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즐거움/로마서 5: 1-11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나갈 때에 많은 즐거움이 있습니다. 가난하여 먹을 것도 없고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다닐 때에는 너무나 속이 상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다가 돈을 벌면 그 돈으로 인 해 즐겁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너무 짓눌려 억울한 일을 당하고만 살다가 벼슬이라도 한 자리하게 되면 그 자리가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가 기적같이 살아나게 되면 다시 얻은 건강으로 즐거울 수가 있습니다. 또 외롭게 살다가 아내를 맞이하고 가정을 꾸미게 되면 그 가정으로 인해 즐거워 합니다. 세상에는 이런 많은 즐거움이 있는데 우리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은 이런 즐거움과 다른 것입니다. 위에 열거한 것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즐거워 할 수 있는 즐거움 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즐거워 할 수 없는 즐거움을 우리 믿는 사람들은 즐거워 해야 합니다. 

I. 믿음의 즐거움 (1-4절)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산다는 그 믿음을 즐거워 하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또 즐거워 하지도 않습니다. 즐거움이 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성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믿음을 즐거워 하지 않는다면 성도라 하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 믿음을 왜 즐거워 합니까? 먼저는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① 칭의의 믿음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1절)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입었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가정을 갖고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가 얼마나 귀엽고 아름답습니까. 그러나 그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칩니다. 그 아이는 죄라는 것도 모르지만 성경은 누구든지 죄인이라고 합니다. 인류의 조상이 되는 아담이 하나님과 계약을 맺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즉 하나님과 인연이 끊어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나머지는 다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받은 이 언약을 아담이 파기했습니다.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담 한 사람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손들에게까지 책임을 지고 계약을 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인류의 죄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불행이 모든 사람의 불행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입니다. 인간의 행동으로는 이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죄에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시어 우리 인간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게 하셨습니다. 이럴 때에 그 사실을 믿으면 죄의 자리에서 우리를 옮겨 놓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이 자신과 상관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여전히 죄인의 줄에 서 있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것은 어떤 공로나 무엇을 드려서도 아닙니다. 믿음 하나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십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한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즐거워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② 영광의 믿음 
"또한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2절) 

이 은혜에 들어갔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진노의 줄에, 멸망의 줄에 서 있을 때에 우리를 의인의 자리에 옮겨 놓으셨습니다. 이 자리 바꿈이 바로 은혜의 자리입니다. 은혜를 주신 방법은 값없이 주신 것이지 돈 주고 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은혜의 자리로 들어간 것입니다. 의인의 자리에 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의인의 자리에 서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죄인의 자리에 서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하늘에 충만하여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믿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보았습니까, 만져 보았습니까? 그저 나와 함께 계시는 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죽음 저 건너편에 있는 그 나라를 직접 보게 됩니다. 만져 봅니다. 듣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있는 말씀대로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할렐루야!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고 보입니까. 그러나 의인의 자리에 섰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영광이 충만한 그 나라에 가서 그 영광에 동참할 수 있다는 즐거움은 믿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믿음을 통한 영광의 즐거움 입니다. 

③ 깨달음의 믿음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3-4절) 


안다고 하는 말은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깨닫는 다는 것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습니다. 가정을 꾸민지 한 달도 채 안되는 신혼 가정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육군 대위로, 나이는 서른 정도였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알지도 못하고, 자신이 성실하게 살면 만사가 다 형통한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한번은 꿈을 꾸는데, 자신은 차 운전도 못하면서 차를 의젓이 몰고 가더랍니다. 즐겁게 달리고 있었는데, 앞에서 커다란 괴물 같은 것이 나와 차와 부딪히는 바람에 소리를 지르며 깼습니다. 꿈이 너무 선명하여 자고 있는 아내를 깨우니까 그의 아내도 몸부림을 치면서 깼습니다. 꿈 이야기를 하니까 그 아내도 이상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괴물같은 황소가 남편의 허리를 물고늘어지는 것을 보고 사람 살리라고 소리를 치고 있는데, 그 때 남편이 깨워서 일어났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날은 차 조심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운전수에게 여러 번 조심하라고 당부하였습니다. 그 날은 무사히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에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가 뒤에서 버스를 들이받는 바람에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까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중상이었습니다. 그 후에 치료를 받고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얼마 후에 양구로 전근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까지도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옆집에 사는 권사님이 교회에 가자고 권하였습니다. 건강 때문에 불안과 공포, 좌절 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예수를 믿어 보자고 하니까 무엇이든지 믿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두말하지 않고 따라갔습니다. 그 후 사단장이 새로 왔는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그래서 사단장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매주일 열심히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듣게 되고, 듣다 보니까 깨달음이 오고, 말씀이 깨달아지니까 말씀을 상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대령까지 있다가 제대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얼마 안 되어 목사가 되었습니다. 사고를 통하여 하나님께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 전에도 다섯 번이나 사고를 당했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 때마다 진단하고 기회를 주었는데도 깨닫지 못하다가 그런 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일찍 깨달았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여러분에게 무슨 일이 닥치거든 깨달으십시오. 이 문제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사람은 가장 복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믿음이 있기 전에는 깨닫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이 깨우쳐 준 것입니다. 깨달음 때문에 즐거움이 있습니다. 

