벳새다 소경의 두 단계 개안(막8:22-26)


성서마당&nbsp1996년&nbsp12월호

 

심상법

<들어가는 말>

막&nbsp8:22-26의 소경을 고치신 예수님의 이적기사는 공관복음서들 중에 오직 마가복음에만 나오는 특이한 이적 사건이다. 그것은 이 기사에 묘사된 대로 예수님은 한 소경을 두 단계로 치유하셨다. 마가복음에서는 소경을 고치신 사건은 여리고에 서 거지 소경 바디메오를 고치신 사건(막&nbsp10:46-52)과 더불어 두 번 기술되는데 이것은 마가 특유의 '이중 적 기술'의 한 모습이기도 하다. (소경을 고치신 사건 외에도 마가복음에서의 이중적 기술은 '먹이심'의 이적기사가 두 번나오며 심 문기사도 베드로의 심문과 예수님의 심문이 샌드위치 기법을 통해 두 번나온다. 마가 특유의 '이중적 기술'에 대한 자세한 예들과 그 것의 논의에 대해서는&nbspNierynck의 &ltDuality&nbspin&nbspMark> 을 보라.) 특별히 이 이적사건은 우리가 앞으로 관찰하는 대로 전후의 단락(혹은 마가복음 전체)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기술된 것으 로 마가의 특별한 의도가 잘 반영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최근 마가복음을 연구하는 학자들 (Johnson&nbspBest&nbspUuelich&nbspVan&nbspIersel&nbspStock 등 등)은 이 사건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이 이적기사가 복음서 내에서 갖는 구조적 의미 즉 마가복음 내에 서의 그것의 기능과 역할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1. 구조적-문학적 이해

제자들의 영적 무지(misunderstanding)와 따름(following)의 실패는 마가복음의 메시지를 이해하는데 중심 된 논의가 되어왔다. 비록 그들이 초기에 예수님의 "따르라"(follow&nbspme)는 명령에 어느 정도 잘 순종했다 할 지라도(막&nbsp1:16-20&nbsp2:14-15 참고.&nbsp10:28) 계속되는 예수님의 많은 이적 들 가운데 제자들은 그것들의 진정한 영적 의미를 깨닫지 못함으로써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듣는 모습을 자주 보게된다 (막&nbsp4:10,&nbsp13,&nbsp41&nbsp6:37,&nbsp52&nbsp7:17&nbsp8:4,&nbsp14-21). 특 별히 마가복음의 바다(항해)기사들(sea[-voyage]&nbspnarratives)은 제자들의 이러한 무지와 불신앙과 두 려움을 잘 지적해 주고 있다(막&nbsp4:40&nbsp6:50-52&nbsp8:17-21). 제자들은 바다 의 상황에만 들어가면 그들의 무지와 불신앙과 두려움의 모습을 지니고 있음이 지적되고 여기에 예수님의 책망은 따가왔다. 불신앙으 로 인하여 무지와 두려움에 떠는 이러한 바다의 장면들은 아마도 마가의 공동체(청중)가 환난과 수난에 직면한 모습을 간접적으로 시사 해 주고 있는지 모른다(Malbon&nbsp1984,&nbsp1993). 그 중에 마지막 바다(항해)기사 (막&nbsp8:13["저희를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과&nbsp22절["벳새다에 이르 매"], 그리고&nbsp14절["배(안)에]을 유의하라.)인 막&nbsp8:14-21은 제자들의 영적 무지가 극적으 로 지적되고 있다. 이 지적은 지금까지의 예수님의 이적들- 특별히 '먹이심'의 이적과 관련하여&nbsp- 에 대한 제자들 의 몰이해를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들은 철저하게 눈먼 소경의 모습과 같았다. 막&nbsp8:17-21의 예수님의 혹 독한 책망은 이점을 잘 반영한다: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 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치 못하느냐....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의 무지에 대한 예수님 의 반복된 책망들(보지 못함 깨닫지 못함[2번] 알지 못함 둔함 기억치 못함)을 만나게 된다. 결국 제자들은 여기까지 따라 오면 서 그들이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눈먼 소경처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상태에 있음을 본문은 암시해 준다.

