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미래를 대하는 성도의 올바른 자세”(약 4:13-17) 
  
오늘은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인생의 미래를 대하는 성도의 올바른 자세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은 사람에게 용기를 줍니다. 그러기에 미래지향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비록 현재의 삶이 고통스럽고 궁핍해도 행복하게 삽니다. 그러기에 미래지향적인 삶을 사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자세입니다. 

그러나 미래를 미리 알려고 하거나 미래를 확신하는 것은 바람직한 자세가 아닙니다. 그런데 미래에 눌려 사는 현대인들은 다음에, 그 다음해에, 그 다음 5년 혹은 10년 뒤에, 다음 세기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알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미래를 알기 위해서 다양한 시도들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점치는 집이나 점성술자들을 을 찾아가는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은 책을 읽고 세미나에 참석해서 경제 현상을 예측하는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은 온갖 회의나 수련회에 참석하여 목표를 설정하고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앨빈 토플러(저서 - 제3의 물결)와 같은 미래학자들이 말에 깊은 관심을 갖습니다.  

✔ 물론 미래를 미리 알고 싶은 이와 같은 모습은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이고, 미래를 미리 개척하고자 하는 마음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미래를 예측하고 미래에 대비하여 계획을 세우는 것은 좋은 태도입니다. 성공하는 삶을 살려면 무계획적(無計劃的)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미래에 대한 분명을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의 운명은 자기 자신이 개척)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확신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생의 계획은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미래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미래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이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본문에서 인생의 미래를 맞이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본문 13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어떤 사람은 매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마치 기업을 경영(經營)하는 오너처럼 치밀한 경영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물론 경영(經營)을 잘하여 이윤을 내는 재테크의 기본입니다. 성경도 합법적인 이윤을 남치는 것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사실 성경도 계획을 세우는 것을 많이 강조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은 잘못된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의 목적, 장소, 과정 등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쉽게 범하는 세 가지 잘못을 범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되는 세 가지 잘못입니다. 그러면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이 없이 장래의 계획을 세우지 말아야 합니다.(13절)
본문 13절에서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참 치밀하고 세밀한 경영 계획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 경영계획의 어디에도 하나님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가 무엇을 원해서 어떻게 그것을 하는지를 알았지만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 먼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계획성이 있는 삶을 살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잠언의 말씀은 계획하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여러 번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계획을 세우는 것은 현명한 일임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창 41:14 이하에 보면 요셉은 애굽의 바로가 꿈을 꾸었을 때에 그것이 7년 풍년과 7년 흉년에 대한 꿈으로, 흉년을 대비하라는 하나님의 계시라고 해석했고 그 점을 바로에게 일러 주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계시대로 7년 풍년 때에 7년 흉년을 대비하여 창고를 짓고 곡식을 비축해두었습니다. 그래서 애굽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나라, 특히 자기 민족 이스라엘을 구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미래를 대비하여 계획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야고보 사도가 지적하는 것은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정하지 외람됨입니다. 꿈을 꾸고 목표를 갖는 일은 위대한 일입니다. 그가 한 일에 대해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그가 잘못한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자기만족적(自己滿足的)인 그의 태도가 잘못인 것입니다. 이 사람이 잘못된 것은 하나님이 없이 장래의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장래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배제한 채 자기만을 위한 계획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인생의 가치 있는 목적(目的)이나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돈을 벌고자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처럼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이면서도 매일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온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사업이나 직장, 학교교육에 대한 계획 속에는 사실 무신론자인 듯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은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더 슬픈 일입니다. 그는 계획을 세울 때 주님을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마치 모든 것이 자기에게 달린 것처럼 스스로 행동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업에 대해 말씀하십니까? 저는 사업과 신앙을 혼합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참된 성도라면 모든 사업은 하나님의 사업임을 깨닫고 사업의 모든 일들을 하나님 중심으로 경영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이 계획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 계획을 세우는 것은 실제로는 무신론자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의 가치관은 1세기나 오늘날이나 철저한 “물질만능주의”(物質萬能主義)입니다. 돈이 그들의 주인(主人)이고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주님께서는 말세(末世)에 사람들의 모습이 이와 같을 것이며, 이는 임박한 심판의 징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마24:38, 눅17:27) 

