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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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귀를 누리는 것이 죄입니다.
왕상10:16-22, 11:1-9
오늘 아침 죄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16번째 설교를 합니다. 오늘 아침 설교의 제목은 “부귀를 누리는 것” 입니다. “부귀를 누리는 것”이 죄란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부귀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부귀를 소유하고 누리는 것이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부귀를 소유하고 누리게 될 때 대부분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문제를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부귀라고 말할 때 사람에 따라서 그 기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금과 은과 상아와 잔나비와 공작 등을 소유한 솔로몬 왕을 가리켜 부귀를 소유했다고 말 할 수도 있지만, 큰 집과 부동산과 은행에 상당 액수의 돈을 소유하고 있는 우리 교회의 여러 성도들을 가리켜 부귀를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프가니스탄과 타지키스탄에서 사역하고 있는 어느 선교사 사모가 말한 대로 부귀는 상대적 개념입니다. “아프가니스탄에 있다가 타지키스탄에 가면 타직이 천국 같고, 타직에서 우즈벡으로 가면 우즈벡이 천국 같고, 우즈벡에서 한국으로 가면 한국이 천국 같아요." 한국에 살면서 먹을 것 입을 것 잠 잘 것 걱정하지 않고 이곳 저곳으로 여행까지 다니며 즐길 수 있는 한국 사람들을 가리켜 아프칸이나 캄보디아나 베트남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 비하면 부귀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 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아침의 설교는 솔로몬이나 이건희씨나 정몽구씨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돈과 집과 재산을 소유하고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한다는 말입니다. 이 설교는 목사님들에게도 해당하고 장로님들에게도 해당하고 권사님들과 집사님들에게도 해당하고 모든 성도들에게도 해당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재물과 돈을 사랑하거나 소유하려고 하지 말라고 설교했습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설교를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사도 요한도 여러 번 했습니다. 돈과 재물을 사랑하지 말뿐 아니라 소유하려는 것도 위태롭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이성봉 목사님은 이명직 목사님이 작사한 허사가를 즐겨 부르시곤 했습니다. 부귀를 좋아하고 소유하고 누리려는 우리들을 경고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제 허사가를 박치원 장로님이 한번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 이제 설교를 시작합니다.
첫째 솔로몬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세상에서 가장 큰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열왕기상 10장에 기록된 솔로몬이 누린 부귀영화는 불의한 방법으로 획득한 부귀영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으로 주어진 부귀영화였습니다. 열왕기상 3장 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하나님은 솔로몬이 드린 일천 번제의 제사를 너무 기쁘게 받으시고 솔로몬이 부귀영화대신 지혜를 주시기를 간구한 기도를 너무 기쁘게 보시고 그만 솔로몬이 구하지도 않은 부귀영화를 그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옛날 이삭도 부귀를 구하지 않았지만 그의 몸의 제사와 순종과 헌신을 기쁘게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그를 백배나 축복해서 거부가 되게 하신 일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에 드는 자들, 그가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넘치는 은혜와 축복을 내려 주시기를 원하시는 너무나 마음이 좋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너무나 큰 부귀영화의 축복을 주신 것은, 죄송한 표현이지만, 하나님의 실수였는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주신 세상에서 가장 큰 부귀영화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둘째 솔로몬은 부귀영화를 누리므로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부귀영화를 선하게 사용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부귀영화 때문에 죄를 짓게 됩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주신 많은 재물을 이웃을 위해 우물을 파는 선한 일에 썼습니다. 최창근 장로님이나 이의숙 권사님은 하나님이 주신 많은 재물을 하나님 나라와 교회와 선한 일을 위해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귀영화를 그렇게 선하게 사용하지 못합니다. 권력은 본질상 타락할 수 밖에 없고 재력도 본질상 타락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주신 부귀영화의 축복 때문에 세 가지 죄를 지었습니다. 첫째 육체의 정욕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일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솔로몬이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왕은 후비가 칠백인이요 빈장이 삼백인이라.” 부귀영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육체의 정욕을 추구하게 만들고 육체를 사랑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사랑하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육체의 정욕을 너무 많이 사랑했고 이방의 여인들을 너무 많이 사랑했습니다.
