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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과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
- 종교개혁 486주년을 맞이하여 -
신명기 32:7
석원태 목사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구속사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세기적이었습니다. 그 중에도 역사의 문을 여시는 시작의 세기가 되는 창세기는 위대한 세기였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되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는 위대한 세기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의 원년이요 그리스도 역사(A.D.)의 원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6세기는 위대한 세기였습니다. 사도시대(복음의 원년) 이후로 가장 위대한 세기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구속역사의 현장에 나타내신 저 유명한 종교개혁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실로 16세기는 위대한 세기였습니다. 거대한 종교개혁의 사명을 위하여 그 어간에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은 강한 신앙과 확신과 사고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높은 영지작용의 행동력과 위대한 도덕성과 정신적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받은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운동에 던져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실로 흥분적이고 영웅적인 신앙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실로 저들은 저들이 왜 그 시대에 태어나고 살아야만 했던가 하는, 존재론적 의미와 내용과 목적을 바로 알았던 역사의식이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Ⅰ. 1517년 10월 31일은 종교개혁의 날입니다.
지금으로부터 486년 전의 역사적 사건의 날입니다. 하나님은 저 독일의 젊은 신부였던 마틴 루터(M. Luther)로 하여금, 로마서 1장 17절에 기록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는 진리의 불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영의 시대를 열어 제친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1,000년이 넘도록 역사 속에 자리잡은 로마천주교회의 반성경적이요, 반기독적이요, 반신적인 총체적 이단사상에 항전을 감행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로마가톨릭은 신론(神論)에 있어서 ‘하느님’이라고 하는 범신론이었습니다. 인론(人論)에 있어서 인간의 완전타락(전적부패)을 거절하였습니다. 기독론(基督論)에 있어서 예수만이 유일무이한 구세주임을 고백하지 아니합니다. 실로 저들에게는 죄를 사해주는 구세주가 수없이 많습니다. 구원론(救援論)에 있어서 이신득구(以信得救)가 아닌 이행득구(以行得救)주의였습니다. 교회론(敎會論)에 있어서 가견적 교회의 무오성을 주장하고 교회(종교회의)의 결의와 성경을 동일시하였습니다. 종말과 내세론(來世論)에 있어서 만인구원론을 주장함으로 결국 지옥은 존재할 수 없게 하는 교리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성경의 완전영감을 부인함은 물론이고, 가경을 정경 목록에 첨가시킴으로 절대계시 사상에서 멀리 떠나버린 이단의 공동체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와 같은 교리 면에서의 총체적 이단으로 말미암아 파생된 온갖 종류의 잘못된 교회의 관행들과 미신, 우상숭배사상, 성직자의 타락 등은 중세기의 영혼들을 암흑과 진노의 저주 아래로 전락시켜 버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마침내 때가 찼을 때, 하나님은 루터의 가슴에 ‘오직 믿음’이라고 하는 진리를 불지르게 하였습니다. 오직 사도적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모든 사람은 다 복음의 제사장이라고 부르짖게 된 것입니다. 속죄권(면죄부)을 사거나, 십자군에 종군하거나, 이른바 거룩한 성 로마를 여행하거나, 성자숭배, 성골숭배를 함으로써는 결코 죄를 사함받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그가 제시한 95개 조항의 공개토론 제목은 4주 만에 독일을 불지르고, 8주 만에 전 구라파를 불지르고 말았습니다. 잠들었던, 아니 죽었던 구라파는 ‘오직 믿음’이라고 하는 복음의 불빛 앞에 깨어나게 되고, 새 역사의 아침을 맞게 된 것입니다.
Ⅱ. 1643년 7월 1일부터 1649년 2월 22일까지 모였던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는 위대한 종교개혁의 산물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126년이 되던 역사적 시점이었습니다.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에서 최대의 종교회의가 모였습니다. 마틴 루터가 점화한 종교개혁의 불길은 실로 대단하였습니다. 종교개혁은 이른바 프로테스탄트교회를 낳고 말았습니다. 루터파는 주로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지방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교리적으로는 주로 이신득구주의였습니다. 개혁파는 프랑스와 스위스, 화란과 스코틀랜드로 확산되어갔습니다. 교리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강조하였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운동 이후에 교회들이 만난 과제는 성경에서 되찾은 진리를 신조와 교리형태로 정리하고 정립하는 일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많은 분량의 성경의 참된 진리를 총체적으로 체계화하여 바른 신앙신조와 교리를 고백하게 함으로 이른바 정통신앙을 수립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 이후의 시대를 신앙고백주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모든 평신도들에게도 성경신앙자유, 해석의 자유, 교회설립의 자유가 있었습니다. 그 성경을 믿고 고백하는 양심의 자유가 있었습니다.
