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비유(1)
새 술은 새 부대에
막 2:18-22

이번 주 부터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비유들을 생각할려고 합니다.오늘은 첫째로 마가복음 2:18-22절 까지의 비유들을 묶어서 생각을 할려고 합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여기 지금 예수의 3개의 비유들이 있어요.혼인잔치에서 금식할 수 없음, 그 다음에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기워서는 안됨, 그 다음에 새 포도주는 헌 가죽 부대에 부으면 안됨 등.
예수께서 이 비유들을 말씀하게 된 동기가 18절에 있지요.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안합니까? 어떤 사람들이 와서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에게 비난조로 문제를 제기한 것을 볼 수 있어요.
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금식이란 상당이 중요하지요.금식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의 표현, 그래서 하나님께 의지함을 표현하는 하나의 신앙의 표현이기도 했고 특히 죄를 지으면 죄에 대해서 철저히 회개하는 의미로 금식을 했어요.그래서 금식을 하면 하나님으로 부터 용서를 받는다고 생각을 했어요.그래서 유대인들에게 금식이 중요했는데 특히 완전한 의를 얻으려고 했던 바리새인들은 아예 일주일에 이틀은 금식을 해야 하는 것으로 그냥 법으로 정했어요.물론 구약성경에 이틀 금식해야 된다.꼭 그렇게 해야한다는 말은 없지만 바리새인들은 구약성경을 해석해서 일주일에 이틀은 꼬박 하루 종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금식을 해야 된다고 법으로 정했어요.
그래서 여기 지금 보시는 바와 같이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한다는 말이어요.그런데 이 바리새인들은 전에도 제가 여러번 말씀을 드렸지만 원래 이 사람들은 즈 산층 평신도들이었는데 이들은 출애굽기 19장 5,6절에 있는 말씀, 이스라엘이 제사장들의 민족이다.하나님께서이스라엘을 제사장들의 민족으로 삼았다.제사장들의 나라다. 출애굽기 19:5-6절을 한 번 읽어 봅시다."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그러니까 이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자기 언약의 백성으로 삼음에 있어서 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넝약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면 그들이 거룩한 백성,하나님께 소유된 백성, 하나님께 속한 백성인데 그것은 또 무슨 뜻이냐면 이 제사장들의 나라여야 된다.이것이 그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이상이어요.
그래서 이 바리새인들은 이 이상을 성취할려고 하나의 경건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이었어요.그래서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제사장들이 아니고 성전에서 제사들 드리는 제사장들이 아니고 평신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출애굽기 19장 5절에 근거해서 구약의 레위기에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을 위해서 주어진 여러 청결의 법이 있지요.손을 씻어야 되고 목욕을 해야 되고 죄를 지었으면 어떻게 제사를 해야되고 이런 여러 청결의 법들이 있잖아요.그것을 자기들에게 적용을 했어요.
자기들도 꼭 레위기법에 제정된 제사장들이 청결하고 의롭게 몸가짐을 할려고 했고 자기들만 그렇게 할려고 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전체,이스라엘 민족의 구성원이 모두 다 그렇게 해야 된다.그래야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제사장들의 왕국의 이상을 성취한다.그렇게 본 것이어요.그래서 아주 이 성별원칙을 강조했고 그리고 이 바리새인들이란 말이 성별된 사람들이란 말이어요.원칙을 강조했고 청결의식을 강조했고 의를 강조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이렇게 금식을 철저히 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세례요한의 제자들도 또 마찬가지로 금식을 철저히 한 사람들이었어요.우리가 복음서들에 그려진 요한의 운동을 보면 요한은 종말에 하나님의 심판에 대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자기들의 거룩성과 순결성을 회복하도록 하는 부흥운동,요새 말로하면 부흥운동을 벌린 사람이어요. 그래서 그 회개의 표로서 목욕,과거의 죄를 회개하고 그 죄를 씻는 것을 이제 극적으로 표현하는 목욕운동을 했지요.그것을 우리는 세례라고 그러는데 그 목욕운동을 했는데 이 요한이 어디서 그런 운동을 했어요? 사막에서.어떤 옷을 입고? 낙타의 가죽 옷을 입고.무엇을 먹고 살면서? 자연식을 하면서.이런 여러가지의 우리 복음서들의 기록에서 우리가 무엇을 발견해요? 요한운동이 굉장히 금욕적인 운동이었음을 우리가 알게 되요.그래서 이들의 요한의 금욕주의적인 회개운동,부흫운동 최후의 심판에 대한 준비운동에 중요한 일부가 금식이어요.
아까 이야기한대로 금식은 하나님에 대한 겸손한 의지함의 표현이기도 하고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의 표현이기도 해서 요한의 전체적인 회개운동과 잘 맞아 들어가서 요한의 제자들도 바리새인들 못지 않게 철저하게 일주일에 이틀 정도는 금식을 했었던가 봐요.
여러분들 일주일에 이틀 금식하라면 하겠어요? 조권사님 고개를 흔드시는데 저는 조권사님 나이쯤되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하하) 지금 막 커가는 사람들 왕성하게 활동할 사람들 이틀 금식하라면 큰일 날 것이어요.그런데 이 사람들은 금식을 철저히 했던가 뵈요.
그런데 예수가 하나  나라 운동을 함에 있어서 그 당시 그러니까 유대사회에서 회개운동을 하고 종말에 하나님의 통치에 대비한 운동을 한 사람들은 다 금식을 열심이 했어요.이 저기 쿰란의 공동체도 열심히 했어요.많이 했는데 그런 운동들과 외견상 비슷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여러 점에서 아주 달랐단 말이어요. 아주 달았어요.
예수도 회개하고 믿음으로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라는 운동을 함에 있어 아 예수는 금식을 권장하는 것은 아니고 도리어 먹고 마시는 것을 많이 했어요.금식을 안하는 것만이 아니고 도리어 정반대로 즐겁게 먹고 마심을 많이 했어요.우리가 지난 번에 예수의 하나님 나라 가르침을 보면서 몇 번이나 관찰을 한 바지요.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이렇게 잔치로 주로 비유하면서 지금 여기도 금방 예수의 이들에 대한 답에 자기가 지금 시작한 하나님 나라 운동은 혼인잔치와 같은 것인데 거기서 즐겁게 먹고 마심이 있을 수 있지 금식할 수 있느냐 하고 답하지 않아요.왜 예수께서 이 하나님 나라를 즐겨 잔치로 비유하면서 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라는 자기의 초대에 회개와 믿음으로 응하는 죄인들과 세리들과 또는 일반 사람들을 데리고 즐겁게 먹고 마시는 일만 했어요.그래서 종말에 하나님 나라에서 주어질 하나님의 구원을 잔치로,그리고 그 구원의 하나의 상징으로 그 구원을 미리 맛보게 하는 의미로 그 구원을 보장해 주는 의미로 아 그들과 잔치를 베출고 먹고 마시는 일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 마태복음 11장 19절 한 번 보시겠습니까? 18절 부터 읽읍시다. "요한은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금욕주의적인 금식을 많이 강조하는 회개운동을 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이렇게 즐거운 잔치를 많이 베푸니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여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그러니까 요한의 운동을 무엇으로 대표적으로 상징이 지어져요.금욕주의적인 금식,거기에 반해서 예수의 운동은 무엇으로 특징이 지어져요.즐겁게 먹고 마심.그것도 누구와? 바리새인들이나 경건한 유대인들이 불결한 사람들이라고 상대하지 않았던 주민들과 상대하였다.그래서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예수 운동에 아주 별명을 붙여 가지고 여기 별명 3개가 있잖아요.탐식가이고 먹기를 탐하는 자이고 포도주를 즐기고 죄인들과 세리들의 친구다.이러한 별명을 붙여 줄 정도로 예수께서는즐겨 먹고 마셨다.
그러니가 여기 지금 도대체 당신도 회개와 종말의 심판에 대비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비하는 운동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하는 시비가 붙었어요.거기에 예수께서 뭐라고 답을 해요? 여기 세가지로 답을 해요.
첫째가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때에 금식을 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 이르리니 그 날은 금식할 것이니라.이 혼인잔치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오늘 날 서양에서도 그렇지만 한국에서도 혼인예식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손님들과 더불어 식사가 있지요.피로연이라는 것.그런데 당시의 유대관습은 그렇게 결혼예식이 있고 그 다음에 식사가 있고 이런 것이 아니고 식사가 결혼식이어요.이제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에 당도하면 거기에 모여서 대기하고 있던 모든 손님들이 그 신랑 신부를 중심으로 함께 잔치를 하는 것으로 결혼식이 이루어 졌어요.
그러니까 결혼식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식사여요. 함께 즐겁게 먹고 식사를 함.그 식사가 때로는 밤 깊숙히 까지 진행이 되었습니다.여러 코스로.그러니가 결혼식에서는 굉장히 먹고 마심, 노래하고 춤추고 함이 굉장히 중요했다고 그래요.그런데 오늘날 비교적 풍요롭게 된 우리 가운데서는 어디 결혼식에 가서 식사에 참여하는 것이 크게 기다리고 기대되는 그런 것은 아니지요.왜냐하면 다 집에 먹을 것이 있으니까. 그러나 한 몇 십년전에 우리 한국에서만 해도 아주 가난하고 고기먹기도 어렵고 할 때는 우리 동네에 친척간에 결혼식이 있으면 굉장히 기대하고 했지요.왜? 거기가서 한 번 잘 먹을 기회가 있으니까 굉장히 기대했잖아요.그런 상황을 우리가 생각을 해 보아야 해요.
예수의 상황 유대 당시 1세기에 유대인들 간에도 굉장히 가난한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런 풍요를 누리게 된 것은 인 류 역사상 최근의 일이어요.그 당시는 상당히 가난한 지경이었어요.그러기때문에 온 동네 사람들이 어느 집에서 결혼식이 열리면 오랬동안 기대하다가 드디어 그 날 당도하면 거기 가서 한 판 이제 잘 먹고 잔치를 벌리는 것이지요.그러니까 그런 때에 혹 결혼식이라고 받은 날이 바리새인들이 정한 금식의 날과 겹치면 그러면 오늘 금식해야 되는 날이니까 잔치하지 말고 금식합시다.누가 그렇게 할 수 있어요? 그렇게 할 수 없어요.그래서 그렇게 금식을 강조했던 바리새인도 아예 예외를 만들어 놓았어요.금식의 날이 결혼식 날하고 겹치면 금식을 안해도 된다.그래서 그 날은 금식안한다고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지금 유대인들의 그러한 관행을 들어서 이렇게 말해요.혼인집 신랑과 함께 있을 때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지금 왔어요.그런데 어떻게 금식을 하느냐? 너희들 관행으로도 안하지 않느냐? 그런 말이지요.자 이 그림은 우리가 이해를 했어요.
이 그림을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가 놀란 사실 하나는 예수가 자신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무엇으로 지금 말한 것이어요? 이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상황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다른 바리새 운동이라든지 쿰란의 옛센파운동이라든지 또는 심지어 요한운동까지도 그 종말에 있을 메시야가 오면 구약에서 부터 메시야 시대에 시온에 하나님의 큰 잔치가 벌어지리라고 메시야 시대의 구원을 그렇게 비유로 그렸는데 그 종말에 메시야가 오면 시온에서 벌어질 하나님의 큰 잔치를 대비하기 우해서 하나님께 의지하고 지은 죄를 회개하고 이런 의미로 금식을 한 것이어요.그런데 예수는 그들과는 전혀 다르게 자기와 더불어 바로 구약에서 부터 기대해 왔던 그리고 지금 바리새운동에 참여하는 여러분들 그리고 심지어 예수의 어쩌면 선생이었던 세례요한 까지라도 기대하고 준비했던 그 잔치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되었음을 지금 예수께서 말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여기 19절 말씀은 1장 15절 말씀의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이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구원의 때가 당도했다.시온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 지고 이것이 그 때의 구원이 큰 잔치로 구약에서 부터 그려져 있는데 구약에서 부터 그 구원이 약속이 되어 있는데 그 구원이 이루어질 때가 지금 당도했어요.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지금 막 도착한 것이어요.그러니까 지금까지의 기대하고 준비했던 시대는 이미 끝나고 또 잔치가 벌어지는 상황이 되었다.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주장입니까? 여러분들,여러분들이 예수의 청중이라고 한 번 생각해 보세요.그때까지는 유대인들이 항상 종말에 있을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해서 금식하고 경건하게 준비해야 된다고 그렇게 생각을 해왔는데 그래서 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이 바리새인들도 있고 쿰란공동체도 있고 요한의 공동체도 있고 다 그러는데 엊그제 까지 요한의 공동체에 동참했던 예수가 드디어 바로 그 기다리고 기다리던 때가 임했다.구약에서 부터 예고된 시온에서의 그 잔치의 때가 임했다.그렇게 지금 주장을 하는 것이어요.
더 나아가서 자신이 바로 이러한 잔치가 있게 하는 신랑이라고 비유를 하고 있는 것이어요.아까 신랑이 자기 집에 당도하면 잔치가 벌아진다고 그랬지요? 지금 예수 자신이 그 잔치가 벌어지게 하는 신랑으로 비유를 하고 있는 것이어요.그래서 실제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구원을 펴지요.지난번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에서 우리가 본바와 같이 바로 앞에 2장 10절에서도 인자가 땅위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에게 알게 하려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셨다.그리고 5절에 소자야 네 죄사한ㅁ을 받았느니라.이렇게 하나님의 죄의 용서를 선언하고 그래서 구원을 약속하고 지난번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에서 본바와 같이 성령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는 것을 지금 하나님의 종말에 구원이 실현이 되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으로 내세우고 회개하는 삭개오에게 오늘 이 집에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다고 선언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 모든 죄와 죽음의 세력에 짓눌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즐기도록 하나님의 구원의 잔치를 하도록 하는 모습을 우리가 지난번에 하나님 나라 공부에서 쭉 보았잖아요.
그와 같은 것을 지금 염두해 두고 자기가 신랑으로서 지금 임해서 구약에서 부터 예고되고 기대되었던 그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잔치가 지금 벌어지고 있음을 이런 상황에서 금식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그러나 20절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은 금식을 할 것이니라.이 말씀은 예수의 수난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의 시점을 두고 말하지요.그 신랑 자신이 유대인들의 손에 붙잡혀서 로마인의 손에 넘겨져서 십자가에 죽음을 당할 그 시간이 있는데 그 기간에는 물론 잔치를 베풀 수 있는 기간이 아니고 금식을 하는 기간이다.그 외에는 지금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지금 예수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통치를 선포하고 그 구원의 통치의 힘을 구원의 힘을 그체적으로 병자를 치유하고 삭개오같은 사람을 온전하게 하고 죄인들을 온전케 회복을 시키고 이렇게 하는 그 기간 동안에는 김식할 것이 아니라 잔치를 베풀어야 된다.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자 그래서 여기서 우선 우리가 무어을 보아야 하냐면 예수의 엄청난 주장,자기과 더불어 하나님의 구원의 시대가 도래했음, 잔치로 그려지는 구원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주장함을 우리가 볼 수 있지요.여기서 한가지 실제적으로 이 본문에서 이런 질문들을 가끔 사람들이 제기하는 것을 보아요.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십자가에 못박히는 잠깐의 순간에 금식을 하고 그 다음은 어떠냐?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다시 만유의 주로 높임을 받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덕을 입게되는 이 상황이 되었지요.그 뒤에는 또 금식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 예수의 가르침대로 한다면 그 말이 맞지요.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한 기본요소가 기쁨의 요소여야 되어요.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그 구원에 대한 즐김,구원에 대한 기쁨,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가장 기본요소들 중에 하나여야 되지요.심지어 고난 가운데서도 주 안에서 기뻐해야 되지요.
우리가 전에 빌립보서를 공부할 때에 편지를 쓰는 바울도 고난 가운데서도 이 편지를 받는 빌립보인들도 고난 가운데 있었는데 그 편지에 계속해서 되풀이되는 권면이 뭐라고요? 주안에서 기뻐하라고 그래서 그 되풀이 되는 권면을 두고 우리가 뭐라고 그랬어요? 그리스도인의 삶에 가장 기본적인 특징들 중에 하나가 뭐야야 한다고요? 기쁨이어야 된다고요.심지어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 고난의 상황에서 인간적으로는 기뻐할 수가 없지요.주안에서 기뻐하라 바로 우리에게 고난을 주는 사단의 세력을 부활하심으로 극복하고 지금 만유에 군림하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곧 우리 구원을 완성시킬 그 주에 힘입어서 기뻐하라고 권면한다고 우리가 배웠지요.이것이 참으로 중요해요.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이 아닌 우리 이웃보다 우리에게 기쁨이 좀 더 많다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심지어 비 그리스도인들 보다 더 안절 부절하고 불안하고 답답해 하고 이롷습니까?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 후자의 형을 보기가 참 쉬어요.그것은 신앙이 잘못된 것이지요.우리 가운데 그런 상황이 있으면 한 번 더 다시 생각을 해 보아야지요.

자 그 다음에 21절 22절에 이어서 또 예수께서 비유들을 더 들었는데 하나는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붙인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겨 헤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기것은 쉽게 이해가 되는 거여요.생베조각은 무엇이라고요? 신축성이 많지요.낡은 베 조각은 신축성이 없고 낡은 옷이 헤어져서 그것을 기워야 겠는데 거기다가 생베조각을 낡은 옷 헤어진 옷에 붙이면 어떻게 되는 것이어요.그랬다가 한 번 빨면 그 생베조각 신축성이 큰 것이 오그라 들어 가지고 낡은 천 기웠던 데를 당겨 가지고 다 찢어 버릴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이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붙일 수가 없다.
이것도 지금 앞에 신랑의 혼인잔치 비유와 어떤 점에서 같아요? 예수의 하나님 나라운동이 전혀 과거 바리새운동과 요한운동과는 다른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새로운 장을 여는 사건이다.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전혀 새로운 장을 여는 사건임을 말한 점에서는 위의 비유와 같지요.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사고의 진전이 있지요.이 두번째 비유에서는 아예 유대교 바리새운동의 형식이든 요한의 운동의 형식이든지 그 유대교는 헌 옷에 해당하는 것,그것을 더 명백히 하지요.이것은 예수께서 요한과도 자기와도 거리를 분명히 두는 그런 사건이지요.그런 말씀이지요.예수께서 율법과 선지자들의 시대는 요한으로 끝났다.그렇게 말씀하시고 자기와 더불어 전혀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여기에서는 지금 비유로 말하는데 명백히 말하는 곳이 있지요.
즉 마태복음 11장 11-14절 까지 봅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세례요한 보다 큰 이가 일어님이 없도다 ......... 오리라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여기 13절 모든 선지자들과 요한 까지 계속되었던 선지자들과 율법의 예언이 성취되는 시대가 시작이 되었어요.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여요.약속과 예언의 마지막이 요한이어요.그러니까 이 구약의 약속과 예언의 시대를 총 결산하는 분이 요한이어요.그러므로 그런 의미에서 요한이 가장 위대한 선지자여요.그런 의미에서 여기 11절에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이 가장 큰 자여요.
그런데 요한의 운동에 동참했다가 세례 때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어 예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했어요.천국운동,마태복음의 언어로는 하늘의 나라, 그것을 한문식으로 표현을 해서 천국이라고 했는데 하나님 나라나 마찬가지여요.이 천국운동은 성취의 시대에 속한 것이지요.요한은 약속과 예언의 시대의 종결인데 예수와 더불어 성취의 시대가 열린 것이어요.구원사의 새로운 시대, 전혀 새로운 시대,성취의 시대.그러니까 이 성취의 시대에 사는 사람은 이 성취의 시대에 가장 작은 자라도 예비의 시대 약속과 예언의 시대의 가장 큰 요한 보다 더 큰 자여요.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그만큼 더 많이 체험하는 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여기 요한의 모든 선지자와 율법의 예언의 시대가 요한까지다고 하는 것과 그래서 요한이 약속의 시대에 가장 위대한 자, 여자의 몸에서 난 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자이다.
그러나 예수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의 성취의 시대가 도래했음, 그래서 그 시대에 속하는 자는 가장 작은 자라도 요한 보다 크다고 말해요.이 말씀에서 예수는 요한과 자기와의 경계가 다름, 요한과 자기와의 사이에 하나님의 구속사에 새로운 장이 열렸음, 약속의 시대거 종결리 되고 성취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아주 엄청난 선언을 하고 있지요.이것을 생베와 낡은 옷의 비유로 설명을 한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 지금 마태복음 11장 기왕에 여기 구절을 폈으니까 여러분들 질문하고 싶은 말이 있을 거여요.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이지요? 아마 여러분들 질문하고 싶을 거여요? 오늘 시간이 많이 갔으니까 내가 이 다음에 그 말씀을 설명을 드릴께요.그것이 아주 어려운 말씀이어요.그 말씀은 따로 설명을 하겠어요.
자 그 다음에 이 똑같은 진리를 예수와 더불어 새로운 구원사의 새로운 장이 열렸어요.그래서 요한으로 종결이 되는 유대교는 헌 옷이고 헌 시대여서 유대교에서의 행동의 관행을 예수의 성취의 시대의 사람들에게 적용을 해서는 안됨을 지금 말했어요.
그런데 똑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세번째 비유여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어서는 안된다.그 당시는 유리병 보다는 가죽부대에 포도주를 넣어서 발효를 시키지요.그런데 새 가죽부대는 신축성이 있어서 포도주를 넣으면 포도주가 발효를 하면서 팬찬한다고 그래요.그러면 새 가죽부대는 신축성이 있으니까 함께 팽창해서 괜찮은데 낡은 가죽부대는 신축성을 잃어 버려요.그런데 거기다가 새 포도주를 넣으면 새 포도주가 어떻게 되요? 발효되면서 팽창을 하면 낡은 가죽부대가 신축성이 없으니까 터져 버린다는 말이어요.그래서 새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고 하셨다.여기사도 아까 베조각의 비유와도 똑같은 말씀이지요.
예수는 요한까지를 지금 요한의 제자들까지도 금식하는데 왜 당신은 안 하느냐? 요한 까지의 유대교를 약속과 예언의 시대로 보아서 이것은 헌 옷에 해당하는 부분 헌 가죽부대에 해당하는 부분 예수자신과 더불어 새 시대가 임해서 성취의 시대, 하나님의 구원사에 새 시대가 열렸어요.그것은 무엇으로 표현이 되어요? 생베조각과 신랑의 오심,새 포도주로 표현을 했어요.그래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운동에 동참하는 자들에게 과거 유대교의 관행이 적용이 되지 않음을 여기서 지금 예수가 말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 세가지의 비유로 예수는 자기와 더불어 유대교의 성취가 일어났는데 그 성취는 약속과 예언보다 훨씬 더 큰 것이기 때문에 약속과 예언의 관점에서 성취를 이해할려고 하고 성취의 새로운 면에 대한 비판을 하면 안된다. 그런 말이어요. 이 비유들은 다 공관복음 마다 세 복음서에 다 있어요.마태복음에도 있고 누가복음에도 있어요.
그런데 요한복음에도 비슷한 비우가 하나 있어요.요한복음 2장 1-10절 까지 가나의 혼인잔치여요.가나의 혼인잔치는 비유가 아니어요.예수의 이적이지요.그런데 사실은 가나의 혼인잔치의 이적은 보통 주석가들은 행동으로 표현한 비유라고 말해요.지금 여기 세개의 비유 공관복음 들에 나오는 세개의 비유와 똑같은 진리를 행동으로 표현을 한 거여요.요한복음을 어떻게 해석을 할 줄을 모르는 분들은 요한복음 2장1-10절 까지 유명한 가나의 혼인잔치의 이작에서 예수게서 혼인잔치를 추궁했다 하는 것을 그 생각만 많이 읽어내는데 그것이 주안점이 아니고 그것이 주요점이 아니고 예수게서 유대교를 성취하고 능가하고 대치함을 보여주는 하나의 비유적 사건이어요.요한복음 2장에서 4장가지는 요한복음 전체에서 예수가 유대교를 성취하고 능가하고 대치한다는 주제가 아주 장해요.
그런데 특히 2장에서 4장 가지 그 주제가 집중해서 나타나요.그런데 보기에 첫 사건은 2장1-10절 까지는 이 주제를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제기하는 사건이어요.여기 지금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세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개가 놓여 있지요.그런데 지금 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뭐가 문제여요.혼인잔치에서 모든 기쁨을 유발시켜야 할 포도주가 다 떨어진 것이어요.지금 예수는 유대교를 뭘로 가나의 혼인잔치는 유대교를 뭘로 지금 비유한 거여요? 포도주가 다 떨어진 그래서 흥이 다 깨지고 생명력이 다 나가버린 파산된 잔치와 같은 거여요.유대교가 이 사건에서 그렇게 그려진 것이어요.
거기 지금 유대교는 성전에서 제사를 중심한 종교지요.지금 여기 결례를 위한 돌 항아리가 뭐하러 놓여 있는 거여요? 몸씨는 결례가 뭐라고 표현되어요.성전에서 제사함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죄사함을 받고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지요.그런데 그 성전에서 예배중심의 유대교가 무엇으로 여기 상징이 되었어요? 결례의 예를 위한 돌 항아리로 상징이 되었어요.그것이 술이 다 떨어져 가지고 흥이 다 깨져버리고 생명력이 나간 잔치에 무슨 도움이 됩니까?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것이어요.다시 말하면 예수는 뭐라고 말하는 거여요? 지금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가 행해지고 하지마는 아무 소용이 없음, 그 하나님 백성에게 무슨 하나님의 구원이 전달되고 그래서 거기 기쁨이 있고 생명이 있고 그런 것이 아님, 유대교는 푸도주가 떨어진 잔치와 같음, 그래서 흥이 다 깨지고 생명이 다 나갔어요.유대교의 중심인 성전결례의 예,거기서 제사드리는 것 등이 뭘 돕느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해요.그 상황에 예수가 와서 무엇을 하는 거여요.가장 좋은 포도주를 만들어서 모두에게 충분히 마시게 해서 다시 그것이 전보다 더 큰 기쁨이 흥이 넘치게 하고 생명력이 엄치게 함, 그래서 잔치를 가져옴, 그것이 구약에서 부터 예고된 종말에 시온에서의 큰 메시야적 잔치가 성취됨, 그래서 유대교를 예수가 능가함, 능가하니까 유대교는 준비에 불과했던 것,그러나 그것도 제데로 준비가 아니고 흥이 다 깨져버리고 생명력이 나간 그런 잔치와 같은 것을 예수에 의해서 대치되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2장 후반부 부터 그것을 하나 하나 보여주어요.그래서 예수가 성전은 곧 부서지고 예수의 몸이 새 성전이 됨, 2장13-19절 가지 22절 까지 계속되는 예수의 성전사건이다.왜 공관복음에서는 예수가 성전을 깨끗이 성전에서 장사치를 몰아내고 성전이 파괴되리라는 예언을 하시고 하는 것이 예수의 공생애의 저 끝에 나타나지요 그런데 요한복음 일찌감치 이 사건을 앞에 갖다 놓았어요.무엇을 강조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바로 유대교를 성취하고 능가하고 대치함을 그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서 이다.
그러니까 바리새인이요 유대의 관원이요 유대인들의 선생인 니고데모,니고데모가 뭐라고 그려져 있어요? 바리새인,관원,이스라엘의 선생, 이 세가지로 니고데모가 그려져 있어요.게다가 니고데모가 돈 푼께나 있는 사람, 이렇게 니고데모가 그려졌지요.그러니까 니고데모가 어떤 사람이어요? 유대인들 중에 가장 고상한 부류의 하나라는 말이어요.그러니까 가장 고상한 유대인도 유대교의 틀내에서는 구원이 없어요.그 사람에게 예수게서 무엇을 요구해요? 네가 어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어? 물과 성령으로,위로부터 오는 힘에 의해서 다시 나야함, 누가 위로부터 오는 힘을 가져오는데요? 예수 자신이.그러니까 예수께서 유대교를 이와같이 성취하고 능가하고 대치하기 때문에 유대교에 남아 있는 한 그중에 가장 고상한 사람,바리새인들 아까 유대교에서의 가장 고상한 의를 성취할려는 사람이지요.거기다가 신학자,선생,거기다가 관원인 니고데모도 그 유대교내에서는 구원이 없어요.유대교는 아까 포도주가 다떨어진 파산된 잔치같은 거여요.거기에는 구원의 기쁨이나 생명이 없어요.
어떻게 해야 그 사람에게 구원이 주어져요?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위에서 가져오는 계시와 성령의 능력으로 이 하나님 나라에 예수가 가져오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으로 구원을 얻는데 그것이 전혀 새로운 시작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예수가 무슨 그림을 썼어요? 난다는 그림,우리말로는 다시 난다고요.5절에 다시난다는 말,원래는 이중의미여요.위에서부터 오는 힘으로 난다는 말이 첫째의 뜻이고 둘째로 그러므로 두번째 뜻은 난다는 말이고 그런데 니고데모는 두번째 뜻으로만 이해를 하지요.
그 다음에 4장에 가면 3장 니고데모의 대화에서 그러면 어떻게 예수가 유대교를 성취하고 능가하고 대치해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 생명 영생을 가져오는 가를 쭉 설명을 해요.그 다음에 4장에가면 아까 니고데모는 누구였어요? 유대교의 가장 고상한 대표자. 4장에는 누가 소개되어요? 큰 유댜교의 틀 안에서 가장 천박한 자 사마리아 여인.우선 사마리아교는 유대교의 이단교,유대교쪽에서는 사마리아교를 이단으로 봤지요.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자기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여기 사마리아 여인이 무엇을 주장해요? 자기들도 야곱의 자손이라고. 야곱 우리 조상 우리 아빠 우리 아버지 야곱이 준 이 우물로 우리가 생명을 얻었다고 하잖아요.그러니까 사마리아인들도 유대인들 못지 않게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구원을 얻는다고 본 것이어요.그러니까 예수는 사마리아인들도 유대교에 속하는 것이어요.그런데 예수께서 바로 유대교를 구약과 유대교를 성취하고 능가하고 대치하시기 때문에 유대교의 가장 고상한 자도 유대교에 힘입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에 의해서 구원받아야 될 것이며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유대교에 있어서 가장 천박한 대표 사마리아 여인 사마리아교 자체가 이방신들과 혼합종교에서 마치 이 여인이 남편이 여러명인 것과 같은 상황이다.그것도 하나의 비유여요.
그런데 바로 그 여닝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생명의 물이 주어져서 구원을 얻게 된다.그 말이어요.요한복음 4장에 뭐라고 그래요?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 것이나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는 것이나 다 헛것이다.유대교와 그 유대교와 적대관계에 있었던 사마리아교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하느냐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느냐?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해야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얻느냐?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해야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얻느냐? 서로 논쟁했는데 다 쓸데없는 소리다.뭐라고요? 예수께서 성령과 진리로 우리말 있지요.여러분들 자꾸 쓰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됨, 그 말은 성령과 진리 안에서의 예배 그래서 우리는 예수께서 가져오는 성령의 시대에 성령에 힘입어서 이 예 유대교의 예배가 기껏해야 그림자로서 그려낼려고 했던 진짜 실제의 관계,하나님과의 실제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말이어요.
그러므로 유대교에 머무는 한 에수 그리스도에 힘입어서 그가 가져오는 완성된 계시와 성령에 힘입어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며 그러기 때문에 유대교의 틀 안에서의 또 하나의 가장 천박한 표현인 사마리아인들도 그 중에서도 더 천박한 사마리아 여인도 예수 그리스도에 힘입어 구원을 얻음, 이런 이야기여요.
자 오늘은 우리가 예수의 세개의 비유와 하나의 비유적 이적을 통해서 예수께서 자기와 함께 자기와 더불어 하나님의 구원이 시대가 도래했음, 그것은 곧 유대교를 구약과 유대교의 예언과 약속을 성취함이니까 성취는 성취되는 것을 능가하는 것이지요.그러기때문에 그것은 대치하는 것이지요.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잔치하는 기쁨이 충만함, 이 구원의 잔치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예고하는 것을 볼 수 있어요.우리는 이것에 익숙해서 이것이 얼마나 감격적인 사건인가를 잘 모르는데 여러분들이 예수의 청중의 입장에서 서 보도록 조금 노력해 보세요.얼마나 놀라운 주장이며 얼마나 감격적인 주장인가. 자 이 다음에 계속하십시다.

하나님 나라의 비유(2)
씨뿌리는 자의 비유
마가복음 4:1-9

오늘 우리가 살펴 보랴고 하는 비유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로서 우리들이 비유들 중에 가장 익숙한 비유라고 생각합니다.막 4:1-9절을 교독합시다. "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튼무리가 모여 들거늘 .......... 또 이르시되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은 들으라 하시니라."
지금 이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이것이 지금 어떠한 상황에서 예수께서 말씀을 하셨는가? 마가는 쭉 지금까지 써 온 가운데서 무엇을 강조를 하느냐면 예수님의 말씀은 놀라운 권세 그리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시위의 놀라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고 예수의 말슴을 들으려고 몰려드는 것을 굉장히 강조했어요.
1장 부터 굉장히 강조했는데 몇 곳만을 보면 막 2장 12절을 보면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고 죄의 용서를 선언하고 또 그 당시의 신학자들 서기관들을 신학적으로 논쟁을 해서 압도를 하자 여기 무리들이 뭐라고 놀라와 합니가? 2장 12절에 다 놀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이렇게 이 사람들이 놀라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이제 쭉 예수의 가르침에 사람들이 놀란다는 것을 많이 보여준 뒤에 3장 마지막에 오면 3장 31절을 보면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는데 그렇게 되니까 동시에 예수를 반대하는 당시의 신학자들 제사장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의 반대운동이 시작이 되어요.그래서 반대운동자들은 아마 예수를 거짓 선지자로서 백성을 오도하는 사람이 안니냐 해서 선지자가 나서 백성을 오도하는 일이 있으면 먼저 그 가족이 책임을 지고 그런 못된 사람들 제지를 하던가 심지어 심한 경우는 없애 버리기도 해야 되어요.
그래서 3장 31절을 보면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를 붙들러 나선 것이어요.이들이 이제 하도 옆에서 예수운동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아 예수가 미쳤다 말이여.제 정신이 아니다.예수가 무슨 악령이 들어 가지고 이 거짓 선지자 노릇을 한다.그러니까 가족이 제일 먼저 나서서 예수를 붙들어서 어떻게 집에 가두든지 아니면 하나님 나라 운동을 못하게 할려고 하는 것이어요.3장 31절도 한 번 읽읍시다." 이때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들을 보내서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둘러 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자 예수께서 이렇게 권세있는 권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선포하고 그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사람들을 온전케함으로 치유함으로 우리가 지난번에 하나님 나라를 연구할때 자세히 보았지만 사람들은 예수를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사단의 힘을 빌려서 예수가 그런 일을 한다 하고 시비를 걸었지요.그것이 막 3장에 15절 부터 쭉 이야기가 나왔어요.그래서 예쉐서는 자기가 바알세불을 힘입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시위한다고 그 적대자들의 비난이 논리적으로 옳지 않음을 잘 보여 주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3장 30절에 많은 사람들이 뭐라고 그래요.예수 속에 더러운 귀신이 들어갔다 또 바알세불에 힘입어서 저런 일을 하고 다닌다 하는 말과 똑같은 말이지요.예수가 사단 또는 사단의 졸개인 귀신의 영향아래 저런 짓을 한다고 하는 것이어요.그러니까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그림은 한편 예수의 하나님 말씀의 선포와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시위로 많은 무리가 지금 예수를 따라요.그러자 동시에 무엇이 많이 일어나요? 무엇도 아주 힘있게 일어나요? 예수를 반대하는 운동도 아주 힘있게 일어나는 것어요.그래서 심지어 이 사람들이 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신학자들이 또는 종교적으로 경건하다고 하는 종교적 관심이 보통 사람들 보다 많은 바리새인들이 주로 예수운동을 반대하는데 이 사람들이 뭐라고 하냐면 예수가 하나님 나라 운운하지만 하나님의 권세로 저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바알 사단의 권세로 그러는 것이고 그러니까 그 사람들 속에 사단의 졸개인 귀신이 들어서 저런다.
그러니까 심지어 누구까지 걱정이 되었어요? 아까 말씀을 드린데로 예수의 가족들이 제일로 걱정이 된 것이어요.왜냐하면 아까 말씀드린데로 신명기법에 따라 가정에 그런자가 나타나면 가족이 제일로 먼저 책임을 져야되어요.그래서 예수의 가족이 지금 예수를 체포하러 나선 것이어요.
그런데 예수가 지금 누구에게 둘어쌓여 있어요? 예수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더 듣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둘어 쌓여 있어서 이 가족이 접근을 못하는 것이어요.그래서 밖에서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불러낼려고 하니까 예수께서 뭐라고 그래요? 둘어 앉은 사람들을 보고는 도대체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이 누구냐? 예수는 어느 관점에서 가족과 가족이 아닌 사람,가족은 자기 둘레에 있는 사람,그러니까 자기와 같이하는 사람들과 자기와 같이 하지 않은 사람들을 구분해요.어느 관점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가? 안하는가? 이 관점에서 구분을 했어요.그러니까 지금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지만 예수는 자기 운동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물론이지만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구분을 하는 거여요.자기를 형식적으로는 따르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구분을 하는 거여요.
어떻게 구분을 해요? 하나님의 말씀,자기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과 행하지 않은 사람들을 구분하는 것이어요.
이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이런 맥락에서 주어진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의 다양함을 설명하려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자기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반응을 촉구하기 위한 그런 비유여요.
여기 4장 1절의 그림을 한 번 봅시다.예수께서 게네사렛 갈릴리 바다에서 이제 가르치는데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니가 자꾸 예수에게 더 가까이 와서 위험에 빠지는 것이어요.이 군중들이 자꾸 예수에게 달려들면 예수가 바다속으로 들어가 버릴 빠져버링 위험이 있는 것이어요.그래서 어떻게 하는 거여요? 배를 띄어서 군중들과 떨어져서 배에 예수가 앉고 뭍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비유를 말하는 거여요.
그런데 이 비유는 무엇입니가? 씨뿌리는 자의 비유지요.씨는 말씀, 하나님 나라의 말슴을 비유한 것이어요.그러니까 지금 예수가 무엇을 합니까? 땅에다가 밭에다가 밭,땅,뭍,육지. 땅 밭에다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어요? 말씀의 씨를 뿌리고 있어요.그런데 이 많은 군중들이 형식적으로는 전부 예수의 말씀을 듣겠다고요.
지금 여기에서 밖에 서 있는 예수의 부모들 형제들 상당히 예수가 하는 일에 회의적인 회의를 가지고 있고 두려움을 가지고 있고 이 사람들이 왜 그런다고요? 예수에 반대하는 무리들,예수에 반대하는 반대자들이 예수가 지금 거짓선지자 악령의 신의 영향으로 거짓선지자 노릇을 한다니까 거기에 영향을 받아 가지고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이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는데 겉으로는 예수의 권세있는 말씀과 그 구원의 권세에 압도되어서 조금이라도 더 말을 많이 들을려고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일부러도 예수께서 지금 씨를 뿌리는 거여요.
그런데 이씨가 네가지 다른 반응들을 일으킴을 지금 이 비유는 말하는 거여요.이 맥락을 하나 생각을 해 두시고 또 하나의 맥락은 이 씨뿌림.하나님 나라를 씨뿌리는 자의 비유로 설명을 하는데 여기 지금 이 비유가 이어서 몇 개가 나오지요.여기 처음에 씨뿌리는 자의 비유가 나오고 또 26절 부터 저절로 자라는 씨의비유 이야기가 나오고 그 다음 30절 부터 겨자씨 비유가 나오고 이렇게 씨의 비유들이 3개가 연달아 나오 잖아요.
그런데 이시의 비유들이 전부 어떤 공통성을 갖고 있느냐면 겨자씨의 비유에서 가장 환하게 드러나지만 씨의 비유 전체에서 어떤 공통성이 드러나느냐면 씨라는 것은 나중에 튼 수확에 비하면 얼마나 미미한 시작이어요.연약하게 보이기도 하고 미미하게 보이기도 하고 그런 것 아닙니까? 예수께서 지금 하나님 나라를 씨로 비유해요.하나님의 말씀을 씨로 비유해요.또 씨라는 것은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자라서 큰 수확을 가져오는 것이거든요.그런데 그런 모든 것이 겨자시의 비유에서 드러나지만 에 씨의 비유에 이 생각이 다 들어 있어요.미미하게 시작함.점진적으로 자람,그러나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라서 큰 수확을 가져옴,이 요소가 다 들어 있어요.
은닌성, 지난번에 감추어진 성격 아주 미미하게 보일랑 말랑,믿음이 있는 자에게만 보이는 그 다음에 점차 자람,점진성. 그 다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라게 되어 있음.이 하나님 나라를 예수는 서너가지으 씨의 비유 나중에 마태와 누가복음을 보면 또 하나 있습니다.밀과 가라지의 비유도 같은 씨의 비유의 맥락 속에 있는데 마가복음에 보면 이런 것들이 다 하나님 나라의 은닉성과 점진성과 필연성을 표현하는 공통성을 가지고 있어요.
이런 것에 유념한 신학자들은 예수의 이시의 비유가 당시 또 하나의 맥락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뭐냐면 당시 유대교에 있어서 메시야 사상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상.그것은 하나님께서 천지개벽을 이루는 대변화가 한 순간에 옛 타락의 창조를 다 심판하시고 전혀 새로운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묵시 문학가들이 주로 그렇게 많이 생각을 했어요.또는 당시 열혈당의 신학에 거대한 무슨 가룩한 전쟁 혁명을 통해서 하루 아침에 로마군대를 몰아내고 그들과 결탁한 타락한 유대인들,사두개인들,제사장들,그들을 다 쓸어 버리고 이 땅에 자유와 정의와 풍요가 아주 가득찬 새 질서가 오리라.메시야가 바로 그런 하나님의 통치를 가져오리라고 생각한 것에 비추어서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는 그런 천지개벽을 통한 하루 아침에 새 하늘과 새 땅을 가진 것도 아니고 또는 열혈당원들이 말하는 그런 무슨 거룩한 전쟁을 통해서 새  부 새 사회구조 새 질서 뭐 이런 것을 가져온 것도 아니고 하기 때문에 예수의 하나님 나라으,ㅣ 선포에 처음에 솔깃해 가지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했을때는 자기들이 생각하는 그런 새 하늘과 새 땅이든지 아니면 이 땅에 다윗왕조를 재건해서 로마의 압제자를 몰아내서 모든 착취자들을 다 몰아내고 자유와 정의와 평화가 가득한 질서를 예수께서 가져올 줄로 알고 예수를 따라왔던 사람들이 점점 예수에 대해서 실망하게 되었단 말이어요.
그 예수에 대해서 실망한 사람들에 누구까지 포함이 되어요? 심지어 세례요한 까지도 그런 것 같아요.우리 마태복음 11장 쩔에서 요한이 감옥에서 예수의 하신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서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에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요한이 자기 뒤에 올 메시야가 불로서 악한 세상을 심판하고 전혀 새로운 구원의 질서를 가져 오리라고 기대를 했는데 또 예수가 바로 그런 메시야라고 선포까지 했는데 예수가 세상에 무슨 불로 다 타락의 죄의 구조를 태워버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가져온 것 같지도 않고 이 악한 로마의 통치나 헤롯의 통치나 사두개 제사장들의 통치를 뒤집어 엎는 것 같지도 않단 말이어요.그러니가 회의가 생긴 모양이지요.
그래서 과연 당신이 그 오시도록 되어 있는 메시야냐?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되느냐? 요한 까지라도 예수의 하나님 나라운동에 대해서 조금 고개를 갸우뚱 해지는 거여요.그래서 예수는 이사야서의 후반부와 여러 예언들을 지금 염두해 두고 자기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소경과 앉은뱅이를 를 낫게 하고 문붕병자를 낫게 하고 어떻게 가난한 자에게 복임이 선포되는가의 이사야서에서 예언이 된 메시야 시대에 일어날 축복이 어떻게 자기를 통해서 일어나는지를 증거로 자기가 메시야임을 요한에게 확인시키는 그 말씀을 해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렇게 예수의 하나님 나라운동이 바로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서 회의를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요한가지도 회의한 상황이 되었다.그 말이어요.
이런 상황에서 예수게서 아마 이런 일련의 씨의 비유들을 했을 것이다.무엇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올바른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그러니까 당시의 유대교나 요한까지도 상상하고 있었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생각을 교정해 준 것이지요.물론 지난 시간에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예수의 제자들이 이런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끝까지 유대교의 메세야 사상,다윗왕조의 재건을 통해서 이 당에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구원의 체제가 올 것에 대해서 포기하지 않고 그것을 예수에게서 구하는 모습을 지난 시간에 보았지 않습니가? 예수는 그들에게 교육을 시킨 것이지요.자기가 지금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는 그런 것이 아니고 이 땅에 씨뿌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가 씨의 비유들의 두가지 배경을 생각할 수 있어요.하나는 지금 다시 정리하면 예수릐 주로 설교,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과 사람들을 하나 하나 온전케함,병자들을 고치고 삭개오 같은 사람을 올바르게 하고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이렇게 하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운동에 대해서 좀 회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아 하나님 나라가 왜 천지개벽하는 것 같은 단번에 이 세상을 좌악과 죽음의 요소를 물리치러 오지 않느냐고 하는 사람들.그것이 하나의 맥락이고 또 다른 하나의 맥락은 아까 이야기한 대로 예수의 말슴에 아예 처음부터 예수가 마치 사단에 바알세불의 앞잡이인 것으로 매도하는 사람들은 말할것도 없고 심지어 예수의 하나님 나라 말슴에 상당한 매력을 느끼고 많이 오는 사람도 있지만 예수게서는 그들이 다 자기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올바르게 반응을 하지 않는 거여요.그래서 올바르게 반응하는 것을 촉구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셨다.그렇게 우리가 일단 배경을 정하면 좋겠어요.
자 그래서 이제 비유 자체를 보십시다.예수께서 여러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침 뒤에 이르되 들으라 들으라 하는 것은 주의를 환기시키는 말이지요.아주 그리고 권세가 잔뜩 들어가 있는 말씀이지요.들으라.예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어요? 예수의 말씀을 듣고 안 듣고에 우리의 생명의 갈림길 생명과 죽음의 갈림길이 있기 때문에 그렇지요.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떠러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지금 우리 번역에 더러는 그렇게 되어 있지요.그 다음 또 두번째는 더러는 흙이 얇은 돌 밭에 떨어지매 흙이 갚지 아니함으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으매 타져서 뿌리가 없어서 말랐고 또 세번째는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매 결실을 못했고 그 다음 네번째는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이렇게 우리 말에 지금 더러는 해서 우리 성경을 읽는 분들 영어성경도 마찬가지여요.어떤 영어번역은 이런 식으로 읽으면 어떤 인상을 받냐면 씨뿌리는 자가 씨를 마구뿌리는데 씨 일부는 길에 떨어졌고 또 하나는 바위에 떨어졌고 또 얼마는 가시덤불에 떨어졌고 일부는 좋은 땅에 떨어졌다.사람들이 어떤 씨뿌리는 자가 밭에 씨를 뿌렸을때 어떻게 씨의 상당부분은 길에 떨어졌고 어떻게 상당 부분은 바위위에 살짝 흙이 있는 그런 곳에 떨어졌고 어떻게 시의 상당부분은 아예 가시덤불에 씨뿌리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있어요.이렇게 하는 농부가 세상에 어디 있어요.그래서 예수가 이 예를 잘못 들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지금 여러개의 씨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하나는 길 위에 떨어지고 하나는 바위에 덜어지고 하나는 가시덤불에 떨어지고, 몇개가 올바르지 않은 곳에 떨어졌습니까? 3개가그랬어요.나머지 3개는 좋은 곳에 떨어진 것이어요.좋은 밭에. 그 나머지 좋은 밭에 떨어진 3개가 하나는 30배 하나는 60배 하나는 100배를 결실한 거여요.지금 하나 하나를 말한 것이어요.그러면 아주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씨부리는 자가 밭에 나가서 씨를 뿌리는 거여요.대개는 좋은 땅에 떨어지죠.
그런데 지금 예수가 말할려고 하는 것은 어쩌다가 하나를 길위에 떨어질 수도 있고 어쩌다가 하나는 가시덤불에 떨어질 수도 있고 어쩌다가 하나는 바위에 떨어질 수있고 그래서 아주 팔레스티나의 농장의 현실에서 여기저기 그냥 막 터뜨려서 일부는 상당히 많은 씨는 길 위에 떨어지고 상당히 많은 씨는 무슨 가시덤불에 떨어지고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 하나를 두고 이야기하는 거여요.그래서 이 이야기가 별로 현실성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아요.
자 그래서 네개의 다른 땅에 이렇게 떨어졌다.그런데 이 씨를 가지고 무엇을 이야기 하느냐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시로 비유를 하지요.그런데 이 정통이 우리 사도들이 이어받아 가지고 여러 곳에서 복음을 씨로 비유를 해요.여러분들 약 1:21절을 한 번 보시겠습니까?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지금 복음을 마음에 심긴 마음에 뿌려진 씨로 설명을 하고 있어요.벧전 1:23절도 그렇게 말해요."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시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이 썩지 아니할 씨가 뭐냐면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 바울도 마찬가지여요.골로새서 1:5-6절에서 복음을 또는 하나님의 말슴을 씨로 말하는데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이 복음이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말로 부터 너희 주에서와 같이 또 온 천하에서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이 복음이 우리 마음 가운데 떨어진 씨로서 열매를 맺어 자란다. 이렇게 말해요.
그래서 예수의 사도들이 예수의 비유의 말씀의 가르침을 잘 받아 가지고 복음이라는 것을 씨로 비유를 해서 이 복음이 각 사람의 심장에 떨어져서 그 심장에서 이 말씀이 점점 싹터서 자라서 사람들을 변화시켜 가지고 그 변화시킴으로 수확을 가진다는 말이어요.열매는 무엇이냐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지난번에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우리가 어떻게 생강읗 해야된다고 그랬어요? 포괄적으로 생각을 해야된다고 그랬지요.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를 온전케 하는 것 그렇게 구원을 생각해야된다고 그랬지요.그래서 이 복음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에 올바로 떨어져서 싹이 트면 여기 이 비유대로 하면 좋은 땅에 떨어져서 30배 60배 100배로 결실을 하는데 이 결실이 뭐냐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구체적인 표현들이어요.
그래서 그것이 지난번에 실제적인 건강으로도 표현이 되고 정치적 자유로도 표현이 되고 관계의 온전함,올바른 관계 사랑으로도 표현이 되고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온전케함으로 표현이 된다는 말이어요.그렇게 해서 죄악과 죽음의 세력 고난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구원이 구체적으로 실현이되게 한다. 이 말이어요.
지금 유대인들이 어떻게 천지개벽하는 그런 갑작스런 한 번에 천지개벽하는 변화를 요구하고 또는 욜혈당의 성전 같은 전쟁을 통해서 개 혁명을 통해서 정권이 바귀고 제도가 개선이 되고 하면 자유와 정의와 평화가 완전해 지는 그런 하나님 나라가 올 것으로 생각하는데 예수는 그것이 아니고 자기가 가져오는 하나님 나라는 우리 마음 속에 뿌려진 씨 같다.또 아까 이야기한대로 예수의 사도들도 처음에는 유대인들 같이 하나님 나라를 생각했으나 내가 예를 든바와 같이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서 과연 예수가 가져오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은 우리 마음 속에 떨어진 씨 같다.그래서 그것이 우리 마음 속에서 점점 싹이 터서 자라서 열매를 맺어야 된다.그러니까 우리의 마음 속에서 부터 우리의 동기와 감정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태도를 결정짓은 하나님 라에 대한 신앙과 불신앙의 태도가 어디서 결국 결정지어져요? 우리 마음 속에서 우리 심장에서.이웃에 대한 사랑과 증오가 우리 마음 속에서 결정지어져요.
우리 마음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주권이 작용을 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상을 숭배하고 자기를 신뢰하고 암몬을 숭배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빋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을 순종케 하고 이런 힘으로 바로 이런 일이 결정되는 우리 마음 속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이 작용을 해서 열매를 맺어요.그래서 가져오는 열매가 무엇이냐면 진정한 의미의 혁명,진정한 의미의 변화, 사람들 간에 정의가 더 확대되고 사람들 간에 평화가 더 확대되고 자유가 확대되고 지난번에 제가 여러번 설명을 했지요.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이와 같은 자유와 정의와 평화가 확대될 뿐아니라 인간과 물질 사이에도 올바른 관계가 성립이 되어서 돈 때문에 죽이고 죽고 죽는 일도 없으려니와 돈 때문에 건강을 헤쳐가지고 죽는 일도 없으려니와 돈 때문에 환경을 훼손하고 오염을 일으켜서 우리 건강을 훼손한 일도 없으려니와 그래서 우리와 물질과의 관계에서도 올바른 관계로 회복이 되어서 우리 삶 전체가 온전해짐.그것이 예수가 가져오는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구원의 실현이어요.
그것이 어떻게 커진다고요? 30배 60배 100배로 커진다. 이 말이어요.아마 예수는 이 말씀 이 씨의 비유를 할때 예레미야서 31:33절을 염두해 두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예레미야는 첫 언약의 실패로 말미암아 첫 언약에 대한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곧 다윗왕조가 완전히 파괴될 것이며 유대민족 전체가 바벨로니아에 포로로 잡혀 가서 노예생활을 할 것을 지금 목전에 두고 무엇을 예언합니까? 새언약을 예언하지요.하나님께서 새언약을 세운다.그런데 새언약은 하나님게서 어디에 슨다고요? 사람들의 심장속에 쓴다고요.그래서 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내면에서 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내면에서 부터 드러나게 한다.그렇게 예언을 했잖아요.
그러니까 아마 예수께서는 제대로 빠구고 무슨 물리적으로 다윗왕조를 재건하고 또는 로마의 착취자들을 다 몰아내고 이렇게 한다고 해서 이 땅에 진정한 자유와 평화 그리고 우리 삶을 온존케 하는 구원이 이른다고 보지 않은 것 같아요.그 진정한 구원은 어디서 오느냐? 우리 심장의 변화에서 온다.그러니가 자기의 하나님 나라운동은 주로 무엇을 하느냐? 말씀으로 해요.칼로 군대를 동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한다.말씀으로 하니까 설득하는 것이지요.그것을 그림으로 말하면 말씀을 우리 심장 속에 심는 것이어요.왜 심장 속에 심어요? 아까 이야기한 대로 심장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불신앙이 결판지어지는 곳이고 이웃에 대한 사랑과 증오가 결판이 지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그 심장에 하나님이 주이심을 하나님이 왕이심을 인식시켜주어요.그림으로 말하면 거기다가 세겨요.
예레미야 선지자가 31장의 말로하면 곧 심장에 하나님이 왕이심을 새겨요.그래서 오로지 하나님께만 의지하고 하나니만 순종하도록 그렇게 새긴다.그것만이 결국 한 사람을 변화시키고 그랬을때에 그 사람을 통해서 그 사람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총체적인 의미로 우리 삶을 온존케 하는 그 구원이 실현이 되어요.자유가 더 발생하고 정의가 더 성립이되고 평화가 더 확대되고 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그 말이어요.그래서 이 씨의 비유들이 복음의 말씀을 씨로 비유하는 것과 이 씨가 우리 심장에 떨어진다고 하는 말씀의 중요성이 여기 있고 예수께서 자기 하나님 나라운동을 당시 사람들이 기대했던 무슨 천지개벽이나 정치적 총칼로 이루는 것으로 보지 않고 이렇게 미미한 그 씨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먼저 염두해 두어야 겠어요.
이 씨의 비유를 말할때는 우선 사람들이 맨 먼저 네가지 종류의 시가 있는데 우리가 어디에 속하느냐? 이것에만 자꾸 관심을 가지게 되어 가지고 제가 씨의 의미 전체에 대해서 좀 더 길게 서론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께서 씨의 비유를 그렇게 하는 이유를 이제 설명했다면 그러면 그 다음 중요한 것은 물론 씨가ㅡ떨어지는 밭의 네 종류 예수의 복음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반응하는 네 가지의 다양한 반응들 이것이 그 다음으로 중요하지요.
자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알아요.하나는 길위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사단이 그 씨를 나꿔채버렸고 그 복음의 시가 그 사람의 심장에 침투하기 전에 나꿔채버렸어요.그래서 사람에게 전혀 영향을 못 미쳐요. 또 하나는 더러는 흙이 앫은 돌 밭에 떨어지매 이는 자갈 밭이란 말이 아니고 조그마한 자갈들이 많은 그런 말이 아니고 바위위에 얇은 층이 있는데 거기에 떨어져서 싹이 곧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어져서 말랐고 깊이 뿌리박지 못한 말씀 그래서 우리 심장의 내면에 우리의 감정과 의지와 사고의 원천까지 파고 들지 못함을 말한다.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기운을 막으매 결실치 못하고 다른 많은 세상의 관심들 또는 세상의 매력들 도는 많은 세상의 사상들 이런 것들이 이 시가 깊이 우리의 인격전체를 복음이 우리인격 전체에 영향을 주는 것은 많은데 그러면 시간은 갔습니다만 한 번 생각해 봅시다.우리가 아가 이 말씀을 말할때에는 예수의 말슴에 매력을 느꼈어요.말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말씀에 매력을 느껴서 많이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한 비유라고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했다고 보아야되요.여러분들 각자가 지금 이 비유에 의하면 어느 밭에 해당 되는 어떠 밭 지금 교회에서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요.예수의 하나님 나라의말씀이 복음이 교회에서 주일마다 선포가 되요.우리 각자는 어떻게 우리가 반응을 하고 있습니까? 한 번 생각해 봅시다.아마 이렇게 될 수가 있어요.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자기가 꼭 여기 지금 길위에 떨어진 씨 하나님 말씀이 자기에게 선포되어도 한 번도 그 말씀을 깊이 받아들이지 않고 말씀을 깊이 이해할려고 하지 않고 정말 자기의 심장에서 하나님에 대한 의지와 순종을 결단하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하겠다는 결단을 하고 자기의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의식적으로 내가 이 길을 선택하는 것은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이고 저 길을 선택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주 비판적으로 의식하고 그 순간에 내가 하나님게 순종하고 하나님게 의지하고 순종해야 되겠다고 결단하는 것이 한 번도 없는 사람.그것이 길위에 떨어진 것.한 번도 자기의 사고와 의지 감정이 결단되는 그 내면에서 이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의식하고 자기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가치판단하고 윤리적 선택을 해야 할때에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 방향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내 힘으로 나의 이익을 위해서 살겠다고 하는 이 방향으로 갈 것인가 한 번도 생각을 안 했음.자기 삶에 하나님이 주이시다는 사실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아무 영향을 주지 않아요.생각을 안해요.교회에 와서 찬송을 부르지만 설교는 듣지만 자기 사업에서 자기 이웃과의 관계에서 직장의 동료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주이시다.하나님이 당신에게 지금 무엇을 요구한다고 하는 것이 한 번도 자기 마음 속에 들어와 있지 않은 것이어요.이런 것이 길위에 떨어진 것입니다.
또 여기 지금 둘째는 돌위에 떨어져 있는 것,이런 것 아마 여러분들이 이런 방향으로 설교를 많이 들었을 거여요.이 하나님의 복음이 처음에 선포되었을 때에 그 복음에 아주 정열적으로 반응을 하다가 하나님의 말슴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해 가지고 이 성경의 말씀의 진리가 그 사람의 가치관과 인생관 세계관 이런 것에 대한 총체적인 변화를 못 가져오고 아주 피상적인 것 예수믿고 구원을 받았다.좋다.예수믿으면 이 세상적으로 건강하고 저기 술담배 안하니까 정신이 올바르고 이웃과도 관계가 좋아지고 부부관계에도 관계가 좋아지고 그러니까 축복을 받는다. 이런 정도로만 생각을 한다. 그러나 예수믿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이심 하나님의 왕되심을 믿기 때문에 아까 이야기한대로 구체적인 선택의 갈림길에서 하나님 도는 예수를 주로 의지하고 순종하면 이 세상적으로 어떻게 되어요? 많은 손해를 볼 수 밖에 없을 수가 있다고요.그런 상황에서는 아니 예수 믿는 것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예수믿는 것과 지금 나의 윤리적인 선택에서 예수믿는 대로 하나님을 왕으로 믿는대로 살면 많은 손해를 가져올 수 있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렇게 깊이 생각을 안하는 거여요.
그래서 조금 더 깊이 그 쪽으로 들어가라고 누가 자극을 주고 목사가 설교를 해서 당신들이 일관되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될 것입니다.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일관되게 순종하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그래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가 주이시고 하나님이 주이시다는 것을 가치판단으로 윤리적인 선택으로 고백하십시요하면 말씀이 자꾸 깊이 들어달려고 하면 자꾸 손해를 보는 것이 두려워져요.그래서 예수믿음을 그 신앙이 성장을 하지 않던가 아니면 아예 신앙에 등을 돌리든가 하는 경우이지요.
세번쩨 이야기는 시간이 없으니까 안하겠습니다만 우리가 어떤 사람은 첫번째 같은 경우가 많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두번째 경우가 많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세번째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그러나 어떤 때는 세번째 같고 어떤 때는 네번째일수도 있고 이렇게 신앙이 왔다 갔다 할 수도 있습니다.지금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가 불신앙 이웃에 대한 사랑과 증오가 결판이 나는 그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가 굳건히 이루어 지도록 해야한다.그것이어요.우리가 각자 우리의 삶을 한 번 되돌아 봅시다.
우리가 첫번째 씨 같이 행동을 하든가 두번째 씨같이 세번쩨 씨같이 행동을 하든가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 심장에서 말씀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왕되;심을 고백하고 그에 의존해서 그에 순종하면 우리를 통해서 많은 자유와 더 많은 정의와 더 많은 평화 그리고 더 많은 건강 더 많은 풍요 종말에 완성이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현재적인 표현이 더 구체화 될 것이고 우리가 아예 하나님의 말슴이 우리 가운데 선포되지만 전혀 그 말씀이 우리의 그 느끼고 사고하고 의지하는 심장의 영역에서 하나님이 주이시다는 말이 전혀 의미가 없으면 구체적으로 이웃을 대하는데 있어서 이웃에 대한 태도의 결정에 있어서 상거래의 관행에 있어서 자기 직업 생업을 어떻게 함에 있어서 그 구체적인 삶의 장에서 예수가 주이시다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으면 길위에 떨어진 시같아요.
또는 예수가 주이시다는 것이 깊이 우리로하여금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가 주이시다는 것 그에게만 의지하고 순종해야 된다는 것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깊이 있게 영향을 주지 않으면 바위위에 떨어짐 또는 세상에 대한 각정 ㅅ[상에 많은 예수가 주이시다는 것과 경쟁을 하는 것에 관심이 팔려가지고 진짜 예수가 주이시냐? 진짜 그에게 의지하고 순종하면 정말 혹시 남에게는 잘될지 몰라도 나는 굉장히 손해를 보지 않나.이런 걱정 속에서 예수가 주도심에 대해서 의지하고 순종을 잘 못하면 가시덤불에 떨어진 시같아요.
그러지 말고 우리 심장에 하나님 나라의 시를 받아 가지고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항상 가치판단하고 윤리적인 선택을 할때마다 아주 의식적으로 의식을 해야되어요.우리 심장의 내면에서 부터 그래서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겠다는 결단을 하고 순종을 하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말이지요.