이러한 제자들의 눈먼 모습 가운데 이제 마가는 소경을 두 단계로 고친 특이한 이적사건을 연이어 소개함으로써 제자들의 영 적 개안이 점진적으로 되어짐을 암시하고 있다(Guelich&nbsp1989:430ff). 즉, 마가는 지금 벳세다의 소경 을 고치신 이 사건(막&nbsp8:22-26)을 통해서 제자들의 영적 눈(깨달음=제자도)이 점전적으로(두 단계로) 열려짐 을 제시하고 있다. 특별히 이 이적사건은 앞으로 나타나는 마가복음의 중심 단락인 '길' 단락 (막&nbsp8:27-10:52)의 서론적 예시(Johnson)나 혹은 앞 단락과 중심 단락을 잇는 연결고리 (Van&nbspIersel)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마가복음 전체의 메시지에 쐐기를 박는 중심(Stock)이 되기도 한 다.

마가복음에서 소경을 고치신 사건(막&nbsp8:22-26 막&nbsp10:46-52)과 '눈'(eye)에 대 한 언급(8:18)과 '본다'(see)라는 단어 (4:12&nbsp8:18&nbsp8:23,&nbsp24[2x],&nbsp25&nbsp9:1&nbsp9:9&nbsp10:51,&nbsp52&nbsp15:39) 는 마가복음에서 또한 자주 언급되는 귀(ear)와 들음(hear), 그리고 귀머거리를 고치신 이적들과 같이 마가복음의 중심주제 인 '깨달음'(understanding) 혹은 '제자도'(discipleship)와 관련된 일종의 상징적 의미 군들로 나타난다 (Shim&nbsp1994:109-110). 상징적 의미를 가진 이들 사건들과 단어들은 예수님의 전 사역 특히 전반부의 이 적사역(1-8장)과 후반부의 수난사역(8-16장)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특별히 이점에 대 해&nbspJohnson(1979:379)은 "막&nbsp8:22-26에 나오는 두 단계의 치유과정에 대한 묘사 는 마가에 의해 눈멂과 눈뜸의 주제를 잘 제시하기 위하여 복음서의 중앙에 위치함으로써 복음서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연결해 주는 상징 적 해석을 제공하고 있다"고 진술하였다(참고.&nbspGuelich&nbsp1989:431). 즉 두 단계로 소경 을 고치신 이 사건은 마가복음의 전반부(주로 이적기사들)와 후반부(주로 수난기사)의 의미를 잘 연결(병합)해 주는 역할을 한다.

2. 설교를 위한 (문학적) 주해

1). 배경: "벳새다에 이르매"(22절)

이미 막&nbsp6:45에서 벳새다로 제자들을 가도록 하신 주님의 의도가 이제야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도중에 예 수님과 제자들은 게네사렛(6:53)을 거쳐 두로 지경(7:24)과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를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러 (7:31), 거기서 달마누다 지경으로 갔고(8:10), 또한 거기서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서(8:13) 마침내 벳새다 에 이른다. 공관복음에서 이 벳새다는 고라신과 함께 예수님의 이적적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의 장소로 언급되고 있다 (마&nbsp11:21 눅&nbsp10:13). 아마 이런 까닭에 예수님은 소경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거기 서 고치신 후에 그를 마을로 다시 돌려보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2). 인물들: 사람들, 소경, 예수님, 그리고 제자들

이 사건에 나오는 사람들은 벳새다의 사람들과 한 소경(22절), 그리고 이 곳에 도착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27절) 을 들 수 있다. 이 사건(장면)의 중심인물은 예수와 소경(사건은 이들 두 사람간의 대화에 집중)이며 마을사람들과 제자들은 이 사 건의 참된 의미를 비추어 주는 일종의 배경과 같다.

3). 장면분석

이 사건의 장면을 분석해 보면:

장면&nbsp1: 마을에서 사람들과 소경 그리고 예수님(22절)

장면&nbsp2: 마을 밖에서 예수님과 소경(23-26절)

예수님(과 제자들)께서 벳새다(마을)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한 소경을 예수님께 데리고 나와 고쳐주시기를 구한다(장 면&nbsp1). 여기에 예수님은 소경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특이한 방법으로("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 고") 이 소경을 두 단계의 과정을 통해 치유하시는데(장면&nbsp2) 이 사건의 핵심은 두 단계의 치유와 함께 두 사람간 의 대화에 있다.

