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세례


안형식




1. 성령의 세례와 충만에 대한 인식의 범위

모 신학대학에서 은퇴 목사님들을 대상으로 성령의 체험이 있는가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다. 질문
하였던 질문자는 응답 내용을 검토한 결과 응답자 중에 약&nbsp15%에 해당되는 목사님들이 성령의 
체험이 없다고 지적하였다. 

우리는 이에 당혹해 하면서, 
1. 워치만 니와 윗트니스 리의 당회, 노회, 총회의 회의를 정면 거부하고 있는 성령론. 
2. 귀신 떼거리와 싸우고 있는 베뢰아의 성령론. 
3. 장막에서 나오지를 못하는 신천신지의 장막론의 성령론과 포장되어 있는 무료성경신학원. 
4.&nbsp70인 역의 헬라어 원전의 성령을 고집하고 있는 킹제임스 버젼만 성경으로 믿고 있는 말씀보
존학회의 어정쩡한 성령론. 
5. 전도를 목적으로 천사와 성령을 이리 저리 막 부려먹는 다락방의 성령론을 경계하며, 
6. 신앙의 단계를 인위적으로 판단하고 조정하고 감독하고 있는 영성훈련원의 성령론을 경계한
다.

(1) 성자와 성령의 우선순위에 대한 갈등

베뢰아에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성부 하나님의 위치에 버금갈 정도로 올려 놓고 막 부려먹
고 있는데, 베뢰아의 핵심은 오직 예수이며, 오순절 계통은 교회의 시대를 성령의 시대로 분류하
여 성부와 성자의 시대는 갔고 성령의 시대가 왔다는 주장을 폄으로 해서 성령의 시대임을 확인
시키고 있으며 오직 성령이다. 이렇듯 제각각의 모순을 짊어지면서도 강조하고 있는 배경은 역
시 성경 해석의 범위와 적용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이며 교단의 배경은 성경의 해석의 차이와 강
조점이 교단별로 각각 특징이 있음을 반영한다.

종교 개혁 후 거의&nbsp550년이 흘러가면서 제각각 바벨탑 짓기를 포기하고 흩어진 무리들처럼, 교단
은 성경해석에 견해를 같이 하는 무리들을 대상으로 교단을 만들어 냈고 그 교단의 특징은 오늘
날 우리가 보는 바와 같다. 

목사 및 교역자들은 그래도 이 차이점에 대하여 알만 한데 반하여 평신도들은 성경해석의 차이
가 얼마나 크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으며 그 배경에 대하여는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
다. 이른바 인본주의 신학이 자리를 잡을 수 있는 배경이기도 하다. 이제 신학은 눈에 보여 지거
나 감각적으로 움켜쥐어지지 않고는 마음을 정화시키고 다스리는 도의 수준에 머물게 되었다. 이
런 차제에 대응하여 여러 가지 영성훈련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시대상에 대한 반등이며 마땅
한 것이라 하겠다.

교인의 관심도에 따라 반응되어지는 영성훈련의 종류도 많아 여차 직하면 불온 영성훈련에 빠질 
수밖에 없겠고 일부 목회자들의 경우에는 자신의 교인들을 인솔하여 어떤 세미나에 참석하였다
가 부작용이 너무 심하여 목회를 그만 두어야 할 지경에 있는 교회가 생겨났다. (여수에 있는 어
떤 교회는 얼마 전에&nbsp88체육관에서 모였던 집회 세미나에 참석하였던 안수 집사님&nbsp6 분 중에&nbsp4분
이 교회를 떠났고 나머지&nbsp2분도 곧 떠날 것이라는 기가 막히는 소식을 전해왔다.) 성령을 오해하
는 것에서 비롯되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목회자가 성령에 대하여 인식이 
부족할 때 나타날 수 있는 현상으로 보아서 성령론에 대하여 인식을 정돈해 주어야 하는 책임감
으로 후배 목사들을 위하여 몇 자 남긴다.

(2) 성령의 세례와 성령의 충만에 대한 이해.

차영배 교수는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영으로서 오순절 성령의 강림사건은 단회 적인 사건이
며, 오늘날의 성령의 충만 과는 비교가 된다고 설명하였다. 그 예로 사도성의 차이와 방언의 차
이를 들었다.(주&nbsp1) 
오순절 성령에 대하여는 목격자가 아님으로 해서 생략하고 오늘날 일어나고 있거나 혹은 체험되
고 있는 성령론에 대하여 현상적으로 접근한다.

1) 성령의 세례

성령의 세례는, 성도들이 믿을 때에 받은 분이 있는데, 이는 성령을 체험하고 교회에 출석하게 
된 교우들이 증거이다. 이들은 통상적으로 급박한 처지에서 구원을 받은 현상이 말해지고 있으
며 주로 병상, 혹은 사고 현장에서 성령을 체험하게 된 특이한 경우이다.

