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닫게 하시는 은혜”(시 73:20-28) 

본문의 말씀은 다윗 왕 시대 때에 성전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찬송하는 직무를 맡았던 성가대의 수석 악사였던 아삽의 시입니다.(대상 25:1) 아삽은 참으로 경건한 시인으로서 “하나님께서 정결한 자에게 선과 복을 행하신다”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1절) 
그런데 이러한 신실한 믿음을 갖고 살았던 아삽이 흔들렸습니다. 그의 믿음에 큰 회의가 생겼습니다. 세상을 보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악인들이 오히려 잘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그러한 악인이 죽을 때에도 고통 없이 죽는 것이 아니겠습니까?”(4-12절) 
그와는 반대로 자기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경건하고 거룩하고 살면서 정결함을 지키며 살았는데 매일 고통을 당하니 이것이 어떻게 된 것입니까?(13-14절). 그러기에 아삽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자문자답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 건지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하나님은 불의한 자의 하나님이요 의로운 자를 돌보지 않는 분이 아닌지요?” 시인은 너무나 실망하여 하나님을 버릴 정도가 되었습니다. 실족할 빠졌습니다. (2-3절) 한마디로 아삽은 이 땅에 번창하고 형통함을 누리는 모순된 현실로 인하여 심한 갈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1-17절) 

그러던 중 시인은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악인(惡人)들이 잘 되고 형통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미끄러운 곳 꼭대기에 있어 결국 파멸(破滅)로 곤두박질 칠 것은 시간문제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18-19절). 그리고 시인은 또 깨닫기를 그들의 영화가 한낱 꿈에 불과해 순식간에 파멸에 이를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20절). 반면에 주님을 섬기며 의롭게 산 자기와 같은 사람은 하나님이 꼭 잡아 주시며 훗날 영광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23-24절). 
아삽은 악인이 아무리 이 땅에서 잘 나간도 해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잡아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악인들이 미끄러움의 정상에서 추락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사는 의인들을 꼭 붙잡아 주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론 아삽도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받기 전에는 마음이 몹시 혼란하고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후에 전과 달리 마음 편히 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손을 잡아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23절). 깨달음의 은혜를 받은 후에 아삽은 소망을 갖고 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악인들은 멸망으로 가지만 자기는 영광으로 갈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24절). 그리고 깨달음의 은혜를 받은 아삽은 이제 하나님을 전파하며 살게 되었습니다(28절). 같은 세상을 살고, 같은 인생을 살지만, 이제는 세상이 다르고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아삽처럼 깨달음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깨달음의 은혜를 받으면 아무리 힘든 상황에 있을지라도 천국과 같이 생활할 수 있습니다. 
(예화) 인도의 선교사 선다싱은 네팔에서 선교하다가 감옥에 갇혔는데, 살인강도들과 한 감방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는 그 흉악범들에게 전도를 했다. 예수 믿고 주님 만나면 몸은 비록 감옥에 있지만 마음은 천국이라고 복음을 전했더니 그들이 예수를 믿고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간수가감방 안을 들여다보니 살인강도들이 기쁨에 넘쳐 찬송하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간수가 그것을 보고 하는 말이 "천국이 따로 없구나. 여기가 바로 천국이구나"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죄수들이 깨달음을 얻은 후에는 같은 감옥이지만 그 감옥이 천국이 된 것입니다. 깨달으면 이렇듯 세상이 바뀌고 인생이 바뀝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아삽과 같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깨달음]이란 지각, 이해력, 통찰력 등과 같은 마음의 작용을 말합니다. 우리말 사전에 "깨닫다"라는 말을 "심령이 진리에 통한다. 깨치어 환하게 알아내다"라는 뜻으로도 풀이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경에서 교훈하시는 "깨달음"에 가장 가깝습니다.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받지 못하면 아무리 존귀하고 높은 자리에 사람이라도 멸망 받을 짐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짐승과 같이 본능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 49:12에는 존귀한 사람일지라도 깨달음이 없으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발람]에게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발람은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해 달라는 청탁을 받고 가는 중에 나귀는 앞을 가로막고 여호와의 사자를 보았지만 발람을 이를 보지도 못하고 깨닫지 못함으로 인하여 나귀의 책망을 받았습니다.(민 22:22, 31)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도 할지라도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받지 못하면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짐승과 같은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짐승도 깨닫고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답게 살고, 성도답게 살려면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깨달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엡 1:17-18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깨닫게 하시는 은혜가 바로 영적 통찰력이기 때문입니다. 