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의 시작과 끝”(계 2:18-19)
   
우리 나라의 속담에 "시작이 절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 어른들의 이 말은 "시작의 중요성"을 강조해 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양 속담에도 이와 유사한 격언이 있습니다."잘 시작하는 것은 절반을 한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한 그래서 고대 철학자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시작은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라고 했으며, 독일의 시인 괴테는 "옷의 첫 단추를 잘못 잠그면 모두 잘못 잠그게 된다"고 지적하면서 시작의 중요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만사(世上萬事)는 출발이 중요합니다. 스타트가 좋아야 합니다. 

그러나 시작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끝맺음"입니다. 그래서 고사성어 가운데  "유종지미"(有終之美)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한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좋게 마무리 하자”라는 마음으로 이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끝맺음에 대한 생각은 우리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독일의 격언에도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죤 헤리우드]는 "훌륭히 끝나는 것은 모두 좋은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시작도 중요하지만 [끝맺음],[나중]도 중요합니다 .공부도 초등학교 때 성적이 일등이라 해도 공부의 종점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교 입학 때 성적이 나쁘면 아무리 과거에 성적이 좋았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1학년 성적보다는 졸업반 때 성적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등상을 산술 하는 점수를 보면 전체 성적이 동점이면 4학년 때 좋은 성적을 얻은 사람이 상을 받게 됩니다. 1년을 놓고 볼 때 1월 달에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마지막 달인 12월에 성적이 떨어지면 의미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청소년 시절에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어도 마지막 노년기에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지 못하면 과거에 잘한 것은 무위(無爲)로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를 봅시다. 3년 동안 특별한 사명을 받고 주님을 위해서 충성했으나 마지막에 신앙생활에서 벗어나게 되니 그의 삶이 얼마나 불행해 지고 말았습니까?

그런데 현재 저와 여러분의 신앙생활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말에 [작심삼일(作心三日)]이 있듯이 우리가 신년 벽두(新年 劈頭)에 계획하고 결심한 마음대로 [시종일관(始終一貫)]한 마음을 가지고 한해를 결산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용두사미](龍頭蛇尾)격으로 한해를 희미하게 결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론 시종일관한 모습으로 한해를 결산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시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향하여 엡 6:24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고 축복하시는 동시에 권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금년도 1월을 맞이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금년을 결산해야 시점을 맞이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반성하며 새롭게 결심하고 의미에서 [신앙생활의 처음과 나중]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시작도 미미하고 끝도 미비한 신앙생활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시작도 미미하고 나중도 미미한 신앙생활의 모습에 언급하고 있는데, 소아시아의 사데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계 3:1-2에서 사데 교회를 향하여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네 하나님 앞에서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라"고 아주 무섭게 책망하고 있습니다. 
사데 교회의 성도들의 신앙생활은 시작이나 끝이 모두가 희미했습니다. 그들은 [살았다]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그 신앙이 죽은 것 같은 신앙생활을 해 온 것입니다. 그들은 신앙생활은 어느 한 부분에서도, 어느 한 가지도 온전한 곳이 없었습니다. 시작도 그러했고, 끝도 그러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 중에도 이런 신앙생활을 해 온 분들이 없는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시작 자체가 무성의(無誠意)했다면 끝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은 이런 신앙생활을 온전히 벗어 버려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성도들에게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고 계 2:25,2:3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시작도 끝도 없이 아무런 각성(覺性)이나 자각(自覺)이나 결심이 없이 신앙생활을 해 가는 서도들에게도 주시는 말씀으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도 스스로 일깨워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해야 하겠고,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받고 들었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해서 이제 얼마 남지 며칠이라도 믿음으로 끝맺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계 3:15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고 아주 무섭게 책망하고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의 신앙생활은 처음과 나중이 모두 이렇게 뜨뜻미지근하여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했으니, 시작도 그랬고, 끝도 그랬습니다. 신앙의 성장이라고는 한 가지도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라오디게아 성도들은 한가지의 칭찬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어떠합니까? 사데와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와 와 같은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분들은 없습니까? 우리 모두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회개하라"(계 3:19),"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6),"내가 문 밖에서 두르리노니 문을 열라"(계 3:20)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게, 뜨뜻미지근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내 입에서 토하여 내치리라"고 책망하시면서도 "열심을 내라","회개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주님께서 이 말씀과 함께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두들이고 계시고 있습니다. 회개하라는 것이며 열심을 내라는 것입니다. 문을 더 활짝 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해서 이제 얼마 남지 며칠만이라도 뜨겁게 신앙생활을 해서 2004년의 신앙생활의 밑천이 되기를 바랍니다.

