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와 기독교 세계관 이해

하나님 나라(神國) 혹은 "하늘 나라"(天國)는 예수의 교훈의 대명사이다. [하나님 나라 ]란 말이 언뜻 듣기에는 생소 한 말 같으나 성경에서는 매우 중요한 주제로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본 주제는 오히려 우리의 신앙 생활을 좀 더 근본적이고 포괄적 인 시각을 갖게 하고, 하나님께서 일해 나가시는 [하나님 나라]에 역사에 발맞추어 나가는 '역사의식(歷史意識)'을 가진다는 것 은 매우 중요한 신앙의 초석(礎石)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바로 천국 혹은 하나님 나라에 가기 위함에 있 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혹시 '그것은 너무 노골적인 말이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천국 가는 것이 성 경 메시지의 최고의 목표이고 주제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서도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을 요구하고 성경 말씀대로 살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것은 궁극적으 로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지로서 [하나님 나라 ]에로의 초대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구약적 표현은 부정적인 표현을 자주 사용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사야&nbsp2:4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전쟁도 없고 폐함도 없다"고 부정적인 묘사를 하고 있 고, 사&nbsp11:6-8에서는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괜찮은 나라"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한 마디 로 하나님 나라는 누가 누구를 해하지 않고 누가 누구를 위협하지 않고 누가 누구를 골탕 먹이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것이 구 약 성경 전체에서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중요한 묘사들이다.  

또한 신약으로 넘어오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선포의 핵심이 [하나님 나라 ]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 나라 "는 예수님 의 가르침에서 가장 특징적인 주제이었다. 우리는 마&nbsp4:17,4:23,24a,9:35a에서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 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 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예수께서 모든 성 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라는 구절들의 말씀들을 살펴볼 때에 [하나님 나라 ]를 선포 하시는 것이 예수님 사역에 있어 가장 중심 되는 주제였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중심된 가르침인 동시에 선포의 핵심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외치면 서 공생애를 시작하셨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제자들을 택하셨으며, 하나님 나라를 이해시키기 위하여 비유들을 가르치셨고, 하나 님 나라 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고, 부활 후에도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 "의 교훈을 주시고 승천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포의 말씀은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부분에서만 아니라 결론 부분에서도 볼 수 있 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nbsp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까지 남은 날 동안 하 나님 나라 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 게 보아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nbsp1:3)
 
따라서 필자는 성경의 최대 관심사가 "천국"임을 증명할 때에 "천국"이나 "구원"이나 실상은 똑같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 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일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포였으며, 이것은 예수님께서 원래 의도하셨 고 목표하셨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성경의 최대 관심사가 [하나님 나라 ]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 은 하나님 나라 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에게 구원으로 제공되는 것이며,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천국을 전파하시고 실제로 이루시기 위 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주제는 참으로 중요하다. 이것에 따라서 세계관, 역사관, 문화관, 삶의 가 치 체계가 달라진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교육, 보건 위생, 법적 제도, 환경 보호, 예술, 가족, 정치 등 모든 영역을 지배 하고 있기 때문이다.

1.하나님 나라 (The&nbspkingdom&nbspof&nbspGod)란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란 무엇인가? 영어로는 왕국(Kingdom)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왕국(王國)'이란 의미를 일차적으로 장소 적 개념 즉 공간적인 개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나라'라고 하면 국가를 구성하는 삼대 요소인 '영토, 국민, 주권' 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 나라가 장소적 개념, 공간적 개념, 정치적으로 개념보다는 하나님의 통치권(단 2:37 동의어/나라, 능력, 권세, 공통어/나라, 왕국)임을 알 수 있다.(시&nbsp103:19) 그러므로 이러한 측면 에서 주기도문의 "나라에 임하옵소서"라는 표현은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모시겠나이다"라는 고백이다.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 는 곳은 어디든지 하나님 나라이므로 하나님 나라 라고 말할 때 '나라'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하나님에 초점을 두어 생각해야 할 것이 다. 즉 하나님 나라 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하나님 나라"를 극락이나 천당 등과 같은 통상적 용법의 천국이나 저승을 의미하는 단어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하나님 나라 를 "죽어서 천국 간다"거나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는 식으로 표현한다면 이것 은 "하나님 나라 "를 원칙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천국에 이러한 개념이 전혀 배제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것은 성 경이 보여주는 천국의 개념 가운데 아주 지엽적인 내용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이상의 고찰에서 우리는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 나라 "나 "하늘 나라"란 용어들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왕(King)이 되셔서 다스린다"는 사상은 그 바탕에 깔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왕권(王權)'에 대하여 자주 언급하고 있는데 (시&nbsp103:19,&nbsp145:11-13,단&nbsp4:3) 그는 일시적인 왕이 아니라 영원하 신 왕으로 간주되고 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의 실수는 하나님 나라를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오해하기는 하였지만 구약 성경에서의 '하 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왕으로 활동하셨던 사건의 회상적 표현이며, 앞으로도 이스라엘 왕으로 이스라엘을 구원 하시고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기대적 표현이다. 따라서 구약 성경에서의 하나님 나라 의 의미는 구원론적이라고 할 수 있 다.
반면에 신약 성경을 "하나님 나라"란 용어가 예수님께서 처음 사용하신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출현과 연결시키고 있 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나타나심으로 하나님의 왕적 통치가 구약 시대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이 세상에 개입한다는 것 이 신약 성경에서의 하나님 나라 의 핵심이다. 따라서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는 기독론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신약 성경의 중심 메시지는 하나님의 통치 사역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직접 수행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약 성 경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란 하나님의 통치의 전체 국면이 아니라 한 특수한 국면 즉 자신의 백성을 다스리시는 사역을 의미하는데 이 제 이 백성에 관계된 것도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조명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란 예수 그리 스도께서 하나님과 자기 자신의 백성을 다스리시는 사역을 지시하는 기독론적 용어임을 알 수 있고, 예수님의 사역에 의하여 하나님 나 라 가 실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2.하나님 나라의 구성요소(構成要素)
"하나님 나라 "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개념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에 대한 선 이해가 필요하다. 하나님 나라 는 ① 주 체로서의 하나님 ② 객체로서의 백성 ③ 이 두 대상을 연결하는 하나님의 주권 내지는 통치 사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약에서는 '이 관계가 하나님과 그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로 나타났고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그가 찾으시는 이스 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즉 '그의 제자들'로 대치된 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나라 는 그의 백성에게만 충분한 효력을 나타낸다 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 하지만 이러한 당연한 사역을 위해 하나님 나라 란 특수한 개념이 사용 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 란 구속의 개념이며,기독론적 개념이다. 

