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와 윤리"

들어가는 말 
나님의 나라(The&nbspKingdom&nbspof&nbspGod)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가장 특징 적인 주제이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중심된 가르침인 동시에 선포의 핵심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외치면서 공 생애를 시작하셨고,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제자들을 택하였으며,하나님 나라를 이해시키기 위하여 비유들을 가르치셨고, 하나님의 나라 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고, 부활 후에도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교훈을 주시고 승천하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 서 볼 때에서 필자는 '하나님의 나라의 윤리'에 대한 바른 접근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평생동안 선포하셨던 하나님 의 나라에 대한 바른 고찰이 요구되며, 필수적인 것이다고 사료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하게 극락이나 천당,통상 적 용법의 천국이나 저승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우선적으로 {하나님 나라} (The&nbspKingdom&nbspof&nbspGod)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고찰하고, 이것을 근거점으 로 하여 본 제목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고자 한다.

   &nbspI.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 나 {하늘 나라}란 용어들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왕이 되셔서 다스 린다}는 사상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왕권}(王權)에 대하여 자주 언급하고 있는데 (시&nbsp103:19,&nbsp145:11-13,단&nbsp4:3) 그는 일시적인 왕이 아니라 영원하 신 왕으로 간주되고 있다. 구약성경은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실 뿐 아니라(출&nbsp15:18) 모든 인류의 왕 (렘&nbsp46:18)이심을 선포하고 있는데,이러한 사상은 하나님께서 왕으로서 세상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왕국 사상에 서 더욱 드러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다웟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셨고, 하나님은 다웟으로 하여금 영광스런 통치를 허락하셨 다. 그렇다고 하여서 이것은 하나님의 왕권이 축소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상의 왕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간주되고 있 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선지자들 사이에는 그들이 알고 있는 {이스라엘이란 만백성이 바라던 영광스런 왕국으로부터 멀어져 있다} 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이러한 깨닫음은 하나님께서 그의 대리인을 통하여 영원토록 통치하실 {미래 왕국}에 대한 소망으로 발전하 게 되었던 것이다.  메시야 대망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도성}을 바라보는 종말론 신앙을 갖게 하였으며 이스라엘 의 대적들은 패망하게 되었고, 예루살렘은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사&nbsp24:23, 욥&nbsp21: 슥&nbsp14:9-17) 그러나 {하나님의 도성} 즉 미래 왕국 에 대한 이러한 대망은 종교적인 배경은 이미 {여자의 후손}(창&nbsp3:15)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탄의 머리 를 깨부수고 하나님 나라를 회복할 것을 이미 약속해 주셨고, 이것은 {아브라함}(창&nbsp22:18), {이삭} (창&nbsp26:3,4),{야곱}(창&nbsp28:14), {다웟 왕국}(삼하&nbsp7:12,13)을 통 하여 예언되었고, 구약의 마지막 부분으로 갈수록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에 대한 분명한 예언이 더욱 구체화 되었다. (렘&nbsp23:5,6,사&nbsp9:6,7&nbsp11:1-5, 욥&nbsp21: 슥&nbsp14:9-17) 그러나 하나님 나라 즉 미래 왕국에 대한 이러한 대망은 근본적이고 정치 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 (The&nbspKingdom&nbspof&nbspGod)는 아주 특수하게 이 우주의 통치의 한 국면이 이스 라엘 백성을 다스리는 현상에 국한하여 사용되고 있음을 살펴볼 때에 {하나님의 나라}의 구약적 의미는 {구원론적}이라고 할 수 있 는 것이다.

