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의 은총을 체험하자 
( 욥 42:12-17, 눅 5:1-7 ) 
 
여러분은 혹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한 적이 있습니까? 죽고 싶은 심정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그 고통의 까닭이 무엇이었던가요? 이런 극심한 고통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고통 당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성경의 인물 욥은 까닭 있는 고난을 당합니다. 너무 의롭고, 너무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은 사탄에서 욥을 맡기셨습니다. 사탄이 할 줄 아는 것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욥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고난은 오히려 축복이고 은총으로 끝납니다. 욥은 길고 지루한 고난이 끝나고 다시 회복됩니다. 욥의 회복은 성도들의 회복의 그림자입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많은 사탄의 시험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성도가 낙원을 회복하고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을 상징하는 이야기입니다. 욥기 42:6에는 욥이 회복될 즈음에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라고 합니다. 회복은 회개의 영이 함께 합니다. 회개의 영이 함께 할 때에 회복됩니다. 욥은 당대의 의인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인정하는 의인도 회개할 것은 있다는 의미입니다. 욥기 42:10에는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라고 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을 도와주러 온 좋은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욥을 더 어렵게 만들고 욥을 괴롭힌 결과가 되었습니다. 욥은 자신을 괴롭힌 자신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이런 욥의 마음은 마치 예수님의 마음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5:44에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십자가 상에서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저들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욥의 기도는 주님의 기도였습니다. 이런 위대한 기도는 회복하는 기도입니다. 또 이런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회복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돌이키시다”고 합니다. 이 말은 ‘회복되다’란 뜻의 “슈브”란 단어입니다. 이 말은 ‘돌이키다’, ‘취소하다’는 뜻입니다. 포로에서 회복하시어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욥이 하나님의 허락으로 사탄에게 내어준 것을 보세요. 첫째, 재산인 양과 약대와 그 외의 짐승들과 종입니다. 둘째는 자녀들 입니다. 일곱 아들과 세 딸입니다. 셋째는 자신의 건강입니다. 욥은 온 몸에 악창이 들어 고생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넷째로 사탄이 빼앗아 간 것은 아내의 마음이었습니다. 욥의 아내는 그가 한참 고생을 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하였습니다. 사탄이 마음을 빼앗가가지 않으면 도저히 남편에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가 힘들고 고생스러울 때 섭섭하게 하면 사탄이 마음을 빼앗아갔구나 생각하시고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욥의 아내는 전혀 도움이 안되는 아내였습니다. 욥은 만년에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의 복은 처음보다 배나 다하였습니다. 채근담에는 “그 사람의 일생은 후반부에 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전보다는 이후가 잘 되어야 합니다. 고통이 있기 이전보다 이후가 잘 되어야 합니다. 구약의 축복관은 자손의 번성, 육적 건강, 적군에 대한 승리, 물질적 풍족, 장수 등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축복관에 있는대로 욥에게 다시 회복하는 은총을 주셨습니다. 욥의 일생은 성도의 일생입니다. 욥의 회복은 성도의 회복입니다. 욥의 회복을 통하여 회복의 은총을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회복의 은총은 신체의 회복입니다. 
욥은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났습니다(2:7). 몸에 성한 곳이 없을정도로 온 몸이 병든 상태였습니다. 욥은 기와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는 불쌍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회복의 은총을 입었을 때 온 몸의 악창이 물러가고 새롭고 건강한 몸으로 회복되었습니다.건강 회복은 가장 중요한 회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천하를 얻어도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건강 잃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필립 얀시는 그의 책에서 현대를 헬스클럽, 건강식이 각광받고 있는 시대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건강이 마치 종교처럼 되었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제가 쓴 책 가운데 ‘미래 목회자의 조건’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목회자만을 위한 책은 아닙니다. 미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힘이 필수적이라는 내용입니다. 세 가지 힘은 영력, 지력, 체력입니다. 그리고 저는 마지막에 이렇게 썼습니다. “영력, 지력, 체력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체력이라”. 체력이 없으면 영력, 지력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욥은 그 후에 140년을 더 살며 아들과 손자 4대를 보았습니다. 완전한 건강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장수는 성경적 복입니다. 출애굽기 23:25-26에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 병을 제하리니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잉태치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고 합니다. 욥은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고 합니다. 장수하고 기한이 차서 죽는 것은 참으로 큰 복입니다. 

