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사람을 입으라II”(엡 4:23-32)
 
본문의 말씀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권면의 계속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새 사람을 입기 위해서는 옛 사람을 벗어버려야 하는데, 옛 사람을 벗어버리기 위해서는 옛날 마음을 벗어버리고(17-19절) 옛날 욕심을 벗어버리고(22절) 옛날 습관을 벗어버려야 한다고(22절)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새 사람을 입는 소극적인 자세입니다. 적극적으로 자세를 가지고 성숙의 자리로 나가야 합니다. 거룩의 자리로 나가야 합니다. 은혜의 자리로 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결심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행동이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만약 우리가 새 사람을 입은 성도답게 살지 아니하면 성령께서 근심할 뿐만 아니라 마귀가 틈을 타서 우리를 유혹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은혜 받은 성도답게 새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후 3:16-17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근심시키지 않고 새 사람을 입기 위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습관은 무엇인지에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새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23절)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새 영을 주셨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겔 11:19)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영이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마음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① 누우스(νοΰς)→ 육적인 마음→ 이해득실(利害得失)의 판단 
② 카르디아(καρδια)→ 영혼적인 마음→ 도덕적인 판단 
③ 프뉴마(πνεΰμα)→ 영적인 마음→ 영적인 판단
①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마음을 가집시다. 성도의 새 심령은 영적인 마음입니다. (프뉴마: 성도의 마음의 영은 성령과 깊은 교제를 통하여 새로워지고 강건해 집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도록 애쓰십시오.→ 성령님과 교제, 사귐, 친밀, 가까움을 애쓰는 것. 
사도 바울은 엡 5:17-18에서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충만을 받으라”→계속적으로 채우려는 태도, 내 속에 하나님으로 가득하게 하는 것, 이것이 새 마음을 갖는 비결입니다.

둘째로, 새 의욕을 가져야 합니다.  
산 사람은 의욕을 가지고 있습니다.  욕심이 변하여 의욕이 되었습니다. 이제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따르고자하는, 채우고자하는 욕심이 생긴 것입니다.  

① 의를 따르는 의욕이 필요합니다.(24절).→“하나님을 따라, 의와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심령을 가져야 합니다.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께 올바르다 하나님으로 가득 채우기를 목말라 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② 진리를 따르는 의욕이 필요합니다.(24절).→“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
예수님 안에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 듣고 예수님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면 진리를 따르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 8:31-34에서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은 의욕이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바랍니다. 

③ 거룩함을 따르는 의욕이 필요합니다. (24절).→“하나님을 따라,의와,진리의,거룩함으로 ‥
주님은 거룩하신 분, 성도는 거룩함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깨끗케 하는 사람입니다.
살전 4:3)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살전 4:7-8)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나님의 선택받은 구별된 자녀로서 자기를 지키려는 의욕. 최소한 지켜야 할 도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할 것은 새로운 사람을 되기 위해서는 새 습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습관을 기릅시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 성경 읽고, 기도하는 습관, 주일날 온전히 예배하는 습관, 남을 도와주는 습관, 새 습관의 목록을 만들어 봅시다. TV→성경, 유행가→찬송가, 노래방→찬양예배, 친목회→저녁예배, 해수욕장→주일낮예배, 시기질투→양보 이해 화목이 필요합니다. 반복하는 행위→습관→사상→인격을 만듭니다. 그러므로 “태도가 변하면 기적을 낳습니다.” “습관이 변하면 새사람을 낳습니다.”

셋째로 좋은 언어의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25절)  
본문 25절절에서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고 말씀처럼 참 말을 해야 합니다. 거짓을 버리고 참 말을 해야 합니다.
성도는 거짓을 버려야 합니다. 거짓은 마귀의 속성입니다.(요8:44) 성도는 참된 것을 말해야 합니다. 믿음의 형제자매들 사이뿐 아니라 믿지 않는 이웃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말이 무엇입니까?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양 말하는 것이 거짓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작은 것을 부풀려 침소봉대(針小棒大)하거나, 큰 것을 축소시켜 말하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실이 아닌 일이 사실인 것처럼 매도되는데 사실이 아닌 줄 알면서도 자신의 이해관계 때문에 말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도 거짓에 동조하는 거짓입니다. 그런 사람을 성경은 벙어리 개라고 말합니다(사56:10).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5:37)고 하셨습니다.

거짓말은 참 묘한 마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 번 거짓말하기 시작하면 자꾸 하게 됩니다. 먼저 한 거짓말을 변명하기 위해 다시 하게 되고, 좀 더 그럴듯한 말로 변명하다 보면 더 큰 거짓말이 되고 맙니다.

