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원하시는 일꾼”(눅 9:51-6)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인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농부가 소를 기르는데 그 소가 송아지를 두 마리 낳았습니다. 농부가 너무 기뻐서 자기도 모르게 '할렐루야 찬양'했습니다. 송아지 새끼 두 마리 낳고서 너무 감사해서 자기 부인에게 말하기를 '여보! 송아지 새끼가 두 마리야. 우리 하나는 주님의 것으로 하고 주께 드리십시다.' 그 농부의 부인도 '아멘'했습니다. 얼마 후에 송아지 새끼 한 마리가 비실비실 앓더니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농부가 울상이 되어 방안에 있는 자기 아내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큰일 났어' '뭐가 큰일 났어요?' '아 글쎄 주님의 송아지가 죽었어.' 주께 드리려고 작정한 송아지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 설명하지 아니해도 무엇이 잘못 된지 다 아시겠지요? 이 농부는 하나님께 드린 헌신한다고 하면서 자기중심적인 판단을 가지고 헌신하였습니다. 사실은 두 마리 다 주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여기에 나오는 이 농부처럼 하나님께 헌신한다고 하면서 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기중심적인 헌신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냉정하게 우리에게 헌신의 모습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에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부름 받은 일꾼으로서의 본분은 무엇인지, 어떤 일꾼의 모습으로 서야 할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본문 51절에서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인류를 구원하는 사명을 다하기 위해 예루살렘 길을 올라가기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일꾼의 자세입니다. 좋고 가치 있는 일은 우연히 되지 않고 굳은 결심이 필요합니다. 우연히 봉사하면 우연히 무너지고 열매가 없습니다. 주님의 일을 할 때도 굳은 결심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축복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실 굳은 결심을 했지만 종종 오해를 받았습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에 가려면 사마리아를 지나야 했고 거기서 하루정도를 유숙해야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먼저 제자들을 파송했는데 그들은 그만 사마리아인에게 배척받아 되돌아왔습니다(51-52절). 몇 명의 주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십자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셨지만 그런 복된 마음이 무시되었습니다. 우리가 일꾼으로서 일할 때 안타까운 것은 가장 가까운 가족조차도 우리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일꾼이 오해로 인해 받는 일이 너무 싫어 맡은 일을 팽개쳐 버린다면 좋은 결과는 결코 생기지 않습니다.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답게 성격이 급한 야고보와 요한은 동료들이 사마리아에서 배척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주님께 즉각 요청합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54절). 하지만 주님은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교회 내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기에, 성격(性格)도, 안목(眼目)도, 전체를 보는 시각(視覺)도 다릅니다. 다르기에 오히려 교회의 성도는 함께 더불어서 살아가야 됩니다. 서로 격려해 주고, 한 사람도 낙심하지 않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향한 길에서 제자들을 어떤 일꾼으로 훈련시키길 원하셨는지에 대해서 세 사람의 사례를 통해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주님은 값을 치르면서 주님을 따르는 일꾼을 원하십니다(57-58절). 
본문 57절에서 “길 가실 때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다고 담대하게 나선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후 교회생활이나 봉사생활에 있어서 호언장담(豪言壯談)할 때가 있습니다. 큰소리친다고, 호언장담한다고 일들이 다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58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주님 자신을 따르는 의미를 먼저 점검해 보길 원하셨습니다. 충동적(衝動的)으로, 감정적(感情的)으로 일을 감당하는 것은 결코 유익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한때 우리가 감정적으로 고양되어 있다고 해서,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하는 보장은 없습니다. 

