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시야의 형통과 불통”(대하 26:1-15)
 
본문의 말씀은 유다의 10대 왕 웃시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웃시야는 16세에 왕이 되어 52년 동안 유다를 다스렸습니다. ꡐ웃시야ꡑ는 ꡐ여화와는 나의 힘ꡑ이란 뜻으로 그는 엄청난 성공을 거둔 사람이지만 말년엔 문둥병이 들어 비참한 생을 마감해야만 했습니다. 성공과 실패를 모두 경험한 사람입니다. 웃시야는 그의 조부 [요아스]와 부왕 [아마샤]와 같이 처음에는 선(善)으로 시작하였다가 악(堊)으로 인생을 마감한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웃시야는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친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초기의 웃시야는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였고, 솔로몬 이후 남쪽 유다에 가장 큰 정치적, 경제적 분야에서 엄청난 번영을 일으킨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후일 나라가 강성해지자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죄를 결과 말년을 문둥병에 시달리다가 외롭고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말년에 문둥병에 걸려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면서 실패의 마침표를 찍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불통케 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공하는 사람에게도, 실패하는 사람에게도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성공한다고 해서 결코 경거망동(輕擧妄動)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더 겸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더욱 더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나 만약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멀리하실 뿐만 아니라 결국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웃시야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웃시야의 형통
먼저 웃시야의 형통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웃시야는 “아사랴”라고도 하였는데(왕하 14:21), 역대 왕 중에서 가장 많은 인기와 덕망을 한 몸에 받았던 세계적으로 소문난 왕이었습니다. 그는 약관의 나이 16세에 왕이 되었지만(3절) 장장 52년이나 집권자의 권좌에 앉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유다는 우리나라의 강원도의 넓이만큼도 되지 못한 아주 작은 영토를 가진 나라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시야는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치적분야에서 대단한 성공을 이룬 사람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군사적으로 블레셋을 정복하고, 아라비아와 마온을 무찔렀으며, 지레 겁먹은 암몬에게 조공을 받아냅니다.[6-8절] 그의 군대는 삼십만 칠천 오백 명(307,500)이나 되었고 전쟁무기도 공장을 두어 만들어냈습니다.[13, 15절] 경제적으로는 물웅덩이를 파 평야와 평지에 가축을 키우고 산을 개간하고 밭을 일궈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10절] 정치적으로도 강성하여 변방은 물론 원방까지 이름을 떨치는 왕이었습니다.[8, 15절] 그는 한마디로 형통의 성공을 거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16세에 참으로 보잘것없는 나라의 왕으로 즉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52년간이나 권세의 지팡이를 잡고 유명한 치정을 하고, 애굽의 변방에까지 이르도록 소문이 나고 그의 명성과 권세로 말미암아 암몬 사람들이 해마다 조공을 바치도록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형통함이 있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웃시야가 형통의 성공을 할 때가 언제였습니까?
 
첫째로, 하나님이 도와주실 때에 잘 되었습니다.(5,7,15절)
웃시야의 성공은 하나님의 도우심에 있었습니다. [5절] ꡒ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ꡓ, [7절] ꡒ하나님이 도우사ꡓ, [15절] ꡒ그 이름이 원방에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ꡓ 
그렇습니다. 웃시야가 형통의 성공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유다의 군대가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도우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웃시야가 강하여져서 이름이 원방에 퍼지게 된 것도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웃시야가 성공하게 된 근본 원인은 웃시야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신앙의 묘미가 있습니다. 
웃시야가 16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52년 동안 권세의 지팡이와 치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시 121:1-2, 고전 15:10) 요셉이 형통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함께 하실 때에 가능했던 것입니다(창 39장)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베스의 기도를 아시지요. 그의 기도응답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전적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대상4:10] ꡒ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ꡓ 
그러나 도우심의 능력을 믿지 않는 이는 불신자요 망하게 됩니다. [욥36:13] ꡒ마음이 사곡한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하나님께 속박을 받을지라도 도우심을 구하지 아니하나니ꡓ 신앙은 주님의 도우심에 우리를 내어맡기는 일입니다. 우리가 무얼 해야 되는 일이라면 그렇게 할 만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죄인임에도 못났음에도 흠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성공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도우시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구해야 합니다. [시62:5] ꡒ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ꡓ 
 