하나님 나라의 비유(3)
하나님 나라의 성장에 관한 비유들
마가복음4:21-32,마태복음13:33

본문 말씀은 앞에 두 그러니까 10-12절가지는 제자들이 예수에게 앞에서 했던 씨뿌리는 자의 비유 또는 씨의 비유 아마 정확히는 씨와 밭의 비유 하는 것이 아마 제일 정확하겠습니다만 씨와 밭의 비유에 대해서 묻는 것에 대해서 답하는 이야기로 되어 있고 그 다음 13-20절 가지는 바로 그 시와 밭의 비유에 대한 예수의 해석이고 그 다음에는 또 두개의 비유들 등불의 비유와 헤아림 받음.그러니가 곡식을 되는 됫박의 비유 그런데 우리 번역에 지금 헤아림 너희가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림은 아마 우리 번역으로 정확히 하자면 너희가 헤아리는 그 됫박으로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그렇게 됫박의 비유여요.
그래서 오늘 공부하고자 하는 본문에는 끝에 등불의 비유와 돗박의 비유가 있는데 앞에는 씨와 밭의 비유와 연결해서 예수와 제자들과의 대화가 있고 질문이 있고 답이 있고 그렇게 되어 있는데 지금 이 등불과 됫박의 비유도 전부 앞의 씨와 밭의 비유와 연결되어 있어요.
그 다음에 또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가 있고 그 다음에 겨자씨의 비유가 있고 이렇게 계속해서 씨의 비유로 지난번에 제가 한꺼번에 설명한대로 씨들의 비유 도는 씨와 밭의 비유로 연결되어 나타나요.
4장의 많은 씨의 비유의 근본의미는 예)수와 더불어 이 세상에 이미도래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다.하나님의 나라가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대로 엄청난 천지개벽을 통한 또는 무슨 이 세상이 완전히 사라지고 새로운 창조,새하늘과 새땅의 창조로 일어나지도 않고 또 열혈당원이 생각하는대로 엄청난 정치적인 혁명 또는 군사적인 무슨 전쟁을 통해서 일어나지도 않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운동은 갈릴리 어부들 몇명 여자들 몇명 데리고 다니면서 주로 설교로 말씀으로 하는 운동이어서 자연히 그것이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엉뚱하게 보여요.너무나 자기들이 지금까지 들어왔던 종말에 메시야가 임하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면 새하늘과 새땅이 임할 것으로 생각했다거나 아니면 최소한도로 출애굽의 재현정도로 최소한도로 다윗왕조의 재건정도로 생각해서 최소한도로 로마 통치로 부터 좀 어떻게 해방이 되고 먹을 것이 풍요해 지고 민족적 반역자들이 좀 척결이 되고 궁핍한 사람들이나 잘사는 사람들이나 좀 평등하게 잘사는 사회가 이루어지고 이런 것일 줄 알았었는데 아 예수의 하나님 나라운동에 그런 것이 나타나지 않을 것 같으니까 아마 거기에 대해서 문의가 생겼겠지요.
지난번에 본 바와 같이 심지어 예수를 메시야로 선포하고 예수와 더불어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다고 까지 한 세례요한도 예수의 하나님 나라운동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고 예수에게 실망하는 것을 배경으로 보았어요.
거기 예수께서 지난 번에 본 바와 같이 네 종류의 밭들에 대한 비유를 한 것을 우리가 보았어요.그 나머지 뒤다라오는 씨들의 비유에 대해서 서론을 했어요.그런데 그 비유를 하니까 제자들이 이제 예수게 물어요.10절에 예수께서 홀로 계실때 그러니까 앞의 4장 1절에 엄청나게 많은 군중이 예수를 지금 따랐는데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호기심을 가지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어서 예수게서 밟히지 않기 위해서 할 수 없이 배를 띄우고 배 위에서 육지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지금 이 비유로 설교했는데 이제 여기 10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제 홀로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설교를 마치니까 아마 어쩌면 대다수가 이제 돌아갔겠지요.그러니까 거기에 누가 남았어요.예수와 함께 두부류의 사람들이 남았어요.하나는 열두제자들 또 한 부류는 그들 예수 주위에 있는 사람들,우리번역에는 그것이 확실히 드러나지 않는데 이것을 두 부류의 사람들을 마가는 일부러 구분하고 있어요.12제자들과 도 예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번역해야 합니다.
12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3장 14절에 방금 마가는 이 이야기 조금 전에 예수께서 열둘을 왜 뽑았다고요? 4절 한 번 보시겠습니까?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오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열둘을 뽑은 이유가 두가지여요. 하나는 자기와 함께 있도록 자기와 함께 있는 것을 주로 무엇을 의미해요? 자기로 부터 배우는 제자도의 첫 요건이 예수와 함께 하면서 그로부터 배우는 일이지요.그 다음 두번재 목적은 사명 파송하는 것,파송한다는 말에서 무슨 말이 나왔어요? 사도란 말이 나왔어요. 파송의 목적은 두 가지여요.하나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이고 그런데 지난 번 우리가 하나님 나라 선포에서 누누히 강조했지만 말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과 귀신을 내어쫓는다는 말은 큰 의미로 뭐라고요? 치유한다는 말이지요.치유한다는 말을 한마디로 말해서 귀신을 내어좇는다고 그러는데 말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과 치유한다는 항상 같이 가는 것이라고 그랬어요.그래서 그것은 두 가지가 아니고 사실은 하나여요.치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말로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구원의 힘을 시위함이라고 그랬지요.그러니가 빈말로 선포하는 것이 아니어요.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여기 임했다고 빈말로 하는 것이 아니어요.
우리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임하는 것을 치유로 항상 시위한다고요.그러니까 그것이 귀신을 쫓아내는 형태도 취하기도 하고 병자를 고쳐내는 형태를 취하기도 하고 삭개오 같은 사람을 온전케하는 형태를 취하기도 하고 죄인들을 회개시켜서 그와 이웃과 그와 가정에서 관계가 올바르게 하고 그가 제정신으로 되게하는 탕자가 제정신이 들게 하는 것도 치유여요.그러니까 그런 모든 의미에서 우리 인생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온전케함,그것을 위해서 열둘을 세웠어요.
제일 먼저 열둘의 특징이 뭐여요? 예수와 함께 함,예수와 가장 근접한 예수와 항상 같이 있는 자들이어요.자 그래서 열둘을 그 다음에는 또 누가 나옵니까? 여기 우리 번역에는 열두제자들이라는 말이 있는데 웜문에는 제자들이 없어요.그냥 열둘이어요.왜? 열둘이 아니어요.아예 하나의 특수언어여요.왜? 예수께서 많은 제자들 중 12을 특별히 자기와 함께 하고 자기로부터 파송을 받아서 자기의 복음 선포와 자기의 하나님 나라 복음선포와 자기의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대행하도록 사도로 삼은 것은 이스라엘의 12지파에 상응하는 열둘의 상징성을 위해서 그런다고 그랬죠.그래서 새이스라엘 종말에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새이스라엘의 기둥들로 삼을려고 옛 이스라엘의 1쪽장들에 상응하는 종말에 예수게서 샤롭게 창조하는 새이스라엘 새 하나님의 백성의 조상들에 해당한다고 할까 아니면 기둥들에 해당한다고 할까 나중에 이들이 초대교회에서 기둥들이라고 불러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바울도 이들을 뭐라고 불러요? "기둥들이다." 그래요.새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의 건물로 보고 하나님의 성전으로 보고 성전의 기둥들이라고 열둘을 그래요.그래서 열둘이 아주 전문언어여요.
우리가 성경공부를 통해서 누차 본 고전 15장 5절에도 베드로에게도 나타나고 열둘에게도 나타나고 거기도 제자란 말이 없어요.그냥 열둘에게 나타나고 실제는 열둘입니까? 하나가 빠져 가지고 유다가 바져 가지고 열 하나 밖에 없죠.그런데도 계속해서 열둘이라는 말을 쓴다고요.아예 전문언어여요.
그래서 아주 특별히 새 이스라엘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의 새 조상들 새 기둥들로 삼았다는 의미로 열둘이라는 전문언어가 생겼는데 그들이 있고 그들 말고 또 있어요. 또 누가? 주위에 있는 자들.정확히 문자적으로 번역을 하면 예수 주위에 있는 자들.이들은 누구냐? 이들은 열둘과는 다른 또 하나의 예수를 추종하는 무리들이어요.거기에 대해서는 어디에 나왔어요? 바로 막 3장 31-35절에 나왔지요.거기 한 번 지난 번에 읽었는데 읽겟습니다. "그때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형재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여기 지금 누구와 예수가 대화를 하고 있어요? 예수 주위에 앉은자들.이들이 누구여요? 우선 저 밖에 있는 자들과 구분이 되지요.저 밖에 있는 자들 중에는 누구도 속해요? 자기 어머니와 동생들도 속해요.그들은 예수가 미쳤다고 생각을 해서 자기 가정에서 거짓 선지자가 나오면 큰 일이 나니까 신명기법대로 잡아다가 어떻게 좀 조치를 할려고 잡으러 온 것이어요.그들은 누구망을 듣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즉 예수의 말을 잘 안 듣고 예수를 적대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러니까 지금 예수 주위에 둘러 앉은 자들이란 말이 3장에 몇 번 나와요? 거기에 3:31절 무리가 예수를 둘어 앉았더라.34절 예수께서 바로 그들을 보고 자기 주위에 둘어 앉은 자들을 보고 그들에게 뭐라고 그래요? 당신들이 내 가족이라 내 모친이요 내 동생이라.왜? 당신들이 하나님의 듯을 행하는 사람들이니까.그러니까 그들이 예수 주위에 왜 둘러앉았어요? 예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다.그래서 예수로 부터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려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배울려고 해요.
그래서 아까 4장 1절에 지금 배경이 이러해요.4장 1절에 보면 굉장한 무리들이 이렇게 인산인해를 이루어서 예수께서 배 위에서 말씀하니까 이들이 다 흩어진 뒤에 누구만 남았어요? 예수께서 앉아 있고 거기에 열둘 제자가 있고 거기에 누가 있어요? 예수 주위에 앉은 자들.그렇게 지금 펴현하는데 예수의 말슴을 즐겨 듣고 경청해서 예수의 말씀을 들어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하나님의 뜻을 헤아린데로 실천하려고 하는 자들,여기 35절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들,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들,이들이 예수 주위에 둘러앉은 자들.
그러니까 열둘이 예수께서 새롭게 창조한 하나님의 백성의 조상들이라고 할까 기둥들이고 또 거기에 더불어 누가 있어요? 또 함께 예수께서 자기 가족이라고 자기 모친이요 자기 자매요 형제라고 선언하는 예수의 가족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있어요.이들이 지금 예수에게 방금들은 비유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 거여요.왜 질문을 하겠어요?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라고요? 말씀을 듣고 경청하고 왜 경청했겠어요? 예수를 신뢰하니까 그러지요.과연 진정한 선지자이다.진정한 메시야이다.예수야말로 정말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시는 분이다.그분이야말로 정말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계시하는 분이다.그러니까 예수의 말씀을 즐겨듣는 사람들.그래서 예수로 부터 배움을 받아서 꼭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려고 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지금 비유를 들었는데 그 뜻을 조금 명확히 알아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려고 물은 것이어요.그 비유에 대해서.
그래서 예수께서 대답을 하되 두가지로 대답을 했어요.하나는 비유의 의미와 둘째는 왜 예수께서 비유로 말하는가? 하는 목적 의도 이렇게 두가지로 예수께서 대답을 해요.우선 거기보면 11절은 주로 이비유의 의미에 대한 정의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관한 것이다.이 비유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림에 관한 것인데 그것이 비밀스러운 거여요.그래서 비유로 말할 수 밖에 없어요.그런데 11절 그것이 너희들에게는 주어졌으나 그 밖에 있는 저 많은 군중들 그들은 예수의 말을 들어도 3:35절에 말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아니어요.예수의 말에서 하나님의 듯을 헤아릴줄 알고 헤아릴려고 노력을 하고 그것을 실천할려는 것이 아니고 그냥 한 번 듣고 말고 하는 사람들이어요.그 사람들이 여기 의인들이지요.그들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한다.
그런데 그 표현이 마가가 일부러 쓴 것이어요.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주어졌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이 비유로 되어 있다.그런 말이어요.여기에 너희에게는 모든 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주어졌다 하는 말에는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자기의 진리를 특별히 나타내주심.그래서 그들의 특권,하나님의 그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이런 것들이 그 한마디에 비밀이 주어졌다는 말에 담겨 있어요.
그러나 외인들에게는 그 특권이 전혀 주어지지 않았음,그 외인들에게는 모든 것이 비밀로 이어지는데 왜 그러면 비유로 외인들에게는 주어지느냐? 그것은 12절에 이사야서 8장 16절을 예수께서 인용을 해서 말을 해요."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께서 지금 자기가 비유로 말하는 목적 의도가 무엇이라고요? 내부 사람들에게는 그러니까 자기 말을 듣고 그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뢰하고 자기의 가르침이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라고 신뢰하고 그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려고 하는 사람 그리고 그 헤아린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이 그것이 비밀스러운 것인데 그것이 환하게 밝혀진다고요.
그런데 밖의 사람들에게는 도리어 예수께서 비유로 말함으로서 그들을 못 알아듣게 만든다고요.못알아듣게 하는 이유는 뭐라고요? 그들이 회개하여 혹시 믿어 죄용서를 받는 구원을 얻을까 해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여러분들 이 말을 읽을 때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믿으라.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터득해서 예수를 믿고 죄용서를 받고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해야될텐데 지금 예수가 뭐라고 그랬어요? 비유로 일부러 비유로 말한 것은 비유가 무엇입니가? 알쏭달쏭하게 말하는 거여요.누구는 그 말을 알아 들어요?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은 알아들어요.그들이 누구여요? 예수의 말에 경청을 할려고 하는 예수 주위에 모여드는 그래서 예수로 부터 가르침을 받을려고 노력하는 이들은 알아요.밖에 있는 자들은 일부러 못 알아듣도록 하나님게서 한다는 말이어요.
그런데 이것은 지금 마가복음 여기에만 기록된 것이 아니고 지금 마가복음 여기에 예수께서 어디를 인용한다고요? 이사야서를 인용하고 있다고요.구약에도 똑같은 원칙이 있는 거여요.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데 그것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어 구언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인데 동시에 또 무슨 말도 하느냐면 이렇게 말하는 거여요.이사야의 예언이 선포되면 선포될 수록 사람들의 눈이 무거워지고 귀가 어두워지고 심장이 더 완악해지고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심장이 회개함이 없어서 멸망받도록 하기 위함이다.구약의 이사야가 하는 말을 지금 예수가 인용하고 있어요.
요한복음에도 도처에 그런 말씀이 나오지요.3장에도 5장에도 그런 말씀이 나오고 5장 28절 부터보면 예수의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에 사람들의 반응이 항상 갈라져요.그 분을 세상의 빛으로 암흑의 세상에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밝혀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오셨어요.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져요? 한 무리는 암흑의 세상에 빛으로 오신 내가 세상의 빛이라(8:12)는 예수님, 이 말은 뭐라고 그랬지요?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말이지요.빛은 무엇을 가능케한다는 말이지요? 지식을.그러니까 예수는 ㅎ나님의 빛이어요.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능하게 해요.하나님을 아는 것이 생명이어요.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구약적인 의미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음,창조주와 하나됨,예수게서는 하나님을 계시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도록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는데 항상 무슨 일이 벌어져요?
어떤 사람들은 소수는 빛에 나왔어요.여기 3장 예수게서 니고데모와의 대화속에서도 그렇지요.빛으로 나온다고요.그래서 예수의 가르침이 정말 하나님의 계시이다는 것을 깨닫고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영생을 얻어요.반면에 어떤 형상이 벌어져요? 이 빛으로 부터 도망을 가는 사람들이 있어요.빛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예수를 정죄하고 거짓 선지자라고 하고 죄인이라고 하고 그런 다수가 있어요.예수의 계시를 거부하는 사람들.그래서 이 사람들은 자기 죄가운데 머무른다.요한복음은 그러지요.요한복음에는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다고요? 어떤 사람은 빛 가운데 나아오고 어떤 사람은 빛을 거부하고 가기에 등을 돌리고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다고요? 3장에는 뭐라고 그랬어요? 예수의 빛 가운데 나아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어요.선을 행하는 자들이어요.
요한복음 3장 16절 부터 읽어 봅시다."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내어 보내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심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을 사랑해서 세상으로 하여금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주시기 위해서 그런데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함으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나타내려 하심이라."
여기 요한복음 3장 이 말씀과 지금 우리가 묵상하는 마가복음 이 말씀과 똑 같잖아요.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의 계시를 터득하고 어떤 사람들은 받아요.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려고 하고 그 뜻을 행하려고 하는 자들 거기 3장 35절 그들을 예수께서 뭐라고 선언해요? 나의 부모요 나의 형제요 나의 자매다.반며네 그 밖에 있는 자들은 들어도 하나도 못 알아들어요.요한복음도 마찬가지여요.누가 진리로 나와요? 선을 행하는 자들,선을 행하는 자들이 누구라고요? 하나님 안에서 행하는 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자들은 예수게로 와요.그래서 예수가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더 환한 계시 빛을 보고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서 생명을 얻게 되어요.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예수게로 안 나온다고요.자기 행위가 악한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그래서 악을 행하는 자들.지금 여기 마가복음에 이야기를 한다면 특별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그렇게 관심을 많이 갖지 않고 예수의 말슴이 곧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계시라는 신뢰가 없고 예수에 대해서 호기심이 있을 지는 모르나 자기들의 선입관을 예수가 충족시키나 안시키나 자기들의 구원에 대한 선입관이 있겠지요.이런 것이 구원이다.
가령 요새 말로하면 건강 시험에 잘 합격하게 하고 부자되게 하고 사업이 잘되게 하는 것이 복음이고 그것이 예수 믿으면 일어난다 하는 정도의 구원에 대한 자기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정말 예수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선입관을 충족시키나 안시키나 내가 좀 교회을 다녀 보겠는데 정말 교회를 다니면 집안에 우환도 없고 사업도 잘되고 애들 학교도 쑥쑥 인류대학에 합격하고 그러면 내가 계속해서 교회에 다니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전에 절에 가봤더니 시원치 않던데 교회에 가보았더니 교회도 시원치 않더라 하고 돌아설 사람들이다.이런 사람들이 어쩐다고요? 모든 것이 비유로 되어요.거기서 한마디도 제대로 안 들어가는 거여요.
그들은 요한복음의 언어로 말하면 자기들 죄 가운데 머무른다 암흑 가운데 머무른다.그러니가 이런 것을 보통 요한복음적인 예정론이라 그래요.사실은 이것은 조금 재미없는 말이어요.마가복음에도 있지요.이것이 일차적으로 인간들의 반응이어요.예수의 계시에 대한 반응에 의해서 자기 자신들이 판가름을 해요.
여기 예수의 복음이 선포되었어요.여러분들이 전도해 보면 아시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말귀를 곧 알아듣고 예수에게로 나아오고 예수를 믿고 어떤 사람은 끝까지 예수를 모르고 믿지 않아요.이런 판가름이 일어난다는 말이어요.그것을 궁극적으로 어떻게 해석을 해야되나? 일차적으로는 인간들 자신의 반응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예정했다고 보아야 한다.하나님게서 미리 판가름을 한 것이다.이들은 밖에 있는 자들이다.요한복음의 언어로 하면 아무개 자식들로 이들은 들어도 못 듣고 이사야의 언어로 하면 복음이 선포되고 하나님의 말슴의 계시가 선포되면 될 수록 그들의 눈은 더 무거워지고 귀는 더 어두워지고 심장은 더 굳어지고한다.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슴에 더 저항하게되는 현상이 우리 가운데 항상 있거든요.그것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하나?
여러분들 아까 황목사님 해밍웨이 이야기했습니다만 그 사람 좋은 믿음의 가정에서 났다고 그러지요.여러분들 스탈린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가? 스탈린이 아주 좋은 믿음의 가정에서 난 사람이어요.그래서 스탈린이 소년시절에 러시아 정교의 신부가 되는 신학교에 다녔어요.신학도여요.그 사람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이사야의 말대로 더 눈이 무거워지고 귀가 어두워지고 심장이 더 완악해진거여요.그래서 하나님의 말슴에 더 적대시해요.
여기 역사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셔서 어떤 자는 구원으로 나아오고 어던 자는 자기 어두움 가운데 죄 가운데 죽음 가운데 그냥 머무르도로 작정을 하셔서 그렇다.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다.그 말이어요.왜 그러는가? 그런 것은 우리가 설명하기가 어려워요.다만 여기에서 그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정함으로 이루어지니 인간들의 책임은 전혀없다.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 그렇지는 않아요.어던 자들은 예수께 나온다고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좋아하는 자들,그만큼 인간의 책임이어요.그러니까 여기에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예정이 아주 긴장을 이루면서 양쪽이 다 여기에 천명이 되어 있어요.
하여간 그래서 13절 부터 예수께서 이 안에 있는 사람들 내부자들,그러니까 예수의 계시가 하나님 나라의 계시라는 신뢰를 가지고 예수로 부터 하나님의 뜻을 더 배워서 그 뜻을 잘 행할려고 하는 올바른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들에게 비유를 설명을 해주어요.
그런데 그 설명을 하기전에 예수께서 무슨 말을 합니가?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데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너희가 이 비유를 아마 잘 이해를 못 한 모양인데 그러면 다른 비유들은 어떻게 이해하겠느냐? 이 말로서 여기 지금 앞에 한 시와 밭의 비유들이 예수의 비유들로 행해지는 가르침을 듣는 네가지 유형들에 관한 비유들이구나.그래서 학자들은 씨와 밭의 비유를 뭐라고 하야면 비유들에 관한 비유라 그래요.
예수의 가르침이 주로 비유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을 듣는 네가지 유형들에 관한 비유다 이 말이어요.여기서 씨와 밭의 비유라 이렇게 말한 이유는 씨는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 그런데 사람들의 다양한 유형을 어떻게 갈라요.시가 떨어진 밭의 종류에 따라 그 밭에서 내는 결과에 다라 사람들을 분류하거든요.그러니까 씨와 밭이 합해서 다양한 결과를 낳지요.씨와 밭이 분리될 수 없으니까 씨와 밭들의 비유라 그렇게 말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겠어요.
그래서 이제 해설을 하겠는데 그 해설은 참 우리에게 익숙해요.말씀이 길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하나님의 말씀이 길가에 뿌려진 씨를 밟는 것 같이 밟은 자들은 어떤 자들이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린 말씀을 빼앗는다고 그랬어요.사단이 즉시 온다고요.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길가라는 것에서 마음이 강퍅함도 아마 암시하겠어요.그런데 사단이 즉시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아버린다는 말이니까 무엇이 강조되어 있습니까? 말씀에 대한 반응이 아주 느린 것이어요.그래서 말씀이 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뿌리를 내릴 여유가 없어요.거기 말씀에 대한 반응이 아주 느린 사람이어요.
왜 느리겠느냐? 길 바닥 같이 마음이 닫아져 가지고 강퍅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요.하여간 말씀에 대한 반응이 느려요.말씀에 대한 반응이 느리고 지체되면 어쩐다고요? 사단이 와서 그 말씀을 빼앗아 버려요.그러니까 한 번 우리가 생각을 해 보세요.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거기에 대한 반응을 즉각 하든지 아니면 천천히 뜸들이고 충청도 사람같이 느릿 느릿 반응을 하면 어쩐다고요? 말씀을 가져가 버린다고요.그런 유형이 하나다.
둘째는 어쩐다고요? 돌 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이 사람들은 피상적인 사람들이지요.말슴이 선포되었을때 피상적으로 기쁨으로 받아요.그러나 깊이 뿌리내리지 못해요.그 사람 마음 갚은 곳에서 확신이 서지 않고 그 사람 인생관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그래서 이 복음의 진리가 항상 뿌리없이 떠 있는 것이어요.예수를 믿는다고 하나 그 믿는다는 말이 우리 생각하는 것, 우리 가치체계, 우리 이웃에 대한 태도, 우리 생업에 대한 태도, 우리 삶에 대한 자세, 이런 것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영향을 주어 가지고 하나의 확신과 복음의 진리됨이 복음의 생명주시는 힘을 우리 삶에 모든 면에서 지적으로 경험으로 체험해서 이 복음의 진리에 대해서 확신이 있어야 될텐데 그러지를 못해요.이제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나 그것이 우리 삶과 사고와 태도와 완전히 동 떨어졌어요,이런 것은 환란이나 핍박이 일어나면 금방 사라질 수 밖에 없다.그 복음의 진리가 우리 심장 깊숙히 뿌리 박혀서 우리 가치관을 변화시키고 우리 인생관을 변화시키고 우리 이웃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키고 그래서 이런 모든 면에서 복음의 진리됨이 정말 생명을 주고 기쁨을 주고 평안을 주고 자유를 주고 하는 것임을 지적으로 일관성있게 헤아려내고 체험으로 뒷밭침 할 수 있을 때에 환란이나 핍박이 와도 그 복음을 거부할 수 없겠지요.그렇지 못하면 환란이나 핍박이 오면 금방 넘어진다.
또 어떤이는 가시떨기에 뿌려놓은 자니 이는 열심으로ㅡ듣되 세상의 죄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슴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한자라.이 사람은 아마 여기 앞의 두 종류 보다는 조금 더 깊이 있는 사람이겠지요.생각이 깊고 그런데 아마 이 사람에게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 복음에 대한 복음은 하나님게서 우리를 사랑하심 그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다고 하는데 이것에 대한 신뢰 이것을 신뢰할 것이냐 아니면 눈에 보이는 가치 돈 맘몬 우상을 신뢰할 것이냐 결정적인 순간에 이 선택의 기로에 설때에 복음을 믿고 복음대로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고 하나님게 의지하고 순종하고 그래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나가는 큰 손해를 보고 죽게 생겼어요.반면에 한 건 잘하면 수십억 벌어서 나와 내 후손까지 좀 안전하고 잘 살아보겠다.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 그런 것은 맘몬이즘 우상숭배에서 오는 것이지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지 하나님만이 우리의 안전이시요 피난처시라고 우리 요새 남북긴장이 고조되면 고조될수록 우리에게 사실 이 진리밖에 더 있습니까? 우리의 반석이시요 피난처시라고 시편기자가 누누이 강조하는바 예수께서 우리에게 계속 가르쳐 주실려고 하는 바 맘몬의 우상숭배하지 말고 하나님게 의지하라고 가르쳐 주실려고 하는 바가 그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결정적인 이런 순간에 세상에서 나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는 방법을 택하는 그런 사람은 어쩐다고요? 이 많은 결실을 하지 못한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슴을 듣고 받아 한 씨는 지난 번에 세개의 시라고 그랬지요.앞의 세개의 시와 그 세개의 시가 떨어진 밭들은 다 열매가 뱔로 없어요.거기에 상응하는 세개의 씨만 즉 그 세개의 씨가 떨어진 세개의 좋은 밭들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하는 자여요.그런데 여기 결실이라는 것을 보통 사람들은 종말에 수확을 염두해 주고 예수가 말하는가? 그래서 믿음의 행위로 종말에 심판때에 하나님게서 인정해줌을 염두해 두고 말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그것 보다도 지금 현재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한다.그 말이어요.
씨의 비유들은 다 무엇에 관한 것이어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이제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이런 것으로 해서 그 의미가 더 확연해 질 것이지만 씨의 비유는 전부 예수와 더불어 이미 여기 온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관한 비유들이어요.그 하나님 나라가 점점 자람,그 하나님 나라가 점점 열매를 맺어감,그래서 30배 60배 100배 열매를 맺어간다는 말이 지금 현재 하나님 나라의 열매맺음이다.그것이 뭐여요? 그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구체화되어서 이렇게 30배 60배 100배로 나타나요.전에도 제가 비난 번에 하나님 나라 강의 하면서 이것을 누차 강조했지요.
사단이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신뢰하도록 네가 네 하나님이 되라.네가 너의 꾀로 너의 능력으로 너의 안전을 확보하고 너의 뜻을 실현하라.자신을 신뢰하라고 너의 하나님이 되라.그래서 탕자가 자기의 내재의 자원을 가지고 아버지로 부터 멀리 떠나버리면 어쩐다고요? 이 사람은 자기의 내재의 자원을 신뢰하고 그 자원으로 자기 안전과 행복을 확보할려고 한다.이런 사람들은 자신을 신뢰한 사람들은 항상 무엇에 빠져요? 맘몬에 대한 우상숭배에 빠진다.맘몬.자신을 신뢰하는데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주는 수단이 맘몬이어요.돈.그래서 우리가 사단의 사주를 받고 살면 사단의 나라 사단의 통치 속에서의 이런 삶은 자신의 우상숭배는 곧 맘몬우상숭배인데 그것은 삶의 원칙이 어떻게 된다고요? 착취가 된다고요.그래서 사람들간에도 항상 관계를 지배와 피지배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로 맺어요.뿐만 아니라 사람과 자연환경도 그래요. 이런 것은 항상 뭐가 난다고 그랬어요? 갈등이 있고 불의가 있고 고난이 있어요.
반면에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는 우리를 어떻게 통치를 해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맘몬우상숭배하지 않고 하나님으로 부터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얻을려고 하면 여기 자신을 신뢰하고 자신을 우상숭배하고 맘몬우상숭배하면 삶의 원칙이 착취여요.반면에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하면 삶의 원칙이 이웃 사랑.그러면 이것에 뭐가 일어나요? 하나님에 대한 의지가 많고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많아서 이웃사랑이 많이 실현이 되면 될수록 뭐가 일어납니까? 의가 일어나지요.불의 대신에 의,갈등 대신에 평화가 일어나요.이곳에는 뭐가 있어요? 자유가 있어요. 이것들이 하나님 나라의 구원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들입니다.이것이 우리의 삶을 온전케 하지요.
이것이 30배 60배 100배 된다.지금 예수가 재림 하실 때까지 완전히 일어나지는 않아요.그러나 우리가 지금 여기 열매맺지 못하는 시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어도 자꾸 이쪽으로 떨어지는 거여요.결국 열매가 없어요.좋은 밭에 떨어진 씨같은 사람들.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려는 사람들.그들이 바로 예수의 가족들이어요.그들에게 예수께서 더 하나남 나라의 비밀을 설명을 해주는데 그들이 그 말씀을 잘 받아서 행하면 행한다는 말은 하나님께 의지한다는 말이어요.전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한다.여기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예수의 가족이라고 그랬지요.그러니까 계속 행해가면 예수가 그르쳐주면 가르쳐준대로 더 많이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면 성경공부하면 할수록 하나님에 대해서 의지를 더 하면 성경공부 여러분들 예수 주위에 지금 앉아있는 분들이지요.
그러니까 오늘 같은 날 연휴때 경부선 타고 남쪽으로 안 내려가고 지금 여기 앉아 있잖아요.여러분들이 누구여요.4장 10절의 말로하면 누굽니까? 열둘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무엇입니까? 예수 주위에 앉은 자들이어요.그들은 3:35절 말대로하면 하나님의 듯대로 행할려고 하는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이들은 좋은 밭이어요.여러분들이 이 태도를 견지하면 여기서 성경공부를 하면 할수록 여기서 아침설교말씀이 복음이 설교를 통해서 선포되면 될수록 듣고 받아들이고 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더 의2비하고 순종하면 어떤 유혹을 뿌리치고 그러면 손해보고 죽을 것 같아 가지고 자꾸 움추러드는데 그것을 극복하고 정말 하나님에 대한 의지와 순종을 하면 그것이 점점 무엇으로 표현이 되어요.이웃사랑으로 표현이 되어요.그래서 남을 착취할려고 하는 순간에 남에게 자기 주장을 하고 자기 이익을 보려는 순간에 도리어 남에게 도움을 주고 이러면 우리 사회와 우리 이웃간의 일차적인 관계에서 우리 가족에서 우리의 이웃간에 사업장에서 모든 관계들이 의롭게 원만하게 되어요.그래서 그곳에 갈등이 아니라 평화가 있어요.
예수를 통해서 이미 온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나중에 종말에나 얻는 것이 아니어요.그때 완성을 받지요.하나님 나라의 구원은 우리가 죽어서나 얻는 것이 아니어요.그때 하나님 예수와 더불어 더 가까이 가지요.그것은 사실이어요.그러나 종말에 완성될 죽음을 통해서 예수에 더 가까이 얻을 그 구원이 지금 여기에 왔다는 거여요.지금 여기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어요. 어떻게? 우리 삶을 온전케 함으로 어떻게 ? 풍요롭게.30배 60배 100배 열매맺음이 뜻이어요.그러니가 여기 오늘 등불비유와 됫박의 비유는 다음주에 하겟습니다만 우리가 한 번 다음 주에 생각을 해보아야 할 것이 우리가 예수 주이에 앉아 있는 사람.예수의 말슴을 경청할려고 하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어요.좋은 밭들임에는 틀림이 없어요.그런데 날마다 하나님의 말슴을 듣는 태도가 과연 좋은 밭에 떨어진 씨와 같아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것이냐? 우리는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하나님 나라의 깨달음이 없어서 못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여러분들 깨달았으니까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우리 모두 우리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나를 신뢰함으로 해서 맘몬이즘에 빠지기 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해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구체적으로 우리를 통해서 더 확대되어 지도록 그렇게 노력을 해야 겟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유(4)
막4:21-32
확장되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들

