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속한 복을 받으라 
( 신 28:1-6, 엡 1:3-6 ) 
 
 
 
 
  
싱가폴에는 세계적인 새 공원이 있습니다. 이 곳에 있는 새 가운데 연분홍색의 아름다운 빛깔을 띠고 있는 홍학이 있습니다. 이 곳의 홍학은 세계에서 가장 예쁜 색깔을 가지고 있는 홍학이라고 합니다. 홍학들이 무리를 지어 있는데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었습니다. 그런데 홍학 우리 뒷 쪽에 홍학의 먹이가 있는 큰 먹이통이 있습니다. 먹이통이라기 보다 작은 연못입니다. 홍학들의 발이 잠길만한 얕은 연못입니다. 그 속에 홍학의 먹이인 작은 물고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연못의 물이 홍학의 색깔과 같은 연분홍이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예쁜 홍학들은 자기 몸의 색깔과 같은 물을 보고 삽니다. 자기 몸의 색깔과 같은 물 속에 있는 고기를 먹고 삽니다. 자기 몸의 색깔과 같은 색의 물을 마시고 삽니다. 이것이 그 곳의 홍학이 세계에서 가장 예쁜 색깔을 띤 이유입니다. 늘 그 속에서 먹고 보고 살아야 그 색깔을 띠게 되는 것입니다. 홍학이 그냥 예뻐지는게 아닙니다. 그 속에서 살고, 그 색깔의 먹이를 먹으니까 예뻐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먹고 사느냐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땅에서 먹고 자라면 땅의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땅에서 아름다운 삶을 삽니다. 하늘에서 먹고 자라면 하늘의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아름다운 삶을 삽니다. 요한복음 15:19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여러분은 어디에 속한 자입니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 18:36)고 하십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늘에 속한 나라는 하늘의 복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이 세상의 복을 추구하면 갓쓰고, 양복 입은 꼴이 됩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들은 하늘에 어울리게 살아야 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 안에서 외에는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인간에게 오는 축복은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은 하늘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복입니다. 브루스 윌킨슨은 ‘야베스의 기도’에서 “복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이다”고 하였습니다. 복 주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신령한 복을 받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늘에 속한 복은 신령한 복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복을 받느라고 하면서 화를 자초하는 경우도 흔히 봅니다. 복을 제대로 받아야 합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아야 합니다. 신령한 복은 영적인 복입니다. 요한이 말씀 한 것을 보세요.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하노라”(요삼 2). 영혼이 잘됨이 최우선입니다. 범사가 잘 되는 것은 차선입니다. 강건한 것은 차차선입니다. 인간의 실패는 이 우선순위의 혼돈에서 옵니다. 범사가 잘 되는 것이 최우선이고, 강건한 것이 차선이고, 영혼이 잘 되는 것이 차차선인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혹은 강건한 것이 최우선이고, 범사가 잘 되는 것이 차선이고, 영혼이 잘 되는 것이 차차선인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우선순위의 혼돈은 복이 아니라 화를 가져옵니다. “신령한”이란 말은 헬라어로 “프뉴마티케”입니다. “영적인”이란 뜻입니다. 구약의 복이 물질적이며 임시적인데 비해 신약의 복은 영적입니다. 세상의 복은 물질적인데 비해 하늘의 복은 신령합니다. 세상의 복이 임시적인데 비해 하늘의 복은 영원합니다. 오늘의 본문 구약의 말씀을 보세요.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미치리니”라고 전제합니다. 그런데 그 복이 무엇입니까? 3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을 봅시다. “성읍이 복을 받고 들이 복을 받습니다. 몸의 소생이 복을 받고, 토지의 소산이 복을 받습니다. 짐승의 새끼가 복을 받고,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습니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습니다. 이 말씀의 복은 다분히 현실적 복입니다. 어떤이는 이 장을 제일 좋아한답니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 복은 신령한 복의 부수적 은총에 불과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사모하고 순종하는 이것이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그 자체가 복입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순종할 수 있는 것은 복을 받은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대가로 육신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무당종교라고 하는 샤마니즘은 세 가지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현실성, 기복성, 의존성입니다. 샤마니즘은 내세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현실적입니다. 샤마니즘은 그 자체가 복을 갈구하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의존적입니다. 무당종교는 무당이 없으면 종교행위 자체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중간 매개가 있어야 합니다. 이 중간 매개가 무당입니다. 그래서 한국 기독교는 이런 세 가지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기복적이란 말은 샤마니즘적인 용어입니다. 기독교는 기복적 종교는 아닙니다. 그러나 기복은 해야 합니다. 복은 구하고 복은 받아야 합니다. 단지 복 때문에 믿는 것은 아닙니다. 세속적 복의 기준은 전통적으로 부귀다남(富貴多男)이라 했습니다. 돈을 많이 벌고, 귀한 자리를 얻고, 아들을 많이 가지는 것은 다 현실적 복입니다. 세속적 복은 눈에 보이는 것 이며 현실적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현실적인 것이 아닌 것이 신령한 복입니다. 현실적인 것만 보이고, 이런 신령한 것이 보이지 않으면 참 복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복은 선물입니다. 하늘이 주어야 받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을 보세요. 하나같이 신령한 복입니다. 천국이 저희 것입니다. 위로를 받습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배부를 것입니다.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볼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상이 클 것입니다. 이 복 가운데 현재적으로 받아 좋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은 현실적으로 좋아보입니다. 땅 부자가 된다는 말 아닙니까? 그러나 이 말도 현제적으로 얻는 것은 없는 말입니다. 땅을 후대에 주신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내게는 빈손입니다. 영어에서 헤어질 때 하는 인사는 “굿바이”(Good bye)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God be with ye)의 준말입니다. 스패인어의 “아디오스”(adios)는 “하나님께 향하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 이상의 축복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기를 비는 것,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목자가 본 시편 23편’의 저자 필립 켈러는 ‘나는 한 때 목동이었습니다’라는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언젠가 내 친구 두사람이 부활절 행사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우리 집에 들러 며칠 동안 머문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내게도 함께 가자고 권해서 같이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길을 가던 도중에 친구 중 한 사람이 모자를 잃어버린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모자를 우리 집에 놓고 왔다고 생각하여 나에게 집으로 편지를 해서 아내에게 좀 부쳐 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때 아내에게서 받은 편지를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가운데 한 구절이 나에게 특히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집을 지붕 꼭대기에서부터 아궁이까지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모자는 보지 못했고, 제가 발견한 것은 그분들이 남기고 간 축복 보따리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신령한 나라입니다. 평안과 사랑입니다. 돈 될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두고 다니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쁨과 평안입니까? 나를 통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들을 남기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다녀간 후에 “저 사람 다녀가면 재수 없어”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전달하고 남깁시다. 이 복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은 하늘의 복입니다. 

