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그 불편한 복음의 진실'
김영봉 목사의 연속 설교(1) '세상에 긴장하라'

1.
'정의, 그 불편한 복음의 진실'이라는 주제로 앞으로 5회에 걸쳐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번 연속 설교를 시작하며 말씀드리는 것은 저 자신과 우리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한 과정으로서 준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정의롭기 때문에 혹은 우리 교회가 정의롭기 때문에 정의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다른 누구를 향해서 정의를 부르짖으려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저 자신의 삶과 저의 목회를 반성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준비하고 있으며, 이 말씀을 듣는 이들이 저의 반성과 회개에 참여하기를 기대할 따름입니다.

'정의'라는 말을 들을 때, 여러분에게는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이 단어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그 의미와 느낌이 달라져 왔습니다. 60년대부터 80년대 사이에 한국에 살았던 분들이라면, 정의라는 말을 들을 때 곧바로 매캐한 최루탄 가스 냄새가 기억날 것이고, 붉은 글씨가 쓰인 머리띠와 개량 한복이 생각날 것입니다. '아침 이슬'이라는 노래와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가 생각날 것입니다. 장준하, 함석헌, 김지하, 박노해 같은 이름들이 생각날 것입니다. 당시, 정의라는 말은 '민주' 혹은 '자유'라는 말의 동의어였습니다.

지금 20대 혹은 30대 청년들은 '정의'라는 말을 들을 때, 어릴 때 보고 자란 만화영화가 생각날 것입니다.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말하며 악당을 물리치는 <세일러문>의 장면이 떠오를 것입니다. 요즈음에는 <정의의 용사 졸라맨>이라는 만화영화가 인기인가 봅니다. TV로 방영되어 어린이들을 사로잡았던 초능력의 사람들, 즉 황금박쥐, 아톰, 로봇태권V, 매칸더V, 마징가Z,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등은 모두 정의의 용사들입니다. 만화영화 주제가의 가사에는 언제나 '정의'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같은 만화에 깊이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정의'라는 말을 들을 때 '악당을 응징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반면, 미국에서 '정의'라는 말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법원 혹은 판사복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정의를 '법의 심판을 받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오바마 대통령이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을 살해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정의가 실현되었습니다(Justice has been done)"고 말했습니다. 법의 문제를 다루는 행정기관의 이름이 The Department of Justice입니다. 우리말로 '법무부'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들리는데, 직역하여 '정의부'라고 부르면 아주 이상하게 들립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를 정부에서 책임진다는 뜻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미국 사법 역사상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사건이 전설적인 풋볼 선수 심슨(O. J. Simpson) 사건입니다. 그 사건이 심리 중일 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심슨이 그 아내를 살해했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게 결론 내릴 만한 증거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심슨은 그의 막대한 재산으로 최고의 변호인단을 구성했고 결국 무죄 평결을 이끌어 냈습니다. 그때 미국 시민들에게 회자되던 말이 있습니다. "정의의 빛깔은 돈 색깔과 같다(The color of justice is green)". 한때 한국에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미국 사회도 그렇게 되었다는 탄식입니다.