부흥회 혹은 수련회, 기도원 등의 집회를 통하여 성령의 세례를 받은 이가 있는가 하면, 공동체
의 영성훈련을 통하여 성령의 세례를 받은 이들이 많이 보고 되고 있다. 이들의 특성은 아주 갈급
하게 성령의 역사를 갈구하였고 성령의 체험을 간절히 소원한 결과로 응답받았다는 특징이 있
다. 이들은 하나같이 성령의 세례를 불세례로 표현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방언이 경험되었고 혹
은 입신이 경험되었고 환상을 보았으며 특이하게는 환청을 경험하였다고 한다. 특히 환청에 대
하여는 경각심을 가져야 하겠는데, 환청을 경험한 이들의 신앙생활의 결과가 아주 좋지 못함으
로 경계해야 하겠다.

이들이 받은 성령의 세례는 최초로 받은 성령의 충만함이며 이런 충만함은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는 점에서 성령의 세례로 구분하는 것이 옳다. 신학적으로 이러한 현상을 신현 (Theophany)으
로 부르는데, 창조주께서 피조물인 인간을 현실의 세계에서 덮으심으로 해서 인간이 견디지 못하
고 반쯤 죽은 상태가 되어 버리고 만다는 뜻이다. 따라서 현상적으로&nbspecstasy의 상태가 되고, 이 
때에 죽을병이 치료를 받는다. 혹은 방언, 입신, 예언 등의 은사가 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성령
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당사자가 반드시 알게 되어 있다는 특성이 있다.

2) 성령의 충만

성령의 충만함은 성령의 세례와는 구분하여 설명을 하는 것이 통상적이며 성령의 세례를 받은 초
기 성령의 충만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으로 말해진다. 즉 처음 성령의 세례를 받고 난 뒤에도 계속
적으로 그 상태와 신앙을 유지해야 하는데 비하여 세상살이를 하다 보면 성령의 세례를 받은 초
기 상태에서 점점 쇠퇴하게 되고 이는 성령의 충만함이 소멸되어 지는 것으로 사도 바울은 에베
소서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지속적으로 받아야 함을 말씀하여 성령 충만의 상태가 지속되어져야 
세상을 본 받지 않게 된다고 말씀한다. (엡&nbsp5:15-17) 거룩의 수단이다. 성화의 기본이다.

따라서 성도는 성령의 충만함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여야 한다는 명제가 성립된다. 하물며 
평신도들도 성령의 충만함의 상태를 지속해야 하는데 목사일까 보냐. 교인의 영성을 지도한다는 
말은 성령 충만함의 상태를 지도한다는 뜻으로 보아야 하겠고, 성령을 체험하지 않고는 영성을 
지도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오직 성경을 토대로 교과서적인 지도를 하겠다면, 중심을 견고히 가지고 해야 할 것이다. 교인은 
안달복달 하면서 영성훈련원에 쫓아다니지 않도록 잘 가르쳐 주고 목사부터 기도회에 적극 참석
하며 평생 기도에 힘을 쏟아야 한다. 오직 성경에 빠져 들게 되는 은사를 비둘기 같은 성령의 충
만함을 받았다고 표현하고 있으며 이는 참으로 불 성령을 받은 것보다 작지 않다.

(주&nbsp1) 사도성이란, 오늘날에도 성경을 기록할 수 있느냐? 하는 사도의 권위를 말함이며 오늘날 
방서, 예언서를 쓴다고 하는 귀신들을 원천적으로 막고 있는 말이다. 방언의 차이란, 사도 당시
에는 각국의 언어(방언)로 들었으며 오늘날의 방언은 "랄랄랄" 방언이 더 많다는 차이. (방언 및 
방서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nbsp13절의 박철수 목사의 영성에 대한 고민에 기록되어져 있으니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3) 성령 체험의 허와 실

1) 허

통상 불세례를 받았다 혹은 성령의 체험을 많이 받았다 하는 은사 파들 치고 팔자가 늘어진 분을 
못 보았다. 이분들은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했다면, 신앙을 포기할 만한 굴곡과 박해 혹은 괴로
운 생활에 견디지 못했을 분들이며 받은 은사를 바탕으로 신앙생활로 버텨 나간다. 이런 이유로 
성령의 불세례를 통하여 평생 하나님의 자녀 되었음을 각인시켜 주시고 믿음생활에서 이탈하지 
못하도록 인쳐 주심이 분명하다. 생활은 가난하고 때로는 곤고하며, 때로는 질곡의 세월을 살고 
있는 분들이며 쉽게 말해 팔자가 드센 분들이 은사를 많이 체험하고 있는 터이다.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결과를 토대로 볼 때에 그렇다는 말이다.

2) 실

비록 도마와 같은 신앙이라고 해도 성령의 충만함을 혹은 성령의 세례를 받은 분들은 절대로 믿
음을 배반하지 않는다. 이들을 통해서 교회마다 전도가 되고 있으며 이분들을 통하여 교회에 봉
사가 되고 있다. 이분들의 저력은 성령의 충만함이 원동력이 되어있음으로 해서 자신들이 성령
의 응답으로 주어진 일이라고 하면 자신의 집도 팔아 올릴 만한 저력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러한 은사 자들의 헌신과 봉사 그리고 충성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으며 견고해지고 있는 터이다.

