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성숙을 위한 권면”(히 6:1-12)

전문 용어로 “제자리 맴도는 현상”을 “유턴 현상"이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현상은 신앙생활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 성장이 없이 제자리 맴도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모습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이 제자리를 맴돌기를 원하시기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신앙 성장을 위하여 몸부림쳐야 합니다. 신앙의 성장은 우리 신앙인이 가진 평생의 과제입니다. 그러기에 죽음 앞에 사도 바울조차도 로마 감옥에 갇혀있는 입장이었지만 빌 3:12-14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도 바울이 구원을 얻지 못했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이는 장성한 신앙을 거쳐 온전한 신앙, 완전한 신앙, 예수 그리스도 형상의 신앙으로 달려간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신앙은 경건의 모양만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을 소유해야 하는 것처럼 정상적인 신앙을 소유한 성도라면 성숙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숙한 신앙이란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본문을 기록한 히브리서의 저자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사람들이 되어야 하며, 또한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 가운데 아직도 젖만 먹는 어린 신자가 있는 반면에, 이제는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성숙한 신자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숙한 신자에 대한 기준점으로 제시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들에게 당신이 얼마나 교회생활을 오래 했으며 봉사와 헌신을 얼마나 많이 했느냐를 묻고 있지 않습니다. 이는 신앙의 성숙도가 신앙 경력과 반드시 정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 경력만큼 성숙해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본서의 기자도 본문 5장 12절에서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라고 말씀하면서 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때때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신앙의 연륜도 필요합니다.(히 5:12) 만물의 이치가 그렇듯이 영적으로도 연륜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오랜 세월과 영적경험들은 신앙 성숙에 피할 수 없는 조건입니다. 

어떤 사람은 갑자기 은혜를 받고 영적체험을 하여 뜨거운 열심을 가지고 섬기기도 하지만 쉽게 낙심하고 실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딤전 3:6에서 “새로 입교한 자도 말찌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라고 말씀하면서 교회에서 중직자를 세울 때는 새로 입교한 자를 배제했던 것입니다. 다양한 경험이 필요합니다. 다양한 영적경험이 없는 성도는 환난의 날들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좋은 경험 뿐 아니라 고통스러운 경험도 신앙생활에 큰 유익이 됩니다. 그러나 오랜 믿은 성도님들은 연륜에 걸 맞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경력만 앞세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성숙한 성도인지를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에스겔은 47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은혜의 단계를 발목에서부터 헤엄치는 단계로까지 점점 더 깊은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엡 3:19에서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신앙의 넓이가 넓어져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길이가 길어져야 하고, 우리 신앙의 높이가 높아져야 합니다.  

그런데 성숙한 성도라면 ① 듣는 것이 둔하지 않습니다.(히 5:11) ② 단단한 식물 곧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야 합니다.(히 5:12) ③ 의의 말씀을 경험해야 합니다.(히 5:13) ④ 선악을 분별하는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히 5:14)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신앙의 경륜만을 고집하면서 듣는 것이 둔하고, 젖만 먹고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하고,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고, 선악을 분별하는 분별력을 갖지 못한다면 연륜과 경험은 있으되 아직도 어린 신자입니다. 어린 신자란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한 자를 말합니다. 신앙의 초보인 자들은 기초를 반복해서 배워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결코 신앙의 초보에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엡 4:13에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가 성숙한 신앙에 대해서 갑자기 언급하고 있습니까? 히브리서가 기록될 당시의 시대 상황은 네로의 치하였습니다. 아직 본격적인 박해를 시작하기 전이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상황은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영접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점차로 힘들어할 뿐만 아니라 구태의연(舊態依然)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누군가가 자신들에게 전해 준 기독교의 진리에 대해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치 않는 자들이 되었고 적당히 하면 된다는 적당주의(適當主義)가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약간의 책망 섞인 어조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능히 성장할 만한 충분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너희가 아직도 그렇게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의 비밀이 전파 된지 벌써 30여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결코 「초신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어린아이처럼 행동하기를 좋아합니다. 