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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베이직



▲ 송삼용
미국 하버드대 종교학자 하비 콕스가 "21세기는 영성의 세기"라고 진단한 적이 있다. 콕스의 진단대로, 지금 한국 기독교에 영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있다. 네이버 검색창에서 <영성훈련>이란 말을 검색해 봤더니 영성 훈련하는 단체가 무려 50여군데나 되었다. 마치 70년대 기도원 운동이 재현되고 있는 느낌이다. 신문을 보면 영성 훈련하는 광고들이 즐비하다. 각종 집회, 세미나, 부흥회 그리고 출판 등에서도 영성이 집중 조명을 받고 있다. 놀라운 것은, 교회 내에서 영성 훈련이란 명목 하에 세속적이고, 비성경적인 훈련 방식들이 무분별하게 퍼지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그런 식의 영성 훈련들이 교회 내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좀 냉정하게 진단하자면, 요즈음 교회에 성행하는 영성 훈련들 중에서 비성경적이고, 세속적인 방식을 그대로 채용한 프로그램들이 많다. 심지어 정통 교단에서 이단시하거나. 경계하라고 규정한 프로그램들까지도 무분별하게 수용하고 있는 교회들이 많다. 교회 성장에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이라면 검증없이 그냥 받아들이는 실정이다. 어떤 영성 훈련 프로그램은 비성경적인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큰 교회에서 시행하고 있다고 하니까 많은 교회들이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심지어 큰 교회 목사님이라면 잘못된 것인줄 알면서도 그냥 쫓아가는 경향도 있다. 결국 큰 교회에서 하는 프로그램은 다 성경적이고 진리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현상들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 큰 것이 좋고, 수가 많은 것이 성공이라는 가치관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잠깐 가치관 문제를 언급하고 넘어가자. 한국 교회의 심각한 문제는 세속주의라고 생각한다. 세속주의 사상이 목회자들과 교인들 사이에 만연해 있는 듯하다. 그러다보니까 진리를 판가름하는 기준까지도 변했다. 성경이 진리를 판가름하는 잣대가 아니라 큰 교회 목회자가 말하면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현실이 되었다. 교회 성장 역시 어떻게 성장했느냐는 문제되지 않는 것 같다. 큰 교회가 되기만 하면 그 성공 사례가 마치 성경적인 방법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언론에서도 그렇게 교인 수가 급속하게 늘어난 교회를 성공 모델로 집중 조명한다. 그러다보니까 교인 수가 늘어나서 언론의 조명을 받는 것이 목회자들의 소망이 되었고, 그런 세속적인 성공관이 많은 목회자들 가운데 팽배해 있다. 부끄럽게도 나도 그렇게 살았다. 

물론 교회가 크면 작은 교회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어서 좋다. 재정이 많아도 마찬가지다. 큰 교회는 그런 장점이 있어서 분명 좋은 점이 있다. 그런 면에서 교회가 크면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목회자들이 다 큰 교회를 목양할 수 없지 않는가? 우리나라에 약 65,000교회가 있다. 그 중에서 50명 이하의 교회가 60%라고 한다. 수적인 통계로 말하면, 39,000 교회가 50명 이하의 교회다. 그렇다면 이제는 한국 교회가 큰 교회 중심으로만 가서는 안된다. 모든 행사나 운동들이 큰 교회 중심으로 가다보니 작은 교회들은 소외감을 느끼고, 무력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심지어 어느 교단에서는 미조직 교회 목회자들은 노회에서 선거권과 피선거권까지 박탈하는 일까지 서슴없이 감행하고 있다. 왜 그럴까? 세속적인 가치관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가치관과 정반대의 가치관을 갖고 사역하셨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12명의 소수의 제자에 집중하셨다. 그들을 참된 제자로 길러내기 위해서 3년을 온전히 투자하셨다. 물론 대중 집회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지만 12명을 제자로 삼는데 전력하셨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갖는 가치관에 따르면, 예수님은 실패한 목회자였다. 정말 그런가? 그렇지 않다! 누가 예수님을 실패한 목회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예수님은 작은 것에 큰 가치를 두셨고, 작은 것도 귀히 여기신 분이셨다. 그런 예수님의 모델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부터 세속적인 가치관에 매여서 큰 교회를 만드려고 발바둥치며 살아왔다. 부끄럽게도 큰 교회를 이루는 것만이 성공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지난 30여년 동안 나는 주님의 종이 아니라 수의 노예로 산 셈이다. 참 수치스럽고, 통탄할 일이다. 

