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관 복음의 제자도

김경진

1. 제자란 누구인가?

오늘날 한국교회는 지난 세기동안 세계교회 역사상 그 유례가 없었던 성장율이 둔 화되면서 점차 정체성(停滯性)을 띠기 시작하 고 있다. 자연의 생명체에 서 우리가 볼 수 있듯이, 어떤 생명체가 성장이 둔화되면서 정체성을 띠게 되면 대개 거기에는 문제가 따 르기 마련인 것이다. 아니 어쩌면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 결과로 성 장이 둔화되면서 정체성을 띠게 되는지도 모른다. 이런 정체성 의 위기에 직면하여 한국교 회는 이 위기를 탈피하고자 온갖 노력과 방법을 동원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제자훈련] 인 것 이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한국교회는 [제자훈련]이란 말을 많이 쓰고 있다. 평신도를 제 자로 간주하면서,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 을 교육 및 훈련시켰듯이, 교회 는 평신도 제자 들을 교육 및 훈련시킴으로써, "평신도를 깨우며" 교회 부흥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 다.

교회의 부흥과 발전에 있어 담임목사 한 사람의 역할이 대단히 중 요한 것은 분명한 사 실이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목 사 한 두 사람의 노력만으로 교회 부흥 이 보장될 수는 없 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이제까지 한국교회에서 크게 주목되지 않아 왔 던 평신도들의 교육과 훈련의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활성화된 것은 한국교회의 발전을 위 해서 매우 고무 적인 일이라고 생각된 다. 그러나 지금의 교육내용의 제자훈련이 과연 한 국교회의 위기를 구제해 줄만한 적절한 대안(代案)이 되고 있는 것일까? 사실 이 처럼 유 행을 타고 있는 제자훈련의 내용을 조심스럽게 검토해 보면, 형식만 바뀌었을 뿐 교육과 훈련의 내용은 크게 달라져있지 않음 을 보게 된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있는 것처럼 포장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 핵심이 되는 내용은 여전히 과거의 교육 내용의 반복 인 것 이다. 중요한 것은 형식과 포장이 아니라 내용과 알맹이이다. 아무리 포장이 바뀐다 하 더라도 속에 있는 알맹이가 바뀌지 않 는다면 그런 변화는 무의미한 것이다. 오히려 교 육 내용의 새로움을 통하여 심령이 변화될 때,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 엮시 변화하 게 되며, 이러한 심령과 행동의 변화는 결국 교회의 성장으로 연결될 수 있 는 것이다.

따라서 제자훈련이 형식을 바꾼 채 또 하나의 평신도 성경공부로 끝나버린다면, 이 엮시 적절한 대안은 될 수 없다고 보여진 다. 문제는 방법이 아니라 교 육의 내용, 즉 원 리이다. 제자로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아는 것 이 중요 하기는 하지만, 제자가 누구이고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원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구속 적 율법이 되고 말 뿐이다.

이런 이유로하여 나는 [제자훈련]의 기본적 원리를 복음서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 님과 그 제자들의 관계 속에서 찾아내어, 오늘날 제자로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신앙 과 생활의 지침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내가 제기하고자 하는 질문은 "과연 제자 곧 평신도란 등 식(等式)이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 로 우리는 복음서에서 제자란 예수 님께서 부르시어 선택한 열두 명의 추종자, 즉 사도(使徒)로 알고 있다. 이런 인식으로 인해 어 떤 평신도 는, "제자가 주님께서 택하신 열두 명의 사도들이라면, 주님께서 복 음서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명령들을 어찌하여 평신도 인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가 있 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였다고 한다. 이 문제와 함께 "역사적 제자들에게 주어진 주님 의 명령 이 오로지 그들에게만 적용되어야 한다면, 그 말씀이 모든 인류를 의한 성경에 구태여 기록될 필 요가 있었을까? 기록되었다면 그 이 유는 무엇일까?" 하는 질문 엮시 마땅히 답변되어 야 할 줄로 생각된다.

이러한 일련의 질문의 배후에는 [제자 개념]에 대한 이해의 부족 이 함축되어 있다.

