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의 성경적 이해, 그 기원과 그 실제
신약 학자에게 듣는 십일조에 대한 성경적 조명
 
김근수 기사입력 2009/06/20 [16:26]
<서 론>

십일조의 시행은 구약 창세기의 족장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신약 초대 교회를 이어서 중세,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신앙생활의 규범으로서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 십일조의 관습은 신자들이 그들의 총수입의 십분지 일을 신령한 목적을 위하여 헌물 또는 헌금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일부 교회에서는 십일조의 시행은 율법적 명령으로 규정하여 신약시대에는 의무적 규범이 될 수 없다고 고려한다. 특히 미국의 대부분의 교회는 성경적 규범이 아니라 신앙원리의 모범으로 수용함으로서 의무적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교회에서는 “소득의 십일조” 혹은 “소산의 십일조”를 평신도들까지 거의 철저하게 시행하고 있다. 최근에 한국교회일각에서 십일조의 관습은 율법적 형식주의라고 그 시행을 부정하는 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고, 심지어 보수주의나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도 비판적인 견해가 없지 않다. 그러므로 십일조의 기원과 그 실제를 구약은 물론 신약에서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고찰함으로써 오늘날 십일조에 대한 우리의 구체적인 견해와 입장을 확인하려고 한다.

<본 론>

1. 십일조의 기원 - 구약시대의 십일조

“십일조”란 수입의 십분지 일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뜻에서 히브리어 “마아셀”이란 어휘에서 기원되었다. 이를 신약 헬라어에서는 “데카테에”라고 번역하였고, 영어에서는“타이쓰(Tithe)”라고 번역하였다. 주로 이 십일조 연보는 성직자들의 생활비와 교회 유지비에 충당되었다. 구약 시대에는 의무적으로 십일조를 하게 함으로써 일종의 종교세와도 같았다. 마치 지금도 영국이나 일부 구라파에서는 “교구세” 또는 “종교세”로 수입의 십분지 일을 징수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1) 족장시대의 십일조

성경에서 십일조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연합한 왕들을 격파하고 돌아올 때 살렘왕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는 기록이다(창 14:17-20). 십일조를 바치는 동기를 보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살렘왕 멜기세덱이 축복하여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라고 할 때에 아브라함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지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고 하였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과 은혜에 대한 응답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살렘왕 멜기세덱은 왕이면서 동시에 제사장이었다. 
 
이 멜기세덱의 제사장 계열이 아론의 계열보다 탁월하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밝힌다(히 7:4-10). 그러므로 그는 구약시대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된다(히 7:1-3). 십일조는 인간 제사장에게 바친 것으로 되나 영적인 면에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으로 밝혀진다. 족장시대에 있어 십일조에 대한 또 하나의 언급은 이스라엘의 건국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고 형 에서를 피하여 하란으로 도피할 때에 광야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에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고 축복하시자 그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고 서원한 것이다(창 28:10-22). 이같이 족장시대의 십일조는 의무가 아니라 축복과 은혜에 감사하는 자원하는 차원의 시행이었다.

(2) 모세 시대의 십일조

십일조가 제도화되고, 의무화된 것은 출애굽 이후 모세가 율법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음으로써 시작되었다. 땅과 곡식과 과실과 우양 등의 십분지 일을 “여호와의 성물”로 성별하고 의무적으로 헌물하도록 계명으로 규정하였다(레 27:30-33). 이와 같은 십일조를 이스라엘 백성은 레위인에게 바쳐야 하고, 또한 레위인은 십일조의 십분지 일을 제사장에게 바치도록 규정하였다(민 28:21-32). 
 
가나안 입국 이후 레위인에게는 육신의 기업을 분배해주지 않고 종교적인 회막의 일만 하도록 요구하였다. 따라서 십일조가 그들의 생활비가 되었다(민 28:24). 제사장 역시 레위인이 바치는 “십일조의 십일조”로 생활하도록 규정하였다(민 28:26,28). 이밖에도 매 삼년 마다 구제를 목적으로 십일조를 시행토록 요구하였다(신 14:28-29).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은 물론 특히 “객”과 “고아”와 “과부”들을 십일조로 구제하는 것은 십일조의 사용규범을 확실하게 해주었다. 물론 그 우선순위는 구제에 있다고 할 수 없다.

(3) 왕정시대의 십일조

사사시대 말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중앙집권적인 왕정을 당시의 종교와 정치의 지도자였던 사무엘에게 요구하였다. 이때에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그가(왕)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너희 양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라고 순수한 종교적 목적이 아닌 또 하나의 십일조가 부담을 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삼상 8:10-18). 
 
이스라엘이 왕정시대로 들어가면서 왕들의 통치하에서 십일조는 더욱 강조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십일조의 정신은 시들어지면서 형식화되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미 왕정시대 초기에 사울왕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얻은 모든 것을 진멸하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어기고 번제와 제사의 명목으로 양과 소를 취하여 왔을 때에 사무엘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삼상 15:22)고 책망했던 사실은 내용보다 형식에 흘렀던 그 시대 십일조 정신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십일조가 감사가 원인이 되어 자원하는 형태로 시행되지 않으면 십일조의 근본 정신이 타락하고 마는 사실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십일조가 제도화되면서 “모든 것은 십일조를 많이 가져왔”(대하 31:5)기에 히스기야 왕은 “여호와의 전안에 방”(창고)을 예비하게 하고 십일조 헌물을 보관하게 하였다(대하 31:6-19).