깨닫게 하시는 통찰력을 갖지 못하면 결코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고, 우리의 삶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욥은 34:32에서 "나의 깨닫지 못한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무슨 일을 행하였으면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이 없이는 결코 인간은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가끔씩 하던 일을 멈추고 빛 앞에 자신의 언행심사를 반성하는 성찰의 작업이 절대 필요합니다. 캄캄하고 어두운 밤에 전깃불이 비쳐 오면 사물을 분명하게 볼 수 있듯이 성령 하나님의 밝은 빛이 우리의 심령 속에 비쳐오면 죄를 깨닫게 되고, 심령의 상태를 깨닫게 되고, 진리의 말씀인 성경말씀이 깨달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령의 비쳐주심을 성령의 조명(照明)을 받아야 합니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영적 지각과 센스가 다 말살되어 버렸습니다. 죄가 우리의 총명을 어둡게 해버렸고 마음을 둔하게 만들어 버려서 영적인 것에 관하여는 보지도 깨닫지도 못합니다. 육신의 눈은 멀쩡해서 잘 보이지만 영안은 감겨있고 마음은 목석처럼 감각이 없습니다. 보고 깨달으려면 먼저 죽음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중생함으로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영안이 뜨이게 됩니다. 그래야 밝히 볼 수 있습니다. 밝히 보지 못하면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보려면 먼저 눈을 떠야 합니다.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야 하고 몽롱한 꿈속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깨어나야 모든 것이 제대로 보입니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영의 세계가 보이고 말씀에 대한 깨우침과 믿음이 생깁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처음 성령님이 임하셨을 때 갑자기 세상이 달라 보이고 모든 것이 경이롭고 신비스럽게 느껴진 경험들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영적 지각과 감관이 트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시에 소생된 것은 아닙니다. 온 몸의 감관이 맑게 깨어나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센스와 지각을 길러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하면 말씀 안에 거하여야 하고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말씀은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고 총명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지식이 월등해 지는 겁니다. 또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할 때 성령님께서 지금까지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하시고 깨달을 수 없는 것을 깨우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깨달음과 통찰력 그리고 지각이나 이해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주께서 마음 문을 열어 주실 때 깨달음이 오고 진리를 보게 됩니다. 예를 들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빌립보 성의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주실 때에 그들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사야 시대의 사람들이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듣지 못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 듣는 귀를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신 29:4, 사 6:9.10) 그러면 우리가 깨닫지 못한 사실들을 하나님께 핑계를 대고 탓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깨닫지 못한 제자들을 늘 꾸중하셨습니다. 우리가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것은 우리의 강퍅함과 둔한 마음 때문에 하나님 듣기를 거부하고 순종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대로 놓아두신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아삽처럼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삽은 하나님의 은혜로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우리가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받으면 어떤 것을 깨달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함깨 생각해 봅시다. 

1. 은혜를 받으면 아삽처럼 자기 자신의 우매 무지함을 깨닫게 됩니다.(20-22절) 
22절에 보니 "내가 이같이 우매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삽이 성령의 조명에 의해서 자신이 우매무지한 짐승과 같은 사람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가 성령의 조명을 받기 전에는 자기 자신이 엄청나게 지혜롭고, 자기 자신이 가장 현명한 사람인 줄로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악인이 잘 되는 것에 대해서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악인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아삽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의심을 품고 하나님이 일을 잘못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는 “정말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는가?”하는 의심까지 품게 되었던 것입니다. 