과연 사도(使徒), 즉 역사적 제자들만이 제자이고, 복음서에서 예수 님을 따랐던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 다른 사람들은 제자 라 불리울 수 없는가? 그런데 우 리가 알기로는 사도 라는 역사적인 열두 제자들 이외에도 성경에는 '사도'라 불리운 자 들이 있었 고,(예를 들 면, 바울, 맛디아(행1.26), 바나바(행14.4,&nbsp14), 주님의 형제 야고보 (갈 1.19&nbsp2.9),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롬16.7), 실라(살전2.6), 심지어 바울의 적대자들/거짓 사도(고후 11.13) 등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의 사도로 소개되고 있고(히3.1), 하나님에 의해 파송 을 받은 선지자들도 사도로 불리우고 있으며(눅&nbsp11.49), 교회의 파송을 받은 자들 엮시 사도로 명명되어 있다(고 후8.23 빌2.25). 참고적으 로 사도(아포스톨로스)는 헬라어 아포스텔로, 즉 '(사명을 주어) 보낸다'는 동사에서 온 단어 로, 그냥 '보낸다'는 뜻을 가진 펨포와는 구별된다(그러나 요한복음에서 이 두 단어는 차 별없이 동의어로 쓰이고 있 다&nbspNBD, "Apostle", [Leicester:&nbspIVP,&nbsp1982],&nbsppp.&nbsp59-60).) ' 제자'라고 불리운 자들도 있었다.(예를 들면, 아리마대 요셉(마27.57 원문에서는 "예수님께 제자가 된"이란 동사가 사용되고 있 다)과 제자의 허다한 무리(눅6.17&nbsp19.37)를 들 수 있겠다. 참고적으로, 제자(림무드)란 구약에서는 드물 게 등장하고 있지만(사8.16&nbsp50.4&nbsp54.13), 그러나 랍비 문헌에서의 탈미드는 랍비에게서 학문 의 전승을 배우는 제 자로서 친숙한 표현이다(대상&nbsp25.8). 헬라세계의 철학자들 엮시 제자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 다. 신약에서 우리는 [바리새인의 제자](막2.18), [(세례) 요한의 제자](막2.18 요1.35) 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일 반적으로 유대인들은 모세의 가르침이 랍비들의 교훈의 토대가 되는 까닭에 자신들을 [모세의 제자]라고 여겼다 (요&nbsp9.28).&nbspCf.&nbspNBD, "Disciple",&nbsppp.&nbsp285-286.) 이 들은 분명 예수님께서 선택하여 세우신 열두 제자의 그룹에는 속하지 아니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는 제자와 사도로 불리우고 있 다. 그렇다면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2. 두 종류의 제자도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먼저 우리는 복음서에서 제자라고 불리운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복음서에 서 우리는 예수님을 스승 으로 알고 따랐던 사람들이 크게 두 종류로 나뉘어져 등장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 다. 


첫째로, [유랑제자]를 우리는 거론할 수 있겠다(the&nbspitinerant&nbspdisciples).

이들은 주님의 부르심과 선택을 받고 예수님의 전도여행에 친 히 동참한 인물들로서(막1.16-20), 사명(使命)의 완수 를 위하여 가정과 재산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포기한 스승 예수님과 마찬가지로(막3.21,&nbsp31-35 눅 9.58), 하나님 나라와 복음 의 선포를 위하여 가진 바 모든 재산과 가정 그리고 직업을 포기하고 문자적으로 예수 님을 뒤좇 은 사람 들이다. 이처럼 선생을 따르기 위하여 가진 바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이 런 태도는 예수님 당대의 랍비 사회에서는 발견 될 수 없는 매우 독특한 것으로서, 보통의 [선생-제자] 관 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서, 결국 이들 유랑제자들은 예수님과 같 은 운명을 택한 [한 운명 공동체]가 되었던 것이다. (NBD, "Disciple",&nbspp.&nbsp285-6.) 한 편 이 유랑제자들은 곧 열두 사도(使徒)들로 서 사실상 역사적으로 반복될 수 없는 제자 들이다.(NBD, "Apostle",&nbspp.&nbsp61.)

둘째로, 우리는 [정착제자]를 거론할 수 있겠다(the&nbspsedentary&nbspdisciples).

이들은 유랑제자들처럼 주님의 말씀을 받고 그 가르침대로 살 되, 사도들처럼 실제로 주님을 따르지는 아니하였고 또한 그들처 럼 모든 재산과 가정 그리 고 직업을 포기 하지는 않은 채, 자기의 속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 주님의 제자로서 살 아가는 사람들 을 가리킨다. 이제 그러면 복음서 내에 등장하는 이와같은 인물을 살펴보 자.