물론 주님을 따르고자 이 사람이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놀라운 헌신의 고백입니다. 이 고백만 본다면 이 사람은 완전한 주님의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자세는 장차 다가올 주님의 고난은 생각해보지 않은 맹목적인 열광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주님은 보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따라다니면 좋은 일만 생길 것으로 알고 큰 기대감에 부풀어 쉽게, 성급하게 따르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고난을 각오하고 결의를 다지면서 좇아가도 어려운데 하물며 아무런 각오도 없이 따라가는 자세는 참으로 무모한 것입니다. 성급하게 주님을 따르려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라고 말씀하심으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치러야 할 대가(代價)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춥고 배고프며, 때로는 거친 대접과 모욕 등 낮은 삶을 살아야함을 각오해야만 합니다. 희생을 각오해야만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출발은 서두르되 길은 서둘러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둘러 쌓은 담은 결국 무너지기 쉽고 서둘러 먹은 음식은 체하기 쉬운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쉽게, 성급하게 생각하고 뛰어가다가는 실망하여 주저앉거나 넘어지기 쉽습니다. 인간 삶의 실수는 서두르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신비하게 변화되신 예수,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는 신유의 예수만 보지 말고, 머리 둘 곳이 없으셨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제대로 보는 신앙적 자세가 필요합니다. 신앙은 눈에 보이는 좋은 것 때문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감정에 따라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 그런데 만약 주님을 따르는 길로 나섰다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주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사려 깊게 헤아리면서 초지일관(初志一貫)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을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한국교회는 주님 앞에서 면류관은 쓰려고 앞을 다투지만 막상 가시밭길은 걷지 않으려고 합니다. 값을 치르지 않으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제자로서의 값을 치르지 않는 교회는 변질되고 허약한 교회가 됩니다. 부름 받은 성도는 복음의 영광과 하나님의 자녀 됨의 의미를 삶을 통하여 확증해야 됩니다. 영광에는 관심이 있지만 섬기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면, 주님 앞에 올바로 쓰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예화) 영국의 캠브리지대학의 시티 스터드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공부도 잘 했습니다. 학교에서도 톱을 달리는 학생이었고 크리캣 운동선수였습니다. 그 운동으로서 영국 전체의 금메달을 따기도 했습니다. 보장된 출세의 길이 그 앞에 열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캠퍼스집회에 참석했다가 복음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는 아프리카의 선교사로 가기로 선포했습니다. 학교 교수들이 아깝다고 생각 했습니다. 보장된 출세 길. 돈과 그리고 명예와 권력과 그 앞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선교의 길에 나서자 모두 그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보게, 이것은 자네에게 지나친 희생이 아닌가?" 이때 시티 스터드는 모든 시대를 사는 크리스천들에게 굉장한 도전이 되는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나를 위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그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내가 그를 위해서 바치는 희생은 그 어떤 것도 지나친 희생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희생입니다. 

▶ 예수님은 희생하는 사람을 보시고 계십니다. 나머지가 없는 희생을 주님께 보여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눅 21:1-4에 보면 과부의 헌금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예루살렘 성전 앞의 뜰에 헌금함이 13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헌금 통에 헌금을 넣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사람들이 헌금을 드리는 모습을 지켜 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무리 가운데 예수님의 눈에 들어온 이가 있었습니다.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그 과부는 단지 두 렙돈을 헌금하였습니다. 우리 돈으로 하면 약 600원정도 되는 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서 사람들의 안목과 하나님의 안목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깨달아야 합니다. 즉 사람들이 보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일부분을 볼뿐이나 하나님은 우리의 삶 전체를 보시고 계십니다. 주님을 위해서 희생적인 삶을 사는 자들을 보고 계시다는 것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신 것처럼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희생을 보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수많은 무리 가운데 그 과부가 예수님의 눈에 들어오게 된 정확한 동기가 있습니다. 희생 때문입니다. 그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많이 바친 액수를 보시지 않고 그 사람에게 남은 액수를 보시는 분이셨습니다. 사람들은 드리는 헌금을 계산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헌금을 드리고 남은 우리 지갑의 돈을 헤아리고 계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과부는 전부를 바쳤습니다. 돈이 많은 자들은 나머지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두 렙돈을 바치고 나니 나머지가 없었습니다. 희생은 남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남아 있음은 전적인 희생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면류관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십자가를 지는 일에도 관심이 있습니까? 나는 주님을 위해서 얼마만큼 희생하고 있습니까? 희생한다고 말하면서 손해가 되는 결코 버리지 못하지는 않습니까?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배설물로 버리는 수준까지 나갈 수 없을 지라도 몸부림이라도 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2.  주님은 주님의 일에 우선순위를 두는 일꾼이 되길 원하십니다(59-60절). 
본문 59절에서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 하옵소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어떤 사람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가족을 핑계 삼아 자신을 향한 주님의 부르심을 유보하고 의무 이행을 지체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주님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즉시 따르지 못하고 미루고 있습니다.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소서." 물론 자식으로서 부모의 장례식을 치루는 것은 당연한 도리입니다. 따라서 모든 일에 우선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 사람은 마땅히 본 받을 자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잘못은 없어도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주석학자들은 이 구절에 대해서 해석하기를 “이 사람의 아버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노령의 부친이 계시니 부친이 돌아가실 때까지 집에 머물며 봉양하다가 부친이 돌아가시면 장례식을 치른 후 주님을 따르겠다는 뜻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변사람들에게 신앙을 가지라고 권유하거나 믿는 성도들에게 봉사하라고 하면 인간적인 의무를 말하며 거절하거나, 혹은 뒤로 미루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신앙생활에서는 세상적인 그 어떠한 조건도 따라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효도를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육에 속한 것 때문에 영에 속한 일을 뒤로 미루지 말라는 말씀이십니다. 