오늘은 막4:21-32절 입니다."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그 다음에 마태복음 13:33절입니다."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누루과 같으니라"
자 오늘은 여러개의 비유들을 읽었어요.마가복음 순서를 따르면 곡식을 되는 됫박의 비유 하나하고 그 다음에 등경의 비유 하나하고 세 개의 씨의 비유 그 중에 첫째는 스스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이 비유는 마가복음에만 나와요.마태와 누구에는 안 나오고 .그 다음에 겨자씨의 비유가 나와요.겨자씨 비유와 함께 마태복음에는 13장 31-33절 겨자씨의 비유 33절은 누룩의 비유이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가 짝을 이루어요.그런데 마가복음에는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겨자씨의 비유,그 앞에 됫박의 비유와 등경의 비유가 있고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가 있고 겨자씨의 비유가 있어요.그 앞에는 무엇이 있어요? 씨와 밭의 비유가 있었고 그것의 해석이 있었고 마태와 누가복음에는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는 없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가 짝을 이루어서 나타나고 그 대신에 여기에는 누룩의 비유가 없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주로 우리가 마가복음 순서를 따라가되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다음에 보겠지만 하나의 짝을 이루는 비유여요.같이 다루기 위해서 잠깐 마태로 가는 거여요.그런데 이 됫박과 등경의 비유는 앞의 씨와 밭의 비유와 그것의 해석과 아주 직결되어 있어요.물론 이 비유들도 다 막 4:1-10절 까지의 씨와 밭의 비유와 직결이 되어 있어요.
그런데 마가복음 겨자씨의 비유 다음에 마가복음 순서로 하면 34절은 이제 비유가 끝나고 해석하고 다시 예수께서 떠나가는 그런 모습이 있는데 이 뒤에 우리가 다룰려고 하는 비유가 밀과 가라지 비유를 다룰 거여요.
마태복음 13장을 보시렵니까? 39절에 가라지의 비유 이런 것들이 또 나타나요.그런데 됫박의 비유와 등경의 비유는 앞의 예수의 씨와 밭의 비유와 연결이 되면서 또 밀과 가라지의 비유와도 연결이 되어 있어요.내용상 예수의 가르침 하나님 나라 가르침 복음을 듣고 알아듣는 사람들과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고 배격하는 사람들의 갈림에 대한 그래서 죄의 심판 때의 갈라짐에 관한 내용이어요.됫박과 등경의 비유는 마가의 순서로는 지금 오늘 이 시간에 다루어야할 것이나 조금 바꾸어서 나중에 밀과 가라지의 비유로 다음에 다루기로 하고 오늘은 이 세 개를 다루기로 해요.
자 그러면 오늘은 막 4:26-29절 까지의 겨자씨를 보면 이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고 가르치시고 아니 자기의 선포와 자기의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고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믿음을 유발시켜서 그들을 온전케함을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한 증거로 나타내는데 아 그러니까 예수의 말을 들으면 예수의 가르침대로 한다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다는데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가 임한 증거를 이렇게 병자가 병고라는 악으로 부터 해방이 됨,삭개오같은 사람이 온전해짐,이런 것을 증거로 내세우면서 이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여기 지금 나타나고 있지 않느냐 이렇게 증거로 내세우는데 다른 한편 이 세상의 악이 기승을 부리고 고난이 지금도 여전해요.그러니까 자연히 아니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가져왔다고 지금 주장을 하는데 하나님 나라가 어디 있느냐?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지요?
지난번에 씨의 비유 처음 시작할 때 그 배경으로 당시 묵시문학가들에 의하면 하나나님 나라가 마치 천지개벽을 통해서 새창조 타락한 옛창조가 완전히 파멸되고 모든 것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일시에 변할줄로 생각을 했는데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그러는데 뭐 그렇게 세상은 그대로 있다.모든 것이 천지개벽을 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일어난 것 같지도 않고 또는 당시 열혈당원들은 정치적인 혁명으로 생각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상적인 다윗왕조의 재건으로 생각을 해서 이 로마의 악독한 통치자들을 몰아내고 그들과 결탁한 사두개 제사장 착취자들을 다 몰아내고 사회정의가 다시 일어나며 정치적인 자유가 확대되며 물질적인 풍요가 일어날줄 알았는데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그러는데 그런 것 같지가 않아요.
우선 로마제[국의 세력은 지금도 엄연한 제국주의 세력으로 유지되고 있고 저 못된 사두개 제사장들은 계속해서 백성을 억누르고 뭐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어요.그래서 자연히 하나님 나라가 어디 있는가? 예수께서 가져온 하나님 나라가 어디 있는가? 이런 질문이 나올수 있지요.그런 질문에 대한 답이어요.이 저절로 자란 씨의 비유가 답이어요.겨자씨의비유도 누룩의 비유도 그것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어요.이 답을 자세히 봄으로서 우리는 예수께서 가져온 하나님 나라 또는 역사속에 침투한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좀 더 정확하게 알게 되요.
우리 가운데도 그런 질문이 얼마든지 있지요? 아니 메시야가 오셨다는데 메시야가 오신지 2000년이나 지났는데 그 메시야가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하나님의 통치 죄악과 죽음을 다스리는 사단의 통치를 꺽고 의와 생명으로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선언한지가 2천년이나 지났는데 하나님 나라가 어디 있는가? 세상은 옛날과 똑같고 끔찍한 고난은 옛날과 똑같은데 도대체 하나님 나라가 어디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다 헛것인가?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있어요.오늘 같은 날 특히 더할 수가 있어요.그런 질문이 우리에게 나로 수가 있어요.그것에 대한 답이어요.이 세 개의 비유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가 답이어요.
자 여기보면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를 한 번 보시겠습니다.4장 26-29절"또 가라사대 .......이르렀음이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가져온 하나님 나라가 마치 논부가 씨를 뿌리는 것과 같은 것으로 지금 설명을 하고 있는 거여요.농부가 시를 뿌린뒤에 여기 지금 비교적 활동을 안 하지요.밤낮 자고 깨고 하는 일 밖에 하는 일이 없지요.농부는 뭐하는 거여요? 기다리는 거여요.언제까지? 곡식이 다 익어서 추수할 때까지 기다리는 거여요.이 농부가 그 과정을 좀 더 빨리 하기 위해서 뭐 거기 개입하고 서두르고 그래 보았자 소용이 없어요.그것이 자라나는 것 그리고 자라나서 열매를 맺는 그 기간이 지나가야 되어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씨가 자라서 어쩐다고요? 자라는 과정이 여기 정확히 기술되어 있지요.씨가 나서 터서 자라서 28절에 처음에는 싹이 나고 이삭이 패고 그 다음에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맺고 익는다.이런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이 농부는 아주 인내력을 가지고 기다릴수 밖에 없어요.다 익으면 추수를 하게 되는데 추수에 낫을 댄다.그러는데 이 말은 요엘 3:12절 말씀을 예수께서 인용을 하는 말이어요.요엘 3:12절은 무슨 말이냐면 최후의 심판 때를 두고 하는 소리여요.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될 시점 그 때에 알곡들은 다 거두어 들이고 쭉정이는 다 불에 태워버리는데 그 때가 분명히 임한다는 것을 지금 말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 비유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중요한 함축의미를 가지고 있어요.첫째는 예수께서 씨를 뿌리는 농부요 씨를 뿌리는 자요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를 역사속으로 가져오신 분이어요.곡식을 거두는 추수하는 분이어요.추수는 아까 무엇을 상징한다고요? 최후의 심판을 상징해요.하나님 나라의 완성.그러니까 최후의 심판은 구원과 정죄를 둘 다 말하지요.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믿음으로 응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자들에게는 구원의 완성을 의미하는 시점이며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사단의 나라에 머무르는 자들에게는 정죄를 의미하는 시점 그것이 추수라는 비유로 말을 하는데 예수께서 씨를 뿌릴 뿐만 아니라 추수도 하는 분이어요.그러니까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가져올 뿐아니라 최후의 심판관으로 나서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응한 자들에게는 구원의 완성을 주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응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정죄를 가져다 주는 심판자 노릇도 하심. 그 뜻이어요.
막 13:24-27절을 읽어 봅시다.대표적으로 예수께서 바로 그런 것을 거기서 말하고 있지요."그때에 ........모으리니." 여기 종말에 예수께서 인자로서 다시 오셔서 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응한자를 자기 택하신 자들을 세상사방에서 모아서 그들에게는 구원을 주고 그러지 않은 자들에게는 정죄를 주는 심판을 하신다.그러니까 이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에서 첫째로 하나 배운 것이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신 분이며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 때에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둘째로 그런데 그 사이에 예수께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으로 사람들을 회개하고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오옴으로 선포한 사역을 마친 그 때에서 종말에 완성 재림 때에 오셔서 우리에게 구원과 정죄를 하실 최후의 심판 사이에 이 하나님 나라의 성장과정에는 예수께서 역활을 안 한 것으로 무슨 통치를 하지 못함.여기 무엇으로 비유했어요? 농부가 하는 일이 뭐여요? 자고 일어나는 것 밖에 안해요.그 사이에 씨는 저절로 자라는 거여요.농부가 씨가 자라도록 어떻게 통제하지 못해요.이 사이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성장과정에 예수께서 통제하지 않은 것으로 이 비유에서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아마 막 13장 32절을 한 번 읽어 보실까요?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심지어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순간에 대해서는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도 알지 못해요.통제하지 못해요.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성장과 그것의 완성은 하나님 아버지의 소관이다.그러니까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하나님 나라를 가져 왔지만 그 하나님 나라의 성장은 누가 역활해요? 하나님 아버지가 하신다.그것이 어떻게 성장하고 언제 그 성장이 완성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들인 자신도 컨트롤하지 못한다.
아들도 모른다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달려 있어요.우리는 절대로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온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니메 의지할 것이지 종말이 언제 오나 숫자 날짜 헤아리고 이렇게 조마조마 하라 그런 말이 아니어요.하나님게 전적으로 의지하라.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그 복음에 전적으로 신뢰하라 그런 말이어요.
그런데 하여간 여기에 심지어 아들도 컨트롤할 수 없음.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달려 있음.
그 다음에 세째로 이 비유는 무엇을 가르쳐요? 그 다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는 성장함,성장해감.그런데 이 성장이 여기 강조되었지요.28절을 보십시오."당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 나고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다음에는 이삭의 충실한 곡식이 채워지고 그리고 열매가 익는다."이 성장의 괒정이 아주 단계적으로 쓰여져서 이 성장의 과정이 강조되었어요.
자 그러면 역사속에서 예수의 초림으로 말미암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과 예수의 재림으로 말미암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 사이에 하나님 나라가 성장해 간다는 말이어요.그러면 이 말이 세상이 점점 더 좋아진다.는 말이냐? 점진적으로 세상이 더 좋아지냐? 사단의 통치가 점점 더 줄어들고 하나님의 통치가 점점 더 성장한다.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 나라가 성장한다는 말은 거꾸로 말하면 무슨 말이어요? 사단의 나라가 점점 더 줄어든다는 말 아닙니까? 사단의 악과 죽음의 통치가 점점 더 줄어들고 하나님의 의와 생명의 통치가 점점 더 성장한다면 그러면 세상이 어떠해야 되겠어요? 점점 더 좋아져야 될 것이 아닙니까? 점점 더 자유와 정의와 평화가 확대되고 건강이 증진되고 풍요가 더 증진되고 점점 더 좋아져야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습니까? 그래요? 우리 경험으로 비추어 보면 그렇지않아요.
전에도 제가 강조했지만 세상이 점점 더 좋아지는 일면이 있어요.그러나 다른 한편 세상이 점점 더 악독해 지는 일면도 있지요.그래서 그냥 단순하게 세상이 점점 더 좋아진다고 문명 낙관론적으로 말할 수가 없어요.지난 19세기 때는 엄청난 과학지식을 폭발의 테크놀로지로 선업혁명 이런 것으로 해서 풍요가 이루어 지고 교육의 일반화로 소수의 특권이 아니라 교육의 힘에 대한 신뢰가 커졌을때 19세기에 자유주의 문명 낙관론이 역사는 점진적으로 개선방향으로 좋은 방향으로 발전한다.그래서 악과 고난이 점점 사라지고 점점 더 좋은 방향으로 나간다.이런 19세기에 자유주의가 팽배하였는데 20세기에 들어오자 마자 처음 50년 동안에 엄청난 전쟁 세계 양차 대전을 겪고 나서 아 그것이 아니구나.역사가 점점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퇴보하고 있어요.
엄청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의 결과가 무엇이냐? 엄청난 큰 살상무기로 해서 더 엄청난 고난을 가져오는구나.그래서 양차 대전을 겪고 나서는 단순하게 문명 낙관론으로 생각을 할 수 없구나.그것을 알게 되었어요.우리 경험에 비추어 보아서도 지금 역사가 점진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간다.그렇게 말해요.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종말에 심판 때에 악인들과 신자들을 구분하신다는 말이어요.그러니까 무엇을 알 수 있어요? 악인들이 그때까지 있다. 있을분만 아니라 악인들이 더 기승을 부려서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더 핍박한다고요.
지금 시간이 없어서 읽지 않겠습니다만 마태복음 24장 37-39절,눅 17:26029절까지 한 번 읽어 보세요.더 악인들이 기승을 부린다.이 말이어요.왜요? 그러니까 예수의 가르침에도 한편 하나님 나라의 성장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단계에 가면 저절로 하나의 진화론적인 과정과 같이 점점 더 악이 소멸되어 지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어떤 면에서 악이 더 기승을 부려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을 더 핍박하고 어렵게 하는 그런 면이 있음. 오로지 하나님의 아들로서 다시 오셔서 사단의 세력을 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구원의 완성을 주어야만 거기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된다.그렇게 예수도 가르쳐요.그러니까 하나님 나라가 성장한다는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성장의 과정을 무슨 진화론적인 내재의 법칙같이 자동적으로 성장하는 것으로 그렇게 이해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두 가지를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어요.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성장의 과정이 진화론적인 과정으로 자동적으로 점점 악을 소멸시키면서 하나님 나라가 성장한다는 그런 말이 아니고 두가지를 말할려고 한다. 첫째는 추수가 분명히 있다는 것.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된다는 것.그때에 우리의 구원이 완성이 되며 또한 그때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응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정죄 심판이 있을 것임.추수가 있을 것임.
다른 한편 그때까지 성장이 있는데 선교와 제자도로 성장이 이루어져요.여기 막 13:10절.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종말이 임하기 전에 먼저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서 모든 민족들로 하여금 사단을 순종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믿고 순종하도록 하는 선전이 있어야 된다.그래서 모든 민족들에게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도록 하는 초청이 이루어져야 되요.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사단의 통치에 순종했던 것을 회개하고 그러니가 사단의 통치에 대해서 등을 돌리고 하나님의 통치로 들어오면 하나님 나라가 성장해야 되어요.그런데 사단의 통치로 부터 회개하고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다는 말은 하나님의 통치에 의지하고 순종해야 된다는 말이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에 의지하고 순종하면 어떻게 나타나요? 이것이 제자도여요.하나님의 통치에 의지하고 순종함이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예수의 제자노릇을 하는 거여요.그래서 예수께서 마태복음 28:18-20절에 보면 예수께서 나와서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하시니라. 아까 막 13장 10절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한다는 말은 사단의 통치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그 통치에서 회개함으로 벗어나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으로 ㄷ, 어오라는 말인데 그래서 그 곳에서 구원을 얻으라는 기쁜소식의 선포요 초대인데 그 말은 다시 말하면 마태복음 28장의 말로하면 예수의 제자가 되어 예수의 가르친 것을 지켜 행하게 하라 그런 말이지요.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이 무엇인데요? 많은 것을 가르치셨어요.그런데 예수는 그 많은 것을 두마디로 요약을 했다고 그랬지요.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몸과 같이 사랑함.이것 두가지로 요약했다고 그랬지요.예수의 모든 가르침이 두마디로 요약이 된 것이다.이것을 지키면 하나님 나라의 헌신은 무엇에 대한 반대말이라 했지요? 우상숭배의 반대말.우상숭배는 본질적으로 자신에 대한 신뢰와 자신의 주장이 우상숭배의 본질이어요.이것이 돌조각이나 나무조각을 신으로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절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돌부처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가서 절하는 것도 사실은 자기주장이어요.이렇게 우상을 하나 만들어 놓고 그 우상에게 절하는 것은 사실은 뭐여요?
이 피조물이 하나님으로 부터 지음을 받아서 바울이 롬1:18절로 부터 우리에게 가르친 바에 같이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지으셔서 이 세상에 하나님을 알 만한 증거가 있어요.그리고 인간의 양심 속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요.하나님의 법이 새겨져 있어요.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어요.그래서 이 자연에 그런 것을 우리는 자연계시라 하기도 하고 일반계시라 하기도 하는데 이런 자연예 있는 증거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한 지식 내면에 양심이 새겨진 하나님의 법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 이런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피조물성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예배해야 된다는 당위성을 가르침다고요.그것을 칼빈은 종교의 씨라고 그랬어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연계시 또는 일반계시로 말미암아 있어서 그 자연계시 일반계시에 의한 하나님의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당위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순종하고 의지해야 된다는 당위를 깨닫게 한다고요.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자기주장하려는 최후의 본질 자기자신을 의지하고 자기자신의 자원으로 자기의 삶을 자기의 안전과 행복을 도모하려는 자기 뜻대로 살려고 하는 자기를 주장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어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어요.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당위를 불러 일으켜요.동시에 인간은 자기주장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요.그래서 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가져오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당위와 자기 중심으로 자기 힘으로 살려는 인간의 자기주장 의지가 합쳐져서 좀 어려운 말로 변증법적인 합의를 이루어서 만들어낸 것이 우상숭배 그것이 종교여요.그래서 나무조각 돌조각을 신으로 만들어 놓고 예배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해야 된다는 당위도 만족시키면서 동시에 나무조각에 대고 돌조각에 대고 인간이 그 신이 나의 뜻을 성취해 주도록 그 신이 나를 섬기도록 그 신은 뭐하는 신이어요? 나를 섬기는 신이어요.그래서 동시에 자기주장하려는 의지도 만족시켜요.그러니까 결국 우상숭배의 본질은 인간의 자기주장이다.자기의 힘으로 자기의 자원으로 자기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도모할려는 거여요.그것이 여러가지로 나타나요.
우리가 아는 불교나 이런 종교들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또는 과학적인 지식에 대한 전적인 신뢰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인간의 지식을 개발하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는 인본주의적인 사상으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가장 보편적으로는 예수께서 가장 경계한 바 맘몬이즘으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돈으로 부터 자기의 삶의 의미를 확보하고 자기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이것이 다 우상숭배여요.이런 것들은 다 결국 피해를 가져와요.
그러니까 이런 것들을 다 버리고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헌신하라.지난 번에 내가 맘몬에 대한 우상숭배가 어떻게 폐해를 가져오는가를 설명했지요.맘몬에 대한 우상숭배 돈으로 우리의 인생의 의미와 안전과 행복과 의미를 확보할려고 하면 우리는 더 이상 나무조각 돌조각에 절하지않아요.그러나 돈에는 절을 한다고요.그러면 돈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안전과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하면 삶의 원칙이 어떠해야 하겠어요? 착취.어떤 사람은 부드럽게 자기주장 이웃에 대한 자기 주장으로 그래서 삶의 원칙이 착취가 되는 것이어요.그러면 갈등이 발생하고 불의와 고난이 발생하고 공포가 발생하고 당하는 자는 착취하는 자의 공포 착취하는 자는 착취당하는 자의 공포 이런 것들이 고난들이지요.
반면에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면 하나님께 우리 삼의 안전과 행복을 헌신하면 삶의 원칙이 사랑이 되는 것이어요.너그럽게 나누어줌,이웃 사랑으로 나타나지요.그러면 여기에 화해,의로움,올바른 관계가 일어나고 공포 대신에 자유가 있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 그래서 삶이 온전해짐.모든 면에서 온전해짐.우리의 심리적으로 정서적으로 온전해지고 사회적인 관계도 온전해 ㅈ고 우리와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온전해 지고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그랬지요.지금 현재.
그러니까 이 하나님 나라가 교회가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열심히 선포해서 선교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도록 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 온 사람들에게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그의 제자되도록. 예수의 가르침이 뭐여요?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사람들의 삶의 원칙이 뭐여요? 두가지다.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이웃사랑.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열심히 가르쳐서 교회가 선교를 널리 하면 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일단 하나님 나라의 테두리에 들어오지요.신앙고백으로.들어온 사람들이 그들의 삶에 모든 영역에서 예수의 제자노릇을 하도록 그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하도록 하면 자연히 온존해짐.구원이 확대되고 고난이 줄겠지요.이 가능성을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가 예수가 말하는 거여요.
그런데 교회로 하여금 선교하게 하고 교회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우상숭배 대신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을 추 취하는 대신에 이웃을 사랑하도록 하게 하는 힘은 지금 그 말이어요.씨가 자라는 것은 누구의 역활이라고요? 하나님의 역활.하나님이 자라게 해요.바울도 고전 3:7절에서 자기는 씨를 뿌렸고 아볼로는 그 씨가 자라도록물을 부었는데 고린도 교회에 와서 처음으로 바울은 복음을 선포했고 아볼로가 와서 또 가르쳤어요.아볼로가 더 가르침,양육한 가르침을 준 것을 바울은 물을 준 것으로 비유해요.그러나 성장을 준 것은 누구냐? 하나님이어요.
그러니까 우리교회가 복음을 선포하고 제자 여러분들에게 지금 가르치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방식 제자도를 가르치고 하지만 여러분들에게 이 가르침의 진리됨을 확신하게 하고 그런 이 가르침대로 살도록 해야 되겠다.우리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가치판단 윤리적인 선택의 구체적인 장에서 이대로 살아야 겠다고 결단하게 하는 것은 어느 인간일 수가 없어요.성령이 해요.그 성령이 지금 작동을 하고 있는 거여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얼마만큼 선교를 열심히 하고 얼마만큼 제자도를 실천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가 성장한다고 말할 수가 있어요.그런데 여기에 사단의 반대의 힘도 막강히 작용을 해요.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이렇게 진화론적으로 직선적으로 발전한다고는 보기가 어렵다.예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더 좋은 것을 향해서 선을 향해서 직선적으로 진화론적으로 발전한다고는 보기는 어렵고 굴곡이 있어요.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통치에 성령의 역사하심에 순종으로 반응을 잘하면 선교가 제자도의 실천이 잘되며 그만큼 역사속에서 이 세상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구체적으로 더 많은 진정한 의미의 건강 진정한 의미의 자유 진정한 의미의 정의 평화로 확대되고 교회가 성령의 역사에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려는 성령의 역사에 믿음으로 응답을 못해서 선교가 약화된다든지 하나님에 대한 헌신 대신에 우상숭배 맘몬이즘에 빠진다든지 이러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확대되기 보다는 사단의 나라의 악이 확대되고 또 교회가 회개하고 새롭게 선교와 제자도에 열심히 성령의 역사에 진정으로 믿음으로 잘 반응하면 하나님 나라가 확대되고 이렇게 해서 도리어 이렇게 굴곡의 방향으로 진전이 된다고 보아야 해요.그래서 종말에는 심지어 예수께서 그때는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의 불신앙이 더 퍼져 가지고 예수의 재림때에 인자가 왔을 때에 신앙을 볼 수 있겠느냐 하는 경고 그래서 예수의 재림때에 도리어 악이 더 기승을 부릴 수 있음을 경고했지요.
그러니까 여기 지금 저들이 바라는 씨의 비유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가 예수를 통해서 왔는데 그것이 묵시문학가들 같이 천지개벽하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도 아니고 열혈당원식으로 무슨 정치적인 대 변혁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 여기 아주 현재 절실하게 있어요.절실하게 그 구원의 힘을 나타내요.어떻게 나타내요? 병자들을 치유함으로 나타내고 삭개오를 올바르게 함으로 나타내고 그 영역에서 자유와 정의와 평화가 확데되는 것으로 나타내기도 해서 이렇게 나타나요.죄인들을 세롭게 함으로 나타나요.그것을 보라 이 말이어요.
그러나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에 사단의 훼방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이렇게 패배도 있을 망정 궁극적으로는 성장해 간다.직선적으로 발전 성장한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문명 낙관론 이렇게 굴곡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해 가고 필연적으로는 추수가 있음.구원의 완성과 심판이 있음.그것을 말하는 것이어요.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전에도 제가 가르쳤고 또 이것과 직결되었으니까 그래도 몇 마디하고 조금만 참으세요.누룩의 비유는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를 좀 더 부연한 것이어요.이 비유들도 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들여 왔다는데 지금 하나님 나라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어느 쪽에서 계속나오는거여요.하나님 나라하면 새하늘과 새땅을 연상하는 사람들 하나님 나라하면 모든 악의 구조가 일시에 제거되고 자유와 정의의 통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열혈당적인 사고 이런 사람들에게서 제기된다.이말이어요.우리에게서도 특히 이 세상에서예수의 가르츰대로 살려다가 손해를 보는 것 같고 결과가 무기력하는 것 같고 자기 자신의 무기력함,교회의 무기력함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도 이런 질문을 하지요.하나님께서 2000년전에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임했는데 도대체 하나님의 통치가 어디 있느냐? 죄악과 죽음이 이렇게 기승을 부리는데 하나님의 통치가 어디 있다고 보아야 되느냐? 이런 질문에 답을 한다는 말이어요.바로 이 씨의 비유들이.
겨자씨의 비유도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무엇으로 비유하는 거여요? 겨자씨같이 조그마한 보일랑 말랑한 은닉성 하나님 나락 무슨 천지개벽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이 로마제국을 일시에 뒤집어 엎고 이상적인 다윗왕조를 재건하는 정치적인 혁명으로 보지 않고 말씀으로,하나님 나라가 새하늘과 새땅으로 오지 않고 칼로도 오지 않고 무력이나 혁명으로도 오지 않고 말씀으로 와요.
말씀으로 온다는 말은 설득으로 온다는 말이어요.설득으로 온다는 것은 하나사람 한 사람 설득함으로서.그러기때문에 그것이 대변혁이라든지 전세계에 걸친 창조적 변혁이라든지 또는 정치적 변혁이 아니기 때문에 믿음으로 사람의 눈에만 보여요.진짜 한 사람이 우상숭배 대신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함이 무엇임을 아는 그것이 정말 구원을 가져옴.그 진리에 대해서 설득이 되어 가지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함,그때에 거기에 샬롬이 일어나요.자유와 정의가 확대되고 평화가 확대되고 진정한 신체적인 건강이 증진되고 그렇지 않고 맘몬이즘 때문에 환경이 오염이 되어서 지금 우리 건강이 좋지 않아요.맘몬이즘이 우리에게 안전과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으로 말미암아 그 곳에서 안전과 행복이 온다.그래서 착취의 원칙으로 사는게 아니고 사랑의 원칙으로 살아야 한다.
그것을 경제학자들이 그 원칙을 사람들이 경제활동에 적용하는 새로운 경제적인 모델,맘몬이즘에 기초하는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나 다 폐해를 가져오는데 맘몬이즘을 조장하는 경제 모델이 아니고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더 큰 마음의 헌신 이웃에 대한 사랑을 더 조장하는 그런 경제모델 그런 원칙을 가진 경제모델을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없을까? 그래서 기독교 경제학자들이 그런 것을 열심히 생각을 해서 창조적으로 그런 것을 해내야 될 것 같고 기독교 정치가들은 법을 만들때 맘몬이즘을 자꾸 조장하는 법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하나님으로 부터 우리의 안전과 행복이 온다고 하는 것, 이웃에 대한 사랑만이 나의 진정한 건강과 나의 진정한 행복을 가져온다.그것을 어떻게 증진시키는 법제도를 만들어 낼려고 애를 쓰면 그러면 하나님의 통치가 성장을 하는 거여요.점진적으로 성장함.그러나 필연적으로.왜?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 지는 것이다.
그래서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짝을 이루어요.예수께서 비유들을 많이 짝으로 가르치셨어요.마태복음13:44-46절 까지 보화와 진주의 비유는 짝을 이루는 거여요.눅15:1-10절 까지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동전도 짝을 이루는 거여요.여기 지금 마태 누가복음에 나오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도 짝을 이루는 비유지요.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짝이 전부 남녀의 짝이어요.양은 누구의 활동이어요? 남자. 누가 동전을 잃어버렸어요? 여자.겨자씨의 비유는 농부는 남자.씨뿌리는 자는 남자.누룩은 어디에 속한 것인가? 부엌에 속하는 여자.음식만드는 것에 속하는.그래서 남녀의 짝을 이루어요.
재미있는 것은 예수께서 그 당시 유대시회라는것이 모든 고대 사회는 전부 그랬지만 완전히 남성의 사회였어요.그런데 예수께서 그렇게 민감하게 짝을 이루어서 이것도 간접적으로 예수께서 여자들도 인간들로 취급을 했다고 가르쳐요.그래서 예수가 마태복음 14장 40절 이하에 종말에 예수 재림때에 심판에 대한 가르침도 남자 여자를 다루어요.24:40-42절 예수께서 오실때에 들에서 일하는 두 남자 중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남겨 놓고 맷돌가는 두 여자 중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남겨 놓고 짝을 이루어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모든 인간들에게 남자이고 여자이고의 창조의 구분이 중요하지 않고 모든 인간에게 적용이됨.그래서 바울이 그와 똑같은 정신으로 갈라디아서에서 3:28절에서 그리스도안에는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고 다 한가지 그리스도인은 새피조물이라고 하는 거여요.
그런데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가 이렇게 짝을 이루는 비유여요.그런데 거기서 둘 다 한꺼번에 말하는 바가 겨자씨의 비유는 선교쪽을 강조하는 것으로 겨자씨가 자라서 마태복음 누가복음에는 큰 나무를 이룬다고 그러는데 겨자씨는 나무는 안된다고 그럽니다.커보았자 관목정도된다고 그래요.그런데 마가복음에는 그 점이 정확해요.그 위에 가지가 굉장히 무성해져서 새들이 진짜 깃든데요.그런데 에스겔 17장 31장 단4장 같은데 보면 하나님께서 종말에 자신의 나라 자신이 세울 나라를 나무로 비유를 해요.그래서 나무의 가지들에 새들이 그래서 모든 민족들이 안식처를 얻도록 한다는 말을 해요.
예수께서 바로 그것을 염두해 두시고 일부러 나무라는 좀 과장법을 쓴 거여요.자기의 하나님 나라운동이 이렇게 미미하게 시작을 하지만 결국 나무를 이루어 많은 민족들로 하여금 구원의 안식처를 얻게한다.그것이 교회의 선교를 통해서 이루어 진다.
누룩의 비유는 선교도 선교이지만 제자도를 더 강조해요.복음선포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믿음과 세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사람들이 사단의 통치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을 하면 할수록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더 실현이 되는 거여요.요새말로하면 사회가 그만큼 더 변화되는 거여요.누룩이 큰 반죽덩이를 변화시키듯이 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문화를 변화시키고 지금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거여요.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는 은닉성,점진성,필연성 성장을 해요.세 개의 비유가 다 성장을 한다는 거여요.어떻게? 점진적으로 ㅍ; 연적으로. 무엇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백성의 선교와 제자도에 따라서.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의 선교와 복음선포에 확신하는 힘을 주고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의 도 자기 주장하는 도가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의지와 순종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방법대로 살도록 하는 그것을 할수 있도록 하는 것은 성령의 힘이다.그러니까 누가 성장을 주어요? 하나님이 준다는 말이어요.그런 것을 에수께서 세개의 비유들로 설명을 한 것이어요.
자 그러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질문 하나님 나라는 어디 있느냐? 지금 여기 절실해요.그런데 왜 하나님 나라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이 나와요?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진정한 의미의 선교 진정한 의미의 제자도를 잘못하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잘 안나타난다고요.희미해요.그러니까 이 세개의 비유들은 우리들에게 큰 도전을 주어요.우리의 선교와 제자도의 실천이 어디에 있느냐? 성령은 우리에게 지금 막강히 역사하고 있어요.우리가 거기에 순응하고 있느냐? 그렇게 지금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나님 나라의 비유(5)
밀과 가라지의 비유
마태복음13:24-30,36-43

마태복음 13:24-30과 36-43절에 있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교독합시다."예수께서 그들앞에 ....................."
우리가 예수의 비유들을 공부하면서 주로 마가복음의 순서를 따라가다가 오늘은 마태복음에 있는 비유를 다루게 되었어요.이 비유는 마태복음에만 나와요.그런데 지난 번에 우리가 다루었던 저절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는 마태복음에는 안 나와요.그러니까 아마 마태복음에는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 대신에 마태가 지금 여기 밀 밭에 자라는 가라지의 비유,이 비유를 여기 넣은 것 같아요.
그런데 마가복음에 나오는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와 여기 오늘 읽은 마태복음의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자세히 비교해 보면 여러개의 우사점이 많아요.그러면서 차이점들이 있어요.이런 것을 보면 예수께서 가르치실때 똑같은 비유를 여러 곳에서 되풀이 해서 가르치시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약간씩 변형을 시켜서 강조점을 좀 달리한다든가 의미를 좀 바꾸어서 했음을 짐작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오늘 이 비유도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와 말뿐만 아니라 내용에서도 유사점이 많지만 하나 또 근본적인 차이점도 있어요.이 마가복음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는 왜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으면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그러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을 우리가 여러번 강조했지만 치유로 시위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한 것이 확실한데 그러면 왜 당시의 유대인들이 기대했던대로 그냥 악의 힘을 하루만에 없애 버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신다든가 또는 전혀 새로와진 사회를 만든다든가 이렇게 하시지 아 지금 우리 가운데 죄악이 이렇게 횡횡하고 고난이 이렇게 많고 이렇게 되는가? 예수께서 지금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시위하는 그 힘으로 병자를 고치고 삭개오같은 사람을 세롭게 하고 하는 힘을 조금 널리 사용을 해서 악의 힘을 완전히 없애 버리고 의를 온 세상에 이루고 새하늘과 새땅을 이루시는 것이 좋지 않을 것인가? 그런 의문에 대한 답으로 예숚서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를 했다고 지난 시간에 그랬지요.
그런데 오늘 우리가 보는 마태복음에 있어서 가라지의 비유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예수의 청중들이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에게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요.다시말하면 악한 자를 없애 버리고 사단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고 그 사단의 사주에 따라 죄악을 저지르고 고난을 끼치는 것을 좀 뽑아 버렸으면 이 사회에서 아예 제거해 주시지 왜 그렇지 않는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자기를 통해서 왔다고 그러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통치를 삭개오 같은 사람을 의롭게 해서 또는 병자를 고쳐서 죽은 자를 살려서 의와 생명의 통치를 나타내는데 그냥 그 정도로 할 것이 아니고 사단을 한꺼번에 다 제거해 주고 사단의 사주아래 죄악을 저지르고 고난을 끼치는 자들을 밀 밭에서 가라지를 다 뽑아 없애듯이 다 한꺼번에 뽑아 버렸으면 좋을텐데 왜 그러시지 않나? 하는 그 의문 또는 예수에 대한 요구에 대해서 예수께서 지금 답을 하신 것이어요.그것이 이 비유의 초점이어요.
예수의 답은 하나님 나라의 씨가 한동안 자랄 그 기간 동안 저절로 자라고 그래서 점점 자란다고 그랬지요.지난번에 마가복음에 세개의 비유를 한꺼번에 보면서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이 세개를 한꺼번에 다루면서 저절로 자람, 점전적으로 자람,그러나 필연적으로 자람.점진적으로 자라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는 잘 안 보임, 은닉성,이런 것을 말했지요.
오늘 본문에서도 그 점은 마찬가지여요.예수께서 다시 한번 밀과 가라지의 비유로 하나님 나라가 점진적으로 자라게 되었음을 말하고 미래에야 추수기가 있음을 말해요.미래의 추수기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에게는 구원의 완성으로 나타난 것이며 악한 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뜻에 어그러지게 산 자들에게는 심판이 있을 것임을 말하는 것이지요.그러면서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비유는 무엇을 말해요? 그 전에 악을 다 드러낼려고 하는 것이 비 현실적임.하나님 나라에게도 방해를 가져올 수 있음을 여기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그러니까 여기 비유의 대충은 그런데 그것을 조금 더 한 항목씩 자세히 설명해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온 세상에 대한 구원의 계획의 실현임을 말하고 있어요.
여기 38절에서 예수께서 이 비유를 설명할 때에 밭은 세상이라.하나님께서 온 세상위에 하나님 나라의 씨를 뿌리는 비유인데 그것은 온 세상에 구원의 통치를 이루려 하심이다.이 밭은 씨뿌리는 자에게 속하지요.24절 어떤 사람이 봏은 씨를 제 밭에 뿌리는 사람과 같다.그러니까 세상은 창조주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요.세상의 창조주 하나님께.38절 천국의 아들들을 뿌린다.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때 아들들이란 말은 샘족언어의 숙어여요."....에 속한 자"라는 뜻이어요.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을 심는 것과 같다.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들을 자꾸 일으키는 것이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 하나님의 활동만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의 활동이 있어요? 악한 자가 활동을 하고 악한 자의 아들들은 악한 자의 아들들(.....에 속한 자)를 심어 놓는다.이 말이어요.여기 악한 자는 사단을 두고 하는 소리이지요.이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하나님께 속한 것이어서 당연히 하나님의 활동무대로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녀들 또는 자기의 백성들을 일으키는 곳인데 불행히도 이 세상에 사단이 또 작용을 하면서 자기 말을 듣는 사람들 사단을 청종하는 자들을 자꾸 많이 일으켜요.그러니까 이 세상이 하나님께 속한 자들과 하나님 나라의 아들들과 사단에 속한 자들 사단의 나라의 백성이 공존하는 밀 밭에 밀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현상과 같다.그 상태가 이제 한동안 계속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상태는 여기 지금 우리 비유에서는 강조가 되어 있지 않지만 두 왕국의 싸움의 상태이지요.하나님 나라와 사단의 나라와의 사움.그래서 하나님께 속한 자들과 사단의 나라에 속한 자들이 서로 싸우는 관계에 있지요.그래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을때에 일어나는 복락 자유가 더 많아지고 정의가 더 많아지고 사랑이 더욱 많아지고 푱화가 더 풍부해지고 건강이 증진되고 이런 것들은 다 하나님의 역사로 하나님의 통치의 구체적인 열매들로 나타나는가 하면 반면에 사단의 작용으로 갈등 억압이 증대하고 싸움이 있고 아픔,슬픔이 있고 이것이 한동안 지속이 될 수 밖에 없어요.
여기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가를 봅시다.이들은 첫째로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씨부리는 자가 밭에 뿌려서 생기는 것이지요.이것은 우리가 저절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됨을 말하는 것이어요.이것은 성경의 일관된 강조지요.우리가 저절로 있기로 한다면 차라리 사단의 아들들 종이 되기 쉽지요.그런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다.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에게 43절에 보면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아버지다.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신다.아버지란 말과 또 짝을 이루는 아들이라는 말의 근본의미는 상속의 관계를 말한다.상속의 관계에서 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창조주의 부요함 무한함을 상속받는 특권이 주어진다.이 말이어요.왜? 창조주가 그들의 아빠이기 때문에.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과 초월성을 힘입어서 우리 인간의 제한성을 결핍성을 극복해서 영생을 얻게 된다.그랬지요.
그 다음에 세번째로 43절에 보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은 의인들이다.막3:15절에 보면 예수께서 세례 때에 세례요한에게 뭐라고 그래요? 내가 모든 의를 성취하러 왔다고 하고 말하지요.예수께서는 무든 의를 성취하시는 분이고 또 마태복음 5:20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자기의 제자들을 의로 부르시는 그 의가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여야 한다.완전한 의에로 부르셔요.그러니까 예수의 의에로 부르심에 응한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이어요.
여기서 의라는 개념은 전에도 여러번 설명을 했지만 원래는 근본적으로는 관계론적인 의여요.올바른 관계를 가짐.그래서 원만한 관계를 가짐.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창조주와 피조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짐.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노릇해주시고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우리의 그의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고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면 올바른 관계는 원만한 관계 그래서 그 속에서 평화가 나와요.온전해짐이 나와요.우리가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을 덕입을 수 있으니까 온전해진다고 그랬지요.그것이 의의 가장 기본의미여요.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짐.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그 관계에 대해서 나오는 의무를 다해요.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함.그러니까 자연히 그의 삶이 온전해짐.그와의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온전해지는 것이어요.그렇게 해서 의라는 개념은 두번째로 윤리적 함축의미를 갖게 되어요.원래 관계론적인 개념인데 바로 하나님과 인간이 올바른 관계를 갖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나님 노릇해 주시고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해 주시고 전에도 여러번 설명했습니다만 부자의 관계가 이런 것이 아닙니까?
아들에 대해서 아버지는 아버지 노릇함과 아들을 사랑해줌,그리고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서 의지하고 순종함.이러때에 이 관계는 원만해요.그러면 이것을 의라고 그러는데 원만한 관계에 있음.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다함.부자의 관계가 아버지에게는 아들을 사랑할 의무가 주어짐.아버지가 아들에 대해서 사랑하는 의무를 다하고 부자의 관계가 아들에게는 아버지를 의지하고 순종할 의무를 주어요.아들이 아버지에게 의지하고 순종하면 의로운 관계인데 그 열매는 평화지요.박한상과 부모의 관계가 아니고 평화의 관계 이것을 워라고 그래요.성경에서는 샬롬이라 해요.
샬롬이라는 말은 갈등이 없음.그런 소극적인 말이 아니고 헬라어로 평화란 말은 갈등이 없음,전쟁이 없음,전쟁의 부재라는 소극적인 의미였어요.그런데 우리 성경에서 샬롬이라는 말은 그런 소극적인 의미가 아니고 그 보다 훨씬 온전함,모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온전케 됨.물론 갈등도 극복이 된 것이지요.전쟁도 없는 것.그러나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생명력으로 가득찬 그런 것이 이루어짐.왜? 창조주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그의 무한한 부여함을 돕는 관계니까.
이것이 의의 기본의미인데 우리가 의임이 되었다는 말은 이런 관계를 등지고 이런 관계에서 멀리 떠나버린 자들(탕자의 비유)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 분깃을 가지고 멀리 떠나 버린 자가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옴.그래서 다시 아들의 지위를 신분을 회복함.그래서 탕자의 비유에 뭐가 나와요? 가락지를 끼우고 옷을 입히고 아들의 지위에 회복시킴.상속자의 지위에 회복을 시킴.그래서 뭐가 이루어져요? 큰 잔치가 살진 송아지를 잡고 픙악을 울리고 잔치가 벌어져요.아버지의 부요함을 성속받는다.이것이 의이고 이것이 구원이어요.
그러니까 의라는 말은 일차적으로는 관계론적인 개념이다.그런데 이 개념은 하나님과 관게에서 나오는 의무를 다함이니 하나님께 순종함.그것은 이웃에 대한 사라으으로 나타나고 사단을 순종해서 죄를 짓고 악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고 거룩하고 참되고 아름답고 이런 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나요.그러니까 의인은 양쪽 뜻을 다 가지고 있어요.자 이런 사람들이 된다는 말이어요. 이 사람들은 결국 43절 마지막 추수때에 마지막 최후의 심판때에 해와 같이 빛나리라.
반면에 악한 자에 속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술도 있어요.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39절에 악한 자 곧 사단이 심는 씨들이다.사단의 통치를 받는 자들.사단의 말에 순종하는 자들.이것이 지금 상당히 심각한 말이어요.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메세지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지금 뭐라고 말해요? 지금 이 비유가 사단의 자식들이라고 그래요.그리고 악을 행하는 자들 좀 심한 말 아닙니까? 여러분들 친구들 중에 예수 안 믿어도 진실되게 살려고 노력을 하고 선한 사람들도 있는데 아 그런 사람들 지금 이 비유에서 예수가 사단의 자식들이라고 그래요.우리 성경에 아마 여러분들 그런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읽기 때문에 그냥 지나쳐 버릴 경우가 있는데 성경 곳곳에 그런 말이 많아요.
한 번 보실까요? 요한복음 8장 44절 한 번 보실까요?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 들이지 않고 예수에게 적대하며 달려드는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으니 너희의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곳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희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됨이라.이 이것이 얼마나 큰 욕입니까? 유대인들에게.유대인들은 인간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아브라함을 아비로 삼고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을 자기들의 아버지로 자기들의 언약의 백성으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로 생각을 하는데 예수께서 아 그렇지가 않다고 그래요.
고후4:3-4절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추지 못하게 하느니라." 믿지 않는 자들은 왜 믿지 않아요? 사단이 그들의 눈을 가리워서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한다.그러니까 그들은 사단의 영향권아래 있다.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니까.밭의 주인이니까.당연히 세상의 주인이어요.그러니까 세상에 나와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당연히 하나님을 인정해야 되고 그에게 의지하고 순종해야 하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그를 의지하지 않는 것 그 행위 자체가 그들이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세력의 영향아래 있음.그러니까 그들의 불신앙으로 불순종으로 자기들이 사단의 영향아래 있음을 나타낸다.
바울의 언어로 말하면 사단에 의해서 눈이 멀음.사단의 영향아래 있음.그것을 심하게 말해서 여기 사단의 자식들이다.그렇게 말하는 것이어요.그런데 그것은 부인할 수 없잖아요.하나님이 창조주로서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인간들의 창조주로서 당연히 하나님으로서 인정을 받아야 하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아요.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받아 들이지 않아요.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대항하는 사단의 세력권 안에 있음.그의 영향아래 있음.그것을 여기 지금 말하는 것이어요.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심한 말이 아니어요.
심각하지요.불신자는 사단의 세력권 안으로 심각하지요.41절에 이들은 스스로 악을 행하는 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다.사단의 세력권 안에 수동적으로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사단이 그렇게 자기 세력권안에 있는 사람들을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기만 하게 하지 않아요.자꾸 악을 자지르도록 불법을 행하게 해요.불법중에 넘어지게 하는 것이 있어요.넘어지게 하는 것은 남으로 하여금 거꾸러지게 하는 것이어요.진리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의를 정의를 행하지 못하게 하고 그런 일도 한다.오늘 아침에 설교 시간에도 같이 생각을 했지요.세상의 사상가들이나 예술가들.오늘날 굉장히 영향을 끼치는 대중 예술가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에게 대항하도록 하게 하고 악을 행하게 하는 악을 도모하고 악이 성하도록 사주하는 일을 하느냐 이 말이어요. 마르크스와 레닌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재앙을 가져 왔어요.얼마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못 믿게 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공산혁명이 자유를 박탈하고 진정한 지유와 진정한 정의를 행하지 못하게 했어요.
지금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지만 그런 악한 자와 악한자에 속한 자들의 악을 행하고 또 남을 거꾸러 뜨리고 하는 일이 한동안 종말까지 공존할 수 밖에 없음을 지금 예수께서 말씀하고 있어요.여기 세번째로 사단에 속한자들은 42절에 그들의 종말은 풀무불에 던져넣어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여기에 엄청난 심판 여기 풀무불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연상케 해요? 다니엘서에서 누가 풀무불에 들어 갔어요? 다니엘과 그이 친구들이 풀무불에 들어 갔는데 다시 우리 권면은 여러 곳에서 다니엘을 연상케 해요.여기 38절 인자라는 말이 나오지요.씨를 뿌리는 자는 인자여요.다니엘서 7장에서 온 말이지요.그리고 하나님 나라, 천국의 아들들.38절에 이 말도 다니엘서 2장과 7장에서 나온 말이지요. 하나님 나라라는 말은 구약에 드문 말인데 다니엘서에 나와요.그 다음에 여기 불법을 행하는 자 이것도 다니엘서에 나오는 말이고 의를 행하는 자 그리고 하나니 나라에 속하는 의인들은 종말에 하나님 나라에서 태양같이 빛나리라.별과같이 빛나리라 하는 말도 다니엘서 12장1-2절에서 온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다니엘서를 찾아보면 어떻게 이것이 다 들어 맞겠는가가 재미있겠지만 시간이 없어서 그렇게 안하겠는데 예수의 비유는 다니엘서의 내용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요.
그런데 하여간 악에 속한 자들에게는 최후의 심판이 있음,그런데 여기 풀무불이라든지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는 것은 그림이어요.그것을 문자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그림언어여요.구원에 이르지 못함.엄청난 고난에 빠짐을 말하는 것이지 그것을 꼭 문자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말이어요.
그러니까이 본문은 예수를 통해서 이미 하나님 나라가 왔으나 이작도 이 세상에 죄악과 고난이 병행하는 가운데 사람들이 왜 하나님께서 좌악과 고난을 단순히 제거해 버리지 않나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이어요.우리도 그런 의문 자꾸 갖게 되지요.예수께서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의 처음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시작이 되었음.출범했음.그런데 이 세상이 사단이 통치하는 이 세상이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음.그리스도의 재림때에 사단을 완전히 꺽고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어요.예수가 처음 오심으로 해서 하나님 나라가 출범해서 사단을 이김.사단을 이김이 악을 극복하고 고난을 극복함으로 나타나요.예수의 생전에는 치유로 나타났어요.그 치유는 모든 악과 고난을 극복함.그래서 우리의 삶을 온전케 함.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사단을 이김을 가장 크게 나타낸 것이 예수의 부활이지요.부활은 죽음 자체를 이긴 사건이지요.치유도 죽음의 증상들인 고난들을 이김이지요.그래서 문둥병자를 고침이 죽음이 문둥병으로 나타나고 죽음이 이웃에 대한 착취와 서로에 대한 적대감과 공포로 나타나고 그런 고난으로 예수께서 그 관계를 치유함으로 삭개오와 이웃과의 관계를 치유함으로 거기에 샬롬 온전하게 됨,평화가 있고 갈등이 평화로 극복이 되고 서로에 대한 공포가 서로에 대한 자유함으로 극복이 되어요.그래서 죽음의 증상들을 죽음의 세력을 죽음을 자꾸 꺽어 가시다가 스스로의 부활로 예수께서 사단을 결정적으로 이겼다고 그러지요.
그래서 이것을 결정적으로 이긴 날이라고 해서 D-Day라고 그러지요.그러나 아직 사단이 항복을 안 해서 한동안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을 씨부리는 밭의 주인과 자꾸 밤에 음침하게 뒤로 다니면서 악의 자녀들을 쑤시는 사단과 각축이 벌어지는 거여요.그러니까 지금 이 세상이 그런 상태에 있어요.하나님의 자녀들을 뿌리는 하나님과 악의 자녀들을 뿌리는 사단의 각축장 이것이 한동안 계속이 된다.
그러나 예수가 분명히 말하는 것은 이것이 이 비유의 중요한 요점이지요이 비유라는 것이 두가지를 말하지요.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출범했으며 한동안 악의 세력이 한꺼번에 제거되는 것이 아니고 악의 세력이 하나님의 구원의 힘과 한동안 공존할 수 밖에 없다.그런 것이 이 비유의 하나의 초점이며 또 하나는 곧 때가 온다.추수의 때가 온다.그때에 하나님의 시위가 완성이 된다.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된다.그때 사단에게는 사단에 속한 자들에게는 엄천안 심판으로 나타난다.그래서 오늘 여기 이 사이에 사는 우리가 이 악의 횡횡함을 보고 왜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했으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을 얼마나 우리에게 크게 시위를 하시고 스스로 부활로 사단의 죽음을 이기기 까지 하시고 또 우리 가운데에 복음이 선포되고 이 복음이 성령의 각 사람속에서 역사하셔서 악인이 살인자가 새사람으로 되는 것도 우리도 보기도 하고 그래서 고용주와 노동자들이 막 싸우는 장에 변화가 일어나 가지고 새로와짐이 있고 평화가 있고 자유가 있고 정의가 확대되는 이런 것도 많이 본단 말이어요.이런 것을 보면 확실히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데 하나님의 통치가 확실히 지금 있는데 그리고 그 하나님의 통치가 막강한 힘으로서 악과 죽음을 이기는 힘으로 지금 나타나는데 아 요즘 한꺼번에 죄악과 고난 죽음을 한꺼번에 제거해 버리지 않지 하고 우리 믿는자들이 그런 생각을 가질 때가 참으로 많이 있어요.
예수께서는 그럴때 낙심하지 말라.그렇다고 해서 악의 힘의 실제만 너무 과장해서 보고 하나님이 지금 막강히 역사하심,죄악의 힘을 극복하고 고난의 힘을 극복하시는데 하나님의 힘에 대해서 눈이 먼다든지 희미하게 만들지 말라는 말이어요.지난 번에 우리가 공부한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그점을 강조했지요.점점 하나님의 통치가 막강해짐,승리에 달함,그것을 굉장히 예수께서 권면했지요.이 비유에서는 그점을 권면하기 보다는 이렇게 공존할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라는 거여요.그러나 신앙을 잃지 말고 확신을 가져라.추수가 있음.그때에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 된다는 말이어요.
자 오늘 그런 이야기인데 여기서 우리가 교훈을 하나 배웁시다.자 그러면 종말에 그리스도의 재림때에 완성이 될 때까지 하나님의 의의 힘과 사단의 악의 힘이 공존할 수 밖에 없다.하나님의 의의 힘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사단의 죄악의 권세아래 놓인 사단의 자녀들이 공존할 수 밖에 없다.그런데 추수때에 되기전에 미리 악의 힘을 강제로 뽑을려고 하지 말라.여기 가라지를 아직 추수때가 되기 전에 강제로 뽑을려고 하지 말라.강제로 뽑았다가는 밀도 다칠 수 있다.
자 지금 이 비유가 그러지요.그러면 우리 가정에서 우리교회에서 우리 기독교 가정 우리 교회 적어도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기로 다 합의하고 결의한 공동체 교회에 죄악이 있고 고난이 있을 경우 그냥 나두라.그리스도가 오실때까지 그냥 놔두라 그런 말이어요?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이 시\ㅏ회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의를 행하려는 자들과 마이클잭슨 같이 사단을 섬긴다고 선언하는 녀석 뿐만 아니라 사단을 인정하지 않지만 실제로 자꾸 죄악을 도모하는 사람들.그러므로 해서 사단을 섬기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은데 그 사람들이 공존하니까 그냥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배버려두어라 그런 말이어요? 죄악을 뿌리 봅을려고 하지 말라는 말이어요? 사회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에서도 그냥 내버려두어라 그런 말이어요? 우리 기독교 가정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지 않는 구성원이 있어요.남편이든지 자식이든지 그러면 내버려두어라는 말이어요? 그 말은 아닌 것 같아요. 왜? 마태복음 5장 27-30절 예수께서 악을 제거하는 거에 대해서 얼마나 날카롭게 말하는가를 한번 읽어 보십시오."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떼어 내버리라.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아노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메 오른 손이 너를 실족체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함이니라."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뜻을 좇고자 하는 선한 의지와 사단의 사주를 받아서 죄를 저지르는 일이 왔다 갔다 하는데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는 하나님의 의의 힘과 사단의 죄악이 공존하니까 그냥 우리가 스스로 우리 속에서의 죄악성을 뿌리 뽑으려고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 그런 말이어요? 이 가라지의 비유가.마 5:27절 말씀을 보니까 그런 말이 아니어요.
예수께서 우리 속에 있는 죄악성을 제거하는데 얼마나 엄중하게 말해요.만일 우리 눈이 우리로 하여금 죄악을 저지르게 하거든 눈을 뽑아 버리라.만일 우리손이 죄악을 저지를려고 하거든 손을 잘라 버리라. 또 마태복음 18:15-17절을 보면 악을 행하는 형제가 있거든 먼저 가서 타일르고 그래도 안 들으면 대표가 가서 타일르라.그래도 안들으면 내어 쫓으라.파문시켜라.그 사람은 교회 공동체에 속하지 못함.그 파면은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속하지 않음을 공식으로 선언한 거여요.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엄중히 파문해야 함.그것을 예수께서 가르치고 있어요.그러니까 오늘 이 비유를 지금 본 마태복음 5:29-30,마태복음 18:15-17절 등과 함께 생각해야 되어요.
그래서 예수께서 일단 오늘 이 비유로 하여금 우리 가운데 있는 죄악이나 우리 개인의 삶에 있는 죄악이나 우리 교회공동체에 있는 또는 우리 가정에 있는 죄악에 대해서 그냥 그것도 괜찮아,그것도 할 수 없어.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공존할 수 밖에 없어 그런 태도를 가지라는 것은 아니어요.다만 우리 가운데 있는 악, 우리 개인의 삶에 있는 악, 우리 교회에 있는 악, 이런 것을 보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회의한다든가 또는 성급하게 이것을 그의 막강한 힘으로 없애주지 않나 하고 원망한다든가 이러지 말고 주권자적인 결정에 맡디고 기다리라.그 말이어요.
그러니까 두가지를 써야 되겠지요.하나는 개인의 삶에 있는 악을 제거하려는 진지함으로 교회안에 악이 있다면 그것을 제거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있어야 되겠지요.둘째는 그러나 완벽주의는 있을 수 없음.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기 전에는 우리 개인의 삶에서도 우리 기독교적 가정의 삶에서도 우리 기독교 공동체 교회의 삶에서도 완벽함이 있을 수 없음,우리에게 가라지가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되어요.우리가 하나님께서 그것을 점차 제거해 주시도록 사단의 세력을 꺽을려고 노력을 하지만 완벽주의를 우리가 고집해서는 안됨,완벽주의를 고집하다가는 역효과를 낸다고요.밀도 다칠수 있어요.이것은 교회사에서 엄청나게 많이 증명한 바여요.
이것은 교회사 뿐만 아니라 사회이데올로기에서도 그래요.아까 내가 막스와 레닌을 예로 들었습니다만 막스 레닌식의 유토피아 사상이 이 땅에 완벽한 정의 사회를 구현하려는 얼마나 역효과를 가져 왔는지 더 많은 고난 더 많은 불의를 가져와요.그런 것을 우리가 흔히 보는 거여요.교회사에서도 교회내의 모든 악을 제거하려는 그래서 완벽주의를 추구하다가 더 큰 악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아요.특히 핍박도 우리 교단이 속한 고신교회가 좋은 예입니다만 과거 고대사회에서 로마제국의 황제의 명에 타협을 해서 신앙을 버리고 배신해서 목숨을 건지는 사람들이 있어요.나중에 핍박이 끝날 경우 그 사람들이 다 교회에 모여들면 신앙을 끝까지 지키다가 회생을 당한 사람들과 신앙을 약간 타협해서 살아난 사람들과 싸우게 되어 있어요.신앙의 순수성을 신앙의 정개를 끝까지 지킬려든 사람들은 신앙을 타협해서 목숨을 건진 사람들에게 배신자라고 욕하고 이 사람들은 자기 변명하고 자기 정당화하고 이 사람들의 형제없음에 대해서 싸워요.이러다가 교회가 꼭 분열을 해요.
우리 한국교회도 그렇찮아요.신사참배한 사람들과 신사참배 안한 사람들이 고신교단과 다른 교단으로 처음에 분리되어요.그것이 한국교회의 분열의 시작이어요.그 뒤에 부터 한국교회가 엄청나게 분열을 해요.특히 장로교가.그래서 우리 한국교회사에서도 가라지를 제거할려다가 밀도 다친 셈이어요.그래서 한국교회가 엄청난 분열 엄청난 갈등 분열과 갈등의 역사를 하다 보니가 한국교회가 교권정치가 너무 강한 교회가 되어 버렸어요.그래서 교회가 성도들의 교제의 장이 아니고 세상정치 보다 더러운 교권정치가 행해지는 곳이 되어 버렸어요.그러니까 완벽주의 이것이 있을 수 없음.
자 제가 오늘 두가지를 강조했습니다.하나는 우리 개인의 삶과 교회의 삶에서 악을 제거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함.에수의 마5:29-30절에 호소해서 또는 마18:15-17절 이런 가르침에 호소해서 그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치리가 약해져 가지고 교회에서 온갖 짓을 다해도 버젓이 목사노릇하고 버잣이 집사노릇 장로노릇하고 성찬식에 참여하고 이렇게 되니까 교회의 거룩성과 순수성이 말이 아니게 되었어요.교회의 거룩성,순수성,의로움을 견지하려는 그 노력이 있어야 되지요.그래서 악을 제거하려는 노력이 악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반면에 오늘 이 가라지의 비유 예를 들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주의는 있을 수 없음,완벽한 교회는 있을 수 없음,어느 교회나 어느 그리스도인의 삶이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세력이 완전히 제거될 때까지는 악과 선이 일부 공존할 수 밖에 없음,하나님의 통치와 거기에 대항하는 사단의 통치가 일부 공존할 수 밖에 없음,그때 판단을 잘해야 되어요.이 사단을 악의 통치를 뿌리 뽑는데 있어 뽑을려고 노력을 해야되는데 아까 전자를 강조함.도리어 밀의 손해가 일어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여기에 지혜가 필요해요.지혜는 성령의 역사로 오지요.그런데 그 성령의 역사는 누가 받아요? 겸허하게 마음이 열려진자 자기 일을 내세우는자 그래서 자기의 일을 성령의 역사로 동일시 하는 사람은 항상 지금 아까 예로 든 신사참배 이후의 한국교회의 분열의 역사에서 고대교회의 로마제국의 핍박의 역사에서 했듯이 이상 분열이 일어나고 분열은 더 큰 악을 조장하고 더 큰 아픔을 가져오고 그래서 하나님늬 나라에 더 큰 피해를 가져오고 자 여러분들 오늘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유(6)
그물의 비유
마태복음13:47-50