   &nbspII.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구약 성도들이 바라보고 기다리던 하나님 나라의 도래였다는 것은 예수님도,세례 요한도, 사도들로 가르 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대망은 근본적이고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세례 요한 의 외침 즉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마&nbsp3:1)는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마&nbsp4:17, 눅&nbsp421)을 들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초림 주}로 도래하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즉 신약의 성도들 은 구약의 성도들이 바라보았던 하나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생애를 통해 차별없이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그들의 삶 속에 서 예수님을 친히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무감각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의 이중 적인 특성인 계시와 은닉으로 말미암아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nbsp13:10-17)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창&nbsp3:15)을 통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것에 대한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로 통 하여 이미 실현하셨는데, 사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많은 사역,이적,메시지들이 {천국} 혹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선포 하고 있다. 또한 사도행전&nbsp1:3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nbsp40일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제자들에 게 {하나님의 나라}(The&nbspKingdom&nbspof&nbspGod)의 사역에 대해서 말씀주심에 대 해서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의 생애와 그의 메시지의 중심도 하나님의 나라였는데, {안디옥과 루스드라,이고니온}에 서 전도할 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행&nbsp14:22)고 기록하고 있 고, 행&nbsp19장에서는 바울이 에베소에 약&nbsp3개월을 머물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담대하게 강론했음 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미 상기에서 전술한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부활과 메시지의 중심된 가르침 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것이었다고 사료하는 것이다.

   &nbspIII. 하나님의 나라의 용어의 의미
공관복음에 보면은 {천국}(The&nbspKingdom&nbspof&nbspheaven) 혹은 {하나 님의 나라}(The&nbspKingdom&nbspof&nbspGod)라는 표현을 볼 수 있는데, 마태복음에서 는&nbsp4회의 언급 외에는 모두 {천국} 즉 {하늘 나라}로 부르고 있고, 다른 복음서에서는 일률적으로 {하나님의 나 라}로 부르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서&nbsp61회 정도가 나온다.
그런데 {천국} 즉 {하늘 나라}라는 표현한 용법은 랍비 문학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라는 칭호에 대 한 {존경심}, 다시 말해서 그 언어 관습에서 기인되었던 것이다. 즉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부르는 것을 황송하게 생 각하여 {하나님}이란 단어 대신 {하늘}로 대치하여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와 천국 사이에는 그 어떤 구분도 지 울 수 없음이 명백한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 혹은 {하나님의 나라} 개념의 이해 핵심은 {장소적(하늘)} 차원보다 {인격적 (통치자)}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사실 {하늘 나라}보다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이 것이 더 본 질적인 의미에 충실하는 것이다고 생각되기에 {하나님 의 나라}라는 말은 장소적 개념보다는 통치적 개념 즉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 이 다스리는 영역}이라는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왕이 통치하는 영토나 백성보다는  왕 자신과 그 왕의 통 치 방식에 관심에 두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왕국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춘 백성 이 없으면 통치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구성하는 요소는 ① 주체로서의 하나님 ② 객체로서의 백성 ③ 이 두 대상 을 결합하는 하나님의 주권 내지는 통치 사역이 있을 때만이 하나님의 나라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정치 적 구조에서 이해해서는 안되며 영적인 구조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nbspIV. 하나님의 나라의 이중적 측면
 &nbsp1)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 측면 : 예수님께서 {천국이 가까왔다}(마&nbsp4:17)고 선언하 셨다는 사실은 이미 그 {왕국}(王國)이 어떤 의미에 있어서 자신의 사역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 의 활동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표현이었다고 여기는 것은 정당하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질문에 답변하시면서 하나님 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 기 때문이다.(눅&nbsp17:20,21)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의 강력한 일면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셨다는 사실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하 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마&nbsp12:28)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는 사단의 왕 국을 정복하는 것과 연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예수님께서 세례 요안에 관하여 언급하실 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침노를 당하 였다고 선언하셨는데(마&nbsp11:1,12, 눅&nbsp7:28),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사단의 강 력한 반발이 있음을 의미하는 말씀이다.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이었다는 가정이 옳다면, 그의 생애와 가르침은 많은 반대 를 불러 일으켰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현존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가치가 없는 것이 다. 현존하지도 않은 하나님 나라가 공격을 당한다는 일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과 창기들이 종교 지도자들보 다 먼저 왕국(王國) 곧 하나님의 나라(The&nbspKingdom&nbspof&nbspGod)에 들어 간다 고 말씀하셨는데(마&nbsp21:31),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응하지 않은 데 반하여 이처럼 사회적으로 버림 받은 자들은 그 가르침에 반응하였다. 이와같은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 (The&nbspKingdom&nbspof&nbspheaven)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 기간 중 예수님께 대하 여 취한 사람들의 태도와 연관된 것이 분명하다.
