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7:11∼19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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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한 해의 추수를 마치고 우리의 손의 수고를 복주사 풍성한 결실을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가족과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고 식사하며 기쁨을 나누는 날입니다. 추수감사절이 되면 보통 우리는 감사에 대한 설교를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해마다 감사절을 맞이하고, 감사에 대한 설교를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하지만, 늘 깨닫는 것은 우리에게 감사가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이 시간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성도님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평소에 얼마나 하나님께나 사람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들 사시는지요? 격식을 차린 말이 아니고, 진심에서 우러나와서 드리는 감사의 말이 몇 마디나 되는지요? 감사지수는 행복지수와도 밀접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감사함을 느낄 줄 알고, 즐겨 감사를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어린 자녀들을 양육하면서 가르치기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감사합니다는 말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안 그런 자녀들도 많이 있겠지만, 요즈음 경향이 그런 것 같습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요, 그래서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는 것은 당연한 의무가 아닌가 해서 자녀들의 입에서 감사합니다는 말을 듣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 말 한 마디 들어서 배부른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말 한마디가 없어도 그만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인간 관계 속에서도 무엇인가 베풀고 그 만큼 돌려 받기를 원한다기 보다는 많은 경우에는 그저 잘 받아주고 감사합니다는 말 한 마디 듣기를 원합니다. 누구가 되었던지 간에 진정으로 감사하면서 우리의 호의를 받아들일 때에 우리의 마음이 뿌듯하고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어떠합니까? 이 아침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바로 우리는 그렇다면 하나님께 감사 생활을 잘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절에서 18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고민을 할 때가 있는데, 적어도 우리 신자들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 중의 한 가지는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범사에 감사한다는 말은 모든 경우에 감사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번 주 중에 감기에 걸려서 한 이틀 정도를 고생했습니다. 정신이 멍하고 몸이 아프고 눈이 아파서 하루 종일 누워 있은 날이 있습니다. 누워 있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만, 주일 설교를 준비한다고 감사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아픈 중에도 감사할 것이 있는가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만 억지로 쥐어짜는 감사는 있어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는 없었습니다. 
  제가 몇 주전에 한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제가 아는 한 권사님은 중병에 들었다가 기사회생했습니다. 그런데 권사님의 병이 위중한 때에 범사에 감사한다는 말씀이 이런 경우에도 적용이 되는가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현상적으로 볼 때에는 생의 소망도 끊어지고 몸의 고통은 심한데 무엇이 감사할 것이 있는가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니까 감사할 이유들이 깨우쳐 지더라는 것입니다. 우선 자신이 심히 아파서 믿음이 없는 남편이 경각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매어 달리는 일이 일어났고, 자녀들의 해이한 신앙이 다시 경성하게 된 것을 인하여 감사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그냥 생각하면 감사할 것이 없으나, 한 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감사할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1. 예수님이 10명의 문둥병자를 만나시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 나아와서 고침을 받은 열 명의 문둥병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11절-13절을 다시 보시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이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누가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고향 갈릴리를 떠나서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가시려고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있는 한 촌에 들어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언젠가도 말씀을 드렸듯이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땅은 북으로부터 갈릴리, 사마리아, 그리고 유다등으로 3분 되어 있었습니다. 사마리아는 앗수르에 포로된 후에 혼혈이 되고 혼합주의 종교가 되었기 때문에 갈릴리인들과 유대인들이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갈릴리와 유다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이 서로 방문할 때에는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지 아니하고 일부러 요단강을 건너서 둘러가는 길을 택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 같은 민족적 편견과 상관없이 사마리아를 관통하여 다니곤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일어난 사건도 바로 그처럼 사마리아 지역으로 들어가다가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멀리서 소리 지르며 환영하는 10명의 문둥병 환자들이 잇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직도 문둥병은 불치의 병 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설령 몸 속에 있는 나균이 다 죽었다고 해도 그 일그러진 용모 때문에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하기가 힘들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형편은 오늘날의 형편 보다도 더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의학이나 약학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대에는 문둥병은 말 그대로 불치의 병일 뿐 만 아니라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의 상징이었습니다. 