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근을 대하는 성도의 바른 자세”(삼하 21:1-6)  

오늘은 기근을 대하는 성도의 바른 자세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년 부년 계속되는 경제적(經濟的) 기근, 정치적(政治的) 기근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몹시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위정자나 정치인들은 민생치안에는 관심이 없고 당리당약에만 관심을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정말 답답하고 짜증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사회는 단순히 경제적 기근과 정치적 기근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기근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모든 영역 속에서 이미 적신호(赤信號)가 들어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상황적 기근이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도 영향을 주어서 영적 기근 가운데 놓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암 8:11에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어쩌면 지금은 말씀의 기근 때인지 모릅니다. 말씀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귀를 막음으로 듣지 못하는 말씀의 기근 때입니다. 

지금 사람들의 마음이 득도로 강퍅해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대처럼 피리를 부어도 춤추지 않고, 왜곡하여도 가슴을 치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마 11:17, 눅 7:32) 바로 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다시금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려울수록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있듯이 다시 기본으로 어려울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물론 인간은 환경에 지배를 받는 존재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어렵고 세상이 어지럽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은 덩달아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시대의 편승하여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오늘의 시대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먼저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쟁과 기근, 가난, 정치적 분란, 경제의 침체... 등과 같은 우리의 모든 문제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를 하나님께 물어 보아야 합니다. 

렘 17:7-8에서 “...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뢰하는 성도라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 걱정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냇가 심은 나무의 진가는 가뭄의 때에, 기근의 때에 더욱 그 진가가 나타납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진가를 나타나 보일 때입니다. 마찬 가지로 신앙의 성숙도는 기근을 만날 때에 나타납니다. 바로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신앙의 성숙도를 분명하게 보여줄 때입니다. 물론 기근의 때에 믿음으로 반응한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하지만 영적 통찰력과 분별력을 가지고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다윗은 참으로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3년 동안 계속되는 기근 앞에서 영적 감각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살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섭섭히 여기실만한 일은 없는가, 하나님과의 사이에 막힌 담은 없는가를 예의주시하며 오직 기도로 나아가는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동과 말씀이 있으면 그 말씀대로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와 공의를 세우는 믿음의 종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기근을 대할 때에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기근을 만날 때에 기도해 보아야 합니다.(1절 상)
본문  1절 상반 절에서“다윗의 시대에 년 부년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다윗은 삼년동안 계속되는 기근을 앞에서  하나님에게 기도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함으로 그 원인을 먼저 살폈습니다. 다윗은 약 5:13에서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고난당할 때에 기도했습니다. 