아직도 자신들이 어린아이인 것처럼 행동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책망 섞인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본래 히브리서의 저자는 멜기세덱(창 14:17-24)과의 비교를 통해 계속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탁월함을 피력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인들의 영적 미성숙한(11절)이란 벽에 부딪쳐 올바른 교리의 전파가 불가능함을 절실히 깨닫고 이제 본론적인 주제에서 벗어나 히브리인들로 하여금 영적인 지식으로 자라갈 뿐만 아니라 그에 합당한 신앙의 열매도 맺을 것을 촉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저자는 본문을 통해서 매우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면서 성도들에게 경각심(警覺心)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듣는 것이 둔하다”라는 것은 영적으로 둔한 것을 말하는 것이지 아이큐가 낮은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학벌이 낮은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진리를 깨닫는 그 수준이 너무나 약한 것을 말합니다. 영적으로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예수 믿고 교회 나온 지 3년쯤 되었으면 이제는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10년, 20년 다녀도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똑같기만 한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이 답답해하시고, 아파하실 것인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영적인 깨달음과 성경 지식과 진보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신앙 성숙을 위해 주시는 권면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신앙 성숙을 위한 첫 번째 권면은 신앙의 초보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1절 상)
본문 6장 1절 상반 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신앙 성숙을 위해서는 신앙의 초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젖만 먹고 떼쓰는 식의 신앙 즉 그리스도의 진리의 기초 단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여기에서 “버리고”라는 말씀은 “포기하고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극복해 나가라”는 뜻입니다. “어려움을 뛰어 넘으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결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한 진군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사고방식과 가치관과 우리의 삶의 터전을 고정시켜 놓는다면 믿음의 자라가지 않습니다. 변해야 합니다. 변할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진보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딤전 4:15에서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변화를 원하면서도 막상 자기 자신에게는 변화하기를 주저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보하려면 우리 자신이 먼저 변화되기를 결심하셔야 합니다. 변화되기를 결심하지 않는 한 변화될 수 없습니다. 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가만  있어도 성장도는 것이 아닙니다. 껍질을 깨야만 성장이 가능한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모습을 버리지 않는 한 어른 성숙한 옷을 입을 수 없습니다. 계속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면서 아무리 성숙한 신앙을 외쳐보아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치한 신앙의 모습을 스스로 버리도록 자신을 결단시켜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은사를 행한다고 해서 성숙한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가 그 대표적인 실례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은사를 받아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고 병도 고치고 영분별도 하고 능력도 행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신앙이 자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 3:1-3에서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ꡓ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무슨 말씀을 주든지 간에 ꡒ아멘!ꡓ하고 잘 소화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무슨 말씀이든지 잘 먹어야 말세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장성한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신앙 성숙을 위한 두 번째 권면은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2절)
본문 6장 1절 하반 절에서 2절에서 “... 죽은 행실의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신앙 성숙을 위해서는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기에서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는 것은 「성숙한 데로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가을에 익은 곡식과 과일처럼 성숙한 사람은 보기가 좋습니다. 그리고 성숙한 사람은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줍니다. 성장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괴롭힙니다. 그 사람의 시간을 뺏습니다. 그 사람의 관심을 자꾸 자기에게 끄집어들입니다. 왜냐하면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언제나 남을 도와줍니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남의 영적 유익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으로 탈바꿈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린아이의 신앙에서부터 뛰어넘어야 할 장벽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뛰어 넘어야 할 장벽을 여섯 가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반복하여 회개하는 행실을 버려야 합니다.