처음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거짓말 하다가 나중에는 양심이 마비되어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잠 12:22에서 경계하기를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히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하였고, 계 21:8에는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니라" 하였습니다. 거짓말이 얼마나 무서운 죄입니까?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심판을 받게 됩니까? 그러므로 항상 정직한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거짓을 버리고 참 말을 합시다. 예수님은 진실하신 분이십니다.(계3:14) 성도란 진실하신 예수님의 진리를 따르는 진실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옛사람의 특징은 거짓말을 자연스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거짓말은 얼마나 이웃과 의 관계를 파괴합니까? 더구나 성도 간에 거짓과 속임이 습관처럼 행하여진다면 이 얼마나 서로를 죽이는 일이겠습니까? 서구 유럽에서 가장 큰 죄는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문화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거짓을 일삼고 거짓말을 참 말처럼 하는 사람입니다.

넷째로 분노의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26-27절)
본문 26,27절에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여기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는 원어로는 “분을 내어라. 그러나 죄를 짓지는 마라”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무조건 분을 내지 말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분을 내겠느냐? 그러나 죄는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KJV 에서는 “화는 내되 죄는 짓지 말며”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분을 내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그러나 죄는 짓지 말라고 하십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기를 “누구나 화낼 줄은 안다. 그건 쉬운 일이다. 그러나 꼭 화를 내야 할 올바른 대상에게, 올바른 정도 것, 올바른 때에, 올바른 목적을 위해, 올바른 방법으로 화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부부싸움을 하십니까? 해지기 전에 반드시 화해하십시오. 만수무강에 지장이 있습니다. 아침에 남편이 출근할 때 절대로 바가지 긁지 마십시오. 분을 삭이지 못한 체 출근하여 일하다보면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을 뿐더러 자칫 안전사고가 발생하여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친구끼리 화를 내며 싸웠습니까? 빠른 시간 내에 화해하십시오.

그리해야 할 이유를 27절이 밝히고 있습니다.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아다니는 마귀에게 분노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분노하는 사람에게 마귀는 이렇게 속삭입니다. “그래, 잘한다. 실컷 화내고 분노를 뿜어라. 그러면 그 때 내가 네게 쏙 들어가서 둥지를 틀리라.”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맙시다. 그래서 엡 4:26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의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분을 내되 있으되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① 하나님 편에서 분노하되 나의 편에서는 분노하기를 삼가 하라는 것입니다.
흔히들 예수님도 성전에서 화를 내셨다고 자기의 분노를 정당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개인적으로 당신을 모욕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무리들을 향하여 슬퍼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결코 용납하지 못하셨습니다. 내게 화를 내게 하는 사람에 대하여 슬퍼하도록 합시다. 그래야 인내할 수 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잠14:29) 그러나 하나님에 대하여는 분노를 합시다.(우리는 이렇게 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② 의의 편에서 분노하되 불의 편에서 분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의의 편에서 분노할 수 있어는 사람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대개 우리는 잘못된 것인줄 알면서도 내게 피해가 올까바, 침묵하지 않습니까? 진정한 의의 분노를 낼 수 있는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둘째는 분은 내어도 해가 지도록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분은 빨리 풀어버려야 합니다. 분을 오래 가지고 있으면 정신적, 육체적, 영적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받습니다. ex)교통사고로 내장이 몸 밖으로 노출된 환자가 분노할 때, 그 색갈이 검붉게 변했고 출혈이 되었다는 어느 의사의 임상보고가 있습니다.
우리는 건설적인 분을 푸는 방법을 개발해야 합니다.(운동, 목욕, 취침, 여행, 영화 감상, 빨래 등등)

셋째는 분은 내어도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감정이 격해 있을 때, 그 때 마귀가 바로 곁에 와 있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ex: 가족 살해범, 자살, 등 등). 분노를 자제하는 능력을 구합시다. 성령의 도움을 청합시다. 

다섯째로 좋은 소유의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28절)
본문 28절에서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좋은 소유의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도적질하지 말찌니라”는 십계명 중 제7계명입니다. 도적질이라는 개념 속에는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 외에 남의 것을 부당하게 착복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국회의원이 권력을 이용하여 부당한 정치자금을 받는 것도 도적질입니다. 공무원이 자리를 이용하여 뇌물을 받고 불법 건축 허가를 내주는 것도 도적질입니다. 