먼저, 갈릴리 여인들을 언급할 수 있겠다(눅8.1-3&nbsp23.49).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막달라 마리아 등의 갈릴리 여인들은 다른 남자 제자들과 함께 주님의 전도여행 에 동참했고 그런 의미 에서 "여자" 제자 들이었다. 하지만 이 여인들은 남자 제자들과는 달리 자신들의 소유를 전부 포기하지 않 고 여전히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으로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을 섬겼다.&nbsp8장&nbsp3절에서 사용된 "섬기더 라"의 원어 디에코눈이 미완료과거 형태라는 사실에서 우리 는 이 여인들이 예수님 일행을 지속적으로 도왔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 을 것이다. 여기에 서 우리는 모든 재물을 포기한 주님과 제자들 일행이 어떻게 전도여행을 계속 할 수 있 었는지에 대한 이해를 얻 게 된다. 즉, 바로 이런 여인들의 지속적인 헌신적인 봉 사와 희 생 그리고 물질적 도움이 주님의 전도사역을 유지할 수 있도록 가 능케 하였던 것이다. (누가복음&nbsp8장&nbsp1-3절에 의하면,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전도여행에 함께 동참 한 것으로 기 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여인들도 열두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유랑제자라고 부를 수 있 지 않을 까? 그러나 그렇 게 부를 수 없는 이유는, 이 여인들이 눅8.1-3 이후 계속 주님을 따랐다고 하는 증거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여인들 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눅&nbsp23.49이며, 그 사이에는 한 번도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이 사실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전도여행을 돕기 위해 '잠시 동안', 혹은 '일정기간 동안 ' 예수님 일행과 동행하였으되, 주님의 사역 내내 동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사실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그들 은 눅&nbsp8.1-3 이후 눅23.49에서 예루살렘에서 다시 등장할 때까지 집으로 돌아가 가정을 돌보았 을 것이 다. 즉 그들은 주님을 섬기기 위해 가정을 완전히 포 기하지는 않았던 것이고, 이 것은 마가복음&nbsp7 장&nbsp1절-13절에서 유대인들의 그릇된 관행인 고르반과 관련하여 주신 주 님의 다른 교훈과 일치하는 것으로 볼 수 있 다(cf. 딤전5.8).) 둘째로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들 수 있겠다(눅10.38-42).

이들 자매는 예수님의 일행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전도여행에 지친 그들을 위로 하고 편히 쉬게금 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우 리는 이들 자매가 여전히 자 기 집을 가지고 있었고 예수님 일행을 영접하여 대접할만큼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발견 하게 된다 결국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기 재산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 던 것이다. 특별히&nbsp10장&nbsp39절 에 의하면 마리아는 접대 준비에 분주한 마르다와는 달리 주 님의 발 아 래서 말씀을 배우고자 하였다. '누구의 발아래 앉아 말씀 을 듣는다'는 이 표현 은 사도행 전&nbsp22장&nbsp3절에 의하면 그 사람의 제자임을 뜻하는 것임을 우리 는 알게 된다. 이 런 견지 에서 볼 때 마리아는 분명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배우는 "여자" 제자였던 것이다.

셋째로,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를 들 수 있겠다(눅&nbsp19.1-10).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시기 전에 주님에 대한 소문을 익 히 들었을 삭개오는 주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였다. 그리하여 여 행에 지친 예수님을 접 대하고자 하였던 것 이다. 이렇게 볼 때 삭개오는 여전히 자신의 집과 재산을 가지고 있 었던 것으로 보인 다.&nbsp19장&nbsp8절에서 삭개오는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 며 만일 뉘 것 을 토색 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자신의 재산 전부를 포기하겠다고는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우리 는 유의해야 할 것이 다. (Brian&nbspE.&nbspBeck,&nbspChristian&nbspCharacter&nbspin&nbspthe&nbspGospel&nbspof&nbspLuke (London:&nbspEpworth,&nbsp1989),&nbsppp.&nbsp50-51.) 또 한 삭개오는, 누가복음&nbsp5장의 레위와 달리, 자기 직업을 단념하겠다고 도 말하지 않은 것으 로 볼 때 그는 이후에 도 여전히 세리로서의 직업을 유지했던 것으로 우리는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사실 세리라는 직업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 다. 단 지 세금을 거둬들이는 과정 에서 세리들이 배당된 금액보다 많은 금액을 징수하기 때문 에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사 실 을 밝혀주는 증거는 누가복음&nbsp3장&nbsp12-13절에서 찾 을 수 있다. 여기서 세례 요한은 회개한 세 리들 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문의 하자,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 였고, 또한 주님의 교훈을 좇아(눅11.41&nbsp12.33) 자신의 재산의 상당 부분을 가난한 자들의 구 제를 위하 여 쓰겠다고 고백하였으며, 예수님께서 친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 이로다"라고 선언하신 삭개오는 분명 주님의 제자 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네째로, 아리마대 요셉을 가리킬 수 있겠다(마&nbsp27.57-61).