이상의 고찰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그가 왕국을 개시하였다는 것을 부인할 근거점을 발견할 수 없 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뒤에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아니할 수 없는데, 이것에 대한 바른 접근 을 위해서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하여 초기 전도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으로서 선포하였음을 목적할 수 있고 (행&nbsp19:8,&nbsp20:25,&nbsp28:23,31), 서신들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이 복 음서에서처럼 두드러지지 않게 나타나고 있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극적인 사상과 적극적인 사상을 공히 공격하고 있다. 하 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은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음식에 관한 금지들을 지키는데 있지 않으며 (롬&nbsp14:17), 또한 하니님의 나라의 개념은 단순히 말의 문제가 아니다(고전&nbsp4:20)고 강력하 게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는 지고한 도덕적 요구들을 받아 들이는 고귀한 삶의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강조 하고 있다. 즉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윤리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 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 성격에 대한 상기의 전술의 증거는 {하나님의 나라} (The&nbspKingdom&nbspof&nbspGod)를 그리스인들이 앞으로 고대하여야 할 것으로 보 는 증거와 균형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2) 하나님의 나라의 미래적 측면 : 예수님은 자신이 인자로서 올 것을 예언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사상과 연결 되어 있는 것이다.(마&nbsp25:31,34)  산상수훈의 팔복 중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겠다는 약속이 현재적 실체로서 보다는 미래적 소망으로서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마&nbsp5:8) 또한 주기도문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위한 간구 가 포함되어 있다(마&nbsp6:1) 즉 예수님은 동서로부터 족장들과 하나님의 아들들이 참여하게 될 미래의 잔치를 내다보 고 계시고 있는데(마&nbsp8:11) 하나님의 나라는 의로운 자들이 {해와 같이 빛나게} 될 곳인데 (마&nbsp13:43)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미래적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신자의 유업을 언급하면서 하나 님의 나라의 미래적 측면을 표명하고 있다.(고전&nbsp6:9,10,&nbsp15:50)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 래적 소망을 도덕적 권면의 기반으로 사용되고 있음은 의미심장하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 한 자가 되는 것은 중요하다(살후&nbsp1:5) 그러나 바울은 그 누구라도 스스로 합당한 자가 될 수 있다고는 언급하 지 않고 있다.  또한 신약 성경의 다른 저자들도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동일한 사상을 제시하고 있는데 {진동치 못할 나라} (히&nbsp12: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나라}(약&nbsp2:5), {영원한 나라}(벧 후&nbsp1:11)  그러나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가장 확실하게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책은 역시 요한계시록인 데, 일곱째 나팔을 볼 때 세상의 나라는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인데(계&nbsp11:15) 이 사건 은 요한게시록&nbsp12:10의 경배 구절에서 찬양되고 있다.
이와같이 이상에서 필자가 전술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이고,역사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하나님의 나라 는 미래적이고, 종말론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이제 장차 오실 재림되신 예수 그리스도 로 말미암아 완성되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나라의 이중적 측면의 관계 :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인 국면(局面)과 미래적 국면(局面)을 가지고 있다. 그 런데 신학자들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 측면만을 강조하는 리츌(Albrecht&nbspRitischl),하르 낙(Adolf&nbspvon&nbspHarnack),다드(C.H&nbspDodd)와 {하나님의 나라}의 미래 적 측면만을 강조하는 바이스(Johannes&nbspWeiss),슈바이처(Albert&nbspSchweitzer) 가 있는데, 이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애를 통해 가르치신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와 {미래성}에 대한 두 측면을 바로 인식하 지 못한  자들도 있다. 반면에 오스카 쿨만(Oscar&nbspCullmann),죠지 래드 (G.E&nbspLadd),헤르만 리델보스(Hermann&nbspRidderbos)와 같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하나 님의 나라의 이중적 측면을 다 강조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은 {이미}(already와 {아 직}(yet)에 사이에서 긴장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때문에 바울은 롬&nbsp7,8장을 통해서 {내 속에 은혜의 시대 와 죄악의 시대가 공존해 서 살고 있다. 내가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소원도 있고, 악을 행하기를 원하는 소원도 있다}라고 언급하면 서  {이미}(already와 {아직}(yet)의 긴장 관계를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 측면과 미래적 측면을 결합시키겠는가? 이것에 대한 최선의 방법은 현재적 하나님의 통치 를 모두가 그리스도가 주되심을 인지하게 될 그날에 있을 그 통치의 최종적 완성에로 성장해 나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즉 하나 님 나라는 겨자씨와 누룩(마&nbsp13:31-33)과 같이 그 통치의 최종적 완성에로 성장해 나가는 것으로 보는 것이 다. 