본문 2절에서 "나는 거의 실족할 뻔 하였다"라고 고백하고 있을 정도로 아삽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의심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떠나갈 뻔 했습니다. 아삽은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신다고 하면 어찌하여 악인이 잘되고 형통하는데도 벌을 내리시지 않고 계시는가 하는 의심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의심하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조차 의심하는 그런 우매무지한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비밀을 우리에게 계시하시지 않고 숨기시는 경우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311에 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시종으로 사람으로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신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짧은 생각과 좁은 소견을 가지고 어찌 하나님의 섭리의 오묘함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해하려는 것 자체가 엄청난 교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은 참으로 우매무지한 짓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서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소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알려고 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죽을 날을 알기 원해서 용한 점쟁이나 예언한다는 사람을 찾아가기도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남편의 사업에 대해서, 자녀의 대학교의 진학에 대해서 미리 알아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죽을 날을 알지 못하게 감추어 두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해서 감추어 두셨습니다. 그러기에 미래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전 7:14 하반 절에서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전 7:14절 상반 절에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곤고한 날에는 이러한 일이 왜 왔는지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매무지한 사람들과 같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판단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자기의 죽을 날을 미리 안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가정도 팽개치고 사업도 팽개치고 아무런 의욕도 없이 그저 먹고 마시며 죽을 날만 기다릴 것이니 온 세상이 일시에 혼란의 도가니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장래의 일에 대해서 해아려 알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삽은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받은 후에 하나님의 섭리는 절대적으로 선하시고, 공의로우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순간에 아삽은 자신 자신의 어리석음, 무지함, 비천함이 얼마나 우매무지한 것이었는가를 알았습니다. 욥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라고 감격적인 고백을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불평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일에 대해서 너무 깊이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알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설사 우리가 안다고 할지라도 호기심을 그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쓸데없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하나님의 비밀을 캐내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리석고 우매한 짓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성경을 통하여 다 계시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그대로 믿고 아멘으로 순종하여 따라가면 우리는 구원을 받고 주님의 도우심을 받고 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은혜를 받으면 아삽처럼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행복임을 깨달게 됩니다.(23,24절) 
본문 2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삽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임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데도 어려움만 당하고, 믿음이 흔들리고 회의감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님을 떠나지 않고 믿음을 버리지 않고 꾸준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권능의 오른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23절) 주님의 교훈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를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영접해 주시는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는 참으로 이기적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계산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에게 이익이 안 되는 것들은 쉽게 버립니다. 눈앞에 생기는 것이 없으면 가차 없이 내팽개칩니다. 그동안 믿음생활해서 눈앞에 뚜렷한 이익이 보이지 않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떻게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신앙생활하고 계신지요? 시간 바치고 물질 바쳐가며 신앙생활했는데 뭐 수지맞는 게 없는 분들 있을 겁니다. 다른 일 같았으면 진작 때려치웠을 텐데!!, 그런데 이상하게 신앙생활은 포기하지 않고, 남들 볼 때 미련퉁이처럼, 곰처럼, 끈질기게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계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권능의 강한 오른 손으로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서 특별한 사랑의 손으로 붙잡아 주시는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을 아삽은 깨달은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깨달음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약속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여러분이 좋은 일을 당하거나 어려움을 당할 때, 건강하거나 병들었거나, 형통하거나 불통하거나,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항상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동행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사야 43:2에서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약속은 바로 나에게 주신 약속임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면서 아무리 큰 홍수와 큰 불과 같은 시련과 환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나의 하나님께서 그 시련과 환난에서 승리하게 해주시되 넉넉히 이길 수 있도록 도와 주신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우리는 종종 이러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시오. 우리가 그것을 [느낀다] 혹은 [못 느낀다] 하는 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변함없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에게 큰 은혜와 사랑을 베풀고 계신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권능의 오른 손으로 나를 붙잡고 계신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지금 공기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보통 때는 느끼지 못하지만 심호흡을 한다든지 손을 흔들어보면 공기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 곁에 계시지만 평소에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나님이 여러분 곁을 떠난 것도 아니고, 그것을 느낀다고 하나님이 여러분 곁에 계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느낌에 관계없이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하시면서 여러분을 붙들고 계시며 돕고 계십니다. 
우리가 여행을 할 때 동행자가 없이 혼자 여행을 하면 쓸쓸하고 외롭고 때로는 두렵기조차 하지만 동행자가 있으면 외롭지 않고 마음이 든든하고 담대해집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 곁에 계시기 때문에 담대하고 용기가 솟아나게 됩니다. 