마태복음에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부자라 고 소개되고 있다. 그는 여전히 자기 죽음을 위해 무덤을 마련할 만큼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 음이 분명하다. 아울러 예수님의 시체를 싸기 위해 아리마대 요셉이 사용한 세마포가 값 비싼 물건이 라 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요셉은 확실히 자기의 모든 소유를 포기하 지 않았다. 자신의 소유를 단지 처분하는 식으로 포기 하기보다는 뜻깊은 일, 즉 주님의 시신(屍身) 을 매장하는 데에 매우 유용하게 활용하였던 것이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물어야 할 것이다.

분명 누가복음&nbsp14장&nbsp33절에 의하면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 유를 버리지 아니하 면 능 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건만, {어찌하여 주님 은 자기의 소유를 포기하지 않은 정착 제자들을 책망하시지 않았는 가?} 하는 것이다. 이것 은 예수님 사역 이해와 복음서 해석에 있어서 상당한 중요성을 갖는 질문이다. 그 이유 는 이 질문 에 대 한 적절한 답변이 주어지지 않을 경우 결국 예수님은 앞뒤가 안맞는 모 순적인 분이 되 고 말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자신의 소유와 가족과 직업을 포기하지 않은 [정착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초대를 받아들이며 또 한 그들을 가르쳤다는 사 실은 결국 주님께서 있는 그대로의 그들의 실상(實狀)을 인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정착제자들 에 게는 이 말씀이 유효하지 않다는 말인가? 분명 그렇지는 않다. 누가복 음&nbsp14장&nbsp25절-35 절 의 말씀은 분명히 제자들을 포함하여 주님을 뒤따르는 무리들에게 주신 말씀이다(눅&nbsp14.25). 이 말씀, 즉 눅 14.33이 정착제자들에게도 유효한 것이라면, 자신 의 소유를 전혀 포기하지 않은 이들에게 있어서 과연 이 말씀은 어떻게 적용되 고 있는 가? 과연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옳을까? 


주님이 주님 자신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 재산을 포기하지 않은 정착제자들을 책 망하지 않고 있음을 볼 때, 우리는 눅 14.33이 정착제자들에게도 무 리없이 적용되고 있 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 재산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에게 재산을 포기하라 는 명령은 과연 어떻게 무리없이 적용되고 있는 것일까? 결국 우리는 여기서 눅&nbsp14.33의 주님의 명령이 정착제자들 과 유랑제자들에게 각각 다른 방식으로 적용되고 있음 을 발견하게 된다. 요컨대 유랑제자들에게는 문자적으로(literally) 적용 되고 있는 반면에 정착제자들에 게는 상징적으로(metaphorically) 적용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말씀이 문자적으로 적용된 유랑제자들의 경우, 그들은 주님 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가진 바 모든 소유를 실제로 포기하였다 (막10.28). 반면에 이 말씀 이 상징적으로 적용된 정착제자들의 경우, 그들은, 비록 실제적으로 가진 바 실제로 소유 를 포기 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들이 처한 환경과 형편 속에서 주님의 말씀의 정신을 따 라 바르게 살면서, 기회가 주어질 경우 기꺼이 자신들 의 소유를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 고자 하였다.

즉, 정착제자들은, 비록 가진 바 모든 소유를 실제적으로 포기하지 는 않았지만,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거 지가 된(눅9.58&nbsp9.3&nbsp10.4) 예수 님과 그 제자들 일 행을 포함하여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하 여 기꺼이 자신들의 재물을 사 용하였다(눅 19.8&nbsp8.3&nbsp10.38&nbsp23.52-53). 한 마디로 정착제자들은 비록 실제로 재산 을 그 수중(手中)에 소 유하고 있기는 하되 사실상 그 재산의 소유권(所有權)은 포기한 것과 다름없이 살았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누가복음&nbsp14장&nbsp33절 말씀은 무리(無理)나 억지없 이 해석되면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인정하신 [두 종류의 제자]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다.