2000. 9. 26 조선일보 31면 보도에 의하면 서울 종암 경찰서가 미아리 텍사스 윤락가 업주들로부터 지난 96년 말부터 받은 뇌물이 7억원이라고 합니다. 적당히 눈감아 주고, 미리 단속 정보를 알려준 대가인 것입니다. 이것도 도적질입니다. 외국 근로자들에게 일을 시키고도 임금을 제 때에, 제대로 주지 않고 임금 독촉을 하면 불법체류로 잡아넣겠다고 공갈 협박하는 업주가 많다고 합니다. 저들은 단순한 도적질이 아니라 강도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인이 값은 제대로 받고도 좋은 물건을 주지 않거나, 적량을 주지 않는 것, 그리고 일꾼이 로임을 충분히 받고도 받은 만큼 일을 제대로 해주지 않는 것 이 모두 도적질 입니다. 
영세상인을 울리는 건물주의 횡포도 도적질이요, 살인적인 고금리로 서민을 울리는 악덕 고리대금업자도 도적질이요, 강도짓입니다.

성경은 도적질하지 말라고 합니다. 도리어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28절) 우리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자신을 위해서 뿐 아니라 빈궁한 자를 돕기 위해서도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홍길동(洪吉童)라는 인물처럼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탐관오리들의 재물을 뺏어다가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소위 우리 사회에서 의적이라 부르며 그 행위를 통쾌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일은 목적도 좋아야 하지만 방법도 좋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남의 것을 주인 모르게 가져가거나 주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완력으로 억압하여 뺏어 가는 것은 그것을 아무리 좋은 일에 쓴다 할지라도 옳지 못한 도적질이요, 강도짓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남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해 자기 손으로 선한 일을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28절). 우리는 내 손으로 열심히 땀 흘리고 수고하여 번 돈으로 선한 일을 위해 써야 합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는 말하기를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벌어라.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저축하라. 그리고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주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씀합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6). 선한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불로소득(不勞所得)을 버리고 수고소득을 하라는 것입니다.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는 도적질하지 말아야 합니다. (도적질과 십일조) 자기 손과 땀을 외면하고 남의 손과 땀을 통하여 소득하고자하는 행위도 도적질입니다. 불한당: 땀 흘리지 않고 소득을 올리는 자. 시 128:1-2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자신의 호의호식(好衣好食)을 위하기보다 빈궁한 자를 돕기 위하여 하라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관원의 태도를 보십시오(눅18장).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을 주라”고 하니 근심하여 갔습니다. 그러나 세리장 삭개오의 변화된 새 생활을 보십시오.(눅19장). 그는 토설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변화입니다.

여섯째로 덕을 세우는 말을 해야 합니다.(29절)
본문 29절절에서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덕을 세우는 말을 해야 합니다. 
사회생활에서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교회 생활에 있어서는 특별히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대개 어떤 경우에 시험 든다고 합니까? 말 때문이 아닙니까? 불결한 말, 가치 없는 말, 무익한 말, 불순한 말, 추잡한 말, 타락한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말을 하여 유익 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생활 가운데 유머(humor)가 필요합니다. 

유머란 익살이요, 해학입니다. 그러나 유머도 사람의 비위를 맞추고 맞장구치기 위해 하는 유머는 삼가야 합니다. 반면, 농담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농담이란 실없이 장난으로 하는 웃음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믿음에 덕을 세우고, 자기 자신에게 덕을 세우고, 상대방에게 덕을 세우고, 교회에 덕을 세워야 합니다.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모였을 때 하는 대화 내용을 가만히 들어보시오. 주로 어떤 내용입니까? 남자라면 술, 여자, 도박, 투기하여 떼돈 버는 것, 낚시 이야기, 등산 이야기, 직장 상사 욕하기 등등입니다. 청소년이라면 이성교제, 컴퓨터, 채팅 등일 것입니다. 결혼한 여자라면 남편 자랑, 아이 자랑이요, 이웃 집 아무개네 흉보기, 남의 남자 이야기 등등일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입술로 스트레스(stress)는 풀지 모르지만 아무런 덕이 되지 못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모여 하는 대화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 믿고 은혜 받은 이야기 아닙니까? 그런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고, 듣고 또 들어도 질리지 않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 불신자와 모처럼 만났을 때 몇 마디 인사말을 나누고 나면 별로 할 말이 없어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삶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말조심에 대하여 가장 분명하게 교훈하고 있는 말씀이 바로 야고보서 3장의 말씀입니다. 약 3:6-10에서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 드리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 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선한 말로 덕을 세우고 은혜를 끼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물론 여기의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라는 말처럼 어떤 사람은 마음 가득한 것을 말로 풀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입으로 스트레스를 풉니다. 먹든지, 수다를 떨든지… 수다를 떠는 것까지야 문제될 것 있습니까? 그런데 어떤 수다를 떠느냐가 중요합니다.
① (더러운 말): 욕설, 비방, 야유, 악담, 음담패설(淫談悖說), 지나친 농담을 버립시다.→ 듣는 이에게 상처와 해를 주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② (덕스러운 말):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말,→ 듣는 자에게 용기를 복 돋으며, 기쁨을 주며 유익을 끼치는 말, 은혜를 끼치는 말. 이웃관계를 돈독하게 하며, 협력과 화목을 이끌어 내는 말을 해야 합니다. 더러운 수다를 떠는 혀에 재갈을 먹입시다. 오직 덕스러운 수다를 떱시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는 약 1:26-27에서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곱 번째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30절)
본문 30절에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 63:7-10에서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 찬송을 말하며 그 긍휼을 따라 그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치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 사랑과 그 긍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라고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셨고, 은혜를 베푸시어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셨는데, 이것을 그만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도 않고 우상을 섬기며 제멋대로 하여 하나님을 근심케 한 것입니다. 