물론 돈을 벌고자 하는 마음이나 돈을 소유하고 하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돈은 인생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일만 악의 뿌리가 됩니다.(딤전 6:10) 돈을 지나치게 사모하는 되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게 되고 많은 근심을 갖고 자신을 찌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이 우리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물질은 다만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과 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이익 남기는 것에만 도취되어 본질적인 성도의 삶의 목적과 의미를 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익 추구만을 위해서 장래의 계획을 세우고 모든 신념과 관심을 집중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은 노아 때의 사람들과 같이, 소돔과 고모라성의 사람들과 같이 모두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음성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눅 17:32) 롯의 처는 소돔과 고모라 성을 빠져 나오다 물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고 소금 기둥이 된 여인입니다. 우리는 롯의 아내와 같은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이러한 사람은 마지막은 사도 바울이 빌 3:19에서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멸망일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 그렇다면 하나님이 없이 장래의 계획을 세우는 잘못된 삶을 교정할 수 있는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장래의 계획에 하나님을 포함시키는 것입니다.
잠 16장 1절절에서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계획은 사람이 하지만 성취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잠 16:9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래의 계획에 하나님을 포함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이 계획을 세우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인생의 미래를 맞이하는 올바른 출발점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또 제가 무엇을 하지 않기를 원하십니까?”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장래의 계획을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제가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를 위해서 제가 열심히 일했는데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기도의 자세는 우리의 모든 장래의 계획에 하나님을 포함시켜는 자세로서 바람직한 자세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계획을 세우는 것은 범하는 쉬운 첫 번째 잘못입니다. 우리의 생의 목표(目標)설정에 하나님을 포함시킴으로써 이를 극복해야 합니다. 

2. 불확실한 내일을 예측하지 말아야 합니다.(14-16절)
본문 14절에서부터 16절에서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불확실한 내일을 예측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 하리라 저것 하리라고 말하는 것은 허탄한 자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존 칼빈(J. Calvin)은 “장래의 계획에 대해서 확신하는 일은 또 다른 형태의 교만으로서 마땅히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할 사람들이 마치 장차 모든 과정이 자신들의 손아귀에 있는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은 한 순간에 대한 확실성도 없으면서 자신만만하게 여기는 어리석은 일이다.”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내일을 추측하고 우리 마음대로 내일을 맞이할 수 있는 생각한다면 그것은 교만(驕慢)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잠 27:1에서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예수님께서 마 6:34에서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철학자 세네카(Seneca)는 “내일 일마저도 뜻대로 할 수 없는데 일생의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일을 추측하고 우리 마음대로 장래대로 내일을 맞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가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인생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도다.”라는 말씀처럼 인생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내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처럼 오늘밤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고착 추측입니다. 인생은 그처럼 예측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어느 누구도 내일의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는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눅 12:17-19)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을 향하여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이 사람은 한 치의 앞날을 모르면서 내일의 행복한 삶을 추축하였습니다. 
그러기에 불확실한 내일을 위하여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뢰하며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시요 방패시기 때문입니다.(시 115:9-11) 우리 인생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더욱 하나님을 의뢰하며 살아야 합니다.

