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한 성도의 삶”(대하 14:1-6)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마땅히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성도라면 마땅히 신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경건(敬虔)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룩한 모양새를 갖추면 경건하다고 말합니다. 또한 목소리가 기도를 많이 한 사람처럼 쉬어있으면 경건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경건의 모양만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을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딤후 3:5) 그런데 문제는 경건의 능력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성도다움이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경건(敬虔)이란 무엇입니까? 경건이란 히브리어로 '하씨드'라고 말하고, 헬라어로는 '유세베이아'라고 말하는데 이 단어의 뜻은 “잘 공경한다” 혹은 “잘 경외한다”라는 뜻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공경하는 마음으로 깊이 삼가 하고 조심하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거룩한 신앙생활을 말합니다. 그러나 진실이 결여되어 있는 경건은 외식적인 경건입니다. 그러므로 경건은 결코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스페인의 극작가 [세르반테스]가 "경건하게 사는 사람이 훌륭한 설교자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여러분은 설교자는 아니더라도 경건한 삶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설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경건한 성도의 삶은 어떤 구호나 신념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악한 세상에 살아가지만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지킨다는 것을 그리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더욱 악랄하게 스며오는 세상의 유혹을 물리치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러나 경건한 성도라면 비록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물들어 살 것이 아니라, 세상을 물들이며 살아야 합니다. 연약한 인간으로서 100% 경건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상황이 타락과 비리를 발랄지라도 그 상황을 이기고 끝까지 경건의 모양만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을 나타내도록 몸부림쳐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경건한 성도는 상황의 인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경건은 물을 주지 않으면 죽게 되는 나무이고, 불경건은 심지 않아도 자라며 뽑아 버리지 않으면 죽지 않는 잡초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 끊임없이 몸부림치지 아니하면 결코 바로 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후 4:7)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없는 심령은 결코 경건의 이르기를 연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경건한 성도답게 살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문에 나오는 아사의 삶은 경건한 삶을 살기를 몸부림치는 우리에게 많은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아사는 솔로몬의 증손자로, 유다 나라의 세 번째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사 왕은 매우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왕위에 등극하여 41년간 통치하면서도 결코 경건된 모습을 잃어버리지 아니했습니다. 그러기에 아사 왕은 마태복음 1장에 예수님의 족보에까지 오를 정도였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아사 왕의 경건된 신앙의 삶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경건한 성도답게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경건한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살피면서 살아갑니다.(2절)
본문 2절에서 “아사가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경건한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살피면서 살아갑니다. 아사 왕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보시고 계시는지에 대하여 살피면서 하나님 앞에서 선과 정의를 행하였습니다. 이와같은 아사 왕의 모습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겠다는 몸부림입니다. 아사 왕과 같은 사람을 가리켜 “신전의식”(라틴어 : 코람데오)을 가지고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아사왕은 “다른 사람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보시느냐?”에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항상 살피면서 살았습니다.  아사 왕의 이와 같은 경건된 신앙의 자세가 유다를 개혁하는 원동력(原動力)이 되었고 하나님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는 근원적인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살피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민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민감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민감한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사람,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 하나님께 민감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는데,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께 물어 보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께 물어 보았습니다.(역상 14:10,14) “하나님! 블레셋 사람과 싸워야 합니까? 싸우지 말아야 합니까?” 결코 자기 마음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으로 살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버림 받았던 사울은 하나님께 묻지 아니하고 오히려 신접한 자에게 물어보았습니다.(대상 10:13,14) 그러기에 사울은 결국 실패의 인생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말씀하실 때에 가고, 하나님께서 멈추라 하실 때에 멈춥니다. 그러기에 이사야 선지자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말씀하실 때에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사 6: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도 아사 왕처럼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하여 함께 생각하며 묵상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성찰하여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인지?”에 대하여 고민하며 살아야 합니다. 