솔로몬 왕은 막대한 유산을 부왕 다윗으로부터 물려받았습니다. 그는 적통의 장자도 아니었습니다마는 서자 신분으로 왕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믿음이 좋아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렸고, 재물과 장수 대신 지혜를 구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된 후 권력의 꿀맛에 젖어들게 되자 주색잡기에 빠져 많은 후궁들을 거느리면서 타락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왕상 11:3-9 “왕은 후비가 칠 백인이요, 빈장(빈장)이 삼 백인이라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더라…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저가 또 이족 후비들을 위하여 다 그와 같이 한지라. 저희가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였더라.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저에게 진노하시니라”

진노하신 하나님은 그 아들 대에 이르러 나라 반쪽을 부하에게 빼앗기게 하셨습니다.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노하시어 그들을 바벨론의 포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계신 성령님을 근심케 하지 맙시다. 

여덟 번째는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32절)
본문 32절에서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씀처럼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 먼저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31절을 보시겠습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라 하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다른 사람에 대한 쓰고 맵고 짜고 가혹한 마음과 말씨를 버리고, 금방 머리끝까지 올랐다가 사라지는 격분을 버리고, 화가 나서 마구 큰 소리 치고 떠들어대는 폭언을 버리고, 하나님을 모독하고 불경스럽게 말하는 것을 버리고, 악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불쌍히 여기어 다정스럽고 따뜻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주기도문에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하지 않습니까? 나의 죄를 용서받으려면 남의 죄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내가 남으로부터 이해를 받으려면 나도 남을 이해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해 주신 그 용서의 마음을 여러분들도 보여야 합니다.

중국 선교사로 큰 업적을 남긴 영국인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가 어느 날 중국인 옷차림을 하고 강가에 서서 나룻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돈푼 꽤나 있어 보이는 중국인 한 사람이 뒤로 다가와서는 함께 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기다리던 배가 가까이 오자 테일러는 무심코 먼저 배에 올라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중국인은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아보려 하지도 않은 채 선교사의 머리를 손으로 때리고 발로 옆구리를 차서 흙탕물에 넘어지게 했습니다. 갑자기 봉변을 당한 테일러는 아무 말도 없이 참고 일어나서는 그가 먼저 배에 오른 다음 더러워진 옷을 털며 배에 올랐습니다. 먼저 배에 올라 팔짱을 끼고 눈치를 살피던 중국인은 그가 외국인임을 알아차리고는, "아니! 당신 외국 사람이 아니십니까?" 하며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테일러는 그 때에도 "예, 괜찮습니다. 이 배는 내 것인데, 어디까지 모셔다 드릴까요?" 라고 말하고는 내가 이유 없이 봉변을 당하고 참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예수님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 중국인은 눈에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된다고 했습니까? 참 된 것을 말합시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맙시다. 도적질 하지 맙시다.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말을 합시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합시다. 서로 용서합시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옛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기 위해서는 새사람을 입은 새 생활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태도는 습관을 낳고 습관은 인격을 만듭니다.<새사람→ 새 습관→ 새 생활→ 새 인격> 새 생활 새 습관은 성령을 기쁘시게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옛 사람의 습관이 나오면 이를 십자가에 온전히 못 박지 못 한줄 알고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새 사람답게 살도록 몸부림쳐야 합니다.(아멘)