3.하나님 나라의 이중성(현재성과 미래성)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활동으로 이미(already) 이 땅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천국에 들어온 자들 입니다. 이 표현이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실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다스림의 결과인 천국의 기쁨에 동참하고 알 때 새 로운 신앙의 각성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이 임한 증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권이 확장됨으로 인해 귀신이 힘을 잃고 쫓겨 나가는 것입니다. (마&nbsp1228)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가 구원을 얻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맛보고 있 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눅&nbsp10:17,18,히&nbsp214)  그렇다면 우리는 맛본 것으로 끝나지 아 니라 느껴야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 나라는 아직(yet) 완성되지 아니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자신의 메시야적 활동으로 이 땅에 이 미 임했음을 가르치심과 동시에 종말에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극치도 아울러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이미 임했지만 아 직 절정에는 이르지 않은 모습으로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입니다. 이 두 사 이의 긴장을 잘 이해할 때 우리는 참다운 재림 소망을 가짐과 동시에 더 더욱 이 땅에서 우리 삶의 의미와 존재 가치를 생생하게 나 타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계&nbsp19:11,13,21:3,4의 말씀은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있다. 그 때가 되면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셨던 상태를 완전히 회복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날 것이며 아담이 원래 하나님의 명을 따라서 완 성시켜야 할 모습이 될 것이다. 그 곳은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nbsp100% 순종한 것과 같은 수준에 가진 자들 이 모여서 만드는 사회의 모습일 것이다. 인간이 갖는 모순성도 없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문화와 역사가 펼쳐질 것이다.  

4.하나님 나라의 신비(神秘)
우리는 이상의 고찰에서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완성될 나라일 뿐만 아니라 현재에 계속적으로 침투되어 들어오는 나라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통치권이 이 땅에서 실행되고 있으되 그 통치권이 영광과 존귀를 다 드러내지 않 고 발휘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이다. 하나님 나라가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극치를 기다리는 형태는 일반 세상 사람들의 눈에 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사단의 권세가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듯이 보이게 한다. 그러나 그 나라의 백성들은 이 신비를 볼 수 있 으며 그 나라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 삶에&nbsp30배,60배,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마&nbsp13:3-9)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천국의 신비가 공개된 비밀임을 알 수 있다. 즉 구원받은 자들에게 더욱 확실하게 드러내 보이시고(계 시)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깜깜하게 만드신다(은닉성)(마&nbsp13:13)  하나님 나라의 시작은 겨자씨처럼 미미하지 만 세상 안에서 그 역사의 흐름을 따라 곧 큰 나무로 자랄 것이다. 또 충만하게 자라 누룩이 가루 전체에 퍼지듯이 세상 전 체 그 영향을 미칠 것이다(겨자씨,누룩 비유, 밭에 감추인 보화, 진주 비유, 그물 비유, 잔치 비유 (마&nbsp22:1-14)  사람들은 이제 이 하나님 나라 를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이 찾을 수도 있고 아주 값진 진주 와 같이 살수도 있다.

5.하나님 나라의 생활(生活)의 법(法)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그의 소유된 백성들인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백성이 우리가 지켜야 할 생활 이 법이 무엇인가? 따라서 우리는 교회 생활이란 단순하게 우리는 단순히 모임에 참석하고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다]라고 착각해서 는 아니될 것이다.  
월프레드 그렌펠(Wilfred&nbspGrenfell) 경이 "당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 이 아니라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 는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하여 심각한 도전을 갖고 있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품의 모델이며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자들이다. 교회로서의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 나라의 이상적 인 삶을 영위해야 할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교회는 현재 하나님 나라 를 잘 드러낼 수 있는 기관이다"라는 것이다. 신자들이 비 록 이 땅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그 활동의 모든 원리와 방향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땅에서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적으로 하나님 나라 를 선포해 나가는 유일한 기관으로서 그 진가 를 발휘하도록 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의미에 있어서 자신이 하나님 백성의 한 분자된 된 교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가 치 있게 여겨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 의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구체적인 모습이 바로 교회의 삶인 것을 때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그 를 신뢰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추구해야 할 그리스도의 새 법은 무엇이 있는가?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들은 새 실재가 되었으므 로 변화된 새 실재로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새 실재가 되었으면 그리스도의 새 법으로 살아야 한다. 

⑴ [신실의 법]을 지켜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신민으로서 지켜야 할 계명은 "약속을 꼭 지키는 일"이다. 한 번 행한 약속은 해로와도 지켜야 한 다. 지키지 않으면 거짓을 행함므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 의 시민으로서 하나님의 신실성을 배워 야 한다. 하나님은 한 번 하신 약속은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한 번 하신 약속은 반드시 지키신다. 약속의 상대자가 그 약속 혹은 언약을 파기하고 범죄하 여 그 언약을 완전히 무효 되게 하였어도 하나님은 약속을 어기실 수 없기 때문에 저들의 무신실성과 범죄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이행하 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여러 차례 그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러나 그 백성들은 그 모든 언약을 다 범하고 폐기하였 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호의를 입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자기 약속이시기 때문에 지키시사 그 백성에게 메시아를 허락하시고 구원 을 베푸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미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한 번 약속은 어떠한 경우에도 기어이 이루신다. 언약의 당사자가 불신실하여 이 룰 수 없는 모든 경우에도 하나님은 자기의 신성성 때문에 자기의 언약을 성취하신다. 하나님은 이처럼 미쁘신 분이다. 그러므 로 이 미쁘신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로 다 하나님의 신실성을 배우고 그의 성품을 우리의 것으로 삼아 우리도 한 번 한 약속은 반드 시 지키고 이루어야 한다.  바로 이 신실 때문에 인간 사회가 성립되고 존속되며, 그리고 인간 사회가 될 것이다. 이 신실성이 무 너지면 인륜 사회가 아니고 도적 사회가 될 뿐이다. 인륜 사회가 되어 축복된 사회가 되고, 문화가 창당되는 사회가 되려면 그 사회 는 신실성에 기초해야 한다. 더구나 하나님 나라 의 시민들은 한 번 정한 약속은 꼭 지키는 신실성을 생활의 법으로 지녀야 한 다.  그래야 하나님을 믿을 수 있으며 또 다른 사람들로 하나님을 믿게 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사회로 설 수 있다. 

신실의 법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중심적인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창&nbsp39:9에서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 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요셉은 하나 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요셉은 [신전의식](神殿意識)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창&nbsp45:5,8에서 "(창45:5) 당신 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 45: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 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요셉은 형들이 자기 자신을 자신을 노예상인에게 애굽의 종으 로 팔았지만 그것을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을 가리켜서 [Coram&nbspDeo](코람데 오)의 삶이라고 합니다.  요셉은 모든 하는 일에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살았습니다. 

성경에 보니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의 공통적인 삶을 보면 모두가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 님 중심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쓰임을 받습니다. 역상&nbsp14:10,14에 보니 "다웟은 범사에 하나님께 물어 보았다" (블레셋과 전쟁) 반면에 사울은 "하나님께 묻지 아니하고 신접한 여인에게 물어보았다"(대상&nbsp10:13,14) 
그렇다. 우리에게 아무리 꿈이 있어도 범사에 인간 중심적인 삶을 사는 인생은 사울처럼 실패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요셉처럼,다웟처럼 하나님 중심적 삶을 살 때에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셔서 범사에 형통케 하신다. 