둘째, 하늘에 속한 복은 창세 전에 예정한 것입니다. 
하늘의 복은 미리 예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연히 우리에게 주어지고, 우리가 우연히 택정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어쩌다가 우연히 자녀가 되고, 우연히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미리미리 예정하신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브루스 윌킨슨, ‘야베스의 기도’에서 “정말로 하나님은 당신이 요청하지 않아서 주지 못하는 그래서 당신이 요청하기만을 기다리는 엄청난 복을 소유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엄청난 복을 주시려고 쌓아두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복은 창세 전에 이미 예비하신 복입니다. 우리가 요청하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편 31:19에는 시편의 기자가 하나님의 쌓아두신 은혜가 있다고 합니다. 베푸시는 은혜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복은 쌓여 있습니다. 쌓아놓고 바닥이 나지 않는 은혜입니다. 하늘의 복은 다함이 없는 복입니다. 이미 예정하신 복입니다. 그런데 그 복을 받을 사람이 요청하지 않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십일조 하나만 해도 창고가 넘치고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말씀을 다 순종하면 감당 못할 복을 받을 것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은 시기적으로 창세 전에 삼위의 영화로운 교제가 있을 때 예정된 것입니다. 창세 전에 속죄의 언약도 이루어집니다. 속죄의 언약이란 언약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창세 이전에 인간 구원을 위한 속죄의 언약을 삼위 간에 맺으셨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만드신 다음 “이것을 먹는 날에는 영원히 죽으리라”는 행위의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 것을 먹고 죽게 되자 다시 은혜로 구원받게 하는 은혜의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미 창세 전에 미리 언약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1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1:15에서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라고 합니다. 택정하셨다는 말은 지나고 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었다는 고백입니다. 저도 어릴 때는 목사의 아들이 싫었습니다. 목사의 아들이라는 것이 어려울 때도 많고, 귀찮을 때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니 이것이 하나님의 예정이며 하늘의 복입니다. 철들고 보니 목사의 아들이라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더구나 목사의 아들로서 목사가 되고보니 이렇게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쩌다 우리의 부모를 만나고, 실수로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창세 전에 예정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된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결코 실수가 없으십니다. 토저라는 분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우연이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만 이미 약속된 길을 걸을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눈으로 볼 때 모든 것이 예정 가운데 이루어진 것입니다. 미리 계획된 하나님의 뜻을 움직여 되어지는 것뿐입니다. 