그런가 하면, 정의를 거대한 사회적 이념의 문제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성을 차별하는 문제, 유색 인종을 차별하는 문제, 혹은 성 소수자들을 차별하는 문제 같은 것들이 Justice issue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미국 사회에서 "이것은 정의의 문제입니다(This is justice issue)"고 말하면,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미국이 가장 사랑하는 언론인(journalist)'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헬렌 토마스(Helen Thomas) 백악관 주재 기자는 "유대인들은 모두 팔레스틴을 떠나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가 문제가 되자 은퇴를 했습니다. 그의 발언은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Justice issue를 건드린 것입니다. 때로 Justice issue를 건드리면 법을 위반한 것보다 더 큰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2.
이처럼, 정의라는 말은 그 상황과 시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다양한 이해들을 관통하는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옳은 것 혹은 바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마이클 샌델(Micheal Sandel) 교수가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라는 책에서 다루는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영어 책의 제목에는 "무엇이 옳게 사는 것인가?(What is the right thing to do?)"라는 부제(subtitle)가 달려 있습니다. 그것이 모든 정의 문제의 핵심에 있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와야 자유와 인권을 위해 싸울 수도 있고, 악당이 누구인지 알 수도 있으며, 법을 제대로 집행할 수도 있고, 또한 이념 문제에 있어서도 바른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 마이클 샌들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국에 '정의 신드롬'을 몰고 온 이유는 '정의에 대한 목마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어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읽고 소화하기에 쉽지 않은 책입니다. '왜 이렇게 어려운 책을 선정했습니까?'라는 애교 섞인 항의를 여러 번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이 작년부터 한국에서 베스트셀러로 팔리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기사를 보니, 2011년 3월에 100만 부를 돌파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책을 좀 읽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한 권씩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팔린 100만 부 가운데 몇 권이 제대로 읽혔는지 궁금합니다만, 이것은 실로 주목할 만한 사회 현상입니다. <프레시안>이라는 인터넷 신문의 한 기사는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사실이 '연평도 포격보다 더 충격적인 올해의 뉴스'라고 평했습니다. 그만큼 이례적인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 현상에 대해 이런저런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한국 사회의 학벌주의가 한몫을 했다는 분석입니다. 출판사가 이 책을 선전하면서 '하버드대학교에서 30년 동안 가장 인기 있는 강의로 꼽힌 바로 그 강의'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하버드대학교에 갈 실력과 형편이 되지 않으니, 하버드대학교의 가장 인기 있는 교수의 책이라도 들고 다니면서 대리 만족을 하고 싶은 심리가 작용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 다른 분석은 이 책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지적 허영심을 만족시켜 주었다는 분석입니다. '정의'라는 무거운 주제, 보기만 해도 질릴 정도로 두꺼운 분량, 그리고 세계 최고 대학의 최고 강의라는 점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 책을 집어 들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 책을 책꽂이에 꽂아 놓고서 '으흠, 내가 이 정도는 되는 사람이야'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는 것입니다. 정작, 책은 읽지도 않으면서 말입니다.

이같은 분석에는 나름대로의 진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정말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정의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마음에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퍼져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책은 그 같은 목마름에 대한 대답처럼 사람들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심리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한국의 '정의 신드롬'의 중심에는 사람들이 부지불식 간에 느끼는 정의에 대한 갈증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의에 대한 갈증 때문에 책을 사놓고는 막상 독파하지 못하는 이유는 독자의 독서 실력에 있다기보다는 독자의 기대와 이 책이 말하는 내용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 자신의 경험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의 제목을 보고 기대했던 내용과 실제로 책 속에서 다루는 내용이 다릅니다.

크게 두 가지 점에서 기대와 달랐습니다. 첫째, 제가 생각한 '정의'는 커다란 사회 문제였는데, 샌델 교수는 "무엇이 옳은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붙들고 씨름합니다. 둘째, 정의에 대해 명쾌한 대답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샌델 교수는 뚜렷한 결론 없이 몇 가지 이론을 소개하면서 독자 자신에게 결론을 맡깁니다. 막상 책을 사왔는데, 그 내용이 자신의 기대감과 다를 경우, 그 책을 끝까지 읽기는, 게다가 이렇게 두꺼운 책을 끝까지 읽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단한 고행입니다.