둘째로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생활할 때에 잘 되었습니다.(4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공하지만, 사람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아니 주님의 마음에 드는 자를 하나님은 도우십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자입니까? 웃시야에게서 그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웃시야는 정직하다는 게 그를 성공하게 만드는 원인이었습니다. [4절] ꡒ웃시야가 그 부친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며ꡓ 하나님은 누구나 다 사랑하시지만 누구나 다 쓰시진 않습니다. 웃시야에게 성공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성공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원인은 그의 정직입니다. 그러나 이 정직이란 평가는 자신이나 타인이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내리신 평가입니다. 열왕기하나 역대기하는 이스라엘의 왕들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그 평가를 하나님의 기준에서 합니다. ꡐ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ꡑ 혹은, ꡐ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ꡑ 등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기준을 항상 자신이 주신 말씀에서 찾으십니다. 하나님이 보니까 웃시야는 성공자로 세울 만치 정직한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좇은 사람입니다. 

바울도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갈1:10] ꡒ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ꡓ 웃시야는 사람들이 볼 때 정직하고 착한 사람이라기보다 하나님께서 보시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신앙인의 절대 기준은 항상 성경입니다. 정직히 행하였다고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면 성경말씀을 온전히 좇아야 합니다. 

[수14:9] ꡒ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ꡓ 갈렙이 여호수아 앞에서 지난날을 회상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기업을 축복으로 받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좇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웃시야가 성공한 이유는 그가 말씀을 온전히 좇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에 잘 되었습니다.(5절)
본문 5절에서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웃시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에 잘 되었습니다. 여기의 “하나님을 구한다”(다라쉬)ꡑ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기 위해 그의 말씀을 따랐다는 말입니다. 경건한 예배자, 구도자의 모습입니다. 구도자의 모습으로 살 때 성공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기도하며 사는 자는 성공합니다.   
그러기에 웃시야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했고, 은혜를 구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서 살았습니다. 이렇게 그가 계속 하나님을 찾은 생활을 함으로 말미암아 그는 형통할 수 있었습니다. 즉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 때에 형통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형통의 성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은혜를 부지런히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본문 5절 상반 절의 ꡒ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ꡓ라는 말씀입니다.  웃시야가 형통의 복을 받은 이유를 말할 때 그냥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게 있습니다. 스가랴라는 사람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ꡐ스가랴ꡑ라는 스가랴서의 기록한 선지자도 아닙니다. 여기의 스가랴는 이름이 그리 알려지지 않은 무명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스가랴는 ꡒ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자ꡓ로서 웃시야 왕에게 영적 감화력(感化力)을 주었던 인물입니다. 하나님의 묵시를 아는 자란 말에서 그가 말씀에 붙들려있는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말씀에 붙들려있다 함은 곧 주님의 손에 붙잡혀있는 사람이란 말이기도 합니다. 웃시야 왕에게는 선지자요 교사요 고문으로서 영향을 준 사람입니다. 스가랴가 왕에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왕에게 가르쳐주고 인도한 것뿐입니다. 