셋째, 하늘에 속한 복은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는 양자가 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만 해도 이게 어디에요? 로마서 8:15에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합니다. 양자의 영만 받아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특권을 가집니다. 바울은 당시의 로마법에 의하여 이 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양자는 증인을 통하여 가족이 되고 아들과 같은 권리와 의무 가집니다. 누가 증인입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랬습니다. 그리스도가 증인입니다. 증인이 확실해야 하는데 그리스도는 확실한 증인입니다. 증인은 “오직 진실만을 말할 것을 선서”합니다. 선서할 때 손을 들 듯이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손을 들고 하나님께 진실을 말할 것을 선서하시고 죽으심으로 우리가 아들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이 교통 사고를 당했습니다. 목사님은 피해자였습니다. 어느 날 법정에서 목사님을 법정에 나오게 하였습니다. 법정에 나가보니 가해자가 증인을 한 사람 데리고 나와서 목사님이 가해자라고 우겼습니다. 목사님은 혼자 나갔는데 미국 사람이 증인 한 사람을 만들어 나온 것입니다. 물론 그 자리에는 그 증인이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할 말이 없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나는 미국의 양심을 믿습니다. 미국은 개인의 양심이 살아야 미국이 산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미국의 돈에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신뢰한다’고 씌어져 있는데 이대로 살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가짜 증인은 자신의 과실을 인정하였고 목사님은 그 후에 보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증인도 믿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증인은 든든한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좋은 증인을 만나서 아무 염려 없이 양자가 되었습니다. 부모의 자녀가 된 것은 자녀의 복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누구에게나 복입니다. 자녀의 보모가 된 것은 부모의 복입니다. 하나님의 창세 전의 예정에 의하여 부모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이 땅에 두시는 도구로 삼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에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자녀의 권리는 상속권입니다. 당당한 권리입니다. 어떤 상속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훗날에 기업으로 받는 권리입니다. “너는 내 아들 아니다”라고 하지만 그런다고 아들이 아닙니까? 한번 아들은 영원한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한번으로 영원한 자녀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녀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편 2:7에서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낳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너는 내 아들, 내 장자이다”라고 하십니다. 이제 우리에게 “아들 삼겠다”고 하시고 양자를 삼으십니다. 하나님께는 양자가 얼마나 귀한지 양자를 위해 친자를 죽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갈라디아서 4:7에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말한대로 가장 신령한 복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입니다. 유업을 잇는 것입니다. 이런 복은 하늘에 속한 복입니다. 우리 가락의 복음 성가에는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는 좋은 일이 있으리라 많이 있으리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특권이지만 좋은 일이 많이 있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이 가득 쌓여 있습니다. 

결론
이탈수업이란게 있습니다. 낮은데서 높은데로, 세상에서 하늘로 벗어나고 승화되는 일입니다. 성경은 “아비나 어미를 나 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참 신앙은 사랑을 위해 사랑을 버리는 일입니다. 에로스 사랑과 아가페 사랑의 대결에서 아가페 사랑이 이겨야 합니다. 낮은 데 매였던 사랑이 높은 데 옮겨야 하고 승화되어야 합니다. 땅엣 것에서 멀리 몸을 떼면 뗄수록 하늘의 것에 가까와질 것입니다. 신령한 것을 사모해야 땅에 것에서 이탈이 가능합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말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때때로 지체하시는가? 하나님은 지체하실 때마다 우리에게 갑절의 축복을 준비하고 계신다.” 당장 주시지 왜 하늘에서 주십니까? 갑절 이상 계산할 수 없는 복을 주시려고 이 땅에서 주시지 않고 하늘에 속한 복을 훗날에 주시니다.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현실적 복보다 신령한 복을 사모하며 삽시다. 하늘의 복인 평안을 소유하고, 천국을 소유한 자답게 큰 가슴을 활짝 열고 위풍당당하게 한 주간의 삶을 하늘의 복 가운데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