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의 복음주의적 해석은 무엇인가? 
 
십일조의 율법주의적인 해석과 복음주의적인 해석 
  
이석봉   
 
 
오늘의 한국교회는 십일조 신앙에 있어서 아직 건재합니다. 그러나 서구신학을 여과없이 받아들인 일부 목회자들에 의해서 상당한 혼란을 야기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십일조를 반대하시는 분들은 십일조가 율법이니 폐지해야 한다고 그 이유를 줄줄이 열거를 합니다. 

필자는 그 분들이 열심은 있는데 헛된 열심을 내고 있구나 생각을 하면서 딱한 심정이 듭니다. 그들은 십일조가 율법이니까 폐지하여야 옳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이야말로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해 무지한 소치입니다. 그냥 겉할키식으로 표현을 할 뿐입니다. 필자는 너무나 답답한 나머지 십일조의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를 정리해야 겠다는 심정으로 이 글을 올립니다.
 
율법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모세를 통하여 주신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을 율법이라고 합니다. 다음은 구약을 통상적으로 율법이라고 합니다. 구약은 모세 오경을 기준으로 주신 말씀들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하나님의 백성의 생활양식입니다. 
 
율법의 의도는  몽학선생(파이다고고스)으로서 죄를 깨닫게 하여 악을 멀리하고 하나님 중심의 예배와 행함으로 살라는 명령입니다. 한 마디로 죄에서 자유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주신 계명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런 본래적인 의도를 벗어나 율법에다 새로운 규율들을 만들고 또 만들어서 사람을 올가메어 죄짐을 무겁게 하여 죄에 더욱 눌려서 부자유하게 하였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런 율법과 규율의 무거운 짐에서 자유하게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으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그 사망과 죄책의 값을 십자가에서 청산하게 하시고 이를 믿는 자에게 의롭다 칭의의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의 정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하여 의롭게 됨과 동시에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율법은 십자가에서 폐지가 된 것입니다.
 
율법이 폐지가 되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율법 전체가 없어졌다는 말이 아니라 정죄하는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뜻입니다. 율법이 어떻게 폐지되었는가 하는 것은 요한복음 8장에 나타나는 바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의 사건에서 확연하게 들어나고 있습니다. 본래 율법은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은 돌로 쳐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는 현장에서 잡아온 여인을 두고 "모세는 율법에 돌로 치라"했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하겠는가? 질문한 것입니다.
 
주님의 답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죄 없는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양심의 가책을 받고 모두 사라졌을 때 주님은 여인에게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자들이 어디 있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율법과 복음을 극명하게 들어내신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으로 주었는데 사람들이 정죄하는 기능으로 사용하여 죽이는데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죄를 깨닫게 하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정죄하는 율법으로서의 기능은 폐지하셨지만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으로서의 율법은 유효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는 율법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율법을 잘못 사용하는 사람들이 나쁘다는 것이며 율법을 죽이는 율법되게 하지 말고 율법을 살리는 복음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 율법의 완성을 위하여 오신 분이십니다. 구속사적 율법의 최종 완성은 십자가에서 이루셨습니다.
 
율법이 율법 되게 하느냐? 복음 되게 하느냐?
바리새인들은 율법이 사람을 죽이는 율법이 되게 만들었지만 예수님은 율법이 사람을 살리는 율법이 되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 사람을 살리게 하는 율법이 복음인 것입니다.
 
십일조를 구약 율법이니 폐지해야 된다고 하는 것은 마치 바리새들의 율법 적용과 같은 것입니다. 왜? 십일조를 사람을 억합하고 옥죄는 율법으로 만드는 것입니까? 왜? 십일조를 자유하는 복음으로 보는 눈이 닫혀져버린 것입니까? 
왜? 십일조를 바리새인의 눈으로 보십니까? 왜? 예수님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십니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을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마 23:23)
 
성경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면 않됩니다.
주님은 십일조도 행해야 하고 의와 인과 신도 행해야 한다고 하질 않습니까? 어디에 십일조는 율법이니까 하지 말고 의와 인과 신은 율법이 아니니까 이것만 행하여야 한다고 했습니까?
 
율법과 복음을 흑백논리로 설명해서는 않될 것입니다.
율법주의자인 너희가 율법적으로 십일조는 행하면서 율법에서 가르치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둘 다 행하라고 하신 것 아닙니까?
 
누구든지 
십일조 반대 운동에 앞장서지 마시기 바랍니다.
십일조 신앙은 귀한 신앙입니다. 서구신학 따라가면 않됩니다.
 
서구신학이 무엇입니까?
이성철학과 자율주의, 심리분석학, 정신분석학에 따른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 아닙니까? 십일조를 율법이라고 몰아붙이면 않됩니다. 그것은 이성주의자들이 하는 이론입니다.
 
주님은 율법을 온전케 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율법이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려는 것은 반대하셨지만(요 8:1-11), 
율법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찬성하신 것입니다(마 23:23).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를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십일조를 구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물질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바른 신앙입니다. 물론 십일조는 자원하여 드릴 때 바른 십일조가 될 것입니다.
복음 정신은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으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를 율법주의적인 사고가 아닌 복음 안에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율법의 정죄에서 구원받고 칭의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물질과 몸으로 헌신하는 것은 개혁주의의 바른 신앙입니다. 물질 헌신의 기초가 바로 십일조 신앙입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칭의된 백성이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를 율법이라고 정죄하고 드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악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대상이 하나님이시고 드리는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를 가지고 따지면서 불응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물질에 인색한 궁리를 표출하는 것은 그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난 것으로 타락하고 잘못된 신앙구조입니다. 복음적인 신앙으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아름답고 복된 일입니다. 자꾸 십일조를 율법주의 안에서 해석하니까 문제가 일어납니다.
 
참된 성경 해석이 무엇입니까?
율법주의가 무엇이고 복음주의가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십일조를 드리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십일조를 드리는 자세가 문제인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자세에 따라 율법주의가 있고 복음주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주의적인 십일조는, 
십일조를 드려 창고가 차고 넘치게 부자가 되겠다는 보상적 차원에서 드리는 것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그 목적이 내가 땅에서 물질적인 부자가 되겠다는 욕심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잘못된 것입니다.
 
복음주의적인 십일조는, 
십일조를 드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차원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 목적이 하나님 중심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차원에서 드리기 때문에 올바른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보상적 관계에서 드리지만,
복음주의는 헌신적 관계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이석봉 목사
  
지금은 수원신학교를 비롯하여 여러 신학교에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재열 목사님이 창간한 리폼드뉴스의 논설위원이면서 칼럼을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