[성령을 체험한 분들을 잘 알아주라. 그리하면 교회의 성장과 부흥의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4) 영성이란

1) 영성이란

모든 종교는 나름대로의 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종교 목적을 향한 추구, 혹은 발로라는 의
미를 가질 때의 이야기입니다. 기독교는 영성을 [영의 생각]을 품었다, 혹은 [성령의 나타나심]
이 있다 로 표현합니다. 즉 삶의 족적에서 성령의 나타나심의 흔적이 얼마나 되느냐? 혹은 성령
의 나타나심이 있느냐? 없느냐? 로 따져 지는 것이지요. 기도와 말씀으로 훈련된 [영성훈련]은 
거룩한 족적을 나타내며 사도행전&nbsp10장에 나타나고 있는 고넬료와 그 가정이 한 예가 되겠습니
다. 경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성의 흔적은 경건으로 나타납니다. 그 외는 다 가짜배기 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영성이 많이 나타납니다. 기본입니다. 성경 말씀을 깊이 상고하면 영성이 많이 
나타납니다. 기본입니다. 이것으로 그 사람의 영성에 대하여 얼마나 깊이가 있는지를 알게 되어
져 있습니다.

2) 문제가 되는 공동체를 통한 영성 훈련

문제는 내 개인적인 영성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하여 검증받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는 것
이지요. 은혜를 받았는데, 예를 들면 방언을 받았는데 [마귀가 주는 방언이 있다더라]라는 말에 
놀라서 그럼 내가 받은 방언은 진짜냐? 가짜냐? 를 알고 싶어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
여 기도해 주신다고 하는 분이 " 내 기도 응답에 당신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
다." 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을 때에 족쇄가 채워진다는 말이지요.

위의 두 가지 사례는 비일비재한 내용입니다. 귀하는 혹시 이렇게 하여 신령하다는 분의 예언기
도로 [신학교]를 다니며 하품하고 있지는 않은가 모르겠습니다.

***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려면 당당하게 오셔서 나를 부르시지 왜 다른 사람을 통하여 나를 쓰
시겠다고 하겠습니까? 사도행전&nbsp9장을 보면 사울이 바울이 되는 변화의 동기가 서술되어져 있습
니다. 참고 하십시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예수님도 아니고 누가 끼어든다는 말입니까? 속
지 마십시오 ***

이런 일들이 대략 공동체의 삶을 지향하는 [기도원]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
야말로 기도원에 갔다가 신세 망치게 된 사람이 많이 있다는 말이지요. 이 중에 가장 강력한 것
은 [꾸르시요]가 원어인&nbsp3박&nbsp4일의 영성훈련입니다. 이름 하여 [트레스 디아스]이지요. 가히 
[풀무불 체험]이라고 부를만한 가공할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반드시 
[거기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이단들이나 대학생 선교회, 등등에서 이미 사용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는데요. 거기에서는 이 과
정을 수료하면 [지도자] [선생]등의 지위를 줍니다. 전도학교 영성훈련원 등등에서 이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널리 퍼진 촉매는 이명범의 [렘]입니다. 아주 독합니다. 현재 부흥사
로 뛰고 있는 어떤 목사는 여기에서 이명범 씨를 찬양하며, 지금까지 [헛 목회]를 했는데, 앞으로
는 [새 목회]를 하겠노라고 감격에 차서 울부짖었습니다. 그리고 이명범 씨에게 최대한 감사의 
표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3) 방언이란,

방언의 정의는 [글로셀랄리아]라는 원어로서 글로셀과 랄리아의 복합어입니다. 글로셀이란 말, 
옹아리를 말하는 것이지요. 랄리아란, 반복을 말합니다. 고로 방언이란 "옹알이를 반복 한다"라
는 뜻입니다. 사도행전&nbsp2장에 나오는 방언은 각 나라 각 족속의 방언이라고 했는데요. 이는 서로
가 알아먹을 수 있는 그 시대에 사용되어지고 있던 언어였습니다.

현대의 은사로서 말하는 방언과는 아주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현대에서 은사로 말해지는 방언
은 저도 못 알아먹고 남도 못 알아먹습니다. 다만 깊은 기도에 들어 갈 수 있도록 기도에 집중하
는데 효력이 있습니다. 방언하지 않고는 깊은 기도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교통
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 와 주시지 않는 한 내가 임의로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는 체널
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방언 무시하는 목사님은 깊은 기도를 체험하지 말라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도 방언을 한다
고 했고 사도는 다 자신과 같이 방언을 할 수 있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유익이 그만큼 많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형식 저, [인터넷시대의 영성과 레마선교회 비판], 개혁주의신행협회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