(예화) 스펄젼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가정마다 달력이 세 개씩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만든 달력인 삼백 육십 오일로 된 달력입니다. 
그런데 안방 침대 머리맡에 가면 마귀가 달력을 걸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것의 모양은 사람이 만든 달력과 똑 같은데 한 장 들추면 정월 초하루가 아니라 "내일"이라는 것입니다. 또 한 장 들추면 또 내일입니다. 일년 365일이 전부 내일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마귀는 속삭입니다. "너희 가족이 하루를 다함께 쉬는 날이 오늘뿐이 아니냐? 목사님도 그것을 알아! 그러니까 오늘은 놀러 가고 내일 가라. 오늘만 살고 죽느냐? 내일 가라" 이렇게 살면 일년을 헛살고 평생을 헛살게 됩니다. 내일로 미루는 사람은 마귀 시간표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 하나님의 달력은 첫 장을 들추어도 오늘, 또 들추어도 오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지 않습니까? 오늘에 충실한 사람은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그 어떤 것보다 앞세우고 신앙 생활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유부단(優柔不斷)하지 마십시오. 내 신앙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이겨나가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요구하실 때는 언제나 무엇이나 양보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여기고 미루지 않고 순종하는 바른 믿음의 자세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는데 미루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삶의 우선순위를 확정하지 못하고, 여전히 쫓겨 다니는 인생입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유익(有益)을 취하는 일에는 빨랐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구하는 데는 느렸습니다. 그 중에서 가시밭의 백합화처럼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하여 주님의 일에 발 빠르고 우선순위를 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신뢰하는 마음으로 그를 빌립보 교회에 추천하여 파송하였던 것입니다(빌립보서 2:21-23). 

오늘날도 자신에 유익되는 일에는 발 빠르게 움직이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느린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에 삶의 우선순위를 두지 않으면, 우리 인생의 무대가 사라지기까지 마지막 주님 앞에 설 때까지도 시원하게 헌신 한번 못해볼 수가 있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사무엘상 2:3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대한 분명한 우선순위를 확정하고 살고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주님의 일에 삶의 최우선 순위를 두는 사람을 통해 여전히 주님의 뜻을 펼쳐나가십니다. 