경건한 성도라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수준과 나의 수준 사이에서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입장에서 편리하게 신앙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비록 힘이 들고 어려운 일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일이라면 그 일을 실천하기에 힘쓰는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있어서 날마다 우리 자신을 성찰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독일의 루터교 순교자 [디트리히 본회퍼]가 “왜 묵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고 대답했던 것처럼 우리가 늘 묵상하면서 자기 자신을 성찰해야 할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성도라면 생활 속에서 내가 지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는지를 늘 성찰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살피면서 살지 못하면 실패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출애굽기 2장을 보면 모세의 실패한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데, 모세는 분명히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의 궁전에서 40년 동안 애굽의 모든 학문을 겸비한 사람이었지만 경건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애굽과 히브리 사람들이 싸울 때에 격분한 나머지 애굽을 쳐 죽여 모래에 감추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살피기보다는 “좌우를 살펴서 사람이 없음”(출 2:12)을 보고 사람이 없음을 보고 애굽 사람을 죽입니다. 바로 모세의 이러한 모습은 인본주의적인 모습입니다. 만약 모세가 하나님의 사람답게 경건한 삶을 살았다면 좌우를 살펴보면서 사람을 없음을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의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어떠했습니까? 비록 보디발의 가정 총무로 있는 형편이었지만 결코 사람들을 먼저 의식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먼저 의식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보디발의 아내가 집요하게 유혹하였지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라고 하면서 유혹의 장소를 뛰쳐나갔습니다.(창 39:9) 바로 이러한 요셉의 모습은 사람을 의식하는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지(全知)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감찰하시되 생각과 감정은 물론이고 앉고 일어섬과 누움을 다 감찰하십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장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139편 1-4절에서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족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께서는 계시지 아니하신 곳이 없습니다. 우리가 범죄하고 숨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드러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어둠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밝히 드러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는 이유는 불꽃 같은 눈으로 감차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곳이나 계십니다. 그래서 시편 139편 7-10절에서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이러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살 때가 있습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결코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속일 수 없음을 깨달고 정직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사람은 결코 사람 앞에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갑니다. 경건한 사람은 아사 왕처럼 언제나 생활 속에서 자기 자신을 살피면서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언제나 살피면서 경건함을 유지함으로 몸부림치는데 저와 여러분이 삶이 바로 아사 왕과 같은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하나님께 숨기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를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죄악을 품고 있으면 기도도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만약 하나님 앞에 숨기는 것이 있다면 이제라도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 자신의 죄를 청산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순종으로써 회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거절하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다시금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풍성한 은혜를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서든지 아사 왕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살피면서 살되 하나님께서 가라고 말씀하시면 가고, 하나님께서 멈추라 하시면 멈추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이 경건한 삶을 사는 성도입니다. 

2.경건한 성도는 언제나 자기를 개혁하면서 살아갑니다.(3절)
본문 3절에서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이하고 주상을 훼파하며 아세라 상을 찍고...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경건한 성도는 언제나 자기를 개혁하며 살아갑니다. 경건한 삶을 살았던 아사 왕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살피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아니하시는 것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아사 왕은 신앙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을 제거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산다고 하면서 개혁하지 아니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이 아닙니다. 아사 왕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을 제거하느 개혁 운동에 앞장서야 합니다. 아사왕은 신앙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을 제거하였습니다. 이처럼 경건한 성도는 끊임없는 자기 자신을 개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개혁주의 교회의 기본적인 명제가 “개혁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도 완벽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이라도 결코 완벽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흠이 허물투성일 때가 더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은혜를 입은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들 자신들도 자기 자신의 허물을 고치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끊임없이 개혁하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아사도 역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살피는 것을 끝나지 아니하고 신앙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을 철저히 제거하고자 개혁 운동에 앞장섰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사 왕의 개혁 운동을 통하여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해야 합니다.