2.시작은 믿음으로 잘 했으나 끝이 부족한 신앙생활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시작은 믿음으로 잘 했으나 끝이 부족한 신앙생활의 모습에 언급하고 있는데, 소아시아의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계 2:2-4에서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안다"고 칭찬하시면서도 4절에서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은 시작은 좋았으나 끝은 시작만 못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끝이 시작만 못했다"라는 것은 그들이 처음 사랑을 버린 데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믿음으로 서로간 사랑을 잘 실천하고 사랑으로 헌신하고 사랑으로 화합하고, 사랑으로 충성하였으나 나중과 끝에 가서는 "믿음으로 역사 하는 사랑"이 점점 식어지고 희미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뜨겁게 서로 사랑하던 처음 사랑을 버렸습니다. 

성경에 보니 이러한 유형에 속하는 사람은 사울이 그러했고,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는 믿음이 있었으나(히11:29) 나중에는 그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히 319,4:2,유 5) 훌륭한 조상 모세의 손자는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끝을 맺었습니다(삿 1830) 또한 갈라디아 교회는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게 되었습니다.(갈3:3) 

이와 같은 사람들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사람들입니다. 처음에는 서로 사랑했으나 나중에는 서로 미워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마 2412에서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경고하시고 있는 것처럼 이러한 현상은 마지막 때의 징조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느 때보다 서로 사랑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특히 주님을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처럼(계 2:5) 우리들에게 이러한 권면을 하고 있음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디서 떨어지고 잘못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의 행위]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1월 달보다 12월에 주님에 대한 사랑이 더 뜨거워져야 할 것입니다. 나중에 사랑이 식어지게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금년도를 시작할 때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을 뜨겁게 가졌을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해야겠다고 결심했을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성수 주일해야겠다, 주일 오후예배도 참석해야겠다, 헌신 예배를 드리는 날만이라도 이 몸 바쳐 예배드려야겠다, 수요 예배도 참석해야겠다, 새벽기도, 금요 심야 기도회에도 참석해야겠다, 성경도 부지런히 일고 성경 공부도 부지런히 해야겠다, 구역예배도 열심히 참석해야겠다, 감사 생활도 힘껏 해야겠다, 십일조 봉헌 생활도 성실히 해야겠다,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하도록 살아야겠다, 금년도는 더욱 믿음으로 살아가겠다."고 아주 단단히 결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의 신앙 생활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금년 한해를 시작할  때 가졌던 "처음 결심, 처음 행위"가 있습니까? 이제라도 이러한 결심, 이러한 행위를 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교회적으로 1월보다 더 좋고, 금년보다는 내년이 더 좋기를 바랍니다. 

3.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은 신앙생활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처음보다 나중이 좋은 신앙생활의 모습에 언급하고 있는데, 소아시아의 두아디라 교회의 성도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또한 이러한 유형에 속하는 사람은 룻이 있습니다.
룻은 나오미의 둘째 자부였습니다. 그녀는 본래 모압 여인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이었으나 시어머니인 나오미의 신앙을 본받았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룻의 믿음에 대하여 룻 3:10에서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라고 말씀하면서 룻의 신앙을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살후 1:3에서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라고 그들의 신앙에 대하여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두아디아의 교회의 성도들은 참으로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환경 가운데 인내하였던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계 2:19에서 두아디라 교회를 향하여 "내가 내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보다 좋도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무엇들이 처음보다 더 좋아졌다는 말씀입니까? 