둘째 그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돌이키게 되었습니다. “왕이 그 마음을 돌이켰더라.”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났으므로.” 성도들에게서 있어서 가장 큰 은혜와 행복은 그 마음을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것이고 그 마음이 하나님에게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치 말게 하소서”(시119:36). “내 영혼[마음]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시143:6). 솔로몬이 전에는 주님을 사모하고 그의 마음이 전적으로 주님에게로 향했지만 부귀를 누리게 될 때 어느덧 그 마음이 하나님에게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돌이키게 되었습니다. 밭을 사고 소를 사고 집을 살 때 사람들의 마음이 교회에서 멀어지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큰 비극입니다.
셋째 솔로몬은 우상을 좇게 되었고 악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은 그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돌이킨 다음 그 마음을 우상에게로 향하게 했습니다.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니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 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 부친 다윗이 온전히 좇음 같이 좇지 아니하고.” 솔로몬은 그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돌이킨 다음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상과 자기를 좇는 악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우상을 갖다 놓았고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 자신을 갖다 놓았습니다. 사람이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때 자만해지고 건방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세상과 우상과 자기 자신을 따르고 높이게 됩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목회자로 성공하게 될 때 그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돌이켜 권력자들과 재력자들에게로 향하게 합니다. 권력자들을 의지하고 재력자들을 의지하게 되고 부귀를 누리는 자기 자신을 의지하게 됩니다. 결국 솔로몬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진노하시니라.”
셋째 솔로몬은 부귀영화의 헛됨을 고백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후 부귀영화의 헛됨은 고백하고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솔로몬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후 자기의 죄를 깨닫게 되었고 부귀영화의 헛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깨달음이 전도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결국 솔로몬은 허사가를 지어서 불렀습니다.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것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1:14). 전도서 2장에서 솔로몬은 자기가 이룬 부귀가 모두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부귀영화의 헛됨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인생을 바로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허사가를 지어서 불렀습니다. 돈에 얽매어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솔로몬의 허사가를 잘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 내 마음에 궁구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전2:1-11).
이제 말씀을 맺으며 다시 한번 정돈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들을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 때 우리들에게 부귀의 축복을 주십니다. 공부를 잘 하게도 하시고 사업을 잘하게도 하십니다. 재물을 넉넉하게 부어 주시기도 하십니다. 물론 모든 부귀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부귀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 성도들은 부귀를 탐하거나 부귀를 쌓아두거나 부귀를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서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눅12장과 16장에 나오는 부자의 경우 부귀는 자신을 망하게 하는 위태로운 것이 됩니다. 반대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이 주신 부귀를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행복을 위해 흩어 써야 할 것입니다. 이삭과 도르가와 고넬료와 루디아의 경우 부귀는 자신들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는 귀한 것들이 되었습니다. “네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는 천사의 말을 들었을 때 고넬료는 너무 황송하고 기뻤을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성도들은 사회의 빈부의 격차를 줄이고 평준화하는 복지사회를 이루는 일에도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신앙공동체가 그런 삶을 지향했고 중세의 수도원공동체가 그런 삶을 지향했습니다.