3. 주님은 주님께 초지일관하고 집중하며 따르는 일꾼이 되길 원하십니다(61절). 
본문 61절에서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육신에 붙잡힌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이는 주님의 제자가 되고 싶기는 하나 아직도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자의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선 이 사람에게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62절) 여기 “합당하지 않다”는 말은 “적합하지 않다. 질서를 세우는 일이 아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 교훈은 가족관계를 금지하신 것이 아니라 가족 때문에 예수를 따르기를 꺼려하는 자에게 내리신 처방입니다. 이 사람의 경우, 작별인사를 통하여 결심이 번복, 또는 포기할 가능성이 있음을 아셨기 때문에 금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준비되고 쓰임 받는 사람은 손에 쟁기를 잡고 앞을 향해서 집중하는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열심 있는 것 같다가도 나중에 변질되는 사람이 아닌 초지일관하고 집중(concentration)하는 사람을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믿음의 쟁기는 힘 있게 잡아야 하고, 잡았으면 뒤돌아보지 말아야 하며, 끝까지 갈아내야만 합니다. 내 삶속에 성령의 감동이 왔습니까? 사람과 의논하거나 합의해서는 안 됩니다. 동의를 구해서도 안 됩니다. 내게 온 성령의 감동을 사람의 입과 맞추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사명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때문에 사람이 내게서 멀어지고 떨어져 나가도 우리는 그 길을 가야만 합니다. 
엡 6:24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찌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은혜가 임합니다. 변함없이 주님께 집중해서 삶의 우선순위로 모시는 주의 일꾼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또한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태복음6:4,6,18)는 말씀처럼 우리가 기도하고 구제하고 금식할 때 드러나게 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늘 아버지께서 갚아 주시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신뢰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이 세워 준 자리에서 묵묵히 주의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믿음의 기술자를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하십니다. 계란을 깨지 않고서는 후라이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를 버리지 못하면 나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두 마리의 토끼를 좇는 자는 한 마리도 못 잡는다는 서양격언을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의 쟁기를 잡은 우리에게 뒤를 돌아보는 이유와 변명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분명히 믿기는 믿고 충성하기는 하는데, 지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일조하고 봉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감동을 주실 때 곧바로 순종해서 실천해야지, '형편 되면 하겠다.', '빚 갚고 나서 하겠다.', '아이들 키워놓고 하겠다.' 
이렇게 하다가는 죽을 때까지 못합니다. 돈 벌어서 헌금하겠다는 사람, 대체로 헌금하는 것 못 보았습니다. 얼마가 되든지 지금 딱 잘라서 낼 테면 내고 말려면 말 것입니다. '내일 하겠다.', '얼마 후에 하겠다.' 하는 말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일꾼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나중에 엄청난 일을 하겠다.', '진짜 마음먹고 큰 일을 한번 해 보겠다'라는 말은 다 소용없는 일입니다. 주님을 따르시려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바로 그것부터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동안 갈아놓은 신앙의 밭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너무 많은 세상 이유 때문에 이리 삐뚤 저리 삐뚤, 끊기고 닿고, 둘쑥 날쑥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신앙의 밭을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뒤 돌아 서지 말기 바랍니다. 이 세상 사람이 날 몰라줘도 뒤돌아서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등지고 십자가를 보면서 뒤돌아보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스스로를 세우려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합니까?
①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사용하심에 감격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처음 직분을 받을 때 두근거렸던 마음이 지금도 뜨겁게 살아 있다면, 그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존경 받고 쓰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감격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계속 사용하십니다. 부르심의 영광을 진정 아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 우리 주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감격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주님의 부르심과 직분 주심을 평생의 감격으로 가슴에 안고 살았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맞기심이니”(딤전 1:12)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부르심에 대한 최선의 응답입니다. 여러분의 감사지수는 얼마입니까? 

② 나를 왜 일꾼으로 부르셨는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필요합니다.
눅 13:6-9에 보면 어떤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왜 포도원에 무화과를 심었습니까? 그것은 주인의 특별한 선택과 관심 때문입니다. 특별한 은총을 받은 것입니다. 포도원에 심기운 무화과나무처럼 하나님은 여러분을 향한 특별한 기대와 은총을 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무화과나무는 아무리 생각해도 못 생긴 나무입니다. 그 나무 잎도 잘 못생겼습니다. 또 나무도 곧게 자라 재목으로 쓸 수 있는 그런 나무도 아닙니다. 또 무화과나무는 관상나무도 아닙니다. 보기 좋은 나무도 아니고 동시에 꽃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열매 안에 꽃이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의 존재의 이유가 있다면 오로지 열매 때문입니다. 열매는 많이 열립니다. 그래서 성지순례 가면 이스라엘 길거리에 많이 심어놓고 그 과일을 먹도록 내놓는다고 합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는 무화과나무와 같이 보잘 것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무화과나무와 같은 우리들을 하나님의 교회인 포도원에 심어놓으셨습니다. 그 이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목적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열매라는 목적을 위해서 무화과를 포도원에 심었던 것입니다. 무화과 나무는 열매가 없다면 존재의 가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열매에 있음을 분명히 깨닫고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창조에도 목적이 있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단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데도 목적이 있습니다. 길가에 마른풀도 발에 걷어차이는 돌 하나도 존재의 이유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지 다 나름의 목적과 이유와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신앙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1장에서 말합니다. "나는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함을 입었다." "이방인의 사도가 되기 위해서 나는 세상에 태어났다." 라고 간증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확실합니까? 이 순간을 위해서 이 일을 위해서 내가 있는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까? 오늘 하나님은 당신에게 특별한 관심과 기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하나님의 포도원에 심겨진 무화과나무들입니다. 이제 예수님 때문에 살고 예수님 때문에 죽을 수 있다고 고백하는 참 믿음의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우리를 일꾼으로 불러 주신 목적을 깨닫고 못하는 자들에게는 거기에 따른 책임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하니 과원지기가 나타납니다. 과원지기가 하는 말이 '금년에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책임지는 신앙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스티븐 코비라고 하는 분이 쓴 성공하는 사람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고 하는 책에서 일곱 가지 성공한 사람들의 습관을 말하는데 그 중에 첫째가 프로- 액티비티(Proactivity)입니다. 이 말은 ‘주도성’이라고 번역하는데 그 말은 '내가 책임진다.'는 뜻입니다. 남을 탓하지 않고 내 책임으로 알고 "내가 하고 싶어 한 일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내가 하고 싶어서 내가 한 일이라고 할 때에 주도성이 살아납니다. 내 책임을 내가 질 때에 그 순간부터 인간의 존재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책임을 내가 질 뿐만 아니라 남의 책임까지도 내가 질 수 있어야 성숙한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과원지기의 위대성을 찾아보게 됩니다. 