그러나 이제는 바뀌었다. 마치 바울이 다메섹에서 변화된 것처럼 2년 전 십자가의 은총을 체험 한 후 나의 가치관이 바뀌었다. 놀랍게도 십자가 안에서 인생관, 세계관, 교회관까지 송두리째 변했다. 놀라우신 은혜로, 이제 나는 큰 교회보다 좋은 교회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십자가를 체험하면서 새로운 가치관을 갖게 되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 모든 것이 배설물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십자가의 진리를 신학에 입문한지 33년만에 깨닫게 된 것이다. 예수님 같으면 생애를 마칠 나이인데, 이제야 복음을 깨달은 셈이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하지만 바울같은 거장도 40살이 넘어서 복음을 깨달았다는 것이 조금 위로가 된다. 모세 역시 80살에야 하나님을 위해서 온 몸을 불살라 일했다면 나에게도 소망이 있어 보여 감사하고 있다. 


비록 50살이 되어 십자가의 복음을 깨달았지만 남은 여생은 오직 복음을 위해 살려고 한다. 루터의 선언을 나의 평생의 고백으로 삼으려고 한다. "십자가의 신학만이 온전한 신학이다!" 나에게 가치관이 바뀌니 교회가 너무나 귀해졌다. 이제야 작은 교회도 너무 귀한 것을 알게 되었다. 전에는 5백명이 모여도 만족이 없었다. 그러다보니까 작은 교회, 개척 교회 등은 바로 눈 앞에 있어도 한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는 작은 교회 목회자들의 눈물과 고통을 정말 몰랐다. 하지만 이제 내가 개척교회를 경험해 보니 그분들의 고충을 알게 되었다. 개척교회 목회자들이 겪고 있는 삼중고를 알게 되었다. 가정 경제, 교회 운영, 성장 압박 등이 개척교회의 삼중고이다. 나는 남은 생애 동안 빚진 자의 심정으로 그분들과 함께 가려고 다짐하고 있다. 그분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에 미력하나며 힘을 다하려고 한다. 

이런 식으로 나의 가치관이 바뀌고나니까 모든 것이 변했다. 교회 성장에 대한 관점도 바뀌고, 성공의 개념도 확연하게 변했다. 이제는 큰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좋은 교회를 세워가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며칠 전에 우리 노회에서 개척교회를 하시던 목사님이 소천하셨다. 너무나 건강하다고 생각했는데, 몸에 이상이 생긴지 2주 만에 급성 간암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 목사님 장례식장에서 외동딸이 상객들에게 드린 인사말을 잊을 수 없다. 

“지난 3일간 많은 분들이 이런 위로를 주셨습니다. ‘목사님이 목회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개척 교회하다가 돌아가셔서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교인들을 많이 모으지 못해 얼마나 힘들셨을까요...’ 그런 위로의 말씀이 저희에게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위로를 해주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아버지께서는 평생 동안 몇 명의 교인들을 데리고 교회 개척을 두차례 하셨지만 진정으로 성공한 목회자였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몇 명의 영혼을 잘 돌보시다가 하나님 앞에 가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를 크게 칭찬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개척교회를 하신 아버지를 보고 신앙의 회의가 있었고, 아버지 곁을 떠나기도 했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저를 하나님께로 인도해 주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진정한 목회자요, 성공적인 목회자였습니다“

교회가 크면 진리의 여부도 판가름할 겨를도 없이 쫓아가는 세대여서인지 개척교회 목사를 새롭게 평가하는 그 딸의 눈물어린 인사가 상객들 모두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큰 교회 목사가 한마디 하면 그것이 진리처럼 받아들이는 시대에 살고 있다. 너무나 불행한 현실이다. 