셋째 우리도 솔로몬처럼 이성봉 목사님처럼 성 프랜시스처럼 부귀의 헛됨을 고백하는 허사가를 부르며 가볍고 여유있고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알라고 권면했습니다. 자기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배고픔과 궁핍에 처할 줄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브라질 사람들은 그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비록 가난하지만 부자나라 미국을 우습게 여기면서 풍부한 자연의 혜택을 누리면서 여유롭게 자유롭게 멋지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뉴질랜드 사람들도 카나다 사람들도 그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 한국 사람들처럼 돈을 좋아하고 돈을 사람하면서 돈에 얽매어 각박하고 여유가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부귀를 우습게 여기는 허사가를 한번 불러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죄입니까? 부귀를 좋아하고 부귀를 탐하고 부귀를 누리며 사는 것이 죄입니다. 우주에서 가장 부요하신 자로서 우주에서 가장 가난한 자가 뒤신 우리 주님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반드시 잘못된 삶은 아닐 것입니다. 부귀영화보다 주님을 사모하고 사랑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찬송을 김혜은 양이 불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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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10:16-22, 11:1-9
오늘 아침 죄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16번째 설교를 합니다. 오늘 아침 설교의 제목은 “부귀를 누리는 것” 입니다. “부귀를 누리는 것”이 죄란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부귀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부귀를 소유하고 누리는 것이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부귀를 소유하고 누리게 될 때 대부분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문제를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부귀라고 말할 때 사람에 따라서 그 기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금과 은과 상아와 잔나비와 공작 등을 소유한 솔로몬 왕을 가리켜 부귀를 소유했다고 말 할 수도 있지만, 큰 집과 부동산과 은행에 상당 액수의 돈을 소유하고 있는 우리 교회의 여러 성도들을 가리켜 부귀를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프가니스탄과 타지키스탄에서 사역하고 있는 어느 선교사 사모가 말한 대로 부귀는 상대적 개념입니다. “아프가니스탄에 있다가 타지키스탄에 가면 타직이 천국 같고, 타직에서 우즈벡으로 가면 우즈벡이 천국 같고, 우즈벡에서 한국으로 가면 한국이 천국 같아요." 한국에 살면서 먹을 것 입을 것 잠 잘 것 걱정하지 않고 이곳 저곳으로 여행까지 다니며 즐길 수 있는 한국 사람들을 가리켜 아프칸이나 캄보디아나 베트남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 비하면 부귀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 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아침의 설교는 솔로몬이나 이건희씨나 정몽구씨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돈과 집과 재산을 소유하고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한다는 말입니다. 이 설교는 목사님들에게도 해당하고 장로님들에게도 해당하고 권사님들과 집사님들에게도 해당하고 모든 성도들에게도 해당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재물과 돈을 사랑하거나 소유하려고 하지 말라고 설교했습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설교를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사도 요한도 여러 번 했습니다. 돈과 재물을 사랑하지 말뿐 아니라 소유하려는 것도 위태롭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이성봉 목사님은 이명직 목사님이 작사한 허사가를 즐겨 부르시곤 했습니다. 부귀를 좋아하고 소유하고 누리려는 우리들을 경고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제 허사가를 박치원 장로님이 한번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 이제 설교를 시작합니다.
첫째 솔로몬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세상에서 가장 큰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열왕기상 10장에 기록된 솔로몬이 누린 부귀영화는 불의한 방법으로 획득한 부귀영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으로 주어진 부귀영화였습니다. 열왕기상 3장 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하나님은 솔로몬이 드린 일천 번제의 제사를 너무 기쁘게 받으시고 솔로몬이 부귀영화대신 지혜를 주시기를 간구한 기도를 너무 기쁘게 보시고 그만 솔로몬이 구하지도 않은 부귀영화를 그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옛날 이삭도 부귀를 구하지 않았지만 그의 몸의 제사와 순종과 헌신을 기쁘게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그를 백배나 축복해서 거부가 되게 하신 일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에 드는 자들, 그가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넘치는 은혜와 축복을 내려 주시기를 원하시는 너무나 마음이 좋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너무나 큰 부귀영화의 축복을 주신 것은, 죄송한 표현이지만, 하나님의 실수였는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주신 세상에서 가장 큰 부귀영화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둘째 솔로몬은 부귀영화를 누리므로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부귀영화를 선하게 사용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부귀영화 때문에 죄를 짓게 됩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주신 많은 재물을 이웃을 위해 우물을 파는 선한 일에 썼습니다. 최창근 장로님이나 이의숙 권사님은 하나님이 주신 많은 재물을 하나님 나라와 교회와 선한 일을 위해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귀영화를 그렇게 선하게 사용하지 못합니다. 권력은 본질상 타락할 수 밖에 없고 재력도 본질상 타락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주신 부귀영화의 축복 때문에 세 가지 죄를 지었습니다. 첫째 육체의 정욕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일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솔로몬이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왕은 후비가 칠백인이요 빈장이 삼백인이라.” 부귀영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육체의 정욕을 추구하게 만들고 육체를 사랑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사랑하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육체의 정욕을 너무 많이 사랑했고 이방의 여인들을 너무 많이 사랑했습니다.
