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라는 마귀의 궤계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임재환 목사/ 여수 성광교회

미가서 7 : 18~19, 에베소서 6 : 10~17



수 년 전에 윤회설을 주장하는 종단의 대표적인 승려가 죽음 앞에서 자신은 수많은 선남선녀를 속이고 악을 행했으니 아비지옥에 떨어지게 되었다는 슬픈 말을 토한 일이 있어서 논란이 되었습니다.

그는 많은 철학을 섭렵하면서 자신의 신앙이 결국 사단의 일이라고 토로하였던 것입니다. 사단은 최초부터 많은 사람을 유혹하여 하나님의 자녀 됨을 손상시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훼방하는 자로서 지금까지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래 사단은 위장에 능해 때를 따라 여러 모양으로 변신하며 사람들을 미혹하는데 우리들이 속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의 시대는 사회변화가 급변하는 시대입니다. 또한 사단의 미혹도 각가지로 나타나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믿음을 지키며 주의 나라를 이루어가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도 미혹하는 영이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16:21~23에 보면 주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잡히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실 것을 말하자,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베드로가 주님을 붙들고 “그리 마소서”하고 간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주의 일을 무너지게 하는 것은 사단의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순간적으로 베드로는 사단의 도구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단 마귀는 교묘하게 속이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넘어지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바울이 말하듯이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서 영적 무장을 해야 할 것입니다. 



1. 기분으로 신앙생활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요즘시대는 감성의 시대라고 해서 모든 일에 감정을 중요시합니다. 심지어 사랑하는 일에도 감정이 중요합니다. 전에는 그저 서로 믿고 살았지만 지금은 감정이 변하면 사랑이 식은 것이라고 해서 다투고 갈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혹은 순간마다 사랑을 고백해야 하는 것인데 얼마나 피곤한 일입니까? 신앙에서도 그런 일들이 생깁니다.

한번은 여름수련회를 하는 중에 열심히 찬송하고 기도하기를 두어 시간을 하자 모두 얼굴이 상기되고 기분이 좋아져서 일어서서 찬송을 부른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분이 ‘이런 때는 원수도 사랑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이제 마음이 시원하다고 했습니다.

은혜로 마음이 시원한 것은 좋으나 시원하기 위해서 예배를 드린다거나 기도를 한다는 것은 바르지 못합니다. 감정을 예배의 성패의 기준으로 삼으면 잘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죄 사함을 받아 마음이 시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들을 감정으로 신앙생활하게 충동질합니다. 기분 나쁘면 교회 안 나가고, 기분 나쁘면 봉사도 그만 두고, 헌금도 기분에 따라 드리기도 하고 안 드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은 언제든지 넘어질 가능성이 다분하고 참진리에 이르지 못하고 결국 구원의 길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4:23에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예배란 감정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고 거룩한 마음으로 말씀을 따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감정의 변화에 따라 드려지기도 하고 드려지지 않기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따라 드릴 때 합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진리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은 것도 기분으로 느끼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이 시원해지면 용서받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아니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죄 사함은 진리의 말씀이 그렇게 하였다고 말씀하신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 내 기분이 아니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그분이 “너희 죄가 사해졌느니라”고 하셨기 때문에 죄 사함 받은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셨다고 하셨습니다. 보통 해녀들은 3~4미터밖에 못 들어간다고 합니다. 10미터 이상 내려가면 심장이 터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사람이 내려간 깊이는 300미터라고 하는데 가장 깊은 곳이 11킬로미터라고 합니다. 그런 곳에 빠지면 무엇이든지 찾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바다에 던지시되 다시 볼 수 없게 깊은 바다에 던지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감정이 아닌 진리입니다. 기분은 그 다음 일입니다. 이 구원의 사실이 너무 기뻐서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 마리아를 보십시오. 잔치할 때 가만히 들어와 옥합을 깨서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씻어드렸습니다. 얼마나 좋았으면 그리했겠습니까? 신앙생활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낮인지 밤인지 모르고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이 행복한 이들입니다. 무엇이든지 주님에게는 아까운 것이 없는 성도, 그저 드리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신앙생활하는 성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몸으로라도 일하는 성도들이 행복한 이들입니다. 기도하느라고 목이 쉬기도 합니다. 찬송을 부르느라고 목청이 아픕니다. 기쁨에 겨워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합니다.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4:9에 ‘내가 천사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진리를 알면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



2. 고난을 보고 의심하지 맙시다.