이것은 난치병이요, 전염병이다 보니 걸렸다고 하면 가정에서 추방당하고 사회에서 격리되어졌습니다. 심지어는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유명한 영화 <벤허(Ben Hur)>을 혹시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문둥병이 걸린 자들은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동굴 같은데서 무리지어 살게 됩니다.  그저 가족들이나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들을 불쌍히 여겨 얼마의 식량을 보내주면 그걸 먹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에 식량이 부족해지면 때를 지어 동리 돌아다니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우리들 양식 떨어졌으니 양식 좀 달라는 신호인 셈입니다. 혹시 문둥병자가 길을 가다가 저 멀리서 오는 성한 사람을 보게 되면 자기 편에서 나는 문둥병자라고 소리를 질러서 그 사람이 피해 갈 수 있도록 해야 했습니다. 괜히 성한 사람 곁을 지나가다가는 돌팔매질을 당하기가 쉬웠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10명의 문둥병자가 멀리서서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도 그런 연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 볼 만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께 큰 소리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재난이나 환난을 당한 자들, 고통중에 있는 자들을 바라볼 때에 느끼게 되는 연민의 감정을 가르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측은지심이라는 것은 그저 마음에 그칠 뿐 일 때가 많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긍휼히 여기심은 단순히 안되었구나 하고 연민의 정을 느끼고, 눈물 좀 흘려주거나 주머니 털어서 몇 푼 보태어 주는 정도의 연약한 긍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긍휼은 문제가 있는 자, 중한 병이 있는 자의 고통 당함을 안타깝게 여기시는 마음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 근본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긍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10명의 문둥병자들은 참으로 참혹하고 비극적인 삶 중에서도 제대로 임자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문제 속에 있는 자들,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자들이 애처롭게 호소하거나 간절하게 부르짖을 때에 결코 외면하시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문둥병자들에게는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그 예수님이 자신들을 낫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결사적으로 긍휼을 호소한 것입니다. 


2. 10명의 문둥병자들을 고쳐주시는 예수님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보면 공생애 중에 예수님은 참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신 것을 봅니다. 우리 찬송가 465장 4절에 "내 몸의 약함을 아시는 주 못고칠 질병이 아주 없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온 몸과 오장육부를 지으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그 분이 손대시고, 그 분이 말씀해서 못고치는 질병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저주스러운 문둥병에 걸려서 오랫동안 고통 당하고 있는 불쌍한 자들이 긍휼을 요청하자 즉각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들로서는 다소 기이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1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위기 13, 14장을 보면 문둥병을 판별하고 다 나았는지를 판단하는 권한을 부여받은 이들이 바로 제사장입니다. 전문적인 의사들이 없던 이스라엘 사회에 있어서 제사장은 의사의 역할도 맡은 셈입니다. 문둥병에 걸렸던 자들이 나았으되 사회와 가정으로 돌아가서 정상적인 삶을 다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사장을 만나서 진단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제사장의 공식적인 선언과 정결례를 거친 후에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은 너희들이 다 나았다고 말씀하시지 아니하고 제사장에게 가라고 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결국 무엇이 판가름 나는가 하면 10명의 문둥병자들이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이 만약 체 우리를 만져 주거나 즉석에서 낫게 하지도 않고 제사장에게 가라니 아니 제사장에게 갔다가 낫지도 아니한 흉물들이 왔다고 난리법석이나 나면 어떡하라고 하면서 다시 자기들의 길을 가버릴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이처럼 병자를 고쳐 주실 때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낫게 해 주십시요라고 요구하는 병자에게 예수님은 때로 내가 이 일을 할 줄 믿느냐고 묻곤 하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말없이 고쳐 주실 수 있지만 반드시 병자의 마음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확인해 보시고 싶어하셨습니다. 10문둥병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고 제사장에게로 가는 길을 택하느냐 아니냐를 보고서 그들의 믿음을 테스트해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이 만큼의 믿음이 있었고 이 만큼의 순종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에게 보이려고 가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어차피 이렇게 살다가 죽을 바에는 한 번 믿고 순종이나 해 보자 하는 각오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고 기이한 일이 무엇입니까? 저희가 제사장이 있는 곳을 향해서 가는 노중에서 모두 다 고침을 받아 버린 것입니다(14절-"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우리는 사실 이런 말씀을 읽거나 들으면서 그저 동화 이야기 듣는 듯 하고 만화보는 듯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문둥병이 그냥 낫는다는 말인가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의사들도 인정할 수 밖에 없고 과학자들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우리의 죄를 위해서 자기 몸을 내어 주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의심하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마치 재벌인 아버지를 두고서 아버지는 가난한 분이다고 생각하면서 무얼 먹고 살꼬 고민하는 어린석은 자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내 몸의 약함을 아시는 주 못 고칠 질병이 아주 없네".