이스라엘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지정학적(地政學的)으로 강대국에 둘러싸여서 항상 전쟁의 위협과 평야 지대가 많지 못한 열악한 자연 환경 때문에 풍요로운 삶을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하나님께서 늦은 비와 이른 비를 주시지 아니하면 결코 결실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땅은 지중해성 기후이기 때문에 이른 비가 없으면 결실할 수 없습니다. 채소도 얻을 수 없고 곡식도 없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농사를 잘 지어도 적당한 때 비가 내리지 않으면 농사는 아무런 수확은  거둘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매년 농사를 지을 때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아니하면 흉년을 당하여 온 백성들이 기근의 고통을 맛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배가 고팠던 시절이 있던 사람은 배고픈 고통과 설음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이해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근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고통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나안 사람들은 그것을 면해보려고 그 대안으로 바알이라는 풍요의 신을 만들어 대대로 우상을 숭배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옛날에는 비가 오지 아니하면 기후제를 지냈던 것처럼 가나안 사람들은 비가 오지 아니할 때에 바울에게 비가 오도록 제사를 지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방법이 얼마나 어리석은 방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근을 만날 경우에 그 원인을 자연 환경적인데서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과학적인 입장에서 환경을 살피는 것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만을 의존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날이 가물어서, 아니면 병충해가 심해서, 종자를 잘못 파종해서”라고 생각하고 그 것을 바꾸어 기근을 면해보려고 먼저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 그러나 성도는 기근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야 합니다.
성도는 인간적인 생각을 앞세우면 안 됩니다. 룻기 1장을 보면 베들레헴에 살던 나오미의 가정이 나옵니다.  나오미의 가정은 그의 남편 엘리멜렉과 그의 두 아들 말론과 기룐과 함께 기근을 피해 모압 지방으로 이주해 갔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최상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흉년을 피해 모압으로 이주해 갔지만 결국 10년 후에는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도 죽고, 나오미의 두 아들 말론과 기룐도 죽고 말았습니다. 행복을 찾아 갔지만 불행으로 끝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참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나오미의 가정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그러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도 역시 연약할 때가 있었습니다. 실수할 때가 있었습니다. 창 12장 10절 이하에 보니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 기근이 심하게 되자 기근을 피하여 애굽으로 갔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결정은 매우 현명하고 적절한 행동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아브라함의 행동은 하나님 백성다운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인본주의적인 행동이었습니다.(창 12:10) 그리고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일까지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근을 만날 때에 인간적인 방법으로 대처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나에게 왜 이런 기근이 왔는가?”를 먼저 살피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에 다윗의 행동은 참으로 지혜로운 행동이었습니다. 신실한 믿음의 행동이었습니다. 다윗은 삼년 동안이나 계속되는 기근의 원인이 자연적인데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계속적으로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다윗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 원인이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이 맞이한 이 재앙과 위기 앞에서 주저 없이 하나님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근을 만날 때에 다윗처럼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근의 때에 왜 기도해야 합니까?
다윗이 기근의 때에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기근의 원인을 알려 주셨습니다. 본문 1절 하반 절에서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기근의 때에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겸손하게 무릎 꿇은 다윗에게 이 기근의 원인이 사울 왕가의 범죄 때문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기근의 때에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원인을 알려주십니다. 기근을 대하는 다윗의 이와 같은 모습은 오늘도 우리 성도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려운 문제를 만나게 될 때 그 문제를 어떻게 불신자와 다른 안목으로 문제의 원인을 진단하고 그것을 신앙적으로 풀어가야만 하는가 하는 좋은 본보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다윗은  비록 그것이 육신의 양식이 문제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는 기회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삼년 연속의 기근을 놓고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을 때 하나님은 즉시 그 원인이 사울 왕이 기브온 사람들에게 잘못한 죄 때문이라고 깨우쳐 주셨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기근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보다는 어디에 가서 양식을 구해오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근에 대한 최선의 대안은 양식이 아니라 기도라는 것을 믿는 고 더욱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불신자와 다른 점입니다.
견디기 힘든 어려움 속에서 먼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살펴보고 과연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으며, 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과연 신앙적인 자세인가를 살피고, 아프지만 인내와 소망을 가지고 실천에 옮기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자세인 것입니다.

2. 기근을 만날 때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9절) 
본문 9절에서 “저희를 기브온 사람의 손에 붙이니 기브온 사람이 저희를 산 위에서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매 저희 일곱 사람이 함께 죽으니 죽은 때는 곡식 베는 처음 날 곧 보리 베기 시작하는 때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다윗은 기브온 사람에게 사람들로 하여금 사울의 아들 일곱 명을 처단하도록 허락을 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기근이 사울 왕 때문에 그러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곧바로 기브온 대표들을 만나 속죄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본문 3절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우리를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라는 말씀처럼 다윗은 사울 왕이 잘못한 것을 대신 속죄할 방법을 구했지만 그때 기브온 거민들은 속전(贖錢)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자신들을 말살하려고 했던 사울 임금의 족속 중에서 7명의 속죄인(贖罪人)을 내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의 요구를 허락했습니다.5절 하, 6절 하)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기브온 사람들이 요구처럼 사울의 아들 7명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삼년 동안의 기근이 바로 사울에게 있었기 때문이었고, 본문 14절 하반 절에서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기근의 원인은 제거한 이후에 하나님께 비로소 그 땅을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울의 아들 7명을 죽이는 것은 원인 제공자를 처단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였던 행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이 통치하는 이스라엘 나라에 삼년이나 연속으로 기근을 내리신 원인이 다윗의 죄 때문이 아니라 사울의 죄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은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어떤 죄를 지었습니까? 
그것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던 여호수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수 9:14-15)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고 요단강을 건너 파죽지세(破竹之勢)로 가나안 땅을 점령해 들어갈 때 기브온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간교한 연극을 하였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여호수아에 화친(和親)을 위한 사절을 보낼 때 다 헤어진 전대와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다 낡은 신을 신고 다 헤어진 옷을 입고 다 마르고 곰팡이 난 떡을 내어 보이면서 자기들은 멀리서 왔으며 자기 백성들을 이스라엘의 노예로 삼고 죽이지 않을 것을 조약해 달라고 매어 달렸습니다. 이에 여호수아는 경솔하게 그들의 외모만을 보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한 채 그들의 요구대로 화친의 언약을 맺었습니다. (수 9:14)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 어떻게 할 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수 9:15)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언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