⑵ [성결의 법]을 지켜야 한다.
예수님께서 마&nbsp5:8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nbsp5:8)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성결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모세 는 레&nbsp114,45에서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 는 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 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고, 베드로 사도는 벧전&nbsp1:16에서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 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고 말씀하면서 성결의 법을 지켜야 함을 말씀하시고 있다. 
창&nbsp39:9에서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 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요셉은 성결 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에도 그는 자기 자신을 더럽히지 아니했습니다. 또 한 단&nbsp1:8에서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 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다니엘은 바벨론 나라의 포로가 되었지만 영적으로, 정신적으 로, 육체적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딤후&nbsp2:22에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또한 네 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 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쓰시는 그릇은 금그릇, 은그릇, 나무그릇,질그릇 등과 그릇 재질에 있지 아니하고,성결케 하는 그릇을 쓰시 기 때문이다.(딤후2:20,21) 요셉과 다니엘처럼&nbsp21세기 역사를 흔드는 쓰임받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영적으로도, 정신적으로,육체적(마약,담배,술,순결)으로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정말 세속적인 문화에 자기 자신을 노출시키지 말아야 한 다. 

⑶ [진실의 법]을 지켜야 한다.
그리스도인도 꼭 지켜야 할 계명들을 갖는다. 그 중에 '참 진실'을 말함이 그리스도인의 제1계명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서 거짓을 말하면 그는 옛 사람이거나 제&nbsp1계명을 범하고 있는 자이다. 제&nbsp1계명을 지키는 자가 그리 스도인이고 거짓을 말하는 자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하나님 나라 의 기초를 허는 자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거짓을 말하면 사는 자 는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생명이 죽은 자이다. 

그러한 자는 공직에도 이르지 못하게 하고, 교회의 직분에도 이르지 못하게 해야 한다. 거짓말하는 그리스도인은 송장으로 취급 해야 한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직분이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 나라 의 근본을 허는 자이이므로 금치산 선고해서 더 이 상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 는 진실과 동의를 기초를 하고 유지되고 통치되는 나라이다. 왜냐하면 하 나님 나라 는 진실을 기초석으로 하고 서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이 그 나라에 참예하지 못하고 성밖 에 있으며 또 불과 유황 못에 참예할 것으로 그 나라의 법이 작정되었다(계&nbsp22:15,21:8) 

⑷ [양심의 법]을 지켜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꼭 지켜야 할 법은 "양심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이해에 관계된 선택과 결정에 있어 서는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고 이해와 유익을 행동의 원리를 삼는다. 그러나 이 길은 개인과 사회를 부패하고 타락하며 인륜 사회 가 되지 못하게 하는 첩경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양심을 따르되 중생 되고 진리로 새로워진 양심을 따라 행동해야 한다.  아무리 목적이 선하고 훌륭해 도 수단이 바르지 못하면 그것은 정죄되는 법이고 또 정죄되어야 한다. 아무리 선한 목적도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그것은 혁명 적 방법이고 기독교이지 못한 방법이다. 그리스도인은 목적에 이르는 과정 중에 늘 중생한 양심을 따라 행동해야 하고, 이해 때문 에 양심을 굽히면 안된다. 이해 때문에 양심을 굽히면 도적이 되고 범죄를 구성할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의 행동에 있어서 언약하고 가냘른 양심의 소리를 따라야 하고 욕망의 충족을 위해 열심할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양심 을 따르면 우리의 결정과 행동이 좀 더 신중할 것이고 급하고 속결하지 않을 것이다. 너무나 급하게 욕망을 충족하고 유익의 열매 를 거두려고 애쓴 후 양심의 가책과 후회 속에 살지 않아야 할 것이다. 욕망에 의해 당위를 희생할 때 반드시 양심의 가책과 후회 가 오고 또 그것이 일생을 두고 반복적으로 괴롭힐 때가 많은데 그런 경우 사람이 무기력해지고 자신과 용기 있는 삶을 살지 못하 게 된다. 그런 것이 심해질수록 그 인격이 분열증을 경험하며 힘을 상실하며 마침내 폐인이 되거나 악한 자가 되거나 아니면 완악해 진 범죄자적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자신과 사회에 대한 큰 손실이고 사회도 퇴폐적이 되고 무기력하게 된다. 

하나님 나라 의 계속은 양심을 따라 삶으로 이루어진다. 양심수가 많아지는 사회도 안되지만 양심을 넘어서는 것에 인박하고 강 해지는 사회도 결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양심대로 살아 편안한 사회를 만들고 살아야 한다. 작자가 다 자기 양심을 따라 살고 그로 써 가책이 없는 삶을 사는 사회이어야지 항상 감시자 있어서 양심이 작동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각자가 자기 양심대로 살면서 평만한 삶을 사는 사회이다. 거기에 활력이 있고 화합과 신뢰가 있으며 평화와 질 서가 지배하게 된다. 법과 공권력으로 강제된 평화와 질서는 벌써 병든 사회이다.  하나님 나라 의 백성들은 양심을 따라 살아야 거 기 하나님의 법이 서고 그의 다스림이 펼쳐진다. 우리는 우리 욕망을 삶의 법으로 하고 사는데서 양심을 따라 사는 것을 생활의 법으 로 하고 살아야 한다. 욕망과 당위가 서로 만나면 대개의 욕망이 당위를 이기게 되는데 그것은 인격자의 삶의 방법이 아니다. 그러므 로 욕망을 따라 사는 자연적인 삶의 방식에서 양심을 따라 당위를 지키는 단련된 인간들이 되어야 하고 또 그런 인간들을 생산케 내 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계명들 특히 그리스도의 법을 좇아 살도록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사람들을 교육해야 한다.  그리하 여 양심의 소리와 하나님의 계명이 상충되지 않게 해야 한다. 양심도 어떻게 교육을 받느냐에 따라 그 발하는 소리가 달라질 것이 다. 