앞에서 이미 우리는 유랑제자는 사도와 동일시되면서 역사적으 로 반복될 수 없는 단회적 인물임을 지적하였다. 이런 의미에 서 오늘날 모든 성도는, 비 록 그 기능이 목사 건 신부건 장로건 집사건 간에, 모두 정착제자들인 것이다. 그리고 누 가복 음&nbsp14장&nbsp33절 말씀이 예수님 당대에도 직능상(職能上) 오늘날의 목사나 신부와 같은 유랑제자들에 게 와 오늘날의 평신도에 해당하는 정착제자들에게 무리없이 적용되었다고 한다면, 유랑이 건 정착이건간에 예수님께서 모든 제자들에 게 주신 것으로 기록된 모든 말씀은 궁극적 으로 동서고금(東西古今)의 모든 성도에게 주신 말씀으로 간주될 수 있 는 것이 다. 바 로 이것이 앞서 이 글의 모두(冒頭)에서 제기된 질문, 즉 "제자가 주님께 서 택하신 열 두 명의 사도들이라면, 주님께 서 복음서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명령들을 어찌하여 평 신도인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가?"에 대한 해답으로 제시될 수 있 을 것이다. 


3. 제자도의 성격

이제까지 우리는 복음서에서 등장하는 두 종류의 제자를 살펴 보면서, 그들의 역할 과 기능이 어떻게 같으며 또한 어떻게 다른 지를 검토하였다. 그러 면 이제 유랑제자와 정착제자 모두를 포함하여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 [제자란 과연 누구이며 또한 어떤 인 물인지]를 복음서를 통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로, 제자란 배우는 사람이다.

헬라어에서 제자는 '마데테스라'고 불리우는데, 이 마데테스란 단어는 본 래 만다노 즉 '배운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 의 명사형이다. 만다노는 신 약성경에서&nbsp25회 나타나는데, 공관복음 가운데 누가복음에서는 한 번도 없고, 마가복 음 에서는 한 번(13.28),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세 번 사용되고 있다(마 9.13&nbsp11.29&nbsp24.32).

제자란 단어가 '배운다'는 동사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면, 일단 제 자의 의미는 배우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배움 즉 교육은 지적인 요소(지식)를 가리 킨다.

제자는 배우는 사람으로서 계속하여 배워야 한다. 이런 의미에 서 제자란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입학은 있되 졸업은 없는 것이 다. 모든 제자는, 교회 내에 서의 그 기능이 목사건 장로건 집사건 간에, 일단 입학하면 마침내 하늘나라에 갈 때까 지 계속적으 로 배우고 또 배워야 한다.

성경은 배워서 끝낼 수 있는 교과서가 아니다. 성경은 배우고 또 배워도 다함이 없는 무궁무진한 진리와 교훈으로 가득차 있 다. 평생을 투자하여 배 워도 다 깨달을 수 없는 생명의 진리가 담겨져 있는 책이다. 그러므로 제자된 성도들은 기회가 닿는대 로, 아니면 일부러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지속적으로 성경을 배우는 일을 게을리해 서는 안된다. 성경을 배우기를 게을리한다는 것은 제 자로서 살기를 포기한 것 과 다름 이 없음을 뜻한다. 그 이유는, 성경 속에서만 우리는 제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 과 지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요리문답에 의하면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원히 기뻐하고 즐거워하 며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 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하 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를 영화롭게 할 수 있을까? 결국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아야 이 것이 가능 할 것 이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성경 밖 에서 우리는 하 나님이 누구신지를 알 길이 없다.

자녀들이 부모를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은 경험을 통하여 부모 가 무엇을 좋아하는 지 싫어하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사람 엮 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면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를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인데, 성경 밖에서 우리는 이런 지식 을 결코 얻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의 성취를 위해서도, 또한 제자로 서 의 바른 삶을 위해서도,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부지런히 성 경을 상고하며 공부하고 배 워야 한다. 이런 까닭에 인생이 해야할 일 중에서 성경을 배우는 일보다 더 가치있는 일은 아마도 없 을 것이다.


배움 즉 교육이 제자도의 한 특징임을 잘 가르쳐주고 있는 것은 마태복음이다.