본문 6장 1절 하반 절에서 “죽은 행실을 회개함에 대한 교훈의 다시 닦지 말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어린 아이의 신앙에서 벗어나려면 반복하여 회개하는 행실을 버려야 합니다. 여기에서 “죽은 행실”이란 말은 죽음을 가져왔던 나쁜 행실을 말합니다. 나의 인격을 파괴했던 행실이었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이런 죄들을 짓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 죄를 심각하게 고백하며 가슴을 찢고 그리고 통회 자복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시 똑같은 죄를 반복하는데 있습니다. 똑같은 죄를 반복하면서 괴로워하며 고민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신앙의 어린아이의 모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 단계를 벗어나라고 권면하시고 있습니다. 이었습니다. 똑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미워할 시간이 없습니다. 전도하는 사람에게는 불평할 시간이 없습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악을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적어집니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시간과 나의 모든 생각과 나의 모든 삶 전체가 선을 행하는 쪽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전도하는 데 생애를 보내기를 바랍니다. 남을 도와주는 데 생애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있는 확률이 점점 적어지며 똑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이 생깁니다. 이제 우리의 기도가 “주여! 이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가 사라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선을 행했던 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하나님께 보고할 수 있는 기도로 가득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본문 6장 1절 하반 절에서 “하나님께 대한 신앙에 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성도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초보에 있는 성도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을 갖지 못하고 불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성숙한 신앙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히 11:6에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신 것과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우리의 삶에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비가 오고 폭풍이 치고 먹구름이 친다 할지라도 태양은 존재하지 것을 믿고 있습니다. 먹구름 속에 은빛 광채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약한 신자들은 환난이 오면 하나님의 의심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이 잘되면 하나님을 섬깁니다. 이것은 어린 아이의 신앙입니다. 우리의 신앙 속에 찾아오는 이 의심을 없애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신앙생활을 하면서 환경이 좋고 모든 것이 잘되면 하나님을 잘 섬기지만 병이 오고 가정이 어려움에 부딪치고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의심이 생기고 절망하고 좌절하는 것 이것은 어린아이의 신앙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우리가 약해질 때 하나님도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약할 때에 하나님은 더욱 강해집니다. 하나님을 계속 바라보고 어떤 일을 만나도, 어떤 절망도, 어떤 역경도, 어떤 고통이 나를 괴롭힌다고 할지라도 신실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 번째 세례들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본문 6장 2절에서 “세례들에... 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예식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세례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하고 있는데, 구약 유태인들의 전례 예식과 또 신약의 세례 등 여러 가지 종류의 세례에 대한 것들로 생각할 수 있고, 물세례와 불세례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세례 할 때에 보면 이 세례를 분명히 알지 못하고 받으시는 분이 요즘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자기가 과거에 세례를 시원치 않게 받았고, 또다시 세례를 새롭게 받아야 되겠다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를 받는데 진리의 내용을 모르고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분명한 신앙 고백을 갖고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례에 대한 갈등 속에 있는 사람은 아직도 어린 신자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라고 성경은 권면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로 안수에 관한 혼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2절) 
본문 2절에서 “안수.. 에 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안수에 관한 혼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짐승에게 안수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짐승을 죽였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그 짐승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구약에 보면 아브라함이 자기 자손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를 했는데, 이것은 죄의 전가가 아니라 축복의 전가였습니다. 그리고 직분을 임직할 때에 안수를 합니다. 이 때도 안수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이 임할 때 안수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실 때도 안수한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안수에 대해서 더 이상 혼돈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2절에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부활에 대한 확신과 영생과 천국에 대한 확실한 진리를 소유하고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안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분명히 있습니다. 다시는 이 문제에 대해서 기초를 닦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로 영원한 심판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본문 2절에서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영원한 심판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버리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영원한 심판에 대한 확실한 진리를 가지고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일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국이 있지만 동시에 지옥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지옥에 관한 설교를 하면 싫어합니다. 그러나 지옥에 대한 설교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옥은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죽는 얘길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지옥에 대한 설교를 듣기를 거부해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지옥 갈 것 같은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잠재 불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대한 불안이 있기 때문에 그 지옥에 대한 설교를 듣는 것을 거부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영원한 심판에 대한 확실한 진리를 갖고 있기를 바랍니다.   

3. 신앙 성숙을 위한 세 번째 권면은 끝까지 진실하게 믿으라는 것입니다.