4). 장면이해와 해석

예수님은 지금 그 당시 이적을 베푸는 사람들(miracle&nbspworkers)의 치유방법("눈에 침을 뱉으시 며 그에게 안수하시고")을 택하사 이 소경을 고치심으로 이 치유가 이적적 사건임을 암시해 준다. 그리고 안수 후 특이하게 소경에 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심으로써 그의 개안상태를 점검하셨다. 소경의 개안상태(단계)는 본문에서 보는 대로 첫 번째 안 수 후 소경은 사람들을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불완전하게) 보았고 두 번째 안수 후에는 만물을 밝히 보았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 은 소경을 고치신 사건을 기술한 이 짧은 기사에서 "본다"( / )라는 단어가&nbsp6번(23절,&nbsp24절 [3번],&nbsp25절[2번])이나 언급되고, 그리고 '눈'( / )이라는 단어가&nbsp2번(23절 과&nbsp25절) 반복된다. 그러므로 이 기사는 소경이 이적적으로 치유되었다는 사실에 강조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개안 의 상태와 단계에 이 이적사건의 의미를 집중하고 있다(이점에 있어서 두 번째 안수 후에야 소경이 '만물을 밝히 보게 되었다'는 언 급은 대단히 이례적이다). 즉 은혜로운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소경이 점진적으로 (특이하게) 개안되어짐을 보여줌으로써 소경과 같 은 제자들의 (영적) 이해상태가 앞으로 점진적으로 발전되어짐을 암시해 준다(23절의 "무엇이 보이느냐?"의 질문 과&nbsp29절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의 질문의 병행적 의미). 이점은 그 다음 단락에서의 예수님의 신분에 대 한 베드로의 반응(이해)을 통해 잘 알 수 있다(Matera&nbsp1989).

3. 설교를 위한 이 단락의 의미건설과 효과

1). 성경에서 소경을 고치신 이적의 일반적 의미

예수님의 이적 가운데 눈먼 자를 고치신 이적사건이 복음서에 자주 언급되는데 여기서 소경은 죄로 말미암아 영적 눈이 멀 게 된 인간을 상징한다. 이 영적 눈멂은 인간의 힘(교양과 지식)으로 치유될 수 없다. 오직 메시아가 오심으로 치유되는 메시아 의 사역을 가리킨다(사&nbsp35:5-6).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자기 자신과 하나님과 미래를 참되게 보지 못한다. 아 니 본다고 하여도 굽게, 왜곡되게 본다. 결국 성경에서 소경은 죄 아래 있는 삶, 흑암의 나라에 있는 인생을 가리킨다(참 고. 골&nbsp1:13). 그러므로 눈먼 인생을 바로 인도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세상의 빛 (요&nbsp9:5)이시고, 어두움의 그늘진 세상에 사는 흑암의 백성들에게 큰 빛 (사&nbsp9:1 마&nbsp4:16)이시다. 이와 같이 예수는 자신을 화목 제물로 주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우 리의 구주이시며 목자가 되셨다. 그가 우리의 손을 붙잡고 영원한 천국으로 낙오 없이 데리고 가신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길 에 빛된 성경(주의 말씀)이 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燈이요 내 길에 빛이니시이다"(시&nbsp119:105). 이 와 같이 빛되신 주님의 인도를 받고(주님과의 교제를 가지고) 성경말씀을 따라 사는 자는 '세상의 빛'이 된다 (마&nbsp5:14&nbspcf. 시&nbsp19:8&nbsp119:9).

2). 마가복음에서의 의미: 두 단계의 점진적 開眼을 중심으로

소경 =>&nbsp1 단계: 나무 같은 것들(사람들)이 걸어감을 봄(8:24)

2 단계: 만물을 밝히 봄(8:25)

