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의 실패
(사무엘상 2:27-36) 

제사 드리는 직분을 맡았음에도 제사에 참패를 한 사람이 엘리 제사장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직분을 맡은 이들입니다. 엘리 집안의 이야기는 예배에 실패하지 않게 하는데 귀중한 교훈을 줍니다. 한나와 엘리는 떼놓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한나가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안에서 극복하고 성공적인 예배의 사람이 된 반면, 엘리는 모든 좋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예배에 실패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하나님께 관심이 있고 하나님을 존중한 한나에 반해 하나님을 멸시한 사람이 엘리였습니다. 한나는 아들보다는 하나님께 관심이 있습니다. 엘리는 하나님보다는 아들에게 더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잘 된 집안은 한나의 집안입니다. 둘 다 아들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했느냐에 따라 예배의 성공자로, 예배의 실패자로 나타납니다. 엘리의 실패는 오늘날 예배자들에게 좋은 메시지를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엘리의 실패를 살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엘리의 아들들의 죄와 벌 

엘리는 제사장임에도 불구하고 아들들 간수를 잘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제사장이면 아들들도 제사장입니다. 그런데도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 드리는 제물을 익기도 전에 갈고리를 넣어 걸려 올라오는 제물을 모두 갈취했습니다. 하나님께 먼저 제사를 드리고 난 후에 제사장의 분깃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데, 이들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도 전에 날고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억지로 빼앗아 갔습니다. 이런 행동에 대하여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삼상2:17]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예, 이런 제물 도둑질의 배후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멸시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이 나온 것입니다. 행동도 문제지만 행동을 낳게 한 마음이나 생각이 더 큰 문제임을 지적하십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여자들을 겁탈하기까지 합니다(22). 쉽게 말하면 제물과 성문제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샀습니다. 이는 보통 인간의 전형적인 죄로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죄를 지은 이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으십니다. 이미 제사장으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했던 엘리 집안이 이제는 그 일을 못하게 하시겠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30)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멸시하는 자를 멸시하십니다. 존경하는 자를 존중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멸시를 받고 살아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가문을 멸절시키겠다고 하십니다. 영원히 그 집안에서는 복이 없고 환난만 있을 것이며 젊어서 죽는 자가 속출할 것이라고 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한 날에 죽을 것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이뤄집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법궤를 빼앗기고 둘이 모두 전사합니다(삼상4:11). 

하나님은 자신을 멸시한 이들에게 매우 화가 나셨습니다. 하루아침에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존중한 한나 집안에 내린 복과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엘리에 대하여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지만, 한나에 대하여는 넘치는 복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이유는 다 한나나 엘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을 어떻게 대했느냐’ 하는 것은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가 축복과 저주를 가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배자로 하나님을 존중해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엘리책망 

하나님은 엘리의 아들들이 죄를 지었는데 엘리에게 사자를 보내 책망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전에 엘리의 조상인 레위지파 아론의 자손에게 에봇을 입고 제사를 드릴 수 있는 특권을 주셨는데, 왜 제물과 예물을 더럽혔느냐고 책망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29) 주님은 엘리 아들들의 죄를 엘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문제아가 있는 게 아니고 문제 부모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두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인 엘리를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두 아들이 그런 짓을 한 것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사랑이 식고 그런 현상은 곧 아들들이 악행을 저지르는 데까지 이르렀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난 날 택하셔서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은 것을 책망하십니다. 이어서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잊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그 무엇을 둔 사람은 진정한 예배자가 될 수 없습니다. 바로 그런 꾸지람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불평과 불만족으로 사는 사람이 아름다운 예배자가 될 수 없습니다. 감사가 곧 예배입니다. 감사를 상실하면 예배도 없습니다. 아무리 금지옥엽(金枝玉葉) 같은 자식이라 해도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진정한 예배자가 될 수 없습니다. [마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그런데 한나는 아들보다는 하나님이었지만, 엘리는 하나님보다는 아들들이 먼저였다는 말입니다. 

물론 한나가 기도할 때 술에 취했다고 생각하는 엘리는 분명히 무능한 종교인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무능하다고 나무라는 구절은 없습니다. 무능보다 더 하나님을 참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은혜를 망각하여 감사를 잊는 것이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엘리는 불행하게도 없어야 할 것 모두를 갖춤으로 예배에 실패한 전형적인 성도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나와 엘리가 가르쳐준 예배 

하나님은 한나와 엘리를 통하여 예배가 어떻게 하면 성공하고 어떻게 하면 실패하는가를 극렬하게 대비하여 가르쳐 줍니다. 예배에 성공하기를 원하신다면 내게서 엘리의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한나의 모습을 개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멸시한 사람은 엘리이고, 하나님을 존중한 사람은 한나입니다. 하나는 예배는 물론 인생도 실패의 늪으로 빠졌고, 다른 하나는 예배는 물론 인생에도 성공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둘 다 아브라함처럼 아들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예배를 조명한 사람들입니다. 엘리는 아들들 때문에 실패하였고, 한나나 아브라함은 아들 때문에 성공하였습니다. 법궤가 웃사는 죽게 하고 오벧에돔은 복을 받게 하듯, 같은 아들이라는 매개체가 그들의 성공과 실패를 가릅니다. 그러니까 예배는 어떤 환경이냐, 어떻게 드리느냐, 무엇을 드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상황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입니다. 

자식 때문에 예배에 낙오자가 되지 마십시오. 문제 때문에 예배에 실패하지 마십시오. 그런 게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에게 관심을 갖고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자식보다도 하나님을 귀중히 여기는 게 바로 예배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예배에 성공하고 있는 지, 아니면 실패하고 있는 지 여러분 자신이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들보다, 부모보다, 재물보다, 건강보다, 지식보다, 살고 있는 집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배의 성공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어떤 좋은 일, 그 어떤 아름다운 행위도 하나님을 떠나서 이뤄진다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어떤 환경이나 조건도 영적 시각으로 보고 주님 뜻 안에서 해결하십시오. 그 어느 것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지는 마십시오. 그런 것이 있을 때 예배에 실패합니다. 부모로서 자식을 위하는 가장 지혜로운 길은 자식보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망하게 하는 길은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어느 것을 통해서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여러분의 예배가 성공하게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