일전에 어느 장로님께서 저에게 문제를 내셨습니다. “오래 살려면 뭘 많이 먹어야 합니까?” 제가 그 자리에서 맞췄지요. “나이 많이 먹어야 오래 삽니다”. 오래 살려면 나이를 많이 먹어야 합니다. 오래 살려면 기가 차면 안되고 기한이 차야 합니다. 사람이 기한이 차서 죽는 것이 축복입니다. 이사야 65:20에는 말합니다.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자가 아이겠고 백세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것이리라.”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나아만은 아람왕의 군대장관입니다. 성경은 큰 용사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한센병자였습니다. 그가 잡아온 자기 집의 이스라엘 계집종이 자신이 선지자 앞에 가면 고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아람왕에게 허락을 받아 고치러 가게 되었습니다. 아람왕이 이스라엘 왕에게 친서를 써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이 옷을 찢고 반기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 엘리사가 나아만을 자신에게 보내달라고 합니다. 엘리사가 나아만을 보자 요단강에 일곱 번 씻으라고 하였습니다. 나아만은 화가 났습니다. “다메섹강이 요단강보다 못할게 뭐가 있어?” 그는 화를 내며 그냥 돌아가려고 하였지만 종들이 말려 일곱 번을 요단강에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그 때 나아만은 온 몸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나아만은 “내가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나아만은 회복의 은총을 입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지칭하실 때 ‘사륵스’라는 단어을 사용하십니다. 헬라어 원어에는 완전한 몸을 가리키는 두 용어가 있습니다. ‘사륵스’와 ‘소마’입니다. ‘소마’란 말은 그 사람이 선하거나 중립적일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반대로 ‘사륵스’는 항상 경멸적이고 부정적으로 인간을 지칭하는데 사용합니다. 만일 내가 병이 들어 냄새가 나고 죄를 지어 죽는 몸을 가졌다는 의미에서는 ‘사륵스’이지만 내가 건강하고 매력적이며 남에게 덕을 끼치는 행동을 하고 죽음에서 살아난다면 ‘소마’입니다. 우리의 몸은 ‘사륵스’에서 ‘소마’로 변화합니다. ‘사륵스’에서 ‘소마’로 변화하는 것은 회복입니다. 우리가 ‘소마’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둘째, 회복의 은총은 가정의 회복입니다. 
욥이 회복될 때에 그의 자녀도 배가 되었습니다. 이미 얻은 7남 3녀는 미리 하나님 나라에 가고 다시 7남 3녀를 얻었습니다. 자녀는 죽어도 영원히 내 자녀입니다. 물질과 자녀는 다릅니다. 물질은 없어지면 내 것이 아니지만 자녀는 죽어도 내 자녀입니다. 그래서 자녀는 원래 10남매인데 다시 10남매를 얻어 배가 된 것입니다. 욥이 실제 인물이라고 보십니까, 아니면 가상 인물이라고 보십니까? 실제 인물이라면 언제 사람인지 아십니까? 욥기의 마지막 절은 욥이 실제 인물이며 족장 시대 인물인 것을 표시합니다. 욥의 나이로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 인물이기에 몇 년을 더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로 봐서 족장시대의 수명이라고 추정하는 것입니다. ‘70인역’에는 시련 후 170년 더 살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욥의 수명은 240세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140년을 더 살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욥은 210세를 살았습니다. 이 수명이 족장들의 수명입니다. 당시 관습으로는 주로 아들들의 이름만 기록합니다. 욥의 경우는 아들들의 이름은 없지만 딸들의 이름은 거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딸들의 이름은 고대 근동의 아름다움의 대명사라고 합니다. 딸들은 각각 특유의 아름다움 지니고 있었습니다. 가정의 회복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호세아는 고멜이란 아내가 있었습니다. 이 아내는 부정한 여인이었습니다. 부정한 삶을 살지만 하나님은 회복하십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억지로 데려다가 다시 아내를 삼고 아들을 낳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회복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욥의 가정의 또 하나의 문제는 아내입니다. 아내가 엄청난 악처였습니다. 욥이 한참 병들어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에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한 것이 아내입니다. 이런 악처에에서 또 10남매를 낳았겠습니까? 아니면 회복 후에 이혼했겠습니까? 아니면 아내가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갔겠습니까?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부부관계도 회복되었을 것입니다. 회복되었다고 본다면 이 아내에게서 다시 10남매를 낳았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예쁜 아내를 만나면 3시간이 즐겁고, 마음씨 고운 아내를 만나면 3년이 즐겁고, 지혜로운 아내를 만나면 3대가 행복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쁜 아내 때문에 가정이 회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씨 고운 아내 때문에 가정이 회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아내를 만나면 가정의 회복됩니다. 가장 좋기는 예쁘고, 마음씨 곱고, 지혜로운 아내를 만나는 것입니다. 가정 파괴는 현대 사회의 한 현상입니다. 미국 가정의 26%가 나홀로 집에 가정입니다. 미국의 가정은 가정 해체가 위험수위에까지 왔다고 합니다. 젊은이들은 결혼을 기피합니다. 결혼한 가정에서는 이혼이 급증합니다. 동성애가 급속도로 확산됩니다. 미혼자의 동거가 10년전보다 72%나 늘었습니다. 우리 나라도 이런 면에서는 선진국입니다. 일전에 어느 가정에서는 기러기아빠가 외롭게 혼자 집에서 죽었습니다. 아이들은 캐나다 밴쿠버에 가 있고, 아내는 지난 추석 때에 캐나다에 아이들 때문에 갔습니다. 이 기러기아빠는 혼자서 집에서 텔레비전을 켜놓은채 숨져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는 가정해체가 아니더라도 가족해체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영어에 가장 엄숙한 말은 어머니(Mother), 가정(Home), 하늘(Heaven)이라고 합니다. 가장 엄숙한 이 것들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것들이 회복되어야 세상이 바르게 됩니다. 성경의 역사 접근법은 가족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역사책은 초점은 가족에서 기구로 이동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역시 교회를 기구보다도 가족과 닮은 존재로 제시합니다. 가정이 회복되어야 교회가 회복됩니다. 가정 파괴는 교회의 파괴로 직결됩니다. 우리의 가정들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회복의 은총은 물질의 회복입니다. 