두 단계의 치유는 예수님의 이적적 능력이 부족하다는 의미(한 번만에 안되니까 두 번해서 되었다고 해서)가 아니라 어떤 특별 한 목적을 지닌 치유절차였다. 마가복음에서 이와 같은 두 단계의 시력회복은 제자들(마가의 독자들)이 두 단계로 신앙의 눈이 밝아짐 (제자도를 의미)을 보여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사건으로 제시된다 (Best&nbsp1986:3-4&nbspGuelich&nbsp1989:430): 막&nbsp8:17-21(소 경된 상태)&nbsp->막&nbsp8:27-38(반쯤 개안)&nbsp-> 죽음과 부활 후에(확실 히 앎). 이와 같은 두 단계의 개안은 특별히 마가복음에서 제자들(마가의 공동체[우리])의 영적 깨달음(제자도)의 두 단계의 모습 을 미리 보여주는 것으로 이것은 베드로의 모습 가운데 잘 나타난다. 결국 두 단계의 개안은 마가의 독자들에게 예수님의 신분과 사역 에 대한 참된 깨달음을 통해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제자도)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막&nbsp8:27-38은 예수 그 리스도의 사역과 신분에 대한 이해와 제자도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 첫 번째 단계: 나무와 같은 것들이 걸어감

많은 이적 기사들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다. 여기에 베드로는 놀랍게도 "주는 그 리스도시니이다"고 고백하였다. 즉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적 사역들을 통해 그가 그리스도(메시아)이심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 고 백 후에 곧바로 주어진 인자의 고난에 대한 예언(8:31)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책망하 였다(8:32. 여기서 "간하매"는 원래 '책망하다'[rebuke]의 의미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수난의 길을 가야한다는 것 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국 반복되는 수난에 대한 예언들 (8:31&nbsp9:12,&nbsp31&nbsp10:33-34,&nbsp45)에도 불구하고 베드로 는 메시아로서 예수님의 수난의 길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책망과 부인과 저주의 길을 간다. 그는 능력의 그리스도는 이해하였지 만 수난의 그리스도는 아직 이해할 수 없었다. 주님에 관한 수난의 삶(8:31)과 그리고 주님(복음)을 따르는/위한 수난의 삶 (막&nbsp8:34-38)은 아직 베드로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교훈이었다.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아마 오늘날 우리도 이적 에 대한 신앙은 어느 정도 바르게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수난에 대해서는, 수난의 주님에 대해서는, 수난의 삶에 대해서 는 베드로처럼 이해하지 못하고 늘 넘어진다. 사실 이것은 마가의 청중이 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였다. 능력의 신앙이 중요하다. 그 러나 수난의 신앙이 없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진리를 밝히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반쪽의 진리를 안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두 번째 단계: 만물을 밝히 봄

마가복음에서 보는 대로 베드로는 메시아의 수난의 길에 대해서 "책망/저주/부인"의 반응을 취하였다. 결국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후에야"(막&nbsp9:9. 즉 베드로의 회복 후[막&nbsp14:28&nbsp16:7]) 그는 수난 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수난예언이 있은 후 베드로는 주님을 책망하며 주님께 수난이 찾아온 후에는 주님을 멀찍이 따르 고 부인, 저주한다.

결국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참다운 고백은 수난기사의 끝에서 한 이방인인 백부장을 통해 제시되어졌다 (막&nbsp15:39). 여기서 백부장은 예수의 죽음("그의 운명하심")을 보고 "예수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고 고백하였다. 마가의 스토리 안에서 처음으로 수난이 하나님의 아들이 메시아로서 걸어가야 할 길임이 비로소 바로 고백되어졌다 고 할 수 있다.

능력과 함께 수난의 이해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그 중에 마가복음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1-8장)이 왜 수난의 길 을 가야하는가'(8-16장)가 마가의 메시지의 핵심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수난(가장 비참한 저주의 십자가)을 받으 셨다'는 것은 기독교의 복음이고 기독교의 능력이며 기독교의 권위로서 이것은 신자의 삶에 각인 되어져야 할 메시지다(고 전&nbsp1-4장). 여기에 인생의 질문은 '아니 어떻게?'가 아니다(이 경우는 영원한 신비[mystery]다) '왜 그 렇게 하셨나?'이다(이 경우는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love]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적적 능력의 주님만 찾는다. 물론 능력의 주님을 만나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적적 능력의 주님 을 만난 후에 수난의 주님께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 성숙(maturity)은 시련과 수난(suffering) 을 통해 형성된다. 금의 제련도, 욥의 인내도, 아브라함의 신앙도, 모세의 지도력도, 다윗의 중보자로서의 언약적 왕됨도, 시련 을 통해, 수난을 통해 정금같이 나온 것이다(히&nbsp11장의 신앙의 사람들의 모습은 시련[수난] 속에서 보여진 모습이었 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에게 수난의 삶이 요구될 때(막&nbsp8:34-38) 과연 우리는 어떠한 자세 와 삶을 취하는가?