II. 사랑의 즐거움 (5-8절) 
① 성령을 통한 사랑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됨이니"(5절) 

우리가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 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는 믿음 때문입니다. 처음 환난을 당할 때는 당황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참아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환난은 인내를 낳고 참아가는 중에 최선의 노력을 하다가 보면 연단이 쌓여 갑니다. 연단의 훈련이 끝나면 희망이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환난이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이 소망을 낳는 줄 깨닫는 것이 중요하며, 이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는 않습니다. 이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안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부어 주신 하나님의 영, 성령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번 주간에 말할 수 없는 큰 수해를 입었습니다. 잃은 것이 많았습니다.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그 어려움을 당해 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잃어버렸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 손해를 계산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남편의 사랑을 차지하는 것이 낫지, 돈을 더 좋아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과 같습니다. 성령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수재를 당하였어도 우리 속에 성령이 들어와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때요, 믿는 사람이 환난을 당할 때는 그만큼 하나님의 사랑이, 관심이 있을 때입니다. 그만큼 도움의 손길이 더 있는 때입니다. 우리는 정상적인 자식보다는 병들고 어려운 일을 당하는 자식을 더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은바 되기 때문에 희망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② 예수님의 사랑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6절) 

의인을 위해서도 죽기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죽는 사람이 간혹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연약할 때에 죽어 주셨습니다. 약자가 강자를 위해 죽는 일은 많지만, 강자가 약자를 위해 죽는 경우는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인이 종을 위하여 죽었다는 말입니다. 즉, 만물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이 연약하고 보잘 것없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기약대로, 즉 하나님의 약속대로 죽으셨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싸워,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누르며 뱀은 여자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여자의 후손이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창조 때부터 하나님이 기약을 정해 놓고 죽을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는데, 이 약속을 하나님께서 지켜 주셨습니다.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소망이 없는 자, 아주 몹쓸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서 나를 위해 죽어 줄 사람을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인간은 죽을 때가 가장 외롭습니다. 사랑한다는 사람에게 죽을 때 같이 죽자고 해보면 뿌리치고 도망갑니다. 절대로 같이 죽을 수 없습니다. 혼자서 죽어야 하니까 외로운 것입니다. 다른 일은 그 일을 같이 하거나 대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대신하지 못합니다. 이런 죽음을 나를 대신하여 죽어 주셨습니다. 도대체 세상에서 나를 위해 죽어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내 아들 딸이 죽겠습니까, 내 아내가 죽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는 즐거움이 넘칩니다. 

③ 하나님의 사랑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8절) 


구약에 재미있는 사건이 나옵니다. 다윗에게는 아들이 많았는데, 그 아들 중에 압살롬이란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 왕위가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멀리 가서 군사들을 훈련시킨 다음 예루살렘으로 쳐들어가서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려고 하였습니다. 세상에 이런 불효막심한 자식이 어디 있습니까? 다윗은 밤중에 도망하였습니다. 도망 가면서 그를 쫓아온 군인들을 다 모아서 정비한 다음 다시 반격을 하였습니다. 아비새와 잇다와 요압 등 세 대장에게 군사를 맡기면서 부탁하는 말이, 그렇게 못된 내 아들이지만 잘 선대하여 주어라, 즉 죽이지 말아라 그 말입니다. 싸우다 보니까 압살롬의 군대가 지고, 반격하는 다윗의 군대가 이겼습니다. 압살롬이 나귀를 타고 도망 가다가 그의 머리가 상수리나무에 걸려 여지없이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쫓아가 그의 목을 잘라 버렸습니다. 다윗에게 가서 승전을 알렸을 때, 다윗이 아들의 죽은 소식을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아십니까? 사무엘하 18장 33절에 보면,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에 있는 다락으로 올라갑니다. 올라가면서 울었습니다. 다윗은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습니다. 세상에 굉장히 고약한 아들인데도 이런 아들이 죽었다고, 차라리 내가 죽고 네가 왕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뻔 하였느냐고 하였습니다. 이런 못된 아들에게도 베푸는 아버지의 사랑은 이렇게 지극합니다. 아들의 죽음을 그렇게 슬퍼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자기의 외아들, 순종밖에 모르는 그 아들을 아예 이 세상의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라고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무엇으로 표현하겠습니까? 이 본문과 비한다면, 즉 다윗의 심정과 비한다면 아마 하늘에서 울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픔과 사랑, 하나님이 하늘에서 울고 있을 그 사랑은 우리가 이 땅에서 생각만 해도 즐거워 해야 할 일인 줄로 압니다. 그래서 사랑의 즐거움 입니다. 