첫째로 아사의 개혁 운동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아사 왕은 무엇을 개혁했습니까? 본문 3절에서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이하고 주상을 훼파하며 아세라 상을 찍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사는 왕위에 즉위하면서 먼저 우상을 제거하는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왜냐하면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영혼과 육체를  타락케 함으로 해서 멸망하게 되는 근본 원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아사 왕은 즉위하면서 우상과 남색하는 자를 없이하였던 것입니다. (왕상15:12). 하나님은 혼합주의 사상을 가진 백성들을 싫어하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종교적으로 타락한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입니다.(신30:17-18) 그러므로 아사 왕의 개혁 운동은 하나님께 돌아가자는 운동이요, 회개의 운동이었습니다.
                                                               
또한 왕상 15:13에 “또 그 모친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우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어서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나”라고 말씀하고 아사는 궁중 개혁을 단행했는데 모친 「마아가」가 [아세라 신]의 목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에서 폐위를 해 버렸습니다. 이는 개혁(改革)에는 성역이 없으며, 예외가 없음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성도는 자기 자신부터 먼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각오와 결심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우상(偶像)을 철저하게 제거하지 아니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사의 이러한 자세는 자기 자신과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 사이에 거리끼는 것들, 문제되는 것들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이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우상(偶像)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 3:5에서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탐심(貪心)은 더 가지려는 욕망(慾望)입니다. 하나님 보다 세상의 물질이나 육체적인 욕망이나 향락을 더 사랑하는 것이 바로 탐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사고방식(思考方式)이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처럼 똑같이 생각하고 그들이 추구한다면 우리도 우상 숭배하는 자들과 다른바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경건한 성도답게 날마다 자기를 개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날마다 자기 자신을 쳐서 복종시켰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둘째로 아사의 개혁 운동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아사 왕은 무엇을 기준하여 개혁 운동을 하였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즉 이 말은 경건의 성도의 삶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4절에 “유다 사람을 명하여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하며 그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사 왕의 개혁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율법(律法)은 「토라」라고 하는데. 이 [토라]는 「지시하다, 안내하다, 가르친다」라는 뜻으로 우리 인생이 나아갈 도리(道理)를 바로 가르쳐 주는 것으로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딤후 3:16-17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경험, 지식, 지혜가 결코 개혁의 기준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만이 가지고 있는 [선입관념] 혹은 [고정관념]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과 생활의  기준으로 삼고 이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셋째, 아사가 개혁 운동을 해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끊임없이 자기 개혁해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하기 위해서 입니다. 본문 7절 중반 절에서 “우리가 주를 찾았으므로...”라고 말씀을 하나님을 바로 찾기 위함에 목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개혁 운동]이란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으로서 하나님을 찾자는 운동입니다. 그래서 왕상 15장에 보면 아사가 구스의 세라의 100만 대군을 이기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아사랴」 선지자가 왕과 백성들 앞에 강조한 말이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4절) 그리하여 그들은 아사랴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찾기로 맹세하였습니다.(12,15절)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운동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찾는 자기 개혁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 밝은 자화상이 그려지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거리끼는 것들이 제거되면 그 어떤 사람도 예외 없이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찾게 됩니다. 하나님을 잡고 메어 달립니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해 주십니다. 본문 5절,6절에서 “또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상을 없이하매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함을 얻으니라. 그 땅이 평안하여 여러 해 싸움이 없은지라. 저가 견고한 성읍들을 유다에 건축하니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개혁운동을 한 아사 왕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문제를 제거하면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가 임합니다. 그러기에 유다 나라는 오랫동안 평안함을 얻고 여러 해 동안 싸움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사 왕은 일평생동안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였습니다.(왕상 15:14) 