⑸ [노동의 법](=대가 지불의 법)을 지켜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하나님의 법은 지불한 수고의 대가의 법이다. 노동은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주어진 인간 생활의 근 본이 되었다. 때문에  인간은 종교적, 문화적 사명들의 수행 외에 자기의 의식주를 위하여 모든 노동을 하게 되었다 (창&nbsp3:17-19) 
하나님은 이렇게 땀 흘려 수고하여 자기의 생명과 가족을 유지 보존할 책임을 남자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힘써 일하 여 자기 몫과 다 책임져야 한다. 그가 열심히 일하면 먹고 살 수 있고, 또 먹을 권리를 가지나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아야 하 는 법칙이 성립되게 된다.(살후&nbsp3:10) 
이처럼 누구든지 일해야 먹고 살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법이다. 즉 노동은 사회가 유지하고 존속되는 기본법이다. 뿐 만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진행되는 모든 활동과 연구도 다 땀흘려 수고하지 않으며 열매가 없게 작정하였다. 그것이 예술적 활동이 든, 학문적 업적이든, 정치 경제의 활동이든 간에 다 땀흘려 수고함이 없이는 결과가 없게 되었다. 인간은 수고를 지불하고 그 대가 로 받은 돈으로 자기의 생을 살아야 한다. 돈은 지불한 수고의 대가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다 자기의 생을 자기가 감당해야 하고, 이 일을 위해서 자기의 정당한 노력을 지불해야 한다. 자기 노 력으로 자기의 밥을 벌어야 하고 남에게 의존해서는 아니된다. 자기의 생을 남에게 의존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서 그것이 바 로 부정이고 불의이다. 자기가 수고를 지불함 없이 돈을 가지려고 함은 도적이다. 왜냐하면 돈을 지불한 수고의 대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공돈을 너무 좋아해서 문제들이 참으로 많다. 자기가 벌지 않고 남이 벌어 놓은 돈을 그것에 상응하 는 수고를 지불함이 없이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하는 심리와 또 그렇게 하는 것을 의당한 줄로 아는 행동과 작태가 가장 노골적으 로 발현되는 경우가 결혼시 과도한 지참금의 요구이다. 이러한 것은 결혼 초부터 불행하거나 이혼의 비극에로 귀착하는 경우가 많이 있 다.  또한 이것은 공직자의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액튼 경(Acton)경의 명언대로 "권력은 부패하고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언급처럼 부패하고 타락할 수밖에 없 다. 때문에 권력의 길에 접근해서 큰돈을 벌 수 없는 많은 백성들이 종교의 길 곧 초자연적 방법에 의해 부에 이르려는 사고방식 이 국민들에게 편만하게 되었다. 이 뿌리깊은 사고방식과 욕망 때문에 한국의 종교들은 거의가 다 기복 종교이고 축복 종교들이 되었 다. 불교나 무당 종교들이나 천주교회나 개신 교회나 다 축복 종교, 기복종교의 길을 걸어왔고 또 지금도 걸고 있다. 

백성들이 이 수고 없는 큰돈에의 욕망을 이용하여 절간들도 큰 축복을 약속해 주고 너무 많은 재산들을 모아 정부의 재정 능력 을 능가할 만큼 되었고, 무당들도 돈을 모아 그 자식들도 외국 가서 박사 학위를 해오게까지 되었다. 교회도 백성들의 이 허망한 욕 구를 이용하여 축복을 많이 선사하고 많은 헌금과 봉사를 강요하게 되었다. 

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 교회는 이제 거듭나야 한다. 국민들의 이 허망한 욕구를 이용하여 축복 기도와 헌금을 종용 내지 강 요에서 깨어나 경제적 민주화를 촉구하고 제도적 비리를 개선하는데 앞장서고 또 선지자적 선포를 계속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의 수고로 자기의 삶을 살도록 사회 유지의 법을 세우셨으므로 우리는 일해야 하고, 일한 수고의 대가로 살아야 할 것이다. 또 자기 의 수고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누구도 탄압할 수 없는 천부적 권리요 하나님이 세우신 법이다.

이 사회가 바로 되고 또 죄악을 경감시키고 문화가 창달하는 길은 다 땀흘려 자기 일을 하고 그 수고의 대가로 사는 것이 다. 일하지 않고 먹고사는 법은 없게 해야 한다. 우리는 힘써 일하고 우리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로 정당하고 의로운 삶을 살 아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고 하나님의 복을 입는 공의로운 사회를 이루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 와 그 나라의 법 이 크게 진전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과 관련지어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노동의 법을 지키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nbsp39:6과&nbsp22,23절에서 "(창39:6)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 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창39:22)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 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창39:23)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 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요셉은 애굽 나라의 종살이를 하 고,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형편에 있었을지라도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에 최선을 다하여 충성스럽게, 성실함으로 감당했다는 사 실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실은 아무리 힘이 들고,어려운 상황일지라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도전 이 되는 말씀이다. 여러분의 소임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주어진 일에 대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께서 요셉에 게 지혜와 명철을 주신 것처럼 꿈을 이루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⑹ [절제의 법]을 지켜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의존해서 살아야 할 법은 절제의 생활 원리이다. 성경 특히 신약이 제시하는 인간 생활의 법은 절제이다. 하나 님 나라 의 백성들은 육체의 정욕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절제된 삶을 살아야 한다. 절제의 생활이 하나님이 세우신 바 른 인간의 생활 규범이어서 과도함은 언제나 피할 생활의 법칙이다.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삶은 육체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쾌락주의도 아니고 죄악된 성향대로 육체적 욕망으로 사는 방탕 주의도 아 니다. 또 이런 쾌락, 환락, 방탕, 육욕주의의 반대의 방식이 아니다. 금욕주의는 대개는 고행 주의가 되어 육체를 괴롭히고 모 든 욕망을 다 죄악시하여 그 욕망의 불을 끄느라고 인생의 주요한 사명과 과업을 포기하고 고행하는 것을 인생의 전부로 한다. 
사람은 대개 욕망에 지배되어 살고 욕망 달성을 위해서 일생 수고한다. 그러나 절제하지 않고 욕망을 따라 과도하면 언제든 지 정상적인 생활의 순환이 깨어지고 조화가 없어진다. 욕망에 따라 행동하고 수고하되 절제가 없으면 건강을 망치고 질병을 얻어 생명 이 단축된다. 

① 먹는 것을 절제해야 한다. 
먹는 것은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선에서 조절되어야 한다. 과거의 배고픔의 기억 때문에 과도히 먹으면 첫째 위장이 장애 를 받아 건강을 망치게 된다. 많이 먹으므로 체중이 과다해지면 온갖 질병이 발생하여 정상적인 생을 살 수 없다.  

②  쾌락의 추구도 절제해야 한다.
사람은 다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은 피하지만 쾌락도 한도 내에서 즐겨야 하고 쾌락만 추구하면 허무감에 이르고 나태해져서 사회 기강을 헌다.  

③ 운동도 노동도 자기 몸의 능력에 맞는 한도에서 해야 하고 과도하면 건강을 망치고 정상적인 인간 생활을 할 수 없게 한다. 
제일 첫째로 감정을 예리하게 하고 격화하여 아름답고 평온한 생을 누리게 못하게 된다. 감정이 정상적인 흐름을 잃게 되면 바 른 판단력을 잃게 되어 인간관계가 원활하지 못해 나빠진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인간 활동에 있어서 욕망을 절제하여 바르게 살아 야 한다.  

그러므로 육체적 활동뿐만 인간 모든 행사가 다 절제되어야 한다. 외적 현시에 더 치중하는 한국 백성들에게 있어서 절제는 매 우 어려운 일이나 절제가 행사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 사회 행사에 있어서 절제는 검소이다. 소박한 행사와 생활양식이 우리의 바 른 삶의 방식인 것이다. 