그는 정치인도 위대한 가문의 사람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가르쳐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살았을 동안에 웃시야는 말씀에서 이탈하지 않았습니다. 웃시야와 스가랴의 관계는 주의 종과 성도의 관계입니다. 조의 종과의 좋은 관계, 그것이 그의 성공비결입니다. 성도는 주의 종을 잘 만나야 합니다. 주의 종도 성도를 잘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쳐주는 사람, 그의 말씀을 잘 따르는 사람의 관계가 성공을 만들어냅니다. 사람이 어떤 사람과 함께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 성공자가 되시기 원하십니까. 말씀에 붙잡힌 자와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에 히브리서 히 13:17에서 ꡒ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ꡓ는 말씀에 대해서 주목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웃시야처럼 주의 종의 가르침에 순종하며 복종하는 자는 유익한 형통을 얻습니다. 웃시야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곁에서 그를 지도하였던 스가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가랴가 죽자 웃시야는 달라집니다. 웃시야의 성공의 이유는 주의 종과의 관계였을 뿐 아니라 그의 말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웃시야가 하나님을 구할 동안에는 성공하였지만 그러나 그가 교만해지자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해야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나중에 웃시야가 교만하여졌을 때[16절] 실패하는 걸 보면, 겸손이 하나님을 구하게 하는 요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셔서 모두 성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나 성공하도록 인도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직히 행하는 자가 되십시오. 주의 종과의 바른 관계, 그가 전해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십시오.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 모두가 성공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웃시야의 불통
웃시야가 왜 불통했습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영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타락은 곧 실패로 이어집니다. 그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었지만 말년엔 실패하고 문둥병이 들어 비참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웃시야가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하였다면, 우리들도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공과 실패를 나누는 기초는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형통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온다면, 실패는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에서 옵니다. 그렇다면 웃시야가 왜 실패를 했는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첫째로 웃시야가 교만할 때에 불통했습니다.(16절 상)
본문 16절 상반 절에서 “저가 강성하여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웃시야는 자기 자신의 이름이 강성해 지고, 형통하니 교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웃시야는 한 때 승승장구하였습니다. 어떤 면에서도 꿀리는 데가 없었습니다. 그 상황을 성경은 ꡒ강성하였다ꡓ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그 강성함이 오히려 그를 교만하게 만들었고, 그 교만함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데까지 이르게 합니다. 그러므로 강성할 때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웃시야는 하나님 때문에 강성했던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웃시야는 하나님 때문에 잘 되었는데 그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은혜를 잊어버린 자는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호 8:14에서 ꡒ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은 자를 잊어버리고 전각들을 세웠으며 유다는 견고한 성읍을 많이 쌓았으나 내가 그 고을들에 불을 보내어 그 성들을 삼키게 하리라ꡓ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성공하고, 승리하고, 잘 되고, 풍요롭고, 건강하면 그 이전의 모습을 망각하기 쉽습니다. ꡐ뒷간에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ꡑ고 하던가요? ꡐ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을 못한다ꡑ고 하던가요? 이런 생각은 그 누구의 마음에도 자리하고 있는 무서운 요소입니다. 잘 될 때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10:12에서 ꡒ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ꡓ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웃시야가 강하여진 것이 그로 하여금 폐인이 되도록 만든 요인이 되었습니다. 
차라리 그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더라면, 그런 폐인으로 사라지진 않았을 것입니다. 성공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보다 부자가 강도나 도둑의 표적이 되듯, 순조롭고 성공하고 풍요로울 때 사탄의 표적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고난이나 빈곤이 위기라면 형통이나 성공 역시 위기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위기는 언제든, 어디서든 도사리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온 축복이나 성공이 하나님께서 온 기인한 도우심이란 걸 잊지 않고 사는 게 중요합니다. 그걸 잊는 게 바로 교만입니다. 성공을 가질 자격이 없는 사람이 가지면 차라리 독입니다. 복을 달라고 하기 전에 복을 가질 그릇이 되길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경계해야 할 것이 교만한 마음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장애물은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교만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렘 50:31에서 ꡒ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교만한 자여 보라 내가 너를 대적하나니 네 날 곧 너를 벌할 때가 이르렀음이라ꡓ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냥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대적하십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보다도 현재 받은 은혜를 계속적으로 유지하며 더욱 더 성장할 수 있도록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잘될 때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른 정립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겸손에서 오며, 그른 관계는 교만에서 옵니다. 교만하면 불순종하게 됩니다. 불순종이란 곧 불신앙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순종과 교만을 대조시킵니다. 겸손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만,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거역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수록 더욱 더 겸손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곧 영적으로 교만하게 되고, 그것은 곧 영적 타락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둘째로 웃시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월권행위를 하다가 불통했습니다.(16절 하) 
16절 하반절에서 “곧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웃시야는 월권행위를 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습니다. 왕이 제사장권을 침범하는 월권행위이며 하나님께 엄청난 진노를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권위를 인간적인 감정과 생각으로 범해서는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① 말씀 권위를 침해한 것이요 ② 하나님의 말씀을 왕권 아래 두려는 교만입니다. 사울 왕의 경우도 이와 같은 월권행위를 하다가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결국 자살함으로 비참하게 최후를 마치었습니다.
그러므로 웃시야가 여호와의 전에 들어간 것도, 향단에 분향하려고 한 것도 모두 주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행위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이 말씀을 거역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론 후손만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분향할 수 있습니다. [민16:40] ꡒ이는 아론 자손이 아닌 외인은 여호와 앞에 분향하러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함이며ꡓ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떨어지면 웃시야처럼 월권행위를 하려고 합니다. 웃시야가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려고 할 때에 제사장 아사랴는 율법을 들어 웃시야에게 성전에서 나가 줄 것을 요청합니다.[18절] 제사장 아사랴의 대단한 용기입니다. 그러나 듣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요? 
스가랴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스가랴가 살았을 동안은 주님의 말씀으로 왕을 가르쳤고 왕은 말씀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스가랴가 죽자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고하는 이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웃시야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나 됩니까? 

