 도리들을 하나님 앞에 더 많이 구하야 하며 은혜를 구하고 긍휼을 구하며 우리의 우리된 것을 놓치지 않기로 주님 앞에 무릎을 꿇 을 줄 아는 자로 결심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죄악의 사슬로부터 그 결박을 풀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이 가 우리을 의와 거룩과 평강과 희열을 위하여 부르신 줄 마음에 기억하시고 우리의 자랑과 행복과 축복을 놓치지 않겠다는 결심하시 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이냐는 모든 세상의 화살들 앞에 그 도전 앞에 "넌 몰라! 그러나 나는 내가 누리는 이 신앙 의 행복함과 기쁨을 방해 받을 없어"라는 자랑스러운 답변을 마음에 채움으로 갖고 있겠다는 주의 약속을 따라 결심  아름다운 시간 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만에 다시 살아 나시 사..",그리고"(나는) 몸이 다시 사는 (믿사오며).. "라는 사도 신경의 두 구절과 관련된 주제들을 말할 때 그는 예수 그리스 도의 절대적인 독특성과 자연성을 고백하는 것으로서 그가 사람들에게 가져다 주는 특별한 소망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 떤 종교도 이와 같은 구절의 고백이 담겨져 있는 것이 없습니다.  
부활의 생명을 가지고 지금 조직이나 전통이나 제도의 무덤 속에서 제도의 무덤 속에서 시체를 바라보는 기독교의 틀을 벗어나 야 한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지금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행동하는 그리스도인, 능력을 행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 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온전히 찬양하는 기쁨으로 구원의 감격함을 언제나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부활에 대한 아덴 사람의 세 가지 반응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롱 하 고, 어떤 사람은 연기하고, 어떤 사람은 믿었습니다. 물론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은 세 번째 사람처럼 주님의 부활을 확실히 믿 을 줄 믿습니다. 그러나 믿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진 자처럼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을 돌리는 생활, 견 고하며 흔들리지 않는 생활,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성경대로 십자가에서 죽 은 지&nbsp3일만에 부활하신 것처럼 주님은 성경대로 반드시 재림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이 재림하시 기 전에 열심히 믿음 생활을 하고, 여러분의 가족과 이웃과 일가 친지들에게 전도하고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여 우리 주 님이 재림하실 때 모두 생명의 부활을 선물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