6.하나님 나라와 기독교 세계관  
⑴ 세계관(世界觀)이란?
오늘날에는 어떤 것에 대해 가치 판단을 해야 할 때 "세계관이 잘 서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한다.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에도 그 사람의 "인격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세계관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청년은 " 신앙이 좋다."고 말하던 것을 이제는 그 사람은 "세계관이 괜찮다."고 말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세계관이란 말이 이처럼 보편적으로 사용되다 보니까 가끔은 굉장히 똑똑하고 많이 배운 사람의 특허품으로 오해되기도 합니 다. 그러나 세계관은 말 그대로 '세계를 보는 눈' 혹은 '세상을 보는 관점'을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관이란 다음과 같 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세계관은 선입관이나 전제를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상당한 수준의 판단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약간 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람마다 무의식 중에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흔히 선입관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거짓 말을 하는 것은 나쁘다"는 말을 생각해 봅시다. 이 말을 여러분도 믿습니까? 그런데 이런 가치관을 가지게 된 것은 강의를 들었 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무의식 속에 형성되었기 때문입니까? 
대부분은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리 못 배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런 선입관이 다 있기 때 문에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수의 지적인 사람들만이 의식적으로 세계관을 선택합니다. 사람들은 의식적 이건 무의식이건 간에 일상생활 속에서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프란시스 쉐퍼](F.Schaeffer)는 이걸 두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전제(前 提,&nbspPresupposition)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홍역에 걸리듯이 주위의 가족과 사회로부 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지게 된다. 그러나 보다 지적인 사람들은 그들의 전제가 어떤 세계관인가를 주의 깊게 생각한 후에 선택해 야 한다는 것을 안다."라고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그는 사람마다 갖고 있는 전제와 세계관을 동일시합니다. 

둘째, 세계관은 보이지 않는 저울과 같은 것입니다. 
저울은 물건의 무게를 확실히 알고자 할 때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세계관이란 자신과 자신의 바깥 세계의 근본적인 문제를 달 아보는 보이지 않는 저울과 같은 일련의 지적인 사고 체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관이란 한 개인이 세계에 대해 갖는 종합적인 ' 신념 체계(a&nbspbelief&nbspsystem)', 혹은 '사고 체계 (a&nbspthought&nbspsystem)'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제시한다는 측면에서는 세계관이란 곧 철학이기도 합니다. 인생에 대한 나름대로 의 대답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자기 철학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야 스퍼스](K.Jaspers)도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철학에서 도피할 방법은 없다... 어떤 사람은 철학을 부인하면서도 스 스로는 무의식적으로 철학을 실천하고 있다."

셋째, 기독교 세계관은 기독교적인 '지성(知性)'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기독교 세계관'이란 말이나 기독교적 전제, 신념 체계, 사고 체계 혹은 기독교 철학이라는 말이 문자적으로 쓰여 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적 세계관을 의미하는 언급은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우라"(빌립보 서&nbsp2:5, 고린도전서&nbsp2:16), "네 마음의 변화를 받아"(로마서&nbsp12:2), " 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신명기&nbsp6:5), "네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누가복 음&nbsp10:27)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의 "마음", "뜻"이란 말은 모두 '지성(知 性,&nbspmind)'을 의미합니다. 
 
어떤 바보같은 대학생이 "'지성'이 무어꼬?"라고 말하니까 그의 친구가 하는 말인즉, "지성이란 건성 피부가 아닌 걸 말하 는 거 아이가?"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만, 지성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생각하고 사물을 판단하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지성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변화와 교육을 통해 소유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형성되는 것이 아니 라 변화를 시도할 때 점차로 발전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성경과 성령의 도움은 필수적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마음, 혹 은 성경적 지성이 기독교적 세계관입니다. 그리고 이 기독교적 지성은 예수님의 지성을 따르려는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지적 혼돈 시대 를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요청되는 것입니다.  
 
⑵ 기독교적 세계관의 필요성(必要性)
왜 기독교적 세계관이 필요할까요? 그 기본적인 대답은 이미 앞에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기독교 적 세계관을 확립할 필요성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로 기독교 세계관 확립이 시급히 요청된다고 봅 니다.  

첫째, 감정에 의존하여 살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약&nbsp200년 전인&nbsp1799년에 쓴 [베르누] 신부의 '선교보고서'에는 이런 대목이 있 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정말이지 단순하다. 그들은 어떤 것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내가 우리가 설교를 했을 때 조심 스럽게 듣지도 않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들은 가르쳐 주는 것을 쉽게 믿었고 그것 때문에 당하는 어떤 희생도 감수했다. 그러 나 내가 다시 성경을 조심스럽게 가르치다 보면 그들이 바로 깨닫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는 이 대목을 읽다가 울 분이 솟았는데, 여기의 "어떤 희생"이란 온갖 박해에 맞선 순교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국인은 이유 없이 목숨 을 버린 것입니다. 
그로부터&nbsp200년이 지난 오늘날의 한국 교회는 무엇이 다릅니까? "아무 것도 묻지 말고 덮어놓고 믿어라." 이 결과로 불교도의 공통적인 생각은 "기독교는 비합리적인 종교라고 생각한다."라는 것이다. 
왜 이런 오해가 생겼을까요? 기독교인들이 우리의 민족 정서상 감정 의존적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편승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 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확실히 우리 민족은 감정과 직관을 중시합니다. 일부 정치인들과 경영인들이 즐겨 쓰는 "감(感)의 정 치", 혹은 "감의 경영"도 같은 맥락입니다.

둘째, 현대인은 이성으로부터 도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은 이성에서의 도피를 선도했습니다. 오늘날의 지적 흐름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성에서 도피하여 체험과 감정, 느 낌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으로 '이성이 해체'되고 '광기' 혹은 '원시적 신비주의'가 합리성의 자리 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의 신세대들은 동양 사상보다도 서구식 교육과 그 사상에 더 익숙하기 때문에 이러한 감각적인 시대 적 흐름에 민감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 와중에 큐핏(Don&nbspCuppit)과 같은 문화 신학자처럼 "나는 기독교 교리나 신앙 체계가 없이도 하나님 을 믿는다."고 호언하는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기독 신앙은 이성과는 무관한 인간의 감정의 산물이 며, 이성의 작용이 동반될 필요가 없는 비지성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불건전한 성령 운동이나 영성 운 동은 실존주의 신학 못지 않게 감정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습니다. 기독교적인 지성이 발붙일 틈이 없을 정도로 교회 안팎 에서 반지성적인 흐름이 도도합니다.

셋째, 신앙은 비지성적이라는 잘못된 영성 때문입니다.
아직도 "신앙은 이성과 충돌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성은 "신앙의 방해물이나 적"이라고 생각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기야 루터(M.Luther)도 한 때는 이성을 "마귀의 매춘부"라고 부른 적이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상 황에서 '기독교 세계관'이란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비영적인 '지적 놀음'으로 매도당하기 싶습니다. 그리고 기성 세대들은 '세계관' 이란 말을 교회가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거부 반응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영성(靈性)'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있 습니다. 
 잘못된 영성은 성경 해석에 많은 오해를 낳고 있습니다. 
① 바울이 철학을 조심하라고 한 것을 두고 모든 철학과 이성적 학문이 다 무가치하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골로새 서&nbsp2:8) ② 바울이 아테네에서 전도할 때 십자가만을 전하지 않고 인간의 지혜에 의지하여 철학적인 접근 방법을 사 용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것입니다.(사도행전&nbsp17:16-34)&nbsp3)기독교는 전도라는 미련한 방법을 사 용한다는 것을 두고 기독교가 근본적으로 지혜롭지 못한 어리석은 종교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고린도전 서&nbsp1:18-21) 이와 같은 잘못된 성경 해석은 모두 잘못된 영성에 기인합니다. 
 