제가 잔소리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소리가 사라지면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복도 사라진다는 걸 아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 여러분을 옭아매는 것으로 오인될 수 있습니다. ꡐ주일을 지켜라, 헌신해라, 이웃을 사랑해라, 헌금을 드려라, 기도해라ꡑ 아마 이런 말씀이 선포될 때마다 솔직히 귀찮은 생각이 들 겁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여러분이 받은 복과 성공을 담는 그릇임을 잊지 마십시오. 

스가랴가 살아서 말씀의 잔소리를 하며 영적 영향력을 미칠 때, 웃시야는 곁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자 교만의 함정에 빠져 헤어나질 못합니다. 실은 다른 제사장들이 왕을 만류하였습니다.[18절] 그러나 듣지 않고 화를 냅니다. [19절] ꡒ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노를 발하니 저가 제사장에게 노할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 앞에서 그 이마에 문둥병이 발한지라ꡓ묵시를 잃은 자는 교만해지고 교만한 자는 망합니다. 그래서 잠 29:18에서 ꡒ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ꡓ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에는 여러 가지 직분과 직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직임 외에 타인의 직임을 월권하는 행위를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 장로님이 목사의 일을 하려고 하고, 집사님이 장로님의 일을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자기 맡은 직분에 충성해야 합니다. 

셋째로 웃시야는 하나님의 매를 맞고 불통했습니다.(20절) 
본문 20절에서 ꡒ대제사장 아사랴와 모든 제사장이 왕의 이마에 문둥병이 발하였음을 보고 전에서 급히 쫓아내고 여호와께서 치시므로 왕도 속히 나가니라ꡓ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웃시야는 하나님의 치심을 통하여 실패했습니다. 
교만한 웃시야는 분향하려던 상태에서 문둥이가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를 치셨기 때문입니다. 웃시야의 성공이 하나님의 기인한 도우심으로 이뤄졌듯, 그의 실패 또한 그의 기이한 징벌에 기인합니다. 그래서 욥기 5:18에서 ꡒ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ꡓ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의 개념으로 문둥병이란 하나님의 매며, 징계입니다. 문둥병에 “걸렸다”라는 말은 곧 “하나님의 매를 맞았다”라는 뜻입니다. [민12장]에 보면, 미리암이 모세를 원망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미리암을 문둥병으로 때리십니다. [민12:9,10] ꡒ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문둥병이 들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문둥병이 들었는지라ꡓ 특히 주님의 종을 비난하거나 업신여길 때 나타나는 질병이 바로 문둥병입니다. 

그래서 문둥병이 들었는지, 나았는지를 분별하는 것도 제사장들의 권한이었습니다. [신24:8] ꡒ너는 문둥병에 대하여 삼가서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에게 가르치는 대로 네가 힘써 다 행하되 곧 네가 그들에게 명한 대로 너희는 주의하여 행하라ꡓ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 성공하는 것도, 복을 잃고 실패하는 것도 주의 종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설교를 하면 우습게 여기는 성도들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진리입니다. 
웃시야의 교만은 결국 하나님도, 그의 말씀도, 그의 말씀을 전하는 사자도 모두 무시하고 범죄하게 만듭니다. 이 죄는 윤리적, 법적인 죄가 아니라 영적인 죄입니다. 영적인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거나 성공할 사람은 없습니다. 영적 교만보다 더 무서운 죄는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구하지 않는 것이 바로 죄이며 그런 채로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공하길 원하십니까? 겸손함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웃시야의 실패는 보이는 것으로는 문둥병이 들어 죽었다는 것으로 끝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둥병이인채로 죽을 때까지 다시 돌이킬 수 없었다는 것과[21절], 열왕의 묘실에 장사되지 못했다는 것은[23절] 왕으로서의 특권까지 영원히 상실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실패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된 특권까지 상실함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귀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현재 삶이 어떠합니까? 하나님께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생각해 본 것처럼 웃시야가 형통할 수 있었던 것은 ①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②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생활하고 ③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였습니다. 그러나 처음 받은 은혜를 계속해서 잘 간직하지 못함으로 결국 불통하였는데, 그 이유는 웃시야가 교만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월권행위를 하고, 하나님의 매를 맞고 형통했습니다. 그 결과는 웃시야는 문둥병으로 죽었고, 결국 열왕의 묘실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비참한 인생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현재 나의 신앙상태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고 늘 불평하고 원망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웃시야의 형통과 불통은 바로 나의 이야기이며 바로 나에게 주시는 교훈임을 깨닫고 이제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영혼의 옷깃을 여밀고 똑바로 주님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