본문 3-1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끝까지 진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본문 10절에서 “하나님은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수고를 잊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끝까지 진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힘으로 성숙의 자리에까지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면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본문 3절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고 위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힘으로는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가능성과 방법과 구체적인 역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가 순종하고 그러한 방향으로 마음에 결심을 하면 이제 성숙한 신자로서의 성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처럼 말하고 난 다음에 4절,5절에 들어가면서 급격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주 무서운 경고를 합니다. 4절-5절에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라고 말씀하면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경계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① 참된 그리스도인은 빛을 맛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믿는 자들에게 성령과 빛과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② 뿐만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은사를 맛보는 사람들입니다. 하늘에서 주는 평안과 하늘에서 주시는 기쁨과 하늘에서 주시는 자유와 그리고 수고하고 무거운 모든 죄의 짐과 죄의식을 벗어버리는 이 축복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 이 하늘의 은사를 체험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③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사람들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은혜에 참여한바 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 능력을 맛보고, 달고 오묘한 성경의 말씀을 밤새도록 눈물 흘리면서 읽어도 기쁨을 다할 수 없는 그 감격을 경험한 자입니다. 뿐만 아니라 내세의 능력을 맛본 자들로서 천국을 오늘 내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아직 천국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이 미치는 그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주님의 주권이 미치는 곳이라면 초막이나 궁궐이나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들은 내세의 능력을 바로 오늘 현실로부터 경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저자는 아주 충격적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 6절에 보면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6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타락한 자들은 분명히 4-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늘의 은사를 맛본 자들이고, 성령에 참예한 자들이었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요 10:28-29의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라는 말씀과 빌 1:6의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는 말씀하고 있는 「성도의 견인」이라는 말씀과 대치되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나님은 믿음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보존하십니다. 그러기에 6절의 말씀은 참으로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타락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그들은 다시 새롭게 회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바로 이해하려면 이 성경 구절은 주경학자들이 많이 고민을 한 성경의 난해 구절 중입니다. 본 성경 구절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많지만 우리가 제일 받아들이기 좋은 말씀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말과 비교해서 생각해 이해가 될 것입니다.(마 12:31,막 3:29) 이때가 바로 바로 네로 황제를 비롯해서 무서운 박해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임하던 때였습니다. 그들이 성령을 체험하고 하나님을 믿고 신실하게 따르다가 이 무서운 박해와 잘못된 이단들에 빠져서 비참하게 최후를 마친 사람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이 부분이 기록된 것입니다. 또 이 부분은 그 다음의 성경과 연결시켜 보면 이런 사람들은 6절 후반부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수치를 당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사람이 그 말년에 하나님과 원수가 된 사람을 우리는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참 어쩔 수 없는 불행이 그들에게 있는 것을 봅니다. 초창기(草創期)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잘 보냈는데, 말년에는 완전히 마귀에게 사로잡혀 결국 실패함으로 끝나는 사람들이 구약 성경에도 많이 있고, 오늘 우리 주변에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타락 신자의 대표적인 예로 가룟 유다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의 사도로 세움을 입어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받았습니다.(마10:1). 그러나 그는 물욕 때문에 예수를 팔아버렸습니다.(요12:6,마26:14-1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처음 잘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끝은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지금 잘 믿고 있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잘 믿지 않으면 이는 엄청난 멸망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을, 그 당시에 그 핍박과 이단의 모든 유혹 속에서 그런 경우들이 있었다는 것을 미리 경고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경고입니다. 이를 바로 이해시키기 위해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본문 7-8절을 통하여 “두 땅에 대한 비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7-8절에서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땅에 비가 내립니다. 똑같은 비를 흡수하는데 한 땅은 채소를 생산하는 땅이 되었고, 한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생산하는 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땅은 복 받은 땅이요, 한 땅은 저주받은 땅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저자는 무서운 경고만을 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본문 9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고 말씀하면서 또 한번의 전환되는 말씀을 합니다. 여기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말은 히브리서에 딱 한번 나오는 말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말입니까? 무섭고 엄격한 말 뒤에 가장 사랑스러운 말이 그 뒤에 나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너를 그처럼 사랑차지 않으면 너에게 그처럼 엄격한 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말뜻입니다. 「크리스소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실수하여 벌을 받고 슬퍼하는 것도다 차리라 나의 무서운 경고의 말을 듣는 것이 낫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실수해서 매를 맞는 것이 낫습니까? 차리리 무서운 경고를 듣는 것이 낫습니까? 무서운 경고를 듣고 회개하는 것이 백 번 낫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받은 축복을 소홀히 하지 않기를 부탁드립니다. 
축복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축복을 지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사소한 일로, 여러 가지 세속적인 일로, 여러 가지 개인감정으로 여러분이 받는 구원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 구원을 지켜 주십니다. 그러나 엄청난 배도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10절에서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넘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 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불의치 않은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실 때에 언제나 정확하게 심판하십니다. 절대로 편견이 없습니다. 
어떤 때 예수 믿다 보면 하나님이 너무 하신다고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사정을 알까? 하나님의 판단이 흐리신 것이 아닐까? 하나님도 부자를 좋아하시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도 권력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세상이 험한 것을 보면서도 하나님은 어찌하여 그냥 놔두시는 것일까? 그러나 여러분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한번도 그에게는 불의가 없었으며, 잘못된 판단이 없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와 사랑으로 형제를 섬기는 것과 지금도 계속해서 형제를 섬기고 있는 것을 하나님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런 사랑의 권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 끝까지 진실하게 믿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성장하가고,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탈피하라고, 무서운 배도의 길에 들어서지 말라고, 그리고 하나님의 주신 축복의 그 잔을 마시고 축복의 길에서 계속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성도답게 좁은 길로 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정말 감당할 수 없는 많은 고통과 환난이 우리들을 비굴하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리할지라도 끝까지 좁은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선을 행할지라도(벧전 3:13)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은 복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벧전 3:13절) 왜냐하면 선을 행하므로 고난을 받는 것이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벧전 3:17)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반드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운 것을 보상해 주시는데, 큰 상급을 우리에게 주실 줄 믿습니다. 