그러나 삼일이 지난 후에 기브온 사람들의 말이 거짓임이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한 것이기 때문에 그 조약은 유효한 것이 되었고 결국 기브온 사람들은 죽지 않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기브온 사람들이 거짓말을 해서 맺은 조약이기 때문에 무효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조약을 자자손손 지켜야만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자세히 나타나 있지 않으나 그 기브온 자손들이 사울 왕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함께 살고 있었으며 사울은 그것이 못마땅하여 무죄한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한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민족보다 민족주의(民族主義)가 강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울의 그와 같은 처사에 대해서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지 않고 다 좋게 생각하고 다윗 때까지 넘어온 것입니다. 사울은 기브온 사람들을 부당하게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은 약조를 무시하는 일이었고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다윗이 왕으로 있던 시대에 3년이나 계속되는 기근이 닥쳤던 것입니다. 

▶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도 그 일에 대해서 침묵해 오시다가 왜 다윗이 왕이 된 후에 지나간 과거사를 다시 되돌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삼년 이나 거듭 기근의 재앙을 내리신 것일까요?
그것은 사울 왕만의 죄가 아니라 그 시대에 동참(同參)하고 있던 다윗을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일에 방관자요 동참자로소 다윗이 왕이 된 이후에도 그것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 왕조차 비로소 삼년 기근이 연속된 후에야 기도 중에 비로소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지요?  
분명히 내가 그 사람을 추대하였고 그 현장에 내가 있었고 그 일을 목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의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도 느끼거나 나누려고 하지 않는 무책임이 공동체를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비록 다윗이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지만 다윗은 그것이 왜 내 책임이냐고? 하나님께서 흉년을 내리시려거든 사울 왕 때 내리시지 않고 왜 이제 와서 나에게 그 책임을 물으시는가 라고 원망 불평해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고 그것을 시인하고 그 대책을 강구하였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그에게도 누구 못지않은 강력한 왕권과 더불어 자존심(自尊心)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사울이 잘못한 과거사를 청산하기 위해 기브온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잘못된 것을 다윗의 일방적인 생각대로 처리하지 않고 약소민족인 기브온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 한을 풀어 주면 되겠는지 그들의 요구를 물어 보았을 때 비로소 기브온 사람들은 그동안 마음 속 깊이 품고 있던 그들의 억울함을 드러내 놓았습니다. 

본문 4절에서 “기브온 사람이 대답하되 사울과 그 집과 우리 사이의 일은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나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왕이 가로되 너희의 말하는 대로 시행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기브온 사람은 자신들의 문제는 돈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억울한 사람들을 죽인 사울 왕의 자손들에게 이는 이로, 눈으로 눈으로 갚아야 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사울이 생전에 다윗을 그렇게 괴롭혔지만 다윗은 사울 왕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그의 가문을 지켜왔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기브온 사람들이 그 사울 왕가의 가족들의 생명을 요구하였을 때 다윗은 어느 쪽을 선택해야 만 할까요? 약소민족 기브온 사람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사울 왕가를 살려줄 수도 있습니다. 