공관복음서 가운데 특별히 제자란 단어의 동사형인 만다노가 비교적 자주 사용되 고 있는 곳이 바로 마태복음임은 앞서 살펴 본 바와 같다. 이와함께 제 자들이 주님의 가 르침을 받고 그들의 무지(無知)가 깨우쳐지며 주님 말씀의 이해(理解)에 도달하고 있 다 는 모습이 다른 복음서들보다는 마태복음에서 더욱 잘 묘사되어 있다 (마&nbsp13.51&nbsp16.12&nbsp17.13). 비록 제자들은 예수님의 교육을 받으며 때로 는 이해에 실패하기 도 하지만(마&nbsp15.16&nbsp16.9), 마침내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우리 는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제 자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르도록 인도하신 주님의 효과적 제자 교육을 또 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제자들이 배워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보다 여실하게 밝혀 주는 또다른 증거를 우리는 마태복음&nbsp10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서 주님은 제자들 을 택하여 부르시고 이어 즉시 그들을 파송하시기 위하여 전도를 위한 권면의 설교를 하시고 있 다. 마태복 음의 파송설교는 마가, 누가복음과 비교할 때 상당히 긴데, 이 엮시 교육을 중요시여기 는 마태복음의 특징의 하나 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파송을 위한 설교만 있을 뿐 실제로 제자들이 파송되어 나갔다는 기록이 나타나있 지 않다는 점이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저희 여러 동네에 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가시 니라"(마11.1). 즉 제자들은 전도 파송을 위한 교육만 받 았을 뿐 실제로 파송되지는 않은 것으로 마태복음에서는 소개되고 있 다. 파송되지 않았 기에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처럼 제자들이 나가 행한 기록도 없고(cf. 막 6.12-13 눅&nbsp9.6), 또한 파송에서 돌아와 자신들의 전도사역에 대해 주님께 보고한 내용 도 기록되어 있지 않 다(cf. 막6.30 눅9.10).

그러면 왜 제일 복음서 저자인 마태는 이런 변화 혹은 해석을 시도하였을까? 아마 도 그것은 제자들에게 있어 사역에 나서 기 이전에 무엇보다도 배움 /교육이 중요함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결국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이 실제로 파송받는 것 은 마지막 장(章) 마지막 절(節), 즉&nbsp28.19-20에서이다: "그러므로 너 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 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즉 마태복음에서 제자들 은&nbsp28.19-20에서 부활 하신 주님의 파송 명령을 받을 때까지는 아직 파송되어서는 안 될, 그 때까지는 계속 배 움으로 준비를 갖추어야 할 사람들로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그런 데 이 파송구절에서 사실 본동사는 "제자삼으라"이고, 나머지 동사 들은 분사와 부정사로 되어있다(가서/  세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nbsp..... ). 따라서 중 요한 것 은 제자삼는 행위이고, 그밖의 나머지 행위들은 이를 돕는 보조 적 수단으로 나타나고 있다. ) 여기에 바로 마태복음의 제자도의 특 징이 나타난다 제자란 파송받기 전까지 부단 히 배워서 제대로 준비를 갖추어야 할 존재들인 것이다. 그러므 로 배움으로 준비하지 않 은 이들은 자신의 주제를 넘어선 교만한 자들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주님의 사역 에 적합치 못하므로 쓰임받기에 적절치 못하 게 될 것이다(cf. 딤후&nbsp2.20-21).

이처럼 제자들은 좋은 제자, 좋은 성도가 되기 위하여 계속하 여 배우고 또 배워야 만 하는 것이다. 또한 마태복 음&nbsp28장&nbsp19-20절의 주님의 지상명령(至上命令)을 따라 남 을 제자삼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좋 은 제자가 되어야 한다. 또한 남 을 가르치기 위해 서는 먼저 잘 배워야 한다. 결국 좋은 제자가 좋은 선생이 되는 법이 다. 


둘째로,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자신들의 일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 [자신을 따라오라]고 명령 하셨다(막 1.17&nbsp2.14). 예수님 당대의 유대 문헌을 보게 되면 아무의 뒤 를 따른다고 하는 것을 곧 그 사람의 제자됨 을 뜻하는 것으로 나타나있다. 이런 용례를 우리는 마가복음&nbsp10장&nbsp32절에서 보게 된다: "예루살렘으 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 들 앞에 서서 가 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 를 데리시 고 자 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며 제자들은 두려워하면서 그 뒤를 좇아가고 있다.

예수님의 뒤를 좇아간다고 하는 것은 실천적 요소를 가리킨다 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앞서의 배움의 요소와 합하여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제 자도의 참 특징을 드러내주고 있다. 