오늘은 그물의 비유 마태복음13:47-50절입니다."또 천국은 마치 ........."
지반 번에 두 주전에 우리가 마지막으로 공부한 비유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였지요.오늘 그물의 비유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와 짝을 이루는 비유여요.이렇게 둘씩 둘씩 짝을 이루는 비유들이 있다고 그랬지요.지난 번의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도 이렇게 짝을 이루어요.비슷한 가르침 비슷한 요점을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슷한 가르침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비유들의 짝이 이렇게 있는데 오늘 우리가 읽은 짧은 비유는 지난 번에 공부한 밀과 가라지의 비유와 짝을 이루어요.
그런데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농업사회에서 얻은 비유이지요.그런데 오늘 보는 그물의 비유는 어업에서 얻는 비유이지요.그런데 이 갈릴리 예수의 활동 무대가 주로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하는 활동무대였지요.갈릴리의 예수의 활동무대에서 예수의 청중들이 아마 가장 많이 종사한 직업이 두가지일거여요.농업이고 어업이고.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그의 청중들이 가장 쉽게 즉각적으로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삶의 현장에서 얻어낸 비유들로 하나님 나라를 가르쳤어요.
그런데 그물의 비유를 우리가 생생하게 연상할 수 있도록 하는 좋은 사건이 1986년에 벌어졌어요.여러분들이 신문에 난 것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어요.1986년에 바로 그 갈릴리 호수 바다에서 예수시대의 고기배가 아주 고스란히 별견이 되었어요.조금도 망가지지 않고 아주 고스란히 발견이 되었어요.그런데 그 고기배가 어느 정도로 크냐면 길이는 10미터 폭은 3미터크기의 고기배였는데 현대 과학적인 연대측정법으로 보았을때에 예수시대의 고기배여요.그래서 어떤 성급한 사람들은 혹시 예수께서 베드로나 이런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탔을지도 모른다.그럴지도 모르지요.그러나 그런 것보다도 훨씬 우리에게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바로 그의 제자들과 그런 배들을 타고 다니면서 갈릴리 호수들을 건너기도 하고 그런 배들을 타고 고기잡은 제자들 베드로나 안드레나 요한이나 이런 야고보나 제자들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면서 고기잡는 언어 제자들을 예수께서 뽑아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세웠단 말이어요.그것도 고기잡는 어업에서 나온 그림을 사용했어요.
오늘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도 그물의 비유로 하고 있어요.그런데 우리가 야고보와 요한의 형제 세베대의 집안에 고기잡이에 대한 우리 복음서들의 간단한 진술에서도 엿볼 수 있는 것 같이 고기잡이가 그 당시가 요새말로하면 중소기업으로도 성행을 했던 것 같아요.그래서 주로 가내 가족중심으로고기잡이가 이루어졌지만 좀 돈이 있었던 집은 배를 여러 척을 가지고 일꾼들을 고용해서 고기잡이를 했던 것 같아요.야고보와 안드레 요한 세베대의 아들들이 바로 그런 중소기업 가정의 아들들이어요.그래서 이 고기잡이가 상당히 위험하기도 하고 아주 어떤 때는 밤이 맞도록 그물을 내려야 하는 직업이기도 했지만 돈벌이는 꽤 되었었던 것 같아요.그래서 거기에 종사하는 것이 적어도 그 당시의 사회에서는 중산층으로 되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난 1986년에 발견된 그 배에도 그물을 내리는 추가 함께 발견이 되었어요.오늘 그물의 비유에서도 그것을 상상을 해야 되요.요새말로하면 바다에서 하는 그것을 저인망이라고 하지요.그물을 추를 달아서 바다에 내리고 양쪽끝에 한 쪽은 한 배가 이렇게 끌고 가서 고기를 다 잡는 그런 방법을 우리가 상상을 해야 되어요. 하나님 나라는 어떤 것 같으며 바다에 이렇게 그물을 내려서 쭉 그물을 끌고 육지로 가면 그 안에 온갖 고기들이 가득차서 올라오는 거여요.그래서 이제 여기 그물에 우리 번역이 좋지 못합니다만 가득하매 여기 요점이 어디가 있느냐면 그 요점이 잘못되었어요.요점은 뭐냐면 그물에 온갖 고기가 가득하매 그래요.거기에 요점이 있는데 불행히도 온갖고기라는 말이 빠져 버렸군요.온갖고기 그 고기에 먹을 수 있는 고기도 있고 못 먹는 고기도 있고 온갖고기들이 다 잡히는 거여요.하나님 나라가 그런 것 같다.온갖고기가 다 그물에 끌려오는 것 같다.온갖고기가 다 그물에 다 끌려오는 거여요.초점이 온갖고기에 있는데 마침 각종 물고기를 모으는 분 같다.
그런데 가령 구약의 레위기 11:9-12절 같은데 보면 생선 물고기 중에서도 어떤 물고기는 불결하니까 먹어서는 안되고 하는 구정이 있지요.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약의 법을 따라 어떤 물고기들은 먹어서는 안되어요.부정하니까.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어떤 것 같냐? 그물을 내려서 온갖 물고기를 다 걷어 올리는 것 같다.그 속에는 부정한 것도 있고 먹을 수 없는 것도 있고 또 좋은 것도 있고 그래서 육지에 다 끌어올려서는 거기서 어부들이 고르지요.그래서 먹을 수 있는 좋은 고기들은 집에도 가져가고 시장에 팔기도 하고 먹을 수 없는 것 불결한 것 부정한 것은 내버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 끝에도 하나님 나라의 완성 때도 그러하다.그때에 천사들이 와서 의인과 악인을 가른다.아까 그물의 비유와 짝을 이루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와 그물의 비유의 공통점들이 무엇입니까? 크게 두가지 둘다 하나님 나라의 현제성 지금 예수와 더불어 여기 역사속에 와서 우리 가운데에 실제로 있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관한 것인데 두가지 공통점이 있어요.
하나는 밀과 가라지가 한동안 공존해요.그런데 여기 그물의 비유에서는 좋은 고기와 나쁜고기가 같이 있어요.자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백성과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자녀들과 실제로는 사단에 속하나 겉으로 형식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가라지 같은 또는 좋지 않는 고기 이것이 공존함.이것이 하나 공통점이어요.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역사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종말에 완성이 될때까지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과 사단의 자녀들이 공존함.
또 하나의 공통점은 그러나 종말에는 분명한 가름이 있음 심판이 있음,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판명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고 나쁜고기 또는 가라지들은 심판의 불에 던져짐,그래서 분명히 그때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있음,이 두가지가 크게 공통점이어요.그래서 이 두 비유가 비슷한 내용을 가르치는 짝을 이루는 비유라고 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과 가라지의 비유와 그물의 비유와의 차이가 있다면 강조에서 차이가 있어요.그것은 여러분이 자세히 봐야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어요.밀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강조점은 그러니까 억지로 종말전에 하나님의 자녀들과 사단의 자녀들을 자꾸 분간할려고 하지 말라.그렇게 하다가는 밀가지도 다칠수 있다.거기에 강조점이 있어요.그런데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그물의 비유는 이렇게 한동안 공존할 수 밨에 없음이 미리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너무 조급하게 생각을 해서 인간의 힘으로 악을 자꾸 제거해서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이룰려고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그것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강조점이 그것에 있었어요.
여기서는 종말에는 분명히 가름이 있다.분명히 심판이 있다.이 둘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다.악한 나쁜고기는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다.심판의 분명함,확실함이 거기에 강조점이 있어요.그물의 비유는 .그래서 약간의 강조점이 차이가 있어요.비슷한 내용을 가르치는 이 비유들이 차이가 있다.그래서 그물의 비유는 우리로 하여금 요한계시록 21:27절 종말에 새예루살렘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시민이 될 새 예루살렘은 어떠하냐면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롣된 자들 뿐이라.그물의 비유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 비하면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어요.
자 그러면 밀과 가라지의 비유와 공통점에서 우리가 두가지를 배워야 되어요.교회는 믿음으로 죄를 회개함으로 사단의 통치영역에서 벗어나서 예수를 주라고 고백함으로 그 고백으로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영역으로 들어왔어요.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모습이 교회여요.이 안에 교회멤버들이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라.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모습이다.이 속에 밀도 있고 가라지도 있고 좋은 고기도 있고 나쁜고기도 있어요.이 소리는 "너희는 나를 주여 주여한다고 해서 다 나의 제자가 아니다."라는 것을 연상케 해요.
그러니까 형식적으로는 주여 주여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실제로는 예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세상의 자식들 그러니까 사단이 통치하는 세상의 자식들일 수 있음.양의 탈을 쓰고 있는 늑대가 교회 공동체 내에도 있을 수 있음.그러니까 아주 관대하게 생각한다고 해서 요새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생각하는대로 교회안에 있으면 다 그리스도인이고 교회안에 있으면 다 하나님의 자녀들이다.이렇게 말할 수가 없다.이 말이어요.또는 옛날 서양에 이른바 기독교 국가 크레스템돔(?)의 사상에 의해서 기독교국가에서 났고 기독교를 고백한 부모 사이에서 났고 교회에서 세례받았고 하면 다 그리스도인이다.그럴 수 없다.이 말이어요.그것을 좀 더 제도화된 것이 카톨릭 사상이지요.교회안에 있으면 다 구원이 보장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의 모습인 교회안에는 밀도 있고 가라지도 있고 좋은 고기도 있고 나쁜고기도 있으니까 교회안에 있다고 해서 다 그리스도인인 것은 아니다.형식적으로 주여 주여 고백한다고 해서 다 그리스도의 제자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이라 할 수 없다.이말이어요.그러니까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자 예수를 뒤 따라가는 자 그 자는 성령의 열매를 맥는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그 삶에 선함이 믿음이 사랑이 소망이 확실히 나타나는 자 예수께서 그래서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그러니까 이렇게 실재적으로 구체적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자가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여요.그런데 교회내에는 형식적으로는 믿음을 고백하고 주여 주여 부르지만 그 주의 뜻에 순종하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고 육신의 열매를 맺는 가라지도 있고 나쁜고기도 있고 그런데 그것이 한동안 지속될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어떤 유혹을 자주 받습니까? 특히 믿음이 돈독한 사람들.하나님 나라에 열성이 있는 사람들이 어떤 충동을 받아요? 어떻게 교회 내부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 가라지들 나쁜고기들 이런 것들을 뽑아 내버리고 갈라 내어 버리고 우리 교회 공동체가 좀 더 거룩하고 좀 더 의롭고 좀 더 사랑이 넘치고 순결하고 이렇게 해야할 것이 아니냐? 그런 충동을 자꾸 느껴요.
여러분들 어제 신문엔가 오늘 신문엔가 무슨 목사가 하여간 요새 사이비 교가 많으니까 그런데 신문에서는 그런 것을 분명히 안 하니까.교회라는 이름을 붙이고 목사라는 이름을 붙이면 다 우리 기독교가 뒤집어 쓰게 되었는데 제가 무슨 말을 하시는 지 알겠어요.어떤 목사가 자기 양녀와 교회 젊은 신도들을 지난 10년동안 상습적으로 강간해 왔다고 해서 체포되고 구속이 되었다는 기사 여러분들 읽어 보았어요.그러니가 몇 년전에 목사가 부동산 관계로 다투다가 장로를 권총으로 쏘아 죽였지요.목사가 강간하지를 않나 사기를 하지 않나 살인을 하지 않나 여신도들을 유흥가에 팔아 먹지를 않나 목사가 그러면 신문에 나는데 장로들은 안 그렇습니까? 그런 짓을 해서 붙잡히는 죄인들 가운데 장로들도 많아요.그리고 일반신도들도 마찬가지여요.
그러니가 우리 교회안에 목사라는 자도 장로라는 자도 신학자 신학교 교수라는 사람도 여기 지금 예수의 비유에 가라지에 해당하고 나쁜고기에 해당이 된 자가 많아요.이런 것을 볼때 신문에 한 번 나면 그렇지 않아도 반기독교적인 감정이 있는 사람들은 교회가 저 따위니 뭐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욕이 다 돌아가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전도의 길이 다 막히고 그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그런데 그뿐입니까? 그런 자들이 우리 가운데 있으면 암적으로 작용을 해요.영적으로 아주 나쁜 분위기를 형성해요.나쁜고기가 우리 가운데 있으면 거짓말하고 시기하고 간음하고 남을 헐 뜯고 분쟁을 일으키고 이런 사람이 우리 가운데 있으면 우리의 공동체가 망가지는 거여요.경건성이 망가지고 신뢰가 망가지고 사랑의 관계가 망가지고 평화가 깨지고 바울은 그것을 뭐라고 표현을 해요? 고전 5장 우리 공부할 때에 아주 험하게 간음한 놈을 내어 쫓으라.
고전 5장 한 번 읽어 보세요.자기 아비의 아내를 취한 이 음행한 자를 교회에서 내어 쫓으라.왜 그래요? 5장 6절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이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예수의 누룩의 비유는 긍정적인 의미로 썼어요.누룩이 그 하나님 나라의 힘 변화의 힘으로 그런데 바울은 반대로 누룩을 악의 작용 그런 나쁜고기 하니까 이때는 우리 속담이 생각납니다.미꾸라지 하나가 온 방죽을 더럽힌다.나쁜고기 하나가 교회 공동체에 우리 속에 지금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표현인 교회 공동체 분위기를 완전히 시악하게 만들고 더럽게 만들어요.바울은 그런 자를 어쩌라? 내어 쫓으라.자 우리가 그런 충동을 느끼지만 그래야 한다고 지금 여기 바울은 고전 5장에서 가르치고 지난 번에 우리가 읽은 로마서 18장에서도 타이르고 말을 안 들으면 출교하라.그런 가르침도 주시지요.
그러나 반면에 밀과 가라지의 비유와 그물의 비유에서는 정 반대로 말하는 것 같아요.그것이 한동안 종말에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스스로 가를 때까지 공존할 수 밖에 없음.밀과 가라지의 비유에서는 차라리 함부로 가릴려고 미리 인간이 하나님 노릇을 대신해서 너는 밀이고 너는 가라지다.너는 좋은 고기이고 너는 나쁜고기이다.이렇게 갈라서 나쁜고기 가라지라고 판정된 자를 자꾸 내어 쫓을려고 하지 말라.그러니까 상반된 가르침이 성경에 있는 것 같지요.
자 문제가 발생햇어요.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데 아가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종말전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갈라지기 전에 가라지를 뽑을려고 성급하게 굴지 말라는 가르침을 왜 주어요? 그 이유가 뭐여요? 거기보면 마13장에보면 밀까지 다칠까 보니까.그것이 우리가 아주 비판적으로 생각해야할 요점이지요.자 우리 교회에 한번 적용을 해봅시다.유리가 교회적으로 삶을 살때 어떤 때는 엄격하게 가라지 나쁜고기를 구분하고 규정하고 내어 쫓아야 되는 것이며 어떤 때에는 그것을 삼가해야 하는 것인가? 한번 좀 여러분들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세요.우리 한국교회사를 역사를 들어도 좋아요.지난 시간에 세계교회사를 조금 예를 들었지요.무슨 일이 벌어진다고요? 핍박때에 믿음에 충실한 자와 믿음을 생명이 아까와서 타협한 자가 항상 갈라진다고요.로마제국의 그 엄청난 핍박 속에서 성도들을 막 불속에 던지우고 성도들을 마구 맹수와의 경기장에 던지고 할때에 로마 황제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을 이제 철회하면 살려준다고 그래요.그러면 상당수는 그런 순간에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믿음을 타협한다고요.
옛날 일제때에 신사참배하라.다 동방요배하라.그랬을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 감옥에 보낸다 할때에 우리 교회의 다수는 타협을 했어요.신산찹배 동방요배가 다 우상이 아니고 하나의 애국의 표현일 뿐이다.그런 것을 그리스도인이 해도 된다.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과 그것은 배치되지 않는다.이렇게 신학적으로 합리화 하면서 정당화하면서 신사찹배를 다수가 했어요.그러나 일부는 고신이 그 뿌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분명히 우상숭배이다.하고 끝까지 예수의 주권에 대한 신실함을 목숨으로 감옥에 가면서 까지도 지켰어요.이런 핍박이 있고나면 항상 서로에 대한 손가락질이 벌어져요.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믿음을 지킨자들은 믿음을 다협하고 배신한 자들에게 가라지 나쁜고기라고 해요.양의 탈을 쓴 늑대에 불과했음,거짓말로 주여 주여 했을 뿐이지 진짜 한번도 신앙고백을 하지 않는 예수의 진짜 제자가 못되었음.그런 자들을 쫓아내야 한다.그런 자들은 다수이니까 쫓아내지 못함으로 우리가 따로 나와야 된다.그래서 고신 교단을 새로 만들어야 된다.그래서 고신교단을 새로 만들었어요.그래서 한국교회가 처음으로 분열이 난 것이지요.그전에도 신학적인 분열의 조짐이 있었지요.다수 보수계열과 지금 한신교회의 조직신학교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신학자들 사이에서 분열이 있었으나 교단적으로 첫 분열이 그렇게 일어났어요.
자 그것은 어떻습니까? 어디에 해당합니까? 여기 고전 5장에 해당합니까? 교회의 순결 성스러움 성도의 교제를 망가뜨리는 누룩같은 암적인 존재를 없애 버려야 교회의 온전함을 지킨다.거기에 해당됩니까? 어떨까 염려되어서 아직 가라지 뽑는 일을 하지 말라 하나님께 그 일을 마치고 어떨까? 밀까지 망칠까봐 우리 교회의 역사가 그 후자에 해당됩니가? 전자에 해당됩니가? 잘 모르겠어요? 아마 판단이 조금씩 다르겠지요.그러나 나는 후자에 해당이 된다고 보아요.왜? 한국교회의 지금 큰 문제가 지금 정말 한국교회의 문제가 분열이지요.한국교회의 수십 수백갈래로의 분열은 우리 교회 공동체의 전체의 삶에 어떠한 독소 어떠한 독의 누룩을 갖다 집어 넣었느냐? 교권싸움 교권쟁탈 교권정치 이것이 외국가면 교회생활에 그런 것이 없어요.그런데 한국교회의 목사들이 왠만한 목사들은 양떼를 잘 돌보는데 보다도 교회정치에 교권싸움에 더 시간과 신경과 에너지를 더 많이 써요.그래서 신학교 하나 질되는데 없고 교회 총회 하나 진짜 은혜스럽게 끝나는데 없고 노회한번 제대로 되는데 없고 그렇게 되니까 심지어 개교회의 공동체적인 삶까지도 전부 정치와 이런 것으로 심지어 어느 교회는 장로투표도 못해요.우리교회는 그래도 정말 모범적이어요.어떤 교회는 장로투표도 못해요.왜? 서로 장로될려고 싸움질을 해서.
그래서 누룩이 가라지를 뽑고 교회의 순결을 지길려고 하는 일면 정당화되는 그런 노력이 밀 밭전체를 망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이 말이어요.우리 개됴회에서도 그래요.그런때 우리 당회가 어떠해야 합니까? 이 두가지를 놓고 생각해야지요.고전 5장 같은데의 가르침,마18장의 가르침을 따라야할 경우냐? 아니면 밀과 가라지의 비유 그물의 비유의 가르침을 따라야 할 경우냐? 어떻게 지혜롭게? 자기 감정대로가 아니고 성령의 인도함을 바라보면서 그러니까 이것이 당외니 제직회니 이런 회의가 중요한 것이지요.어느 한 사람의 독단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인도함이 교회의 전체를 온전함을 위해서 주어지는 것으로 믿고 충분히 토론을 하는 가운데 저 사람을 두는 것이 악의 누룩이 퍼지게 해서 우리 교회를 망치게 하는 경우냐? 하여간 타일르는 것이 나으냐? 제거하는 것이 나으냐? 아니면 가라지같이 좀 참으면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갈를 것을 믿고 우리는 기도하고 타이르고 참고 이렇게 해야 되느냐?
그렇지 않으면 지난 시간에도 강조한바 완전주의,종말에 완성된 완전이 있어요.그런데 완전주의,교회의 순결이라든지 이런 모든 점에서 완전주의를 추구하다가는 역효과가 벌어질 수 있다.내가 예를 들었지요.우리 교회가 지금 순결을 추구한 것은 참 좋은 일이었는데 내가 보기에는 가라지를 너무 일찍 뽑다가 밀밭 전체를 망가지는 역효과가 난 경우.자 우리 교회공동체에서 이 가르침을 적용했습니다만 이것이 우리 가정에도 적용이 되어요.우리 가정에서 구성원의 서로의 부족함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도 적용이 되는 것이어요.
징벌이라는 것이 어떤 때에 이루어져야 되는 것이며 어느 때에 완전주의를 추구하는 나머지 징벌은 도리어 해가 될 수도 있음.이런 것을 우리가 좀 생각을 해야되겠어요.너무 완전주의를 추구하면 자기의의 주장 교만함의 심정이 싹트게 되어요.우월감 이것이 싹트게 되어요.그런데 그런 것들 자체가 무엇입니까? 악이지요.그래서 역효과가 일어날 수 있으니까 그런 것을 우리가 잘 살려서 그러니까 지난 번에 공부한 밀과 가라지 비유 그리고 오늘 공부한 그물의 비유와 다른 한편 마 18장이나 고전 5장에 비추어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교회생활에 대한 올바른 이해,교회 징벌에 대한 올바른 이해 그리고 우리의 완전을 추구함에 있어 유보적인 태도 관용의 태도가 함께 있어야함.이런 것을 우리가 공부했어요.

