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
글 수 616
누가복음 15:11-24)
설교요약
오늘의 본문은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입니다. 어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가 받아야 할 유산을 미리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할 수 없이 두 아들에게 미리 유산을 나누어 줍니다. 둘 째 아들이 그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저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그 재산을 다 탕진하고 맙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듭니다. 둘째 아들은 할 수 없이 그 나라의 어느 집에 종살이를 합니다. 돼지를 치는데 먹을 것이 없습니다. 돼지가 먹는 음식이라도 먹으려고 했지만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정말로 가련하고 불쌍한 처지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기다립니다. 드디어 아들은 아버지에게로 돌아오고 아버지늘 그 아들을 품습니다.
이 비유는 인간들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게 하실 만큼 우리를 사랑십니다. 오늘 우리는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 하나님의 사랑만을 부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탕자와 같은 우리들을 하나님이 당연히 용납하시고 받아 주셔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기다리지 않는 아버지는 사랑이 없는 나쁜 아버지처럼 인식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들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아버지의 당연한 할 일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돌아온 아들을 위해 반드시 잔치를 해야만 그 아버지는 사랑이 있는 아버지라고 인식을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우리를 용서하셔야 하고, 하나님은 당연히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죽게 하셔야 하고,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무조건 용서하고 받아 주어야하는 하는 것처럼, 일방적인 생각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깐 오늘 본문에서 탕자가 어떤 일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습니다. 탕자가 어떤 일을 반드시 해야만 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탕자가 한 일이 있습니다. 아니 탕자는 반드시 이 일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아버지의 사랑의 울타리 안에 들어올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만을 강조하다보니, 내가 그 하나님의 사랑에 어떻게 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가하는데 대해서는 잘 알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고 하더라고 우리가 그 사랑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지를 않는다면, 그 사랑의 혜택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집밖의 탕자는 아버지의 사랑의 혜택을 받아 누리는 은총을 어떻게 받아 누릴 수가 있었습니까?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1. 스스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스스로 깨닫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버지에게 요청한 것이, 자기가 집을 나간 것이, 자기가 나가서 마음대로 돈을 쓴 것이, 이렇게 지금까지 자기 생각했던 것이, 자기가 선택핸 것이, 자기가 행동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탕자는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 사랑의 은총 가운데 들어갈 수 있는 첫걸음인 것입니다. 자기의 잘못된 깨닫지 못하는 자는 아버지의 사랑의 울타리 속에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자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지요. 그대고 돼지의 열매도 못 얻어 먹고 죽게 되는 것입니다. 죽는 것입니다.
2. 아버지의 품안이 어떠한 곳인가를 가슴 깊이 느끼는 것입니다.
탕자는 나가 보니깐, 돈 떨어지고, 먹을 것도 떨어져 보니깐 그제서야 아버지의 품이 얼마나 좋았으며, 아버지가 얼마나 고마운 분이신가를 절실하게 알게 됩니다.
17절,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지금 여기서 돼지 먹이도 얻어 먹을 수가 없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내 아버지 집에는 품꾼들도 잘 먹고, 잘 벌고, 잘 살고 있으니, 내 아버지의 집이 얼마나 풍성하고, 내 아버지의 품이 얼마나 좋은고 하고 뼈져리게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고마우신 분인가를 이제야 가슴깊이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안이 부자유스럽게 느껴 질 수가 있지요? 자기 마음대로 나쁜짓도 할 수 없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내키는 대로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것 같으니 슬슬 하나님 곁을 떠나고 싶어지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건수가 생기는 그,것을 핑계삼아 하나님을 떠나 봅니다. 그러다가 실컷 고생하고 두들겨 맞고, 병나고 망하고 얻어터져서 그 때가서 하나님 살려 달라고 두 손 들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곁을 떠나보니,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결국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기분좋게 불신의 생활을 실컷 즐겼습니다. 그런데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얼마나 심하게 사고가 났는지 그 사람의 머리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머리뼈가 박삭 깨지면서..,
모두가 그 사람이 죽은 줄로 알았습니다. 조각난 머리뼈를 붙이고 머리 속에 있는 것을 집어 넣고 수십 바늘을 꿔맸습니다. 생사의 갈림길에 오랫동안 있었습니다. 의사들은 가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 그래도 살고 싶었나 봅니다. 하나님 살려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한 번만 살려 주시면, 한 번만 살려 주시면 이제는 하나님앞에 무조건, 생명 다하여 충성하겠다고...
기적이 일어났지요, 가망이 없다고 했는데... 하여튼 살아나고 건강을 회복해서 퇴원을 했습니다. 한동안 제법 신앙생활 잘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다시금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교회를 안나오고 , 하나님을 떠나려고 갖은 핑계와 이유를 다 댑니다. 회사가 바빠서, 중요한 사람을 만나야 하기 때문에,,
교회 예배에 빠집니다. 주일까지 빠집니다..... 하나님 안녕.. 사람은 화장실 갈 때만 바빠서는 안됩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를 모른 채 하고 잊어 버려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바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 사고가 나는데 그 자리에서 처참하게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만만하게 보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나쁜 짓을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감찰하시고 우리의 마음까지 꿰뚫어 보십니다. 무서운 하나님...