이런 자유는 마침내 나라마다 성경을 믿는 저들의 신앙고백서를 작성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화란에서 알미니우스(J. Arminus)의 자유주의적 신앙과 신학사상에 반대하여 돌트회의(The Synod of Dort, 1618-19)를 열어 칼빈주의의 다섯 가지 교리(전적 타락, 무조건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궁극적 구원(성도의 견인)을 채택한 일이었습니다. 영국 같은 경우는 대륙의 신학사상 문제보다는 복잡한 국내정치와 맞물려 개혁운동을 하게 되는 특수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1.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의 여러 상황적 배경
헨리 8세의 왕권지상주의로부터 엘리자벳의 국교주의, 그 뒤를 이은 제임스 1세로 계승되는(1603) 국교주의(성공회)의 감독제 정책 때문에 많은 지도자와 신자들이 박해와 고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때 영국 청교도들은 ‘1,000인의 탄원서’(Millenary Petition)를 국왕에게 제출하여 영국 국교회(성공회)의 감독제도보다 스코틀랜드의 장로교제도를 도입할 것을 건의했으나 묵살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번역만은 허락되어 저 유명한 흠정역(King James Version)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후 1625년에 찰스 1세가 즉위하면서 ‘감독없이는 참 교회가 있을 수 없다.’는 절대왕권과 감독제도를 강화하면서 청교도들의 개혁운동에 탄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벳 여왕시대에 영국 런던에만 청교도 목사 20,000여 명이 지역 교회를 세워 설교를 할 정도로 개혁 교회는 부흥하고 왕성하였습니다. 찰스 시대에 와서는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영국 의회는 다수의 청교도 세력이 지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1643년 7월 1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포함한 전 대영제국이 공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신앙고백과 예배모범, 권징조례와 교회정치 등의 규례를 제정하고자 하였습니다.
신학사상은 물론이고 로마가톨릭적인 영국 국교회의 39개 신조 조항을 개혁주의적인 내용으로 개정하고, 로마가톨릭적인 예배의식 등을 일체 배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 신학적 특징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의 신학적 특징은 종교개혁 사상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칼빈주의 신학체계를 근간으로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스코틀랜드의 요한 낙스 사상이 그 결정적 영향을 주었고, 요한 낙스는 제네바에 가서 칼빈의 신학사상을 전수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당시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이 대륙(구라파의 스위스 제네바,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등지에서 종교개혁 사상, 특히 칼빈의 신앙과 신학사상을 배워 와서 영국을 뜨겁게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3.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 내용들
(1) 발의자는 영국의회였습니다.
(2) 기간은 1643년 7월 1일부터 1649년 2월 22일까지 약 5년 8개월 어간이었습니다.
(3) 참석자는 151명이었습니다.
121명의 청교도 목사와 30명의 평신도 대표였습니다. 그 중에 10명은 상원의원이었고, 20명은 하원의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 4명의 신학자와 2명의 평신도 대표가 참관인 자격으로 참석하였습니다.
(4) 회의진행과정의 특징이 있습니다.
5년 8개월간 무려 1163회 이상의 공식적이고 정규적인 신학모임을 가졌습니다. 주중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종교회의를 모였습니다. 토요일과 주일은 섬기는 교회로 돌아가 교회를 섬겼습니다. 교회가 먼 성직자들은 사원에 머물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길고 긴 회의는 성경에 기초한 교리적 발언을 무제한으로 허락하고, 모든 교리의 최후 채택은 만장일치제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단 비성경적인 발언의 경우는 즉시 언권이 중단되었습니다.
(5) 그 결과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제정하게 되었습니다.
① 신앙고백서(Westminster Confession) 총 33장으로 1646년 12월 4일에 완성된 후 신학자들이 의회에 보고하고, 1647년 8월 27일, ‘하나님의 말씀과 가장 잘 어울리며, 우리의 공인된 교리, 예배, 권징, 정치와 전혀 위배됨이 없다.’고 스코틀랜드 교회가 승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② 대요리문답(Large Catechism) 총 196문으로 1647년 10월 22일에 완성된 후 신학자들이 의회에 보고하고, 1648년 4월 14일 관주 구절이 완성된 후 최종 완료되었습니다. 목사 후보생들인 신학생과 목사들, 그리고 성인 신자들의 교리교육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③ 소요리문답(Shorter Catechism) 1647년 11월 25일에 완성되어 신학자들이 의회에 보고하고, 1648년 4월 14일 관주 구절을 완성하고 최종 완료되었습니다. 어린이들과 학생들의 신앙교육을 위해 제정되었습니다.