그러면 실천적 요소로서 우리는 제자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우선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가정(가족 막 1.20)과 재산(막1.18,&nbsp20)을 포 함 하여 모든 것(눅5.11 막10.28)을 포기하였다. 예수님은 자신 을 따르는 제자도의 요건으 로 누가복음&nbsp14장&nbsp25-35절에서 가족과 자기 목숨을 미워하고 또한 자기 의 모든 소유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셨다. 이러한 것들의 포기가 쉽지 않을 것이고, 또 포기하고 좇은 후에 후회할 수도 있기에, 주 님은 포기에 앞서 세심한 숙고의 필요성이 있음을 비유로 써(눅14.28-32) 강조하고 있다. 즉흥적으로 주님을 따르겠다고 나 선 추종자들을 권면하 실 때도 주님은 이런 류의 말씀을 주신 바 있다(눅9.57-62).

게르트 타이센은 예수님을 포함하여 이들 유랑제자들의 삶의 특 징을 마가복음&nbsp10 장&nbsp28절 을 근거로하여 사회적 무근성(無根性&nbsprootlessness) 이라고 명명(命名)하였다. (Gerd&nbspTheissen, 김명수역, 원시그리스도교에 대한 사회학 적 연구 (서울: 대한기독교출판 사,&nbsp1994),&nbsppp.&nbsp134-171.)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 땅에서 뿌 리없는 삶 을 살았다. 사실 이 땅에 뿌리를 깊게 내리면 내릴수록 우리는 이 땅을 떠나 기 싫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믿음 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돈과 권력과 명예과 쾌락 등의 뿌리를 세월과 함께 깊게 더 깊게 내릴려고 애쓰는 가련한 이들을 보 게 된다. 나그네는 짐이 무거울 경우 편안한 여행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 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될 수 있 는대로 이 땅 의 것들을 자꾸만 버리는 연습을 익힘으로 이 땅에서의 여정(旅程)을 쉽고 도 가볍게 경주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참 고, 골&nbsp3.1-3). 


4. 제자도의 모델 케이스 마르다와 마리아 사건(눅10.38-42) 이 제는 누가복음에만 기록된 하나의 사건을 통하여, 제 자들이 배움과 실천을 겸비 해야 하 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해 보도록 하자.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마르다와 마리아 자 매 는, 비록 가족과 재산을 포기하지 않 았지만, 이스라엘의 각 성과 촌을 두루 다니셔야 하는 전도여행으로 피곤하여 지친 예수님 과 그 일행을 집으로 초대하여 대접하였던 정착 제 자들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일행을 초대해 놓은 후 두 자매가 보인 반응은 사 뭇 다르다. 한글 개역에서 '언니'로 소개 되고 있는 마르다는 여행객들을 초대해 놓고 열심히 접대 준비에 바쁜 반면에, 동생 으 로 소개되고 있는 마리아는 바쁜 언니를 도울 생각보다는 여 행으로 지치신 주님으로부 터 말씀을 배우기를 선호하였다. 그런 데 이 두 자매 중에서 예 수님은 접대 준비에 바쁜 마르다가 자기를 돕지 않는 마리아로 인하여 불평하자 오히려 말씀 듣기를 선택 한 마 리아를 옹호하시는 말씀을 하셨다(41-42절).

이런 이유로 하여 이제까지 한국교회는 세속적인 일로 분주한 마르다보다는 말씀 을 배우기를 선택한 마리아를 더 바람직한 성 도 및 제자의 모습으로 생각하여왔다. 아울러 이로부터 생활보다는 말씀을 배우는 신앙 교육(여기에는 교회에서 의 예배 및 교 육 이 포함된다)이 더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면서 성도의 생활, 즉 윤리적 측면이 상대적 으로 덜 강조되는 폐단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기사(記事)를 해석함에 있어 염두에 두어야 할 요점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이 기사가 놓여진 문맥에 대 한 고려이다. 이 기사 바로 앞에 위치한 기사 는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10.25-37)이다. 이 비 유의 마지막 은 주님의 율법사에 대한 명령인데, 그것은 바로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이다. 그리 고 이 명령에 이어서 소개되 고 있는 기사가 바로 [마르다/마리아 기사]인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대로, 복음서가 연대기적으로 기 술된 역사서가 아니 라면,(이 말은 복음서 속에 역사가 전 혀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분 명 복음서 속에는 구주 되 신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이 담겨져 있다.) 누가가 이 두 기사 를 한 문맥(文脈) 속에서 연이 어 소개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하 면, 누가는 확실한 의도를 갖 고 이 두 기사를 묶어서 기록하였던 것이다. (Cf.&nbspW.&nbspGrundmann,&nbspDas&nbspEvangelium&nbspnach&nbspLukas(Berlin:&nbspEvangelische&nbspVerlagsanstalt,&nbsp1974),&nbspp.&nbsp225&nbspF.&nbspW.&nbspDanker,&nbspJesus&nbspand&nbspthe&nbspNew&nbspAge(St.&nbspLouis:&nbspClayton&nbspPublishing&nbspHouse,&nbsp1974),&nbspp.&nbsp133-134.) 이 것이 사실이라면, 앞의 비유 에서 선한 사마리아 인의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은 마르다일까, 아니면 마리아일까? 그 것은 전도 여행 으지친 예수님을 접대하고자 준비에 힘썼던 마르다였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까지 알고 있는 것처럼 마르다는 결코 꾸중만 을 들었던 것이 아 니고, 마리아와는 다르지만, 어쨋튼 마 리아와 똑같이 하나의 바람직한 모델로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즉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힘들고 지친 가난한 이웃에게 사랑을 베품 으 로써, 믿음을 실천으로 옮겼던 훌륭한 제자의 모습인 것이다. 요컨대, 마르 다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복음서 기자 누가의 정해 진 의도에 의해 결정된 문맥에 의하여 추천된, 사 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실천한 모델인 것이다(참고, 갈5.6).