하나님 나라의 비유(7)
싹트는 무화과 나무의 비유
막가복음13:28-32

오늘 묵상할 말씀은 막 13장입니다.우선 28-32절을 한번 읽겠습니다."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그 가지가 연하여 지고 잎사귀를 내면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우리가 예수의 비우에 대해서 계속해서 할려고 그러는데 지난 번에 했던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의 성장에 관한 비유들이었어요.예수 그리스도와 함게 이 세상에 와서 구원의 힘을 나타내기 시작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성장해 가는가? 여러가지 씨의 비유들 그리고 누룩의 비유 등으로 이렇게 하나님 나라가 성장해 감,점점 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을 우리에게 끼치면서 성장해 가는 과정들에 관한 비유들을 공부했어요.
오늘 부터는 몇가지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 성장의 끝,그러니까 종말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관한 비유들.에수께서 역사속에서 세상속에서 특히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더불어 성장에 가는 하나님 나라가 종말에 어떻게 될 것이고 그때에 심판과 구원이 어떻게 완성될 것인가? 그런 것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치셨는가? 그런 것을 오늘부터 살펴볼려고 그래요.
그 중에 첫 비유가 여기 막13장에 여러가지 비유들이 나오는데 그중에 텃 비유가 여기 오늘 읽은 28-32절 까지 있는 무화과 나무의 비유여요.그런데 벌써 읽으면서 알았겠지만 이 비유를 이해할려면 예수의 종말에 관한 가르침 전체를 좀 알아야 전체의 맥락속에서 이 비유의 뜻을 알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막 13장을 여러분과 내가 다 한 번 읽어 보아야겠어요.길지만 앞으로 우리가 토론할 비유들도 다 이 맥락에서 해야되므로 13장을 한 번 읽겠습니다."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가로되.......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보신바와 같이 이 마가복음 13장은 종말에 대심판의 날 대재앙의 날 그 날은 동시에 믿는자들에게는 구원의 날이어요.26절-27절 인자가 오셔서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끝으로 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아서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구원의 완성을 보는 그 날이어요.그 날은 우선 대재앙의 날 심판의 날이기 때문에 그 날까지 믿는자들에게 특히 환란이 심할 것을 예수께서 예고하는데 그러기때문에 잘참고 믿음을 지키고 기다려야됨.무엇보다도 주의하고 깨어있어야 함.거기 33절 부터 몇번씩 되풀이 되는 주의하고 깨어 있으라.여기 삼가하라 그 말도 주의하라 그런 말이지요.몇번씩 되풀이되는 경고 깨어서 잘 살펴야 한다.
무엇을 잘 살펴야 되나? 때의 조짐들을 잘 살펴야 된다.종말이 이르는 조짐들을 잘 살펴야 한다.그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서 여기 싹트는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여기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무화과 나무가 가지 끝이 말랑 말랑해지고 거기서 물이 올라서 말랑말랑해지고 잎사귀가 트면 아 이제 여름이 가까왔구나 하고 이제 농부들은 또는 마당에 무화과 나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무화과 나무의 싹틈에서 여름이 금방 임박했음.여름은 이스라엘의 계절로 결실의 수확의 계절이어요.
수확은 밀과 가라지들의 비유에서도 보았지만 마지막 심판과 구원의 날을 상징하는 때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무화과 나무가 싹튼 것을 보고 곧 여름이 닥치고 곧 수확의 계절이 오리라는 것을 아는 바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때의 조짐들을 깨어서 조의깊게 잘 살핌으로서 잘 대비해야 된다는 것.구원의 완성의 날은 이렇게 환란을 동반하고 엄청난 재앙을 동반하고 핍박을 동반하고 심판의 날과 함께 오기 때문에 그때 깨어서 조심하여 믿음을 지키면서 그 날을 맞이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재앙에 휩쓸림.그 가르침을 여기서 지금 하시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 29절에 이와같이 너희가 이런 일들이 아는 것을 보거든 무화과 나무의 잎사귀가 싹트는 것이 곧 여름이 올 것이라는 것에 대한 조짐이듯이 29절에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 것은 곧 인자가 심판과 구원을 위해서 올 것임에 대한 조짐임.그렇게 말을 하고 있지요.
이런 일들이 곧 종말에 심판과 구원에 대한 조짐들인데 그러면 이런 일들이 무엇이냐?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왔음.여기 사실은 인자가 주어일수도 있고 종말이 주어일수도 있고 우리 한글 개역번역에는 인자라고 햇는데 원래 원본에는 좀 불분명해요.대명사로 되어 있어요.헬라어 대명사는 사람을 가르치는 3인칭 대명사로 해석할 수도 있고 아니면 사물을 가르치는 3인칭 대명사로 해석할 수도 있고 영어로 He로 번역할 수도 있고 It로 번역할 수도 있고 그래서 조금 불분명해요.개역번역에는 인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을 했는데 아마 그것이 무리가 없는 해석일 거여요.
여러분들은 그정도로 알아두시고 이런 일들이 발생한 것을 보면 인자가 가까이 온 것을 알라.앞에 인자가 와서 뭐한다고요? 26절 23절에 대심판을 행하고 택한자를 구원하신다.그 날이 가까운 것을 알라.그런 말이어요.그러면 이런 일들이 뭐냐? 이런 일들은 앞에 쓴 일들.앞에 쓴 일들이 어디서 부터 시작합니까? 우선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가 임박했음.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이 다시 지은 이른바 헤롯의 성전이라 하는데 그것은 고대세게에서 요새말로하면 몇대 불가사이에 속한 위대한 건물이었어요.엄청나게 크게 엄청나게 아름답게 지어서 로마역사가의 책에도 나중에 로마랍비들의 책에도 속담이 전해내려온다고 그랬지요.누구든지 헤롯의 성전을 보지 않는 사람은 자기 일생에 크고 아름다운 건물을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그럴 정도로 위대한 건물이었어요.
그래서 갈릴리의 시골뜨기들이 이 건물을 보고 놀라서 1절에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얼마나 위대하면 이 건물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하지요.예수께서는 이 건물이 완전히 부서지리라.여기의 부서지리라는 수동태지요.이 건물이 파괴된다고요.이런 것을 신적 수동형이라고 해요.하나님이 파괴하신다는 말을 하나님의 이름을 거명하기를 꺼려했던 유대인들은 주어인 하나님을 피하기 위해서 수동형으로 표현을 한다.하나님이 여기서는 성전을 완전히 파괴해 버린다는 그렇게 예숚서 제자들을 경고하고 그들이 미혹되지 않고 그들이 종말에 있을 환란과 심판의 과정을 잘 지날 수 있도록 이렇게 여기 지금 설명을 해요.
여기 막 13장에 종말에 대한 가르침들인데 여기 해석이 아주 여려워요.굉장히 어려워요.그래서 학자들간에 논란도 많고 주석도 굉장히 복잡하고 아주 어려워요.그런 것을 여러분들에게 다 설명할 수는 없고 다만 여기 한 서너가지 분명히 드러나는 요점들만 말씀드린다면 첫째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중심으로 해서 엄청난 환란의 때가 이를것인데 그때에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핍박을 당할 것이다.그 핍박을 당함과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어야 된다.하나님 나라의 복음선포를 위해서 또 그리스도인들이 더 핍박을 당한다.당할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 해요.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하나님을 믿고 복음을 선포한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고 이방인들에게도 핍박을 받을 텐데 거기 9절 공회에 넘겨주겠고 회당에서 매질을 당하겠고 이런 것들은 유대인들에 의한 핍박이지요.그 다음에 임금 앞에 서고는 이방인의 왕들에 의한 핍박이지요.유대인들로 부터나 이방사람들로 부터 많은 핍박을 받을 것인데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선포한다는 이유로 재판을 많이 받게 되는데 그 재판의 과정이 예수의 주이심에 대한 하나님의 왕되심에 대한 증거가 되는 복음선포의 기회가 되는 것으로 말씀하시고 그때에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 하셔서 그들에게 증거할 말을 줄 것임을 말씀하셔서 안심도 시키시며 이렇게 예수께서 말씀해 가고 있어요.
그러니까 종말은 어떤때냐면 그리스도인들이 선교를 열심히 해야되는 때이고 그것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핍박을 받게 되는 때이다.그러니까 핍박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성장해 가는 그런 때이다.
둘째로 분명한 것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엄청난 물질적인 파괴가 있을 것임,여기 13장 14절을 보면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것의 선 것을 보거든 멸망의 가증한 것이란 말은 다니엘서에서 온 말이어요.다니엘서 9:27,11:31,12:11절 등에 있는 거기서 나오는 특수한 용어인데 그것은 주전 169-168년에 당시 유대를 지배하고 있었던 시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4세가 조금 역사를 여러분들 알 필요가 있지요.주전 326년쯤에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를 점령하고 팔레스티나를 점령했어요.그리고 알렉산더가 지금의 인도의 동북부 인더스강 까지 갔지요.지금의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동부까지 다 점령했어요.동쪽으로는 인도동부에서 서쪽으로는 이탈리 이집트까지 다 점령하는 광활한 제국을 세웠지요.그런데 알렉산더가 그리고 나서 10년 후에 전쟁터에서 병사해서 죽었어요.그래서 그의 광활한 영토가 그의 장군들 4사람에 의해서 사분이 되었어요.그래서 원래는 팔레스티나가 유대땅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는 알렉산더 대왕의 이름을 다서 창건된 지중해를 면한 곳에 창건된 지중해를 면한 곳에 새로 세운 도시이지요.원래는 알렉산드리아에 본거지를 둔 톨레미 왕조의 통치를 받았어요.
그런데 주전 198년에 시리아의 안디옥 그러니까 나중에 바울의 선교의 중심지가 되는 안디옥이라는 곳을 알지요.우리가 유명한 시도행전에서 아는 도시의 안디옥 거기에 본거지를 두었고 셀루키드 왕조로 넘어가요.톨레미 왕조나 셀루키드 왕조가 다 알렉산더 대왕의 후게왕조들이어요.그런데 둘이 팔레스티나를 경계로 유대땅을 경계로 한쪽은 이집트쪽을 차지하고 살았고 한쪽은 저 위에 시리아쪽을 차지하고 살았는데 처음에는 유대땅이 톨레미 왕조 이집트 왕조에 속하다가 주넌 198년에 셀루키드 왕조의 힘이 세가지고 팔레스티나가 셀루키드왕조에 속하게 되어요.다시말하면 시리아의 통치를 받게 되어요.다 헬라 사람들이어요.
그런데 거기서 특별히 혹독한 왕이 나와요.안티오쿠스 4세라는 자가 스스로를 제우스의 현현이라 해서 헬라말로 에피파니우스(나타남이라는 뜻) 제우스의 성육신이라고 주장을 하면서 자기가 신이라고 주장을 하면서 에루살렘 성전에 제우스의 상을 세우고(자기상이겠지요)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을 제우스에게 제사하는 제단으로 만들어 버리고 유대교의 안전을 폐해버렸지요.안식일도 못지키게 하고 할례도 못하게 하고 기타 율법의 모든 것을 금하고 음식가리는 법 이런 것을 못하게 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완전히 제우스의 성전으로 둔갑시켜놓고 각 동네마다 제우스의 신당을 만들어 놓았어요.일제때에 한국의 동네마다 신사를 만들어 놓았듯이 유대인들을 강제로 거기 가서 향을 피우고 제사를 하게 만들었어요.그래서 주전 168년에 유명한 마카비 반란이 벌어진 거여요.
모딘이라는 동네에 살았던 제사장 마키비우스가 그의 아들들과 더불어 그의 아들들 중의 하나가 유다라는 사람이었는데 그 유다의 별명이 메카비우스였어요.메카비우스라는 말은 큰 망치라는 뜻이어요.그래서 보통 메카비 형제들이다고 알려졌는데 여러분들 역사는 몰라도 헨델의 유명한 오라트리오 쥬다는 메카베우스 알지요.그것이 이 배경이어요.이 마타티우스가 그 아들들과 더불어 모딘이라는 동네에 와서 에피파니우스 안티오쿠스 4세의 명을 받아가지고 유대인들을 강제로 제우스 신전에 가서 향을 피우고 제사하게 하는 그 광경을 보고는 시리아의 장교를 죽이고 그 강요에 못 이겨서 우상숭배에 동참하는 유대인들도 죽이고 하나님과 율법과 이스라엘의 순결을 위해서 열성을 가진 자들은 따르라 해서 반란이 벌어지지요.그래가지고 이 반린이 성공을 하지요.게릴라전법을 해서 크게 성공을 해서 나중에 처음에는 165년 쯤에는 예루살렘을 탈환을 해요.그래서 깨끗이 정화해 가지고 하나님께 바치고 그것을 지금도 유대인들은 크리스마스 조금 전에 우리 달력으로 12월 초에 기념하는 하누키절이라는 거여요.미국에 가몀 여러분들 유대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에 가면 그 잔치를 볼 수 있어요.지금도 기념하는 절기이지요.처음에는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하고 종교의 자유를 확보하고 점점 더 정치적인 자유도 확보해 가지고 155년 쯤되면 독립을 확보해요.
그러나 주전 64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 장군에 의해서 점령이 되어 가지고 그때 부터는 로마의 통치를 받게 되지요.이러한 아주 다이나믹하고 환란 많았던 역사가 지금 예수의 세대의 직전에 일어났던 사건들이어요.그런데 여기 지금 다니엘서 9장 11장 12장 등에서 에피파니우스가 세운 신상을 그렇게 부른 것이어요.멸망의 가증한 것이다.그것이 서지 못할 곳이 어디여요? 서서는 안되는 곳? 예루살렘 성전.예루살렘 성전에 서게 되면 그런 일이 발생할 거여요.그때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 파괴되는 시작이 되어요.그때에 엄청난 환란이 있을 텐데 그때에 사람들은 내려 가지도 말고 피신하라.그때 피신하지 못하는 임신한 여자들 멎먹이를 인고 있는 자들은 피신할 수 없어서 엄청나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를 하지요.그 날은 긴 겨울 같은 날이 될 터인데 겨울에 피신하기 어려운 그때에 그런 날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그리고 19절은 심지어 창조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지금 후에도 그런 큰 환란은 없을 것이라고 그렇게 하면서 20절에 하나님께서 기간을 감해 주시지 않으면 살아남을 자가 없다고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도 살아남을 자가 없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 예수께서 종말에 무슨 일이 발생한다고요? 주전 2세기 중반쯤에 안티오쿠스 4세가 예루살렘 성전에 우상을 세우고 유대교를 초토화하고 유대인들을 엄청난 환란을 주어서 메카비 전쟁으로 말미암아 엄청나게 많은 환란이 일어났듯이 그 환란의 상당부분을 우리는 다니엘서에서 읽을 수가 있어요.그와 같은 환란이 되풀이 될 것으로 아니 그보다 더 심한 그와 비슷한 그러나 강도에 있어서는 더 심한 환란이 있을 것을 지금 예고하고 그것은 무엇으로 종결이 된다고요? 예루살렘 성전이 더럽혀지는 정도가 아니고 완전히 파괴되는 돌이 돌 하나에 얹혀지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파괴되는 엄청난 환란으로 종결이 될 것이다.
그때에 세번째로 26절 27절 인자가 큰 권능과 영광 가운데 오셔서 심판과 구원을 할 것이다.불신자들에게는 그때는 심판의 시대가 될 것이며 택함받은 자들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응한 자들은 그때에 모아져 가지고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그때가 그러니까 지난 번에 우리가 공부한 비유들의 언어로 말한다면 수확의 계절이 되어서 밀과 가라지가 갈라지는 그런 양과 염소가 갈라지는 그런 때가 될 것이다.지금 그렇게 설명을 하면서 에수께서 이 일들이 벌어질 때 그러니까 예루살렘 성전에 하나님을 대항하는 큰 반란이 일어나고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그런 일이 벌어질 때 그때에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도 많이 일어나 가지고 백성을 미혹하게 할텐데 그런 일이 벌어지는때 그런 것들이 무화과 나무의 잎사귀가 싹트는 것 같은 종말의 조짐이다.그런 것들을 살펴서 거짓선지자 거짓 그리스도에게 미혹되지 않고 이런 믿음의 준비없이 환란을 맞이함으로 해서 마지막 끝까지나마 구원받는 자들의 대열에 속하지 못하는 그런 것이 있어서는 안된다.그런 경고를 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고 있어요.
자 그래서 대충 뜻을 알겠는데 우리에게 큰 문제가 예수의 이 예언이 일부 주후 70년에 성취가 되었어요.잘 알다시피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기되었어요.누구에 의해서? 주전 106년에는 셀루키드 왕조의 왕 안티우쿠스 4세에 의해서 더럽혀지고 파괴될 뻔했지만 이번에는 로마의 세력에 의해서 주후 70년에 완전히 파괴되었어요.그때 유대인들이 대부분 포로로 당시 전쟁포로라는 말은 노예가 된다는 말이어요.노예로 붙잡혀 가서 엄청난 살육도 일어났지만 그후에 노예생활이 엄청난 반란이 유대인들에게 있었어요.그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이 경고에 힘입어서 유대인들의 반란에.주후 70년에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파괴한 이유가 주후 66년에 유대인들이 로마제국에 대한해서 반란을 일으켰어요.그것이 유명한 유대전쟁이라고 그러지요.그런데 이 전쟁을 일으킬때에 누가 주동이 되어서 일으켰냐면 열혈당이 중심이 되어서 일으켰어요.예수께서 많이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열혈당과 바리새당의 보수 우익당이 합세를 해 가지고 나중에는 제사장들도 많이 동참을 해가지고 반란을 일으켰어요.
이들은 누구를 모델로삼아서 일으켰느냐면 아까 이야기한 주전 168년이래로의 메카비 형제들을 모범으로 삼아서 자기들을 열혈당이라고 불렀어요.아까 메카비 반란이 어떻게 시작이 되었어요? 하나님과 율법과 성전에 대해서 열성을 가진 사람은 반란을 하자 그때 열성 하나님의 영광과 율법 성전 열성이 이방왕을 숭배하는 것은 십계명의 제1계명을 어긴 우상숭배요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때 로마 황제를 위해서 아침마다 제사를 드렸어요.그것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예루살렘 성전에 선 것과 마찬가지이다.우상숭배이다.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훼손이다.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율법과 성전에 열성을 가진 사람 이들이 주동이 되어서 반란을 일으켰지요.로마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전을 오랬동안 포위를 하다가 드디어 불화살로 주로 불화살을 사용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다 태워 버리고 다 부숴버렸어요.
진짜 예수의 말씀대로 이 돌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다 부서버렸어요.서쪽벽만 조금 남았어요.기념으로.얼마나 어렵게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했는가 그래서 이 반란을 종식시켰는가 기념을 하기 위해서 서쪽벽만 조금 남겨놓고 모두 파괴해 버렸어요.그래서 거기서 엄창나게 많은 사람들이 살육을 당했을 뿐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간 거여요.그때에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굉장히 어려운 문제가 부딪혔어요.그들이 같은 유대인들로서 이 열심당을 중심으로한 유대인들의 반란에 동참을 해야 되느냐? 로마 식민지 제국에 대한 반란에 동참을 해야 하느냐? 아니면 하지 않아야 하느냐?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경고를 힘입어서 예수가 여기서 뭐라고 그니이까? 14절 이하에서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을 가라.도망을 못가는 젖먹이 딸린 여자들 임신한 여자들 걱정을 하고 있지요.예수께서 도망하라.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도망을 갔어요.페트라라는 곳으로(아라비아 땅) 많이 도망을 갔어요.화를 많이 면했어요.이와같이 예수께서 지금 예고하는 예언들이 예수께서 주후 30년에 이런 예언을 했다면 40년 후에 거의 문자적으로 성취되었어요.
거기까지는 참 좋은데 이제 문제가 무엇이냐? 그러면 어쩐다는 거여요? 이 성전에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고 엄청난 재앙이 있고 그러면 26절 인자가 와서 심판을 통해서 택함받은 자들을 구원하겠다는 것인데 그래서 종말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있으리라는 것인데 이 예수의 종말에 대한 예언은 성취된 것입니까? 안 된 것입니까? 주후 70년에 예수의 재림이 일어났습니까?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부서지고 지금 예수가 말하는 엄청난 재앙은 일어나는 것은 사실인데 그러면 그때에 예수의 재림이 있었느냐? 인자의 옴이 있었느냐? 그래서 그때에 택함받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완성에 들어가는 일이 있었느냐? 없었던 것 같다.이 말이어요.지금까지도.그래서 지금 1924년이 흘렀지요.
그러니가 그동안에 간간이 사람들이 지금 예수가 예언한 막 13장 마 24장 눅 21 22장에 있는 이 예수의 재림이 곧 임한다고 해가지고 거짓선지자들 거짓메시야들이 자꾸 일어나서 백성들을 미혹하는 일이 자꾸 있어요.최근에 우리 한국에 크게 일어난 것이 이장림 사건.10.28일날 .하여간 그런 일이 교회사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일어났어요.그런데 지금까지도 예수의 재림이 안 일어난 거여요.자 그러니 문제 아닙니까?
그러면 예수의 예언이 잘못되었느냐? 이것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되느냐? 이것이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어요.그래서 이것에 대한 여러가지 토론이 있었는데 여러분들에게 그런 토론을 세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고 한두가지만 좀 생각을 해보면 좋겠어요.
두가지가 다 연결이 되는데 성경에서 예언이라는 것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느냐? 여러분들 지금 예수의 예언과 비슷한 예언이 하나 있지요? 구약에 여러개 있겠지요.그런데 그 중에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 요나서 2장에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이 악의 도성 니느웨를 40일 후에 완전히 파괴하겠다.가서 알려라.여기 예수는 앞으로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데 정확히 그것이 어느 날 어느 시에 오는 가는 천사도 모르고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도 모른다고 여기 32절 아버지만 안다고 그러지요.
아 그런데 자꾸 이장림이 자기가 안다고 주장을 하고 이장림 외에 무슨 산속에서 계시를 받았던 사람 하나 둘 나타나 가지고 그 날이 언제라고 하며 자꾸 주장하는 자들이 나타나서 우리를 미혹하지요.지금 예수는 천사들도 모르고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도 모른다고 그러는데 하여간 예수는 미래에 재앙이 오고 종말이 오는데 그 날은 정확히 알지 못해요 다만 그것이 언제 일어난다는 거여요? 다만 이세대가 다 가기 전에 이런 일이 발생한다는 거여요.그래서 그중에 일부는 주후 70년에 그러니까 예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의 세대안에서 사실은 일어났지요.문자 그대로 일어났어요.
그러나 그중에 제일로 핵심부분인 인자의 오심 예수의 재림 이것은 그 세대에도 안 일어났지만 그 후에 1900년이 흐른 우리 세대에도 안 일어났어요.이 말이어요.그래서 문제가 있다.이 말이어요.하여간 이 세대에 일어나리라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정확히 몇년후에 어떤 해에 일어나리라 그렇게 까지는 말을 안했어요.
그런데 요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예언은 뭐여요? 예수의 예언보다 훨씬 정확하게 40일 후에 멸망한다.그런데 그 예언이 들어 맞았습니까? 하나님이 요나에게 주신 메세지 또는 요나가 가서 해야할 예언 40일 후에 하나님께서 니느웨성을 다 멸망시킨다.하는 예언이 다 일어났어요? 안 일어났지요.니느웨성의 왕과 온 백성이 철저히 회개함으로 하나님께서 용서를 하고 멸망을 하지 않았어요.
또 하나 보시겠어요? 눅 13장 6-9절 까지 보십시다."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리라." 이 비유도 나중에 공부하겠지만 이 비유로 하나님의 원래의 계획이 아까 니느웨의 경우는 인간들의 회개와 믿음의 반응에 따라 도는 하나님 자신의 오래참으심으로 변경이 될 수 있다.연기될 수 있어요.니느웨를 40일 후에 다 없애 버릴려고 그랬는데 그들이 철저히 회개함으로 그 파괴를 면해주는 거여요.지금 여기 예수의 비유이지요.아까 우리가 눅 13장에서 읽은 비유.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과 세상에 대해서 심판을 유예하고 있음,오래참음 가운데 회개하고 의의 열매가 혹 맺힐까 해서 2년 3년 유예하고 있음.이것을 바울은 로마서 3장 26절에서 하나님께서 오래참음 가운데서 그렇게 말해요.그래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계획이 이미 하늘에 있어서 그것을 하나님께서 그의 계시자들에게 선지자들에게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에게 미리 인간들에게 에고케 하지요.
그 예는 이사야서에서도 볼 수 있지요? 그랬을때에 예언이 발생한 거여요.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리라.이미 하늘에서 결정된 하나님의 계획 그것을 선지자들과 예수가 계시를 받아서 예고하는 거여요.그러니까 그것이 뭐가 됩니까? 우리에게는 예언이 되는 것이지요.그런데 그 예언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 또는 세상 사람들의 철저한 회개와 믿음의 반응에 따라서 그 하나님의 계획이 변제되기도 하고 취소되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눅 13장의 비유대로 유예하는 오래참는 가운데 조금 더 기다림,이런 것도 우리가 볼 수 있지요.
그것을 하나 생각해 보시고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은 성취되는 것은 항상 예언보다 크다는 사실 성취는 예언과 같음이 있어야지요. 그러나 그것은 항상 결국 크지요.이 원칙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그래서 예수께서는 저 결과를 미리 보고 말씀하실때는 요만하게 말했다면 나중에 성취된 것은 예언과 연속성이 있지요.그러나 그보다 크게 항상 나타나지요.그래서 예수의 예언이 아까 이야기한대로 일부는 주후 70년에 거의 문자적으로 일어났어요.그러나 예수의 인자로서의 다시 오심 재림은 지금 아직까지 안 일어났다고 해서 지금 우리에게 고민하는 문제가 발생했는데 과연 안 일어났느냐? 이 예수의 인자로서의 재림의 성취를 지금 이 예언의 문자그대로 하면 안 일어난 것은 사실이어요.아직 예수께서 하늘로 부터 천사들을 동반하고 영광 가운데 나타나셔서 온 세상에 걸친 심판을 하고 악의 역사를 종결시키고 우리 모두 죄악과 죽음과 고난으로 부터 완전히 구원한 그런 성취는 아직 안 일어났어요.그런데 그 성취는 앞으로 종말에 크게 일어날 것인데 그전에 예수의 재림이 있었다고 볼 수 없느냐?
한 번 읽어 봅시다.요한복음 14장 1절입니다. 요한복음 14장-16장 까지가 고별사지요."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하나님께로 돌아감.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우리를 위한 처소를 예비하기 위해서 그리고 나서 다시 온다고.와서 우리를 영접한다.요14:3절 다시 와서 우리를 영접한다는 것은 여기 막 13:27절 다시 와서 땅끝에서 부터 와서 하늘까지의 온 세상에 택한 자들을 다시 모아서 하늘 나라로 영접함 그것과 일치하는 예고지요.요한복음에서는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하나님께로 들어감으로 해석을 해요.그리고 부활하셔서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남을 그의 제자들에게 옴.그러니까 재림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가 성령을 보내요.
성령을 우리 요한복음에서는 뭐라고 하느냐면 파라클레토스라고 해요.그것을 어떻게 번역을 해야되는 지를 아직도 몰라요.여러가지 가능성이 있어요.우리 개역성경에는 보혜사라고 했는데 파라클레토스라는 말은 보통 법적인 언어인데 검사와 변호사의 역활을 겸한 직책이어요.세상에 대해서는 검사노릇을 하고 믿는자들에게는 변호사노릇을 하는 그런 역활이어요.성령의 그 역활을 위해서 파라클레토스라고 부르는데 그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그리스도 자신의 제 2의 자아 성령이 제 2의 자아여요.그래서 요한복음은 그리스도를 첫 파라클레토스라고 하고 그리스도의 영 성령을 또 하나의 파라클레토스라 그래요.
그러헤 해서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심은 곧 그리스도의 오심.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오심.그래서 부활한 그리스도가 오시고 성령이 오심으로 재림이 이렇게 일어나는 거여요.너희들을 고아와 같이 두지 아니 하리라.내가 다시 와요.그 다시 오심은 종말에 여기 막 13장대로 인자로서 믿음없는 자들까지도 다 인정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옴이 있지만 그전에 부활하신 주로서 또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옴.요한복음은 이렇게 해석을 해요.그래서 그리스도의 재림이 한 번 종말에 임하는 사건이 아니라 물론 종말에 크게 공개적으로 일어나지요.그런데 그전에 오심.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오심도 원래 십자가 전에 내가 너희에게 오겠다는 재림의 약속을 적어도 일시적 성취, 성령의 오심도 그 재림의 약속의 일시적 성취,이 성취가 일어난 거여요.그래서 성취가 완전히 종말에 완성이 되는 거여요.그러니까 십자가의 죽음전에 예수께서 떠나시기 전의 예언은 조그마하게 간단하게 한마디로 다시 올 것으로 말씀하시지만 그 예언의 성취는 이런 식으로 일어난다.이 말이어요.
아까 성취는 예언보다 항상 크다는 말이어요.성취는 예언된 만큼 일어난다고 보면 성경적 예언을 이해하기 어렵다.이 말이어요.그런데 성취는 항상 예언보다 크다는 원칙을 잘 염두해두고 생각을 하면 예수께서 예언은 인자가 온다는 단순한 한마디 예언이지만 성취는 종말에 완성이 될 그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전에 부활하신 주로서 우리에게 오심.그의 영으로 우리에게 와서 우리 가운데 내주하심.이것이 다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겠다는 예언의 성취되어가는 과정이어요.그것을 종결이 이제 온 세상에 걸친 심판과 구원으로 오심.이렇게 이해를 하는 것이 좋다.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그렇게 이해하도록 예수의 재림의 약속을 ㅡ렇게 이해하도록 권고한다.그렇게 해석해 놓았어요.우리에게 그렇게 이해하도록 지침을 주었어요.그러면 부활하신 예수의 우리 가운데 그의 영으로 오심.우리 가운데 내주하심.가령 로마서 8장 같은 것을 보면 바울도 성령이 우리 가운데 내주하심이 곧 그리스도의 우리 가운데 내주하심이어요.그래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와요.또 그리스도가 언제 우리에게 오는 것이 가장 절실하냐? 객관적으로 객관화되서 나타나느냐? 예배때 온다고요.특히 공동체적인 예배때에.
예배가 종말의 선취, 종말에 오시는 주께서 지금 우리 가운데 오심,종말에 있을 심판을 지금 우리에게 체험하게 하고 말씀으로 우리에게 죄됨을 심판하시고 종말에 있을 죄용서와 구원을 지금 우리에게 베풀게 하고 종말에 있을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지금 여기서 체험하게 하는 거여요.예배가 성취된 오심이어요.예배때 주의 오심은 종말에 오심의 미리 취함이어요.
고전 16장 22절 제일 끝에 바울이 편지에 기도 한마디로 끝나지요.마라나타.그런데 왜 우리가 그것이 기도인줄을 몰라요? 번역이 잘못되어서 그렇지요.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 번역이 되었는데 옳지 않고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기도.거기 초대교회의 아주 절실한 기도였어요.아랍말로 마라나-타 그 기도는 두가지를 한꺼번에 요구하는 기도여요.종말의 재림을 위한 기도 빨리 재림하셔서 우리의 고난을 종결지으고 우리의 구원을 완성해 주소서 하는 기도이며 동시에 예배때의 오심 주여 오시옵소서 이제 종말에 완전히 베풀 심판과 구원을 지금 여기 우리에게 베푸소서 하는 기도여요.그러니까 재림을 어떻게 생각해야되어요.단어적으로 종말에 한 번 오는 것으로 해서는 안되고 종말에 재림이 있어요.그것은 아직 미래적이어요.그런데 에수가 예언하실때의 재림은 그 한 번 단어적인 것이 아니고 부활하셔서 우리 가운데 오심.영으로 오심.예배때에 우리에게 오심.이런 것을 통해서 종말에 오실 주에 대한 확신이 커가는 거여요.
자 그러니까 지금 종합하겠습니다.앞으로 공부할 종말에 예수의 막 13장 종말의 예언에 있어서 성경의 예언을 어떻게 해석해야될 지 잘 모르고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이 예언의 일부는 주후 70년에 되어 버렸는데 그러나 중요한 부분 재림부분은 전혀 1900년이 흐르도록 성취가 안 되었는데 이것 예수가 잘 모르는 것 아니냐? 우리가 더 이것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되고 이것을 어떻게 성경으로 읽을 수 있느냐?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고요.이런 문제를 잘 해석을 할려면 성경의 예언의 해석의 몇 가지 원칙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이 좋다.
하나는 경륜 가운데 그의 계획이 유보되고 변경될 수도 있음,그것은 하나님의 오래참으심으로 우리를 위함임.둘째 예수의 재림에 관해서 말한다면 요한복음의 해석대로 바울의 해석대로 종말에 일어날 그 재림 선취적으로 지금 부활하신 주의 오심.그 주의 영 성령 가운데 우리 가운데 오심.주의 오심은 심판과 구원을 동반해요.그래서 종말에 완전히 누릴 그 심판과 구원을 지금 여기서 누리게 한다. 그것을 잘 이해하시고 우리가 앞으로 종말에 대한 예언들을 이해해가면 동시에 깨어서 기도해야됨.깨어 주의해야됨.동시에 이장림 운동같이 안절부절함 없이 주께 맡기는 평안함이 함께 있어야 된다.그런 말이어요.

하나님 나라의 비유(8)
파수꾼의 비유
막 13:34-36

오늘 공부할 말씀은 막 13장입니다.34:36절 까지인데 32-37절 까지 읽읍시다."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지난 번에 우리가 예수께서 종말에 대해서 어떻게 에고하셨나를 살펴 보았습니다.그래서 종말이 임하는데 그 날은 심판과 구원의 날로서 그리스도의 구원이 완성이 되는 날인데 그 때에 많은 환란이 있을 것을 예고하는 것을 우리가 보았어요.그 날은 언제일런지 예수 자신도 모르고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자적인 결정에 달려있음을 말한 것을 보았어요.그러기때문에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이 어떠한 자세로 그 날을 준비해야 되는가를 말하는 거지요.
여기서 보는 말은 33절에 주의하고 깨어 있으라는 말과 또 결온에 있어 37절에 다시 한번 깨어 있으라는 말도 처음 한 문단의 시작과 그 문단의 마침을 이렇게 삼아요.강조하기 위해서.중간의 주제가 깨어 있으라는 말이구나 성경을 여러분들이 자세히 읽으면 그것을 여러분들이 발견해요.
이렇게 한 니야기 또는 한 가르침의 단위가 처음에 중요한 말로 시작하고 그 다음에 되풀이 하는 말로 끝나고 이런 것이 아주 자주 발견이 되어요.예를 들면 가령 마가복음 1장 1절에 뭐라고 시작합니까? 하나님의 아들 에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시작을 하지요.마가복음 15장 39절 클라이 막스에 가면 백부장의 말을 통해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고 이는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마가복음의 클라리막스에 가면 다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마가복음이 종결이 되어요.그래서 막가복음 전체가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보여주는 책이구나.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됨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바로 복음이구나.그것을 우리가 알게 되어요.
그런데 막가복음 8:27절부터 31절쯤으로 해서 여기를 분수령으로 해서 여기서 부터는 계속해서 예수가 십자가를 향해서 감.예수가 고난을 받아야 함을 보여주어요.이 부분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이 이루어 지는 거여요.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고 고백을 해요.그전에는 예수가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 능력의 시위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의 시위 그리고 그의 가르침의 권위 그래서 여기서는 주로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대권자로서 하나니 ㅁ나라의 힘 권위를 시위하는 것을 차례 차례 보여주어요.가르침에 있어서의 힘,그래서 심지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꼼짝을 못하게 하는 가르침의 힘,말씀의 권위,이적의 힘,사람들을 치유하는 죄인들의 죄문제를 해결하기도 하고 죄문제가 일으키는 여러가지 고난의 문제들 문둥병자도 맛고 중풍병자도 낫고 이렇게 시위하는 힘,심지어 귀신들도 제어하는 힘,그래서 여기서는 주로 예수의 예수의 말씀과 행위의 권위의 힘을 보여준다고요.그와같은 예수의 계시끝에 제자들이 예수에 대해서 옳게 고백을 해요.예수가 메시야이다.
이 고백을 맏아서 자기가 어던 메시야인가? 만민들을 위해서 대속의 죽음을 하는 고난받는 메시야이다.그래서 여기서 부터 막 18장 31절 부터예수께서 자기의 죽음을 예고해요.그것의 클라이막스가 십자가의 죽음이어요.그러니까 예수의 메시야적인 행위는 십자가에 달린 분으로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거여요.그래서 바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고 백부장이 과연 저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하는 거여요.우리가 이런 구절을 이렇게 볼 줄을 알면 아 이 막가복음 전체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보여주는 것이구나.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르치고 행했다는 것이 그것이 복음이다.그것을 보여줄려고 하는데 에수의 하나님의 아들됨의 내용은 무엇이냐?
그것은 십자가에 우리를 향한 대속의 죽음에서 그 절정을 이루는 것이다.이런 것을 우리가 쉽게 알수가 있어요.그런데 성경의 큰책 복음서 같은 큰 책에서도 이런 구절들을 발견하지만 이렇게 조그마한 한 단락에서도 이렇게 주제를 처음에 여는 문장과 마지막에 결론문장에 되풀이함으로서 우리에게 여기서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가 무엇이다라는 것을 가르쳐주어요.조그마한 단락에서 바울서신에서도 볼수있고 복음서에서도 흔히 볼수 있어요.이런 것을 인쿠르지오라고 해요.
지금 우리가 여기 보는 막가복음 13:33-37절 까지 조그마한 단락에서 에수의 가르침이 어디에 초점이 있느냐? 깨어 있으라.그래서 처음 가르침을 이 말로 시작을 하고 마지막 맺는 말이 이 말로 시작을 해요.깨어 있으라가 이 단락의 인쿠르지오여요.
자 우리가 이런 것을 많이 발견하는데 이것을 세 복음서를 나란히 놓고 보면 마태복음서는 예수의 종말에 관한 가르침을 어떻게 준비하고 대비하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 마가복음에서 읽은 이 이야기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고 비슷항ㄴ 비유들을 여러개를 담고 있어요.이 종말이 인자가 도둑같이 온 비유,청지기의 비유,지혜로운 처녀와 바보처녀들의 비유,달란트 비유,양과 염소의 비유,이런 비유들을 쭉 연달아서 마태복음 24장에 담고 있어요.
반면에 누가는 예수의 종말에 관한 가르침 가운데에 우리가 읽은 이 비유와 마태복음 24장에 담고 있는 비유들을 담지 않고 종말에 잠자지 않고 깨어서 잘 준비해야 된다는 비유없이 그냥 권면의 말씀만 담고 있어요.반면에 누가는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비유와 마태복음 24장에 있는 비슷한 비유들 아까 이야기한 도둑의 비유....등을 12장에 갖다 놓고 있어요.알찌감치 먼저 비유들을 말하고 있어요.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의 이 비유도 누가복음에는 아마 12장 쯤에서 찾으면 있을 법하다고 짐작할 수 있지요.그래서 누가복음 12장을 보면 실제로 눅12:35절을 보십시다."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으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열어주라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 복이 있으리로다."
여기 눅 12:36-38절 까지 보면 막 13장에 있는 비유와 내용이 같은 것을 알게 되어요.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막 13장34-36절 까지가 권면의 말씀 33절 비유가 34절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 이렇게 비유가 있지요.34-35절 쯤까지가 비유 그 다음에 다시 권면(36절) 홀연히 와서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고 깨어 있으라(36-37절) 이렇게 구조가 되어 있는데 그 중에 비유를 보면 이것이 완전한 비유가 못되고 반쪽자리 비유인것을 알게 되어요.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다.
보통 예수의 비유 같으면 처음에 이렇게 시작을 해요.그래가지고 주인이 왔는데 그때에 종이 깨어 있으면 그 주인을 잘 맞이해 가지고 어떤 복을 누리고 이 종이 게을러 가지고 잠자고 있을때 주인이 당도했을때 잠자는 상태로 발견이 되면 어떤 벌을 받게 된다.여기까지가 한 뒤에 그 다음에 권면의 말씀이 있을 터인데 보통 예수의 비유의 후반부가 그냥 없어요.그냥 35절 부터 권면이 시작이 되는 거여요.34절 까지만 비유이고 35절 벌써 권면이 시작이 되는 거여요.
여러분들이 아까 읽는 누가복음 12:36-38절 까지 거기를 읽으면 멀리 갔다가 돌아와서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같이 되라.그래서 주인이 와서 그 사람이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라.왜냐하면 주인이 그 사람을 식탁에 앉히고 식사에 시중을 든다.이렇게 되어 가지고 마가복음에는 없는 보통 예수의 비유의 후반부가 누구복음에 있는 것 같아요.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짐작할 수 있냐면 마태는 예수의 종말에 관한 비유들을 나름대로 충분히 기록한 반면에 마가는 굉장히 생각을 해가지고 핵심적인 권면만 주로 담고 있음을 우리가 알게 되어요.
그래서 문지기의 이름을 파수꾼이라고 그러는데 문지기의 비유가 더 맞는 말이어요.그러니까 문지기의 비유가 원래 지금 막 13:34절과 눅12장 후반부가 합쳐진 것이 원래 예수의 전체의 비유였는데 그것을 마가와 누가가 조금씩 다르게 누가는 전반부가 없어요.마가는 한 사람이 집을 떠나가는 것 부터 시작을 해요.누가는 돌아 오는 것으로 부터 시작을 하지요.누가는 돌아와서 그 주인이 어쨌다는 것이 없지요.누가는 주인이 떠나가는 장면은 없지만 돌아와서 종을 발견해서 어쨌다는 것이 있지요.그래서 마가와 누가의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비유의 반쪽씩이다고 보면 되어요.마가에 문지기의 비유의 전반부가 있다면 누가에 12  35-38절 비유에 후반부가 있다고 생각을 하면 되어요.문지기의 비유를 막13:34-36절과 눅 12:35-38절 까지를 하나의 비유로 생각을 해보면 좋다는 그런 말이어요.
예수께서 그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종말이 언제 올지 모르니까 어떻게 대비해야 되느냐? 주의하고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하기 위해서 이 비유를 말했어요.뭐냐면 주인이 집을 떠나서 멀리 가면서 그집의 종들에게 각각 임무를 주고 잘 집안을 꾸려갈 것 특별히 집을 잘 지킬 것을 명하고 갔어요.갔다가 한참 있다가 다시 돌아 왔을때 종들이 자기들의 임무를 잘하고 특히 문지기가 깨어 있다가 주인을 잘 맞아 들여서 문을 열어주고 들어가게 하면 그러면 주인이 와서 이 종들을 식탁에 앉히고 자기가 식사대접을 하는 시중을 들어서 식사대접을 할 것이다.그 비유여요.그렇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 깨어 있으라.그런 비유이지요.
여기 종들이라는 말은 신약시대의 종들은 주로 두 형태가 있었다고 그래요.하나는 법적으로 종이고 주인에게 법적으로 완전히 소유된 자들 그래서 주인이 하나의 상품으로 팔고 사고 할 수 있는 존재들,법적으로는 아무 권한이 없었어요.그러기때문에 혹독한 주인을 만나면 아주 형편없이 대우를 받았지요.반면에 완전히 주인에 속하기 때문에 주인집의 식구여요.좋은 주인을 만났을때는 굉장히 대접을 받는 사람들이지요.여러분 유명한 영화 벤허 보셨지요? 벤허 집안의 종들 알지요.그래서 만약 주인이 후사가 없으면 종이 후사가 되어요.그래서 종이 주인에 따라서 좋은 대접을 받기도 하고 굳은 대접을 받기도 해요.이 종은 돈을 모아 가지고 자기 자유를 살 수도 있었어요.자유인이 될수도 있었어요.물론 어렵지만.
또 레위기 25장에 희년의 율법에 따라 원래 모세의 법대로 한다면 매 50년마다 희년때는 노예들이 전부 해방이 되었어요.물론 인간의 사악함 때문에 이 법이 잘 안지켜져 가지고 편법이 마련이 되어 가지고 종들을 잘 해방을 안시킨 그런 경우가 있었어요.또 희년법을 레위기법대로 그대로 지키면 약자들의 역효과가 다 나타났어요.그런 일들로도 정확히 지킬수가 없는 그런 법이기도 했어요.그런 종들이 있었어요.
반면에 품팔이 종들도 있었어요.이 사람들은 법적으로 종은 아니나 고용된 사람들 주자집에 고용이 되어서 일당을 받고 월급을 받고 고용이 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법적으로는 종들보다 나으지만 실제로 대접을 받기는 종들보다 못할 경우가 많았어요.왜냐면 종들이 받는 주인의 보호가 없기 때문이다.하여간 그런 두 종류의 종들이 있었는데 오늘 우리 비유에 나오는 종들은 전자에 속하는 거여요.
오늘 비유는 초점이 예수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깨어 있으면서 인자가 오는 것을 맞이하라는 것인데 이런 유의 비유들 마24장 도둑의 비유 청지기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들은 주인이 가고 없는 사이 주인이 나중에 돌아온 사이에 주인으로 부터 부여받은 각자의 임무를 잘해야된다.성실히 해야된다는데 초점이 있어요.예수의 재림때까지 그때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때가 금방일수도 있고 그때가 오래일수도 있고 그러는데 그것에 너무 이장림파식으로 언제올지 모르니까 곧 올 가능성이 있으니까 생업에 종사하고 이 땅에서 일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다 모아서 오시는 주를 맞이할려고 기도나 하고 있자 이러지 말고 각자에게 부여된 일을 충실히 하라.그런 가운데 맞이하라.그런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요.달란트의 비유라든지 청지기의 비유라든지 이런 비유들은 그래요.
그런데 오늘 우리의 비유는 그것 보다도 깨어 있으라는 경각심,늘 다시 오실 주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으라는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오늘 우리 비유가 조금전에 13:32절에 바로 그 위절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심지어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그러니까 그 날을 헤아일려고 노력하지 날라 그 날이어요.그것은 전적으로 성부 하나님의 주권자적인 경륜에 달려 있고 그의 선택결정에 달려 있으니까 그 날은 인간도 천사도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도 모르므로 그 날을 어떻게 헤아릴려고 무슨 숫자노름을 하고 여기 앞에 있는 징조들이 지금 세게사에서 일어나고 이런 것을 어떻게 해석해 가지고 그 날이 언제고 몇시고 헤아리지 말라.성경의 요한계시록을 뚫고 다니엘서를 뚫고 해서 그 날을 헤아릴려고 하지 말라.심지어 예수께서 말하는 종말의 징조들은 환란이 나고 전쟁이 나고 지진이 나고 핍박이 심해지고 이런 것을 자꾸 자꾸 가지고도 그 날을 헤아릴려고 하지 말라.그 말이어요.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니까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니까 그 종말도 우리에게 가장 유리한 때에 우리에게 임하게 할 것이다라는 마음으로 안도하라는 말이어요.그것이 중요한 것이어요.
그 종말이 언제이고 안절부절하는 것은 믿음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믿음이 적은 거여요.하나님게 맡기고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해서 우리를 위해서 가장 좋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가 임하게 하여서 우리 구원을 완성할 것이다라는 그 안도함을 가지라는 말이어요.
반면에 똑같은 이유로 그 날이 언제일지 모르니까 늘 그 날에 대비하고 있으라.우리의 가장 우리한 때에 하나님께서 그 날을 정하실테니까 그 하나님께 맡기고 안도하라 그랬지요.그 말은 왠만한 사람에게 뭐라고 들려요? 이저 버리고 살아도 되는 것이지.예수의 두번쩨 권면은 그러지 말라.는 말이어요.깨어 있으라.이것이 서로 모순이 되는 것 같아요.사실은 모순이 되는 것이 아니고 야간의 긴장이 있는 것이 사실이어요.그 날에 대해서 안절부절해 가지고 어떤 날짜를 미리 헤아릴려고 하는 태도.이런 것을 하지 말라.이 말이어요.그것과 깨어 있으라는 것과 좀 긴장이 되지요.모순은 아니라도 그런데 둘 다 왜 그러냐면 그 날에 대해서 모르니까 언제일지 모르니까 그러기때문에 인간이 날짜를 헤아려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그런데 그 날짜를 헤아릴려고 하면 할수록 안절부절이 되어요.이장림의 시한부 종말론을 한 번 행각해 보세요.
그러지도 말고 그 날이 언제일지 모르니까 그 날을 미리 헤아릴수 없으니까 잊어버리고 살자.이 세상이 마치 영원할 것 같이 항상 이럴 것 같이 그냥 살자 그러지도 말라.깨어 있으라.종말이 언제라도 임할 수 있음.언제 임하든지 그 종말에 늘 대비하는 자세로 살라.그러니까 하나는 안도와 깨어있음.이 두가지가 상호 긴장을 이루면서 우리 가운데 있어야 그것이 건전한 믿음이고 종말에 대한 건전한 태도여요. 우선 오늘 초점은 깨어 있으라는 것에 있는데 그것을 보면 우선 여기에 예수께서 자신이 제자들을 이 세상에 두고 멀리 떠날 것을 말을 헤요.그리고 이 비유로 다시 돌오올 것을 말해요.그런데 멀리 떠나고 다시 돌아올 사이 이 세상으로 부터의 부재기간이 충분히 길어서 그 기간동안에 그의 제자들도 잠들어 버릴 그런 유혹을 느낄수도 있음.그래서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 그의 교회를 떠난뒤 그 분이 다시 돌아와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할 때까지 그 기간이 충분히 길어 가지고 그의 제자들 중 일부는 잠들 유혹을 느낄수 있는 만큼의 그것을 우리에게 먼저 이야기가 함축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어요.
둘째로 이 이야기가 함축하고 있는 것은 예수께서 돌아오셔야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고 구원이 완성이 됨,예수가 정말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분임.그래서 하나님 나라이지만 동시에 에수 그리스도의 나라임도 보여줌.예수 그리스도의 자기의 이 땅에 오셔서 선포함으로 하나님 나라가 시작이 되었어요.그의 치유로 그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이 나타났어요.그런데 이제 예수가 다시 돌아와서 심판과 구원을 베풀어야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어요.그러니까 하나님 나라가 처음부터 시작 때서 종말의 완성 때까지 에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거여요.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대권자여요.하나님 대신 하나님의 통치를 담당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는 분임.그런데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 나라가 시작이 되었는데 그 뒤 예수께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교회를 떠나 있는 동안이 꽤 긴 기간이 될 것임.그 기간 동안에 누구는 잠들 유혹을 느끼는데 그렇게 잠들어서는 안되고 깨어있어야 됨.
그 다음에 세번째로 그렇게 깨어 있는 종은 누가복음에 우리 비유의 결말대로 한다면 그것이 사실은 이 비유의 가장 놀라운 점이지요.37절에 어떻게 됨다고요? 우리가 예수의 재림때에 깨어 있으면 그래서 돌아오시는 주를 잘 맞아 들이면 주인이 띠를 띠고 그러니까 부엌일을 하기 위해서 앞치마를 입고 종들을 식탁에 앉히고 나와서 수종을 든다고.섬긴다는 말은 식탁에서 음식을 대접한다는 말이지요.여러분들 여기 아마 여러번 읽으셨겠지만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여요.얼마나 놀라운 결말입니까? 지금 예수께서 자기와 제자들의 관계를 무엇으로 설정을 하셨어요? 주인과 종의 관계로 설정했어요.그런데 자기의 재림때에 그의 제자들이 믿음을 가지고 깨어 있다가 자기를 잘 맞으면 어떤 축족속에 들어간다고요? 자기가 종노릇하고 그의 제자들 종들이 상전노릇하는 거여요.
이것은 이 이야기를 하는 예수의 유대사회는 고대 이른바 동방에 속했지요.고대 동방사회에서 왕과 종의 관계 백성의 관계는 얼마나 엄격하게 구분이 되었어요? 고대 동방의 왕을 막스 베버의 말에 의하면 그런 통치법을 절대군주라고 그래요.왕이 주인이지요.동방이 서방보다 군주의 권위를 더 높였기 때문에 동방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사실은 서방에서도 마찬가지여요.왕이 신하들을 식탁에 앉혀놓고 식탁에서 수종을 든다는 말은 동방에서만 아니라 서방에서도 없는 일이지요.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요.그런데 에수께서 이 비유를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놀라운 비유.
여기서 우리가 관찰할 것이 많아요.하나는 예수의 재림때에 이루어질 구원의 완성에 대해서 식탁의 잔치의 비유를 듬.이것은 우리에게 익숙하지요.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식탁의 풍요로운 잔치로 그렷어요.왜? 우리 인간들의 결핍으로 부터의 해방 인간들의 제한성으로 부터 해방 하나님의 무한한 무요함에 들어감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런다고 그랬지요.아주 우리에게 익숙해요.그래서 예수의 재림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부요한 잔치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래서 우리의 모든 제한성을 극족하고 제한성에서 오는 모든 고난들을 극족하고 영생에 이르게 되는데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식탁에 앉고 우리 주 에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시종드는 분이 됨.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것이 상당히 놀라운 비유의 결말인데 별로 놀랄 것이 없어요.왜? 최후의 만찬때에 예수께서 바로 이것을 극으로 나타냈지 않습니까? 가령 눅 22:22-27절을 한 번 읽어 봅시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에수께서 제자들을 앉히고 식탁에 앉히고 섬겼어요.수종을 들었어요.먹는 것 마시는 것을 수종을 들었어요.그래 가지고 그것을 이 세상의 도와 대조를 했어요.이 세상에서는 이른바 위대한 자가 왕이 주가 종들을 부리는 자여요.그런데 에수가 새롭게 창조할려고 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에서는 큰자가 섬기는자 식탁에서 수종드는자 자기가 내일 죽음을 당하게 되는데 바로 그 죽음이 이 제자들을 섬기기 위해서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죽음문제를 해결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잔치에 들어가게 하기 위한 것이다.그것을 만찬의 식탁에서 풍요로운 식탁으로 그리고 자기의 섬기는 몸짓으로 시위를 한 거여요.그 시위 그 연극을 눅 22장에서는 예수께서 한 말만 옮겼지요.그런데 그 몸짓 제스츄어를 우리에게 자세히 기록하는 복음서는 요 13장이 바로 누가가 말하는 눅 22장의 내가 너희 가운데에 섬기는 자로 있느니라는 말의 그 내용을 그대로 행동을 기록했어요.
예수께서 요 13장 최후의 만찬 식탁을 배설하시고 만찬도중 예수께서 일어나셔서 눅 12장에 있는 비유대로 띠를 두르고 수건을 허리에 동이시고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겼다고 그래서 그들의 죄가 깨끗이 씻긴 상태로 하나님 나라의 그 풍요로운 잔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 죄를 씻는다는 것은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의 의미를 상징하는 거여요.그 죽음이 속죄의 제사여요.이 하나님의 백성의 죄를 씻어내는 제사.그것을 예수께서 극으로 표현을 했어요.제자들의 발을 씻어줌.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이 제자들을 위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의 풍요로운 잔치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한 섬김이어요.그것을 예수께서는 최후의 만찬때에 만찬을 배설하시고 그들에게 떡을 떼어주고 포도주를 부어주는 그 섬김으로 표현을 하고 그것을 그들의 발을 깨끗이 닦아주는 종이 하는 일-이것도 유대의 종은 하지 않았어요.이방 종이나 하는 아주 천한 일이지요-을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때에 하셨어요.
그런데 지금 이 비유에서는 그가 재림때도 그때에 그의 백성이 믿음을 가지고 깨어 그를 기다리고 맞을 준비를 하다가 영접하면 바로 그 인자의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을 받아 하나님 나라의 부요함에 참여하게 될 것임.그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잇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두가지를 배웁시다.첫째 우리가 신앙의 올바른 긴강을 유지하자는 것. 이장림이 나와서 뭐라고 하든지 어떤 달변의 부흥사가 와서 뭐라고 하든지 또는 세상이 어떻게 흉흉하고 무슨 난리가 나고 지진이 나고 무슨 일이 벌어지든지 안절부절하고 날짜를 헤아리고 그러지 말고 그런때일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의 주권을 믿고 안도함이 있어야 할 것이고 반면에 우리가 더 내일도 오늘같고 모래도 오늘 같고 예수가 재림을 한다는 것 벌써 예수의 가르침이 이천년이나 지났는데 우리 벧후서에 나오는 이야기 같이 이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이 세상에서의 가치나 열심히 추구하면서 살자.이런 유혹을 받을려고 할 것 같으면 다시 한 번 각성을 해서 종말이 임할 것임 곧 임할 수도 있음.그 종말이 임할 곳에서는 가치의 완전힌 뒤집어짐 가치들의 전도가 일어나니까 우는 자에게 위로가 있고 배고픈자에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선포되고 이 땅에서 부요함을 누리고 권세를 누린자에게 눅 6장의 평지설교에 의하면 이 땅에서의 가치들이 완전히 뒤집어 진다고요.
그러니까 그것을 생각하면 깨어있다는 말은 이 세상의 가치들에 혼을 빼 가지고 이 세상의 가치들을 절대화해서 그것에 혼을 빼주고 그것을 얻을려고 발버둥치고 바울이 고전 7장에서 우리에게 충고한대로 고전7:29-30절 말씀을 봅시다."형제들아...... " 이렇게 주의 재림이 확실히 있고 그 재림이 언제라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면 우리가 깨어 있게되어요.주를 맞을 준비를 한다고요.깨어있음은 이 세상의 가치들을 절대화하지 않아요.그래서 이 세상에서 좀 가난하다고 울고 불고 할 것도 없고 그래서 돈만 벌면 다 될 것 같이 돈에 혼을 다 빼주어 가지고 그것을 무슨 수단 방법을 써서 벌려고 그러지도 말고 돈이라는 수단을 가졌다고 해서 또는 이 세상에서 조금 성공을 했다고 해서 마치 영생을 얻은 양 웃고 과시하고 그러지도 말고 웃는자들은 웃지 않는자 같이 이 세상의 가치들을 과격히 상대화해서 이 가치들로 부터 자유로와지고 재림과 더불어 있을 그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대비하고 있으라.그 말이어요.
우리 신앙생활이 이 두가지가 적절히 긴장을 이루면서 조화를 이루어야 되요.안절부절하지도 말고 반면에 종말을 잊어버리고 이 세상이 전부인양 이 세상의 가치들에 혼을 빼주고 이 세상과 타협하고 살지 말고 주를 생각하면서 주의 오심을 생각하면서 믿음을 지키고 그리스도인의 도를 따라 살고 이렇게 사는 것이 중요하고 둘째로 여기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누가 주여요? 섬기는 자가 주임.아까 읽은 눅 22장에도 잘 나타나듯이 하나님 나라 완성된 곳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섬기는 자이심.그것은 벌써 이미 이 세상의 역사속에 들어온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우리가 참여하고 사는 거여요.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서는 될 수 있으면 우리의 시민권이 하나님 나라에 있으니까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니까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살려고 노력을 해야되어요.이 세상에서의 삶의 원칙은 자기주장함.남에게 군림함이어요.그런데 그것은 항상 고난을 가져온다고 그랬지요.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의 원칙은 남을 섬김.종노릇함.그것이 구원의 완성이어요.예수의 비유의 끝이 눅 12장대로 바로 에수 스스로가 최후의 만찬때 그림으로 연극으로 시위했드시 우리를 위해서 종노릇하는 주의 오심을 보여줌으로서 우리에게도 바로 그러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한 종노릇함에 힘입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들도 서로에게 해야할 그래야 그곳에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이루어짐.그런 것을 우리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있는 이 비유로 오늘 배우게 된 거여요.