(예화) 어떤 구두수선공이 자기 교회 목사님인 로버트슨 목사님의 사진을 항상 지갑에 끼워 넣고 다니고 있었습니다. 이따금 그 사진을 꺼내보는 것을 바라본 친구가 그 이유를 묻자 "내가 죄의 유혹을 받을 때 목사님의 사진을 끄집어내서 바라보기만 하면 그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생긴다네"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자기가 존경하는 교회의 목사님의 사진만 보아도 유혹에서 이처럼 큰 효과를 나타낼 수 있거든 하물며 거룩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을 확신할 때 얼마나 놀라운 힘이 생기겠습니까? 시 16:18에 보니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항상 내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의지하며 살아가면 죄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고,시련과 환난 가운데서도 요동치 않고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곁에 계셔서 무엇을 하시느냐 하면 "주께서 내 오른 손을 붙셨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부모님이 붙잡아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평안하고 모든 일이 잘 될 때는 하나님이 나를 붙잡아주시는 것을 원치 않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할 적에는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붙잡아주시기를 원합니다. 

또 아삽은 본문 24절을 통하여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교훈해주고 계십니다. 시편 119:50에 보니 "이 말씀이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면 힘과 용기가 생기고 위로와 소망이 넘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느낌이나 감정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감정은 설악산의 능선 위에 걸려있는 아름다운 저녁노을 같아서 쉽게 사라지고 변하는 덧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정을 의지하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날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의연한 자태를 잃지 않는 저 월악산처럼 변치 않고 우뚝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불변하신 하나님의 말씀만 굳게 의지하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항상 행복할 수만은 없습니다. 때로는 불행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불행한 사건이 다가오더라도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감정을 의지하지 말고 주님과 주의 말씀만 굳게 의지하고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24절 하반 절에서는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극복하고 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광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고후 4:17에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롬 8:18에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을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시련과 환난이 다가오더라도 믿음으로 말씀을 의지하여 승리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예화) 사사기를 보면 삼손이 어느 날 무섭고 사나운 사자의 공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지하고 믿음으로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듯이 찢어버렸습니다. 며칠 후에 보니까 벌 떼가 그 사자의 입에다 꿀을 슬어놓아서 그 꿀을 맛있게 따먹었습니다.( 삿 14:5-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에게 고난이라는 사자가 나타나서 우리를 괴롭힐 때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시련과 환난을 물리치고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단 꿀의 축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하면 "주여 이번에는 무슨 단 꿀을 주시렵니까?"하고 주님께 기도하면서 그 고난을 극복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아삽처럼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행복을 깨닫게 바랍니다. 
3. 은혜를 받으면 아삽처럼 주님밖에 사모할 자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25,26절) 
본문 25-2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삽은 주님 밖에 사모할 자가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아삽은 전날에 세상과 사람과 물질을 의지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헛되고 다 부질없고 허무한 것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물질은 정함이 없는 뜬구름과 같아서 언제 우리 곁에서 흘러서 떠나가 버릴지 모릅니다. 권력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시 146:3에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마리지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사 2:22에 보면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으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사람들은 너무도 이기적이고 계산적이어서 자기에게 유익이 있으면 사랑하고 의지하지만 이젠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면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나 자식을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변함이 없습니다. 한결같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요지부동입니다. 
아삽이 본문 26절에서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라고 말씀하는 것은 하나님은 요지부동하신 분으로서 절대적으로 변함이 없으심을 상징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영원한 분깃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은 결코 없어지는 않는 분복(分福), 영원한 기업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결같은 사랑으로 한결 같이 모습으로 우리에게 관심을 보여주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나를 잊어버려도 하나님은 결코 나를 잊어버리지 않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히 6:10) 그래서 시 27:10에 보니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 하시리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사모할 자는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을 아삽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아삽처럼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통하여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사모할 자이며, 하나님만이 우리의 반석이 되시며, 하나님만이 우리의 분깃이 되신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4. 은혜를 받으면 아삽처럼 하나님을 떠난 자는 음녀와 같이 멸망하지만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최고의 행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27,28절) 