신앙을 거저 먹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넓은 길(축복과 번영의 길)로만 가려고 하지 예수님과 복음을 위 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좁은 길(수난의 길)로는 가려고 하지 않는다. 치유와 번영의 신학과 삶만 추구하지 봉사와 수난 의 신학과 삶은 없다. 모두들 신비한 능력가운데 飛上/飛躍하려고만 하지 수난의 길로 또박또박 걸어가려고 하지 않는다(광야의 길 을 걸어가는 삶[창&nbsp22장의 아브라함]). 이적과 기사를 일으키는 은사모임, 치유모임에는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모인 다. 그러나 의의 길, 봉사의 길, 수난의 길, 곧 자기를 포기한 십자가의 길로 가야 한다는 설교와 삶에는 부자청년처럼 근심하 며 돌아간다(참고. 막&nbsp10:21-22). "말씀으로 인해 환난이나 핍박이 오는 때에는 다 도망치고 없었다." 여기 에는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도 주님의 수난 앞에 뿔뿔이 흩어졌고 도망쳤다.

마가복음의 스토리는&nbsp1-8장은 이적기사가 주로 나오고,&nbsp8-16장은 수난기사가 주로 나온 다. 이것을 통해 어떤 신학자들은 마가복음은 영광의 신학과 수난의 신학이 서로 상반된다고 주장하면서 마가의 공동체 내에는 영광 의 신학을 추구하는 이단의 무리들과 수난의 신학을 주장하는 바른 무리들이 있었는데 제자들의 모습은 전자의 무리를 보여주는 것이 고 예수님의 말(모습)은 후자의 무리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복음서 내의 두 단락의 상충된 모습을 가지고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러 나 마가복음은 사실 두 단락이 상충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nbsp1-8장에서 놀라운 이적을 베푸신 주님(하나님의 아들) 이 우리를 위해(막&nbsp10:45) 무능하게 수난/섬김의 길(잡혀 돌아가심)을 가신다(8-16장)는 복음을 일관성 있 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를 따르는 제자들인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까?: "나를 따르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를 질 것이니라"(막&nbsp8:34).

<나가는 말>

결론적으로 마가복음을 통해 우리는 능력의 신앙과 더불어 수난의 신앙을 추구해야 함을 주지해야 한다. 복음전파는 강력한 능력 으로 나타나야 하지만(막&nbsp6:1-13) 그러나 섬김과 수난 속에 의의 길로 걸어가는 것을 배제할 수 없다(세례요한 의 삶을 보라[막&nbsp6:14-29]). 이것은 교회에 기고를 통한 능력전도 (power&nbspevangelism)와 함께 수난과 희생이 따르는 봉사전도 (service&nbspevangelism)가 수반되어야 함을 말해 준다. 최근의 밥 퍼주는 사역은 여기에 하나의 큰 귀감 이 된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여호와 라파(치유), 여호와 닛시(승리), 그리고 여호와 이레(준비)의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해야 한 다. 즉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가]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는"(시&nbsp91:1) 능력의 삶이 필요하 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능력의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구원과 실행)를 위해 섬김과 수난의 길을 가신 하나님(의 아들)이심 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마가복음에서 관찰할 수 있는 흥미로운 점은 예수님의 사역이 비인간적인 세력들(귀신들 병 자연의 파멸 적 힘)에 대해서는 힘으로 제압하지만 그러나 사람들에 대해서는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용서와 사랑과 섬김의 모습으로 대하였다는 것이 다. 물론 이와 같은 삶은 이 악한 세대 가운데 언제나 불리하게 취급되어지며 수난이 따른다(막&nbsp8:38). 결국 예 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예수님이 가셨던 그 길을 가야 한다. 크리스천의 삶에 수난을 우회하는 삶이란 있을 수 없다. 수난의 신학 과 신앙과 삶은 크리스천의 제&nbsp2 단계의 성숙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각처 에 표적과 기사가 나타날 뿐 아니라 수난과 희생이 동반된 사랑과 섬김과 의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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