▶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의 요구대로 사울왕의 자손 일곱 명을 기브온 사람들에게 내어 주는 결단을 하였습니다. 본문 9절에서 “저희를 기브온 사람의 손에 붙이니 기브온 사람이 저희를 산 위에서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매 저희 일곱 사람이 함께 죽으니 죽은 때는 곡식 베는 처음 날 곧 보리 베기 시작하는 때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기브온 사람들은 그 일곱 명을 처단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기브온 사람들의 맺은 한은 풀었는지 모르나 그 일곱 사람의 죽음을 목격해야만 하는 사울 왕의 첩이었던 리스바에게는 역시 크나 큰 또 하나의 한이 되고 말았습니다. 본문 10절의 “아야의 딸 리스바가 굵은 베를 가져다가 자기를 위하여 반석 위에 펴고 곡식 베기 시작할 때부터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그 시체에 낮에는 공중의 새가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게 한지라”는 말씀처럼 사울 왕의 첩리스바에게는 크나 큰 또 하나의 한이 되고 말았습니다. 

▶ 그렇다면 왜 그러한 결과가 계속해서 꼬리를 물고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목숨을 걸고 맹세한 언약을 지키지 않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만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책임을 묻지 않고 넘어가신다면 하나님은 신실하심을 무효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죄한 피를 흘렸다면 역시 그 죄는 피로써만이 갚아지는 것이 곧 대속의 원리인 것이며, 사울의 후손 일곱 명이 죽임을 당함으로 무죄한 피를 흘린 죄에 대한 결과가 어떤 것인가 하는 하나님의 공의를 여실히 드러내주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돌이킬 때에 기근을 거두어 가십니다.
암 8:11 상반 절에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린 기근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다윗 시대에도 뿐만 아니라 엘리야 시대 때에도 하나님께서 기근을 주시지 3년 6개월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눈을 닫으면 아무리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문제 해결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하나님께서 닫으면 열 사람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기근이라면 우리가 아무리 기도해도 그 기도는 응답되지 않습니다. 그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다른 문제도 풀리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근이 있을 때에 다윗처럼 하나님과의 문제가 없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사람과의 관계가 잘못되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먼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교역자와 관계, 성도와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등 사람들과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문제의 원인을 살펴본 후에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즉시 깨닫고 회개하여 돌이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마 18:18에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를 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은 공평하시고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돌이킬 때에 기근을 거두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세상 백성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이며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이방인들까지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어떤 약속이든지 하나님과 맺은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이 크든지 작든지 간에, 아니면 감정으로 했든지, 이성적으로 했든지 간에 하나님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맹세도 하지 말아야 하고, 함부로 서원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키지 못할 맹세, 서원은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 빠지게 만듭니다. 엄청난 문제를 야기시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비록 기브온 사람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여호수아를 속이고 거짓말을 했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은 언약은 반드시 지켜져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이방인들과의 약속을 해 놓고 지키지 않고 약소민족이라고 짓밟고 억울하게 대할 때 하나님은 결코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소국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도, 예수님이 그 땅에 오신 이유도, 세상에서 별 볼일이 없는 저와 여러분을 택하시고 예수 믿게 하시고 구원하여 잘 살게 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물론 기브온 사람들이 사울의 자손 일곱 사람을 처형하는 것은 역시 잔인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책임한 조약(條約)과 그것을 사울 왕이 지키지 않고 억울한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 그 후손이 그대로 당함으로 생명은 생명으로만이 대속되어짐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늦게 지만 다윗의 기도를 통하여 기근의 원인을 깨닫고 이제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이키기 위해서 그 원인을 제거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금 축복해 주셨습니다.  

첫째로 그렇게 한 후 삼년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다가 그 즉시 하늘에서 비가 내렸습니다.(10절)
본문 10절에서 “아야의 딸 리스바가 굵은 베를 가져다가 자기를 위하여 반석 위에 펴고 곡식 베기 시작할 때부터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그 시체에 낮에는 공중의 새가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게 한지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삼년 동안 비 한 방울을 내리지 않다가 그 즉시 하늘에서 비가 내렸습니다. 

② 뿐만 아니라 사람이 고난을 당하여 하나님께 아무리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던 기도가 다시 응답되었습니다. (삼하 21:14)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 아비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 모두 왕의 명대로 좇아 행하니라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니라”

이처럼 사울 왕 때 죽임을 당한 기브온 사람들의 억울함을 하나님이 외면하지 않으시고 다윗 세대에 와서 그것을 속죄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은 결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유리하게 하시는 민족 신이 아니라 세계 만민의 하나님이심을 깨우쳐주는 것입니다.