하나님 나라의 비유(9)
도둑의 비유와 청지기의 비유
마태복음24:42-51

우리가 지금 예수의 비유들을 차례로 공부해 나가고 있는데요.최근에 우리가 몇 번 공부한 것은 종말의 재림에 대해서 준비하라는 그런 가르침을 주신 비유들을 보고 있습니다.그중에 가장 유명한 비유가 오늘 공부하는 도둑의 비유입니다.마태복음 24장42-51절입니다."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거기서 슬피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오늘 두개의 비유들을 잘 읽었습니다.하나는 도둑의 비유로 42-44절 까지이고 또 하나는 청지기의 비유로 45-51절입니다.우선 도둑의 비유를 보면 이것이 소위 예수의 범죄의 비유시리즈입니다.예수의 비유에 범죄자들을 등장시켜서 하는 비유들이 꽤 많이 있지요.우리가 잘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노상강도가 등장하는 비유여요.예수께서 막2장 27절에 보면 자신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치유함을 더 강한자가 강한자의 집에 침범을 해서 그 강한자를 꽁꽁 묶어서 그 가솔을 심판하는 것으로 비유를 했지요.그래서 스스로 더 강한분으로 강한자 사단의 집 사단의 왕국에 침입을 해서 사단을 묶고 사단의 권세아래 놓여있는 우리를 해방을 시키는 것으로 예수께서는 자신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자를 치유하는 사역을 설명했지요.
또 어떤 집에 칩범해서 그 속에 있는 가솔들을 침탈하는 그런 비유로 설명햇어요.또 예수께서 땅위에 재물을 쌓아두지 말라.왜그러냐면 도둑이 와서 도둑질해 간다.하늘에 재물을 쌓아두라.그 곳에는 도둑이 와서 침탈할 일도 없고 좀이 먹을 일도 없다.도둑이 등장을 하지요.
이와같이 예수의 비유들의 도둑,침범하는 자.이런 자들이 등장을 해요.이런 것들을 범죄비유들이라고 편리하게 이름을 붙이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그 당시 시대 상황을 잘 시사해 주고 있어요.그 당시 아마 삶이 굉장히 어려웠던가 보아요.당시의 시대상황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에 의하면 특히 갈릴리는 삶이 굉장히 여러웠던 것으로 나타나요.그러니까 자연히 도둑들이 성행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그래서 예수께서 도둑을 자료로 삼아서 비유를 드는데 사람들이 금방 무슨 말인가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에 에수께서 비유들을 대개 일상행활에서 사람들의 체험에 너무 가까와서 사람들이 금방 깨달아요.그런 것들을 자료로 삼아서 하지요.씨뿌리는 장면 농사에서 자료를 얻는다든지 또는 어부에서 자료를 얻는다든지 주로 이런 것들이 많아요.어쩌다 빈도가 조금 적은데 행상에서도 한두번 자료를 얻고 그러는데 이번 공부하는 비유는 도둑의 비유여요.
예수께서 자신이 최후의 심판자로 구원의 완성자로 그러니까 인자로 오실 것을 도둑의 옴의 비유에서 지금 설명하는데 여기서 세가지 요점을 금방 깨달을 수 있지요.하나는 도둑이 오는 것은 기대하지 않은때에 그것은 전혀 예측할 수 없음이 하나의 요점이고,두번째 요점은 그러기때문에 도둑이 옴에 대해서 늘 대비하고 있어야함.세번째는 대비하고 있지 않을 경우는 손해가 막심할 것임.이런 것이지요.
이런 우리가 도둑과의 일상적인 경험을 자료로 삼아서 인자가 오는 것은 도대체 예측할 수가 없음,그러기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인 우리가 늘 인자의 오심에 대해서 대비하고 있어야될 것임에 대해서 말을 하지요.그렇게 대비하고 있을 경우에는 오심이 우리에게 구원의 완성의 날이어서 우리에게 도리어 축복의 시간이 될 것이나 대비하고 있지 않을 경우는 도둑에 대해서 대비하고 있지 않으면 그 주인이 집안의 재산을 다 잃어 버리듯이 그래서 큰 손해를 보듯이 최후의 심판자로 오시는 주에 의한 심판을 받게 되어서 엄청난 손해가 있을 것임을 지금 경고하는 것이지요.이 뜻은 우리에게 너무 분명해요.
그런데 예수가 인자로서 오심을 도둑의 옴과 비유했는데 곰곰히 생각을 하면 이 세가지 점에서는 비슷한 점이 있지만 한가지 차이가 있어요.도둑이 오는 것과 주께서 오시는 것 두가지 차이가 있어요.아까 이야기한대로 세번째 요점 예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심판으로 연결이 되어서 큰 손실을 얻으나 예비하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의 오심이 손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의 축복을 의미하니까 거기에 차이가 하나 있지요.
또 하나의 차이가 있는데 도둑의 옴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사이에 또 하나의 차이가 도둑의 옴에 대해서는 언제 오는가 그 시점만 불확실한 것이 아니고 도대체 올지 안 올지 그것도 불확실 해요.그것도 불확실해요.예수의 오심에 대해서는 언제 오실는지 모르는 그 시점에 대해서는 불확실성이 있지요.그러나 예수의 인자로서 최후의 심판자로 구원의 완성자로 오심은 확실한 거여요.그것이 큰 차이지요.그러니까 도둑은 안 올수도 있기 때문에 언제 올지도 모르는 불확실성도 있지만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그 점에도 불확실성이 있기 때문에 도둑에 대한 대비는 좀 느슨할 수도 있어요.느슨해도 조금 덜 바보스럽다 그렇게 생각이 되겠지요.그러나 여기 예수의 오심은 너무나 확실한 거여요.거기에는 불확실성이 없어요.분명해요.단지 언제 오실지만 예측할 수 없어요.그런데도 예수의 인자로서 오심을 대비하지 않으면 얼마나 바보스러워요?
그러니까 도둑의 비유는 한편 예수의 오심과 도둑의 옴이 비슷함으로해서도 우리에게 경고가 되지만 거기에 있는 차이점으로 해서도 우리에게 더욱 경고가 되지요.우리는 에수 그리스도의 인자로서 오심은 너무나 확실한 일이기 때문에 더더욱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됨을 여기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아까 제가 처음 비유를 소개할 때 예수께서 예수께서 그의 재림에 대한 깨어 대비할 것을 가르치는 여러가지 비유들을 했는데 그중에서는 여러분들 살전 5:2절을 읽어 봅시다.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니라." 여기 주의 날이 주께서 오셔서 취후의 심판을 벌이고 우리 믿는자들의 구원의 완성할 그 날이 도둑같이 임한다고요.이 종말에 대해서 유대인들도 가르쳤지만 종말에 옴에 대해서 도둑같이 온다.이 그림은 유대문서에 나타나지 않아요.오로지 예수의 비유에 처음 나타난다고요.그래서 많은 주석가들은 이곳에서 바울이 지금 우리가 마태복음 24장에서 보는 그 예수의 비유를 해석하고 적용하고 있음을 말을 해요.바울서신들에는 예수의 말씀들이 잘 인용되어 있지를 않아요.그러나 자세히 보면 더러 예수의 말씀들이 간접적으로 반영이 되어 있어요.그런데 그런 것들 중에 하나가 바로 살전5:2절이어요.
그런데 바울만 그러는 것이 아니어요.벧후3:10절을 읽어 봅시다."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거기도 주의 날이 도둑같이 임한다고 말을 한다.계시록3:3절을 봅시다."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부활하신 예수께서 교회에게 하는 경고 그것은 생전에 에수께서 교회에게 했던 경고와 똑같지요? 마지막으로 계시록 16장 15절도 마찬가지입니다."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있도다." 여기서도 부활하신 주께서 교회에 다시한번 생전의 경고를 되풀이 하는 것이지요.
자신이 도적같이 온다.모든 곳에서 언제 올지 예측하지 못하는 그때에 온다.준비된 자들에게는 그때 구원의 완성의 축복의 순간이겠지만 준비되지 않는 자들에게는 엄청난 심판의 시점이 될 것임.그러니까 깨어 있으라는 것 잠자지 말라는 것 술취해서 흐리멍텅해서 그러지 말라는 것. 그 다음 늘 우리의 신앙생활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에 대한 의지와 순종의 도를 새롭게 하고 해야할 것을 늘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보고 있는 두번째 비유 청지기의 비유로 넘어가기 전에 제가 도둑의비유와 예수의 범죄의 비유 시리즈 중에 라고 했는데 여러분 들 좀 불편하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왜 이렇게 범죄자들을 등장시켜서 비유로 나왔나? 거기에 대해서 도덕적인 판단을 안하는 거여요.지금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할때 그 여리고 성을 가는 중에 이 사람을 죽도록 때리고 돈까지 다 훔쳐 갔는데 그 놈 나쁜 놈이다.이 말을 할려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강도를 만난 자를 누가 어떻게 도왔는가를 말함으로서 제자들에게 이웃을 사랑해야됨을 말하는데 지금 여기 도둑의 비유에서도 도둑의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아요.그래서 도둑을 범죄자 시리즈를 또 여기 눅 18:1-8절까지에서는 하나님께 우리가 계속해서 기도로 매달려야 됨을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로 들어요.불의한 재판관에게 한 과부가 자꾸 가서 호소함으로 결국 자기의 뜻을 이루어 내는 그것을 예로 들어요.얼핏보기에는 하나님을 불의한 재판관으로 좀 비유를 했단 말이어요.
조금 더 내려가면 눅 19장11-27절 가지에 므나의 비유에서 장사를 잘못한 잘하지 않은 종을 주인이 악한 종이라 하고 심하게 심판한 것으로 하나님게서 마치 우리들에게 큰 이익을 남기라는 다분히 자본주의적인 정신을 고취하는 것 같은 그런 비유를 들고 있어요.이런 비유 모든 비유들을 대할 때에 아마 여러분들은 다 신앙이 성숙해서 그럴일 없겠지만 거기에 요점은 우리로 하여금 그 곳에 등장하는 도둑 불의한 재판관 불의한 청지기 이런 사람들을 본 받으라 그런 것이 아니고 예수께서 아주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의 경륜과 집접연결되는 그런 생생한 자료로 가르침의 재료를 삼아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구원 그의 심판 이런 진리를 우리에게 전달할려고 하는 거여요.
그래서 오늘 여기서 본 바와 같이 도둑의 비유에서 특별히 도둑의 문제에 대해서 예수께서 도덕적으로 민감성이 없었다던가.그래서 이런 도둑을 내세워서 종말에 잘 대비해야될 가르침을 주신 것이 아니라 종말에 우리가 잘 대비하고 있어야함을 잘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취할려고 하다보니 도둑을 재료로 삼아서 가르침을 주시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여러분들간에는 그런 사람이 없지만 가끔 평신도들 중에서도 전문신학서적을 우리 신앙을 좀 더 깊이 이해하고 신학을 좀 더 평신도에게도 더 높은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전문신학서적을 읽는 분들이 가끔 있어요.그런 분들이 읽는 책 중에 바로 우리 복음서들에 예수의 말씀들로 에수의 가릋밍드로 씌여진 나타나는 것들이 사실은 예수가 가르치고 예수가 쓴 말들이 아니고 나중에 교회가 지어내 가지고 예수의 입 속에 넣어서 마치 예수가 했던 말 가르침으로 나타난다.그렇게 씌여져 있는 신학책들이 가끔 있어요.그런데 여러분들 가끔 곰곰히 생각해 보세요.만약에 여기 이야기한 범죄자 시리즈 비유들 만약에 예수께서 자기의 인자로서의 오심을 도둑의 옴에 비유해서 가르치지 않았다면 교회가 베드로가 야고보가 요한이 그런 비유를 만들어 낼 수 있겠습니까? 예수 자신이 이런 비유를 만들어낼 수 있겠지요.그러나 만약 베드로나 요한이 이 비유를 만들었다면 베드로아 요한이 예수를 도둑같이 만드는 것 아닙니까? 불의한 재판과 같이 만드는 것 아닙니까? 도저히 교회가 이런 비유들을 만들어 낼 수가 없지요.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어요?
그러니까 이런 자료들을 이렇게 생각해 보면 범죄자 시리즈 이것은 오로지 예수만이 할 수 있는 예수만 가르칠 수 있는 비유들이어요.그러니까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 복음서의 자료들이 예수의 제자들이 정확히 예수로 부터 직접 듣고 우리에게 기록으로 남긴 자료들임.그래서 우리 복음서에 있는 예수의 말씀과 가르침들이 아주 신실하게 우리에게 전승된 자료임을 알게 되어요.가끔 경솔한 신학자들이 여러분들 이런 책을 읽었다면 우리 복음서에 신뢰할 만한 예수의 말씀들이 적다는 그런 책들이 더러 있는데 거기에 별로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자 그러면 두번째 비유 여기 청지기의 비유 마24:45-51절 까지 계속해서 깨어 종말에 대해서 예수의 재림에 대해서 준비하고 있어야 될 것을 말하지요.여기는 이제 종들 중에 우두머리 종과 나머지 종의 관계로 지금 비유로 들고 있어요.그러니까 주인이 이제 종들 중에 대표자를 세워서 청지기지요.그로하여금 밑의 종들을 질 거느리고 그들로 하여금 주인의 가사를 잘 돌보도록 그렇게 책임을 주었는데 그 청지기가 주인이 없이 주인대신 종들을 잘 거느려서 가사를 잘 다스려야 할 때에 두가지 방법이 있지요.
한 신실한 종은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은 때를 따라 자기밑에 있는 종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고 그 집안을 잘 다스려요.신실하지 못한 종 악한 종은 밑의 종들을 자꾸 때리고 학대하고 자기는 술친구들과 더불어 흥청망청 사치하고 향락을 누리고 그렇게 살아요.이 악한 종이 왜 그렇게 삽니까? 주인이 더디 도이라 해서 주인이 언제 올지도 모르고 아마 빨리 오지 않을 것이다.그렇게 생각을 해서 그 마음이 방자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까 도둑의 비유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주인이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때에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예측하지 못할 그 시점에 이르러서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에게는 그를 축복하고 그에게 이제 자기 가정을 잘 나스리는 것을 보고는 자기 전 재산을 관리하도록 맡긴다.이 악한 종에게는 엄중한 심판 벌줌이 있다고 말을 하지요.
여기 재미있는 것은 첫번째 종들은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들이라고 표현을 했고 이렇게 주인의 옴에 대비를 못하고 주인이 떠나 있는 동안에 주인의 뜻을 받들지 못하는 자에게는 악한 종이라..그러니 그 마음에 바보같은 환상을 갖게 되고 옳지 않은 생각을 한 사람으로 그렇게 여기 그리고 있어요.이것은 예수께서 특별히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주신 말씀이었던 것 같아요.
우선 종들 중에 우두머리를 이야기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비유자체에서도 우리가 이 비유는 주로 그리스도인 지도자들(목사들 장로들 선생들)에게 의도하고 주신 비유같다는 인상을 받지요.예수 당시의 베드로나 야고보나 요한 등 사도들에게 주로 염두해 두고 주었던 비유 같아요.그것은 특히 눅 12:41절에 보면 바로 지금 본 도둑의 비유를 듣고 베드로가 여짜오되 예수께서 이 비유를 우리들 사도들에게 하신 말입니까? 아니면 모든 사람에게 하심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이 청지기의 비유를 한 것으로 되어 있어요.그래서 이 누가복음은 더 확실히 청지기 비유는 지도자들을 위해서 주어진 비유임을 알게 되어요.교회지도자들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셔서 땅위에 계시지 않는 동안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잘 맡아 관리하는 위탁관리인들임.그런데 그 주인이 이제 와요.와서 교회 지도자들에게 위탁관리 잘했는가 안했는가를 심판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때 위탁관리를 잘했으면 칭찬을 받고 조그마한 가사를 돌보는 임무에서 주인의 모든 재산전체를 관리하는 임무를 받는다.반면에 위탁관리를 잘 못한 종에게는 엄중한 문책이 있고 그런데 그 문책에 대한 그림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여기 마태복음 24장 51절 엄히 때리고 처벌해서 그들이 슬피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슬피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지옥에 떨어짐을 주로 말하는 그림이지요.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저주의 땅에 떨어짐.슬피울며 이를 갊이 있다는 말은 주로 지옥에 떨어짐을 말하는 거여요.그러니까 주께서 부활승천하시고 다시 우리에게 오실때까지 그 기간동안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잘 위탁관리를 해야되는데 그 지도자들이 위탁관리 하는 것이 주로 무엇입니까?
45절이 사람들에게 같은 종된자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 일 이것은 복음으로 잘 가르치는 일을 비유하는 것이지요.그래서 교회지도자들의 주된 임무가 주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재림할 때까지 그 교회부재기간에 땅위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잘 위탁관리하는 교회지도자들이 주로 할 일이 무엇이냐면 성도들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영의 양식을 잘 먹이는 일 그것이 주된 일이어요.그 일을 잘 했으면 칭찬을 받을 것이고 그 일을 잘못하면 큰 벌을 받는 것이지요.그 일을 잘해서 칭찬을 받는 경우는 주인의 모든 전재산을 관리하게 된다. 그러는데 이것은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때에 하신 말씀과 같은 말씀이지요.
마태복음 19:28절을 한 번 읽어 봅시다."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그때에 교회지도자들 지금 에수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의 주권에 참여해요.예수께서 이스라엘과 온 세상을 통치하고 그의 주권에 참여하게 되어요.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최후의 만찬때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어요.아 그러니까 교회 지도자들이 예수의 부재기간동안 그것을 맡아 신실하게 그 일을 하면 예수의 주권에 동참하고 예수의 심판에 동참하게 되고 그렇지 못하면 자신들이 심판을 받아 영원한 죽음의 땅에 떨어지고 그렇게 된다.그 말이어요.
이 예수의 가르침도 이 비유도 바울사도가 그리고 신약의 다른 곳에서 사도들이 계속 이어받아 가르치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어요.우리가 잘 아는 고전 4:1-5절을 보시겠습니다."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하나님께로 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바울이 자기와 아볼로와 다른 사도들을 청지기들로 교회를 잘 위탁관리하도록 위임을 받았어요.그래서 자기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충성 신실함이어요.주께서 오실때에 자기를 청지기들이 그의 임무를 신실하게 감당했나 안했나 판단이 있고 신실하게 했을 경우에는 주로 부터 칭찬을 받는다고요.지금 우리가 읽은 비유와 사실 얼마나 가깝습니까?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마태복음 24장에 있는 청지기의 비유를 거의 고스란히 지금 자기와 아볼로에게 적용을 하고 있어요.
벧전4:10절도 그런 것이어요."각각 은사를 맡은 사람이....... 청지기들로 봉사하라." 벧전 5:2절이 더 가깝습니다.1-2 을 읽읍시다."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며." 베드로도 지금 예수의 이 가르침을 다시 자기가 세운 교회의 장로들 대표들 지도자들에게 그대로 지금 전달하고 있어요.첫째 그 임무를 신실하게 하라.둘째 섬기는 자세로 하지 군림하는 자세로 하지 말라.마24장의 비유에 악한 종은 자기 밑에 있는 사람들을 마구 때리고 자기는 자기 친구들과 더불어 흥청망청 마시고 그런 자세로 하지 말고 섬기는 자세로 하라.이렇게 베드로도 지금 예수의 비유를 잘 배워서 자기가 세운 지도자들에게 잘 전달해주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오늘날 우리 교회에 세워진 지도자들 목사들 장로들 짐사들 다 지금 예수의 비유대로 그리스도의 교회내에서 임무들을 다 맡았어요.그래서 예수가 오실때에 우리 각자에게 물음이 있다고요.주께서 우리 각자게에게 책임을 묻는다고요?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각자에게 주신 임무를 신실하게 감당했나 안했나 책임을 물어요.특히 교회 지도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잘 가르치는 것 가르침을 주는 자들이 특히 중요하다고요.그러지요.바울이 디모데와 디도에게 특별히 강조하는 바가 그것이지요? 목사들이 정말로 복음을 제대로 선포하는가? 그리스도의 진리를 제대로 가르치는가? 엉터리 복음 엉터리 가르침을 성도들에게 주면서 그들의 신앙을 왜곡하고 그들의 제자들을 헛되게 만들지 않았는가? 책임추궁이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악한 종의 태도는 남 위에 군림하는 태도 스스로 흥청망청 대접을 받고 잘 지내려는 그런 태도 이런 목자들이 우리 가운에 얼마나 많아요? 우리 스스로가 이런 목자들이 되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되지요.그래서 두번째 청지기 비유는 특히 지도자들에게 주어진 비유들로서 우리들에게 맡겨진 양떼를 어떻게 잘 돌보는가? 어떻게 잘 복음의 진리로 가르치고 잘 섬기는 태도로 직분을 감당하는가? 이것을 생각하게 되어요.책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을 하게 되어요.
이 비유들이 그러니까 근본의미는 주의 재림때를 우리 각자가 준비하도록 도둑의 비유에 대해서는 각자가 신실하게 믿음을 유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우리 삶을 잘 순종하면서 살아가야 함을 말했다면 두번째 청지기의 비유는 우리가 교회에서 각자 직분들을 맡은자들로서 그 직분을 잘 감당해야됨.신실하게 감당해야됨을 말했어요.
그러나 이것과 함게 본 것은 이 두 비유들이 바울은 어떻게 이 비유들을 해석해 가지고 교회에 가르치고 베드로는 또 어떻게 이 비유들을 해석을 해서 교회에 가르치고 이런 것을 우리가 보았어요.그래서 여기서 두가지를 교훈을 얻지요.
하나는 얼핏보기에는 신약의 공관복음을 지나 가지고 저 서신들로 가면 도대체 예수의 말씀이나 가르침에 전혀 안 나타난 것 같아요.그런데 자세히 보면 사도들의 가르침에 예수의 말씀들과 비유들 가르침이 다 들어가 있어요.정말 예수의 참된 제자들로서 예수의 가르침을 잘 이어 받아 가지고 자ㅣ들의 제자들에게 전수하고 있음을 우리가 이번 시간에 찾아 보았어요.
이것은 우리에게 또 무엇을 가르칩니까? 그러니까 우리도 예수의 이 가르침을 잘 배워서 그것을 우리의 제자들에게 우리의 양떼들에게 잘 전수해야됨을 우리가 배웠어요.도둑의 비유가 제일로 유명한 비유라고 그랬지요.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바울도 가르치나 베드로도 가르치나 요한계시록에도 두번이나 나오나? 이것이 우리이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 신약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의 오심에 대한 관심 그것에 대한 기대 그것을 위해서 준비하는 것에 대한 강조 그것이 얼마나 컸는가.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잖아요.
우리들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물론 작년에 시한부 종말론 열광주의자들도 있었지요.그것도 잘못되었지요.그러나 우리는 그 반대가 아닙니까? 여기 악한 청지기 같이 주께서 오시는 것이 더디니까 이 세상이 전부인것 같이 흥청망청 이 세상을 즐기고 신앙이 게으르고 제자도에 대해서 게으르고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초대 그리슫인들에게 바울도 베드로도 요한계시록에서도 자꾸 되풀이 해서 이 예수의 도둑의 비유가 가르쳐졌다는 것은 우리가 종말에 대한 기다림 기대 그것에 대한 준비 그런 자세로 살아야 올바른 삶임을 가르쳐 주고 있잖아요? 그래서 바울이 고전 7장에서 때가 단축되었다고 그래서 종말이 가까옴에 대한 늘 마음을 가지고 갈라고 가르치지요.우리 더 앞으로 공부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유(10)
미련한 처녀들과 슬기로운 처녀들
마태복음 25:1-13

오늘 공부할 내용은 마태복음 25:1-13절 까지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비유들을 차례로 쭉 살펴보고 있는데 지난 몇 주간에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비유들은 대개 예수님께서 이당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를 출범시키고 이제 잠깐 이 땅에서 떠나 계시는 동안에 성도들이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나를 가르치는 비유들을 우리가 살펴보고 있어요.예수님께서 이제 종말에 다시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고 대심판과 구원을 이루실 것인데 그때까지 이 땅에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성도들이 어떠한 자세로 살라야 하는가? 이것을 가르치는 비유들을 쭉 살펴보고 있어요.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비유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비유인데 아주 우리에게 익숙한 잘 아는 비유여요.이 우리 한국도 그렇지만 예수님의 예루살렘 유대 근동지방에 있어서 결혼잔치는 굉장히 크게 아주 중요하게 열렸어요.그런데 결혼의 풍속을 알아야할 필요가 있는데 결혼의 모든 것이 다 준비가 되었을때 결혼식이 열리는데 물론 준비하는데는 음식도 많이 준비해야 되겠지만 중요한 손님들이 다 도착을 해야 되고 그랬을때 신랑이 신부의 집에 당도한답니다.그래서 신부를 데리고 자기집에 커다란 행렬,춤을 추며 풍악을 울리는 그런 행렬을 지어서 신랑의 부모집에 신부를 데리고 가서 신랑의 집에서 결혼식을 하고 이제 큰 잔치를 하게 되는 그런 풍속이었다고 그래요.
그런데 이제 신랑이 신부의 집에 당도해서 신부를 데려갈려고 할 때 신부의 아버지가 또 마지막으로 조건을 심하게 내 걸어서 거기서 또 신부를 데려가는 조건ㅇ을 가지고 흥정을 하는 일도 흔히 있었다고 그래요.그렇게 되면 결혼식이 아주 늦어진답니다.그래서 밤중에 이렇게 늦어지는 일도 있고 그런 예가 있었다고 합니다.그래서 우리가 그런 것을 좀 이해해야 예수님의 비유가 현실감 실제감있게 이해가 됩니다.
어떻게 해서 신랑이 밤중에 옵니까? 바로 그런 결혼식 풍속이 있었던 가 보아요.여기 예수님의 이야기에는 열처녀들이 등을 준비해서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으로 나타나요.그런데 언뜻 보기에는 열 처녀 중에 누구 하나가 신부로 선택이 되는가? 그렇게 생각이 되는데 그것이 아니고 이 열처녀들은 아마 결혼식에 불을 밝히는 그런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은 처녀들인 것 같아요.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등이 아니라 횃불로 생각을 해야 된다.그래서 이제 횃불을 들고 신랑이 당도하면 춤을 추는 그런 역활을 부여받은 자들이다.이렇게 보아야 한다.
그런데 여기 지금 기름이 떨어진 이야기를 보면 번역이 된대로는 등을 든 여ㅏ들인데 그러기때문에 신랑이 당도했을때 그 집에서 춤을 추는 역활을 부여받았다기 보다는 신랑이 나중에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에 갈때에 그 행렬동안 등을 밝혀서 신랑과 신부를 데리고 신부집에 가서 잔치를 참여하는 역활을 부여받은 이 처녀들,그렇게 보는 것이 합당한 것 같아요.그래서 그 결혼식에 아주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은 처녀들이어요.
그런데 신랑이 오는 시간이 늦어지고 아마 시랑과 신부의 아버지가 우리 땅을 줄때에 지참금의 반대말로 양을 몇 마리 더 내라든지 소를 두어 마리 더 내라든지 하여간 주고 받는 것.여러분들 기억납니까? 구약의 야곱이 신부 하나를 데려 오기 위해서 몇년간 머슴살이를 했어요? 상상해 보세요.그래서 신랑이 딸을 데리러 왔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마지막 욕심이 생겨 가지고 양 50마리 더 내야 한다.아니면 우리 집에 와서 3년간 머슴살이를 해야 된다.하여간 조건을 내 걸었다 합시다.그래서 흥정이 길어지고 해서 신랑이 일찍 당도하지 못하는 것이어요.그런 동안에 동네 처녀들은 꾸벅 꾸벅 졸게 되는 거여요.그런데 마침 드디어 자정 쯤 되어서 신랑이 당당히 들어 오게 되었어요.누가 지금 "신랑이 당도했다."고 외치고 신부를 데려갈 자세입니다.그래서 다들 잠에서 펄쩍 깨서 신랑을 맞는데 이 바보 다섯쳐녀들은 문제가 발생했어요.그동안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않은 것이어요.기름을 조금만 가지고 나섰던 모양이어요.그렇게 신랑이 늦게 올지 몰라서.그래서 기름이 다 달아 가지고 불이 꺼질려고 할 판이어요.그러니까 현명한 다섯처녀들은 미리 늦게 와도 괜찮을 정도로 언제 올지 모르니까 그러니 충분히 대비해야 한다 해서 기름을 충분이 준비한 다섯친구들에게 기름을 좀 나누어 쓰자 내 등에 조금만 부어 달라.그러니까 그 친구들이 뭐라고 그럽니까? 우리가 서로 나누다가는 우리 등에 기름이 다 모자라서 신랑을 맞아 가지고 신랑과 신부를 맞아 가지고 행렬을 지어서 저기 신랑의 집에 가서 결혼식을 성대히 불을 밝히고 거행을 하고 그 잔치에 참여할 일을 우리가 다 못한다. 조금 있는 기름을 다 나누다가는 누구도 못한다.가서 빨리 기름집에 가서 기름을 사와라.
그러니까 이 바보쳐녀들이 불가능한 일을 하게 된 것이지요.뭐 빰중에 기름을 사로 어디로 가서 기름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 사이에 신랑은 신부를 데리고 가서 쳐녀들을 출발시키는 행렬을 통해서 신부를 데리고 집에 가서 결혼잔치를 하게 되는데 늦게야 바보처녀들이 와 가지고 우리도 잔치에 참여하게 해주오.하고 애원을 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왜? 이미 문은 닫혔고 이미 그들이 없이 결혼잔치는 다 이루어 져서 흥겹게 돌아 가는데 실제로 자기의 맡은 역활도 못하는 자들이 이제 뭐 새롭게 더 이상 필요하지도 않아요.그래서 여기 결혼잔치에 그들은 참여하지를 못하게 되었다.그러니까 그런 자들이 되지 말라.이렇게 지금 우리의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 지금까지 우리가 공부한 여러 비유들과 공통점들이 많이요.우선 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이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즐겨 잔치에 비유하셨는데 그중에서도 제일로 흥겨운 결혼잔치로 비유했다는 것.우리 여러번 설명했지요.왜 그런다고 그랬어요? 잔치의 상징성 때문에 그런다고 그랬지요.잔치의 풍요로움.지금 우리 이 땅에서의 사단의 통치 아래서의 결핍에 반해서 하나님 나라의 부요함.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또 우리의 이 땅에서의 시간적으로도,장소적인으로도,지혜로도,능력으로도,사랑으로도,모든 면에서 부족하여 모든 고난이 발생하는데 하나님의 모든 부요함으로 말미암아 얻는 만족함의 실태,우리잔치에서 이제 다들 만족하게 드셨지요.배불렀지요.그런데 그런 곳에서 더 먹겠다고 아귀다툼을 하십니까? 서로 더 먹기를 권해서 아주 사랑이 풍성한 그런 기쁨의 풍성한 잔치를 했어요.이 땅에서는 우리가 사단의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부족하여 서로 남의 것을 빼앗고 자기를 불리려는 아귀다툼으로 이 땅의 삶은 아픔과 슬픔의 삶이지요.전에도 여러번 설명했듯이 성경공부 하신 분들에게는 자꾸 되풀이 되는것 같아서 제가 지금 안할려다가 또 혹시 새로운 분 한두분 있을까 해서 그 분들을 위해서 다시 한번 하니까 여러분들 신물나게 들으신 분들은 조금 참으세요.
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즐겨 잔치와 상속으로 비유하셨나? 그런데 두가지의 뜻이 똑같다고 그랬지요.잔치의 상징성 때문에.잔치에는 풍요가 있어요.거기서 오는 만족이 있어요.그 만족은 어때요? 기쁨이 있어요.반면에 사단의 나라는 죄악과 쭉음으로 다스린다고 그랬지요.죄를 짓도록 하고 죄를 지으면 우리에게 죽음으로 댓가를 치루어요.거기에는 항상 결핍이 있어요.우리의 제한된 자원,우리의 조그마한 잠깐의 시간,장소적인 제약,지혜의 부족함,능력의 부족함,그런 결핍.결핍에서 항상 불만이 나와요.늘 만족하지 못함.늘 채워지지 못함.여기서 아픔과 슬픔이 나오지요.그러니가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는 방법이 남의 것을 빼앗는 방법.더 있겠어요? 사단의 나라에서는 삶의 자세가 남에 대한 자기주장,착취의 자세일 수 밖에 없어요.그러니가 거기에는 갈등이 있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늑대노릇을 하는 생존경쟁.
여기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자세는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의 자세.그러니까 잔치의 이런 상징성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우리가 하나님의 부한한 부요함을 덧입는 것이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다.
상속도 마찬가지여요.탕자의 비유 기억이 나십니까? 탕자가 자기의 분깃을 자기 속의 자기 조그마한 자원으로 자기 삶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할려고 아버지에게 등을 돌리고 멀리 가서 자기의 조그마한 자원으로 자기의 삶과 행복을 찾아 볼려고.그것이 아담의 이야기지요.탕자가 우리 아담이지요.곧 우리 각자지요.그래서 결국 어떻게? 결핍 속에 떨어져요.그래서 그가 구원이란 하나님게 다시 아버지께 다시 도라가서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어서 아버지가 그를 가락지를 끼우고 아들로 다시 회복을 시키시는 것이어요.아버지의 모든 부요함.창조주의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게 되어요.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고 음악을 울리고 춤을 추고.이렇게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잔치의 비유로 준비를 하셨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흥겨운 결혼잔치로 비유했어요.우리의 비유가 그중에 하나여요.
그러네 우리가 이미 막2:18-20 절에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결혼잔치로 비유한 것 하나를 배웠어요.한번 읽어 보시겠습니까? 왜 예수의 제자들이 요한의 제자들이나 당시의 경건한 유대인들과는 달리 금식을 하지 않는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에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같이 있을때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예수님은 지금 자기를 신랑으로 비유하고 자기가 지금 선포하고 시위하는 하나님 나라를 혼인잔치로 이렇게 비유를 해요.우리의 지금 비유와 똑같지요.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마태복음 25장의 비유와 똑 같아요.이 비유에서도 예수님은 자기를 신랑으로 비유하고 그 하나님 나라를 혼인잔치로 비유하고 있어요.
그런데 차이가 하나 있지요.여기 막 2장에서는 예수께서 지금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기쁜소식.지금 온갖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구원해 내는 그 하나님의 사역 죄인을 다시 하나님과 이웃에게 온전케 회복을 시키고 육신의 병든자들을 병을 고쳐주시고 삭개오 같은 자를 다시 건져주시고 의롭게 하고 하나님과 이웃과 올바르게 해서 그의 삶과 그와 이웃과의 관계에 샬롬이 일어나게 하고 이런 것들을 예수는 지금 하나님 나라가 실현이 되고 있음.그래서 현재 지금 자기의 복음선포와 사역을 통해서 실현이 되어 가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여기 지금 막 2장에서는 혼인잔치로 그래서 여기 지금 사단의 통치아래 있는 아픔과 슬픔이 극복되고 하나님 나라의 만족과 기쁨이 실현이 되는데 무슨 금식이 필요 있느냐? 그 말이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마25장의 비유는 예수께서 다시 재림하실때 완상될 하나님 나라를 혼인잔치로 비유하고 그때에 큰 구원이 있을 것임을 지금 이야기해요.그러니까 막2장에서의 혼인잔치의 비유는 예수를 통해서 지금 여기 실현이 되는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를 비유하는 것이고 마25장은 예수의 재림때에 있을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를 비유하고 있어요.
그런데 여기 지금 막2장 아까 19절 까지 읽었는데 20절을 이어서 읽으면 무슨 이야기가 나와요?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임하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여기서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잠깐 그의 제자들로 부터 떨어져 있을 기간이 있음을 말씀하고 계셔요.그러니가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우리들로 부터 잠깐 떨어져 계셨다가 다시 오시는데 그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의 태도에 대해서 지금 몇 주 동안 우리가 보는 이런 비유들로 가르치는데 그중의 하나가 오늘 우리 비유여요.그러니가 우리가 다시 한번 여기서 확인하는 것은 예수께서 자신의 하나님 나라 선포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자신을 통해서 출범했다는 것이고 그러나 종말에 완성이 된다.이렇게 예수께서 보고 계셨음을 우리에게 막2장과 마25자에 똑같은 혼인잔치의 비유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어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비유를 즐겨 씨의 비유로 들었어요.씨의 비유들중에 우리가 지난번에 집중해서 본 비유가 뭐여요? 겨자씨의 비유라든가 자라는 씨의 비유.여기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출범한 하나님 나라는 시뿌림이나 마찬가지여요.종말에 완성이 될 하나님 나라는 수확에 해당이 되는 것이어요.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씨를 뿌렸어요.이것이 점점 자라서 종말의 예수의 재림때 거두어지는 것이어요.그래서 에수의 하나님 나라의 오심은 순간적으로 한거번에 다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통해서 시작이 되었고 그래서 점점 자라서 종말에 완성이 될 것임을 가르침 것이어요.
그 다음에 두번째로 이제 이 비유의 핵심은 우리가 지난 몇 주 동안에 보아온 모든 비유들과 마찬가지로 종말에 재림함으로 말미암아 대심판을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완성하실 주에 대한 기다림의 태도가 얼마나 신실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지요.그런데 그때에 심판이 있을 것임.여기 오늘 우리 이야기에서는 그 심판이 현명한 지혜로운 쳐녀들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동참을 해서 기쁨을 누리게 되고 지혜롭지 못한 처녀들은 이 잔치에서 제외됨.그것에 대한 엄중한 경고여요.그들은 제외될 것임.
이런 구절들을 읽을 때마다 예수를 주라고 신앙고백하고 그 고백을 함으로 말미암아 세레를 받아서 이미 사단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이전을 하는 사람이 그것이 세레의 뜻인데.그래서 예수의 주권아래 이미 있는 사람이.아 이렇게 종말에 구원으로 부터 제외될 수 있느냐? 이런 문제를 많이 제기를 하지요.우리의 본문도 당연히 그런 문제를 제기해요.그러니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믿음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나라에서 해방이 되어서 이미 출범한 하나님 나라로 들어와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드리 종말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될 때에 구원이 완성이 될 때에 그 구원으로 부터 제외될 수 있느냐? 우리 개혁신학을 하는 장로교인들이 이 질문을 많이 해요.왜 그러느냐면 개혁신학에서 강조하는 것이 우리 구원이 만세전부터 창조전부터 하나님게서 우리를 이미 아시고 바울이 롬8장에서 그러듯이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그래서 우리를 믿음에 이르게 하시고 구원을 얻도록 하시고 그래서 의라 선언하셨고 그래서 이미 그의 영광을 누리도록 하나님의 본질에 참여하도록 이미 예정하셔서 우리가 구원을 얻었는데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종말에 구원에서 제외될 수 있느냐? 그렇게 문제들을 제기하기 시작을 해서 둘 중의 하나를 택하지요.
진정으로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믿음과 구원에 이미 이른자들은 절대적으로 탈락하는 법이 없다.그러니까 그들의 믿음이 외형적으로는 그가 믿는자 인 것 같았으나 실제로는 하나님의 예정을 받아서 실제로는 하나님의 예정을 받아 믿는 자가 아닌 자들,그런 자들은 제외될 수 있다.그래서 진짜 믿음이 아니었고 외형적으로는 믿는 것 같이 보였던 자들 만이 탈락하는 것이지 진짜 믿는 자들은 탈락하는 법이 없다.이렇게 생각을 하든지. 또 하나는 진짜 탈락을 부인해요.진짜로 예정을 받은 사람은 예정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첫 맛을 본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믿음으로 들어온 사람은 탈락하는 법이 없다.아무개가 타락한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그 속에 믿음이 계속해서 남아 있었다.그래서 이제 타락을 부인하든가 둘 중에 하나를 해요.
그런데 이것은 아주 성경의 가르침을 옳지 않게 해석하는 것이어요. 성경의 가르침을 우리들의 교리에 자꾸 두둘겨 맞추려고 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요.지금 이 본문은 분명히 무엇을 가르쳐요? 혼인잔치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아서 혼인잔치에서 할 역활까지 다 부여 받았던 처녀들 중에도 혼인잔치에 못 들어 갈 수가 있어요.그것을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어야 해요.이렇게 해서 보면 우리 성경에 두줄기의 가르침이 있어요.
하나는 아까 말한대로 예정론이고 우리 구원이라는 것이 우리의 공로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 지는 것이다.그러기때문에 믿음도 결국 하나님의 선물이다.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영적인 눈을 뛰어서 복음을 터득하도록 그 복음을 받아 드리도록 결단하게 하고 이런 것이 내가 한 줄을 알았는데 사실은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미리 역사하신 은혜다.왜 성령이 미리 와서 내게 그렇게 역사를 했나? 또는 하나님이 만세전부터 창조전 부터 나를 구원하시려고 작정하셨기 때문에 바로 그렇게 해서 내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 창조주 하나님이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나를 끝까지 지키신다(성도의 견인).내가 좀 실수를 하고 내가 성실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나를 끝까지 지키신다.그러니까 우리의 구원이 확실하다.이것을 우리 성경이 굉장히 강조하고 있어요.
반면에 이런 본문이 있어요.탁락의 가능성이 있음.그중에 제일로 심한 것이 무엇인가? 바울이 고린도전서 공부할때 무슨 말이 자주 나왔지요? 스스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서 있는 자가 넘어질 수 있음.바울은 자신에게도 그것을 적용하지요.고전9:16절에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사도인 자기도 화가 있다.하나님의 저주에 떨어진다.구원을 못 받는다는 말이어요.뿐만 아니라 고전 6장 음행하고 형제들과 다투고 세상법정에 싸움질이나 하고 탐욕하고 우상숭배하고 이런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그러니까 누구에게 하는 소리여요? 교회안에 있는 사람들에게.그들을 바울은 뭐라고 불렀어요? 고전 1장에.신앙이 풍부하고 하나님의 은사가 풍부한 사람들이다고 칭찬했어요.그들 중에도 계속해서 우상숭배하고 음행하고 탐욕해 가지고 형제들에게 송사나 하고 이런 짓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를 못한다.그 말이어요.하나님 나라에 한 발 들어 갔어도 결국 못 들어간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제일로 엄격하게 한 말이 어디에 나오느냐면 히브리서 6장에 나와요.뭐냐면 새로움을 통해서 빛을 받고 성령에 참여한 자가 되고 하늘의 좋은 선물을 맛보고 체험한 자가 타락을 하면,타락한다는 말은 이대 믿음을 버린다는 말이어요.무슨 일상의 죄를 짓는다.그런 말이 아니고 여기 타락이란 엄격하게 무슨 말이냐면 신앙을 버린다.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의 제사를 드렸음.그 신앙을 버리면 히브리서 6장에 두번째의 기회는 없음.그래서 멸망에 이른다.탈락하고 만다.
그래서 지금 보는 바와 같이 우리 성경에는 두개의 가르침이 있어요.이 두개의 가르침을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 들여야 되어요.그런데 이 가르침은 다 예정론과 경인론을 가르치는 것은 성경의 이 가르침이 나올 때는 그 가르침의 상황과 그 상황에서의 의도를 살펴서 우리가 해석을 해야 되어요.이것은 어느 때에 이 가르침을 주느냐면 가령 핍박의 상황이라든지 또는 성도가 자신의 연약함을 스스로 느끼고 죄책감에 사로 잡혀 있을때라든지 그래서 회의에 빠져 있다든지 이런 사람에게 주는 말씀이어요.무엇을 말하기 위해서? 구원의 확신을 주어서 안도하도록 하기 위해서 시험이 굉장히 많고 핍박이 심하고 그래서 가끔씩 우리가 실수하고 그런데에 대해서 죄책감이 있고 그래서 내가 믿음이 있나? 없나? 내가 이래 가지고 되겠는가?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두려워하고 기도도 잘 안나오고 이런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핍박이 심하고 그러는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옳은 일인지 그것이 결국 종말에 우리 구원을 확보할 것인지 이런 연약함과 회의에 빠진 상황에 우리 구원의 확신과 안도를 주기 위해서 가르쳐요.
반면에 탈락의 가르침은 아가 우리가 예를 들었지만 방탕하고 방종할 가능성에 책임있는 제자들을 촉구하기 위해서 이 가르침을 주지요.방탕으로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신앙의 게을러 짐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것은 불안에 빠지지 않도록 그런데 이 가르침이 주어지게 되는 상황과 이 가르침의 의도와 관계가 없이 이것을 그냥 추상화시켜 가지고 교리의 문제로 서로 대립을 시키면 이론적으로 모순이 되는 것이어요.
그러나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가 그렇게 훈련을 받아 왔어요.특히 장로교인들이.그러니가 자꾸 성경공부하면서 롬 8장에 장래의 것이나 현재의 것이나 칼이나 죽음이나 무엇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그러는데 아 거기 몇 장 더 읽어 보니까 이스라엘도 하나님이 불신앙으로 끊으셨다고.또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가니까 그놈들이 하도 못된 일을 많이 하니까 바울이 위협을 많이 해요.자꾸 성도들이 되풀이 해서 질문을 하는데 미리 이것들을 이 가르침이 주어지는 상황과 의도와 관계없이 거기서 완전히 추상화시켜 가지고 이론적으로 대립을 시켜서 우리 장로교 쪽에서는 이족이 중요하다.왜? 이 말은 예정론이나 견인론이나 사실은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다는 말이어요.그래야 하나님에 의해서만 구원이 일어나니까.이 쪽을 강조해야 된다.그러면 이 쪽을 강조하려면 성경의 이런 말씀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한대로 이중의 하나 택해야 된다.진자 예정을 받아 믿는 사람은 탈락한 법이 없어.그런데 우리교회의 누구집사 누구장로 결국 세상으로 가버렸는데 그 사람은 그냥 믿음이 있는 척하고 20년 30년 교회 그냥 따라 다닌 것이지 그래서 진정한 믿음이 없었던 것으로.믿음을 부인하든가 아니면 아까 이야기한대로 진정한 누구 잠깐 타락했지만 그것은 타락이 아니고 진자 예정되었으면 다시 돌아온다 해서 타락을 거의 진지성을 부인하고 그러나 이런식으로 해결을 하면 탈락할 수 있다는 경고에서 힘을 빼버리는 거여요.그래서 결국 방탕 방종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성경말슴을 약화시켜 버려요.그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거여요.그래서 이 방종으로 나아가는 것이어요.나는 예정을 받았으니까 나는 무슨 일을 해도 괜찮다.결국 이렇게 되어도 괜찮은 것으로 가게 되어요.그래서 성경말씀에 깨어 기도하라는 이 말이 효과가 반감이 되게 하여 버려요.
반면에 감리교 성결교 계통의 신학 소위 알미니안주의 신학은 이 쪽을 굉장히 강조해 가지고 이것을 약화시켜요.이런 신학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믿음에 달려있다는 식으로.그때 그렇게 되면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선행이 되는 것이어요.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믿음에 달려 있어요.그래서 우리가 믿음이 좋으면 구원이 있고 우리의 믿음이 사라지면 또 구원이 철수되고 그래서 구원이 왔다갔다 해요.그렇게 되면 일단 구원이 굉장히 불안하게 되어요.누구도 자기의 구원을 확신할 수가 없는 것이어요.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그것은 구원도 아니어요.왜? 인간의 성행의 믿음인들 그 선행에 달려 있다면 구원은 굉장히 인간적인데 어떤 인간적인 것도 구원이 될 수 없어요.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으로 부터오는 은혜로 우리에게 올 수 밖에 없으니까.그러니까 그것도 옳지 않는 것이어요.
우리가 이런 성경 말씀을 만났을때 이 말씀이 주어지게 되는 상황과 그 곳에서 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의도하는가를 살펴서 헤아려서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 들이고 이 말씀이 주어졌을 때 또 이 말씀이 또 이 말씀이 주어지는 상황이 어떤 것이고 의도가 무엇인가를 살펴서 그것을 그대로 받아 들일 것이어요.그래서 그 둘 다 다를 견지해야 되어요.둘다를 견지하게 되면 둘 사이의 이론적인 긴장이 있고 아까 이야기한대로 어떻게 믿음을 가진 사람이 탈락할 수 있는가? 이론적인 긴장이 아까 특히 그것을 상황과 관계없이 추상화시키는 그것이 아예 모순으로 까지 되어 버린다고요.그런데 긴장이 있을 때 뿐만 아니라 실제의 신앙생활에서도 약간 긴장이 되어요.이것을 가지고 둘 다 견지할 때에 건전한 신앙이 되는 것이어요.그러니까 자기의 신앙에 대해서 스스로 내가 이번에 신앙생활에 교회생활에 등한시하고 나태했다.큰 죄책감으로 하나님게 나아가기를 불안해 하고 두려워하는 사람. 여러분들이 그러분이라면 또는 여러분들이 그런 친구를 만났다면 그에게 이 말씀을 주어야 되어요.당신이 지금 스스로 죄에 대해서 깨닫고 그것에 대해서 아파하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그런 것이 다 뭐냐? 하나님께서 당신안에 지금도 역사하시고 계심.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으로 하여금 죄를 보게하고 당신을 하나님에 대해서 경외하게 하고 이것이 성령이 지금 당신 가운데서 역사하시고 계심.하나님게서 당신을 계속해서 붙들고 계심의 표징이다.그러니가 하나님께서 당신이 실수했어도 하나님은 당신을 계속해서 붙들고 있고 그렇게 종말까지 붙들고 계신다.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을 갖고 안도하고 이번의 큰 실수를 이번의 신앙의 게으름을 교훈 삼아서 깨어서 다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이렇게 축복해야 만 되는 것이어요.
반면에 어떤 사람은 자기가 구원의 확신이 있다 해 가지고 대표적으로 극단적으로 구원파 사람들,보통 우리 성경에는 고린도 사람들 같이 확신있다 생각해 가지고 나는 예정을 받아 이제 구원을 받았으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하고 방탕하는 사람들에게는 여러분들에게 그런 친구가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이 성경말씀을 열심히 읽어 주어야 되지요.분명히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되는데 그때에 당신이 구원으로 부터 제외될 수 있다.그래서 그를 책임이 있는 제자들로 불러와야 되어요.그래서 우리 신앙생활의 안도함이 있어야되지 기쁨이 있어야 되지요.평화가 있고 여유가 있어야지요.이것이 없으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에 다 안절 부절한다고요.
그래서 우리 신앙생활에 이것이 두가지가 다 약간의 긴장 속에서 견지가 될 때 우리 신앙생활이 건전한 신앙이어요.우리가 안도하면서도 다시 한번 우리를 되돌아 보는 그런 자세 되돌아 보면서도 되돌아 보았을 경우 우리의 신실하지 못함에 대해서 뉘우침 속에서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은혜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안도함을 갖는 것이 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건전한 신앙생활이어요.둘중의 어느 하나가 결여되면 건전하지 못해요.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경우 진짜 신앙이 있다는 분들이 이 쪽에 집착을 해 가지고 확신과 안도가 없어서 안절부절해요.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일 수록 더 마음에 기쁨이 없고 더 마음에 평화가 없고 여유가 없고 그래서 그 사람들의 대인관계에도 굉장히 여유가 없어요.그런 경우가 참으로 많아요.양쪽이 다 견지가 되어야 하고 우리가 스스로를 돌아볼 때에 양쪽을 다 확인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해요.
세번째로 등불을 밝힌 이야기도 우리가 지난번에 막 4:21-25절을 공부하면서 배웠지요.하나님의 백성이 등불을 밝히는 자들로서 그 등불을 침대 아래 두지 않는다는 그 비유를 우리가 하나님 나라 비유에서 배웠지요.그런데 마5:15-16절에 보면 등불을 밝힘은 선행을 지칭하는 말이어요.그래서 우리 마25장의 비유에서도 등불 밝힘을 아마 예수께서는 선ㄹ행을 두고 말씀하신 것 같아요.이 현명한 다섯처녀들은 예수의 재림전 지금 이 세상에서의 제자도의 삶을 성실히 삶으로 말미암아 선한 열매를 맺는 삶을 한 것이어요.반면에 성실하지 못한 여자들은 기름이 준비된 것이 적어 가지고 불이 꺼지는 암흑.다시말하면 선한열매를 맺지 못하는 여자들이어요.그래서 예수께서 재림을 하실때 대심판이 있어요. 그때에 선한열매를 많이 맺은 현명한 여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로 초대를 받고 구원의 완성을 누리게 되는 것이고 그때에 함량미달로 판정이 되는 선한 열매를 많이 맺지 못하는 제자들은 그들이 누구입니까? 여기 기름이 다 떨어져서 불을 밝히지 못하는 이 암흑의 세상에 환한 불을 밝히지 못하는 사람들은 탈락하고 만다.그렇게 지금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 누가복음 12:35절 누가 한번 읽어 보시겠습니까? "너의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기다리라." 아까 이야기한대로 마25장 1_13절 까지의 처녀들의 비유는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비유여요.그런데 누가복음 이 절이 사실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비유를 한 마디로 요약을 하는 말이어요.누가복음의 이 말이 어쩌면 원래 마태복음에 기록이되어 있는 이 비유의 일부였는지도 모르겠어요.그런데 누가는 다른 것을 다 생략하고 이 말만 실음으로 해서 같은 가르침을 줄려고 한 것 같아요.띠를 띤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띠를 푼다는 말이 무슨 말이어요? 허리 띠를 언제 풀어요? 잠자리에 들 때에.그러니가 잠자지 말고 그런 말이지요.뭄머하라.항상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성도의 순례의 길에 늘 깨어서 준비를 하고 이 어두움의 세상에 불을 밝히며 나아가라.그런데 여러분들 괜히 이것을 가르쳐 주어 가지고 시간도 다 갔는데 괜히 여러분들 스스로 관찰해서 제가 하지도 않는 문제를 제기해 가지고 시간을 끈다고 생각한 사람 있을지 모르겠는데 여러분들이 아가 목사님 말씀한대로 1년에 한번씩 성경을 읽고 그렇게 자세히 공부하면 분명히 우리 본문에서 이 문제를 발견하게 되어요.
우리가 읽은 이 비유와 전에 읽었던 청지기의 비유 또는 지금 내가 예를 든 눅 12:35절과 다른점이 하나 있어요. 같은 내용인데 중요한 다른점이 하나 있어요.뭐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비유는 열처녀들이 다 어떤 상태에서 신랑을 맞습니까? 다 졸다가 맞이해요. 그런데 청지기의 비유 그리고 여기 지금 내용적으로 같다고 해서 인용한 눅 12:35절은 자지말고 깨어 있으라는 것을 촉구하는 것이어요.그러니가 보통 예수께서 종말에 재림하는 자신을 맞을 성실한 제자들을 위해서 자지말고 깨어있으라는 그림을 쓰는데 오늘 우리의 본문은 같은 가르침을 주면서도 어던 상태를 상징하고 있어요? 꾸벅 꾸벅 조는 상태.그렇게 되니까 25장 13절이 잘 안맞아 들어가지요.25:13절이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는 알지 못하느니라.지금 이 비유에서는 깨어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거든요.기름준비를 많이 하는 것이 문제여요.그러나 열처녀들이 다함께 잠든 것이어요.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예리하게 괜히 가르쳐 주었습니까? 여러분들이 그렇게 오래 공부하면 문제를 발견하게 되어요.아니 여기 지금 비유는 다른 비유와는 달리 깨어있는 것이 문제가 아닌데 기름을 준비하는 것이 문제인데 아 그 비유의 끝머리에는 똑같은 경고 깨어 있으라 하니 이것어디 좀 맞아 들어가지 않지 않느냐? 문자적으로 보면 그래요.그런데 결국 이 전체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주의 오심에 늘 잘 대비를 하고 있으라 철저한 제자도의 삶을 잘 살아야 된다는 것이지요.그래서 혹시 정확히 공부하는 사람들은 여기 마25장 13절 말씀은 마태가 예수의 이런 종말에 오시는 주에 대해서 잘 대비하고 있으라고 할때에 주시는 예수의 일반적인 가르침을 내용이 똑같기 때문에 이비유에도 덧붙였을 가능성이 많아요.그래서 원래의 비유는 12절로 끝나고 13절은 마태가 이것이 결국 예수께서 청지기 비유나 모든 비유로 촉구하는 깨어 있음의 자세를 견지하라는 말이다 하기 위해서 여기에 덧붙였을 가능성이 많아요.혹시 그룹성경공부하다가 누가 질문하면 그렇게 답을 하세요.
그런데 이제 마지막으로 살전 4:15-17절 까지만 한번 읽어 보시겠습니다.바울이 우리 예수님의 비유를 어떻게 쓰는가를 한번 보시겠습니다."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너희에게 말하노니 주의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더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여러분들 숙제 하나 드리겠습니다.오늘 읽은 마 15:1-13절 직ㅁ 읽은 살전 4:15-17절 까지 공통점들을 한번 찾아 보시고 그렇게 찾아 보시면 바울이 예수의 비유를 하나도 인용만한 것 같은데 아 놀랍게도 바울이 여기 살전 4:15절에서 뭐라고 시작을 해요? "주의 말씀으로" 주의 말씀이 바로 그 비유여요.주의 말씀을 내가 너희들에게 전한다.바울이 에수님의 말씀이나 비유를 전혀 사용을 안 한 것 같은데 자세히 보니까 지금 여기서 우리가 마태복음에서 오늘 공부한 그 비유를 그댜로 적용시키고 있는 거여요.바울서신에서 이것이 얼마나 성도들에게 탈락할까 조심하라는 경고만 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 구원의 확신에 대한 위로를 주는 것으로도 사용함을 발견하게 되어요.