하나님의 나라의 그와 같은 절정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대적들을 굴복시키신 후 모든 권세를 하나님께 넘겨 드리는 일과 일치하 게 될 것인데(고전&nbsp15:24&nbsp-28) 그것이 바로 이제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재림으 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이다. 요한계시록&nbsp21장의 새 하늘과 새 땅은 창&nbsp1:1에서 창 조하신 그 하늘과 그 땅과 연결이 되면서도 죄악의 세력이 완전히 정화된 셰계일 것이다. 즉 죄악의 세력이 파멸을 당하고 새로이 회 복된 우주의 어느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nbspVI.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 자격 요건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에 요구 조건들에 대한 태도에 상관없이 누구든 그 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암시는 전혀 찾아볼 수 없 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의 요구에 반응한 자들과 반응하지 않는 자들 사이에는 구분이 생긴다. 이것은 이미 상기에서 고찰하 여 본 것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에는 몇몇 도덕적 요구 조건들이  설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조건들에 합당치 않는 자는 즉 시 좇겨난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큰 요구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 자신에 대한 헌신의 문제인 것이다. 왜냐하 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따를 것(마&nbsp1624)과 예수님을 가족 관계보다 우선 순위에 놓 을 정도(마&nbsp10:37)로 헌신할 것을 요구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심지어 제자들이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신뢰 할 것을 요구할 정도였다(막&nbsp10:13&nbsp-16)  그와 같은 엄중한 요구 사항들 때문에 혹자는 어 느 누가 그 조건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인가라고 질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힘으로 그 조건들 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기대하지 않으셨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헌신이지 공로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가 르침의 정체는 믿음의 필요성에 대한 지속적인 강조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특히 서신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 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또 한 가지 자격 조건은 {중생} 혹은 {거듭남}이다(요&nbsp3:3,5)
이것으로 볼 때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의 만족이란 인간 스스로 행할 수 없는 것임이 더욱 분명한 것이다. 왜냐하 면 이것은 성령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거듭난 자들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 누구 도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의 자격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하여 획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nbspVII. 하나님의 나라의 윤리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선포의 핵심이었다.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은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윤리를 논할 때에 하나님의 나라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이것은 필수적인 것이다.
그런데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선포하실 때에 팔복에 대하여 논리 정연하게 말씀하셨는데, 이 복은 물질적인 것 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에 사는 공동체에 대한 전제 조건을 세운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 스스로의 종교적,윤리적 자격을 전 혀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특징이다. 그들의 진짜 자격은 예수님이 영적으로 빈곤한 사람이 빈손으로 예수님 앞에 서 면 구원과 메시야적 기쁨이라는 종말론적인 선물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 님의 백성은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자비와 평화를 가져오는 무리라는 개념으로 특징지울 수 있는 것인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 들은 새로운 삶의 양식을 소유한 새로운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물론 이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미} (already와 {아직}(yet) 사이에 사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은 세상 나라의 백성이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이 다.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답게 살려면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마&nbsp13:44) 즉 밭에 숨겨진 보화를 발견 한  후에 그것을 소유하고자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산 어떤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다 희생 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 때때로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마&nbsp13:45)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의 사역에 적극적으 로 동참하는 능동적인 모습도 가지고 있어야 함을 명심해야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 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라면 그에 속한 백성답게 책임과 의무 를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구약의 율법을 폐하시고 어떤 새로운 삶을 제시한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이 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나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오히려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라 고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이다.