한편 마리아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기사 속에서 분 명히 예수님에 의해 말씀을 배우는 제자의 바람직한 모습으 로 추천되고 있다. 여기서 " 주의 발 아래 앉아" 는 어구(語句)는 누가복음의 속편인 사도행전&nbsp22 장&nbsp3절에서 바울에 의 해 사용된 표현, "가말리엘의 문하에서"와 꼭같은 표현이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분명 주님 의 문하에서 학습한 주님의 "제자"였던 것이다.(누가는 사도행전&nbsp9장&nbsp36절에서 복 음서 기자 중 유 일하게 다비다를 가리키며 "여제자" 를 사용하고 있다.) 이 사실은 예 수님 당대의 여자에 대한 인식 및 관습을 놓고 볼 때 매 우 중요한 사 건이다. 즉,&nbsp1세기 즈음의 유대 지방에서 여자들은 일종의 노예로 간주되었고 종과 함 께 남자(남편) 의 재 산의 일부분이었으므로(십계명 중 제 십계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 지니라"인데, 네 이웃의 집에 속한 것 가운 데 첫 번째가 바로 [네 이웃의 아내]로 소개되고 있음 을 보게 된다(출애굽기&nbsp20.17). 이로 보건대 아 내, 즉 여자는 남편의 재산의 일부분이고, 결혼 전의 여자, 즉 딸 역시 성인이 되기 전까지(12년&nbsp6개월) 아버지 의 소유였던 것이다(참고, 요아킴 예레미아스,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천안: 한국신학연구 소,&nbsp199 ),&nbspp. ), 랍비들의 교육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랍비들은 여자들을 가르치는 것 을 수치스럽게 여겼으며, 심지어 는 여자 들과의 대화조차도 회피하였다. 이런 당대의 관습을 감안할 때 예수님께서 여자 들만이 사 는 집에 초대를 받아(어떤 학자는 이 두 자매를 과부, 혹은 노처녀로 소개하고 있다.) 그들 의 대접을 받으며 또한 말씀을 가르쳤 다는 사실은 사실상 일종의 스캔달과도 같은 사 건일 수 있었다.

여하튼 마리아가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으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은 한 편으로 이제까지 마르다가 대변하고 있는 여성 의 일상적 역할(가 정의 일)을 뛰어넘어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교육을 받음으로써 남자들과 대등한 위치에 이르게 되었음에 대 한 하나 의 좋은 증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건에서 마리아가 상 징하는 바는 교육 (배움)에는 성적(性的) 및 신분적 차이가 있 을 수 없다는 것이다 (cf. 갈3.28 고전&nbsp11.11-12). 그러나 마리아의 이런 역할로 인해 사랑을 실천 에 옮긴 모델 인 마르다의 역 할이 결코 축소되거나 과소평가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마리아가 중요한 만 큼 마르다 역시 중요한 것이 다.

결론적으로 이 기사에서 마리아와 마르다 모두는 제자도의 모델로 추천되고 있다.

즉, 마리아는 배움(교육)의 제자도의 특징을 보여주며, 마르다는 실 천의 제자도의 특징 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과 적으로, 우리는 이 [마르다/마리 아 기사]에서 결국 제자란 지식과 실천을 겸비한 인물이어야 함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조회수 : 31 , 추천 : 0 , 작성일 : 2003-11-10 , IP : 61.39.168.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