둘째로, 인생은 짧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안개니라”라는 말씀처럼 인생은 짧습니다. 인생은 안개와 같아서 아침에 펼쳐졌지만 낮이 되면 금새 없어집니다. 우리가 얼마나 오래 살지 누가 알 수 있습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성경이 인생을 어떻게 묘사합니까? 나뭇잎, 풀, 그늘, 연기, 수증기와 같은 단어에 비유합니다. 우리는 영원에서 심장 한 박동만큼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제가 얼마나 살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유모차에서 휠체어로 얼마나 빨리 지나갑니까? 인생은 짧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우리 마음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일이 당연히 올 것으로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사야 56장 12절의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먹자 내일도 오늘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라는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태도를 가지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위대한 인생이여! 파티를 열어라! 부어라! 마셔라! 인생을 즐기자! 우리는 영원한 살려고 한다.”야고보는 이런 사람이야말로 인생은 망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일이 오늘과 똑같을 거라고 절대로 추정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100살까지 살 것이라고 짐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우리들은 계획이나 목표를 짜서 남들에게 나팔 불기를 좋아합니다. 
“내년에는 내 수입이 두 배가 된다말야!”, “내년에는 나는 3개국을 여행할 거야!” 목표를 발표하는 것은 믿음의 고백일 수 있고, 교만의 자랑일 수도 있습니다. 어디에서 차이가 납니까? 동기가 그 차이를 구분합니다. 우리가 말한 것에 대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목표(目標)를 갖는 것은 위대한 일이지만 그러나 먼저 나하고의 관계를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목표에 대해 하나님이 갖고 계신 것으로 먼저 이야기하자고 말씀하십니다. 내일을 예측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을 예측하면서 “이것 저것 하리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허탄한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허탄”이란 말은 “알라조네이아”(alazoneia)라는 말인데, 이 말은 “떠돌아다니는 돌팔이 의사”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돌팔이 의사는 병이 낫지 않았는데도 다 나았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허탄”은 오만(傲慢)불손(不遜)의 죄악(罪惡)입니다. 따라서 여기의 “허탄”이란 말은 “교만”이란 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잠깐 보이다가 없어질 안개와 같은 인생이 장래를 자랑한다면 그것은 교만하게 공허한 것을 의지하는 불신앙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 이러한 허탄한 자랑을 “이생의 자랑”(요일 2:16)이요 세상을 좇아 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허탄한 자랑은 사람이 주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의 인간적인 수완이나 재무나 명예 혹은 재물 등을 믿고 자랑하는 것으로 부당하게 자기 자신을 높이는 교만한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높여야 할 하나님을 무시하는 공허한 자랑은 죄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롬 3:2에서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인생은 결코 하나님 앞에 자랑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자랑거리를 들고 나가려는 사람은 아주 교만한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교만입니다. 교만(驕慢)은 믿음이 자라지 못하도록, 믿음을 병들게 만듭니다. 교만은 무서운 독소입니다. 교만(驕慢)은 결코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없는 죄악(罪惡)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설교자 스펄젼 목사는 “하나님이 다른 죄는 손가락으로 다루시지만 교만을 팔을 걷어붙이시고 다루신다. 탐심에 대해서는 무서운 심판을 내리시지만 교만에 대해서는 열배로 더 무거운 심판을 내리신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확실한 내일을 추측하면서 “이것저것을 하리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허탄한 것입니다. 모세가 시 90:10에서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수고와 슬픔밖에 자랑할 것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잠깐 자는 것과 같은 존재요, 아침에 돋는 풀과 같은 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시90:4,5) 그래서 성경에서 인생에 대하여 “나그네 길(창479),베틀의 북(욥7:6),쇠하여지는 꽃, 잠간 자는 것(시90:4), 일식 간(시90:3), 그림자(욥8:9), 풀의 꽃(약1:10-11),안개”라는 비유적인 표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계획을 세우고 자랑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그 인생을 취하시면 그만입니다.  

☞ 그렇다면 그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여 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34에서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 말씀이 「리빙 바이블」에는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이 내일도 너희를 돌보아 주리라. 하루하루씩 살아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씩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생의 미래를 맞이하는 방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미래는 분명히 우리가 감당하기가 벅차지만, 다행히도 미래에는 한번 24시간씩 작은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미래를 계획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현재를 살 뿐입니다. 오늘을 사는 것이지 내일은 살 수 없습니다. 미래를 계획(計劃)하십시오. 그러나 현재를 중요시 여기십시오. 인생은 우리가 무언가를 계획하는 사리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오늘은 15년 후에는 우리가 얘기하게 될 그리운 옛날이 됩니다. 오늘을 사십시오. 현재에 충실하십시오. 하나님 없이 계획을 어리석음을 범치 마십시오. 내년을 기약할 수 있을지 모르는 것처럼 다음 주를 기약할 수 없습니다. 내일을 추정해서는 안 됩니다.  

1분 경영학(The One Minute Manger)이라는 책을 스펜서 존슨이 “완전한 현재”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완전한 현재”란 문자 그대로 “완전한 현재”를 말합니다. 현재의 시간, 그것이 내가 갖는 있는 전부입니다. 그것이 내가 이 세상에 줄 수 있는 전부입니다. 다음 시간이나 다음 달이 아니라 바로 지금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며 나는 그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 바로 현재입니다. 

그러나 미래가 불확실하고 알 수 없고 짧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긴장하고 두려워하며 공포에 떨며 염려해야 되는 것은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더욱 의뢰하게 하는 동인(動因)입니다. 미래를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우리는 내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일 쥐고 계신 분을 압니다. 다윗은 시편 35편 15절에서 “주여! 나의 날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는 삶의 주인 되신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이 계획을 세워는 어리석음도 범치 말아야 하고, 내일을 예측하는 어리석음도 범치 말아야 합니다. 그대신 우리의 계획에 하나님을 포함시키며 오늘을 최선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이 얼마나 우리에게 필요한지를 인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또한 내일 입고 머시고 먹는 문제를 가지고 염려하지 말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25-34)고 말씀하신 의미를 바로 깨닫고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잘못된 장래의 계획을 교정할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입니다.  

3.선을 행하는 것을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17절) 
본문 17절에서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선을 행하는 것을 알면서 그것을 다음으로 미루는 것은 죄입니다. 여기에서 야고보 사도의 강조점은 마땅히 행해야 선을 “미루는 것”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습니다. 이제 하려던 참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 언제 시작할래?”