(마&nbsp5:17)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구약적 표본보다도, 초대 기독교의 표본보다 도 더 철저화된 윤리적인 삶을 살것을 가르치셨음을 알 수 있다. 진실로 예수님은 율법을 반대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승인하였으며,율 법의 완성을 강조하셨는다. 즉 예수님은 그 기준을 구약에서 보다 더 높게 제시하심으로 더욱 철저화된 윤리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 한 사실은 {이혼법,재물 ,마음의 동기,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통해 생생하게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1) 이혼법의 철저화(마&nbsp19:3-9/막&nbsp10:2-12/눅&nbsp16:18) : 구약 에 보면 모세는 이혼을 허락했다(마&nbsp19:8)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혼을 명령하지 않는다.(6절, 하나님께서 짝지 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같은 예수님의 말씀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모세의 해석과 다르다고 하 는 것이 그들의 이유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데 강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 라}(9절)고 말씀하신 것은 모세의 율법을 페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명기&nbsp21:1-4은 이 명령으로 인하 여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이 명령과 더불어 성립될 수 있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예수님의 가르침은 신명 기&nbsp24:1-4의 계명보다 더 철저한 기분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주의깊게 보아야 한다. 신명기는 이혼한 후 재혼했 던 여인을 다시 데려오는 것을 금하고 있는데 반하여 예수님은 아예 이혼 자체를 금하고 계신다. 더군다나 이혼을 간음으로 보지 않 는 구약과는 달리 예수님은 이혼을 간음으로 간주함으로 말미암아 이혼 금지법을 더욱 철저화 시키고 있는 것이다 (눅&nbsp1618)

2) 재물에 대한 철저화(막&nbsp10:21/마&nbsp19:21 /눅&nbsp12:33,18:22) : 예수님은 ① 마가복음&nbsp10:21에서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 난한 자들을 주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신면기&nbsp5:10의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 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것이니라}는 구약의 가르침보다 더욱 철저화된 말씀이다. 구약 율법은 {그 요구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 라}(신&nbsp15:8)고 명령하고 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그냥 나누어 주라} 고 가르치고 있는데, 이것은 빌려주는 것보다 주는 것은 휠씬 힘든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가진 것을 팔아서 주 는 것}은 더 더욱 힘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배 려}와 {하나님의 백성의 가난한 이웃에 대한 의무}를 하나님께서 요구하신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공통점은 누가복음에서도 나타나고 있 는데 누가복음&nbsp6:30에  의하면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라} 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 구절들의 공통점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구약의 가르침보다 더 철저화된 것임을 밝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진 실로 {가진 것을 팔고},{주고 다시 달라}고 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의 철저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가르침은 구약의 정신 과 전연 어긋나지 않는다. 왜냐햐면 이러한 가르침은 구약의 의도를 철저화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② 재물에 대한 철저화는 눅&nbsp12:33의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라}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나타나고 있 고, 마&nbsp19:21의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를 주라}는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특 히, 눅&nbsp18:22의 명령은 가장 급진적인 가르침이시다. 즉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주라}라 는 말씀은 예수님이 율법보다 더 높은 수준의 명령을 하고 계심을 밝히 드러내고 있는 성경적 증거의 말씀인 것이다. 진실로 이러 한 철저화는 도덕법이라고 부르는 율법보다 더 높은 수준의 명령을 하신다.이러한 철저화는 도덕법이라는 부르는 십계명에 제한 된 것 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철저화하신 이 구제법은 안식년과 관계된 시민법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요구가 단지 예수님 의&nbsp12제자에게 또는 특별한 조건 아래 있는 자들에게만 향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는 모 든 사람을 향한 것인데, 이것은 눅&nbsp14:33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재물의 포기를 요구받 는 {너희}는&nbsp12제자 뿐만 아니라 무리들임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눅&nbsp14:25에서 {누구든지 자 기의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절대로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는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예수님 은 마&nbsp6:3-4에서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은밀한 구제의 철저화에 대한 말씀이다. 여기에서 구제는 구약과 같이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의도를 지니 며, 은밀히 함은 이 의도를 철저화한다. 예수님은 율법의 준수의 동기와 실제적인 효과까지 고려하신다. 이것은 율법보다 더 높은 수 준의 제시이다.