④ 공중예배 모범규례 제정 이것은 영국과 스코틀랜드 전교회가 로마가톨릭의 비성경적이고 미신적이고 이단적인 여러 예배 의식을 제거하고, 성경계시에 근거한 진리를 따라 하나님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의 예배의식을 제정하였습니다.
⑤ 권징조례와 교회정치 규례 권징조례와 교회정치 규례를 제정하였습니다. 이것들은 교회의 순결을 보전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며, 교회의 질서를 위해서 제정되었습니다.
4.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의 교회사적 의의
(1) 칼빈주의 신학사상을 계승 발전시킴에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이래로 성경의 최대표현인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사상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한 표준문서들입니다.
(2) 현재 미국을 위시한 전 세계 개혁교회와 장로교회가 사용하는 교회사적 유산이 되고 있습니다.
(3) 한국 장로교회도 1907년 최초로 12신조를 작성할 때 그리고 신앙고백서, 大·小요리문답, 예배모범, 권징조례, 교회정치 등을 제정할 때 여과없이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의 표준문서들을 채택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의 한국교회가 세계적 교회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위대한 영국 교회사가인 크리스토퍼 힐(Christopher Hill)은 17세기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17세기는 영국과 영국교회에 있어서 결정적인 세기였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세기인 17세기 중에도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가 열렸던 1640년대가 가장 중대한 시기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언필칭 교리는 딱딱하다, 사랑이 없다, 복음적이지 못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의 진리를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신조나 교리는 성경의 근본 뜻을 체계화 한 것입니다. 집에 비유한다면, 신조나 교리는 기둥과 대들보와 같은 것입니다. 인체에 비유한다면, 몸의 뼈대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전한 신앙고백은 건전한 신앙신조와 교리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의 위대한 산물 가운데 하나인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라고 하는 종교개혁의 사상을 체계화하여 세계 교회 발전의 유산이 된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는 확실히 교회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실로 위대한 종교개혁의 빛나는 유산입니다. 진리운동의 유산이요 계승이었습니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신 32:7)!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의 교회운동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있다는 말이 아닌가! 참된 진리운동의 보전과 계승을 알려주는 말이 아닌가! 오늘의 종교개혁의 과제와 방향을 제시하는 역사적 교훈이 아닌가!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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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개혁 486주년을 맞이하여 -
신명기 32:7
석원태 목사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구속사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세기적이었습니다. 그 중에도 역사의 문을 여시는 시작의 세기가 되는 창세기는 위대한 세기였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되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는 위대한 세기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의 원년이요 그리스도 역사(A.D.)의 원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6세기는 위대한 세기였습니다. 사도시대(복음의 원년) 이후로 가장 위대한 세기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구속역사의 현장에 나타내신 저 유명한 종교개혁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실로 16세기는 위대한 세기였습니다. 거대한 종교개혁의 사명을 위하여 그 어간에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은 강한 신앙과 확신과 사고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높은 영지작용의 행동력과 위대한 도덕성과 정신적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받은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운동에 던져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실로 흥분적이고 영웅적인 신앙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실로 저들은 저들이 왜 그 시대에 태어나고 살아야만 했던가 하는, 존재론적 의미와 내용과 목적을 바로 알았던 역사의식이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Ⅰ. 1517년 10월 31일은 종교개혁의 날입니다.
지금으로부터 486년 전의 역사적 사건의 날입니다. 하나님은 저 독일의 젊은 신부였던 마틴 루터(M. Luther)로 하여금, 로마서 1장 17절에 기록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는 진리의 불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영의 시대를 열어 제친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1,000년이 넘도록 역사 속에 자리잡은 로마천주교회의 반성경적이요, 반기독적이요, 반신적인 총체적 이단사상에 항전을 감행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로마가톨릭은 신론(神論)에 있어서 ‘하느님’이라고 하는 범신론이었습니다. 인론(人論)에 있어서 인간의 완전타락(전적부패)을 거절하였습니다. 기독론(基督論)에 있어서 예수만이 유일무이한 구세주임을 고백하지 아니합니다. 실로 저들에게는 죄를 사해주는 구세주가 수없이 많습니다. 구원론(救援論)에 있어서 이신득구(以信得救)가 아닌 이행득구(以行得救)주의였습니다. 교회론(敎會論)에 있어서 가견적 교회의 무오성을 주장하고 교회(종교회의)의 결의와 성경을 동일시하였습니다. 종말과 내세론(來世論)에 있어서 만인구원론을 주장함으로 결국 지옥은 존재할 수 없게 하는 교리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성경의 완전영감을 부인함은 물론이고, 가경을 정경 목록에 첨가시킴으로 절대계시 사상에서 멀리 떠나버린 이단의 공동체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와 같은 교리 면에서의 총체적 이단으로 말미암아 파생된 온갖 종류의 잘못된 교회의 관행들과 미신, 우상숭배사상, 성직자의 타락 등은 중세기의 영혼들을 암흑과 진노의 저주 아래로 전락시켜 버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마침내 때가 찼을 때, 하나님은 루터의 가슴에 ‘오직 믿음’이라고 하는 진리를 불지르게 하였습니다. 오직 사도적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모든 사람은 다 복음의 제사장이라고 부르짖게 된 것입니다. 속죄권(면죄부)을 사거나, 십자군에 종군하거나, 이른바 거룩한 성 로마를 여행하거나, 성자숭배, 성골숭배를 함으로써는 결코 죄를 사함받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그가 제시한 95개 조항의 공개토론 제목은 4주 만에 독일을 불지르고, 8주 만에 전 구라파를 불지르고 말았습니다. 잠들었던, 아니 죽었던 구라파는 ‘오직 믿음’이라고 하는 복음의 불빛 앞에 깨어나게 되고, 새 역사의 아침을 맞게 된 것입니다.