3.
그렇다면, 이 시기에 정의에 대한 갈증이 널리 퍼지고 깊어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사회학자 혹은 사회심리학자들이 연구해야 할 질문이기는 합니다만, '고민하는 관찰자'로서 몇 가지 짐작이 가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 독재 정권 하에서 사는 동안 우리 국민들은 민주와 자유를 정의와 동일시했습니다. 정의를 무참히 짓밟고 권력을 손에 쥔 사람들이 '정의 사회 구현'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면서 국민을 억압할 때, 우리는 참된 정의에 목말랐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적인 정의를 위해 희생을 감당했습니다. 생명을 잃은 사람들도 있었고, 고문으로 인해 폐인이 된 사람도 있었으며, 인생의 황금기를 도피 생활로 보내야 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같은 희생과 헌신이 모아져서 우리는 결국 민주 정부를 보게 되었고, 이제는 더 이상 정의를 위해 싸우지 않아도 되는 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된 지, 벌써 한 세대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독재 정부만 사라지면 정의는 자동적으로 실현되는 줄 알았습니다. 민주 정부가 뿌리를 잘 내리고 나면 정의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회 구석구석에서 정의롭지 않은 모습을 목격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독재 정부 시절보다 더 부패한 모습입니다. 이렇듯, 정의로운 사회가 된 것 같은 현실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정의에 목말라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모든 국민이 함께 싸울 공공의 적이었던 독재 정부가 사라지자 사람들의 관심이 사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독재 상황이 심할 때는 자신의 진로 문제를 두고 고민하는 것이 사치스러워 보였습니다. 모두가 억압받던 시대에는 나 혼자만 잘 살려고 궁리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잘 먹고 잘사는 것보다 더 큰 문제,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지는 못한다 해도, 적어도 그렇게 믿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존경했습니다. 그런데 그 공공의 적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자 너무도 신속하게 그리고 너무도 철저히 자신의 개인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변화를 대학교에서 가르칠 때 실제로 목격했습니다. 제가 대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92년입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학생 운동이 활발했습니다. 사회정의 문제를 가지고 집회를 열면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었고 학교 측은 긴장했습니다. 그런데 9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집회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수가 현저하게 줄어들었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학생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학생들의 관심은 오직 학점 그리고 진로뿐이었습니다. 90년대 후반에는 총학생회장이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어서 학생처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 장학금을 준다는 명목으로 설득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자란 세대가 지금 우리 사회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들보다 더 젊은 세대의 경우에는 그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그들이 묻는 질문은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가 아닙니다. "무엇이 나에게 유익한가"입니다. 요즈음에는 질문이 "무엇이 멋있어 보이나"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 사회는 정의가 이미 이루어졌다는 착각 때문에 거대한 관심(mega concern)을 망각하고 자신의 일신상의 문제에만 집중하게 되었고, 옳고 그름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고 자신에게 유익한가 아닌가의 질문에만 집중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 보니, 마음 깊이 '이건 아니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생긴 것입니다.

인간은 때로 상상 이하로 비열해지기도 하지만, 상상 이상으로 고상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본래 지어진 방식을 떠나 살다 보면, 뭔가 불편을 느끼게 되고 허전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권태로움을 느끼게 되고, 회의감을 가지게 됩니다. 원래 인간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도록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인간은 잘 먹고 잘사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에게는 진리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옳고 그름의 질문을 오래도록 망각하고 살다 보면 내면적인 불만족을 느끼며 진리에 대한 갈증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 일어나고 있는 정의에 대한 갈망은 한 세대 가까이 자기중심적이고 현세적인 이익을 위해 살아온 결과로 생긴 내면적인 각성에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이처럼, 자신을 생각하느라 이웃을 잊고,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추구하느라 옳고 그름을 망각했다는 점에서 기독교인도 별로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창조주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의 사람이었습니다. 진리를 가르치고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그분을 '진리의 영(요 16:13)'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진리는 우리가 섬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는다면, 진리는 마땅히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판단하고 선택하는 데 있어서 '무엇이 옳은 것인가?'라는 질문은 가장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어떻습니까? 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축복'입니다. 축복은 신앙의 핵심에 속합니다. 하지만 그 축복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진정한 축복은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산다는 것은 정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은혜를 베풀며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망각하고 혹은 하나님에게 등지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려면 때로 손해도 보고 희생도 하며 고난도 당하게 됩니다. 현세적인 축복만을 바라고 믿는 사람들은 이 같은 희생과 고난을 견뎌 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신앙을 통해 어떤 유익을 얻을까?'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다는 사람들이 옳게 살아가려는 고민과 노력을 외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언젠가 이 지역에 사시는 회계사 한 분께서 제게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이민 사회에서 가장 전도하기 어려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제가 "누굽니까?"라고 물었더니, "저 같은 회계사입니다"고 대답하십니다. 왜 그런가, 여쭈었더니 세금 보고를 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의 허위와 위선을 너무도 자주 목격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세금을 줄이는 것을 문제 삼을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법을 위반하고 양심을 속이는 것에 대해 거침이 없다는 것입니다. 목사 혹은 장로 같은 직분을 가진 사람들조차 그런다는 것입니다. 생활이 정말 어려워서 그러는 경우에는 그래도 양해가 되는데, 충분히 여유롭게 사는 분들이 허위 보고를 요구할 때면 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올라온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건축 헌금 때문에' 혹은 '선교 헌금 때문에'라는 핑계를 대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정말 그럴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핑계를 대는 것을 볼 때면 견디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런 경우를 자주 겪다 보니, 교회 안에는 모두 위선자들밖에 없는 것처럼 생각된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정죄하려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반성이 필요하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교회도 다를 것이 별로 없습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먼저 진리가 선포되며 또한 진리가 실천되어야 하는 곳입니다. 정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정의로운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정의는 침묵 당해 왔습니다. 교인들은 목회자에게 '듣기 좋은' 소리만 해 달라고 기대하고, 목회자들은 그 요구를 충족시켜 주면서 기득권을 누립니다. 이렇게 하여 '침묵의 카르텔(Cartel of Silence)'이 만들어집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니, 서로 부담 가는 말에 대해서는 침묵하기로 결탁하는 것입니다. 그 침묵 속에서 교회는 타락해 왔습니다. 최근에 <미주뉴스앤조이>에 실린 문동환 목사 인터뷰에 보니, 故 강원룡 목사님과 조용기 목사님과의 대화가 나옵니다. 조용기 목사께서 강원룡 목사께 그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도 몰트만의 신학을 잘 안다. 그러나 그런 얘기하면 교인들이 못 받아들인다. 그래서 교인들이 원하는 얘기를 해 줘야 한다."