영성도 마찬가지이다. 영성의 진위 여부는 성경에서 찾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경험에서 진위를 찾으려고 한다. 한 명성있는 목회자가 좋은 영성 훈련 방식이라고 하면 그것이 성경적이냐는 문제되지 않는 것 같다. 그런 식으로 개인의 경험에 의존하는 영성은 결국 신비주의로 기울고, 사이비 영성으로 전락될 것이다. 진리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사람들의 경험이 아니다. 영성의 진위도 성경이 기준이 되야지 성공한 케이스가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 

한국 교회에 영성에 대한 관심이 불길처럼 일어나고 있는 틈을 타서 비성경적인 영성이 성도들을 혼란케 하고 있다. <가짜 영성>이 진짜 행세를 하고 있는 겪이다. 가짜는 아니지만 영성의 본질을 벗어난 <유사 영성>도 성도들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영성, 하면 뭔가 한번 체험하고, 혹은 한번 쓰러져야 하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2년 전, 나는 교회 개척을 준비하려고 기도하는 중에 영성 훈련하는 현장들을 여러 차례 탐방한 적이 있다. 놀랍게도 대부분의 영성 훈련 현장에는 신비주의와 표적, 은사 중심의 영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이미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개혁주의 영성신학>을 8년여동안 가르쳐 왔기 때문에 성경을 벗어난 영성을 누구보다 더 비평해 왔다. 그런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영성 훈련 현장들이 휘청거리고 있음을 직접 목격했다. 

개혁주의 입장에서 영성 훈련 현장들은 이미 수위를 넘어 위험한 상황에 이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성 훈련 현장에서 나도 한번 쓰러져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그래서 나도 그 대열에 참석해 봤다. 하지만 억지로 밀려 넘어지긴 했으나 그 다음에는 아무런 표적이나 느낌도 없었다. 그리고 어떤 흔적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그런 영성 훈련에 익숙해 있는 것 같다. 어떤 현장에서는 '임파테이션'(나눔, 전이)이라는 명목으로 책임자들이 안수를 하는데 약간 찌릿하는 느낌이 왔다. 또 어떤 '엑스타시'(황홀경) 같은 상태가 약간 오긴 왔는데 그 다음에는 별 표적이 없었다. 또 다른 곳에서는 여기저기 쓰러져서 웃음과 괴성을 지르는 곳도 있었다. 그런 현장을 보면서 마치 종교적 광란에 빠진 사람들의 몸부림 같은 것을 느꼈다. 기독교가 정말 그런 종교였던가를 의심할 정도였다. 지금도 전국적으로 이런 식의 영성 훈련 프로그램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영성 훈련 현장들 외에도 단전 호흡, 초월 명상, 요가, 집중 훈련 등까지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엄밀하게 분석해보면, 그런 방식들은 대표적인 뉴에이지식 영성 훈련 방식인데도 그런 훈련에 푹 빠져있는 기독교인들이 많다. 목회자들 조차도 뉴에이지 사상에 물들어있는 프로그램들을 영성 훈련이라는 명목으로 여과없이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예를들면, 신과의 합일을 주장하면서 정신 집중이나 마음을 비우는 훈련이 최상의 영성 훈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의 훈련이 뉴에이지식 명상 훈련 방식이요, 힌두교에서 행하는 영성 훈련 방식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따라가고 있다. 뉴에이지 세계관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두가지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신이라는 것이요, 또 하나는 명상을 통해서 신과의 합일을 경험함으로서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특히 주목할만한 사실은, 한국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까지도 추앙하는 헨리 나우웬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중요한 사안이어서 원문을 직접 인용하겠다. 

"Today I personally believe that while Jesus came to open the door to God's house, all human beings can walk through that door, whether they know about Jesus or not."「Sabbatical Journey」 (1998, p.51.) 

"오늘날, 예수가 하나님께로 이르는 문을 열어 주셨지만, 예수를 알든 모르든, 모든 사람이 그 문을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개인적으로 믿는다" 

이같은 나우웬의 고백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나우웬은 이미 여러 저서들을 통해서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가 삶 속에서 보여준 선행과 봉사는 많은 사람들을 크게 감동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성의 기초가 성경을 벗어나 있으니 심각한 일이다. 그리스도를 모른 채, 사람의 선행과 봉사를 통해 하나님께 이를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는 길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다. 성경은 단호하게 말한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

그렇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도 하나님께 이를 수 있다는 것은 최근 많은 기독교인을 현혹하는 종교다원주의 사상에 불과하다. 어떤 종교를 가져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 결국에는 하나님께 이를 수 있다는 종교다원주의 사상은 현대 기독교인들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세속 영성도 바로 이런 사상에서 시작된다. 깊은 묵상과 초월 명성을 통해서 신의 세계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렇게 값싼 것이 아니다. 여러분은 어떤가? 우리의 구원이 그렇게 값싼 것인가? 선행과 봉사를 통해서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이를 수 있는가? 우리의 구원이 선행과 봉사를 통해서 주어지는가? 성경에서는 분명하게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를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 이를 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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