③ 예수님은 눅&nbsp6:35에서 면제년(신&nbsp15:1)의 정신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는데 {너희는 원 수를 사랑하고 선대하여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은 매&nbsp7년마다 돌아오 는 안식년에는 빚을 탕감해야 한다(신&nbsp15:1)  그러므로 그들은 빌려줄 때 돌려 받기를 바라지 말고 주어야 한 다. 이 때문에 빌려주지 않는 사람이 없도록 하나님은 가난한 형제에게 반드시 빌려줄 것을 명하시고 있는 것이다 (신&nbsp15:7-8)  예수님은 가르침은 이 정신을 철저화하여 원수에게도 빌려주라고 명하시고 있다. 그러므로 이 계명 과 예수님님의 가르침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예수님은 더 높은 수준의 율법 준수를 요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원수에게 빌 려 주는 것은 우리의 형제에게 빌려주는 것보다 더 힘들다. 그런데 이러한 철저화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이라면 누구든지 이러 한 삶을 살 수 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께서 의도하시는 바이다.

③ 마음의 동기의 철저화(마&nbsp5:21-22,&nbsp27-30) : 마태복음&nbsp5 장&nbsp21절부터&nbsp30절에 있는 예수님의 윤리적인 가르침은 소위 여섯 반제 (Six&nbspAntithese)로 알려진 말씀 중에서 {살인}과 {간음}에 대한 예수님의 기준을 기록한 말씀인데, 예수 님께서는 이와같은 말씀을 통해 율법이 보여주려고 하는 진정한 의도가 인간의 마음 상태에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즉 {형제에 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되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22절)이며,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 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한 것}(28절)이라며 살인과 간음의 근원을 인간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소집하고 계신다. 이러한 관점에 서 볼 때에 예수님의 윤리는 곧 마음의 문제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④ 사랑의 철저화(요&nbsp13:34,35) : 예수님의 윤리는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현대 의 모든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윤리가 사랑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요&nbsp13:34을 통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 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며 이 명령을 새 계명으로 부르시고 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새 계명이라고 하였는가?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시대 즉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 것이 결정적인 이유 가 되지만 예수님께서 주신 이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레&nbsp19:18)는 옛 계명보다 사랑의 기준 이 자애(自愛)에 있었지만 예수님의 새 계명은 몸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신 신적인 사랑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새로 운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새 계명은 구약의 옛 계명과 비교하여 매우 급진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예수님 의 사랑의 윤리의 극치는 {원수를 사랑할 것}을 요구하시는 말씀으로 부터 찾아질 수 있을 것인데, 눅&nbsp6:35에 서 예수님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고 말씀하심으로 사랑을 더욱 철저화 시키시고 계신 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의 윤리가 개인 윤리에만 고착되지 않고 사회 윤리로 나타나야 하는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필자는 예수님 께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요&nbsp15:13,요일&nbsp3:16)고 하 신 말씀도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에게도 해당되는 구절로 해석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 의 비유를 통하여 진정한 사랑은 인종과 국가와 종교를 초월하는 것임을 친히 솔명해 주셨기 때문이며 (눅&nbsp10:25-37),사랑할 만한 요소가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베풀 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눅&nbsp6:27,28,&nbsp32-36) 또한 이웃사랑과 관련하여 반드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사랑은 단순 히 이웃에 대한 감성적 느낌이나 동정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행함이 뒤따라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뿐만 아니 라 임금의 심판 비유(마&nbsp25:34-40)에 있어서 이웃 사랑을 실제적인 행함이 핵심이고 이 행함의 여부에 의해 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결정되고 있음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상의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전술들은 단지 우리를 절망시키어 은혜와 믿 음에 의하여 구원받는 길로 나아오도록 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의 삶의 원리로서 주어 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상 수훈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로서 지켜지기를 기대하며 주어진 것이며 (마&nbsp7:13-27), 또한 그 가르침은 지키기 힘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로 하여 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교훈하신 말씀을 결 코 잊어서는 아니될 것이며, 이 모든 일들이 지켜지기 위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을 바로 가르쳐야 할 것이다. 진실로 이러한 이 일 이 없이는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을 결코 수행할 수 없다.(마&nbsp28:19-&nbsp20)  그래서 페어번 (Patrick&nbspFairbarn)은 이러한 사실을 직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단순한 행위로써 생명을 얻을 지 라도 복음의 제도인 율법과 관계를 가지지 않고서는 그것을 실행할 수도 즐길 수도 없는 것이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진실로 이 것은 {이미}(already와 {아직}(yet)의 긴장 국면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제 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윤리는 그리스도의 재림때에 완성될 것이기 때문에,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만 바라보 고 살아가야 하는가?