인간이 빈손으로 태어나지만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은 하나님의 돌보시는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인간들에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더욱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 6:31-32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 아닌 그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주리고 목마른 기근의 고통을 허락하신 때가 종종 있으셨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오늘 말씀의 주 인공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도 바로 그와 같은 맥락에서 다윗이 저지른 죄가 아니라 사울이 범한 죄였지만 그것은 기브온과 이스라엘 공동체와 맺은 언약을 어긴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공동체와 개인이 공동적인 책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삼년 동안 계속해서 기근이 찾아왔다는 것은 죽음에 가까운 고난입니다. 그 원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였거나 제사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다만 과거에 사울 왕이 히틀러처럼 민족주의에 빠져 변질된 애국심(愛國心)으로 자기 나라 땅에 살고 있는 이방인 기브온 족속을 학살한 것이 결과적으로 자기 백성들을 더 고통에 빠뜨리게 된 것입니다.

4. 그러면 본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교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생의 모든 문제는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죄의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사울 왕이 범한 죄가 다윗 왕시대의 기근과 재앙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사실은 죄가 언젠가는 심판을 불러옴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죄를 간과하면 공동체 전체가 재앙을 맞는다는 진리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너와 나, 하나 하나의 개체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부름 받은 거룩한 신앙공동체, 생명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죄의 심판성을 가르치며, 조상들이 자손들의 영적인 책임자여야 한다는 사실과, 한 공동체는 과거의 역사까지도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윗의 신앙과 그 인격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기근이 있고 재난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물었습니다. “과학적으로 기근이 있을 수도 있고 재난이 있을 수도 있지!”하고 해석하고 끝나면 안됩니다. 
바람과 풍랑을 조절하시고 천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 엎드려 묻고 간구해야 하는 것이 신앙백성들의 삶인 것입니다. 사실 다윗은 이 재난에 책임이 없었습니다. 
또 책임이 있다 하더라도 한 나라의 왕이기에 자신이 마실 물과 먹을 양식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묻고 매달렸습니다. 여기에 다윗의 훌륭한 신앙과 인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가운데서 해석하고 해결할 줄 아는 믿음의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문제를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로 해석하시기 바랍니다. 형통할 때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재난이 있을 때는 죄의 장벽이 있는 것이 없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은 전도서 전 7:14에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야고보 사도가 약 5:13에서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고난 당할 때에 기도해야 합니다. 기근의 때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또 한 가지를 기억할 것은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고, 공의를 베푸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조상들의 의로운 삶을 통하여 후손들에게 축복의 역사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운 역사요,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의로운 삶이 후손들에게 큰 축복의 역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에 여러분의 자손이 이끌어 가는 사회가 의로운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민족이 산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삼년 연속된 기근의 원인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언약을 지키지 않은 불신실한 죄 때문이었습니다. 만약에 오늘도 그 같은 원칙이 적용되어진다면 해마다 기근이 임해야 하고, 조상의 죄로 인해 후손된 우리들이 대속의 죽음을 죽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들에게 그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까닭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요? 다윗처럼 우리의 후손에게 차압을 붙이시기 위함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원칙을 위에게 적용하신다면 단 한사람도 무사할 사람이 없고 평생 고통을 겪으며 살아도 그 빚을 다 갚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기근보다 더 두려운 문제는 곧 죽음과 심판입니다. 그에 대한 대안이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한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최선의 대안이 되어주셔서 우리가 살게 되었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사 53:5에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은 바로 우리에가 죄로 말미암아 당하게 되는 고통을 우리가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 때문에 우리가 이처럼 평화롭게 살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상관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닮아 공동체 속에서 대속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좋은 일에는 함께 라고 말하지만 책임을 져야 하는 일에 대해서는 내 책임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최소한 우리라고 말하는 곳에 영광의 몫만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책임도 분담해야함을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커지고 강해질수록 교만하지 말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  인간과의 관계, 심지어 불신자와의 관계에서도 신실하게 지켜 신실하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세계 역사를 보십시오. 그러한 책임 의식을 가지고 사는 민족을 강대국이 되게 하시고, 그러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을 성공하는 지도자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 역사의 키를 잡고 계심을 깨닫고 우리에게 기근 가운데서 다시 살 길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