III. 영생의 즐거움 (9-11절) 
① 구원의 영생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9절)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토록 죽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영생은 천당에서만 오래오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에 가서도 죽지 않습니다. 천국 가서도 오래 살고, 지옥에서도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천국 가서는 구원 얻은 사람, 즉 하나님의 진노의 줄에 서 있던 사람들 중에, 믿습니다 하고 의인의 자리로 옮겨져서 의롭다 함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원이라고 하며 구원을 얻은 사람만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지옥에 가는 사람들도 다 영원히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영원히 삽니다. 하나님이 없는 곳에는 온갖 고난, 불행과 고통과 좌절뿐입니다. 이곳이 지옥입니다. 그런고로 영생을 왜 즐거워 할 수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같이 하는 구원 때문에 지옥의 진노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까닭에 즐거워 할 수밖에 없는 즐거움이라고 믿습니다. 

② 화목의 영생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하였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10절)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천국에 살면서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고 원수지간으로 지내면 어떻게 합니까? 차라리 지옥에 가는 것이 낳습니다. 제가 결혼을 하고 아내와 크게 싸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제가 결혼한다고 하니까 친구들이 하는 말이, "너 결혼하게 되면 한 번은 싸울 거다. 그 첫 싸움에서 지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첫 싸움부터 져 줘 버릇하면 계속 져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 싸움에서이기면 계속 이기니까, 하여튼 지지 말라는 것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결혼한 지 3,4년이 지나니까 짜증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갔다가 늦게 오면 왜 늦게 오느냐, 어디 가면 어디로 간다고 말해라, 자기한테 보고하라는 것입니다. 목사가 어떻게 다 보고하고 다닐 수가 있습니까? 참다못해 싸움이 시작되었고 나는 그동안 쌓였던 불평 불만을 다 말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목사의 집안에서 농짝을 부수겠어요, 고함을 치겠어요. 그래서 언제까지든지 말을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며칠 지나면 항복하겠지 했더니, 항복을 해주어야 어떻게 하지요. 3일이 지나니까 급한 사람은 저였습니다. 밥을 해 놓고 먹으란 말을 안 합니다. 밥을 해서 애들에게만 먹으라 합니다.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빨래를 안 해 주니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애들 있는 데서는 싸우지 않은 것처럼 하였습니다. 그래서 애들을 시켜 와이셔츠를 달래 오고 빨아서는 아이들을 통해서 보내고... 지옥 지옥해도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그렇게 다정하던 부부가 불화가 생기고 대화가 끊기니까 바로 지옥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죽어도 싸움을 안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대화가 활발하고 화목한 가정은 천국입니다. 대화가 끊어지고 불화 한 가정은 지옥입니다. 천국에 가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산다는 것, 즉 영생의 즐거움이 여기 있는 줄로 압니다. 

③ 체험의 영생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15절) 


바울이 한 말입니다. 바울이 그 전에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예수를 안 믿어도 자기는 하나님 안에 있는 줄로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하나님 밖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데, 그때는 예수를 핍박하고 예수를 안 믿었으면서 하나님을 잘 믿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잘못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의 뼈아픈 간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즐거움을 선생한테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 깊이 들어가서 하나님이 주시는 즐거움을 보며, 만지며, 체험하며, 죽어서가 아니라 지금부터 그 즐거움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이론이나 지식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결론을 지어 성도의 즐거움을 말씀드리면, 믿음의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 자체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면 이미 성도는 아닙니다. 다음으로는 사랑의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영생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영생은 성도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이상의 즐거움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