① 그들의 사업이 처음보다 나중 행위가 더 좋았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으뜸 되는 사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전도입니다. 전도 사업이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아졌다는 것입니다. 
② 그들의 사랑이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았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과는 반대 현상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은 처음 사랑을 버렸지만,두아디라 교회의 성도들은 처음 사랑보다 나중 사랑의 행위가 더 컸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교회의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갈수록 사랑이 풍성한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③ 믿음이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믿음이 성장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1월의 신앙보다 12월의 신앙이 더 나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금년의 신앙보다 내년의 신앙이 더 좋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④ 그들의 섬김 곧 봉사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았다는 것입니다.
안내 위원, 헌금 위원, 주교 교사, 찬양대원, 봉사 위원 등이 1월보다 12월에 더 봉사를 잘하고, 금년보다 내년이 더 좋아야 하겠습니다. 
⑤ 그들의 인내가 처음보다 더 좋았다는 것입니다.
끝부분에 필요한 것이 인내심입니다. 인내심이 부족하면 우리의 좋은 결심이 1년도 못 가서 무너지고 맙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전 7:8에서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낫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을 보니 하나님의 약속을 신실하게 믿고 인내하지 못한 가운데 불평, 불만을 토로한 백성들은 아무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밝혀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수아 21:43-45 보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열조에게 맹세 하사 주마 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하였으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사방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셨으므로 그 모든 대적이 그들을 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대적을 그들의 손에 붙이셨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일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의 성도들처럼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은 성도들을 향하여 계 2:23에서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우리들의 신앙 생활을 갚아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려고 몸부림치고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아지는 성도들을 칭찬하십니다. 또한 주님은 2:26 하반 절에서 그들을 향하여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아지는 성도들은 결코 주님께서 잊지 않으시고 각 사람의 수고 한대로 갚아 주실 줄 믿고 결코 조금이라도 신앙생활에 흔들림이 없기를 바랍니다. 

4.시작도 좋고 끝도 좋은 신앙생활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시작도 좋고 나중도 좋은 신앙생활의 모습에 언급하고 있는데, 소아시아의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계 3:8에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하여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고 칭찬하셨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같이 칭찬만 받고 책망은 한마디도 받지 않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신앙생활의 시작도 좋고 끝도 좋았던 것입니다. 시종일관(始終一貫)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처음의 아름다움이 나중까지 끝까지 지속되는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엡 6:24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변함없이 주님을 뜨겁게 사랑한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갈렙은 45년동안 건강도 불변했거니와(수 1410),민 14:6-8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신앙(수 14:12)과 여호와를 온전히 순종하는 신앙(민 14:24)이 불변하여(수 14:14) 처음과 나중이 똑같은 신앙생활을 소유하였습니다. 

욥의 신앙생활은 시종일관(始終一貫)하였습니다.  욥은 까닭 없이 고통을 당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원망하지 않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중단하지 아니하고 [시종일관] 하나님만을 경외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축복해 주셨는데 처음보다 나중에 더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욥 4212은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 그가 양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들이 시종일관(始終一貫)을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능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랬던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처럼 물질적으로 부유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잘 지켜 실천해 갔고, 박해와 환난 속에서도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고 시종일관하게 신앙생활을 잘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두아디라 교회의 신앙과 빌라델비아 교회를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은 신앙생활의 결심이 1년도 못 가서 좌절되고 무너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 3:3에서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3:10에서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주리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네 가지 신앙생활의 유형에 대하여 말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어느 신앙의 유형에 속해 있습니까? ① 시작도 미미하고 끝도 미미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까? ② 시작은 믿음으로 잘 시작하였으나 끝이 부족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까? ③ 아니면 시작은 미미했었지만 이제 끝은 좋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④ 아니면 시작도 좋고 끝도 좋은 시종일관(始終一貫)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물론 요즘처럼 영적으로 유혹 받고 위협받고 있는 이때에 언제나 같은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최소한 처음보다도 나중이 더 나아지는 신앙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정상적인 성도님이라면 [과정은 무시한 채 결과에만 치중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의 정도가 나중보다 조금 못하고,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결코 그것으로 인하여 [의기소침](意氣銷沈)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금년 한 해 동안 정말 믿음으로 살려고 몸부림치고 [시종일관(始終一貫)]한 모습으로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수고하였다면 그 성도님의 금년 한해의 신앙의 결산은 적자가 아니라 흑자입니다. 물론 요즘에는 [일의 과정은 무시한 채 일의 결과에만 치중하고 그것을 가지고 판정하는 세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은 일의 결과에만 치중하지 말고, 일의 과정도 중요하게 생각하여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수고하면 언젠가는 분명하고 확실한 수확물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할 때에 내년에 결산할 때에는 보다 성숙하고 성장한 모습 가운데 영적 결산을 할 줄 믿습니다. 정말 금년 한해를 끝맺음함에 있어서 시작보다 나중이 더 좋은 신앙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는 연말(年末)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욥 8:7에서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 하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저와 여러분의 삶의 질과 높이 처음보다 나중이, 금년보다 내년이 더 창대 하는 축복과 은총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