이렇게 정의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교회들은 성장을 위해 '되는 것'을 찾았습니다. 교회 성장에 도움이 되면 무엇이든 허용하고 사용했습니다. 교회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사람들은 '시험 든 사람들'로 규정되고 왕따당했습니다. '은혜롭게 하자'는 말로 모든 문제를 덮어 두고 넘어갔습니다. 은혜를 위해 덮어 둔 문제의 쓰레기 더미가 푹푹 썩다가 폭발하면 대형 스캔들이 되어 버리곤 합니다. 대형 교회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작은 교회들 안에서 일어나는 의롭지 못한 일들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주목하는 사람이 없고 견제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작은 교회의 부패의 정도는 훨씬 더 깊을 수 있습니다.

5.
그 결과, 교회의 권위가 참담할 정도로 땅에 떨어져 버렸고, 기독교가 가장 매력 없는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2010년도에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에서 행한 연구 조사에 의하면, 기독교는 고등 종교들 가운데 가장 신뢰하지 못할 종교이며, 목사는 성직자들 가운데 가장 신뢰하기 어려운 사람들로 나타났습니다. 2009년도에 <시사저널>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조사 대상 직업 33개 중에서 목사의 신뢰도는 25위로, 11위의 신부, 18위의 승려보다 월등히 낮게 나타났습니다. 어디 가서 직업란에 '목사'라고 써 넣기가 부끄럽게 되었습니다. <기윤실 보고서>에 보니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되는 봉사 활동을 가장 많이 하는 종교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개신교회가 가장 높은 응답을 받았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개신교회가 사회를 위해 좋은 일을 제일 많이 한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러면서도 개신교회를 가장 싫어합니다.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왜 이런 현상이 생겼습니까?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좋은 일'에 대해서는 열심을 내는데, '옳은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정의에 대한 갈증은 교회 안에서 더 간절하다 할 수 있습니다. 교회 바깥에서 사람들이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자각을 하고는 정의에 대해 목말라하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는 믿는 사람들이 물질적인 축복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자각을 하고는 정의에 대해 목말라하는 것입니다. 저는 매 주일, 우리 교회 교우가 아닌 분들로부터 평균 두세 통의 이메일을 받습니다. 대개는 교회에서 당하고 있는 문제를 두고 고민을 전해 오거나 개인적인 신앙적 고민을 전하는 메일입니다. 그 메일들 속에서 저는 정의를 향한 간절한 목마름을 읽습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그 책의 내용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세대가 공유하는 갈증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드러냈다는 점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동안 우리 세대가 먹고 사는 문제에 탐닉하느라 정의의 문제를 망각하고 살았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는 하나의 중요한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정의에 대한 자각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정의로운 삶을 위해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어느 비평가는 샌델의 책을 '고난도의 지적 유희'라고 혹평했는데, 만일 이 책이 지적 유희의 도구로만 쓰이거나 혹은 정의에 대한 마음의 부담감을 덜어 내는 수단으로만 사용된다면, 백만 부나 팔린 이 책은 결국 쓰레기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성령의 손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의 신드롬’을 통해서 성령께서 어떤 메시지를 전해 주시려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저는 이 신드롬을 통해 성령께서 전달하시려는 메시지가 있다고, 분명히 믿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잊고 지내던 정의의 가치를 다시 회복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잘 먹고 잘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살아온 과거를 회개하고, 옳은 것을 향한 고민과 분투를 다시 시작하라는 메시지입니다.