3.경건한 성도는 언제나 무릎으로 살아갑니다.(4절)   
본문 4절에서 “유다 사람을 명하여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하며 그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경건한 성도는 언제나 무릎으로 살아갑니다. 아사 왕은 강한 오직 여호와 하나님인줄 알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본문을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꺼리끼는 요소」들을 기도하는 가운데 제거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을 찾으면 우리에게 평안함이 넘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경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패턴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아사 왕의 개혁운동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평안과 형통의 은혜를 주셨습니다.(5-7절)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셨으므로 사방의 성읍을 어려움 없이 건축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평안과 형통의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서 평안하고 형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노력한다고 돈을 번다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축복해 주셔야만 가능합니다.(시 127) 그래서 시 127:1-2에서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노력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노력하되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께서 평안과 형통의 축복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이 시 32:6에서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께 돌아가자]라는 개혁 운동을 일시적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개혁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개혁하지 아니하면 실패할 또다시 넘어질 수밖에 없고, 또다시 실패할 수박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우리 자신 쳐서 복종시키면서 개혁 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셔야만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끊임없이 개혁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힘써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평안이 헛되지 않도록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의 말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아사 왕은 하나님의 은혜로 평안했습니다. 참 좋았습니다. 6절 하반 절에서 “그 땅이 평안하여 여러해 싸움이 없은지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었습니다. 바로 이 때에 아사는 무엇을 했습니까? 7절 이하에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성읍]을 건축했습니다. 아사는 [성곽과 망대와 문과 빗장을 만들어 아주 견고하고 튼튼한 성읍]을 건축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평안을 누리게 되게 되면 그 평안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힘써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을 유지하지 위해서 성읍을 건축하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사의 군대는 유다 중에서 [큰 방패]와 [창을 잡은 자]가 [30만 명]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냐민 중에서 작은 방패를 잡으며 활을 당기는 자가 [28만 명]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모두 합하니 [58만명]의 용사를 양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전략을 가진 군인들을 키우기 시작하였습니다. 본문 8절에 보면 [창을 잡은 창 부대], 그 다음에 [방패를 잡으며 활을 당기는 부대] 등 당시로서는 상당히 현대적인 전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아사왕은 자기 나름대로의 평안과 인생의 은혜를 향유하기 위해 견고한 성읍과 군대와 작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정도 되면 하나님을 의뢰하기 보다도 자기가 만들어 놓은 견고한 성읍과 군인들을 더 의뢰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본성이기에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아사를 아시는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셔서 견고한 성읍과 군대만을 의뢰하는 세상적인 인간으로 있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영적인 은혜와 능력을 유지하면서 이 땅의 사람들이 맛보지 못하는 영적인 깊은 세계를 체험하면서 영적인 삶을 살기를 하나님은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두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삶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세밀한 손길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알아야 우리가 나아갈 길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 것들을 더 의뢰하고 있을 때에 “너는 그러면 안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아사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의 방법은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9절,10절에서 “구스 사람 세라가 저희를 치려하여(군사를 몇명을 데려 왔습니까?)  군사 백만과 병거 삼백승을 거느리고 마레사에 이르매 아사가 마주 나아가서 마세사의 스바다 골짜기에 진 치고”(9-10절)라는 말씀이 나오고 있는 것처럼 아사는 58만 명의 군대를 준비하고, 견고한 성읍과 요새를 구축했습니다. 게다가 자기 나름대로의 현대적인 전략까지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아사의 영적 안일함을 경계하시기 위해서 [구스왕 세라]를 통하여 [백만 명의 군대]를 부르셨습니다. 