3. 그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가다가 나음을 받은 문둥병자들 중에 단 한 명 만이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예수님 계신데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절하며 사례하였다, 즉 감사를 드렸다고 16절은 말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사마리아인이라고 성경은 구태여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뉘앙스가 있는가 하면 그 사람이외의 나머지 9명은 유대인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사실이 무엇인가 하면 평소에는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한 자리에 마주 앉을 수도 없는 견원지간입니다. 상극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같은 문둥병에 걸려서 가정과 사회에서 쫓겨나고 나니 하나가 되었습니다. 문둥병이 사마리아인과 유대인들을 하나되게 한 것입니다. 한 운명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문둥병에서 낫고 보니 예전의 인종적인 차별과 사회적인 차별이 다시금 되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10명을 낫게 해 주었으나 오로지 한 명, 그것도 유대인들에게 개 돼지 취급 받던 사마리아 인 만이 돌아와서 감사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은 탄식의 말을 발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17,18절). 예수님의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면 이렇게 와서 감사하는 자를 기쁘게 여기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홉은 어디있느냐?"는 말이 무슨 말이겠습니까? 이 말 속에는 예수님의 마음이 섭섭하시다는 것입니다. 감사라는 것은 강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에서부터 깨달아져서 자발적으로 마음이 있어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감사를 명령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병을 낫게 해 주어도 감사할 줄 모르는 9명을 향해 몸은 나았으나 그 마음은 결코 변치 않으심을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은 그들을 괘심하다고 하신면서 한 번 낫게 하신 것을 물리시지도 아니하셨습니다. 
  제가 주보 뒷 면에 실었습니다만 무명의 성도가 쓴 '그 아홉의 변명' 이라는 재미있는 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로 돌아오지 않은 9명이 내세울 만한 9가지의 변명을 적어 본 것입니다. 지은 글이지만 한번 생각해 볼 만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한 사람은 '의사와 제사장에게 가서 정밀검사를 해야겠다' 해서 갔다는 겁니다.  '이게 나은 것 같은데 정말 나았는지.'  아주 의심이 많은 부류의 사람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혹, '재발 가능성이 있는지도 몰라.  그런고로 며칠 두고 봐야겠다.'  이사람은 신중한 성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낫긴 나은 것 같은데 워낙에 믿기지 않는 꿈같은 얘기라서 정말 나았는지 좀 기다려 봐야겠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내 병은 본래 문둥병이 아닌 좀 특이한 피부병 정도 였던가보다.'라고 생각하는 회의론자의 변명입니다. 
      네 번째 사람은 '내 병은 나을 때가 돼서 나았을 거야.'  이 사람은 자기의 몸이 나은 것을 자연현상으로 보려고 합니다. 
      다섯 번째 사람은 병 걸리기 전에 가졌던 밭과 재산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요, 이제 먹고 살아야겠으니까. 그래서 그걸 빨리 알아보기 위해서 가버렸어요.  