Ⅱ. 1643년 7월 1일부터 1649년 2월 22일까지 모였던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는 위대한 종교개혁의 산물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126년이 되던 역사적 시점이었습니다.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에서 최대의 종교회의가 모였습니다. 마틴 루터가 점화한 종교개혁의 불길은 실로 대단하였습니다. 종교개혁은 이른바 프로테스탄트교회를 낳고 말았습니다. 루터파는 주로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지방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교리적으로는 주로 이신득구주의였습니다. 개혁파는 프랑스와 스위스, 화란과 스코틀랜드로 확산되어갔습니다. 교리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강조하였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운동 이후에 교회들이 만난 과제는 성경에서 되찾은 진리를 신조와 교리형태로 정리하고 정립하는 일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많은 분량의 성경의 참된 진리를 총체적으로 체계화하여 바른 신앙신조와 교리를 고백하게 함으로 이른바 정통신앙을 수립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 이후의 시대를 신앙고백주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모든 평신도들에게도 성경신앙자유, 해석의 자유, 교회설립의 자유가 있었습니다. 그 성경을 믿고 고백하는 양심의 자유가 있었습니다.
이런 자유는 마침내 나라마다 성경을 믿는 저들의 신앙고백서를 작성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화란에서 알미니우스(J. Arminus)의 자유주의적 신앙과 신학사상에 반대하여 돌트회의(The Synod of Dort, 1618-19)를 열어 칼빈주의의 다섯 가지 교리(전적 타락, 무조건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궁극적 구원(성도의 견인)을 채택한 일이었습니다. 영국 같은 경우는 대륙의 신학사상 문제보다는 복잡한 국내정치와 맞물려 개혁운동을 하게 되는 특수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1.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의 여러 상황적 배경
헨리 8세의 왕권지상주의로부터 엘리자벳의 국교주의, 그 뒤를 이은 제임스 1세로 계승되는(1603) 국교주의(성공회)의 감독제 정책 때문에 많은 지도자와 신자들이 박해와 고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때 영국 청교도들은 ‘1,000인의 탄원서’(Millenary Petition)를 국왕에게 제출하여 영국 국교회(성공회)의 감독제도보다 스코틀랜드의 장로교제도를 도입할 것을 건의했으나 묵살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번역만은 허락되어 저 유명한 흠정역(King James Version)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후 1625년에 찰스 1세가 즉위하면서 ‘감독없이는 참 교회가 있을 수 없다.’는 절대왕권과 감독제도를 강화하면서 청교도들의 개혁운동에 탄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벳 여왕시대에 영국 런던에만 청교도 목사 20,000여 명이 지역 교회를 세워 설교를 할 정도로 개혁 교회는 부흥하고 왕성하였습니다. 찰스 시대에 와서는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영국 의회는 다수의 청교도 세력이 지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1643년 7월 1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포함한 전 대영제국이 공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신앙고백과 예배모범, 권징조례와 교회정치 등의 규례를 제정하고자 하였습니다.
신학사상은 물론이고 로마가톨릭적인 영국 국교회의 39개 신조 조항을 개혁주의적인 내용으로 개정하고, 로마가톨릭적인 예배의식 등을 일체 배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 신학적 특징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의 신학적 특징은 종교개혁 사상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칼빈주의 신학체계를 근간으로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스코틀랜드의 요한 낙스 사상이 그 결정적 영향을 주었고, 요한 낙스는 제네바에 가서 칼빈의 신학사상을 전수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당시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이 대륙(구라파의 스위스 제네바,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등지에서 종교개혁 사상, 특히 칼빈의 신앙과 신학사상을 배워 와서 영국을 뜨겁게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3.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 내용들
(1) 발의자는 영국의회였습니다.
