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세우는 사람


-임화식목사/ 순천중앙교회

마태복음 16 : 13~20



얼추 쉰 살이 다 되어서야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온누리교회 교인이라고 자신을 즐겨 소개하는 카피라이터 이만재라는 분이 쓴 「교회에 가기 싫은 일흔 일곱 가지 이유」라는 제목의 책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이 책에는 ‘우리 젊은 신세대 왜 교회를 멀리 하나?’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제가 대학에 강의 나갔을 때는 학생들에게 이 책을 읽고 서평을 제출하도록 숙제를 내 주곤 했던 책입니다. 저자는 이 책을 신세대 젊은이들이 갖고 있는 교회 가기 싫어하는 이유들에 대해서 나름대로 들려주고 싶은 해명성 이야기들을 썼노라 집필의도를 밝히고 있습니다. 

어쩌면 교회에 나가기 싫었던 경우 경우를 이 책에서 조목조목 잘도 짚어내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교회나 세상이나 별로 다른 것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까놓고 이야기하자면 교회나 세상 사람들이나 매한가지더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보니 사람을 학력 따라, 세상 신분 따라 대우하더라. 교회는 말 그대로 예수님의 평등 정신과 박애주의를 실천하는 도장이어야 할텐데, 세상 풍속 못지 않은 또 하나의 계급 사회처럼 여겨지더라. 겸손을 가장한 미소와 그럴싸한 좋은 말들로 포장되어 있을 뿐, 권위적인 직분을 가진 자들의 모습이 젊은이들에게는 도대체 부정적인 모습으로 비쳐진다 이겁니다. 그리고 웬 공명심, 명예욕이 그렇게도 많은지, 은근히 자기 이름 내려 하고, 시기 질투하고, 돈으로 사람을 평가하더라, 뭐 이런 식의 주장을 77가지씩이나 잘도 정리해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예수는 좋으나 교회는 싫다’ 이런 식의 막 말에 대해서 저자 나름대로 상당히 성실한 답변을 적고 있습니다. 듣기로는 이 책이 꾀나 팔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책의 내용이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번쯤은 정말 교회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가? 아니 교회란 무엇인가? 교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갖고 있어야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원초적 모습을 설명해 주시고 계십니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우선 바른 신앙고백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 살아생전에 그 당시 유대 민족은 로마의 식민 지배 하에서 고통 받고 있었습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짓눌리고 약탈당하고 툭하면 남의 나라 군사들이 와서 제멋대로 휘젓고 돌아가는 이 한심한 현실 속에서 이 민족의 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예수께서는 너무도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또한 지금 제자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도 훤히 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 때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종말론적인 메시야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이 고백 위에 교회는 성립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역사가 창조되었습니다. 바로 교회의 창립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반석 위에 내가 교회를 세우리라.” 여기서 교회가 이루어집니다. 여기에는 아직 눈에 보이는 교회의 건물도 없습니다. 성도들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과 열두 제자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오늘의 교회의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먼저 이 고백이 분명해야만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십니다.’ 이 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이 신앙고백이란 하나님께 대한 충성 서약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알고 주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에 감격하여 응답하고, 나아가 여기에 내 운명을 바치는 것입니다. 충성을 맹세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내 목숨을! 다 바쳐서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당신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하고, 이 위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교회에는 계시적 성격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시몬아, 네가 참 기특하다. 어쩌면 내 마음에 쏘옥 드는 대답을 잘도 하니?”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본문 17절에 보면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는 우리가 신앙고백을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도록 계시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아무도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교회의 소속은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18절을 보면,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그랬습니다. 교회는 주께서 세우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의 모든 영광은 주인이신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결코 사람이 칭찬을 받고 높임을 받는 그런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 교회의 주인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를 믿기 전에는 교회를 엄청나게 핍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게 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께서는 교회와 당신을 동일시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곧 그리스도요, 그리스도가 곧 교회며, 교회는 주님의 몸이라고 우리는 그래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종말론적인 약속이 주어진 곳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겠다. 교회는 천국의 열쇠를 가졌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 복을 받고, 교회를 통하여 구원을 얻고, 교회를 통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교회는 자선 사업을 하는 곳도, 봉사 사업을 하는 기관도 아닙니다. 교회는 천국 가는 기관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나머지 모든 일들은 부수적으로 마땅히 해야 하는 일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천국을 소유한 자로서 이 세상사는 동안 끊임없이 베풀고,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할 뿐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죄 사함의 권세를 주님으로부터 위임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울어도 못 하고, 힘써도 못 하는 것이 내 자력으로 죄 사함 받고, 죄 씻음을 받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선행을 많이 하고 고행을 한다고 해서 내가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사죄권을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권세를 교회에 위임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19절을 보면,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엄청난 사죄권을 교회에 위임하셨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해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교회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씀이 방해 없이 잡음 없이 깨끗하게 전해지고, 또한 성령의 역사, 십자가의 거룩한 역사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바로 적용되는 곳이 교회다.” 옳은 말씀입니다. 말씀과 성령과 그리스도의 권세, 이것이 교회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그리스도 중심적이요, 성경 중심적이며, 교회 중심적이어야 합니다. 교회를 통해서 말씀을 듣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모습을 뵈옵는 체험을 하게 될 때에 비로소 교회요,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교회는 살아 움직이는 주님의 몸이요, 생명력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겉모습은 교회처럼 보이지만 어떤 교회는 이미 생명력을 잃고 죽어 있는 교회도 있습니다. 

미국의 어느 목사님께서 살아 있는 교회와 죽어 가는 교회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교실, 주차장 등 늘 공간의 문제가 대두된다. 그러나 죽은 교회는 공간을 염려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교회는 아이들과 소년 소녀의 재잘거리는 소리로 늘 시끄럽다. 죽어 가는 교회는 죽은 듯이 조용하다. 살아 있는 교회는 언제나 일꾼이 부족하다. 죽어 가

교회는 일꾼을 찾을 필요가 없다. 살아 있는 교회는 언제나 예산을 초과해서 쓴다. 죽어 가는 교회는 은행에 잔고가 많다. 살아 있는 교회는 새 얼굴 이름 알기가 어려워 애먹는다. 죽어 가는 교회는 해를 거듭해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살아 있는 교회는 선교 사업이 활발하다. 죽어 가는 교회는 교회 안에서만 움직인다. 살아 있는 교회는 주는 자로 가득 차 있고, 죽어 가는 교회는 타내는 자들로 차 있다. 살아 있는 교회는 믿음 위에 운행되고, 죽어 가는 교회는 인간적 판단 위에 운행된다. 살아 있는 교회는 배우고 봉사하기 위하여 바쁘고, 죽어 가는 교회는 편안하다. 살아 있는 교회는 활발히 전도하고, 죽어 가는 교회는 점점 굳어져 화석화된다.”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교회를 세우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교회를 허무는 사람입니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른 신앙고백을 할 수 있음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살아 있는 교회, 든든히 서 가는 교회로, 썩어지는 한 알의 여문 밀알과 같은 존재가 되어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