(4) 바벨론 포로시대 이후의 십일조

왕정시대의 십일조뿐만 아니라, 모든 것의 부패와 타락은 유대와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이어진다.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십일조의 시행이 잘 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마지막 정경 선지자였던 말라기 선지자는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 3:8-9)고 책망하였다. 
 
더욱이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고 신앙적 원리와 규범으로 되돌아가도록 요청하고 있다. 그러므로 십일조 제도는 구약시대에 나타난 일시적인 관습이 아니라 영속적인 신앙적 규범으로 구약시대 전체에 맥락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2. 십일조의 실제 -  신약시대의 십일조

구약의 십일조가 신약시대에도 계속하는 것인가? 혹자들은 구약시대에 시행되었으나 신약시대에 중지된 제사제도와 같이 십일조 제도 역시 중지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서 그 실제를 규정할 필요가 있다.

(1) 바리새인들의 십일조

복음서에서 십일조가 처음 언급된 것은 바리새인의 십일조 관습이었다. 그들은 철저하게 십일조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십일조의 근본정신이 약화되었음을 예수님께서 지적하시고 책망하셨다. 그들은 “소득의 십일조”(눅 18:12)는 물론이고, 심지어 채전에 조금씩 심는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눅 11:42)까지 바쳤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고 책망 받았다(눅 11:42). 바로 이 점이 율법적 형식주의에 매여서 십일조의 형식은 취하되 그 근본적인 내용인 “공의와 사랑”의 정신은 망각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복음서 저자 마태는 십일조의 정신을 “의와 인과 신”이라고 언급하였다(마 23:23). 더욱이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눅 11:42)고 말씀하시므로써 형식의 십일조와 내용의 십일조를 다같이 공존시켜야 할 것을 교훈 하신 것이다. 혹자는 이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의 것이기 때문에 율법을 완성하신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십일조의 시행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도”란 말씀이 분명히 제도적인 십일조를 뜻함이 분명하기 때문에 십일조의 중지란 예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문제가 되는 “율법의 마침(완성)”이란 로마서 10장 4절의 말씀을 바로 해석하는 것은 신약의 십일조에 대한 분명한 규범을 확정할 수 있을 것이다.

(2) 신약의 십일조 개념

로마서 10장 4절에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하였다. 여기에 채용된 “율법의 마침”이란 말은 헬라어로 “텔로스 노무우”인데, “마침”에 해당하는 “텔로스”는 삼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이다. 그 의미는 “마침(Termination)”, “목표(Aim)”,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의미로서 “성취(Fulfillment)”란 뜻이다. 혹자들은 율법의 마침으로 율법의 5대 제사가 마침이 되었듯이 십일조도 마침이 되었다고 해석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해석가들은 한결같이 율법을 제사법, 의식법, 시민법, 또는 도덕법 등 율법의 어떤 구분과 종류를 반드시 언급한다. 왜냐하면 율법이 마침이 되었다고 주장하면 모든 율법이 다 폐지되어야 할 것인데 대부분의 율법들이 아직도 여전히 준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사법만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어떤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그러면 율법의 복수의 개념이 가능한가? 신약의 그 어느 곳에서도 율법을 “노모스”라고 단수로 채용하지 “노모이”라고 복수개념으로 쓴 곳은 단 한 번도 없다. 오히려 성경은 율법의 전체성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율법의 조문을 구별하여 이해할 수 있지만, 율법의 어떤 종류를 구별할 수는 없다. 야고보서 2장 10절에 보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한 조문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라고 밝힘으로써 간음하지 않았어도 살인하였다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된다고 하였다(야고보서 2:11). 이는 율법이 본질상 하나임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도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8)고 그 전체성을 분명히 교훈 하셨다. 이와 같은 면에서 고려한다면 “율법의 마침”이란 번역보다 “율법의 성취”라는 이해가 올바르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구약의 5대 제사에 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레위기 등 소위 “제사법”으로 구성되어 있는 성경들은 폐지되고 그 유효기간이 지난 것이 아니라 오늘날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있고 유효한 것임을 분명히 해야만 한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에 동물의 피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은 예수님께서 대속의 어린 양으로 단번에 완전하게 피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다. 이는 율법의 한 성취(Fulfillment of the Law)일 뿐이다. 율법의 최종적 완성(Consummation of the Law)은 과거에 진행되어 왔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고, 장차 주의 재림과 더불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십자가 이후 십일조를 규정한 율법이 죽었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왕정시대 이후에 나타난 형식주의, 초대교회의 바리새인들과 같은 의식주의나 외식주의, 타성에 젖어서도 안된다.

<결 론>

신약성경에서는 끊임없이 연보에 대하여 가르친다. 억지로 하지 말고 즐거움으로 하라고 했다(고후 9:5-7). 또한 후한 연보를 하되 “이를 얻은 데로” 하라고 했다(고후 9;13, 고전 16:2).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다(고전 10:31). 이러한 가르침을 받아 예루살렘 초대교회에서는 유무상통의 헌신생활을 한 적도 있다(행 2:44-45). 바나바뿐만 아니라 많은 신자들이 밭과 집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충당하였다(행 4:34-36). 
 
이런 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형식주의적 십일조에 메여있는 것이 아니라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 (눅 11:42), 그리고 “의와 인과 신”(마 23:23)에 원리에서 재물을 관리하고 사용하는 청지기 정신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십분의 일만 하나님의 것이고 나머지는 내 맘대로 남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필요에 따라서 십의 이나 삼을 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다만 원리는 적어도 십의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할 것이다. 이는 비단 물질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 해당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