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벧전 2:11-12) 

세월이 유수와도 같다는 말이 실감나는 현실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2003년도가 엊그제 시작된 것 같은데 벌써 한해를 마감해야 하는 순간입니다. 국내외적으로도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해였습니다. 무엇인가 안정이 되지 않은 불안한 정국 속에서도 우리는 한 해를 종결짓게 됩니다. 
그런데 더욱 더 안타까운 사실은 우리의 신앙도 남다른 어떤 고상한 모습보다는 또 한번 후회해야 하는 변화 받지 못한 모습으로 한해의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시점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미움과 증오, 비난과 조롱의 마음이 사랑의 마음을 삼키는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자존심 때문에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없는 초라한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찬양하는 것 같은데 내면에 참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도생활을 하는 것 같은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고 하면서도 통제되지 아니하는 내 감정, 내 의지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의 열매는 없으면서도 우리의 입은 헛된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액션이 없이 말만 풍성한 껍데기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진단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말만 요란한 삶을 살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하나님 앞에 계산되는 한해의 결산이 어떤 성도에게는 많은 이익을 남겨 주님께 칭찬을 들을만한 착한 성도들도 있겠지만 우리 대부분의 신앙의 모습은 결산할 내용 없이 헛된 것을 추구하며 분주하게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분명하게 명심해야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우리는 나그네 인생이라는 것입니다.(11절 상)
본문 11절 상반 절에서 “...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나그네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그네 인생임을 망각한 체 이 세상 것만 탐닉(耽溺)하며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잠깐 머물다가 본향(천국)을 찾아 갈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런 신분의 사람을 가리켜 나그네 인생이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나그네와 행인은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나그네'는 타향에 거주하는 자를 의미하고, '행인'은 잠깐 지나가는 길손을 의미합니다. 나그네와 행인이라는 말에는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고(빌3:20), 이 땅은 우리의 영원한 거주지가 아님을 가리켜 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12절 하반 절)
본문 12절 하반 절에서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아름다운 결산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힘써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결산을 하면서, 마침표를 찍으면서 꼭 기억해야 할 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합니다.(11절)
본문 11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려면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합니다. 
육체를 제어하지 아니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없습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면서, 자기가 말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생각을 다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가 나그네와 행인 같은 그들을 호칭하면서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호칭하고 있는데, 이 말은 '사랑을 받는 자들아'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곧 흩어진 나그네 같은 성도들이 사도 베드로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말이요,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은 우리에게 사랑할 만한 어떤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들은 성도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나그네가 쉽게 빠질 수 있는 것은 타 지역에 있기 때문에 함부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때론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 살기보다는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살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들은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 '육체'는 단순한 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악한 본성을 가리킵니다. '육체의 정욕'이란 예수 믿기 전에 행하던 악한 행동들을 의미합니다. 타락한 옛성품을 말합니다. 어두움에 속한 욕망들을 의미합니다(벧전2:9).
이 육체의 정욕은 강렬하고 충동적이기 때문에 영혼을 거스리게 됩니다. 육체의 정욕에 빠지면 이 세상의 것이 삶의 전부가 되어버립니다. 육체의 정욕은 우리로 방종하게 하여 십자가의 능력을 상실시켜버리고 맙니다. 육체의 정욕은 우리로 하여금 물질적 행복에 목적을 두게 합니다. 쾌락을 인생의 최고가치로 여기게 합니다. 
이런 악습이 성도들에게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그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제어하라'는 말속에는 이미 육체의 정욕을 제어할 힘이 우리에게 있음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다고 핑계치 말아야 합니다. 얼마든지 이길 수 있고, 물리칠 수 있는데도 우리 스스로 그것을 택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情)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거듭난 성도는, 믿음으로 성숙한 성도는 이미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자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정과 욕심에 끌려 다니는 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미 그 부분에 대해서는 완전히 사생결단을 내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아직도 육체의 정욕에 끌려 다니시는 분은 없습니까? 빨리 그런 삶에서 돌아서시기를 바랍니다. 내 욕심을 채우고, 내 정욕대로 사는 것은 절대로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신분을 날마다 확인하면서 육체의 정욕을 이기고 영혼의 유익만을 위해서만 살아야 합니다. 영혼의 유익은 기도하는 생활입니다. 말씀 속에 살며 순종하는 삶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공급하는 삶입니다.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그들로 참 생명을 얻게 하는 삶입니다.
 
2. 선한 행실을 가져야 합니다.(12절)
본문 12절에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선한 행실을 가져야 합니다. 
선한 행실을 갖지 아니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사람마다 각자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여러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도만이 가져야 되는 삶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욕심을 채우는 삶이 아닙니다. 내 자존심을 세우는 삶이 아닙니다. 조그마한 이익에 눈이 머는 삶이 아닙니다. 남을 비방하는 삶도 아닙니다.

우리는 선한 행실을 가져야 합니다. 순간순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일지라도 우리는 선한 행실로 대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도 성도들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라고 했습니다. 성도의 삶은 이미 이방인 즉 불신자들에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이미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 세상은 성도들만이 사는 독무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감출 수 없는 성도의 삶이기에 우리는 착한 행실을 유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천국을 소망하는 성도들은 매일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불신자들은 성도를 곱게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들은 틈만 보이면 성도들을 비방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악하다고 비방합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많은 비방들이 있었습니다. 성도들끼리 형제자매라고 하니까 성적으로 문란한 집단이라고 비방했습니다. 성찬식 때 주님의 몸과 피를 마신다고 하니까 식인종이라고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을 만왕의 왕으로 섬기니까 로마황제를 거역하는 국가의 반역자로 몰아세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성도들의 잘못된 행실 때문에 지금 교회가 얼마나 비방거리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진실하지 못한 성도들, 차라리 내가 죄인이라고 고백했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셨을 텐데 너무나 불신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저들에게 보여지는 우리의 변함없는 선한 행실은 저들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하는 촉매제가 됩니다. '너희 선한 일을 보고'라는 말은 불신자들이 계속해서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불신자들에게 보여 진 우리의 행실이 저들에게 인정받는다면 그 성도는 참으로 진실한 성도요, 행복한 성도입니다. 성도들의 선한 행실을 보는 불신자들이 그들이 예수 믿게 되는 날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이 선한 행실을 유지해야 할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성도의 삶은 아름다워야 합니다. 내 선한 삶을 통해 누군가가 예수 앞에 나올 수만 있다면 얼마나 마음이 기쁘겠습니까? 이와 같은 능력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나그네와 행인 같은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내 욕심만 채우며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든 내 기분대로 살아서도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길에는 불신자들이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가 바르게 사느냐, 바르게 살지 못하느냐 하는 것도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주변의 불신자와 직결된 문제라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나그네 인생길을 가는 성도들은 때론 외롭고, 고독하고, 피곤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나그네 인생으로 이 땅에 남아야 합니다. 본향(천국)을 그리며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고 우리의 선한 행실을 유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