 그러기에 과원 지기는 열매 없는 실패의 책임을 졌습니다. "열매 없는 책임이 내게 있습니다. 내게도 있습니다" 나무에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도 책임이 있다는 겸손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 할 때에 내려칩니다. 다 진멸 하겠다고 말씀하실 때 모세가 말합니다. "하나님, 정히 그러시려거든 내 생명부터 먼저 취해주시기 바랍니다." 즉 이 백성의 죄 중에 내 책임도 있기에 형벌을 함께 받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마음입니다. 

 마찬가지로 과원지기도 책임을 지겠다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책임을 지고 다시 1년 동안 수고하겠다는 것입니다. '땅을 파고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애를 쓰겠다'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내가 책임을 지겠다는 과원지기가 많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할 때 그 포도원은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책임지는 신앙을 간직하는 성도가 바로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해에는 우리가 어떻게 일을 해야 합니까? 
한 번 더의 기회를 통하여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무화과나무나 과원지기에게는 단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지게 됩니다. 그리고도 '열매가 없으면 그때 찍으세요. 한 번 더 기회를 주세요. 마지막 기회(Last Chance)를 주세요' 이렇게 요청합니다. “다시 기회를 달라”고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이 정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못했으니까 그만 두겠다고 하는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인들은 '나는 지금까지 못했으니까 그만 둘래' 하는 생각을 먼저 합니다. ‘그만두겠다’는 소극적인 자세보다는 하나님께 다시 기회를 달라고 요청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지님이 위대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일은 그만둘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내 기분대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해에는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일을 제2의 좋은 삶의 기회인지 알고 다시금 그 일을 위해서 최선의 충성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일을 거절하며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하나님을 저버리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3년을 기다렸습니다. 열매 없는 것을 알고도 1년 2년 3년을 기다렸습니다. 그 기다림이란 하나님의 기다림, 하나님의 인내를 말합니다. 즉 열매 맺기를 기다리고 있었단 뜻입니다. 그러나 이 3년이 지난 다음에 주인은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땅만 버리느냐? 이 나무를 찍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앞 에서 자신을 깨닫고 주어진 마지막 기회에 열매를 맺어 내야만 합니다. 

기독교는 열매 맺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열매가 없는 그리스도인은 참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서 열매를 구하실 때 열매를 찾지 못하는 기독교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심판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를 찍어내는 것입니다. 바로 내가 찍어내야 할 나무가 아닌지 정확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지 못한 자신을 밝히 깨닫고, 자신을 회개하며, 열매를 맺는 삶이 되도록 힘쓰는 자들입니다. 그리하여 열매를 찾으시는 하나님께서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앞으로 보아도 뒤로 보아도 열매를 맺어내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③ 우리는 하늘나라의 상급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본질적인 복, 영원한 복은 현존하는 지상세계가 아닌 천상에서 받고 누리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은 빨리 투자해서 빨리 이익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 일꾼된 우리의 평가는 하늘나라에서 받습니다. 주를 위해 목숨 바친 순교자들은 이 땅에서는 아무런 영광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썩지 않을 영원한 면류관을 받았습니다. 우리 안목을 높여 정말 소중한 것은 지상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계산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여유를 가질 수 있고 기쁘게 주 앞에 헌신할 수 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배되었으므로 나뿐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디모데후서 4장 7~8절)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주님을 따르는 의미를 사려 깊게 헤아리면서 믿음으로 나아야 합니다.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주님의 일에 발 빠른 사람, 주님의 일에 삶의 우선순위를 두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면서 초지일관하고 주님의 부르심에 집중(concentration)하여 묵묵히 주의 일을 감당하는 주님의 일꾼이 됩시다.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뜨거운 감격을 가지고 영원한 하늘나라의 상급을 소망합시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바탕으로 기쁘게 봉사하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일꾼으로 스스로를 굳게 세웁시다. 우리 모두 품격 있는 성도되어 품격 있는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를 세워갑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