아삽은 본문 27,28절을 통하여 "하나님을 떠난 자는 음녀같이 멸망한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우리에게 복이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음녀는 자기의 쾌락과 유익을 위해서 이 남자 저 남자의 품에 안기지만 결국은 병들어서 비참하게 죽게 됩니다. 마릴린 몬로가 미색을 자랑하여 이 남자 저 남자를 좋아 하다가 결국 무서운 병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가까이함이 최고의 행복임을 깨닫고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차를 보면 제일 앞에 기관차가 뒤에 붙어있는 객차들을 엔진의 힘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관차가 떨어져 나가면 그 자리에 정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객차와 같은 존재들인데 능력의 원천되신 하나님께 딱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시시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주셔서 시련과 환난을 극복하고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제단을 쌓고 부르짖어서 불로 응답을 받아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를 850명의 가짜 선지자들을 처형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우리들도 영적 인 갈멜산과 같은 이 세상에서 엘리야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롬 8:28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도록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도 바울은 롬 8:31 이하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당당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아무도 대적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주시면 마귀와 죄와 환난, 핍박이나 그 무엇이 우리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주셔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도록 여러분을 붙잡아주실 줄을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성숙한 성도라면 믿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아삽이 본문 28절 하반 절에서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여러분도 결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에 의해 경영된다는 것을 깨달은 아삽은 이제 이를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하겠노라는 선교적 자세를 보이고 있습니다.(대상 29:11) 이것이 바로 은혜를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은혜받은 자는 결코 그 은혜를 혼자만 간직하지 않습니다. 그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내가 만난 예수님”,“내가 만난 하나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해야 합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입술을 벌리지 못하는 사람은 벙어리 개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 56:10에서 “그 파숫군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라고 말씀하면서 마땅히 파수꾼의 사명을 다해야 할 사람들이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소경이요, 무지한 자요, 벙어리 개라고 단호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벙어리 개는 짓지를 못합니다.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증거 하지 못하는 것은 정말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운 처지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전파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 당할 때에도 당당하게 주님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 어려움에서 벗어나면, 형편이 나아지면 또는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자신 있게 하나님을 전파하겠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상황이 좋아지고 문제가 풀리고 나면 그때는 그때대로 하나님을 전파할 수 있고, 현재의 어려운 처지에서도 하나님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 누가 봐도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여러 사람 앞에서 벌떡 일어나서 "내가 지금 이러 저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굳게 믿고 하나님을 사랑 합니다" 이렇게 크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강력하게 하나님을 전파는 것이 되겠습니까? 

공산당원의 총살에 두 아들을 잃고 장례예배를 드리는 손양원 목사님께서 다음과 같이 답사를 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내 어찌 긴말의 답사를 드리리오. 내가 아들들의 순교를 접하고 느낀 몇 가지 은혜로운 감사의 조건을 이야기함으로써 답사를 대신할까 합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를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 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께 감사합니다. 
셋째, 2남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합니다. 
끝으로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얼마나 멋있는 모습입니까? 딤후 4:2에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만난 하나님을 증거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은혜를 받은 후에 깨달은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당당하고 확신 있게 증거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아삽은 깨달음의 은혜를 어디에서 받았습니까? 이러한 고백을 하게 되었던 동기에 무엇에 의한 것이었습니까? 
본문 16-17절의 말씀을 주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16-1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내가 어찌면 이을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의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아삽은 다른 데 가서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찾아가 물어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삽은 큰 번민과 회의 가운데서도 성소 찾아 나와 예배드리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살았던 것입니다. 아무리 마음이 흔들리고 의심이 가득 차도 성소는 찾아 나왔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성소에 들어갈 때 깨달음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회의와 번민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말고 교회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아삽이 그러다가 깨달음을 얻지 않았습니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변치 말고 교회예배에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생활 중에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CCM 작곡가요 피아니스트인 [신상우] 씨는 젊은 크리스챤들이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1991년 식구들과 카나다로 이민을 가서 얼마간 방탕한 생활을 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하루는 친구들과 밤새 술을 마시다 새벽에 친구네 집에 갔다고 합니다. 그 친구의 어머니는 믿음이 좋은 분이라, 자기들을 위해 늘 기도해주시던 분이었습니다. 신상우 청년은 그날 친구의 어머니를 따라 새벽기도회를 나갔습니다. 가서 한 귀퉁이에 앉았는데, 많은 눈물을 흘러내렸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어깨를 감싸주셨습니다. 그 후 이 청년은 변화되어 오늘날 찬양 사역자로 크게 일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처지이든, 어떤 모습이든, 주의 전에 나와 예배를 드리십시오. 그리하시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시는 은혜를 받으면 아삽처럼 살 수 있습니다. 성도답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로 사용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삽이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되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우매 무지한 존재임을 깨닫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최상의 행복임을 깨달아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밖에는 사모할 분이 없으니 주님만 사모하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는 자는 음녀처럼 멸망하지만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최고이 행복임을 깨닫고 열심히 예배에 참여하며 열심히 기도해서 늘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