욥기 1:3에서 기록된 욥의 재산 보다 두 배나 많은 재산을 욥은 회복되면서 다시 얻습니다. 양이 7천마리였지만 1만4천마리로 회복됩니다. 약대가 3천마리였지만 6천마리로 회복됩니다. 소가 5백겨리였지만 1천겨리로 회복됩니다. 암나귀가 5백마리였지만 1천마리로 회복됩니다. 만일 다른 회복이 다 있어도, 물질의 회복이 없다면 온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온전한 회복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온전한 축복입니다. 베르나르는 “하나님이 부유하신 한 나는 가난할 수 없다. 하나님의 재물이 곧 나의 재물이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무엇이든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되찾게 될 것이다”고 합니다. 욥은 하나님 때문에 잃었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이전보다 배나 더 많이 얻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가난을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부자도 많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부자였고, 욥이 부자였고, 아리마대요셉이 부자였고, 예수님의 숨은 여제자 요안나가 부자였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소유를 가지고 가난한 자도 있고, 적은 소유를 가지고도 부한 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물질을 회복하신 것은 물질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은혜없이는 잃습니다. 은혜로 다시 얻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는 베드로를 취하신 얘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밤새 바다에 나가서 그물을 던졌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한 밤이었습니다. 그의 배는 비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렸을 때에 두 배에 가득한 회복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그냥 은혜로 받은 고기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성경은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고 가록합니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차게 얻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얼른 반을 자신의 친구에게 주었습니다. 두 배에 가득 채운 이유는 반을 주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카네기는 “내 필요를 채우고 남는 잉여 재물은 영구한 사유재산이라기 보다는 이웃을 위해 잠시 관리를 맡은 신성한 신탁금이다. 백만장자는 가난한 사람들의 재산 보관인일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나눌 것을 아시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풍성하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풍성케 하시는 이유입니다. 

결론 
밀턴은 “가장 많이 고난을 당한 사람이 가장 많은 영화를 받을 것이며, 가장 위험한 곳을 지나온 사람이 큰 승리와 성공을 볼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밀턴 자신의 고백입니다. 밀턴도 노년에 시력을 잃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또 이 말은 욥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는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라고 하였습니다. 욥은 영적으로도 회복되어 이제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욥의 회복은 완벽한 회복입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회복 후의 자세를 보시고 주시는 은총입니다. 육체적 회복이 더 나쁜 결과를 가지고 올 수 있습니다. 가정적 회복이 더 나쁜 일일 수 있습니다. 물질적 회복이 더 나쁜 사람을 만드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든지 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미문에서 만났던 앉은뱅이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난 다음에 뛰기도 하며 걷기도 하며 성전에 들어가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의 회복은 회복된 다음에 영광을 돌릴 것을 보고 베푸신 은총이었습니다. 회복은 회복의 가치를 아는 자에게 주시는 은총입니다. 회복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회복은 저주가 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회복은 회복 후의 은총을 아는 것입니다. 지금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고난이 닥쳐올 징조가 보입니까?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장차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회복하게 하실 것입니다. 회복의 은총을 위한 현재의 고난입니다. 이 고난에서 승리하고 회복의 은총으로 충만한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