6.

로마서 12장 1절과 2절이 이번 연속 설교의 본문입니다. 앞으로 이 본문을 붙들고 계속 씨름할 것입니다. 신앙적인 입장에서 정의로운 삶이 무엇인지를 아주 잘 요약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에서 사용된 단어와 표현 하나하나에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종합하면, 정의롭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정의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로서 바울 사도는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본받지 말라'는 능동태 표현은 헬라어 원어의 의미를 다 담아내지 못합니다. '수스케마티조마이(suschematizomai)'라는 헬라말의 뜻은 '틀에 맞추다'입니다. 명사형 '스케마(schema)'에서 나온 말인데, '계획' 혹은 '도식'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scheme이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스케마'는 '틀'을 가리킵니다. 모텔의 식당에 가면 와플 만드는 틀이 있습니다. 그 틀에 와플 액을 넣고 뚜껑을 덮고 뒤집어 놓으면 2분 후면 와플이 만들어집니다. 허연 액체가 틀의 모습 그대로 구워집니다. '수스케마티조'라는 단어는 이처럼 어떤 틀로 찍어 내는 것을 가리킵니다.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은 이 구절을 번역하면서 원어의 의미를 잘 살려 놓았습니다.

"Don't become so well-adjusted to your culture that you fit into it without even thinking (문화에 너무 잘 순응하여 아무 생각 없이 동화되어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필립스 박사(J. B. Phillips)의 번역을 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Don't let the world around you squeeze you into its own mould.(당신을 에워싸고 있는 세상이 당신을 세상의 틀에 밀어 넣지 않게 하십시오)."

여기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진실을 발견합니다. 우리 자신을 세상 풍조에 노출시키고 있으면 자연적으로 세상의 틀에 맞추어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세상의 풍조를 따라가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이 세상이 보여 주는 것들을 보고 이 세상이 들려주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사고방식과 가치관과 행동 양식이 그 틀에 맞게 만들어집니다.

어느 통계에 보니,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하루 평균 3,000개의 광고에 노출되어 있다고 합니다. 믿기 어려운 통계입니다만, 그럴 법도 합니다. 우리가 의식하든 안 하든, 우리는 어딜 가나 상업광고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상업광고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지금의 당신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만족해서는 안 된다. 나를 가져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꼭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이 나에게 꼭 필요한 것처럼 속이는 것이 상업광고입니다. 하루에 3,000번이나 이같은 세뇌를 당하고 사는 겁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것에 노출되어 있다 보면, 빚을 내서라도 그 물건을 사야만 될 것만 같습니다.