하나님 나라의 비유(11)
달란트 비유
마태복음 25:14-30

오늘 공부할 비유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우선 본문을 먼저 교독하겠습니다."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때에 .......슬피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비유는 지난시간 몇 주 동안 우리가 살펴온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돌아 가셔서 우리를 떠나 계시는 동안 그가 이제 종말에 재림하실텐데 그 재림하기 전에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이 그의 제자들이 어떠한 태도로재림하는 그 분을 맞을 준비를 해야되는가.어떠한 태도로 주께서 지상에서 우리로 부터 부재기간 동안에 삶을 영위해야 되고 봉사를 해야 되는가 하는 일련의 비유들의 마지막 비유를 오늘 살펴 보게 되어요.
그런데 이 이야기는 이미 익히 잘 아는 이야기여서 다시 되풀이 하지는 않겠어요.그런데 조금 생생한 감을 갖기 위해서 한 달란트가 어느 정도의 돈이냐면 한 달란트는 성인의 10년분의 노임에 해당이 되어요.그러니까 오늘날의 돈으로 환산을 하면 가령 월급을 100만원을 받는다고 합시다.그러면 1년에 1200만원 연봉,10년분이면 1억 2천만원이지요.상당한 자본을 이 주인이 세 종들에게 주면서 그것으로 사업을 하라고 한 거여요.그러니까 한 달른트 받은 사람도 1억 2천만원의 상당한 밑천을 받았지요.그런데 여기 다섯 달른트 받은 사람은 6억을 받은 사람이고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2억 5천을 받은 사람이고 상당한 돈을 가지고 장사를 하라.그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가 앞서 공부했던 비유들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비유들과 공통됨이 무엇입니까? 주께서 우리로 부터 부재하시는 동안 그러니까 그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성실한 자들이 있고 성실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음을 말하면서 성실하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기쁨에 당도하지 못하리라는 경고가 주어져 있고 이런 것들이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일련의 비유들의 공통점이어요.
그런데 다른 비유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보았던 비유들은 대개 주께서 예기치 않은 중에 오리라 그러니까 늘 준비하는 마음으로 있어야 한다.청지기의 비유도 그런 것이었고 거기에 초점이 있었고 열처녀의 비유에서도 거기에 초점이 있었지요.그런데 오늘 비유는 기다리는 것 보다는 기다리는 동안에 우리가 성실히 제자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거기에 초점이 있어요.
그러니까 마5:15절에 예수께서 등을 말 아래 두어서는 안된다고 한 말과 일맥상통하는 비유라고 볼 수 있어요.여기 한 달란트를 받아 가지고 그것으로 열심리 사업을 해서 이익을 남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땅을 파고 거기에다 숨겨 가지고 사업을 못한 이 종은 마치 예수의 산상수훈에 나오는 등불을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자로서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진리를 세상 암흑세상에 널리 선포해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게 하는 의무를 가진자가 그 계시의 불을 등불을 말 아래 둠으로 해서 전혀 제자도의 의무를 다하지 못함.선교를 다하지 못함.그런자와 똑같은 자가 된 것이지요.
이런 자는 예수께서 또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씨를 뿌려서 좋은 밭에 뿌려서 많이 생산하면 생산할수록 그 사람에게는 더 많이 주어지고 그렇게 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산을 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가진 것도 빼앗아 간다고막4:24-25절에 경고를 하셨는데 그것과 비슷한 이런 가르침을 하고 있는 비유여요.
여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주인이 종들에게 그들의 능력대로 능력에 따라 이렇게 달란트를 나누어 주었다는 것 아닙니까? 15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다섯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다.이렇게 말하고 있잖아요.이것은 우리에게 가령 바울리 로마서 12장에서 설명하는 주께서 우리 각자에게 성령의 은사들을 나누어주심을 상기시켜요.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들에게 이 은사들을 나누어 주셨어요.
엡 4:7-8절을 읽어 보실까요? "우리 각각 ...."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승천하셨을때에 그의 백성들에게 성령의 은사들을 나누어 주셨다.그것을 잘 활용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주셨다.각자에게 그러니까 은사들이 다르고 그 은사글을 어떤 사람에게는 현저한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좀 덜 현저한 은사를 주시고 이렇게 주셧어요.우리에게 이와같은 바울사도나 벧전 4장에 있는 가르침을 연상케 하는 비유여요.그런데 이 비유를 보면 처음 두 성실한 종들 다섯 달란트를 받아서 사업을 해서 다섯 달란트의 이익을 남긴 사람 또 두 달란트를 받아서 두 달란트의 이익을 남긴 사람 이 사람들에게 하는 주인의 칭찬이 똑 같아요.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 할지어다.그러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다양한 은사들을 받고 또 다양한 재능 다양한 크기의 재능들을 받았는데 어떤 사람들은 더 많은 재능을 받고 어떤 사람들은 덜 받고 그런 것이 큰 문제가 아니고 우리 각자 받은 재능을 최대한 성실하게 주를 위해서 쓰고 이웃을 위해서 활용함으로서 열매를 맺으면 결국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는 축복을 것이다.재림하시는 주로 부터 칭찬이 같음을 우리가 여기서 알게 되어요.
우리는 이 세상에 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더 큰 재능을 받은 것에 대해서 자랑하고 어떤 사람은 덜 받은 것에 대해서 열등감을 가진 다든가 시기한다든가 이럴수가 있고 그런데 그런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많음을 우리가 알게 되어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위로부터 받은 달란트를 최대한 활용해서 주를 위한 성실한 삶으로 말미암아 재림하셔서 우리의 심판과 구원을 이루실 주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구원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은 그것이 중요한 것임을 우리가 알게 되어요.그런데 지금 하나의 문제가 발생이 되어요.왜냐하면 이 비유의 누가복음판은 달아요.아 려러분들 제가 괜한 것 가르쳐 주지요.그냥 그런가 보다 생각하시면 되는데 눅 19:11-27절까지 거기도 또 같은 비유가 나오는데 문제는 좀 다르게 나와요.
누가복음 19:11-27절을 교독합시다." 저희가 ......" 여러분들 이 비유와 앞의 마태복음 25장의 비유가 아주 유사하지요.멀리 가는 주인이 종들에게 장사자금을 주어서 장사를 했는데 두 종들은 신실하게 해서 이익을 많이 남겼고 한 종은 신실하지 못해서 장사를 하지 않고 게으름을 부려서 아무 것도 남기지 못했고 그래서 주인이 돌아와서 성실한 종들에게는 많은 상급을 내렸고 성실하지 못한 종에게는 있는 것도 빼앗아 버리는 엄한 심판을 내림.이것이 똑같지요.
그런데 무어가 다릅니까? 자세한 것에서는 다른 것이 많지요.우선 달란트가 어느정도 돈이라고요? 10년분의 노임 요새 월급을 100만원한다면 1억 2천쯤되지요.므나는 그보다 훨씬 작은 100일분의 노임에 해당이 된다고요.석달 반의 노임이니까 한달에 100만원이면 350만원쯤의 노임 하여간 그 다음에 한 사람이 열므나 받았고 한 사람이 다섯 므나 받았고 한 사람이 한 므나받았고 이런 상세한 점에서 다르지요.
누가는 멀리 가게 된 주인을 귀인이라고 부르고 그 사람이 멀리 가게 된 이유도 왕위를 받으러 갔다고 상세히 저고 있어요.그런데 그 영토의 백성들이 그 사람이 왕이 되는 것이 싫어 가지고 그 사람 뒤에 대표단을 보내 가지고 그 귀인보다 더 높은 사람에게 황제에게 우리는 이 사람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합니다.이 사람을 왕으로 만들어 주지 마소서.이렇게 청원을 했다는 거여요.그래서 이 귀인은 결국 왕위를 받아 가지고 와서마테복음에 없는 일 그러니까 한 므나 받았는데 그것으로 장사하지 않은 자를 심판한 것은 마태복음의 비유와 같은데 여기 또 하나 누가복음에만 있는 것 자기의 왕권에 반대한 그 동네 백성들 그 도읍의 사람들을 다 죽였다.이렇게 심판을 했다.그것이 지금 마태복음하고 누가복음에 큰 차이점들이지요.왜 이런 틀림없이 같은 비유인데 왜 마태와 누가가 달리 보고하느냐?
아마 여러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제안들이 있는데 둘 중에 하나겠지요.하나는 예수께서 같은 가르침을 정황에 따라 조금씩 달리 가르쳤을 것이어요.그래서 근본적으로는 비슷한 비유를 정황에 따라 어떤 때는 조금 덧붙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생략하기도 하고 이렇게 해서 가르쳤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마태는 좀 단순한 비유를 적고 있고 누가는 에수께서 어떤 다른 정황에서 같은 비유를 좀 더 확대해서 초점을 한 두개 더 갖는 그런 비유로 확대를 해서 가르쳤는데 그 판을 누가는 적고 있고 그럴 가능성이 하나 있고 또 하나는 누가가 원래 두개의 비유들을 종합해서 지금 오늘 누구판 같은 모습이 되지 않았겠나? 원래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달란트의 비유 마태와 근본적으로 같은 비유에다가 두번째 요소 누가판에 있어서 마태판에 전혀 없는 부분 왕권을 받으러 갔는데 뒤로 그 도읍의 사람들이 그 분이 와이 되는 것이 싫다고 가서 청원하고 그러나 결국 왕권을 받은 귀인이 와서 왕이 되어 가지고 자기를 반대한 시민들을 죽였다.그런 또 다른 비유였는데 누가가 두 비유를 섞었을 가능성이 있고 둘 중에 하나겠지요.
그러나 그 중에 어느 것이라고 해도 괜찮아요.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예수 당시의 예수의 청중들이 누가가 말하는대로 그 비유를 들으면 아주 실감나게 비유를 들었을 거여요.왜 그러냐면 그것이 바로 헤롯왕의 사건이어요.예수가 말하는 비유가 헤롯왕의 사건이어요.우리 성경시대의 유대역사를 보면 헤롯이라는 이름이 참 많이 나와요.여러사람의 해롯이 있었어요.그런데 우리가 아는 헤롯은 크게 두 사람, 하나는 헤롯대왕이라는 사람인데 마태복음 1-2장에 나오는 헤롯이어요.예수의 탄생때에 동방박사들로 하여금 예수의 탄생지를 알려 달라고 해서 예수를 없애 버릴려고 했던 왕 그 사람이 헤롯대왕이어요.그 사람은 주전 4년에 죽었어요.
그 사람이 죽자 그 사람은 원래 반 유대인이었어요.아버지는 에돔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유대인이었어요.이 사람이 로마 황제에 의해서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이 되엇는데 유대인들이 굉장히 반대를 했었어요.그래서 헤롯이 자기 왕권을 행사하기 위해서 용병을 사가지고 예루살렘에 대해서 전쟁을 3년간이나 했어요.그래서 겨우 왕권을 차지한 뒤로 오랬동안 37년간이나 통치를 하면서 무단하게 통치를 했어요.물론 로마사람에 의해서 임명된 왕이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주전 4년에 죽었어요.예수의 탄생과 함께 그 무렵에 죽었어요.그러자 이 헤롯대왕이 자기 영토를 자기 아들 세명에게 나누어 주었어요.(유언으로) 유대땅과 사마리아 땅과 이두매야 땅은 아켈라오의 아들에게 주었고 그리고 그에게 왕의 칭호까지도 넘겨 주었어요.그리고 저기 갈릴리 땅은 헤롯 안티파스에게 넘겨 주었어요.그런데 이 헤롯 안티파스는 우리가 알아요.성경에 세례요한의 목을 베고 예수를 핍박하고 예수로 부터 그 여우같은 놈이라고 욕을 먹고 나중에 예수를 재판하고 한 헤롯은 이 지금 헤롯안티파스여요.갈릴리의 통지자.그 다음에 세째 아들 빌립은 갈릴리 호수의 동부 북부 그 영토를 주었어요.이렇게 헤롯의 왕국을 셋으로 나누어 가지고 나누어졌어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로마사람들의 추인을 받아야 해요.그래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두매와 그러니까 헤롯왕국의 중심부를 다스리게 되었으며 헤롯으로 부터 왕의 칭호까지도 승계받게 된 아르켈라오가 실제로 로마에 갔어요.그래서 로마의 황제로 부터 왕이라는 그리고 왕으로서 그 영토를 다스릴 수 있는 권리를 받을려고.그러니까 여기 예수의 이야기 귀인같이 했다. 그 말이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아르켈라오를 좋아할리가 없어요.헤롯대왕도 싫어하던 참인데 아르켈라오는 또 어머니가 사마리아인이었어요.헤롯대왕 자신도 반유대인이었는데 그의 아들 아르켈라오는 4분의 1 유대인도 아니어요.그러니까 좋아할리가 없어요.사마리아 그 원수같은 사마리아 사람들 그래서 유대인들이 로마 황제에 우리는 아르켈라오가 우리를 다스리는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한다는 청원을 하도록 대표단을 파견햇어요.로마황제가 헤롯대왕의 유언을 결국 추인을 했어요.그렇게 해서 헤롯의 왕국을 삼구분해서 세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고 아르켈라오가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두매아를 통치하게 되었어요.다만 아르켈라오에게 왕이라는 칭호는 쓰지 못하게 만들었어요.왕이라는 칭호는 쓰지 못하고 한 종족의 통치자라는 말로 에르스나고스(?)라는 칭호만 들었어요.
그것을 받아 가지고 와서 아르켈라오가 10년을 통치했는데 그 통치가 아주 좋지 못했어요.자꾸 문제가 발생하니까 나중에 로마황제가 아르켈라오를 쳐서 그의 통치를 종식시키고 총독을 직접 보내서 총독정치아래 들어간 것이어요.그 총독들이 여럿이 있었어요.다 못되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우리가 잘 아는 충독 빌라도 그런데 갈릴리는 계속 헤롯 안티파스가 통치를 했어요.그래서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활동을 했을때 핍박을 받게 되고 그의 재판도 받고 그런 것이지요.
그러니까 예수의 비유를 듣는 사람들에게는 엊그제 아르켈라오 이야기를 지금 예수가 비유로 들은 것이어요.자신이 십자가에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께 가서 하나님 아버지로 부터 만유의 주권자로 만유에 군림하는 왕권을 받으러 가는 것으로 그리고 있어요.그리고 결국 그 왕권을 받아 다시 이 땅에 오신 분으로 자기를 그리고 있어요.참으로 놀랍지요.아 그 유대 사람들 귀에는 유대인들에게는 아르켈라오 하면 치가 떨릴텐데 아주 좋아하지 않을텐데 사람들이 그 아르켈라오의 이야기를 자기에 대한 비유로 예수께서 썼다.상당히 재미있지요.
예수께서 앞으로 자기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께 가서 하나님으로 부터 만유에 군림라는 왕권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하나님께 ㄲ, 까지 등을 돌리고 반대하는 원수들을 벌 주시는 심판자로 오실 것을 하필이면 아르켈라오의 예를 들어 가지고 설명을 했다는 것이 참 재미있잖아요.
하여간 다시 한번 보지만 예수께서 그 삶의 정황에서 그것이 씨뿌리는 자의 농부의 이야기든지 어부의 이야기든지 또는 예수의 재료들 중에 그런 것이 많지요.그러나 가끔은 장사하는 달란트 므나 장사하는 비유 삶의 정황에서 사람들이 쉽게 또는 목수일 하는데 있어서 아버지로 부터 아들에게 비법이 전수되는 이런 것들을 재료로 했어요.사람들이 쉽게 즉각적으로 이해할 그런 자료들을 비유로 해서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가르쳤어요.그래서 여기 지그 아르켈라오를 재료로 삼아서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 나라에 가서 하나님으로 부터 천지의 창조주이심,역사의 지배자이신 하나님으로 부터 왕권을 받아서 다시 오신다. 그것을 지금 말하고 있는데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시편 110:1절을 말하는 거여요.
시 110:1절" 여호와게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다윗이 여호와께서 내 주 메시야에게 이르시기를 내 으편에 앉ㅇ라 우편에 앉은 것은 왕의 대권을 위임받는 것 그래서 여호와가 주여요.그런데 여호와 우편에 메시야가 등극을 해요.메시야가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으로 부터 그의 왕권을 위임을 받는다고요.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 주되심 만유의 주로 군림하심을 위임받아요.이 시 110:1절은 우리 신약성경에 가장 많이 인용이 되는 구약의 말씀이지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 하나님의 왕권을 위임받으심 그래서 아들로서 아들은 상속자라는 뜻이다.아버지의 대권을 위임받아서 만유위에 군림하심.이것이 예수의 십자가에 죽음과 부활 그리고 지금 현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을 미리 예언한 말씀으로 우리 신약성경에 가장 많이 인용된 구약이어요.
그런데 그 중에 대표적으로 한 곳만 보면 빌 2:6-11절 이다.이것이 지금 시편 110편 1절을 풀어서 말하는 거여요.그런데 우리가 막 12:25절 이하를 보면 예수께서 스스로 시편을 인용해서 다윗이 메시야인 자신을 이미 주라고 불렀음을 말씀하지요.지금 이 비유에도 그와 같은 예수의 자기이해가 담겨 있는 것이어요.곧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시편 110편에 예언된대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거여요.그래서 하나님으로 부터 그의 주권 왕권을 위임받아서 만유의 주로서 우리에게 오실 것이어요.그 진리를 지금 아르켈라오 이야기를 비유하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지금 가셔서 하나님의 왕권 주권을 위임받아서 이 땅에 다시 올때까지 이땅위의 시민들 가운데는 백성들 가운데는 두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어요.여기에 보면 눅 비유로 말하면 예수의 종들이 있고 예수의 종되기를 거부하는 그의 왕됨을 거부하는 자들이 있고 그런데 예수의 종들 중에서도 또 두갈래로 갈라져요.그러니까 사실은 세 종류여요.크게는 두종류.예수의종들이 있고 또 그가 왕됨을 거부하는 불신자들 예수의 주되심을 거부하는 불신자들 그의 주권을 불순종하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겠다.이런 자들을 말하지요.
그런 자들에게는 그의 주가 돌아와서 있을 심판이 하나님 나라의 구원에 들어가지 못함.영생에 들어가지 못함.죽임을 당함.엄중한 경고가 있고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종들 가운데에 우리가 거기 속하는데 거기에 두 종류가 있어요.이것은 마태복음의 비유와 같은 것이지요.주께서 주신 은사들을 잘 활용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많은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이 사람들에게는 상급이 있고 주로부터 은사르르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적지않은 은사여요.그것이 한 달란트면 1억이 넘는다고요.한므나여도 350만원이 되요.적지 않은 은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땅에 묻는다든지 무슨 수건으로 싸놓는다든지 후자를 심판하는 주께서는뭐라고 불러요? 악하고 게으르고 무익한 종이라고 불어요.
게으르고 무익한 것은 알겠는데 왜 그것이 악합니가? 주의 뜻을 주를 제대로 말지 못하고 주를 독한 사람 남에게 못된 사람 씨뿌리지 않고 거두고 헤치지 않않고 거두는 남을 착취해서 남의 것 뺏는 사람 이렇게 주에 대해서 이해를 못하고 이해를 할려고도 하지 않고 그의 뜻에 순종하려고 하지 않고 이런 사람 우리가 성경공부도 게을러서 하나님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주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주의 뜻을 살피고 그의 뜻대로 살려는 그런 노력도 없고 게으르고 이런 사람 이런 사람은 가진 것 까지도 뺏기는 거여요.가진 것이 무엇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나라에 받아들여졌지요.우리가 구원의 첫열매를 얻었지요.
그런데 이 비유대로 말하면 그것 까지도 뺏긴다.이렇게 말하면 전에도 우리가 누차 이야기했지만 이 비유대로 이렇게 생각하면 금방 우리는 아니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그 구원이 견지된다고 성경이 가르치지 않느냐? 예 그렇지요.성경이 그것도 가르친다.그러나 바울의 말대로 한다면 선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선자가 넘어질수 있음.그것을 어떻게 두가르침이 서로 적당히 합리적으로 타협을 이룰까 그렇게 헤아릴려고 하지 말라고 그랬지요.둘다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되어요.
하나님편에서 철저히 우리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 진 것이므로 신실한 하나님 설령 우리의 미련함에도 불구하고 불성실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우리 구원을 끝까지 지키시리라는 그 진리도 우리가 견지해서 그것이 그럼으로 해서 우리 신앙이 안도함이 있어야 된다고요.안도함의 반대되는 말은 안절부절함.
반면에 성경은 우리가 제자도에서 성실하지 않으면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구원의 첫 열매도 놓칠 수 있다.히브리서 6장 10장에 엄중한 언어로 경고하지요.한번 빛의 쬐임을 얻은 사람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진리를 알고 구원의 첫 열매를 얻은 사람이 신앙을 버리면 두번째 회개는 없음.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뒷걸음질치면 하나님의 오래참으심 가운데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낭떠러지가 있을 수 있음.그것도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중요시해야 된다고요.그러면 두렵고 떨림의 자세가 있어야 되어요.그래서 신앙의 안도함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신실함에 전적으로 맡기는 안도함과 그러나 날마다 나의 제자도의 삶을 재점검하는 구렵고 떨림의 이 자세가 건전한 긴장을 이루었을때 우리 신앙이 건전한 시낭이라고 여러번 가르쳤는데 여러분들 기억나십니까?
여기 지금 이 비유는 후자쪽으로 우리에게 다시 한번 마태는 아까 달란트 10,5,1달란트 이렇게 배분되었는데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남긴 사람에게 같은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은혜 같은 종류의 축복이 선언되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그런데 누가에 있어서는 그 반대여요.누가판의 이야기는 이 사람들에게 므나를 나누어 주었지요.한므나씩 똑같이 나누어 주었어요.그런데 한 사람은 열므나르르남기고 한 사람은 다섯므나를 남기었어요.그 사람들에게 상급도 다르게 남겨졌어요.열므나 남긴 사람에게는 열고을을 다스리라. 다섯므나르르남긴 사람에게는 다섯고을을 다스리라.전에 우리가 고전 3장을 공부하면서 상급에 대해서 공부했지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의 가치관을 이 세상의 관점에서 이 세상의 경험을 비유로 한다면 지금 분명히 열고을 차지한 사람이 더 큰 상급을 받고 더 좋은 것이지요.다섯고을 받은 사람은 덜 좋은 것이고 그런데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의 가르침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 세상의 가치관이 뒤집어져요.완전히 뒤집어져요.그래서 이 세상의 큰자가 작은 자가 되고 하나님 나라에서는 통치자가 섬기는 자이고 그러니까 여기 열고을 다스린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와 같이 열고을위에 군림해서 그 백성들로 부터 대우를 받고 그런 것이 아니고 열고을을 섬기는 거여요.
막 10장 42-45절을 읽어 볼까요? "..........." 예수께서 이르시는 하나님 나라가 마치 이 세상의 질서와 똑같은 것인줄 알고 세베대의 아들들이 거기 수상 부수상을 하게 해 달라고 예수께 부탁을 하니까 다른 제자들도 분해가지고 우리도 저 제자보다도 조금도 못하지 않는데 가장 좋은 자리는 다 저자들이 차지하고 우리도 좀 차지하게 해달라고 서로 경쟁이 붙었어요.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이 세상의 징서와는 완전히 뒤집어져요.하나님 나라에서는 지도자가 섬기는자여요.이 세상의 지배자는 군림하는 자여요.하나님 나라에서는 종노릇하는 거여요.이런 정신으로 우리가 비유를 이해를 해야지요.예수가 열고을을 맡기신다니까 상급이라는 것이 뭐냐? 바울이 고전 9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섬김자체가 상급이어요.바울은 뭐라고 그래요? 전에 우리가 고전을 공부할때 배웠지요.자기가 그런 엄청난 고난 가운데에 주께서 주신 사도의 권리 회중들로 부터 생계를 얻어 살면서 복음을 선포할 권리가지 포기 하면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바울은 상급을 위해서라고 그러지요.
그런데 그 상급은 무엇이냐? 복음을 무혀로 효괴있게 선포하는 끄 자체 그것이 상급이어요.그래요.섬기는 것 그러니가 우리가 너무 추상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아파트 로얄층으로 생각을 해요.냄새나는 1층은 게을렀던 성도들이 가는 데고 로얄층은 애써서 새벽기도도 열심히 했던 성도들 전도를 열심히 했던 성도들이 가는 곳이라고 너무 그렇게 생각할 것은 아니어요.중요한 것은 더 열심히 섬기는 것 더 많은 책임을 지는 것 이것이 상급이라는 거여요.
그러니까 우리의 가치관이 그렇게 변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지금 여기서 벌써 그렇게 변하면. 그러면 우리의 한국의 정치도 많이 정화될 것입니다.인간관계도 많이 정화되고 거기에 정말 하나님 나라의 샬롬이 일어날 것이어요.정의가 일어날 것이어요.자유가 확대되고 하여간 여기 우리에게 경고와 권면이 있어요.
여기서 두가지만 조금 더 관찰하고 넘어 가려고 합니다.하나는 이 종들이 어떻게 주인 또는 왕되는 분의 종들이 되었는가를 설명하지 않아요.그들의 재능으로 너 다섯 달란트 이익을 남겼으니 내 종이 되라.너 두달란트 남겼으니 내 종이되라.이렇게 말하지 않아요.종이 되었어요.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어떻게 돕니까? 우리의 공적으로 우리의 달란트로 됩니까? 우리의 능력으로 됩니까?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요.하나님이 그의 은혜로 우리를 자기 백성삼았고 주 예수께서 우리를 그의 은혜로 그의 종 삼았어요.하나님 나라 속에 있어요.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첫열매를 누리는 사람들이어요.
우리에게 그러니까 지금 중요한 것은 은혜로만이지요.그런데 그 구원의 상태에 있는 우리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예수의 주권에 충실히 순종하는 제자도의 삶을 성실히 하는 것 그것을 위해서는 권면과 경고가 주어져요.여기서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나타납니까?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실 분이지만 동시에 그의 뜻을 어긋나고 그에게 반대하는 그를 끝까지 그에게 등을 돌린 사람에게는 엄한 심판자로 나타나요.
그 다음 마지막으로 예수의 재림때 있을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상태는 어떤 상태입니까> 그냥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는 다 잠자는 아니면 그냥 모여서 예수께 찬양예배만 드리는 그런 것이 아니고 열고을을 맡아 다스리고 다솟고을을 맡아 다스리고 이런 것이 뭐어요? 계속해서 섬김 서로에 대한 섬김의 장 서로에 때한 더 많은 섬김을 하는 그런 관계가 계속되는 곳.그래서 서로에 대한 더 많은 섬김의 관계가 계속되기 때문에 그 곳에 진정한 샬롬이 있고 진정한 기쁨이 있고 생명력이 가득찬 곳.그렇게 우리가 생각하도록 이 비유는 가르치고 있어요.
자 우리가 이 비유로 아까 서두에 말씀을 드린대로 주께서 부활승천으로 말미암아 그가 다시 우리의 구원과 심판을 완성하여 재림하실때까지 우리로 부터 부재기간 동안 우리가 어떤 자세로 남아야 되는가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비유들에 대한 공부들을 일단 마쳐요.이 다음에는 다른 종류의 비유들을 우리가 살펴 보겠어요.두가지로 요점을 간략이 하면 늘 언제오실지 모르는 깨어서 늘 기도하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그런 일련의 비유들을 보았지요.그 날과 그 때는 모르니 항상 종말에 비추어 오늘을 살아 한다.그것은 항상 주를 맞을 주를 영접할 그런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말도 되지만 오늘을 너무 절대화하지 말고 오늘 여기에서의 가치들에 너무 혼을 빼주지 말고 종말에 완성의 빛에 비추어서 오늘의 가치들을 상대화시켜서 오늘의 가치들로 부터 자유로운 사람들로 살아야 된다는 것.다른 하나는 오늘 주로 살핀 것 그 동안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들을 최대한 성실하게 써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많은 열매를 맺으면서 살아야 한다.그런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유(12)
양과 염소의 비유
마태복음 25:31-46