⑶ 기독교 세계관을 무시한 결과들
세계관은 반드시 결과를 초래합니다. 즉 우리의 결단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결정을 짓게 합니다. 세계관의 역동성이 낳는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여기서는 세계관을 무시할 때 파생되는 몇 가지 결과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혼합주의적인 사상을 낳습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 속에서 표출하는 개인적인 견해나 행동의 뿌리는 세계관입니다. 그가 어떤 세계관을 가졌는가에 따라서 그 사 람의 삶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철학자 안병욱 교수는 그의 인생론에서 "나는 신앙하는 것과  학문하는 것을 별개의 문제로 생각한 다."고 피력했는데, 그의 이런 견해는 많은 청년들로 하여금 신앙과 학문의 비일관성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게 했습니다. 최근까지 만 해도 많은 기독 청년들이 신앙과 학문, 신앙과 직업, 신앙과 생활의 분열을 전혀 문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세계관 의 부재가 낳은 혼합주의의 결과였습니다.

고린도교회도 마찬가지였는데, 그 교회에는 "수다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고린도후서2:17) 했습니다. 여기 의 '혼잡하게 한다'는 말은 '섞는다' 혹은 '혼합한다'는 말입니다. 즉 당시의 헬라 철학에 물든 이교도적인 궤변가 (sophist)들이 세속적인 철학과 성경 사상을 섞은 혼합주의(syncreticism)를 파생시킨 것입니다. 그 결과 일상생 활 속에서 결혼 문제, 성적인 문제, 경제 문제 등에서 타협적인 태도가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바울 사도가 그러한 고린도교회 의 혼합주의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은 사랑이 동반된 지적 전쟁 밖에 없다고 권면했습니다.(고린도후서10:5) 

둘째,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로 전락시킨다.
여러 세계관들 사이의 갈등은 알고 보면 상이한 진리와 종교 사이의 갈등입니다. 오늘날의 세계적 혼돈의 핵심은 바 로 이 둘 사이의 싸움을 말합니다. 기독교가 직면하고 있는 세계관적 위기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즉 기독교를 진리가 아니라 종교 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우주와 인간에 대한 유일한 진리(眞理)'가 기독교라고 말합니다.(이사 야&nbsp45:18,19 사도행전&nbsp26:25)
제가 여기서 진리라고 말할 때 그것은 마치 '장갑'과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장갑이 두 켤레가 있습니다. 하나는 부티 가 나는 비싼 가죽장갑이고 다른 하나는 빈티와 촌티가 주루루 흐르는 털장갑입니다. 그런데 가죽장갑은 추운 겨울에 끼고 나가면 손 이 시립니다. 그 이유는 내 손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털장갑은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손이 시리지 않습니다. 손에 꼭 맞 고 따뜻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겨울이 되면 어느 것을 낄까요? 그러면 기독교는 가죽 장갑과 같을까요 아니면 털장갑과 같을까요? 물 론 털장갑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주와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해 바른 대답과 설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로서의 기독교가 무너진 곳에서는 온갖 우상과 미신이 판을 치게 되고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생각이 퍼지기 시 작합니다. 이제 이것은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만의 의견이 아닙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의 다수도 그와 같은 의견을 따르고 있습 니다. 미국의 조지 바너가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국민&nbsp67%가 그렇게 믿고 있고, 복음주의 기독교인 의&nbsp50% 이상이 그렇게 믿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사실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까지도 현대 문화의 상대주의적인 세계관에 포로가 되어 있다는 증거입니 다. 시인 구상씨는 "한국 기독교인들은 생명보험 들듯이 예수 믿고 있다."고 꼬집었는데, 그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 이유도 여 기에 있습니다. 기독교가 종교로 전락되면 온갖 종교적인 기교(技巧)와 기복(祈福) 사상이 기승(氣勝)을 부리게 됩니다. 그리고 정 직한 질문과 대답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 결과는 서양의 히피들처럼 질문을 멈추고 마치 마약에 취한 듯이 '예수에게 미쳐라 (Get&nbsphigh&nbspon&nbspJesus)'고 소리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가 신비적인 체험 만을 중시하는 종교가 되어 버린 탓입니다. 
  
셋째, 사회적 기틀을 연약하게 합니다.
개인이나 국가는 철학이 있어야 견고합니다. 일찍이 로마 제국은 세계 정복이라는 '개똥철학'이라도 있을 때는 국가가 지탱되었 지만 그것마저 사라졌을 때는 내부적인 분열과 혼돈에 의해 종말을 고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역사와 문화는 철학의 산물입니다. 철 학, 즉 절대적인 세계관이 없는 개인이나 국가는 새로운 역사와 문화를 창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회를 지탱하기도 불가능해 집니 다. "절대적인 세계관이 무너진 결과는", 쉐퍼(F.Schaeffer)는 크게 네 가지를 지적하여, "도덕적 기초의 붕괴, 법률 을 위한 명확한 기초 상실, 악의 문제에 대한 대답 부재, 지성적 전도 방법의 폐기"라고 했습니다. 절대적인 세계관이 무너지면 전 반적으로 사회적인 혼란이 온다는 말입니다. 가치 기준이 모호한 결과입니다.

역사가이며 언론가인 존슨(P.Johnson)이 말하는 지난&nbsp200년간의 기독교적 세계관의 공백이 가져온 사회적 현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지식인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성직자를 대신했으나 비정한 관념의 포학(暴虐)으로 최악의 압제를 행사했다(마르크스, 사르트르, 러셀), 
② 종교적인 우상을 타파하고 합리적인 이성을 세우려 했으나 그 이면에는 인격적 양면성을 드러내었다(셀리, 톨스토이, 촘스키), 
③ 타인으로부터 불후의 명성을 얻고 흠모의 대상이 된 사상가들이 개인적인 도덕적 삶은 추악하기 이를 때 없었다(루소, 브레 히트, 훼밍웨이) 그들이 가져다 준 유익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로 인해 엄청난 사회적 혼란이 동반되기도 했습니다.  

⑷ 기독교 세계관의 바른 이해   
⑴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전&nbsp10:31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 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주인이 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 되시기 때문이다 (골&nbsp1:15-17)  따라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그 하는 일의 목적과 동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에 있는 것 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든지 그 일이 나 자신을 위한 일이 우선적인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 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 백성된(요&nbsp3:3-5) 우리들이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하는지 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자.