우리는 미루는 것을 좋아합니다. 야보고 사도는 그것이 ‘덫’이라고 지적합니다. 무엇이 옳은 일인지 알고 있다는 자체가 그 일을 할 할거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죄를 뭐라고 정의합니까? 우리는 죄를 악한 행동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살인, 간음, 사기, 거짓말, 도적질과 같은 것들 말입니다. 이런 것들은 적극적으로 행한 죄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종류의 죄도 있습니다. 소소극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범하는 죄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분명한 어조로 “선을 행할 줄 알고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않았음에도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내가 반드시 해야만 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알면서도 행치 아니하면 그것은 바로 죄인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불신앙은 그들이 몰라서 범한 죄악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주님을 기다려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적인 욕심에 눈에 먼 나머지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주님의 복음을 배척하였습니다. 실로 행하지 않는 믿음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것으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하게 악을 피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피하는 것 그 이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하루하루에 마땅히 행해야 할 것들을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마땅히 행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것은 분명히 죄입니다. 마땅히 행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행치 않고 자기의 마음대로 행하는 것은 죄(罪)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 14:23에서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것이 죄(罪)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선을 행할 줄을 알면서도 미루면서 장래의 계획을 세우는 잘못된 삶을 교정할 수 있는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미루지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지금 하는 것입니다.
잠언 3장 27-28절에서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미루지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하면 “내일(來日) 혹은 다음에”라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할 수 있다면 지금 할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을 가지고 행할 수 있는 일을 세 가지 있습니다. 소비하든지, 낭비하든지 아니면 투자하든지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인생은 낭비할 수도 있습니다. 인생을 낭비하는 일은 수없이 많습니다. 텔레비전 광고는 우리의 시간과 돈과 인생을 낭비하는 수많은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니면 인생을 소비할 수도 있습니다. 명예나 쾌락과 같은 것들을 얻고자 우리의 인생을 소비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인생을 투자할 수도 있습니다. 인생을 잘 사는 방법은 인생을 영원히 지속하는 것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 것을 위하여 결코 붙들어둘 수 없는 것을 포기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오래 살 것인가? 그 기간에 대해 염려합니다. 물론 이것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무엇에 기억했는가?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여한 것에 관심을 갖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인생을 중요한 것으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중요하지 않는 것들, 비본질적인 것들에 낭비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중요한 것으로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달란트와 은사에 대해 말씀해 주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인이 한 사라에게 한 달란트를 주고 다른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주인이 떠나갔다가 수년 후에 돌아왔습니다. 두 사람은 자신을 돈을 두 배로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것을 땅에 묻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주인은 말하기를 “네가 차라리 그것을 은행에 맡겨뒀더라면 이자라도 얻었을 것 아니냐 이 악한 종아!”라고 책망하십니다. 사악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가치 있는 것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나쁜 일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가치 있는 인생 것으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위한 것이라면 생각되면 무엇이든지 지금 행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주나 다음 달이나 내년으로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전도할 일이 있으면 바로 지금 행하시기 바랍니다. 충성할 일이 바로 지금 행하시기 바랍니다. 헌금할 일이 있으면 바로 지금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생명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기여하고 있는가를 먼저 염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염려하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우리 자신이 실행해야 할 선한 일이 있다면 바로 지금 그 일을 실천하십시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인생의 미래를 계획할 때에 제한적이고 회의적인 자세로 임하거나, 우리들의 어떤 결정들을 할 때마다 항상 타당성 여부를 의심하라는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① 하나님이 없이 장래의 계획을 세우지 말고 장래의 계획에 하나님을 포함시키라고 말씀하십니다. ② 불확실한 내일을 예측하며 장래의 계획을 세우지 말고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여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③ 선을 행할 줄을 알면서도 미루면서 장래의 계획을 세우지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지금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범사에 하나님과 함께 우리의 인생을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자문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치 마지막인 것처럼 「하루하루를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루하루가 마지막인 것처럼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에 관심을 갖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사업에 동역자이십니까? 어떻게 동역하고 계십니까? 증명해 보이시기 바랍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미루지 말고 바로 지금 당장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젠가는 내 인생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할 날이 올 겁니다.”라고 말하지 말고 바로 주님을 위해서 우리의 할 수 있는 일들을 계획하되 그 일에 주님을 포함시키고 주님의 뜻대로 행하되 바로 지금 그 일을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함으로 하나님 나라에 많은 것을 기여하여 많은 썩지 않는 이익을 맡길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