4.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까?(11-12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서 불러내시고 세상 사람과 구별해서 자신의 자녀로 삼으신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고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각자 예수 믿은 동기도 다르고 믿게 된 과정도 다양하지만, 동일한 것이 있다면 배후에 우리를 불러내신 하나님의 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를 세상 사람과 구별해서 예수 믿도록 하셨을까요? 우선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을 얻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이 계시는 나라에 가서 그분이 누리는 생명과 모든 지복을 그분과 함께 영원토록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정말 생각만 해도 황홀하고 엄청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구원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또 현실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동안 창조자와 구원자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짧은 한 생을 살 동안 가장 고상한 목적 가운데 살도록 부르셨고 그러한 삶을 명령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아 드리는 것입니다. 이 현실적인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으로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려고, 현실적인 목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된 사람이 되도록 하고자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듯이 구원을 얻는 신앙생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생활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저 가만히 앉아 믿기만 하면 자연적으로 돌아가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굉장히 어렵습니다. 

우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사는 구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어도 450년 혹은 50년 후에나 이런 사건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합니다. 당장 세상이 뒤집어져서 우리가 함께 하나님 앞으로 부름을 받는다면 모르지만, 자연 법칙에 의해 앞으로 살 기간을 계산해 보면 하나님의 구원은 그 때쯤에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짧은 인생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살아보면 30년, 50년이란 기간은 실로 긴 세월입니다. 아마도 수십 년에 이르는 인생길을 걸어갈 동안 우리가 겪어야 될 시련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고비를 넘어 하나님 나라의 문에까지 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앞으로 어떤 환란이 기다리는지 모릅니다. 어떤 슬픔과 고통을 맛볼지 모릅니다. 또 얼마나 화려한 인생을 살지 모릅니다. 하여튼 예측할 수 없는 인생길입니다. 이런 길을 걸어가면서 마지막 구원을 우리가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기 위한 신앙생활은 쉽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매일 매일의 삶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 삶을 살려고 할수록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이 주변에 너무나 많습니다. 세상은 점점 우리를 유혹하는 쪽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한 예로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별의별것을 다 접하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기 시작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저만큼 가버립니다. 어떤 욕구 불만이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자주 몰입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란 종교적 구호로 전락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점점 바빠지고 경쟁도 살벌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멀어지고 맙니다. 모든 것이 나의 생각 속에서 맴돌고, 다음 목적을 향해 뛰다 보면 10년, 20년이 지나가 버립니다. 이런 유혹 많은 세상에서 날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도 만만치 않고 천국까지 가는 길은 더욱 험난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변덕이 많은 신앙생활을 하기 쉽습니다. 유혹이 없을 때는 교회도 열심히 나오고, 성경도 읽어보려고 애를 쓰고, 안 믿는 사람을 만나면 전도도 하면서 나름대로 열심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어떤 유혹이 와서 자신도 모르게 '꽝!' 하고 쓰러져 버리면 성경도, 기도도 팽개쳐 버리고 나중에는 술도 한 잔 마셔보면서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버립니다. 한 마디로 신앙생활에 일관성이 없어져 버립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힘들고 어려워도 일관성 있는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는 일관성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한 생을 살다 보면 어려운 일이 많습니다. 지겨워질 때, 그리고 예배의 감격에 빠질 때에는 잘 해 보다가 이내 잘 안되거나 마음이 식어버리고 감동이 식어지면 옛날로 돌아가기가 일쑤입니다. 이렇듯 일관성 없이 변동이 심한 신앙생활을 하기가 쉽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이런 신앙생활에 젖어 있는 분이 있습니까? 기분에 따라, 여건에 따라 신앙생활 하는 분들은 오늘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은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마음가짐과 태도를 가지고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이런 신앙태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이것은 신앙생활 하는 데에만 적용되는 법칙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변덕이 심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조령모개」(朝令暮改) 식으로 아침저녁으로 말을 바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사람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습니까? 인간관계가 다 파괴되고 맙니다. 변덕이 심해 믿을 수가 없으면 아무도 자기 곁에 오지 않습니다. 사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면 원칙과 목적이 분명하고, 보기에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믿어줄 만할 때 그 사업이 잘되는 것이지, 기분대로 사업한다면 성공하지 못합니다. 식사를 하러 갈 때도 저절로 발걸음이 옮겨지는 식당이 있습니다. 수많은 식당들이 즐비한 길거리를 지나면서 하필이면 그 식당을 자주 애용합니까? '그 식당에 가면 내 입에 맞는 음식이 있다, 잘 해 준다.'라는 나름대로의 신뢰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 식당이 일관성(一貫性) 있게 고객을 대접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서도 이런 일관성을 요구하는데, 하물며 '구원을 받겠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매우 고상한 목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음가짐과 태도에 있어서 일관성이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칭찬을 듣겠습니까? 그러므로 일관성이란 매우 중요합니다. 