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왕되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사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 (The&nbspKingdom&nbspof&nbspGod)라고 할 때에 지역적 인 개념, 장소적,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주권적, 통치적 개념(동의어 = 나라, 권세, 능력)으로 사용되고 있다.(시& nbsp10319) 하나님 나라 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통치이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사회"라고 정의할 수 있다. 즉 "하 나님께서 다스리신다"라는 일차적인 개념이 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그 사회가 하나님 나라 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적용되어 죄가 사해지고, 성령께 서 오셔서 하나님의 생명이 지배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그 곳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영역이며, 바로 그 영역이 바 로 하나님 나라 인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나라를 직접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스리신다. 하나 님의 통치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시행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치를 받아서 사는 곳은 다 하나님 나라이고, 하나님께서 왕으로서 계시는 영역인 것이다. 이러 한 각도에서 인간 사회의 모든 활동 영역이 다 그리스도의 것이다. 지금껏 통상 생각해 오듯 교회만이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께 서 교회만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삶 전체 (The&nbsptoality&nbspof&nbsplife)을 다스리고 통치하고 계신다. 때문에 하나님 나 라 의 백성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영역을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도록 거룩하게 구별하 여 드리는 책임을 지고 있고, 우리의 삶 전체의 초점이 예수 그리스도께 맞추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 가서 우리 자신이 먹는 것도, 우리 자신이 말하는 것도, 우리 자신의 취미 생활도, 우리 자신의 생각하는 것도, 우리 자신의 느끼 는 모든 것도 다 우리의 영원한 왕되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하며, 그 통치에 굴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상술한 바와 같 이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는 도덕적 영역, 진리, 과학, 예술,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브라함 카이퍼](A.&nbspKuyper)는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주권 곧 통치이 미치지 않는 것 은 한 곳도 없기에 어느 누구도 나는 거기서 무관하다고 변명할 수 없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 면 하나님의 백성의 삶은 오직 하나님 중심적이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사도 바울은 롬&nbsp11:36에서 "만물이 주에게 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고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모든 중심 사상 체계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출발해서 구원의 주이 신 하나님을 말미암지 않고는 결국 심판주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라는 사상으로 철저하게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 때문에 하나님 나 라 의 백성들은 매순간마다 하나님과 더불어 생각을 시작하며 삶의 전체 걸음걸이가 하나님의 면전(Coram&nbspDeo)에 서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하여 언제나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의 모든 사상과 삶에서 하나님 앞에서 살지 못하면 그것은 곧 교만의 삶이며 아무 의미도 없는 악 인과 같은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시&nbsp10:4) 따라서 하나님 나라 의 백성들은 공부하는 것도, 말하는 것 도, 생각하는 것도, 취미 생활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한다. 결국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설 때만이 바른 양심을 갖게 되 며 겸손하게 되며 바른 사회와 바른 문화를 갖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 없는 공부는 아무도 가치가 없는 공부이며 부패할 수밖 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과 관련지어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 없는 문화나 사회는 부패와 문화와 부패한 사회 가 될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알지 못하는 신앙생활은 결국 부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 라 의 백성들이 공부하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삶이 온전히 영광과 경배를 받아야 할 분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돌려져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현상은 롬&nbsp1:25에서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뀌어 피조물을 조물주보 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이시로다. 아멘"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商況) 교육] 을 받고 있는 결과로 말미암아 대부분의 학생들은 하나님 대신에 과학(科學)을, 하나님 대신에 기술(技術)을, 하나님 대신에 물질 (物質)을 더 경배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우상은 ① 과학주의 ② 기술주의 ③ 경제주의(단&nbsp2:31-)가 될 수밖 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상황 교육]이 만들어 낸 결과인 것이며, 이것의 귀결로 공부하는 것이 나의 영광이 지, 나의 출세이지, 나의 명예를 위해서 이지, 나의 영역을 위해서 이지 어찌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것으로까지 귀결되 어 버린 현실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사실은 [쟝 칼벵](J,Calvin)이 그의 기독교 강요&nbsp1 권&nbsp1장 첫 페이지에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 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자기 자신을 알 수 없 다"라는 지적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우리가 말하는 것도, 우리가 숨쉬는 것도 다 하나님의 주 권 가운데 되어지는 일이며,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사랑이 없이는 결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은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신 것이다.  

② 하나님 나라 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중심한 [우주관] 혹은 [세계관]을 갖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상기에서도 이미 상술한 바와 같이 하나님 나라 의 백성들은 교육, 보건 위생, 법적 제도, 환경보호, 예술, 가족, 정 치 등 모든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이 주권자 되심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사고를 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 세계관]이다. 따라서 영 지주의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이원론적 관계에 있지 않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너무나 좁게 생각해서 제한해 버릴 때가 많이 있다. 때문에 학교생 활 혹은 직장 생활 따로, 교회 생활 따로, 교우 생활 따로 모든 일들이 제각기 이루어지고 주일날에는 다만 몇 시간 하나님께로 향 하는 어리석은 범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우리의 삶 전체에 해당되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시&nbsp139:7에서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 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라고 고백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이것에 대하여 우리도 분명하게 깨달아야 한다. 어디서든지 불꽃같은 여호와의 눈길 앞에서 진실되게 살 아가며 그리스도의 구속을 찬송하는 구체적인 삶까지를 포함함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 사도 바울이 골&nbsp2:10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 (골&nbsp2:10)가 되신다. 그는 어떠한 영역에서든지 우리의 주인(&nbspLord)가 되시며 왕(King) 이 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의 백성들은 모든 영역의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아야 하며 오직 그의 영광 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결코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과 별개라는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가져서는 않된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삶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며 어떤 인생관과 세계관 을 가져야 할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빌립보서&nbsp4:8에는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 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 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원론적 사상을 거부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의 백성은 교육은 인간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일하는 진실한 성도가 되기를 교육하지만 동시 에 세상에 어떠한 직분을 갖고 일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하고 그를 위해서 살도록 하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의 주권은 세상의 어디든지 미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 나라 의 백성의 삶이란 생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가리킨다.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를 생각하 여 볼 때 하나님 나라 의 백성들은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으나 세상에 속한 자는 아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세상에 다 삶의 목적을 두고 사는 자는 아니지만 여전히 세상에 살고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세상에 대한 책임과 소명을 동시에 갖고 있다 는 말이다. 세상은 죄로 어두워진 세상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와 세상을 이층 구조를 볼 것이 아니고 성도가 세상에 대한 선교적 책임과 사명을 감당하는 뜨거운 확신으 로 불타 있어야 한다. 때문에 우리의 영원한 왕되신 하나님은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③ 하나님 나라 의 백성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그만을 경배하고 봉사해야 할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 다.  창&nbsp1:27,28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하나 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 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피조된 인격체로서의 사람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믿으며 그의 기 쁘신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요리문답&nbsp1문답에서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하 고 있는 것이며 이것에 대한 답변으로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고전&nbsp10:31, 롬&nbsp11:36)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시&nbsp73:24-25, 요&nbsp17:22,24)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죤 칼빈은(J.calvin)은 "하나님의 백성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그의 은혜에 대해 감사함과 아버지 를 향한 자녀의 존경심과 사랑으로 응답해야 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피조물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문화(文化) 명 령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책임과 사명을 다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문화적 명령]을 수행하는 힘 곧 만물을 지배하는 힘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지정의(知情意)적인 진보가 필요하 며 이러한 진보를 위하여 일을 하되 전심전력을 다하여 해야 한다. 그렇게함으로써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④ 하나님 나라 의 백성들의 삶의 유일 절대 원리인 성경이 교훈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 의 백성들로 하여금 온전케 하고 그에게 인도하는 성경은 유일 절대 원리의 표준인데 성경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 께 경배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딤후&nbsp3:16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 로 교훈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라" 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성경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유일 절대 원리이며 표준입니다. 그리고 성경만이 유일한 안내자이다. 하지만 어떠 한 성경관을 갖는가에 따라서 그 대답은 퍽 달라지게 된다. 어떤 사람은 종교적 마음의 거울로만 이해하고 어떤 자는 성경에서 오 직 윤리적인 몇 가지만을 취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의 백성에 대한 원리로서 성경은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이 된다. 따라 서 하나님의 백성은 성경이 가는 곳까지 가도록 하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멈추도록 하며 성경이 침묵하는 곳에 그들도 침묵하도록 하 는 것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다"(시&nbsp119:105)하는 고백을 진실히 하도록 하 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 첨가해서 하나님 나라 의 교육철학의 특징은 일찍이 칼빈주의 철학자 포루마(k.J.Poma)가 지적하고 있 는 것처럼 "자녀와 부모 사이에 언약적 관계"로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의 백성은 우리 자신에게 주신 소명인 직업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며, 이것이 여러분의 직 접적인 동기와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이것에 대하여 시비시비를 논하기를 바란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 다. 