만약에 이 아사 왕에게 약 28만명 정도를 이끌고 공격해 왔다면 생각해 본다면 아사는 무엇을 더 의뢰했겠습니까? 그때에도 아사가 하나님을 더 의뢰했겠습니까? 아닙니까? 아마도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고 자기의 군대를 더 의지하고 [58만 명의 병력으로만]을 가지고 구스왕 세라와 싸웠을 것입니다. 이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아사가 결코 자기 자신을 의뢰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뢰하도록 100만 명의 군대를 데리고 왔던 것입니다. 여기에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10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 자신을 가장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아사 자신이 자기가 쌓은 견고한 요새와 성읍을 믿고 있음을 아시고 구스 왕이 [마레사의 스바다 골짜기]에 진을 치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무엇을 이야기 합니까? 요새와 성읍은 공격을 받을 때 그 안에서 여유 있게 지킬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쟁을 요새와 성읍을 공격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골짜기에서 시작케 하십니다. 이는 곧 아사가 만든 요새와 성읍이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11절 말씀을 보십시다. 아사 왕은 창과 활과 방패를 잡은 현대적인 전략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스왕 세라]를 통하여 군사 100만 명과 철 병거 300승을 가지고 와서 아사의 전략을 아무런 쓸모가 없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아사가 만든 방패와 활과 창이 병거 앞에서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대포]를 가지고 [탱크]를 공격하는 격입니다. [철 병거]가 완전히 제압하는 것입니다. 창과 활과 방패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아사 왕이었다면 이와 같은 어떤 행동을 취했겠습니까? 
꼼짝할 수 없는 절대 절명의 위기 앞에서 아사 왕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아니 부르짖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사 왕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사 왕은 자기 자신의 지식과 능력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 기도했습니다. 본문 11절은 구약에 나타난 [위대한 기도문] 중에 하나입니다.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11절) 

그렇습니다. 아사의 기도의 고백처럼 우리가 삶의 문제를 고민할 때에 나를 도와줄 분은 주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그의 자녀를 그리스도의 피로 사시고 난 다음에 그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케 하시기 위하여 반드시 시험(試驗)을 하십니다. 그 시험(試驗)은 우리의 지식(知識)과 재능(才能)과 능력(能力)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시험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원리인지 모릅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아무리 어려운 시험이 와도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 또 나에게 영적인 근육을 강화시키려고 그러시네요.’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한계 상황(狀況)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알아 가며, 하나님을 더욱 더 의뢰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경영하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가장 가증스럽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예수님을 의뢰하지 아니하고 자기 생각대로 사는 것, 자기 힘만 믿고 사는 것들을 하나님이 가장 가증스럽게 여기십니다. 한 발은 하나님께, 한 발을 세상에 걸친 양다리 작전을 무척이나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시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향하여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며 말며, 방백도 의지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인간의 지혜가 끝난 곳에 하나님의 시작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적인 노력이 한계에 부딪쳤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그의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우리를 시험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 시험은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유혹이 아니라 시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시험하실 때는 여러분들의 능력과 생각을 넘어서는 것으로 시험을 하십니다. 그럴 때마다 그 사건과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오직 주님 앞에서 기도할 때에 놀라운 일이 우리에게 생깁니다.(12절) 11절 뒷부분을 보면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구스 사람들이 인간 아사 왕 군대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해서 싸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성도라면 우리도 아사 왕처럼 이와 같은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본문 13절 하반 절에서 “살아남은 자가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 앞에서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여호와의 군대 앞에서] 살아남은 자가 한명도 없었습니다. 이제는 아사왕의 군대가 아니라 여호와의 군대가 되었습니다.(13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인생의 한계를 가지고 고민할 때 전폭적으로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 앞에 나 자신을 드릴 때에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여호와의 군대가 되게 해주시고 사람이 주님을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라는 고백의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칠 때마다 온전히 주님을 의뢰하는 우리가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경건한 성도는 아사 왕처럼 우리는 무릎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 없이 하는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윌리암 캐리가 "은밀하고 열렬한 믿음의 기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경건의 밑뿌리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경건한 성도라면 항상 은밀하고 열렬한 믿음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숙한 성도라면 마땅히 경건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경건의 표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경건한 성도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대해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함께 고민해 보았습니다. 이제 바라기는 고민하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몸부림치시는 중에 ①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살피면서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② 언제나 개혁하면서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③ 언제나 무릎으로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통하여 평안과 형통함의 축복을 받으시기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