둘째 그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돌이키게 되었습니다. “왕이 그 마음을 돌이켰더라.”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났으므로.” 성도들에게서 있어서 가장 큰 은혜와 행복은 그 마음을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것이고 그 마음이 하나님에게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치 말게 하소서”(시119:36). “내 영혼[마음]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시143:6). 솔로몬이 전에는 주님을 사모하고 그의 마음이 전적으로 주님에게로 향했지만 부귀를 누리게 될 때 어느덧 그 마음이 하나님에게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돌이키게 되었습니다. 밭을 사고 소를 사고 집을 살 때 사람들의 마음이 교회에서 멀어지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큰 비극입니다.
셋째 솔로몬은 우상을 좇게 되었고 악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은 그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돌이킨 다음 그 마음을 우상에게로 향하게 했습니다.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니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 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 부친 다윗이 온전히 좇음 같이 좇지 아니하고.” 솔로몬은 그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돌이킨 다음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상과 자기를 좇는 악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우상을 갖다 놓았고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 자신을 갖다 놓았습니다. 사람이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때 자만해지고 건방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세상과 우상과 자기 자신을 따르고 높이게 됩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목회자로 성공하게 될 때 그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돌이켜 권력자들과 재력자들에게로 향하게 합니다. 권력자들을 의지하고 재력자들을 의지하게 되고 부귀를 누리는 자기 자신을 의지하게 됩니다. 결국 솔로몬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진노하시니라.”
셋째 솔로몬은 부귀영화의 헛됨을 고백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후 부귀영화의 헛됨은 고백하고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솔로몬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후 자기의 죄를 깨닫게 되었고 부귀영화의 헛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깨달음이 전도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결국 솔로몬은 허사가를 지어서 불렀습니다.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것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1:14). 전도서 2장에서 솔로몬은 자기가 이룬 부귀가 모두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부귀영화의 헛됨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인생을 바로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허사가를 지어서 불렀습니다. 돈에 얽매어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솔로몬의 허사가를 잘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 내 마음에 궁구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전2:1-11).
이제 말씀을 맺으며 다시 한번 정돈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들을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 때 우리들에게 부귀의 축복을 주십니다. 공부를 잘 하게도 하시고 사업을 잘하게도 하십니다. 재물을 넉넉하게 부어 주시기도 하십니다. 물론 모든 부귀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부귀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 성도들은 부귀를 탐하거나 부귀를 쌓아두거나 부귀를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서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눅12장과 16장에 나오는 부자의 경우 부귀는 자신을 망하게 하는 위태로운 것이 됩니다. 반대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이 주신 부귀를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행복을 위해 흩어 써야 할 것입니다. 이삭과 도르가와 고넬료와 루디아의 경우 부귀는 자신들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는 귀한 것들이 되었습니다. “네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는 천사의 말을 들었을 때 고넬료는 너무 황송하고 기뻤을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성도들은 사회의 빈부의 격차를 줄이고 평준화하는 복지사회를 이루는 일에도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신앙공동체가 그런 삶을 지향했고 중세의 수도원공동체가 그런 삶을 지향했습니다.
셋째 우리도 솔로몬처럼 이성봉 목사님처럼 성 프랜시스처럼 부귀의 헛됨을 고백하는 허사가를 부르며 가볍고 여유있고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알라고 권면했습니다. 자기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배고픔과 궁핍에 처할 줄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브라질 사람들은 그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비록 가난하지만 부자나라 미국을 우습게 여기면서 풍부한 자연의 혜택을 누리면서 여유롭게 자유롭게 멋지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뉴질랜드 사람들도 카나다 사람들도 그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 한국 사람들처럼 돈을 좋아하고 돈을 사람하면서 돈에 얽매어 각박하고 여유가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부귀를 우습게 여기는 허사가를 한번 불러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죄입니까? 부귀를 좋아하고 부귀를 탐하고 부귀를 누리며 사는 것이 죄입니다. 우주에서 가장 부요하신 자로서 우주에서 가장 가난한 자가 뒤신 우리 주님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반드시 잘못된 삶은 아닐 것입니다. 부귀영화보다 주님을 사모하고 사랑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찬송을 김혜은 양이 불러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