사람들은 보통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통”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 되는 일도 없고, 막히는 일이 없이 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걱정거리도 없고 근심이나 고민은 전혀 없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우들 중에는 무슨 일이 생기면 설명을 하지 않고 숨기는 이들을 봅니다. 그 분들은 “내 기도가 부족해서, 내 믿음이 약해서 이런 거지, 열심히 믿지 않아서 이렇게 된 거야. 다 내 잘못이야”하고 아무 일 없는 척합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을 당하면 믿음을 버리는 이들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우리들은 누구나 음악시간을 좋아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선생님이 음악을 가르치거나 가곡을 가르쳐서 좋아했던 것이 아니라 그 분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일어만 유럽의 레지스탕스 이야기를 신나게 들려 주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려고 그 시간에는 줄을 섰습니다. 덕분에 우리들은 그 아름다운 가곡이나 노래들은 배우지를 못했습니다. 도리어 매 시간마다 쪽지시험을 보고 매주 월요일마다 아침 수업시작 전에 시험을 보던 선생님 시간, 우리를 들들 볶아서 괴롭혔던 분들의 과목이 지금도 우리들을 살리고 지금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고난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교묘한 사단의 전술입니다. 동방의 의인이었던 욥을 보십시오. 그는 절기마다 꼭 제사를 드리고, 자녀들을 위해서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짐승들을 도적 떼에게 빼앗기고 종들이 상했습니다. 자녀들이 함께 잔치하던 집이 무너져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산천이 무너지는 아픔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그 자신마저 몸에 종기가 나서 앉아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믿음이 적은 아내는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하였습니다. 친구들은 네가 죄를 지었으니까 그렇지! 회계하라고 재촉합니다.

믿으면 만사형통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고난 중에서 하나님을 뵈옵게 되었습니다. 그는 더 거룩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언제 찬송을 많이 부릅니까? 기쁠 때입니까? 슬플 때입니까? 기쁠 때는 별로 안 부릅니다. 그러나 슬플 때 많이 부릅니다. 왜 입니까? 찬송은 대부분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주님을 생각하고 깊은 슬픔 중에도 위로받기 위해 지었기 때문에 슬플 때 불러야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8~9에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히브리서 12:6에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만사형통만이 신앙인 것처럼 말하는 사단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3. 변하지 않은 자신을 보고 실망하지 맙시다.



가끔 자동차를 가지고 다니다 보면 참으로 괴로운 일이 많습니다. 좌회전하려고 점잖게 서 있으면 다른 차가 달려들어 지나가고 차선이 좁아져서 천천히 가다 보면 어느새 다른 차가 옆으로 올라와 끼어듭니다. 그러면 속이 상하고 입에서 나쁜 말이 나오곤 합니다.

어느 목사님은 기분이 나쁘면 욕은 할 수 없고 욕에 따라 번호를 매겼답니다. 1번은 약한 것, 2번은 좀더 강한 것, 3번은 아주 강한 것으로 정했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자신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낙심하는 것입니다. “내 기질이 안 변했어. 내 성격이 그대로구나!” 하고 낙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단의 계략 중에 하나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그런 성품까지도 합당하게 사용하십니다.

바울이 한번은 바나바와 다투었습니다. 전도여행을 하면서 마가를 데리고 갔는데 그가 중도에 돌아가 버렸습니다. 바울은 몹시 화가 나서 그 다음에 떠날 때는 그를 빼 버리자고 했습니다. 그 일로 바나바와 다투고 실라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후회하고 마가를 사랑했습니다. 바울의 성질이 변해서 순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바울의 그런 성품이 그 험하고 위험이 깔려 있는 소아시아와 그리스, 로마에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기질이 변한 것이 아니라 기질의 방향이 바뀐 것입니다. 나쁜 일을 위해 쓰이던 기질이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방향이 바뀐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기 잡는 습관으로 사람을 전도해서 하루에 수천 명씩 전도했습니다. 요한은 그물을 기워 주는 일을 하다가 교회를 돌보고 양육하는 일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마태는 장부를 정리하는 글쓰기를 통해 주님의 일생을 기록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이 로마서 8:35~39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한 대로 이 믿음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