일관성(一貫性)이란 변덕스러운 기분이나 갑작스러운 변화, 일시적인 유행과는 거리가 먼 꾸준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내 기분이나 세상 돌아가는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어떤 변화가 일어나도 나와는 무관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내 마음자세는 꾸준해야 합니다. 항상 동일해야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곁길로 가게 하는 세상에서 모든 유혹에 맞서 낮이고 밤이고 제자리에 있게 만드는 것, 이것이 일관성입니다. 오늘은 물론이고, 내일도 어제처럼 나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는 것, 이것이 일관성입니다. 그저께 하나님 앞에서 한 행동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계속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피곤해 하고 짜증을 느끼는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태도, 이것이 일관성입니다. 신앙생활은 이 같은 태도를 견지할 때 은혜를 받을 수 있고 자신이 복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항상 일관성을 가지고 대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찾습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필요할 때에도 항상 그분은 그 자리에 계시고, 내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그분을 찾으면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일관성입니다. 자신이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우리를 향해 그와 같은 일관성을 가지고 자신을 찾기를 원하시고, 또 자신을 경배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에게 이와 같은 일관성이 있습니까? 우리가 시종일관 하나님 앞에 성실하려면 몇 가지 실천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부지런해야 합니다.(11절, 12절 중반 절) 본문 11절과 12절 중반 절에서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이 부지런해야만 일관되게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열심을 가지고 부지런히 소망에 대한 확신을 끝까지 간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서든지 도중에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소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에 돌아올 때까지 하나님의 지혜의 장성한 분량에 돌아가기까지 우리는 이 복음의 행진과 믿음의 행진을 계속해야 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1절에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부지런함이 없이는 우리의 행동을 시종일관(始終一貫) 동일하게 유지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100번을 결심해도 게으른 사람은 그 결심대로 실천하지 못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많은 분들, 특별히 젊은이들을 보면 게으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게으름은 망국의 병입니다. 예수 믿고 나면 그 게으름도 뿌리가 뽑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내 몸에 익었던 게으른 습관이 나중에는 파괴되어 버립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을 일컬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혼은 새로워졌는데 몸은 여전히 게으르다면 그 사람은 완전히 변화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을 이렇게 섬기겠다, 나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이렇게 매일 하겠다.'고 100번 일기를 쓰고 결심을 해도 게을러서 실천하지 못하면 그 다음부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게으른 사람을 미워하십니다. 개미보다 못한 사람으로 취급하십니다. 게으른 것을 팔자로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일사분란하게 신앙생활 하려면 부지런해야 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얼마나 바빠야 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경쟁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뒤떨어지면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보다 시간을 더 많이 사용해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안 하므로 그만큼 시간이 남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그만큼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떨어지지 않기 위해 그들과 똑같이 열심히 하면서 교회에 와서 성경 공부, 제자훈련, 각종 봉사, 예배에도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따라서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제대로 신앙생활 하려면, 그리고 사회 사람들에게 뒤지지 않으려면 두 세 배로 부지런해야 합니다. 