3. 자기의 처지를 아는 것입니다.
탕자는 자기가 거기서 굶어 죽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날 자기가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도 모르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기가 영혼이 영적으로 굶어 메말라 가도 있는데도 말입니다. 자기가 지금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본인은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만 사단이 그 눈과 그 귀와 그 마음을 가리면, 바보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통일교 문선명이를 따라가고, 여대성들과 놀아난 교주 정명석을 따라가는 열성신도를 중에 아주 똑똑하다고 하는 지식인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처지를 바로 인식할 줄 아는 자만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혜택을 입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4.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자기 자신이 아들답지 못했음을 회개하는 모습입니다. 아들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나는 아들아니 유산을 달라고 아버지에게 큰 소리를 쳤지요. 아들의 권리만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진 탕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신의 고집과 아집을 하나님 앞에 포기해야 합니다...
마치 세리처럼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흐느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 자신을 죽이면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분명히 잘못한 탕자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죽지 않으면.. 기필코, 분명히.. 돼지가 먹은 쥐엄열매도 못얻어 먹게 되어 죽게 됩니다. 비참한 죽음이지요..
5. 일어나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큰 소리칠 때는 언제고, 이제 돌아가는 것은 언제입니다. 나는 죽어도 그러지를 못한다 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사람의 결국은 죽음이지요.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안기기 위해서는 일어나서 돌아가야 합니다. 자존심도 죽이고, 부끄러운 것 창피한 것,. 모든 것을 감수하고 돌아가야 합니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중요한 것 아닙니까?
오래 전에 청량리 대왕코너, 지금은 롯데백화점이 들어섰는데.. 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불이 나니 젊은 여성들이 몸에 옷을 걸치지 않고 뛰쳐 나오더라고요. 벌거벗은 몸으로 소방관의 등에 엎혀서 나오더라고요.. 살아야지요.. 두 말할 것 없이 살아야지요.
창피하다고, 부끄럽다고 불타고 있는 건물 밖으로 안 나올 겁니까?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이십니다. 알고도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오래 인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인내와 긍휼의 기간이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뭐 사랑의 하나님인데.. 라고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주님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이제 하나님은 인내를 끝내시고, 기다림을 끝내시고.. 심판을 위해서 일으서시고 계시는 엄위하신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관대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참으신 하나님 만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심판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삶을 정결하게 살아야 합니다.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막 살아서는 안됩니다. 대강대강 살아서는 안됩니다. 진실되게 삽시다. 정직하게 삽시다
Tweet
설교요약
오늘의 본문은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입니다. 어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가 받아야 할 유산을 미리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할 수 없이 두 아들에게 미리 유산을 나누어 줍니다. 둘 째 아들이 그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저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그 재산을 다 탕진하고 맙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듭니다. 둘째 아들은 할 수 없이 그 나라의 어느 집에 종살이를 합니다. 돼지를 치는데 먹을 것이 없습니다. 돼지가 먹는 음식이라도 먹으려고 했지만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정말로 가련하고 불쌍한 처지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기다립니다. 드디어 아들은 아버지에게로 돌아오고 아버지늘 그 아들을 품습니다.
이 비유는 인간들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게 하실 만큼 우리를 사랑십니다. 오늘 우리는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 하나님의 사랑만을 부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탕자와 같은 우리들을 하나님이 당연히 용납하시고 받아 주셔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기다리지 않는 아버지는 사랑이 없는 나쁜 아버지처럼 인식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들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아버지의 당연한 할 일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돌아온 아들을 위해 반드시 잔치를 해야만 그 아버지는 사랑이 있는 아버지라고 인식을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우리를 용서하셔야 하고, 하나님은 당연히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죽게 하셔야 하고,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무조건 용서하고 받아 주어야하는 하는 것처럼, 일방적인 생각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깐 오늘 본문에서 탕자가 어떤 일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습니다. 탕자가 어떤 일을 반드시 해야만 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탕자가 한 일이 있습니다. 아니 탕자는 반드시 이 일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아버지의 사랑의 울타리 안에 들어올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만을 강조하다보니, 내가 그 하나님의 사랑에 어떻게 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가하는데 대해서는 잘 알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고 하더라고 우리가 그 사랑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지를 않는다면, 그 사랑의 혜택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집밖의 탕자는 아버지의 사랑의 혜택을 받아 누리는 은총을 어떻게 받아 누릴 수가 있었습니까?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1. 스스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스스로 깨닫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버지에게 요청한 것이, 자기가 집을 나간 것이, 자기가 나가서 마음대로 돈을 쓴 것이, 이렇게 지금까지 자기 생각했던 것이, 자기가 선택핸 것이, 자기가 행동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탕자는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 사랑의 은총 가운데 들어갈 수 있는 첫걸음인 것입니다. 자기의 잘못된 깨닫지 못하는 자는 아버지의 사랑의 울타리 속에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자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지요. 그대고 돼지의 열매도 못 얻어 먹고 죽게 되는 것입니다. 죽는 것입니다.