지난주 잠깐 동안 애틀랜타에 다녀왔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승무원들이 스낵을 줍니다. 땅콩 봉지와 함께 냅킨을 주는데, 냅킨에 코카콜라 광고가 적혀 있습니다. 냅킨 하나도 그냥 두지 않고 상업 선전의 도구로 만든 것입니다. 이러니 하루에 3,000번 광고를 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코카콜라 병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위에 Open Happiness! (행복을 여십시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 문구를 보는 순간, 속으로 '아, 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탄식했습니다. 그 글씨는 실제로 빨간색이었습니다. 콜라 병을 따는 것이 어찌 행복을 따는 것입니까? 실은, 불행을 따는 것입니다. 탄산음료가 건강에 해로운 것은 공공연한 진실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러한 선전으로 사람을 속이려 합니다. 그 속임수에 넘어가면 이 세상이 만들려는 모습으로 주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의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이 시대의 풍조를 잘 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문화와 시대 풍조가 우리를 어떻게 만들려고 하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소저너스(The Sojourners)>의 창시자 짐 월리스(Jim Wallis)는 우리 시대에 자녀를 키우는 일은 '반문화적인(counter-cultural)' 활동이라고 말합니다. 자녀를 바르게 키우기를 소망하는 부모들이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어야 할 말입니다. 어릴 때부터 세상 문화에 노출되어 자라다 보면, 아이의 사고방식과 가치관과 행동 양식이 세상 문화의 틀에 찍혀 버리기 때문입니다. 일단 어떤 모양으로 찍히고 나면, 그 틀을 바꾸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가정과 교회에서의 종교 교육이 중요합니다. 자녀만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도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곧 세상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등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 살되, 세상을 경계하고 문화를 경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7.

왜 복음이 때로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지, 그 첫 번째 이유가 오늘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정의롭게 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이 세상 문화와 풍조에 불편함을 느껴야 하고 그 속임수를 간파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불편한 일입니다. 귀찮은 일입니다. 그저 세상 풍조에 나를 맡기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면 아주 편합니다. 세상에 대해 긴장하지 않고 나를 맡기고 살면 불편이 없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제대로 믿고 살려면 세상에 긴장해야 하고 문화에 대해 경계해야 합니다. 불편하게 사는 편을 택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우리의 사고방식과 가치관과 생활 방식이 얼마나 속속들이 세속적이고 물질적이며 이기적이고 속물적인지를 자각하고 반성하십시다. 우리 중에는 그렇게 되고 싶어서 적극적으로 세상의 풍조를 따라잡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 자신을 아무 방비 없이 세상 문화에 노출시켜 놓고 좋아 보이는 것을 따라 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바울의 말씀을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 촉구하십니다. "너희의 실상을 보고 두려워 떨라!"고 말입니다. "더 이상 세상 풍조에 휘둘리지 않도록 깨어 살라!"고 말입니다.

한 번 그렇게 하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매일의 싸움입니다. 매일 평균 3,000번을 싸워야 하는 일입니다. 이 시대의 선전에 속지 않으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세상 속으로 파고 들어가되 세상에 긴장하고 세상에 속하지 않으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만, 여기에 참된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지 않습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고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마 7:13~14)."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거짓말에 속아 세상의 흐름에 자신을 맡겨 잘 먹고 잘사는 것에만 몰두하는 것은 편한 길이고 안전한 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멸망에 이르는 길입니다. 반면, 세상에 긴장하고 그 문화와 풍조에 불편을 느끼며 때로 그것을 거슬러 살면서 옳은 것을 붙들기 위해 씨름한다면, 때로 불편하고 힘들고 손해를 볼지라도 그 길을 걸으며 생명을 누리고 결국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과연 이 두 갈래 길에서 어느 편을 선택하며 살 것입니까? 부디, 이 땅에서 참된 생명을 누리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복된 길을 걷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진리와 정의의 주님,
편하고 넓은 길을 탐하고 살았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세상에 긴장하지 않고
저희의 마음과 영혼을 내어 맡긴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미 고칠 수 없을 정도로 세상의 틀에 찍혀 버린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제, 주님의 성령께 저희를 맡깁니다.
세상의 틀대로 만들어진 저희를 깨뜨려 주시고
주님의 거룩한 손으로 다시 빚어 주소서.
세상에 긴장하게 하시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을 찾게 하시며,
좁은 길을 걷게 하소서.
매일의 이 싸움에서
매일 승리하도록
저희를 도우소서.
아멘.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의 '정의, 그 불편한 복음의 진실'이라는 주제의 연속 설교를 앞으로 5차례에 걸쳐 연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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