(2) 기간은 1643년 7월 1일부터 1649년 2월 22일까지 약 5년 8개월 어간이었습니다.
(3) 참석자는 151명이었습니다.
121명의 청교도 목사와 30명의 평신도 대표였습니다. 그 중에 10명은 상원의원이었고, 20명은 하원의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 4명의 신학자와 2명의 평신도 대표가 참관인 자격으로 참석하였습니다.
(4) 회의진행과정의 특징이 있습니다.
5년 8개월간 무려 1163회 이상의 공식적이고 정규적인 신학모임을 가졌습니다. 주중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종교회의를 모였습니다. 토요일과 주일은 섬기는 교회로 돌아가 교회를 섬겼습니다. 교회가 먼 성직자들은 사원에 머물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길고 긴 회의는 성경에 기초한 교리적 발언을 무제한으로 허락하고, 모든 교리의 최후 채택은 만장일치제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단 비성경적인 발언의 경우는 즉시 언권이 중단되었습니다.
(5) 그 결과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제정하게 되었습니다.
① 신앙고백서(Westminster Confession) 총 33장으로 1646년 12월 4일에 완성된 후 신학자들이 의회에 보고하고, 1647년 8월 27일, ‘하나님의 말씀과 가장 잘 어울리며, 우리의 공인된 교리, 예배, 권징, 정치와 전혀 위배됨이 없다.’고 스코틀랜드 교회가 승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② 대요리문답(Large Catechism) 총 196문으로 1647년 10월 22일에 완성된 후 신학자들이 의회에 보고하고, 1648년 4월 14일 관주 구절이 완성된 후 최종 완료되었습니다. 목사 후보생들인 신학생과 목사들, 그리고 성인 신자들의 교리교육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③ 소요리문답(Shorter Catechism) 1647년 11월 25일에 완성되어 신학자들이 의회에 보고하고, 1648년 4월 14일 관주 구절을 완성하고 최종 완료되었습니다. 어린이들과 학생들의 신앙교육을 위해 제정되었습니다.
④ 공중예배 모범규례 제정 이것은 영국과 스코틀랜드 전교회가 로마가톨릭의 비성경적이고 미신적이고 이단적인 여러 예배 의식을 제거하고, 성경계시에 근거한 진리를 따라 하나님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의 예배의식을 제정하였습니다.
⑤ 권징조례와 교회정치 규례 권징조례와 교회정치 규례를 제정하였습니다. 이것들은 교회의 순결을 보전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며, 교회의 질서를 위해서 제정되었습니다.
4.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의 교회사적 의의
(1) 칼빈주의 신학사상을 계승 발전시킴에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이래로 성경의 최대표현인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사상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한 표준문서들입니다.
(2) 현재 미국을 위시한 전 세계 개혁교회와 장로교회가 사용하는 교회사적 유산이 되고 있습니다.
(3) 한국 장로교회도 1907년 최초로 12신조를 작성할 때 그리고 신앙고백서, 大·小요리문답, 예배모범, 권징조례, 교회정치 등을 제정할 때 여과없이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의 표준문서들을 채택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의 한국교회가 세계적 교회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위대한 영국 교회사가인 크리스토퍼 힐(Christopher Hill)은 17세기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17세기는 영국과 영국교회에 있어서 결정적인 세기였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세기인 17세기 중에도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가 열렸던 1640년대가 가장 중대한 시기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언필칭 교리는 딱딱하다, 사랑이 없다, 복음적이지 못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의 진리를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신조나 교리는 성경의 근본 뜻을 체계화 한 것입니다. 집에 비유한다면, 신조나 교리는 기둥과 대들보와 같은 것입니다. 인체에 비유한다면, 몸의 뼈대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전한 신앙고백은 건전한 신앙신조와 교리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의 위대한 산물 가운데 하나인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라고 하는 종교개혁의 사상을 체계화하여 세계 교회 발전의 유산이 된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는 확실히 교회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실로 위대한 종교개혁의 빛나는 유산입니다. 진리운동의 유산이요 계승이었습니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신 32:7)!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의 교회운동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있다는 말이 아닌가! 참된 진리운동의 보전과 계승을 알려주는 말이 아닌가! 오늘의 종교개혁의 과제와 방향을 제시하는 역사적 교훈이 아닌가! - 아 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