},{현재는 예수님의 윤리적 명령의 성취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영혼 구원에만 관심을 갖고 가능하면 이 세상의 제 도나 정치에 관여하지 않은 채, 그리스도인들끼리만 공동체를 이루어 그 속에서만 예수님의 윤리의 적용을 꿈구며 살아가야 하는가?}라 는 얼빠진 질문을 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이러한 얼빠진 질문을 던지는 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결 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데, 이러한 사상들은 김세윤 박사가 지적대로 종말론적인 이원론에 근거한 {현실도피적인 금욕주의 태도}로 서 결코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며 잘못된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는 바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은 종말에 완성될 그러나 예 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역사 속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야 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즉 회개하고 믿음으로 하 나님의 나라에 백성이 된 자는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고 그가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왔다는 믿음과 장차 그 나라 에 들어갈 것이라는 복된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 나라의 현실들을 세상 속에 나타 낼 수 있어야 하는데, 자기 주장의 의지에서가 아니라 자기를 철저하게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내어 놓는 사랑으로 보여줄 수 있어 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은 예수님의 윤리의 가장 큰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하니님에 대한 절대적이고 전적 인 순종과 이웃에게 스스로를 내어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섬김의 실천을 통하여 자기 주장의 의지 로 파멸되어가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의 구원과 치유의 힘이 미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비록 예수님께서 교훈하신 하 나님의 나라의 윤리를 완전하게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이지만 그 윤리에 도달해야 하는 구원론적 사명이 신자들에게 있음을 직시하 고 이 세상의 고난을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에 흠없이 들어가기 위한 준비기간으로 간주하고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필자 는 하나님의 나라의 윤리의 실천을 위해서 기도를 강조하고 싶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은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 의 자원을 하늘로부터 땅으로 가져오는 통로가 되기에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은 더욱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 곧 윤리가 이 땅에서도 이 루어 질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할 때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의 마음 가운데 내주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 의 믿음을 복돋으셔서 복돋아진 믿음만큼 하나님의 나라의 윤리의 열매를 우리 삶 속에 거두어 주실 것이다.

    맺은 말 :
필자는 본 소고를 통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가장 특징적인 주제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 (The&nbspKidom&nbspof&nbspGod)에 대한 것인데, 이것은 예수님의 중심된 가르침이 요, 선포의 핵심이었음을 전술하면서 강조한 {하나님 나라}는 장소적 차원보다 인격적 차원인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다스리심}이라 는 본질적인 이해가 있어야 함을 지적하는 바이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절대적인 요건은 우리 스스로 에 있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즉 인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한 것으로 불가능하고 오직 믿음 (Sola&nbspFide)과 오직 은혜(Sola&nbspGratia)로만 가능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아니될 것은 예수님께서 산상 수훈의 가르침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인 우리가 취할 삶 의 원리 즉 하나님의 나라의 윤리를 제시하시면서 {이미}(already와 {아직}(yet) 가운데서 긴장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 들인 우리들에게 그 나라에 합당한 삶을 그대로 실천할 것을 명령하고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진실로 이와같은 강조점 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지나치게 오해하여 마치 {믿음}과 {행함}이 분리된처럼 생각하고, {믿음}만 있으면 어 떤 행동이든지 정당화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소위 {믿음 제일주의}가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서는 더욱 더 강조되어 야 할 것이라고 강력하게 피력하는 바이다. 진실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라면 종말론적 이원론에 근거한 {현실도피적인 금욕주의 태 도}에 따른 그릇된 신앙 생활을 과감하게 버리고, 예수님께서 마&nbsp6:10에서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 서 이루어지이다}고 말씀하신 기도의 본질적인 의미를 바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고 아울러 피력하는 바이다.끝으로 우리는 예수님께 서 자기를 따라오는 자들에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 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nbsp7:21)고 교훈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요구하 시는 삶의 실천적인 행위가 있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만약 이러한 사실을 부인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율 법이 일점 일획도 폐하여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으로서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눈이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필자 는 감히 피력하면서 본 소고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바라기는 {믿음과 행위}에 대한 이해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의 윤리에 대한 바 른 이해가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Soli&nbspDeo&nbsp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