      여섯 번째 사람은 병 걸리기 전에 같이 있었던 가정과 식구들, 특별히 아내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서 가버렸을 것이다는 것입니다.
      일곱 번 째 사람은 '뭐 예수라는 분이 나에게 특별히 해준 것이 없잖아.'  안수를 해준 것도 아니고, 어루만져준 것도 아니고, 약을 준 것도 아니고 아, 그저 "제사장에게 가서 보여라" 한 말씀 밖에 안했는데 아, 뭐 예수님이 별로 해준것도 없는데' 하면서 가버린 것입니다. 
      여덟 번째 사람은 '다른 유명한 랍비들도 이런 것은 아마 가능할는지 몰라.'  예수님의 능력을 상대화 해 버린 사람의 변명입니다. 
      마지막 아홉번째 사람은 '이 누더기를 걸치고 추한 모습으로 예수님께 갈 수는 없잖아.  가서 목욕을 하고 새 옷을 입고 예물을 가지고 그리고 예수님께 가야지.'라고 하면서 가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저런 핑계와 변명을 하면서 잠시만 시간을 흘러버려도 다시는 감사할 기회를 얻지 못하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깨달아 주는 순간에 즉각적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는 버릇을 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께 돌아와서 사례한 사마리아인을 보십시오. 그 한사람은 자기의 모습 그대로, 문둥병자의 옷을 걸친 채로 추한 모습 그대로 개의치 아니하고 즉각적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이 벌써 우리를 환영해주시고 사랑해 주셨는데 이 모습 이 추한 모습이면 어떠냐?' 그 한사람은 우선 감사했습니다. 최우선적으로 감사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9명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하셨지만 이 이방인의 자원하는 감사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감사를 보고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인하여 감사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감사한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갚아 드리는 무엇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감사란 그저 하나님이 이렇게 좋은 분이시고, 이렇게 좋은 것을 주셨다고 마음으로 깨닫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덕을 칭송하는 것이요 찬양하는 것입니다.
  시편 69편에 보면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30,31절).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는 것과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이 뿔과 굽이 있는 값비싼 황소를 제물로 드림보다 하나님을 더욱 더 기쁘시게 한다는 말을 이해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그에게 빚지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추수감사절에만 감사할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범사에 우리는 모든 것을 인하여 감사할 수 밖에 없는 빚진 자들 입니다. 바울이 적고 있는대로 우리가 그 안에서 살며 기동하며 존재합니다. 은혜를 입은 성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길은 그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본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는 사마리아 인에게 예수님은 그 기쁨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19절 말씀입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이 사람이 다른 9명 처럼 병 나을 수 있는 기적에 대한 믿음 뿐 아니라 그 영혼을 구원하는 믿음에 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줄 모르는 다른 9명은 몸은 나았으되 그 영혼의 결국은 의심스러운 것입니다. 어쩌면 새로 태어난 인생이라고 생각하면서 신나게 살다가 죽었을지도로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한 사람의 사마리아 인을 보십시오. 그는 몸만 성하게 된 것이 아니고 그 영혼까지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의 받는 은혜 위의 은혜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9명의 부류에 속하는 자들입니까? 아니면 사마리아인과 같은 사람입니까? 많이 받았다고 무조건 감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멈추어 서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앞전에 불렀던 찬송 가사 처럼 "나 이제 생명있음은 주님의 은혜요"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살아 숨 쉬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내가 뼈빠지게 일해서 번 것이요, 수확한 것인데 하나님이 뭐 감사하냐고 생각이 드십니까? 그러나 우리의 손이 수고한 대로 거두게 하시고 먹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이 한해에도 수해로 인해서 각종 재난으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한 이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수고했으나 남에게 빼앗기고 억울하게 눈물 흘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한 번 더 깊이 생각해 보시면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 덕에 산다는 것을 고백할 수 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의 은혜로 인하여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