오늘 같이 공부할 말씀은 마25:31-46절 입니다.여기의 이 비유는 먼저 비유의 뜻을 제일로 먼저 밝혀요.31절에 인자가 자기영광으로 모든 천사들과 함께 올때에 자기 영광에 앉아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 대한 심판을 할 것임.이것에 대한 비유이다.이렇게 예수께서 비유에 대한 뜻을 밝혀요.
여러분들이 성경을 많이 읽으셨으면 여기 지금 25:31절 이 말씀과 또 그때에 심판때에 구원받는자들에게 만세전부터 창세전부터 예비된 하나님 나라가 주어질 것이다는 점에서 여러분들이 금방 아 이것은 다니엘서 7장에 예언된 말씀을 예수께서 지금 염두해 주시고 하신 말씀이다.그것을 알게 될 것이어요.
다니엘서 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앞으로의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대해서 환상으로 미리 계시해주셔요.처음에는 네 괴물들이 차례로 나타나는 것을 보여주어요.이 괴물들은 이방왕조들을 표현하는 말인데 이런 이방왕조들이 차례로 일어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아주 못살게 핍박하고 짓밟고 할텐데 그런 끝에 하나님께서 또 하나의 환상을 보여주어요.하늘이 열기고 하늘에 하나님의 왕좌들이 놓이고 다니엘서 7장 9절 부터입니다.개역번역에는 단수로 되어 있는데 사실은 복수여요.왕좌 하나가 놓인 것이 아니고 그중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난 하나님께서 옛적부터 계신이 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어요.그 하나님이 보좌에 등극하시고 천사들이 부복해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송하는 장면이 펼쳐지고 책이 열려서 모든 사람들에 대한 심판을 하는데 그 하나님의 백성을 못살게 구는 마지막 왕조를 대표하는 뿔난 괴물을 불로 멸망시키고 그리고 내가 또 보니(단7:13) 한 사람의 아들같은 이가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께로 부터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받았다.하나님이 그 통치권을 이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에게 주셨다.그것을 다니엘의 환상 가운데서 본 것이어요.
한 사람의 아들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와서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여기 지금 하나님이 등극하시고 모든 천사들이 예배하는 가운데에 온 세상에 대한 심판이 열려서 뿔난 괴물을 하나님을 반항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못살게 굴었던 이방왕조를 심판의 불로 멸망시키고 그런 끝에 한 사람의 아들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하나님께 나아와서 하나님으로 부터 나라를 받았다.
다시 말하면 한 사람의 아들같은 이가 하나님 우편에 등극을 해서 하나님으로 부터 그의 통치권(나라) 왕권을 위임받았다.그런 말이어요.하나님 우편에앉는다는 말은 시110:1절에 나오는 말로서 우리 신약성경에 가장 많이 인용된 구약의 구절인데 하나님의 우편에 앉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대권자가 된다는 말이어요.하나님의 대권을 위임받아서 하나님 대신에 행사하는 자 된다.그런 말이어요.그래서 에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 우편에 높임을 받았다고 고백을 하지요.우리 사도신경에 그렇게 고백을 하지요.하나님 우편에 높임을 받아서 우리를 심판하고 구원하시러 온다.우리 시도신경에서 외울때마다 고백하는데 그것이 우리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고백되는 부분이어요.시110:1절의 성취로서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운자 가운데서 일으키셔서 자기 우편에 높이셨다.그 말은 하나님의 왕권을 통치세계에 대한 통치권을 주권을 예수에게 위임했다.그 말이어요.그래서 예수가 만유의 왕의 통치권을 대행한다.그란 말이어요.그것에 대한 예언이 단7장에 있는 것이어요.
그래서 이 하나님과 여기서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그냥 사람이란 말이어요.숙어여요.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셈족언어에서 하나의 숙어여요.한 사람이라는 말이어요.사람이라는 말도 종을 말해요.거기에 아을디라는 말이 붙은 경우에는 종들 중의 하나 라는 말이어요.사람이라는 종중의 하나.그러니까 한 사람이란 말이어요.
그런데 그 분이 어떤 분이냐? 사람같은 모습으로 사람같은 분으로 다니엘의 환상 가운데 나타나는 거여요.아까 단7:5절에 하나님은 노인 형상으로 나타났지요.하나님도 한 사람같은 분으로 그런 형상으로 나타났고 그런데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 그래서 이름을 옛적부터 계신 이라.노인형상으로 나타났는데 여기 또 하나 환상중에 또 하나 나타난 분이 있는데 그 분도 사람같은 분이어요.
그런데 구름을 타고 온 것에서 우리는 아 이분이 인간이 아니고 신적인 존재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어요.구약에서는 구름이 하나님의 운반체여요.하나님이 구름을 타고.구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상징하는 .그래서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상징해요.그래서 이 한사람의 아들 같은이라. 사람의 모습을 한 또 하나의 신적인 존재여요.또 하나의 인간.제 2의 하나님 같은 분.옛적부터 게신 노인 같은 하나님과 또 한분 사람의 모습을 지니는 또 하나의 신적인 존재.그 분이 하나님 우편에 등극하여 하나님의 통치권을 위임받는 장면을 이제 다니엘이 보았어요.
에수께서 31절에 보금서에 보면 스스로를 인자라고 그러지요.이것은 단 7장을 염두해 두고 자기가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이라.그 말이어요.여기 단7:13절에 나오는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이다.단7장에 계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시는 분이다.그런 말이어요.예수께서 인자라고 부르는데 그 말이 무슨 뜻이라고요? 자기가 단7장에 예언된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이다는 말이어요.자기가 바로 단 7장에 예언된 그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는 분이다.그런 뜻이지요.
자 다니엘은 여기까지 환상을 보았는 데 이것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고민하고 있을때 천사가 18절 부터 이 환상의 뜻을 해석해 주어요.이것이 무슨 뜻이냐면 천사가 해석해 주기를 당분간 아까 말씀을 드린대로 괴물들로 상징되는 무지막지한 이방왕조들이 일어나서 세상을 다스리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못살게 굴 것인데 하나님게서 그것을 그대로 줘버리지 않고 종국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그의 백성들 그때까지 신실하게 남아 있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이것을 단 7장에서 뭐라고 표현을 한느냐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에게 주신다느느뜻이다.그러게 해석을 해요.
앞에 나오는 네 괴물들은 네 이방왕조들을 상징한다고요.왕조들,이들의 세계가끝나고 하나님께서 종결을 지우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심판으로 다 물리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게서 그의 나라를 주신다는 뜻이다.그러니까 여기 다니엘이 본 환상과 18절 이하의 천사의 해설을 연결시키면 이제 인자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바로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이고 상징이고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 나라를 중개해주시는 분이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그러니가 예수께서 자신이 아주 독특하게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어요.아마 여러분들이 많이 가지고 있는 주석성경도 보면 아마 인자라는 말이 신약시대에 메시야에 대한 칭호였다.이렇게 많이 나와있을 거여요.사실은 그렇지 않아요.인자라는 말은 원래 칭호가 아니었어요.그냥 한 사람이라는 말이어요.그런데 예수께서 그것을 자기에게 칭호로 만드신거여요.거기다가 우리말로는 잘 표현하기 어려운데 관사를 더 붙여서 그 사람이다.자신을 에수께서는 항상 그 사람이라고 가르쳤어요.사람의 아들이란 말이 그 당시 유대교에 있어서 무슨 메시야저기 칭호가 아니었고 다윗의 아들이라든지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라든지 다윗의 가지라든지 다윗의 씨라든지 이런 것들은 다 메시야에 대한 칭호였는데 인자라는 말,사람의 아들이란 말이 그와같은 칭호는 아니었고 그냥 사람이라는 말이어요.하나의 숙어여요.
예수께서 그 말에 그 관사를 붙여 가지고 자기에 대한 칭호를 만든 거여요.왜 그것이 칭호가 되느냐?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그 사람의 아들이라.그런 뜻이었다고요.자기가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의 역활을 하는 분이다.자기가 바로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을 받아 하나님의 대권을 위임받아서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해 주시는 분이다.그런 뜻이어요.예수께서 자기를 인자라고 불렀다고요.
자 그러니까 여기 그런 분으로 에수께서 단 7장의 예언이 종국적인 성취로 나타날때에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예수께서 여기인자로서 그 인자로서 그 사람의 아들로서 이렇게 하나님의 우편에 하나님의 보좌위에 등극했을때에 천사들이 이에 부복하고 예언하는 것이지요.그때에 단7장에 그림대로 심판이 벌어지는데 그 심판을 비유로 에수께서 지금 설명을 하는 것이어요.
그때 마치 복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일단의 사람들을 왼편에 오른편에 구분할 것이다.이것은 책들을 보면 당시의 팔레스티나에서 여기 양들과 염소들을 한 무리로 치기도 했던가 보아요.그것이 한 목자가 양따로 염소 따로 칠수가 없으니까 함께 섞어서 친 경제적인 편의도 있겠지만 또 목축의 지혜와도 좀 관계가 있었던가 보아요.양들 보다는 염소들이 더 참을성이 없답니다.양들이 더 미련해 가지고 더 이상 뜯을 풀이 없는데도 양들은 계속해서 거기서 뜯는 경향이 있답니다.그런데 염소들은 참을성이 없어서 풀이 벌로 없으면 곧장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해가고 이런 것을 염소들이 더 잘 안대요.그래서 염소가 이동을 해가면 양들도 따라 가고 이렇게 되어 가지고 풀뜯기는데 양과 염소를 이렇게 섞어서 치면 좀 더 좋았답니다.그래서 그렇게 쳤대요.그리고 밤이 되면 팔레스티나 기온이 상당히 내려갈때에 이제 거꾸로 양들은 추위를 잘견딥니다.염소는 못 견디고 염소는 좁은 우리로 끌러 드리고 양들은 밖에 세우고 낮에는 함께 섞어서 치다가 밤이되면 양들과 염소를 구분했답니다.지금 그런 것을 배경으로 예수께서 비유를 말씀하고 계신 거여요.
그 심판의 때에 에수께서 그 사람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대권을 위임받아서 심판의 권세를 가지고 나타나셔서 온 세상을 심판할 때에 마치 밤이 되어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사람들을 구분한다.그래서 양떼는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런데 무엇에 따라서 구분했냐? 35절 부터 양들은 야들로 비유되는 사람들은 내가 목말라 주릴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때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때 영접하였고 벗었을때에 입혔고 병들었을때에 돌아 보았고 옥에 갇혔을때 와서 보았다.이들을 뭐라고 부릅니까? 37절에 의인들이라 그러지요.이들에게는 단 7장의 예언대로 뭐가 주어진다고요? 하나님 나라가 주어져요.종국에 완성이 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축복.구원의 완성이 주어진다.그 말이어요.반면에 염소로 비유되는 사람들은 42절에 내가 주리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때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때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때 옷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때와 옥에 갇혔을때 돌아보지 아니하였다.그리고 이들을 41절에 저주를 받는 자들이라고 부르지요.이들에게는 주의 심판이 주어져서 마귀와 그의 종들이 받게 되는 영원한 반열에 심판을 받게 된다.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염소로 상징되는 악인들과 양으로 상징이 되는 의인들의 차이가 뭐여요? 주를 섬겼는가? 아니 섬겼는가? 그것이지요.내가 주릴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반면에 익인들은 내가 주릴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주를 섬겼는가? 안섬겼는가? 의 차이지요.
지금까지 우리가 여러 비유들이 그런 점에서 같았지요.심판의 기준이 얼마만큼 우리가 주께 신실하였느냐에 있다고 그랬지요.지금까지 우리가 본 여러 비유들이 다 똑같이 가르쳤어요.얼마만큼 우리가 주께 신실하고 주께 순종하고 주를 섬겼는가에 따라서 심판이 내려진다.그런데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비유들과 지금 오늘 보는 비유의 큰 차이는 무엇이냐? 주를 섬긴다는 뜻이 무엇이냐? 주께 신실하다는 뜻이 무엇이냐? 그것을 오늘 비유는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는 거여요.
지난번에 본 달란트의 비유 기억나십니까? 열달란트 받은 사람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한 달란트 받은 사람 열달란트 다섯달란트 받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받은 달란트를 잘 활용을 해서 주의 재산을 많이 늘리는 사람들로 칭찬을 받고 상급을 받았지요.반면에 한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를 오해하고 받은 달란트를 활용하지 못해서 주의 뜻을 잘 섬기지 못해서 벌을 받았지요.거기서는 우리가 달란트는 무엇이고 달란트를 잘활용한다는 뜻이 무엇인가? 예수께서 구체적으로 그 비유들을 설명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오늘 이 비유는 바로 그것을 설명하는 거여요.주로 부터 받은 달란트를 잘활용한다는 뜻이어요.다시말하면 주께 신실하고 주를 섬긴다는 뜻이 뭐냐? 애매하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그런것이 아니고 아주 구체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나그네를 돌보고 병든자들을 돌보고 감옥에 갇힌 자들을 돌본 한마디로 하면 이웃을 잘 돌보는 이웃을 사람함.그런데 그 이웃은 우리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이웃이어요.그것이 또 우리가 좋아하는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내용이 아닙니까? 이웃이 뭐냐? 하나님을 헌신을 다해서 사랑하고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라.예수가 모든 계명을 이 두마디로 요약을 했지요.두마디가 아니고 하나의 사랑의 계명이어요.하나님을 헌신을 다해서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아.그런데 그때 이웃이 누구냐?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이웃이 우리에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이웃이어요.
여기 오늘 우리의 본문도 마찬가지여요.우리의 이웃이 누구냐? 주린 사람,목마른 사람,헐벗은 사람,감옥에 갇힌 사람,병든사람,이 사회에서 항상 소외되고 박탈당하고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지극히 작은 사람들 이들이 이웃이다.이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했느냐에 따라서 심판이 이루어진다.이 말이어요.그런데 구체적으로 에수께서 이렇게 헐벗고 굶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되고 옥에 갇히고 병들고 이런 사람들을 에수께서는 뭐라고 부릅니까?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지요(40절) 내 형제들중에서도 더 많이 어려움을 당하는 고난받는자들.세상적으로 보면 지극히 작은자들,이런 자들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했느냐에 따라서 심판이 주어진다.이렇게 말하잖아요.
그러면 여기 지금 이렇게 여러움을 당한 사람들이 사회에 소외되고 고통을 받는 이런 일반적인 사람들을 가르치느냐? 아마 여러분들 성경을 읽으면 다 그렇게 해석을 할 것이어요.성경학자가 마태복음을 자세히 읽어 보니까 딴 생각이 들었어요.왜? 마태복음 10장을 보시겠습니까? 마10:40-42절까지 보십시다.예수께서 이제 자기의 제자들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도록 내어 보내는 선교파송의 상황에서 하신 말씀입니다.마10:40-42절과 마25:31-46절 까지 본문을 비교해 보면 여기 마 25장의 굶주리고 목마르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나그네로 쫓기고 병들고 감옥에갇힌 사람들이 선교사로 유리 방황하면서 이곳 저곳 다니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예수의 제자들을 가르킨 것이 아니냐? 그런 생각이 들게 되었어요.예수의 제자들 예수의 복음을 선포하러 유대땅과 사마리아 땅과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나그네 노릇하면서 때로는 굶주리고 때로는 목마르고 헐벗고 핍박받고 감옥에 갇히기도한 제자들을 영접하는 자는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고 그들에게 찬물 한그릇이라도 준자는 에수에게 준 것으로 간주되어서 그들에게 최후의 심판때에 상이 있을 것이다.그것이 마10장 40-42절 까지 말하고 있지요.이 두 본문을 연결시키면 여기 마 25장에도 형제들 에수께서 형제들이라고 부르는 굶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로 유리방황하고 병들고 감옥에 갇히고 하는 자들은 예수의 제자들을 가르킨다.그러한 해석이 가능해요.
그렇다면 이 우리가 보는 비유는 주의 심판때에 에수께서 모든 민족들을 다 심판을 하신는데 그 심판의 척도가 복음선포하러 온 에수의 제자들 선교사들에 어떠한 태도를 취했느냐? 그들을 잘 영접하고 그들을 도와서 복음선포가 잘 이루어 지도록 했느냐? 아니면 그들을 핍박하고 죽이고 복음을 거절하고 했느냐? 에 따라서 양 의인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구원의 완성을 받을자들,염소들 악인들 저주받을 자들,사단 마귀에 속한 자로 구분이 된다.그렇게 해석을 하면 그런 뜻이 되겠어요.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열심히 그렇게 해석을 할려고 해요.그런데 마10:40-42절 까지와 마25:31-46절 까지와 놀라운 유사성도 있지만 큰 차이가 하나 있어요.마 10:42절에는 '누구든지 나의 제자의 이름으로 오는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그릇이라도 주는 자에게는 상이 있다.'그런데 오늘 우리가 보는 것은 마 10장은 에수의 제자인줄 예수의 제자이기 때문에 냉수를 주는 이야기 이고 여기 마 25장은 정반대로 양으로 구분이 되었던 사람이 자기가 모르는 거여요.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는데 그 고통받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르고 그 고통받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곧 예수에게 주는 것임을 모르는 거여요.마10장은 명백히 에수의 이름으로 예수의 제자들 오는 자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왔기에 예수의 제자들이기에 따뜻히 대접한다는 이야기이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여러분들이 그냥 마10장에 대한 지식이 없이 읽을 때에 얻는 인상대로 읽으면 되어요.
오늘 읽은 본문은 헐벗고 굶주리고 하는 자들이 특별히 복음선포하러 나서는 사도들,선교사들이 아니라 이 사회에서 고난받은 사람들이어요.이 사회에서 소외되고 고난받은 사람들 가난하고 쫓기고 감옥에 갇히고 병들고 하는 사람들 여러분들 복음서를 읽어보면 에수께서 특별히 이런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부여 주었어요.그래서 가령 눅4:16절에 있는 예수의 첫 메시야로서의 설교가 이사야서의 61장의 예언대로 가난한 자 전쟁포로들 감옥게갇힌자들 병든자들 그들에게 마태복음에서도 산상수훈에 가난한자들 우는자들 예수께서 누구를 특별히 영접하고 누구를 도왔어요? 사회에서 멀리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든자들,문둥병자들,저기 죄인들 이런 사람들을 에수께서 특별히 돌보도록 가츠쳤어요.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비유도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되어요.
자 그래서 우리가 여기 구원을 살펴보면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는데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을 불렀어요.그래서 일단의 사람들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응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 왔어요.그래서 예수를 주라고 고백했어요.반면에 일단의 사람들은 예수를 거부함으로서 자기들이 스스로 그렇게 생각을 안할지 모르나 실제로는 사단의 통치에 그냥 머무르게 한 거여요.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사람들은 예수를 주로 고백함으로서 벌써 여기서 구원의 첫 열매를 맛보기 시작했어요.그런데 에수께서 종말에 다시 오실때 아까 비유가 가르쳐 준대로 이제 심판이 일어나요.그런 가운데 이것이 분리되겠지요.양떼와 염소로 구분이 되어요.염소로 상징이 되는 자들은 마귀와ㅓ 그의 사자들 마귀의 종들과 함께 멸망을 받을 자들이어요.그러니까 마귀의 나라에 속한 자들로 분리될 것이어요.그런데 예수께서 지금 이 비유를 누구에게 주고 있어요? 그의 제자들에게 하고 있어요.지금 에수의 메시지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응한 자들에게 지금 하는 것이어요.그러니까 에수의 최후의 심판때에 물론 이렇게 지금 예수의 복음에 응한 자들과 그것을 의식적으로 거부한 자들이 분리될 것은 사실이어요.
그러나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지금 에수께서 이 비유를 그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이른바 믿음으로 응한자들 가운데 분리가 일어날 것임.이 자들이 염소로 그의 복음을 거부한 자들이 염소로 마귀의 나라에 속해서 마귀와 함께 멸망에 처해지는 것을 너무나 상식적인 당연한 일인데 에수가 이 비유를 그의 복음에 응한자들에게 지금 하고 있다고 해서 무엇을 알게 되느냐면 그의 복음의 메세지에 믿음으로 응한 자들 가운데서도 양과 염소의 분리가 일어날 것임.쉽게 말하면 지금 교회에 다 속한 자들 가운데서도 양과 염소의 분리가 일어날 것임.밀과 가라지의 비유와 똑같은 비유이지요.이 사상이 가시적인 교회 속에서는 또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자들 속에서 주의 심판때까지 진짜 주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 진짜 하나님 나라의 백성 밀,또는 양이 있고 외형적으로는 거의 구분할 수 없는 염소 영과 구분하기 어려운 염소 또는 밀과 구분하기 어려운 가라지가 있을 수 있음.최후의 심판때 그것이 갈라짐.그래서 양 밀 진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로 확인이 될 것이고 진짜 속하는 사단의 나라에 마귀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마귀와 함께 불의 멸망에 처해질 것임.지금 그런 이야기여요.
그런데 어떻게 그 심판이 이루어지느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게 마시게 했고 내게 영접했고 내게 찾아왔고 ....내게가 누구입니까? 주 에수 그리스도께 우리가 얼마나 신실했느냐? 아까 이야기한 대로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한 모든 비유들이 다 똑같다고 그랬어요.그런데 이 비유가 주 에수께 신실하다는 뜻이 무엇이냐? 우리 마음속으로 그냥 주여 주여 부르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방언을 열심히 하고 술답배 안하고 성경열심히 읽고 그런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고 이웃을 우리의 도움을 필오로 하는 자,내가 10우너 도와 주면서 저분이 나를 100원 보와줄수 있다.내가 언제라도 반대급부를 계산할 수 있는 그 사람이 이웃이 아니고 김영삼씨가 야당국화의원으로 갉장차에 실려다닐때 내가 사진찍고 같이 데모하면 그 사람 언제 대통령 되면 나 한자리 기켜주겠지 그것이 이웃이 아니고 이웃이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어요.그 이웃에게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서 심판이 이루어진다.
마 7:21-23절을 보시겠습니다.여기서도 최후의 심판때에 대한 말입니다.겉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로서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자들로서 주여 주여 기도 열심히 하고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는 자 목사노릇하는 자 설교많이 하는자들.우리 같은 사람들 큰일 났어요.또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는 자들 잠실 주경기장에 수만명 모아놓고 손바닥만 내밀어도 막 뒤로 자빠진다고 하는 사람들,그런 사람들이 양떼들로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까? 그 사람들은 예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떠나거라.그들이 우리 25장의 비유에 염소에 속해서 그들은 사실 사단의 나라에 속한 자들로서 마귀와 함께 영벌에 처해진다.하나님의 뜻을 행한자 그 자를 21절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자 오늘 묵상하는 비유대로 말하면 이웃에 대한 사랑 구체적으로 나의 도움이 필요로 하는 자들 굶주리는 자들 헐벗은 자들 억울하게 옥살이 하는 자들 그들에게 우리가 얼마만큼 도왔느냐? 에 의해서 심판이 이루어진다.
최후의 심판이라는 것은 지금 현재 우리의 상태의 재확인에 불과해요.왜 그러느냐면 전에도 여러번 강조했지만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은 또는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예수께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그에게 전적으로 순종한다.그런 말이지요.믿음으로 의인이 되었다는 말이 무슨 말이어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회복이 되었다.피조물로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회복이 됨.그것이 의인이 되었다는 말이어요.올바른 관계가 무엇이냐면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함.그 말이어요.거꾸로 죄인이라는 말은 사단에게 의존하고 순종함.그 말이지요.그러니까 하나님께는 의존하지 않고 거부함.이 길은 사단에게 의존하고 순종함.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하고 죽음으로 월급을 주어요.죽음이 현재 모든 고난들로 증상이 나타난다고요.예수는 우리를 어떻게 다스려요? 의로 다스려요.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의를 행하게 해요.의를 행한다는 말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이웃과 올바른 관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함.이웃과 올바른 관계가 이웃을 사랑함.그러면 생명이 일어나요.생명이 정의와 평화 환경적인 건강,육신적인 건강으로 나타나다고요.예수께서 우리를 이런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에서 불러내어서 이런 상태에 있던 자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해서 하나님과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을 시킨 것이어요.이것을 우리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 애매하는 것이 아니고 종말에 에수가 오실때에 그때 처음으로 결정이 되는 것이 아니고 또는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고 종말에 예수가 오실때에 완성될 것이지만 지금 벌써 여기서 체헝하게 된다고 그랬지요.믿음으로 들어가고 지금 여기서 벌써 그 구원을 누린다고 그랬지요.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에 우리가 전적으로 의존하고 순종하면 우리가 이런 것을 얻어야 이것은 여러번 설명했듯이 이런 자유와 정의와 평화와 건강과 이런 것이 확대되어요.
우리가 과연 여기 지금 가난한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자들에게 옷을 입히고 병든 자들에게 돌보고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면.왜 그렇게 살아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하나님 나라에 있다는 소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는 소리는 바로 이 두계명을 실천한다는 말이어요.하나님 나라에 들어간ㅆ다는 소리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는다는 소리인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순종이 뭐여요? 하나님 나라의 통치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이다.우상숭배 맘몬숭배하면 죽임이 와요.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을 했으면 성수대교가 잘 만들어졌을 것이고 아파트도 잘 지어졌을 것이고 지하철도 잘지어졌을 것이고 그러면 어떻게 되어요? 우리의 평안도 확대되어요.우리가 평안해지면 지금 바다보래로 지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 불안하다고 그러지요.불안하면 어떻게 되어요? 건강이 헤쳐져요.맘몬을 숭배하지 않고 하나님을 헌신했으면 아파트 지은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는 의미로 아파트를 지었으면 어떻게 되었을 거여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확대되었겠지요.그런데 사단을 쫓고 맘몬숭배해서 죽음이 확대되는 판이어요.
그러니까 제가 상당히 오랬동안 여러분들과 같이 하나님 나라를 공부하면서 늘 강조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 그렇게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데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강은 사랑 그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고 순종하는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지금 여기서 그 구원을 나타내요.하나님 나라의 구원이라는 것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의 온전케함.지금 여기서 벌써 자유와 정의와 평화와 건강의 확대로 모든 좋은 것.우리삶을 온전케 하는 것으로 나타나요.이것이 물론 종말에 완성이 되지요.그 종말에 완성될 형태의 그것을 지금 여기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지요.너무나도 큰 것일 것이기 때문에.그러나 그것의 첫열매를 지금 여기서 우리가 이런 형태로 구체적으로 누리게 되어 있어요.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으로서 ㅘ나님의 통치아래있는 사람으로서 그 통치가 구체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몸과 같이 사랑이 계명으로 오는데 그 곳에 순종한 사람은 그 순종행위로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들어내는 것이고 그렇게 순종하지 않은 사람은 형식적으로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그 주의 이름으로 설교도 하고 주의 이름으로 병자도 고치고 난리를 피지만 실제로는 사단의 나라에 속한 사람이어요.그래서 최후의 심판때는 고스란히 그것이 드러나는 거여요.확인이 되는 거여요.최후의 심판을 벌써 우리의 삶으로 결정을 하는 거여요.
최후의 심판은 다른 것이 아니고 지금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드러내는 거여요.진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는 사람이고 진짜 예수의 주권에 의지하고 순종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형식적으로 예수를 주여 주여 하고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굉장한 믿음을 가졌다 저렇게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고 저렇게 기도를 열심히 하고 저렇게 복음선포를 많이 하고 전도를 많이 하고 믿음이 좋다 하지만 에수께서 내가 전혀 보른다고 할 수 있어요.우리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에 대한 헌신 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게으른 사람은 겉으로는 종교적 열정이 있을망정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볼 수 없다.지금 우리는 양과 염소를 구분못하고 밀과 가리지를 구분하지 못해서 그런 사람들 다 훌륭한 하나님의 백성인 것으로 간주할지 모르나 심판때는 다 드러나서 그런 사람들은 원래 속하는 사단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사단과 함께 멸망받게 된다.지금 그런 경고여요.그러니까 우리에게 얼마나 무서운 경고여요.우리 한번 우리 스스로를 다 돌아보아야 겠어요.
그런데 여기서 이 본문이 두가지로 오해되는 경우가 많아 가지고 그것만 간단히 지적하고 마칠까 합니다.하나는 이 본문을 보고 어떤 사람은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이 아니고 사랑이라는 선행으로도 구원받을 수 있다.그런 가르침이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이 본문을 잘 이해를 못하고 하는 말이어요.이 본문이 아까 누구에게 주어지는 이야기라고 했어요? 믿음으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제자들.그들에게 주어닌 거여요.그들에게 그 믿음이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왔지만 그 하나님의 통치 아까 이야기한 두계명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 반대말은 우상숭배라고 그랬지요.우상숩ㅇ배의 가장 절실한 형태가 무엇이라고요? 맘몬이즘 그것 항상 같이 가는 말입니다.하나님 나라에 들어왔다 하면서도 우상숭배를 하고 맘몬이즘 이 세상적인 가치 돈 권력 명예나 추구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왔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순종하지 않고 자기이익만 추구하면서 사는 그런 일이 없도록 영고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말씀이라는 것.이미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믿음이 전제된 이야기지.그런 믿음이 없이 그냥 선행을 통해서 구원을 맏는다.그런 말은 아니지요.
아까 믿음이 우리를 올바른 관계로 회복을 시키는데 올바른 관계에 머무는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함.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그의 나라로 불러 들였어요.예수의 속죄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가 덮어지고 하나님게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들로 만들었어요.의인만들었어요.이제 우리에게 중요한것이 뭐여요? 하나님의 통치를 받음으로 내가 우리의 삶의 현자에서 구체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헌신 대신 하나님을 의존하는 대신에 내가 돈을 의존한다든지 권력을 의존한다든지 하면 그 순간 뭐하는 거여요? 하나님의 통치에 등을 돌린 것이지요.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음.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내가 지키지 않으면 그 순간에 내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것이어요.그러면 그 순간에 내가 죽음을 맛보아요.우리가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면 그 순간 우리의 구체적인 가치판단과 윤리선택의 순간 순간마다 우리가 사단을 순종하면 죽음을 맛보아요.어제 제가 백화점에 갔었는데 자동차가 서로 양보를 않고 한 옷 잘 입은 아주머니하고 돈이 꽤나 있게 생긴 아저씨하고 부짗혔어요.싸우고 난리여요.그 사람들이 지금 죽음을 체험하고 있는 거여요.왜?하나님의 말을 안 들어서. 그 순간에 뭐라고 그랬는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좀 양보하라고 그런데 그 두 운전자들이 양보가 뭐여요? 사단의 말을 들었어요.너 주장하고 네가 먼저 앞서 나아가라.앞서 나아가다가 둘이 죽음을 맛본 거여요.그래서 사람들이 자꾸 빵빵 거리고 난리가 나 가지고 그 두사람 때문에 우리가 함께 죽음을 맛 본 거여요.
또 하나 잘못된 해석이 해방신학 특히 우리 한궁에서는 민중신학이 그런 형태인데 여기 보세요.내가 굶주렸을때 네가 나의 밥을 먹였고 내가 목말랐을때 네가 나를 물을 주었고 내가 감옥에 갇혔을때 네가 나를 찾아왔다. 에수께서 가난한 자들과 자기를 동일시 했다.거기서 민중신학자들은 논리를 비약시켜서 가난한 자들이 에수다 그래요.그래서 우리 한국의 민중신학이라는 것이 민중이 에수다고 해요.예수는 따로 개인으로 존재하는것이 아니고 민종의 표상이다.가령 우리 마가복음이 나사렛 예수의 개인의 삶과 가르침과 섬김과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가 아니고 고난받는 민중의 이른바 사회적인 전기이다.엉터리 같은 소리를 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왕이 자기의 고난받는 백성에 대한 사랑의 행위를 자기에게 한 행위로 간주한다.그 말이지 그러니까 바로 그 가난한 자들이 아니고 가난한 자들이 왕이기는 더더욱 아니지요.왕이 내가 굶주렸을때 네가 찾아왔고 그렇게 말하는데 무슨 말이어요? 왕이 자기의 고난받은 백성에 대한 섬김을 자기에 대한 섬김으로 간주한다는 말이지 왕은 왕이고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여요.왕이 가난한 자는 아니지요.
더더구나 민중신학같이 집단이 왕이기는 더더구나 아니지요.그러니까 그 혼돈은 우리가 말아야한다.그런 민중신학 해방신학으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그러나 이제 이 비유를 마치면서 두개의 오해 우리의 선행이나 공로로 구원을 받은다는 말이 아니다.또 하나는 민중신학으로 에수가 가난한 자들이고 가난한 자들이 예수다는 소리가 아니다.이 말로 공부를 마치면 우리가 마음편하게 집에 돌아가야지요.우리가 종전대로 살면 되겠구만 그런데 그래서는 안되어요.이 본문은 우리에게 엄청난 경고를 아까 마7장에 있는 것 같이 우리가 서로 겉으로만 주여 주여 우리의 진정으로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것은 제자도의 댓가를 요구해요.병든자들을 돌보고 감옥에 갇힌 자들을 돌보고 가난한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들에게 마실 것을 주는 것을 댓가로 요구해요.우리의 것을 나누어 주어야 되어요.그러면 손해 희생 아픔을 요구하지요.그것을 하기가 싫러 가지고 우리가 종교적 경건한 행위들로 위장하는 습관들이 있어요.우리 모두가 그런 유혹을 다 받아요.어떻게? 주여 주여 기도를 더 큰 소리로 하고 전도한다고 선지자 노릇을 하면서 돌아 다니면서 나같이 성경공부했다고 열심히 가르치면 된다고 그리고 설교하면 된다고 그러고 또한 무슨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잠실 주경기장에 사람들을 몽땅 모아놓고 시위하면 자기가 과연 하나니 나라에 속한 자로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을 하면 그렇게 우리가 생각하기 쉬운데 예수께서는 그런 것이 다 쓸모 옶을 수 있음.주께 신실함.아주 구체적으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그 도움을 주는 것.우리가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우리가 진짜 주를 사랑하고 주께 신실하다면 추운 겨울에 가난한 사람들도 돌보고 고아들을 돌보고 시골의 노부모들도 돌보고 우리 부모아니라 남의 부모도 돌보고 이런 일 우리가 해야지요.우리보다 더 굶주리는 백성들 우간다,보스니아의 어디에 이런 일 하기 싫어서 종교행위로 위장하면 최후의 심판때에 무엇을 박아요? 지금 당장은 양과 비슷하게 밀과 비슷하게 염소같이 가라지 같이 지낼지도 모르나 최후의 심판때에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사단의 나라에 속한 녀석이야 이렇게 괼 수 있음.엄중한 경고여요.

하나님 나라의 비유(13)
그리스도 병든 자들의 의사.
막 2:17

오늘 우리가 묵상할 비유는 막 2:17절에 있는 아주 짧은 비유입니다. 막 2:17절 "건강한 자에게는 의인이 쓸데없고 병든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이 말씀인데 이 말슴의 배경을 위해서 2:13-17절 까지 읽읍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모든 사람을 위해서 전파하셨어요.모든 사람들이라는 말은 우리 인간들은 자꾸 편가르기를 좋아해요.그래서 경건하고 편안하게 사는 중산층인 우리 교회의 성도들 같은 분들은 예수께서 ㅇ리들을 위하시고 우리가 좀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복음이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그렇게 생각할 수 있고 반면에 최근에 지난 이제는 좀 많이 줄었습니다만 70년대 80년대에 유행하먼 해방신학 민중신학 하던 사람들은 예{수를 가난한 자들 죄인들 무식한 자들 이런 자들을 위한 분이지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복음을 선포한 분이셨지 뭐좀 가지고 머리속에 이른바 먹물들도 들어갔고 스스로 경간한채 하고 이런 사람들에게 도리어 예수께서 꾸짖기만 하고 혼낸다고 했다고 이렇게 자꾸 편을 가를려고 그러는데 옳지 않아요.
예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했어요.그러니까 부자들 가난한 자들 지식인들 무식한 자도 이른바 경제적인 종교생활로 경건한 자도 아니고 그 사람들에 의해서 죄인들로 비난을 받은 그 사람들 모두를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어요.모든 사람들에게 에수는 우리 마가가 막1:15절에서 요약한바와 같이 거기 막1:15절에 에수의 복음전체를 요약해서 에수께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는데 그것이 뭐냐면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이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다 .....뭐가 전제되었어요? 모든 사람들이 죄인들임.우리가 이른바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죄인들만 죄인들이 아니고 심지어 경건한 바리새인들도 신학자들인 서기관들도 다 죄인들임.이 말이 전제되어 있어요.
오늘 우리의 상황으로 말한다면 우리 교회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요구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이야기여요.그러니까 이 말은 또 무슨 말로 부터 해요? 경건하고 도덕적인 사람만 구원 대상인 것이 아니고 진짜 사회에서 죄인이고 낙인찍힌 사람들에게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구원을 받을 수 있음.그것이 전제되어 있어요.이렇게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을 선포했던 거여요.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가 있어요.예수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믿으라.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얻으라는 이 선포는 당시 유대사회에서 유대종교적인 지도자들로 부터 죄인들로 낙인찍혀서 오는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구원에 동참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종교적인 행위로 율법을 잘지키는 의의 행위로 나는 종말에 오는 세상에 축복을 확인해 놓은 셈이라고 스스로 자만했던 사람에게는 에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큰 도전으로 왔지요.그 사람에게는 너도 죄인이다.너도 너의 종교적인 행위와 율법지킴.뭐 이런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새롭게 듣고 그 복음에 비추어서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고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그러니까 이 사람들에게도 결국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복음이지만 기쁜소식이지만 먼저 그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도전으로 자기자신들을 죄인들로 깨닫게 하는 하나의 도전으로 예수의 말씀이 왔던 것이어요.
그러니까 예수의 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누구에게 먼저 인기가 있었어요? 경건한자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복음으로 알아 차리기 위해서는 그 속에 담겨 있는 도전을 먼저 아주 정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아픔이 있었어요.너도 죄인이다.회개하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믿으라는 도전을 먼저 받아 들여야 했어요.그래서 진실로 자성하고 자기의 죄인됨을 인정해야 하는 그런 단계가 있어요.어떤 사람들은 그런 단계를 잘해서 예수에게 겸손히 나아와서 에수께서 제공하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은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이 그 단계를 뛰어 넘지 못해서 에수에게 도리어 적대하고 예수를 도리어 잡아 죽이게 되지요.
반면에 당시 신학자들 또는 경건한 바리새인들로 부터 구권에서 제외되었던 죄인들 세리들 창기들 또는 무식대중들 그런 사람들은 오는 세상에 구원에 참여 못하리라고 당시 경건한 사람들 신학자들이 이렇게 가르쳤어요.그 사람들에게는 에수께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서 구원을 얻는다고 하니까 여러분들 그 입장에서 한 번 서 보세요.얼마나 이것이 큰 기쁨의 소식입니까? 자기들에게.그래서 이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이어요.여기 지금 알패오의 아들 이야기가 나오지요.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다가 예수의 화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이 선포에 감동을 받아 가지고 세관을 박차고 그 사람이 회개함이 무엇으로 나타나 있어요? 세관을 박참으로 표현이 되어 있어요.
세관이란 무엇이냐면 관세징수하는 사람이어요.진짜 로마 사람들이 세를 징수하는데 유대사람들이 어느 관할구역에서 물건을 유통하는데 세금을 붙이는 통관세 이런 것을 징수할 권리를 돈을 많이 줘서 사요.그래 가지고 여리고 같이 상당히 중요한 무역로가 위치한 곳에 사람을 사 가지고 거기서 로마정부에 할당된 만큼만 바치고 나머지는 자기가 먹고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어요.이 사람들은 그러니까 돈을 많이 벌었지요.그러나 로마제국에 충성하는 빈족반역자라는 의미로 또 이웃을 착취하는 자라는 의미로 종교적으로 신학적으로는 가장 천대를 받아서 유대교에서는 종말에 구원의 소마이이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런데 이 알패오의 아들이 세리인 레위가 세관을 박찼다고 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돈으로 자기안전과 행복을 사는 맘몬이즘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으로 부터 구원을 얻으리라고 예수의 복음을 제대로 알아듣고 그러니까 죄를 회개한 것이지요.복음을 믿고 나온 것이지요.이 사람들이 에수에게 많이 몰려 들었어요.예수께서 그들과 먹고 마시는 식탁의 교제를 했다는 말이어요.
식탁교제란 유대인들이나 근동의 고대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그냥 먹고 마시는 문제가 아니고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를 받아들임의 표징으로서 아주 의미가 잇었어요.그래서 예수께서 이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는 것은 에수께서 그들을 다 받아들이고 그들을 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을 했다.그런 말이어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이 거룩한 도덕적으로 순결한 종교적 지도자가 아주 악령높은 세리들 죄인들 창기들 이런 사람들과 먹고 마시는 잔치를 예사로 벌림.한번 여러분들 상상해 보세요.우리 박은주 목사님이 저기 먹자 골목에 가셔서 거기서 죄인들을 몽땅 모아놓고 한 달에 댓번식 주말마다 가서 잔치를 한번 벌렸다고 합시다.여러분들 이떻게 하십니까? 제가 그랬다고 합시다.그러면 학교에서 가만 두겠어요? 지금 그런 상황이어요.예수의 종교적인 지도자가 유대교의 상식으로는 좀 힘들어요.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속하지 못하고 종말에 구원에서 배제된 그런 악명높은 사람들 하고 함께 먹고 마신다.그래서 여기도 나오지만 여기 죄인들과 세리들의 친구다.여기 신학자들이 예수를 뭐라고 비난합니까?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먹는 것을 보고 어째서 죄인들과 함께 먹느냐? 이렇게 지금 비난하지요.
제가 가끔 인용합니다만 눅 7:34절에 마찬가지로 비난했지요.눅 7:36절 부터 읽어 봅시다.;'바리새인들이 에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 가셨을때에 바리새인들과 먹고 마시는 것도 꺼리지 않았어요.바리새인들을 적으로만 생각하고 배척한 것도 아니고 그들과도 먹고 마시고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에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은 것을 보고 옥합을 가지고 와서 머리털로 씻는 것을 보고 예수께서는 또 그것도 허락하시고 그래서 34절에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는자여 포도주를 즐기는자여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로라 한다고요.이렇게 에수께서 죄인과 세리의 친구로 먹고 마시는 일을 이렇게 많이 하니까 이 신학자들 종교적인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았을때는 뭐가 된 거여요? 예수가 세리들과 더러운 사람들과 어울림으로 예수가 더러워진 것이어요.
전에도 제가 말씀을 드렸지만 이것이 모든 종교의 원칙이어요.거룩한 것과 가룩하지 않은 것을 가르는 모든 종교의 원칙이 더러운것과 어울리면 더러워짐.그러니까 문둥병자를 만지면 만진사람이 더러워져요.송장을 만지면 만진사람이 더러워져요.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 함께 죄인이 되는 것이어요.그들의 거룩치 못하고 더러워짐에 동참하여 어울림으로 같이 더러워짐.그러니까 더러운 것과 연결이 됨으로서 더러워짐.그것이 모든 종교의 원칙이어요.그러니까 당연히 종교적인 바리새인들은 서기관들은 에수를 비난하지요.너도 죄인이고 더러운 사람이다.
그런데 에수는 왜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일을 즐겼느냐?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하나님의 주권자적인 사랑이 구원하는 힘이라는 것을 전제하지요.둘째 그 속에는 모든 사람들이 죄인들임.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구원이 필요함.다시말하면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누구도 자기의 의를 내세울수 없음.이것은 스스로 자기가 의롭다 하는 사람에게는 도전이 되는 것이고 스스로 자기의가 하나도 없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복음이 되는 것이고 스스로 자기 의가 있다고 하는 사람에게도 복음인 것이어요.왜냐하면 스스로도 자기의가 좀 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 도전을 잘 받아 들여서 자기의 의가 가짜의 의이고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아야 자신이 죄인됨을 깨달아야 비로서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한 것임을 이 복음을 옳게 깨닫고 그 복음을 덧입어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어요.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은 인간의 모든 죄를 덮고도 남음.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죄보다 더 크다는 것.인간의 모든 죄를 덮고도 남음.
전에도 제가 한번 지적했지만 그것을 바울은 이렇게 표현을 해요.롬5:15-21절까지에서 이렇게 표현을 해요.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우리를 죄와 죽음에로 몰아넣은 첫 아담과 우리를 구원하신 마지막 아담의 순종을 대조하면서 그러나 이 은사는 그러니까 마지막 아담의 은헤의 선물은 첫 아담의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을 넘쳤으리라.여기의 지금 더욱이라는 말과 넘쳤다는 말에 유의하세요.
첫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그의 후손 전체가 죄와 죽음에 빠뜨려졌는데 둘째아담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는 그 죄의 힘보다 크고 그 죄가 가져온 죽음을 극ㅈ복하고도 남게 넘친다.그 말이어요.또 이선물은 범죄한 한사람으로 말미암은 것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하심을 입었느니라..마찬가지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있고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의 한 분 에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안에서 완노릇하리라.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아 생명에 이르느니라.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느니라.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어하게 하려함이라.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죄보다 더 커서 죄를 덮고도 남아요.예수는 지금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모든 죄를 다 덮어 버리고도 남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현하는 분이셔요.
그러니까 예수께 있어서는 더러운 것과 연결이 됨으로 스스로 더러워짐의 일반적인 종교적인 원칙이 적용이 되는 것이 아니고 더러운 자들이 에수와 연결이 됨으로 그들의 더러움이 깨끗해 지는 원칙.예수가 재현하는 하나님 나라의 사랑이 인간의 모든 죄를 덮고도 남아요.그러기때문에 이런 큰 하나님의 사랑을 재현하는 예수는 더러운 자들과 연결됨으로 예수가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고 더러운 자들이 예수와 연결이됨으로 그들이 거룩해짐.
그러니까 보통 종교의 원칙은 연결됨이든지 어울림이든지 이것이 모든 종교의 원칙이어요.더러운 것과 연결이 됨으로서 어울림으로서 더럽혀짐.그런데 에수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니고 더러운 자들이 예수와 연결이 되니까 예수와 어울림으로 거룩해짐.왜 그러느냐?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모든 죄들을 덮으니까.그래서 지금 예수께서 죄인들과 먹고 마심으로서 그들을 깨끗케 하는 거여요.썩은 그들의 부패를 치유하고 그들의 병을 치유하는 거여요.예수께서 죄인들가 먹고 마심으로 그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는 거여요.우리가 인간들이 자기들의 의의행위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자적인 사랑.그 은혜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그 복음을 선포하는 예수께서 자기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그래서 그 하나님의 큰 사랑을 덧입으라고 모두를 초청했어요.여기 바리새인들도 초청을 하고 죄인들도 초청을 하고 죄인들은 자기들이 워낙 죄인임을 알기 때문에 금방 그것이 복음인 것을 깨닫고 자기 죄를 회개하고 여기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을 때려 치우고 에수를 따르듯이 쫓아와요.
그러나 서기관들은 이런 사람들은 그 복음을 깨닫지 못해요.왜? 그 복음의 복음됨.예수의 하나님 나라의복음을 왜 깨닫지 못해요? 자기들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들에게 무슨 의가 있다고 보는 거여요.그래서 자기들의 그 의에 대해서 하나님께 종말에 반대급부로 구원을 주시리라고 믿는 거여요.그러니까 이 경건한 사란ㅁ들은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으라.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라는데 이 사람은 자기의를 믿은 거여요.자기의 종교적인 능력 또는 도덕적이 성취 지적인 성취 자기를 믿는 거여요.죄인들은 자기 속에 믿을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그러니까 예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나아오라.그러니까 그 사람들 쉽게 복음을 알아 들어요.그런데 이른바 의인들은 자기들 속에 뭐 믿을만한 것이 있어요.믿을만한 것이 있다고 보는 거여요.자기들의 종교적 경건성 도덕적으로 깨끗함.지적인 성취.이런 것에 하나님께서 보상하지 않겠느냐? 주의 심판때 상급을 주시지 않겠느냐?
곰곰히 생각해 보세요.부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에만 의존한 것입니까?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은 자신의 성취를 의존한 거여요.예수께서는 이것이 안된다는 말이어요.자신의 성취라는 것이 종교적이거나 지적이거나 도덕적이거나 하여간 어떤 것이어도 결국 피조물적인 불완전한 것이어서 우리를 구원할 힘이 없어요.그것을 제일로 먼저 깨달아야 되어요.경건한 사람들은 그것이 바로 죄를 회개함이어요.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함이어요.자기자신을 신뢰하려는 자기의를 신뢰하려는 것이 우상숭배여요.그것을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서 구원을 얻으라.그런데 아까 말씀드린대로 그 복음을 깨달은 사람들이 바리새인들 중에서도 꽤 있었고 때로는 신학자들에게도 꽤있었고 그 사람들 다 에수를 환영하고 그러나 주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예수에게 적대함.대체로 했는가 하면 자기 속에 신뢰할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죄인들 세리들은 예수의 복음을 곧 깨닫고 예수에게 나아왔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에게 예수가 회개를 요구하지 않았나? 민중신학자들은 회개를 요구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아까 막 1:15절에서 본 바와 같이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를 요구한 것이지요.여기 알패오의 아들 레위에서 회개를 보지 않습니까.주 에수께서는 그들이 죄가 용서되었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음.그래서 종말에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잔치에 그들이 참여하게 될 것임.이런 것들을 시위하기 위해서 그들과 먹고 마시는 잔치를 베풀었다.
우리가 전에 하나님 나라 공부할때에 여러번 보았지요.그래서 에수가 죄인들과 먹고 마심은 두가지 의미가 있지요.하나는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구원에 그들이 참여할 것이라는 보증의 뜻이어요.예수께서 하나님 대신에 죄를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주심.그래서 그들이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잔치에 참여할 것임을 보증해주는 뜻이 있어요.
또 하나는 종말에 완성이 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지금 현재 실현받는 뜻이 있어요.두번째 것은 아주 중요해요.물론 종말에 완성될 것이지만 지금 벌써 그 구원의 덕을 봄.그래서 이들이 이제 하나님을 다시 한번 하나님으로 아빠로 인정하고 그에게 나아가 기도할 수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며 이웃과의 관계가 올바라지며 레위가 세관에서 하나님도 믿을 수 없고 누구도 의지할 수 없으니까 세금을 많이 거두어 가지고 돈으로 자기의 행복을 살려고 지금까지 했는데 박차 버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함으로 다행히 이웃과도 더 이상 이웃을 착취않고 그래서 이웃과의 관계가 평화롭게 이루어져요.그래서 자기가 착취하는 이웃으로 부터 원망을 덜 받고 그들로 부터 유혹도 덜 느끼고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삭개오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이 사람의 삶에 어떤 일이 벌어져요? 평화가 그만큼 증진되지요.자유가 그만큼 확대되지요.이것이 뭡니까? 이렇게 되면 스트레스를 덜 받게 되어요.건강해지고 자기 부인에게도 덜 짜증을 내고 자식들도 덜 패고 집안에 평화도 기쁨이 더 커지고 이것이 다 뭡니까? 이것이 종말에 완성이 될 구원.샬롬의 현제적인 실현이지요.그것이 현재 벌써 부족하나마 임시적으로나마 부분적으로나마 체험하게 되는 거여요.그래서 에수의 잔치상에는 기쁨 평화가 있고 형제애가 있고 그래서 예수는 무엇을 선포했어요? 종말에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약속한 복음을 선포했어요.그 구원은 회개함으로 그 복음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얻는다고 가르쳤어요.믿는자들에게 예수는 그것이 빈말이 아님.종말에 완성될 구원에 들어갈 것을 보증해주는 의미로 말로만 보증하고 먹고 마시는 정도로만 이루어진다면 그것이 무슨 실감이 나겠어요? 그런데 그것은 구체적인 실현.우리의 삶속에서의 자유와 평화의 확대로 우리 건강의 확대로 구체적으로 실현이 됨.그러기때문에 에수의 말씀대로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그의 사랑에 의지하고 그의 선한 뜻에 순종해서 살면 지금 우리가 그렇게 해서 얻는 이 기쁨과 이 자유와 이 평화가 이 건강이 이 생명력이 완전히 무한대로 영원히 이루어짐.그것이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어요.여럼풋이 짐작할 수 있어요.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무엇인가? 어떻게? 지금 우리가 그것을 임시적으로나마 아까 이야기한대로 자유와 평화 기쁨 건강 이런 것으로 확대됨을 체험하니까 종말에 완성될 구원은 뭐냐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그것의 무한한 확대 우리가 체험할 수 있어요.늘 강조했지요.종말에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관념화하고 추상화해서 생각하지 말라구요.구체적으로 생각하시라고요.
그래서 에수가 죄인들과 먹고 마심을 늘 하셨는데 이것을 다른 말로하면 여기 17절의 비유 이것이 바로 병든자를 치유하는 의원의 일임.죄로 말미암은 고난 가운데 있는 우리들을 병든자들로 비유한 거여요.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치유로 비유한 것이어요.그러니까 종말에 구원을 가져오시는 에수 자신을 의사로 비유한 것이어요.그런데 이것은 기껏해야 ㅡ림정도가 아니고 그림을 넘어서 아주 사실적으로도 병들어 있고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병들어 있고 우리가 에수의 복음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회개하고 오로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의 뜻에 순종해서 사는 이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라지고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고 전전으로 하나님께 순종함.이렇게 되면 자연히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이 된다고요.이웃에 대한 사랑을 하면 이웃과의 관계가 원만하고 올바르게 되고 이웃애 대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자유가 그만큼 확대되어요.평화가 정의가 그만큼 확대되어요.두루 두루 육신적으로 건강해져요.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육신적인 건강으로도 나타나는 거여요.사회적인 건강으로도 나타나고.이 구원이라는 것이 우리 실존의 어느 한 단면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어요.모든영역에서 포괄적으로 구체화되어서 나타나요.추상적으로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을 온전케 하는 이런 형태로 나타난다고요.이것이 치유다.이 말이어요.우리가 여기서 두가지를 생각해 보아야겟어요.
하나는 지금 강조한대로 이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병이 치유되고 우리가 종말에 있을 구원의 구체적인 실현을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체험하게 된다는것.어떤 사람들은 신앙의 영역이 있고 지난번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비난번에 성령론에 대한 올바르지 않는 이해 때문에 혼돈이 우리 성도들에게 많다고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성령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우리에게 실현되게 하시는 분이셔요.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에게 계시되게 하는 분이셔요.그리스도안에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에게 실제로 실현되게 하시는 분이어요.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를 육신의 병고침 그런데만으로 나타난 것으로 생각을 해서 그쪽을 굉장히 강조한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특히 우리 개혁교회전통을 가진 사람들은 그런 것 관계없고 그냥 우리가 말슴듣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게한 것.이것에만 관게있다.이렇게 하는데 둘 다 옳지 않다고요.
그리스도의 구원이라는 것이 우리의 삶 전체에 대한 포괄적인 것이어서 그 구원이 지금 누차 되풀이 하지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와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 그리고 자연과 하나님과 피조세계 전체와의 올바른 관계에의 회복에서 오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것을 온전케 하는 그 축복 그것이 구원이어요.그러니까 그 구원이 아까 말슴드린대로 사회적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로 말미암아 자유가 확대되고 정의가 평화가 확대되고 자연과의 관계도 올바라져서 우리의 육신적인 건강도 회복이 되고 그러니까 성령의 역사가 우리 육신적인 건강의 회복으로도 나타나고 이웃과의 관계의 회복으로도 나타나고 자연과의 관계의 회복으로도 나타나고 우리 삶의 모든 관계에서의 온전케함으로 나타나요.
둘째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 구원이 종말에 에수의 재림때에 또는 죽음 이후에 비로서 우리가 받는 것이 아니고 그때 완성될 구원이 지금 여기서 에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우리 죄를 화개하고 그의 복음을 믿으면 우리에게 부분적으로나마 임시적으로나마 실현이 되어요.그래서 에수가 정말 우리에게 의사이심을 우리가 알게 되어요.
자 이와같은 이해를 가지고 오늘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오늘 크리스마스날이니까 이 본문에 비추어서 우리는 교회생활을 오래해서 스스로 상당히 경건한 사람들로 졸교적이고 도덕적이고 상당히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들로 자처를 하는데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가운데 오심을 한번 생각해 보시오.그것이 무엇과 같습니까? 예수께서 육신으로 계실때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으로 계실때 죄인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그들과 먹고 마심.두그림을 생각해 보세오.거룩한 하나님의 아들 영광의 하나님의 아들이 오늘 크리스마스에 우리 죄와 고난의 세상에 오심과 존경받은 종교지도자 에수가 이 죄로 누더기진 더러운 죄인들에게로 오심.그들에게 잔치를 베푸심.똑같은 그림 아닙니까?
우리가 아무리 경건한 척 해도 우리는 부족하고 더럽고 추악하고 우리 생각이 얼마나 추악이 많이 들어있고 우리 행동이 얼마나 죄스럽고 그렇습니까? 예수께서 만약에 의인들만 부르시고 의인들만 상대하신분이라면 우리가 에수의 그 무리에 어떻게 들겠어요? 크리스마스 얼마나 감사합니가? 예수께서 어떤 분이지요? 하늘의 고고한 곳에 혼자 앉으셔 가지고 의인들을 그리로 불러들이는 그런 분이 아니고 그 거룩한 곳에서 그 엄청난 거룩의 힘으로 여기내려 오셔서 우리같은 더러운 자들을 거룩하게 하신다.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감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죄인들인 우리가 감히 하나님께 아빠라 부르며 낭갈 수 있도록 얼머너 기쁜 소식입니까?
여기 죄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서기관 바리새인들로 부터 비난을 받고 너희들은 내세에 아무 소망없다고 비난을 받고 매도당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이 거룩한 에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와서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하나님이 사랑이셔서 너희들을 그의 백성으로 자녀들로 맞아주신다.그들이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다시말하면 그와같은 감격이 오늘 우리 크리스마스때 우리의 감격이 되어야 되지요.아 거룩한 이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이루고 무슨 종교적인 업을 쌓아서 자기에게 오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그가 우리에게 오셔요.우리같은 추악하고 더러운 한심스러운 우리의 행동을 가만히 보면 얼마나 어리석고 한심스럽고 유치하고 더럽고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가운데 오셔요.우리를 그의 거룩함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그의 완전함으로 우리를 온전케하심.여러분들 그 감격있습니까? 내가 말로 다 잘 표현한지 모르겠어요.
그 다음에 한 번 생각해 봅시다.자 그러면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의 은혜로 우리가 가룩한자가 되었어요.그리고 죄인들을 이츄하는 복음,더러운 것들을 거룩하게 하는 이 하나님의 힘을 우리가 알고 그 힘을 지닌자들이 되었어요.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의 사회에서의 자세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지금 우리가 경건을 추구하고 거룩을 추구하고 도덕적인 순결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로서 다 훌륭하지요.좋지요.에수와 같은 자세를 가지고 삽니까? 아니면 예수의 자세를 비난한 서기관들의 자세를 취하고 삽니까? 한번 좀 생각해 봅시다.어떤 자세를 취하고 살지요? 놀랍게도 우리가 보통 서기관들의 자세를 취하고 살지요.아까 제가 예를 들었습니다.아 박복사님이 방배동 먹자골목에 토요일 마다 가서 판을 벌린다고 생가해 봅시다.우리 당회에서 어떻게 할 꺼여요? 우리 제직회에서 어떻게 할 거여요? 제가 압구정동 어디 먹자골목에서 토요일 마다 판을 벌렸다고 합시다.어떻게 하지요? 당장에 아까 이 교회 텅텅 빌 거여요.왜 그럽니까? 한번 생각해 봅시다.왜그것을 우리가 두려워합니까? 아 여기 서기관들 자세가 참 이해가 되잖아요.우리가 사실 그런 자세잖아요.
그것을 왜 그러는가를 분석해 보아야지요.제일 먼저 박목님 먹자골목에 갔다.그러면 무엇을 두려워 하겠습니까? 더러운 자들과 어울림으로 박목사님의 도덕적인 높은 수준이 내려가고 더러워지고 그러니까 함께 더러워지니까.제가 그런 짓을 하고 다녔다면 당장에 타락했다고.그런데 예수는 죄인들과 먹고 마심으로 타락해진 겁니까? 그것이 아니고 예수로 말미암아 죄인들이 거룩해짐.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의 죄인들과 더러운 것과 어떻게 해야겟습니까? 자꾸 피해서 우리끼리만 거룩한 도성을 쌓고 살아야겠습니까? 그렇게 하라고 그럽니까? 이 본문의 가르침이.
더러운 세상 속으로 적극적으로 들어가서 더러운 자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려서 그 더러운 자들을 깨끗이 해야된다.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말라는 것을 가르칩니까? 지금 이 곳은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더 열심이 가라는 말이어요.그래서 너도 더러워질까 하노라가 아니고 까마귀들을 깨끗이 하라는 말이어요.여기서 전제되는 것이 뭐라고 했지요? 유교는 까마귀 사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말라고 가르쳐요,불교도 마찬가지로 수양하는 사람이 산속의 고고한 곳에서 혼자 고고하게 거룩을 유지하라.그것이 모든 종교의 원칙이어요.그리스도의 복음은 뭐라고요? 그것이 아니고 암흑의 세상에 들어가서 빛이되고 썩은 세상에 들어가서 소금이 되고 병든 세상에 의사로 들어가라.그래서 치유하라고.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에 있어서 모든 종교들과 세상의 이상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어요.
그것을 우리가 실천하기가 어려워요.왜? 두려움이 앞서서.왜 두려움이 생겨요? 아까 이 원칙이 작용하는데 있어서 전제가 뭐라고요?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의 죄보다 크다.그 확신 하나님의 힘이 사단의 힘보다 크다는 확신이 없어서 그래요.제알 첫째가 성령의 힘이 세상의 영보다 크다.그런 확신이 없어서 한마디로 믿음이 부족해서 여기서 하나 주의할 점은 거룩한자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자로 성령의 성결케하는 힘을 지닌자로 더러운 세상에 들어감.그것이 치유하는 의사의 자세로 들어가야 되는데 의사가 함께 가서 이 세상에 들어가서 병들어 버리면 안되지요.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는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의 말씀 진리 이것을 타협하고 세상의 것을 인정하고 이런 자세로 들어가면 같이 썩지요.
어떤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은 죄인들의 사이에 같이 들어감은 에수가 죄인들과 함게 스스로를 동일시해서 그들을 인정했다.그들을 있는 그대로 좋다고 예수께서 선언했다고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아까 그것이 아니라고 그랬지요.그들에게 예수께서 무엇을 요구했어요? 회개하라고.그러니까 우리가 더러운 세상에 의사로서 들어가야 한다.의사로서 들어가서 변든자를 치유해야 된다고.그런데 어떤 자세로 들어가야 되어요? 하나님의 진리를 견지해야지요.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인정하고 스스로의 죄를 인정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설득하는 자세로 들어가야지.그런 것이 없이 죄를 회개하는 요구없이 그냥 그들과 먹고 마시고 들어가면 이렇게 되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두가지를 조심해야지요.하나는 보수적이고 경건적인 그리스도인일수록 자꾸 육이 부서워 가지고 세상으로 부터 분리의 원칙을 강조하면서 세상으로 부터 도피할려고 하는 서기관적 자세를 취하는 것.이것도 참 안되지요.우리가 우리의 삶의 구체적인 장에서 하나님의 치유가 필요하고 하나님의 거룩하게함.순결케함이 필요한 곳에 적극적으로 들어가서 선교적인 자세 암흑에 가서 빛을 비추는 썩은 곳에 가서 소금노릇하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
둘째 어떤 자유주의적인 신학자가 말하듯이 이 세상에 들어감은 그냥 세상속에 기독교적인 정체성을 무시해 버리고 그들주의 하나 그래서 그들의 썩은 가치관 우상숭배 썩은 도덕 이런 것을 그것도 옳다.하나님께서 다 받아준다.이런 자세로 들어가서는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후자에 약점이 있어요.그러나 보수 신앙인들은 전자에 약점이 있어요.아예 세상에 안 들어갈려는 오늘 우리가 묵상한 말씀에서 특히 크리스마스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은 죄인들 병자들에게 오셔서 구원의 잔치를 베푸심.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를 느끼고 둘째로 우리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 그것이 자꾸 이 세상에서 철수할려는 우리의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세상의 사움보다 더 세다.하나님의 은혜가 세상의 죄보다 더 크다.하나님의 영 성령이 세상의 영보다 더 강하다.그 믿음을 가지고 이 세상 썩은 곳에 의사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고 하나님의 올바른 도를 가르쳐서 치유를 가져오는 의사노릇을 하러 적극적으로 들어가야 된다는 것을 오늘 같이 묵상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