2. 아버지의 품안이 어떠한 곳인가를 가슴 깊이 느끼는 것입니다.
탕자는 나가 보니깐, 돈 떨어지고, 먹을 것도 떨어져 보니깐 그제서야 아버지의 품이 얼마나 좋았으며, 아버지가 얼마나 고마운 분이신가를 절실하게 알게 됩니다.
17절,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지금 여기서 돼지 먹이도 얻어 먹을 수가 없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내 아버지 집에는 품꾼들도 잘 먹고, 잘 벌고, 잘 살고 있으니, 내 아버지의 집이 얼마나 풍성하고, 내 아버지의 품이 얼마나 좋은고 하고 뼈져리게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고마우신 분인가를 이제야 가슴깊이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안이 부자유스럽게 느껴 질 수가 있지요? 자기 마음대로 나쁜짓도 할 수 없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내키는 대로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것 같으니 슬슬 하나님 곁을 떠나고 싶어지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건수가 생기는 그,것을 핑계삼아 하나님을 떠나 봅니다. 그러다가 실컷 고생하고 두들겨 맞고, 병나고 망하고 얻어터져서 그 때가서 하나님 살려 달라고 두 손 들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곁을 떠나보니,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결국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기분좋게 불신의 생활을 실컷 즐겼습니다. 그런데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얼마나 심하게 사고가 났는지 그 사람의 머리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머리뼈가 박삭 깨지면서..,
모두가 그 사람이 죽은 줄로 알았습니다. 조각난 머리뼈를 붙이고 머리 속에 있는 것을 집어 넣고 수십 바늘을 꿔맸습니다. 생사의 갈림길에 오랫동안 있었습니다. 의사들은 가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 그래도 살고 싶었나 봅니다. 하나님 살려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한 번만 살려 주시면, 한 번만 살려 주시면 이제는 하나님앞에 무조건, 생명 다하여 충성하겠다고...
기적이 일어났지요, 가망이 없다고 했는데... 하여튼 살아나고 건강을 회복해서 퇴원을 했습니다. 한동안 제법 신앙생활 잘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다시금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교회를 안나오고 , 하나님을 떠나려고 갖은 핑계와 이유를 다 댑니다. 회사가 바빠서, 중요한 사람을 만나야 하기 때문에,,
교회 예배에 빠집니다. 주일까지 빠집니다..... 하나님 안녕.. 사람은 화장실 갈 때만 바빠서는 안됩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를 모른 채 하고 잊어 버려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바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 사고가 나는데 그 자리에서 처참하게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만만하게 보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나쁜 짓을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감찰하시고 우리의 마음까지 꿰뚫어 보십니다. 무서운 하나님...
3. 자기의 처지를 아는 것입니다.
탕자는 자기가 거기서 굶어 죽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날 자기가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도 모르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기가 영혼이 영적으로 굶어 메말라 가도 있는데도 말입니다. 자기가 지금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본인은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만 사단이 그 눈과 그 귀와 그 마음을 가리면, 바보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통일교 문선명이를 따라가고, 여대성들과 놀아난 교주 정명석을 따라가는 열성신도를 중에 아주 똑똑하다고 하는 지식인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처지를 바로 인식할 줄 아는 자만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혜택을 입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4.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자기 자신이 아들답지 못했음을 회개하는 모습입니다. 아들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나는 아들아니 유산을 달라고 아버지에게 큰 소리를 쳤지요. 아들의 권리만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진 탕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신의 고집과 아집을 하나님 앞에 포기해야 합니다...
마치 세리처럼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흐느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 자신을 죽이면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분명히 잘못한 탕자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죽지 않으면.. 기필코, 분명히.. 돼지가 먹은 쥐엄열매도 못얻어 먹게 되어 죽게 됩니다. 비참한 죽음이지요..
5. 일어나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큰 소리칠 때는 언제고, 이제 돌아가는 것은 언제입니다. 나는 죽어도 그러지를 못한다 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사람의 결국은 죽음이지요.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안기기 위해서는 일어나서 돌아가야 합니다. 자존심도 죽이고, 부끄러운 것 창피한 것,. 모든 것을 감수하고 돌아가야 합니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중요한 것 아닙니까?
오래 전에 청량리 대왕코너, 지금은 롯데백화점이 들어섰는데.. 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불이 나니 젊은 여성들이 몸에 옷을 걸치지 않고 뛰쳐 나오더라고요. 벌거벗은 몸으로 소방관의 등에 엎혀서 나오더라고요.. 살아야지요.. 두 말할 것 없이 살아야지요.
창피하다고, 부끄럽다고 불타고 있는 건물 밖으로 안 나올 겁니까?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이십니다. 알고도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오래 인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인내와 긍휼의 기간이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뭐 사랑의 하나님인데.. 라고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주님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이제 하나님은 인내를 끝내시고, 기다림을 끝내시고.. 심판을 위해서 일으서시고 계시는 엄위하신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관대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참으신 하나님 만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심판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삶을 정결하게 살아야 합니다.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막 살아서는 안됩니다. 대강대강 살아서는 안됩니다. 진실되게 삽시다. 정직하게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