 
둘째, 인내해야 합니다.  본문 12절에서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인내할 때에 일관성(一貫性)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의 내용은 특별히 아브라함을 중심에 두고 하는 말씀인데, 15절을 보면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1장 4절에도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기 원합니까? 일관성(一貫性) 있는 신앙생활을 해서 구원받고 하나님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정말 오래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도응답이 없어도 오래 참을 줄 알아야 됩니다. 예수를 잘 믿는데도 좋지 못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럴 지라도 오래 참고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인내심이 없이는 신앙생활을 견고하게 할 수 없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을 보면 성격이 급해서 도무지 참지를 못합니다. 요즘에는 조금만 아파도 약 한 알만 먹으면 고통이 가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참는 연습을 도무지 할 틈이 없습니다. 자연히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영향을 주어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생기면 참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기도생활 하다가도 마음에 안 들면 중단해 버리고, 성경을 읽다가도 별 다른 것이 없으면 참지 못하고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은 인내(忍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내(忍耐)하지 않으면, 끝까지 견디지 못하면 환란이나 고난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고난 뒤에 숨겨놓으신 축복들을 다 놓쳐 버리고 맙니다. 끝까지 참는 자가 승리합니다. 끝까지 참으면서 걸어가는 자가 시종일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와 같은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게으르지 않고 인내하면서 시종일관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자에게 우리 하나님은 축복해 주십니다. 그래서 사 26:3에서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저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 앞에 시종일관 견고한 자세로 신앙생활을 바로 하면 하나님께서 하늘의 평강을 부어주시고, 또 부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축복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축복을 받아 하나님 앞에 칭찬 받는 아름다운 주의 자녀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15절) 
신앙 성숙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에 따른 훈련이 필요합니다. 본서의 저자는 5:14절 하반 절에서 이를 “연단”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연단을 받는다”라는 말의 헬라어 단어는 「김나조우」(gymnaz)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신체나 정신을 집중적으로 훈련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에서 파생된 독일어로 우리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김나지움」(Gymnasium)이라는 말인데, 독일에서 「김나지움」라고 할 때 “체력을 단련하는 체육관이라”는 뜻도 있지만 “대학에 진학하기 위하여 공부하는 모든 과정”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훈련을 해야 합니까? 그것은 습관적으로 행동이 나타나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몸에 배이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론적으로 아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습관적으로 행동이 나타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국이 낳은 위대한 청교도 학자인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은 우리가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아는 장성한 신자가 되기 위한 방법으로 "끊임없이 그리고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명상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들어야 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읽으면 저절로 이해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저절로 이해된다면 구약시대에는 말씀을 가르치는 제사장이나 서기관, 선지자, 신약시대에는 목사와 교사가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능력(faculty)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해한 말씀을 습관적으로 행할 수 있도록 계속 반복하여 훈련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일에 지적인 훈련을 받는 일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이 역사하기만 하면 저절로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탄적인 발상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멜기세덱에 대하여 더 설명하고 싶지만 기본적인 이해력이 없기 때문에 더 설명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교리에 대하여 지적으로 자세히 검토하고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배운 교리 내용을 생활 속에 습관적으로 나타나도록 하기 위하여 철저하게 훈련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적용하는 훈련, 기도하는 훈련, 다른 사람을 섬기는 훈련,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훈련, 지역사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적 수준은 어떠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섬기고 있다고 하면서 진리와 거짓, 선과 악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면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교회에 다닌 연륜은 오래 되었어도 말씀의 초보적인 지식도 모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까지 말씀의 맛을 경험해 보지 않은 상태는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을 사용하여 배우고, 그 말씀이 몸에 배이도록 잘 훈련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믿음의 진보를 나타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인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절대로 믿음의 진보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를 모르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맛을 경험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할 때 말씀의 맛을 알고, 감동을 느끼며, 그 말씀을 생활에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의 진보를 보이기 위하여 지각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훈련을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몸에 배이도록 훈련하시기 바랍니다. 이 일을 통하여 믿음생활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의 행진은 나 혼자 걸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홀로 개척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그 길을 가셨습니다. 그래서 12장에는 믿음의 선진들, 허다한 구름처럼 둘러 싸있는 믿음의 선배들을 그렇게 소개하면서 바라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전고투(惡戰苦鬪) 끝에, 험한 인생의 항로 끝에 항구에 도달한 배처럼 믿음의 승리를 한 사람을 바라보라고 본문은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개척자가 아닙니다. 이미 주님이 가신 길을 뒤 따라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순교자들과 믿음의 선배들이 뒤따라갔던 길들을 겸손히 우리가 뒤따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히브리서의 저자가 권면처럼 성숙의 자리로 나아가되, 어린 아이의 신앙을 벗어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며, 끝까지 진실하게 믿음으로 살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궁극적인 승리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