⑵ 일하는 핵심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상술에서 그리스도인의 일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에 대하여 주지해 보았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공부해 야 하는 핵심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쉽게 접근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솔로몬이 잠&nbsp1:7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 여호와를 경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임에도 불구하고 미련한 자는 지 혜와 훈계를 멸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석학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한 지성인 중에 지성인이었으며, 학자 중에 학자였던 바울 은 빌&nbsp3:8의 말씀을 통하여 "또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 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 나라 의 백성된 우리들이 일하는 모든 것들의 핵심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다. 그래서 호세 아 선지자는&nbsp6:3의 말씀을 통하여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 다. 
그런데 여러분이 일을 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부분에 자리하고 있는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인 되심 을 인정하는 것이 너무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일하는 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고 있지는 아니한가? 또한 하나님을 바로 알기 위 한 목적이 아니라 출세와 명예 그리고 빵을 위한 것인가? 
우리는 사람의 눈에 인정받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하듯이 정성껏 해야 하는데, 정당하지 못한 방법을 통 해 좋은 성적을 얻으려는 사람을 보게도 되지만 하나님은 마음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을 목 표로 해야 하며 이것이 우리의 삶의 핵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⑶ 삶의 목표에 바른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사도 바울이 골&nbsp3:23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이 하지말라"고 말 씀하고 있고, 딤전&nbsp4:15에서는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고 말씀하 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어떠한 일을 하든지 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렇다고 [완벽한 자가 되라]는 말씀이 아니라 최선을 다 해 일하라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일 뿐만 아니라 책상 앞에 선한 청지기이다. 우리는 마&nbsp25:14-30 의 달란트 비유가 주는 중요한 교훈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주인에게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한 달란트 가진 사람은 그가 이익 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에 있지 않았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는 것에 있었다. 그러기에 주인은 이것을 악하고 게으르다는 평가하 였던 것이다. 
우리는 책상 앞에 청지기로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능력을 최선을 다해 관리해야 하며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우리의 진보 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해야 할 것이다. 나에게 젊음이 주어지고 여건이 허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태하게 생활하며 주어진 일 에 등하시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죄악적인 모습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② 노력한 대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과정을 등하시한체 결과에만 치중하는 사고 방식에 탈피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 중에서도 결 과에 치중하는 사람이 많다. 예를 들어 어떤 학생들은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하여 컨닝도 개의치 않는다. 이런 학생은 병든 사회의 녹 슨 물을 먹고 는 관중의 눈만 의식하는 불쌍한 광대한 같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결과가 나올지라도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여 공부하고, 공부한 것에는 정당하 게 심판을 받을 수 아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염려하지 말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준비하 고 노력하였다면 반드시 좋은 열매를 거둘 것이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 곧 심음과 거둠의 가장 기본적인 이치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 은 우리들에게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다 그대로 거두리라" (갈&nbsp6:7)고 말씀하고 계시며 이 구절은 공부하는 자세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이기도 한다. 
그렇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요행을 바래서도 아니되고 불로소득(不勞所得)을 구해서는 아니된다. 즉 부정행위를 해서도 결 코 아니된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에게는 결코 선한 열매를 맺지 않게 하신다. 시편 기자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 는 기쁨으로 거둘 수 있으며,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오다" (시&nbsp126:5-6)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노력한 만큼 열매를 거둘 수 있다.  그러므로 최선 을 다해서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노력한 만큼 우리가 수확할 수 있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 님 나라의 백성은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셋째로, 기도하면서 일해야 한다. 
"기도하면서 일하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라"는 말씀이다. 즉 지혜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는 말씀 입니다(왕상&nbsp3:4-13,약&nbsp1:5)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약&nbsp1:5에서 "너희 중 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말씀하고 있 고, 마&nbsp7:7에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 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뿐만 아니라 요일&nbsp514-15의 말씀에서는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 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 을 얻은 줄로 또한 아느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심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장 좋은 것 이 무엇인지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시며 나의 삶을 돌보아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일마다 주님 앞에 지금 내가 무엇 을 하는 것을 기뻐하실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하며 이를 위해서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나가는 글   
[하나님 나라]라고 말할 때에  지역적인 개념, 장소적,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주권적, 통치적 개념](동의어 = 나 라, 권세, 능력)으로 사용되고 있다.(시&nbsp10319) 하나님 나라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통치이고 하나님의 통치 가 이루어지는 사회"라고 정의할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라는 일차적인 개념이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그 사회가 하나님 나라 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적용되어 죄가 사해지고, 성령께 서 오셔서 하나님의 생명이 지배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그 곳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영역이며, 바로 그 영역이 바 로 하나님 나라 인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나라를 직접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스리신다. 하나 님의 통치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시행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치를 받아서 사는 곳은 다 하나님 나라 이고, 하나님께 서 왕으로서 계시는 영역인 것이다.

이러한 각도에서 인간 사회의 모든 활동 영역이 다 그리스도의 것이다. 지금껏 통상 생각해 오듯 교회만이 그리스도의 것이 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만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삶 전체을 다스리고 통치하고 계신다. 때문에 하나님 나라 의 백성된 그리스 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영역을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도록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리는 책임을 지 고 있고, 우리의 삶 전체의 초점이 예수 그리스도께 맞추어져 할 것이며, 신자가 살아가는 모든 영역에서 주 예수의 주님 되심 (Lordship)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 의 백성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① 신실의 법 ②  성결 의 법 ③ ④ 양심의 법 ⑤ 노동의 법( = 대가 지불의 법) ⑥ 절제의 법을 지키고자 몸부림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하 나님 나라 의 백성이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또한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에서 생각하여 볼 때에 우리 인생에서의 성공과 실패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다는 깨달아 야 한다.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을 위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 하여 노력하는 삶과 함께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지혜의 대명사이었던 솔로몬 왕 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여 주실 것이다. (잠&nbsp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